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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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ㆍ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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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사ㆍ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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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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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란트의 트리어 시에서 유대인 변호사 아들로 태어난다(5).
· 로마 제국의 수도 중 하나였던 트리어는 19세기 초, 주민의 95%가 가톨릭이었는데, 부친 하인리히 맑스는 칼 맑스가 태어나기 전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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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헨 열강회의에서 5국동맹 결성. 자유주의 운동의 진압을 획책(9).
· 작센ㆍ바이마르, 바이에른에서 헌법 제정.
· 본 대학 창립.
· 프랑스ㆍ낭만주의 문학 논쟁기(-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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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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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에서 혁명운동 발생(리에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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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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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를 받고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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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결사법 폐지, 노동조합 합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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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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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 인구 약 1,226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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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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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어 시의 프리드리히 김나지움에 입학(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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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7월 혁명이 일어난다. 그 여파로 독일의 여러 연방에서 자유주의적 소요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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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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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바흐 축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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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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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본 대학 법학부에 입학(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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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 편력ㆍ집회ㆍ결사 금지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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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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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옮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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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사상 두 번째의 경제공황 발생(-39), 실업자가 넘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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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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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 철학 연구에 전념하고, 또한 베를린 대학에서 B. 바우어 등 헤겔 좌파(베를린 그룹)와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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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팅겐 7교수사건(11).
· 프로이센 인구 약 1,410만 명.
·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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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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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 하인리히 맑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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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양에서 증기선 운행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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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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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철학에 몰두한다. 박사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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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반곡물법동맹 결성.
· 프랑스, 알제리 정복(30-) 완료.
· 프랑스의 유권자 20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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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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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의 새로운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즉위, 반동정치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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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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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 학위 취득(4).
· 베를린 대학 졸업(5).
·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7 무렵).
·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 및 『서간집』의 발췌 노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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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 소년보호법 성립.
· 이탈리아에서 리소르지멘토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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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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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연보』를 위해 「프로이센의 최신 검열훈령에 대한 견해」 집필(43년에 『아네크도타』에서 발표).
· 『라인 신문』(1월 창간, 편집장 회프켄)에 일련의 논문을 기고한다(5-). 10월부터 실질적으로 이 신문의 편집장.
· 역사 연구 노트(크로이츠나흐ㆍ노트)를 작성.트리어에서 루게에게 편지를 보내 베를린 자유인(E. 마이엔, L. 블루, E. 바우어, K. 나우베르크 등)을 비판.
· 역사 연구 노트(크로이츠나흐ㆍ노트)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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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 정부, 자유주의적ㆍ급진적 신문 잡지를 발매금지.
· 프랑스에서 기조 내각, 의회를 해산.
·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 격화.
·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직물 노동자들이 역사상 최초의 집산적인 공장을 경영.
· 덴마크에서 국민자유당 결성.
· 로렌츠 슈타인 『오늘날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간행, 이에 의해 독일 국내의 많은 지식인들이 프랑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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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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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 신문』 편집부를 발매금지 직전인 3월 17일에 떠난다.
· 그 후 루게, 헤스와 함께 『독일연보』를 대체하는 평론지 발행을 계획. 타이틀을 『독불연보』, 발행지를 파리로 결정. 프랑스 측 집필자와의 교섭 시작.
· 크로이츠나흐에서 예니와 결혼(6).
· 『독불연보』를 위해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기초(-44.1).
· 파리로 옮긴다(10-11,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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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다니엘 오코넬의 아일랜드 분리 운동.
· 나폴리, 토스카나 등에서 민중이 전면적 봉기를 시도.
· 스페인에서 자유주의적 헌법 성립(-45).
· 스위스에서 가톨릭의 존더분트 결성.
· 이 무렵 스위스에 거의 4,000명의 독일인 망명 활동가들이 체류(마인츠 정보국의 비밀 보고).
· 러시아의 바쿠닌, 스위스에서 바이틀링 등 독일인 활동가들과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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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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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게와 함께 『독불연보』 발행(2). 첫 호(1ㆍ2호 합병)만으로 폐간. 이 실패로 루게와의 사이에 불화 발생.
· 런던의 엥겔스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2).
· 파리에서 바쿠닌, 보트킨 등 러시아인, 르루, 루이 블랑 등 프랑스인, 에버베크 등 독일인 활동가들과 의견 교환(3-5).
· 세이, 스미스, 스카베르크 등의 경제학 노트, 「경제학ㆍ철학 <제1> 초고」, 리카도, J. 밀, 맥컬록, 엥겔스 등의 경제학 노트, 「경제학ㆍ철학 <제2> 초고」, 「경제학ㆍ철학 <제3> 초고」를 작성(3-8).
· 『독불연보』에 발표한 논설에 대해 프로이센 정부가 반역죄와 불경죄로 고발, 맑스 체포장을 발행(4).
· 프루동과 알게 된다(7).
· 『포어베르츠』에의 기고와 편집에 대한 협력을 시작(7-).
· 파리에서 엥겔스의 방문을 받는다(8).
· 엥겔스와의 공저 『신성 가족』을 기초, 이듬해 2월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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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공업과 목면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인 슐레지엔 주에서 직조공의 봉기(6). 첫째 날에는 페터스발다우에서, 둘째 날에는 랑엔비라우에서 발생, 참가자는 약 5,000명. 프로이센 군, 이틀 후에 봉기 진압. 프로이센 정부, 봉기에 관한 보도를 일절 금지.
· 빌헬름 볼프, 슐레지엔의 직조공의 참상을 상세히 관찰, 피(被)구제 프롤레타리아트 아동교육협회 창립.
· 전해에 취리히에서 체포된 바이틀링, 런던 도착(8), 차티스트 외 영국 거주 망명 활동가들의 집회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는다(9).
· 런던에서 샤퍼 등 독일인 활동가들(의인동맹)과 라베트 등 온건 차티스트가 협력하여 만국민주주의동지협회 설립(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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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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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부, 프로이센의 압력으로 맑스 등 『포어베르츠』의 기고자에 대해 국외추방을 명령(1). 브뤼셀로 옮긴다(2).
· 브뤼셀에서 『포이어바흐 테제』 집필(봄), 거기서 세계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하라고 외친다.
· 엥겔스를 따라 영국을 여행(7-8), 런던에서 줄리앙 하니 등 차티스트 좌파 및 의인동맹 런던지부 지도자들과 만난다.
· 브뤼셀에서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 공동 집필 시작(9). 여기에는 마찬가지로 브뤼셀로 옮겨온 헤스도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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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철도 건설 절정.
· 아일랜드에서 대기근과 경제공황 발생.
· 유럽 전역에 감자 흉작 확대(해충).
· 미국, 텍사스 병합.
· 독일에서 철도가 7,000킬로미터에 달한다.
· 프로이센 국내에서 합리주의적ㆍ민주주의적인 빛의 벗 협회, 자유신앙교회, 독일 가톨릭교회 등이 반정부적인 대중운동을 확대.
· 스위스의 바트란트 주에서 일시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부 성립.
· 런던의 의인동맹 내에서 혁명노선을 둘러싼 바이틀링 대 샤퍼 등의 연속 토론(-46.1).
· 의인동맹 미국지부, 사회혁명협회라는 명칭으로 결성. 크리게의 영향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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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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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엥겔스와 함께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조직(1-2).
· 통신위원회를 거점으로 파리 진출을 시도. 그 일환으로 바이틀링 비판(3), 크리게 비판(5), 그륀 비판(5-)을 감행. 또한 프루동에게 접근하지만 실패(5).
· 러시아의 문예평론가 P. W. 안넨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10월 간행)을 비판하고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해 서술한다(12).
· 그러는 동안에도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 집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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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 독일연방 가맹을 희망.
· 크라쿠프 봉기, 뎀보프스키의 지도로 폴란드 공화국 국민정부 수립 선언을 발표(2).
· 오스트리아 군, 크라쿠프 봉기를 진압하고 이를 병합.
· 제네바에서 급진파 부르주아지의 반란.
· 미국ㆍ멕시코 전쟁(-48)으로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점령.
· 영국에서 곡물법 폐지, 자유무역 정책 실시.
· 미국의 사절 비들, 우라가(浦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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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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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의인동맹의 요청(1)을 받아 엥겔스와 함께 의인동맹에 가입.
· 의인동맹 개편을 위한 제1회 국제공산주의자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지만(6) 결석. 엥겔스는 출석. 또 대회에서 채택된 규약 초안에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내걸고 있다.
· 『철학의 빈곤』을 출판(7).
· 엥겔스와 함께 브뤼셀 독일인 노동자협회 설립에 진력(8).
· 『브뤼셀 독일인 신문』에 기고하고 이를 기관지로 만들어간다.
· 제2회 국제 공산주의자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며, 여기에 출석해 엥겔스와 함께 새로운 조직(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공산당 선언』) 집필을 위임받는다(11-12).
· 브뤼셀의 독일인 노동자협회에서 「임금노동과 자본」에 대해 강연(12), 1849년에 공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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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에서 연합 주의회 소집(4-6).
· 프로이센에서 영방교회(Landeskirche, 領邦敎會)의 이탈자 급증, 이듬해 1월까지 약 9,000명에 달한다.[로마교회로부터 독립하여 각 제후를 최고의 사제(司祭) 또는 수장(首長)으로 한 영방 단위의 교회.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1524년 농민전쟁이 점차 폭력화함에 따라 제후(諸侯)의 무력진압을 지지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확립을 제후들의 힘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방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성립됨으로써 군주의 영방종교(領邦宗敎) 결정권이 확립되었다]
· 영국에서 10시간 노동법(공장법) 성립.
· 이탈리아에서 카보우르 등이 입헌운동을 일으킨다.
· 러시아 군,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진압(-49).
· 프랑스 의회,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4), 전국에서 개혁연회(7-12), 그 사이에 기조 내각 성립(9).
· 미국(아이오와 주)에서 공산주의적 콜로니 '코뮤니아(Communia)' 창설, 촌장 코흐.
· 프랑스의 노동자 조직, 유물론적 공산주의파(데자미 지도)에 장기 금고형의 처벌(7).
· 브뤼셀에서 국제 폴란드 축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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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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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 선언』을 탈고하고 런던으로 발송(1-2), 직후 런던에서 출판(2-3).
· 프랑스 2월 혁명 발발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동맹 본부(중앙위원회)를 런던에서 브뤼셀로 이전한 뒤 파리로 이전. 3월 3일 체포, 4일 추방, 5일 파리 도착.
· 벨베크, 보른슈테트 등이 파리에서 독일인 망명자로 이루어진 무장군단을 결성해 독일로 진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에 반대한다. 대신에 개인으로서 독일로 귀국해 활동하도록 제안(3).
· 혁명에 합류하기 위해 엥겔스와 함께 마인츠를 경유해 쾰른으로. 그곳에서 『신라인 신문』 발행 준비에 착수(4).
· 공산주의자 동맹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각지의 민주주의자협회에 가입해 그 좌파로서 활동할 것을 주장(5).
· 일간지 『신라인 신문』 창간(6.1).
· 쾰른 시의 민주주의 단체들의 대표위원회 위원의 지명을 받는다(6). 그 이후에는 라인, 베스트팔렌 지방의 민주주의 극좌파로서 활동한다.
· 파리 6월 봉기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결전에 대해 『신라인 신문』에서 보도한다(6).
· 쾰른 민주주의자협회 총회에 출석해 슈나이더 2세와 함께 대표로 선출된다(7.21). 이 총회에는 바이틀링도 출석하여 반맑스적인 발언을 하지만 이를 일시적으로 무시.
· 엥겔스와 함께 쾰른 민주주의자협회 총회에 출석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비판적인 바이틀링의 견해를 반박(8.4). 또한 엥겔스와 함께 제1회 라인 주 민주주의자대회에 출석(8). 그 후 베를린, 빈 등 각지의 민주주의자들과 의견을 교환.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자가 수행해야 할 역사적 의의에 대해 설명하며 다닌다(8).
· 엥겔스 외의 동맹원들과 함께 쾰른 시의 프랑켄 광장에서 6,000명 규모의 민주주의자 집회에 출석. 치안위원회를 조직(9.13).
· 『신라인 신문』에 논설 「위기와 반혁명」 연재. 거기서 혁명 후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9.14).
· 제2회 라인 주ㆍ베스트팔렌 민주주의자대회에 출석하지만 K. 샤퍼, A. 베커 등의 체포로 대회 무산(9.25). 같은 날 오후 쾰른의 민주주의자에 대한 경찰의 압력 강화되고, 다음날인 26일 『신라인 신문』 외의 민주주의적 신문은 발행금지 처분을 당한다.
· 『신라인 신문』(10.12 복간)에 논설 「빈에서의 반혁명의 승리」를 게재해 오스트리아에서의 부르주아지의 배신과 빈 함락을 보도(11.7). 또한 납세 거부투쟁 및 반혁명에 대한 무장투쟁을 호소한다(1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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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레르모에서 봉기(1).
· 밀라노에서 시민과 군대가 충돌(2).
· 파리에서 개혁연회 금지, 마침내 2월 혁명 발발(2.24), 공화정 선언, 제2공화국 임시정부(-52).
· 파리에서 뤽상부르 위원회가 설치되어 국립작업장의 설치를 포고(2).
· 파리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코르포라시옹(Corporation) 형성이 진전(2).
· 뮌헨에서 폭동 발생(2.8-2.11).
· 파리 2월 혁명 소식이 독일에 전해지자 각지에서 폭동과 집회 발생. 특히 만하임에서 인민집회(2).
· 프랑스에서 보통선거법 제정(3).
·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집회(3.5).
· 밀라노 폭동, 이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혁명운동 격화(3).
· 빈 혁명 발발(3.13).
· 베를린 혁명 발발(3.18).
· 제1차 바덴 봉기(4).
·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성립(5.18).
· 프라하에서 슬라브계 주민대표에 의한 제1회 범슬라브대회 개최(6.1-6.12), 직후 그곳에서 반란이 발생하지만 빈디슈그레츠 군에게 진압된다(6.13).
· 파리에서 노동자 폭동 발생(6.23), 카베냐크가 독재권을 장악하고 진압(6.27).
· 체코ㆍ헝가리에서 혁명 탄압(6).
· 코슈트, 헝가리 의회에서 국방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반혁명에 저항(7).
· 마치니, 밀라노에서 시민방위위원회 설립(7).
· 라데츠키 군, 밀라노에 진군(8).
· 베를린에서 제1회 독일 노동자회의 개최(8.23-9.3).
· 빈에서 왕당과 타협한 국민군과 노동대중이 격돌(8.23).
· 프로이센 정부, 덴마크와 말뫼 휴전조약 체결(8.26).
·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말뫼 조약을 최종적으로 비준.
· 프랑크푸르트, 쾰른, 바덴 등에서 의회의 말뫼 조약 비준에 반대하는 폭동 다발. 모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 군대가 진압.
· 뢰라흐에서 슈트루페가 독일 공화국 선언, 이른바 슈트루페 봉기(9.21).
·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우애회의 중앙위원회 결성(9-50.6), 회장 S. 보른, 기관지 『우애』.
· 옐라치치, 반혁명군을 이끌고 헝가리 진격(9).
·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좌파, 빈 방어를 위해 L. 블룸과 J. 프뢰벨을 파견(10.17). 코슈트도 빈으로 향한다.
· 베를린에서 제2회 독일 민주주의자대회 개최(10.24).
· 빈디슈그레츠와 옐라치치의 반혁명군, 빈 포격 개시(10.30), 함락(11.1).
· 프랑스에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취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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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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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쾰른 노동자협회의 위원회 회의에서 연설(1.15, 29).
· 『신라인 신문』에 논설 「쾰른 신문의 선거론」을 게재해 프롤레타리아트, 도시 소부르주아지, 농민을 가장 민주주의적인 계급이라고 표명(2.1).
· 『신라인 신문』에 논설 「임금노동과 자본」 연재(4.5-4.11).
· 샤퍼 등과 함께 민주주의협회 라인 지구 위원회로부터의 탈퇴를 표명(4.15). 소부르주아와의 공동 투쟁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노동자 대중당의 형성으로 향한다.
· 프로이센에서의 추방 명령(5.16).
· 『신라인 신문』이 발행 금지되어 최종호를 전면 붉은 색으로 인쇄(5.19), 엥겔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a. M.으로 가고, 다시 바덴, 팔츠로 간다. 각지에서 혁명군을 프랑크푸르트로 보낼 것을 호소한다(5.19-월말).
· 파리로 옮겨 각종 민주주의 단체나 노동자 단체와 연락(6).
· 프랑스 정부로부터 모르비앙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파리에서 런던으로 망명(8.26).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를 재건(8).
· 런던의 독일인 노동자교육협회에서 독일인 망명자 구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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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공화국 성립(1).
· 로마 공화국 성립(2).
· 오스트리아 군, 노바라 전투에서 사르데냐 군을 격파한다(3.23).
· 마치니, 공화혁명군 지원을 위해 리보르노, 피렌체, 로마에서 활약, 로마 의회에 들어간다(3).
· 헝가리, 독립선언(4.14).
· 피렌체에서 반혁명 승리(4).
·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좌파)의 저항에 호응하여 서남독일을 중심으로 헌법투쟁 확대(4).
· 말뫼 조약,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자에 의해 파기, 전쟁 재연(4.3-7월).
· 드레스덴에서 무장봉기(5.3-5.8). 반란은 뷔르템베르크, 바덴, 팔츠로 확대. 제2차 바덴 봉기(5.13).
· 프로이센ㆍ하노버ㆍ작센에서 3왕동맹 성립(5.26).
· 프랑스 군, 로마에 침입(5).
· 오스트리아 군, 토스카나에 침입(5).
· 파리에서 6월 폭동.
· 프랑스 군, 로마 공화국을 분쇄(7).
· 바덴, 팔츠에서 혁명이 진압된다(7.23).
· 오스트리아 군, 헝가리 혁명을 진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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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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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자동맹을 재건(1). 다만 독일 본국에서는 쾰른을 중심으로 비합법 결사로서 반을 증설.
· 함부르크에서 창간된 『신라인 신문ㆍ정치경제 평론』에 논설 「1848년 6월의 패배」(나중에 다른 논문과 함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수록)를 게재한다(3.6).
·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의 동맹원에 대한 호소」(3월 회람장)를 발표한다(3).
· 동맹 중앙위원회 내부에서 빌리히와의 사이에 대립 발생(7), 비판 개시(8).
· 동맹 중앙위원회에서 빌리히‒샤퍼파를 비판. 그러나 이 파는 동맹 전체에서 다수파가 된다. 중앙위원회의 쾰른 이전 결의(9).
· 쾰른의 중앙위, 맑스, 엥겔스 등의 제안을 받아 빌리히‒샤퍼파 제명 회람장을 발송(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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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 왕, 흠정헌법 발포(1).
· 프랑크푸르트 a. M.에 연방의회 재개.
· 하노버, 작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에 의한 4왕 조약(2).
· 프랑스에서 보통 선거제 폐지(5).
· 마치니, 런던에서 르드뤼 롤랭, 아르놀트 루게, 구스타프 슈트루페 등과 협력하여 유럽 민주주의 중앙위원회 결성(6-7).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두 공국, 덴마크와 싸운다(7).
· 뉴욕의 바이틀링,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독일인 활동가들을 규합해 제1회 독일인 노동자회의 개최(10).
· 올뮈츠 협정(11), 독일연방 정책의 좌절.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굴복.
· 영국에서 철도가 23,500마일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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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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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블랑키파 망명자들 및 루이 블랑, 그리고 빌리히‒샤퍼파가 2월 혁명을 기념해서 개최한 집회 '평등자의 연회'를 엥겔스와 함께 비판(2).
· 쾰른에서 헤르만 베커에 의해 『칼 맑스 논문집』 간행(4), 제1권뿐.
·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서 경제학(고전파), 토지 소유에 관한 연구에 들어간다.
· 라인하르트(하이네의 파리 비서)로부터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대한 통지를 받는다. 이 이후 『디 레볼루티온』을 위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집필을 시작(12).
· 「런던 노트」 작성(-53).
· 런던에서 차티스트의 대표대회 개최(3-4), 신강령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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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에서 반란 발생(4), 자유주의 방향으로 향한다.
· 오스트리아에서 금광 발견.
· 러시아에서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철도 개통.
· 런던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 개최(5-10).
· 오스트리아, 헌법을 폐지하고 일시적으로 전제정치 부활.
· 프랑스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발생, 공화파의 패배(12).
· 프로이센, 덴마크에 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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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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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쾰른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원에 대한 재판(10.4-11.12), 그 사건에 대해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진상』을 저술하고 프로이센 정부를 비판. 그러나 그 이후 동맹 자체가 사실상 해체.
· 프랑스에서 인민투표에 의해 루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나폴레옹 3세에 의한 제2제정(-70)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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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열국회의.
· 카보우르, 사르데냐 수상 취임(-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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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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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젤에서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진상』을 간행(1). 그 가운데 독일로 보낼 2,000부가 압수되어, 다시 보스턴의 노이에 엔그란트 차이퉁 사에서 소책자로 간행(4).
· 영국에서 바쿠닌 스파이설이 돌지만 이를 부정, 바쿠닌을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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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에서 노동보호법 성립.
· 러시아‒터키 간의 크리미아 전쟁(-56). 영ㆍ불 함대, 다다넬스 해협에 출동.
· 미국의 사절 페리, 우라가(浦賀)에 내항.
· 러시아의 사절 푸차틴, 나가사키에 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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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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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미아 전쟁에 대한 논설들을 기초(『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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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셉스, 수에즈 운하 개발권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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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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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제도ㆍ신용제도ㆍ공황」을 『신오데르 신문』에 집필.
· 경제학 연구에 관한 「참조사항」을 작성(1).
· 크리미아 전쟁 및 영국의 동향에 관해 논설들을 발표(『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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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 즉위.
· 러시아 군, 세바스토폴 요새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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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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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경제공황에 관해 논설들을 발표(『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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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진출을 적극화하는 영국ㆍ프랑스의 중국 출병, 애로호 사건(-60).
· 영국 사회과학진흥협회 창립(-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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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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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을 덮친 경제공황을 관찰하고 드디어 경제 연구에 몰두, 논문 발표(나중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집필(8-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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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공황, 유럽 각국에 확대.
· 프랑스, 알제리 정복을 거의 완료.
· 인도에서 세포이(시파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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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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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무갈 제국 멸망, 영국령 인도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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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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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제1분책 간행(6).
· 「자본 장에 대한 플랜 초안」, 「발췌 노트」, 「인용 노트」, 「인용 노트에 대한 색인」, 「나 자신의 노트에 관한 요록」 작성(-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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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통일전쟁 발발.
· 프로이센에서 몰트케 참모총장 취임.
· 일본에서 안세이(安政)의 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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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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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의 군제개혁 및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관한 논설 집필.
· 프리드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맹'은 역사의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고 표명(2).
· 『포크트 씨』 간행(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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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에서 군제개혁.
·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링컨 당선, 남부 여러 주들이 연방에서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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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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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남북전쟁에 관해 논설들을 집필(-65).
· 『1861-63년 초고』를 집필(8-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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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왕국 성립.
· 러시아 농노해방령.
· 미국에서 남북전쟁 발발(-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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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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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에 온 라살레와 만나지만 노동운동이나 계급투쟁, 경제학상의 문제들 등에서 의견의 일치에 이르지 못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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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수상 취임.
· 런던에서 제3회 만국박람회.
· 프랑스, 사이공 조약으로 코친차이나의 일부 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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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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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65년 초고』(제2부 「제1고」, 제3부 「주요 원고」를 포함) 집필(8-65.12).
· 『재 런던 독일인 노동자교육협회의 폴란드인에 관한 격문』 기초(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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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에서 봉기(1), 러시아군 진압.
· 링컨, 노예해방선언(1).
· 면화공황
· 영국군, 가고시마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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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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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런던에 창설(9.28-76). 이를 이어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 동 협회의 『잠정규약』 기초(10).
· 런던에 온 바쿠닌에게 『공산당 선언』을 몇 부 건네고 제1인터내셔널에 대한 협력을 요청(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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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스비히‒홀슈타인(제1차 독일ㆍ덴마크) 전쟁(6).
· 러시아에서 폴란드 농노해방, 젬스트보 설치.
· 제네바 협정, 앙리 뒤낭의 제창으로 국제적십자동맹 성립.
· 4국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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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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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 가격, 이윤』 기초. 또한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인사』 기초(5).
· 『자본』 제2부 「제3고」 집필(-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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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노예해방령(1). 링컨 암살.
·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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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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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1부 초판 원고를 집필(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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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 전쟁(6-7).
· 프로이센에서 비스마르크파의 국민자유당 결성(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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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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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부르크의 마이스너 사에서 『자본』 제1부를 1,000부 출판(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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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독일연방 성립.
· 파리 만국박람회.
· 미국,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 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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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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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2부 「제4고」 집필(4-5).
· 「국제노동자협회와 영국 노동자 조직의 결합」(10).
· 『자본』 제2부 「제2고」 집필(1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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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제1차 디즈레일리 내각(보수당, 2-12),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자유당, 12-74.2).
·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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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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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2판에 대한 서문.
· 「제1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제4회 바젤 대회에 대한 보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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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대륙횡단철도 완성.
· 수에즈 운하 개통.
· 영국에서 국교 폐지.
· 일본에서 판적봉환(版籍奉還), 관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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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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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 제1선언」 기초(8.7), 「제2선언」(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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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7-71.5).
· 이탈리아, 교황령 병합(통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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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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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코뮌에 관한 「제3선언」(5.13). 나중에 『프랑스 내전』으로 정리된다(6).
· 엥겔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 런던 대회를 위한 「총무위원회에 보내는 제안」, 「잠정적 결의안」(9.9).
· 『자본』 제1부 독일어판의 개정 작업(1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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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제국 성립(1), 제국헌법 발포(4).
· 파리 코뮌(3.18-5.27).
· 영국에서 노동조합법 제정.
· 일본에서 폐번치현(廃藩置縣)(7), 이와쿠라 사절단 구미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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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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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러시아어판 초판,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3).
· 『자본』 제1부 독일어판 제2판 출판(7).
· 『자본』 제1부 프랑스어판 출판(9-75.4).
· 인터내셔널 맑스파, 비밀 회람장 「이른바 인터내셔널의 분열」에서 바쿠닌파를 규탄, 이를 각 지부에 송부.
· 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 맑스의 보고에 기초해 바쿠닌과 기욤의 제명을 결의. 아울러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뉴욕 이전을 결의(9). 인터내셔널, 사실상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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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3제회의(독일ㆍ오스트리아ㆍ러시아).
· 프랑스에서 국민개병제.
· 일본에서 학제 반포, 태양력 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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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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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민주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헤이그 대회 보고)에서 엥겔스와 함께 또 다시 바쿠닌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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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제동맹 성립(6).
· 독일에서 문화투쟁 발생.
· 스페인에서 제1공화제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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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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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닌 저 『국가와 아나키』 강요(-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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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독일노동자조합 해산 명령.
· 독일에서 철강 카르텔 성립.
· 스페인에서 세라노 독재정권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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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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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노동자당 강령 평주(고타 강령 비판)」(4-5) 집필, 송부(공표는 1891년).
· 독일에서 아이제나흐파ㆍ라살레파 합동으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 수립, 고타 강령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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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수에즈 운하의 주식 매수.
· 일본, 러시아와 치시마ㆍ사할린 교환조약(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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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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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러 저작 독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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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에서 만국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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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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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2부 「제5고」, 「제6고」 집필.
· 『오테체스트벤누이에 자피스키(조국잡지)』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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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터키 전쟁(4-78).
· 인도 제국 성립. 빅토리아 여왕, 황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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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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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2부 「제7고」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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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열국회의(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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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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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발레프스키 저작 『공동체적 토지 소유』 독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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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국가(國歌)로 정하고 국가 축제일(7.14)을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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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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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2부 「제8고」 집필(-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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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에서 인민의 의지파, 궁궐 폭파 음모.
· 밀라노에서 직공당 결성.
· 모로코,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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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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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3.8).
· 모건 저작 『고대사회』 독서, 노트.
· 부인 예니 사망(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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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제협상(독일ㆍ오스트리아ㆍ러시아, -87).
· 루마니아 왕국 성립.
· 프랑스, 튀니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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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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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제1부 독일어판 제3판을 위한 개정 작업(-83.1. 83년 미간 개정).
· 러보크의 저작 『문명의 기원과 인류의 원시 상태』 독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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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국동맹(독일ㆍ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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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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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녀 제니 사망(1.11).
· 런던에서 사망(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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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인도국민협의회 성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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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토바 아키히로 등, 『맑스사전』, 오석철ㆍ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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