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지? 여행을 갔다더니 얼굴이 검게 그을린 네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늘 열심히 살면서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널 보면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멋져 보이고 부럽고 존경스럽기 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기도 하고.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 내가 모르는 세계를 찾아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나에게 익숙한 것, 당연한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가 아는 당연함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를 묻는 일이기도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모처럼만에 떠난 여행 즐겁게 다녀오고, 건강한 모습으로 서울서 또 얼굴 보자. 서울은 어떠냐고? 서울은 아직 엄청나게 더워. 하지만 입추가 지나니 알게 모르게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 이 땅에서 수천, 수만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가 이런 절기 하나에 온전히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네 안부가 궁금해서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문득 너와 함께 읽고 싶은 책 한 권이 있어 쓰는 편지이기도 해. 아직 독서의 계절은 아니지만 독서가 어디 때가 따로 있을라고. 같이 귀 기울여 들어주길.
내가 고른 책은 안승준이라는 젊은이, 영원한 젊은이의 책 한 권인데, 안타깝고 슬프게도 스물다섯의 나이로 이미 세상을 떠난 젊은이의 글을 모은 유고집이야. 우선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간단히 설명을 해볼게. 얼마 전에 신경숙 표절 사건이 있었지? 신경숙이 ‘표절한’ 책들 중 아마도 가장 앞서는 글이 바로 이 안승준의 유고집에 실린 아버님의 편지야. 안승준이 죽고 얼마 후 아버님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 책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데 앞부분이 다음처럼 이어져. “슬픈 편지 – 서문에 가름하여. 안창식, 1991년 9월 30일. ~귀하. 저는 이제 고인 된 안승준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주소록에서 발견된 많지 않은 수의 친지명단 가운데 귀하가 포함되어 있었던 점에 비추어, 저는 귀하가 저의 아들과 꽤 가까우셨던 한 분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이미 듣고 계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그의 아버지로서 그의 돌연한 사망에 관해 이를 관련된 사실들과 함께 귀하께 알려드려야만 할 것 같이 느꼈습니다.” 편지는 아버님께서 아들의 유고집을 묶어 내려 하는데 이 책에 아들을 아는 사람들의 아들에 대한 기억, 추억 혹은 에피소드가 담긴 글을 싣고 싶으니 보내달라는 부탁의 편지야. 정말 제목 그대로, 슬픈 편지이지?
그런데, 너도 잘 알다시피, 나야 말하자면 직업이 ‘철학자’이긴 하지만 문학이나 글쓰기에 큰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기회에서 신경숙의 표절 사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나누게 되었는데, 우연히 내 철학 수업을 듣는 어떤 분이 안승준의 막내 여동생분이시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 안승준은 그러니까 그 분의 큰 오빠이셨던 거고, 위의 슬픈 편지를 쓰신 분은 이분들의 아버님이신 거였어. 그래서 그분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검색을 하고 하다가, 나도 지면으로는 잘 아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석좌교수 장하석 교수가 인생의 책 세 권을 꼽으라는 어느 기자의 부탁에 대답을 하면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이 구조』 그리고 지금 소개하려는 안승준의 유고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를 꼽은 것도 알게 되었지(장하석 교수의 인터뷰도 아주 좋은 글이니 검색을 해서 꼭 읽어봐. 정말 좋은 글이야). 알고 보니 고인이 된 안승준과 장하석이 어린 시절부터의 죽마고우였고, 안승준의 장례식에서 친구 대표로 조사를 읽은 사람도 동갑내기 스물다섯 젊은 청년 장하석이었던 거야. 하지만 나는 그걸 보고서도, 개인적인 추억이 얽혀있어서 그렇겠거니, 스물다섯 한국청년 안승준의 유고집이 어떻게 칼 세이건과 토마스 쿤의 책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책일까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호기심도 일었고, 마침 그 여동생분께서도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이 책을 아직 몇 권 가지고 계시다는 것 같아서, 제가 읽고 싶으니 혹시 책을 빌려주실 수 없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어보았지. 그 분이 그래서 책을 한 권 주셨는데, 나는 그때도 무엇인가 조금은 ‘센티한’ 감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 안승준은 학번으로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인 것 같은데, 시기나 모든 면에서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훌륭한 청년인 것 같아서 책을 읽기 전에도 이미 무엇인가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거든. 그리고 책을 받아들고 집에 와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난 정말 이렇게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이성이 함께 걸어간 책,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온정주의나 반(反)지성주의로 빠지지 않고 냉정한 현실인식과 투철한 논리로 자기 삶을 이론화하고 또 그렇게 살아간 책은 처음 읽었어! 더구나 이 글들은 몇몇 논문 관련 단편이나 교수님들께 보내는 학업에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저 혼자 단상처럼, 일기처럼 적어 내려간 글, 혹은 친구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는 글들이거든. 그러니 글 쓴 사람으로서는 그 외의 누가 읽을 거라고, 혹은 출판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쓴 글들, 진심이 담긴 ‘사소한 글들’인 거지! 어느 누구도 이렇게 읽게 되리라 생각지 않고 청년 안승준이 홀로 적어 내려간 이 글들을 읽으며 난 한국인으로서도 그렇지만 이미 그런 좁은 민족적ㆍ국가적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를 위해 고민하고 말하고 또 그렇게 살다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았어.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보면, 주인공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내’가 되기 위해, 모든 좁은 ‘나의 세계’를 다 떠나잖아. 처음에는 가족, 친척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친구를 거쳐, 결국은 종교와 사랑, 그리고 민족과 국가까지 모두 말이야. 난 안승준의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젊은 철학자의 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이 정도면 이 책에 대한 소개가 되었나?
그런데 정작 안승준은 누구고, 뭘 한 사람일까? 일단 우리 친구, 이렇게 부르자, 안승준은 1966년에 서울 성북구 수유동에서 태어났어. 서울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다가 공무원으로 외국에 나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1980년 가족이 일본으로 가서 중고등학교의 일부를 다니던 중, 1982년 미국의 한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옮겼어. 졸업 후엔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입학해 대학생이 돼. 그러다가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1985년에 일시 귀국하고, 1987년엔 연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청강을 해. 1987년이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4.13 호헌조치와 그에 따른 민중의 반발로 노태우의 6.29선언이 있었던 해야. 박종철이나 이한열을 알지? 그게 바로 1987년에 일어났던 일이야. 안승준은 1980년을 일본에서 보내서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비극적 진상을 검열 없이 접했고, 이 일은 그의 어리고 젊은 마음에 큰 상흔을 남기게 돼. 안승준은 1985년에 한국에 와서도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서울민중연합이 운영한 민족학교를 1기로 수료해. 1988년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복학한 안승준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그만 둬. 그리고 1989년에 사회생태학연구소에서 여름학기를 수료하고, 1989년 뉴욕의 한 사회연구소의 학ㆍ석사 통합 과정에 입학한 후, 유진 랭 칼리즈 소속으로 ‘생태와 사회’ 전공의 학사 과정과 인류학 전공 석사 과정을 마치게 되거든. 1991년 5월 두 개의 학위를 취득한 안승준은 대학원 2차년도 과정에 편입을 허가받아. 그리고 한국에 계시던 어머님, 작은 여동생이 미국에 가셔서 함께 즐거운 휴가를 즐기고 난 열흘 후인 1991년 8월 8일 버몬트 주의 더머스톤의 웨스트 리버에서 유명을 달리 한 채로 발견 돼. 안승준은 여름방학 동안 방문한 친구의 집에서 개 한 마리만을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개울로 내려가는 바위에서 넘어지면서 뇌손상을 입어 의식을 잃은 채 개울에 떨어져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것인데,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개울의 깊이가 무릎에도 차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이 모든 것은 실로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린 친구들의 헌사에는 김지하의 시가 한 편 실려 있어.
회귀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너무나도 슬픈 시지? 이 시가 내 가슴에 와서 박히더라. 안승준이라는 저 젊은이, 저 꽃은 이제 흙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오늘 나는 네 곁이 앉아 안승준이라는 젊은이의 책을 같이 읽으려해. 벌써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나? 물론,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백번을 들었다 해도 단 몇 줄이라도 스스로 책장을 넘겨가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읽어보는 것보다는 못하겠지? 아래의 글들을 읽다보면, 내가 왜 다른 책이 아닌 바로 이 책을 골라서 너와 함께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저절로 알게 되리라 생각해. 난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고 어렵기만 한 백 권의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 이런 우리나라 젊은이의 제대로 된, 잘 쓴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철학이고 공부라고 생각하거든. 자, 이젠, 너도 나와 함께 책을 읽고 들을 준비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며, 너와 함께, 네 곁에 앉아, 책장을 넘겨본다. 우선, 1988년 22살의 안승준이 친구 장하석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읽어보자.
“어제밤, 학교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두 시간 빼먹고, 대신 내 방에 앉아서, 무시무시하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 들으며 끄적거린다. 얼마 전 아버지의 편지 속에 이런 말이 있더라. ‘대학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맹목적이 아닐는지’라는. 결국 교육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이겠지. 지금 당장은 무엇이 어떻게 될는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교육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부딪쳐나가면 그 보답은 온다는 뭐 그런 거. 그런데 난 도무지 그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산타페에 있을 때 세미나 시간에 교육과 세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인 기억이 난다. 그 질문 자체도 내가 던진 것이긴 했지만, 그때는 내 나름대로 대답을 찾았던 것 같아. 결국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그건 교육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외적 요소, 특히 사회적 압력에 의해 받아야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세뇌일 따름이다’라는 것이, 그 때 필수과목인 ‘미국 역사’를 놓고 내가 내린 결론이었고, 나름대로 타당성 있는 결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런데 지금 ‘자유의지’에 대한 나의 달콤한 생각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교육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인지, 아니면 아주 섬세하게 짜여진 일종의 세뇌에 불과한 것인지가 아리송해지고 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바로 이 학교를 택한 건 분명 나의 의사였고 나의 의지였다만, 그 선택 역시 결국 무언가 선택하게끔 만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게 대학이란 선택조차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가? 대학교육에 대한 믿음? 맹목적이라는 것? 그건 마치 당장 필요한 도움이 없어 거리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그것도 꼭 오리란 확신도 없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맹목적인 기독교적 구원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나는 과연 제대로 날고 있는가?」, 170~171쪽)
안승준은, 말하자면, 그저 무심하고 무책임한 남들의 눈으로 볼 때,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아무런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소위 ‘엄친아’로 자라난 친구였던 것 같아. 하지만 젊은 안승준의 ‘멋진’ 점은 이렇게 자신을 키워낸 조건들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안정적인, 실은 자신을 얽어매는 족쇄에 다름 아닌, 틀을 부수고 불확실한 ‘나 스스로가 되는 길’을 찾아 떠난 용기와 결단에 있는 것 같아. 안승준이 선택한 삶은 자기 개인의 신분상승이나 일신의 영달만을 위하는 삶이 아닌,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과 헌신이 있는 삶이라는 점이 글을 읽는 내내 가장 절실하게 와 닿았던 것 같아. 다음 글은 1988년 이러한 회의와 고민을 거쳐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야, 한 번 읽어봐.
“어느 누구에게든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철학을 하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이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주어진 혜택을 다 던져 버리고 홀로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그 이유가 있었고, 다른 유혹 다 뿌리치고 이 별난 세인트존스에서 철학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정했을 때도 그 이유가 있었지요. 언젠가부터 가슴 속에 맺히기 시작한 뜨거운 정열이 그 이유였고, 그 뜨거운 정열이란, 내가 내 땅에서 받은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이 세뇌에 불과했다는 자각에서 시작해서, 광주로, 그 왜곡보도로 이어지고, 그리고 고난과 수모로 이어지는 수많은 나에 대한(말했지요, 이미 나와 남의 이분법이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각. 그리고 이 사람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사랑, 의무, 연민, 내 땅의 수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풀어보겠다던 정열. 저에게 있어서 철학은 도구입니다. 쇠나 망치나 다름없는 도구. 나의 반항, 철학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이어야만 하는 이곳에서의 나의 반항은 모든 나의 힘을 빼놓았고, 나에게는 이제 꿈틀거릴 힘도 없습니다. 더구나 더욱더 무시무시한 자각은, 아무리 이곳에서 답을 구했다고 해도, 그 답은 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물음이나 문제들에 응용될 수가 없고, 아니 응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 이런 식의 응용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점들을 만들어내게 되고, 내 자신 더욱더 우리로부터 소외되어 간다는 자각, 마치 서울시가 지옥이 되어버린 것 같이. 만일 아직도 나에게 그때의 정열이 남아 있다면 그 답은 타들어가는 서울시내 길거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자각. 답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따라서 저에게는 아이보리타워 안에서의 형이상학은 더 이상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쓰잘데없는 지적 자위행위에 불과한 철학에는 이제 지쳤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바보가 되어간다던 모택동의 푸념이 너무나 절실하게 들려옵니다. 학교에서 읽으라고 주어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은 차가와져 오고, 점점 더 내 자신에게서도 멀어져 버리고 맙니다. 최근 한참 책이 안 읽힐 때 책을 읽으며, 책 그 내용보다도 왜 그 사람이 이런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읽어보았습니다. 머리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책을 읽는 거죠. 훨씬 책이 잘 읽히더군요. 데카르트 경우가 그랬고 홉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메아리는 이곳에 없습니다. 가정의 정당성, 그 토론 없이, 그 가정에서 흘러나오는 논리의 마력에 빠져 있는, 그리고 거기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는 젊은 철학자들의 모습이 메스꺼워지더군요. [...] 그저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하나의 인간으로 남아 있고 싶을 뿐입니다.”(「철학 공부에 대한 회의(1).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그만 두면서」, 184~187쪽)
잘 읽었지? 결국 안승준은 공부와 삶의 괴리,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머리로만 하는 공부, 현실과 상관없는 철학, 자신이 주입받은 대전제를 비판하지 못하는 ‘가짜 철학’에 환멸을 느끼고 학교를 그만 둔 거야. 물론 나는 모든 철학이 꼭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이렇게, 경솔이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 진실로 믿는 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사람만이, 설령 그것이 잘못된 것이더라도, 철학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 그리고 또 훗날 새롭게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니 그런 사람은 굳이 ‘철학’을 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철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겠지. 다음 편지는 앞의 이 편지로부터 약 3개월이 흐른 후인 1989년 1월에 바로 아래 남동생에게 쓴 편지야(순서대로 남자 둘, 여자 둘의 4남매야). 이 편지를 읽어보면 스물세 살의 승준은 자신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편지를 집에 보낸 후, 아버님에게서 온 세 통의 긴 편지, 그만큼 긴 엄마의 편지,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된 남동생으로부터 온 두 통의 편지를 받았나 봐. 똑똑하고 속 깊은 장남을 미국에 홀로 보내놓고 공부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만을 기대하시던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장남의 말이 청천벽력 같은 놀라움이셨겠지? 그런 상황에서 승준은 이제 막 인류학과에 입학한 남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거야. 말하자면 이 편지는 ‘자아실현과 효도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고민과 결단을 적은 것인데, 이 글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도 남 얘기 같지 않을 것 같아.
“내가 학교를 그만둔 일을 일방적으로 아버지께 이야기해 드린 이후, 지금까지 상당한 양의 편지를 받았다. 예측하지 못했던 건 아냐. 결정이란 언제나 순간적인 것이기는 하다마는, 그 순간을 못 찾고 질질 끌어온 데에는 엄마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크게 걸려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엄마 아버지께 미리 상의 안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일을 저지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나 자신도 그 동안 찾지 못했던 그 순간이 왔을 때―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겼을 때―그 탄력을 잃기 전에 나 자신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부터 미리 저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엄마 아버지의 설득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는 배수의 진을 치고 엄마 아버지께 보고를 한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엄마 아버지께서 나를 물속으로 집어넣지는 않으시겠지 하는 자신에서였다. 물론 엄마 아버지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결정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다. 그만큼 나의 결정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고 거기에 고민이 많았으리라는 건 너도 짐작할 수 있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야. 그 결정으로 내가 잃게 되는 것은 엄청나게 많다. 우선 군대 문제가 걸린다. [...] 그러면서도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내가 이제는 나 자신을 책임지겠다는 뜻이며, 그에 따르는 엄청난 특권을 모두 포기할 자신이 있다는 성장의 뜻이다. 이 결정은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괴로움까지도 견뎌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내 자신도 스스로의 용기와 가능성에 대해 놀라버린 무서운 발전이기도 했다. 절실했다는 것이다. 그래, 물론 나와 집 사이에는 이야기하거나 적혀 있지는 않지만 서로 알고 있는 많은 약속과 동의가 있을 것이다. 대학을 마치는 것도 그 중 하나겠지. 그런데 나는 그것을 깨부순 것이다. 그래, 엄청난 배반이지. 전화로 들은 엄마 목소리에서 역력히 드러나더구나. 하지만 누구보다도 엄마를 내 졸업식에 참석시키고 싶었던 것은 나다. 그런데도 내 자신은 그걸 차 부순 거다. 그만큼 절실했던 거다. 집에다 편지를 길게 쓰면서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 그 ‘절실성’을 이해해달라는 부탁이었지. 그런데 그 절실성이 전달이 안 되더구나.
내가 처음으로 정열이란 것을 가져본 것이 중삼 때였다.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정열이었고, 그 정열에는 몇 가지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 하나는, 광주 문제 등을 계기로 엄청나게 발전한 나의 사회의식과, 그 무렵 책을 통해 알게 된 후까시로 쥰로오(深代惇郞)라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를 통해 느낀 그 직업 자체 대한 매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한국사회를 바꾸어나갈 수 있다는 사명감 또는 목적의식이었다. 아버지께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 아버지 대답은 의외로 부정적이시더구나. ‘신문기자라는 그 직업 자체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라면 반대다.’ 그러시면서도 언론의 자유도 신문의 책임도 개인의 생활도 보장이 되지 않는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시더구나. 그 한 마디가 나의 ‘정열’에 얼마나 차가운 물을 끼어 얹었는지는 이야기 않겠다. 내가 그런 정열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의 바로 그런 상황 때문이었는데, 아버지는 한국의 바로 그런 상황 때문에 반대를 하신 거다. 너도 아다시피, 아버지나 엄마가 여간해서는 우리가 하려는 일에 반대를 안 하시잖니.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놓고 같은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는 데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가 없더구나. 아마 그때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공간을 잃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한 갈등은 계속 이어진다. 미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그러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서 어떤 국내의 문제들에 대해―특히 정치적, 사회적인 것들―답을 구해보겠다는 것이 그 때 내 생각의 핵심이었는데, 아버지는 그러한 나의 상황을 고려해서 개략적으로라도 앞으로의 전공분야를 정하고 가되 그것이 공과계통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물론 강요는 아니었지. 하지만 늘 강요를 잘 하시는 분이 권하시는 것과 강요를 잘 안 하시는 분이 권하시는 것 사이에는 그 권하는 힘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내놓은 타협점이 건축이었다. 지난번 귀국해서 한국서 일 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처음 꺼내시는 말씀이, 서울에 오면 데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거였다. 내가 무리무리해서 귀국하려 했던 것은 그 모두들 국내에서 고생고생할 때 나만 멀리 떨어져 편안한 생활을 하는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고, 바로 그 국내의 어수선하고 심각한 분위기 속에 나도 들어가서 그 죄책감을 나름대로 풀어보자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시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데모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라는 거다. 결국 타협점은 국문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거였고, 학교 데모에서는 돌 한 번 던져보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 두어야만 했다. 다행히 이학기에 서민통[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족학교를 통해서 그때까지 쌓아온 죄책감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고, 그 점은 지금도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민족학교에서의 반 년 간의 생활은 어느 때보다 알차게 그리고 정열적으로 뛰어볼 수 있었고, 그러한 내 자신의 모습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한 내 생활의 모습으로 인해 엄마 아버지 걱정하신 건 알지만, 그래도 데모를 꾸미고는 다녔을망정, 데모대 앞에서 돌을 던져 보지는 않았으니 약속을 깨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옛날에 아버지가 문 앞에서 뛰어들어 닥치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셨다는 할머니 말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엄마의 걱정 때문에 나 역시 보이게 보이지 않게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고, 그런 지금의 나는 어떤 정열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이 엄마 아버지가 나를, 아니 우리를 키우시면서 바라시던 모습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네가 인류학에 대해 품고 있는 어떤 종류의 정열이 부러운 것도 그런 이유이고, 또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것도, 또 네 자신이 그 정열을 발전시켜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번 나의 결정에는 다분히 이 보이지 않는 갈등을 폭발시켜 무언가 엄마 아버지께 전해드리고 싶던 메시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또한 우리를 위해 해주시고 생각해주시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거, 뭐 그런 걸까?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열의 결여다. 지금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언젠가 찾아오리라 확신하는 그 정열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라고 저번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해주시고 해주시는 이야기들, 조언들이 거의 나를 정열에서 멀리 떨어뜨려놓으니, 뭘 어떻게 해야 될는지를 모르겠구나. 옛날에 내가 실연(?)을 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가장 위험한 것은 그 사랑하는 사람의 주위에 철창을 쳐놓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마음대로 날지 못하는 철창 안의 새뿐만 아니라, 그 새를 돌아보아야만 하고 하루 세 번 꼭꼭 먹을 것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나 자신이 더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런데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자신의 주위에 철창을 쳐놓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새가 되는 거라고. 한 여자만 혹은 주인만 바라보며 먹을 것을 갖다 주기만을 기다리는 거라고. 나한테 묻더군. 혹시 내 주위에 철창을 쳐놓지는 않았느냐고. 나한테 하루 세끼 밥을 갖다 주어야 하는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내가 뭐 엄마 아버지와 연애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는 상대와 종류에 관계없이 공통된 점이 있다고 생각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혹시 내 주위에 철창을 쳐놓으신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다. 철창을 치는 것도 거두는 것도 어미가 아닐까? 철창이 쳐져 있으면 새끼는 날고 싶어도 날지를 못한다.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엄마 아버지가 혹시 엄마 아버지 주위에 철창을 스스로 쳐놓으신 건 아닌가 하는 거. 만일 그렇다면, 이 새끼는 멀리 가지를 못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어디를 가든 그 사랑하는 사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철창 따위는 필요 없겠지.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 곧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기에 말이야. 엄마 아버지께서 주위를 한 번만 둘러봐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남아 있구나. 내가 자유롭지 못하니 말이야.”(「철학공부에 대한 회의(2).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 다시 진학할 결심을 하면서」, 204~208쪽)
아마도 한국에서 자라난 젊은이라면, 나의 한 학생이 표현했던 대로 ‘자아실현과 효도 사이에서’ 고민해본 친구라면, 이 글이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해. 바로 나 자신도 이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했었으니까.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선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글을 발견하고 타이프를 치고 정리하여 책을 묶은 분들이 바로 다름 아닌 부모님들이시라는 점이야. 부모님들께서는 어떤 심정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당신들의 사랑하는 장남이 쓴 글들을 묶으셨을까? 그 심정을 세상의 어느 누가 알까? 어떻게 보면 부모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런 글들 역시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교정을 보아 책으로 묶어내신 그 마음, 그 뜻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새겨보아야 할 것 같아. 이런 점을 잘 기억해둔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라면 우린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안승준의 말이 맞아. 이른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얽어매는’ 일은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까?
오래전 중학교 시절엔가 읽은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에 나오는 문장이 기억이 난다.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자유롭게 놓아주어라, 그것이 네게 돌아온다면 그것은 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네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다.’ 번역에도 잘 나타나지만,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놓은 이 시제의 변화가 참 멋지지? 무엇인가를, 특히 누군가를 ‘소유’해서 그것을, 그 사람을 얻을 수는 없지. 설령 그것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너 자신일지라도. 사람이란 원래 소유하거나 소유될 수 없는 존재이니까. 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운 존재이니까. 김어준의 말대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못한다면 온전한 인격체이자 개인으로서의 ‘나’의 발전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방식대로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마도 나의 정신적 독립은 그 사람에게 커다란 ‘배신’이겠지? 하지만 심리적, 경제적 이유기(離乳期)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나’가 될 수 있을까? 온전히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사람이 ‘나’가 될 수 있을까? 더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실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지? 이 말은 물론 불성실한 기만의 결과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고통을 주라는 말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길을 걷되 결국 타인이 자신의 길을 몰라 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말이겠지? 실은 오늘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자녀의 성장을 방해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승준의 부모님은 이런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장남의 말을 한 글자도 고치거나 빼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책을 묶어서 세상에 내놓으신 것이지. 그리고 장남의 결정을 처음에는 반대하고 마땅치 않아 하셨지만, 결국 부모님들은 장남의 결정을 믿어주고 지지해주시잖아. 그게 어디 부모님들의 입장에서 쉬웠겠니? 사람들은 말하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나는 늘 학교와 다른 곳에서 젊은 친구들만을 만나게 되어 있는 특별한 직업을 가져서 늘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곤 하지. 그리고 나는 세상의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지고야 마는 사랑, 자식을 떠나보내는 참답고 성숙한 사랑,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사랑을 하신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이겨버리는’ 그런 사랑을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안승준의 부모님은 그런 분들이 전혀 아니시고, 따라서 지금 말하기엔 적절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 부분은 한국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니 간단히만 적어볼게. 우린 우리사회의 오늘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지만, 실은 부모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 때로는 너무나도 속 좁고 안이하며 옹졸한, 또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비겁한, 그러면서도 남의 희생에 기초해서 삶을 영위하는 부모들마저도 때로는 전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가 생각보다는 너무 많아. 세상에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다면, 신문에 거의 매일 보도가 되는 아동 학대와 살해, 이 많은 고아원들은 다 왜 존재하는 걸까? 우리는 이상을 품되 현실을 직시해야 해. 그리고 실은 이런 부모들이 어디 따로 있다기보다는, 모든 부모가 인간이니 만치, 때로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이 ‘끔찍한 진실’을 우리 모두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을까? 그래, 속담을 따라 표현해보자면, 자식이 부모를 이기고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진다면, 자식과 부모 모두는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되지.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이기면?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그 자식은 ‘불행한 인간’이 되어버려. 더구나 ‘마마보이와 효도’가 때로 구분이 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이 자식은 불행한 인간, 병든 인간이 되어버리거든. 난 이런 학생들은 내가 처음 강의를 시작하던 1996년 이래로 수없이 보아왔고, 오늘도 이런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아. 이건 그저 비극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지. 그리고 안승준의 부모님은 결국 당신들의 장남이 내린 어렵고 힘든 길을 믿고 지지해주는 길을 택하셨어. 나도 오늘 거의 안승준의 나이에 이른 자식이 있으니, 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알아. 그래, 아마도 너무 늦어도 너무 늦은 말일 테지만, 최근에 안승준을 알게 된 한 사람으로서, 부모님과 가족분들의 고통 앞에는 깊은 위로를, 그리고 그분들의 용기 앞에는 존경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안승준은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1989년 11월 아버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제목은 ‘부모가 치는 울타리’로 되어 있어. 편지가 제목이 있었을 리는 없고 옮겨 쓰고 편집하신 부모님과 가족분들이 정한 제목일 거야. 이 글의 제목을 ‘부모가 치는 울타리’로 정하신 것 자체가 이 부모님들이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또 그러기 위해 가슴이 아프지만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그런 힘과 용기를 가진 분들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이 편지가 내가 너와 읽고 싶은 마지막 글이야. 이 글은 조금 길어. 하지만 읽다보면, 넌 이 세상 어디에도, 키케로도, 카토도, 공자도, 증자도, 맹자도, 부처도, 마르크스도, 니체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내게 네게 ‘철학한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일, 그러니까 스스로 그 근거를 묻고 또 대답하는 일, 한 마디로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그것이 당연한지, 당연하다면 어떤 근거에서 왜 당연한지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지? 나는 안승준이 아버님께 보낸 이 편지가 ‘효도’(孝道)란 무엇인가라는, 효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정의(定義)를 제출하고 있다고 생각해. 일단 한번 읽어보기를.
“우선 제게 새겨져 있는 아버님의 모습을 그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게 박혀 있는 가장 오래 된 아버님의 모습은―동시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아버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신기하게도, 제가 직접 보았거나 경험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도 좋아했다는 ‘구루마’에 걸터앉아 옆에 계시는 아버님의 검은 테 안경을 빼앗아 노는 것을 그대로 받아주시면서 같이 놀아주던 색 바랜 사진 속의 아버님입니다. 그때 제 나이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둘, 셋? 육십년 대 말이라 하더라도 아버님 삼십대 초반의 일, 벌써 이십 년이 훨씬 지난날의 일이겠군요. 한 가지,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은,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아버님의 모습이 이십 년 전 사진 속의 그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아버님의 모습을 들으시고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웃음을 띄우시게 되실는지 궁금하군요.
제게는 이 사실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넓은 가슴으로 저희들을 받아주시는 모습, 언제나 저희들 편에서 저희들의 행위를 인정해주시는 모습, 아버님 말씀대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커나가라’고 말씀하시던 그 모습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이지요. 그리고 저희들이 그러한 모습을 저희들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게끔 일률적으로 저희들을 키워주신 아버님 어머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지요.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쇠사슬에 얽매이지 않고, 한 사람의 의식 있는 독립된 존재로서 자유스럽게―그렇지요, 이 ‘자유스럽다’는 말보다 더 성스런 표현이 어디 있을까요―지금까지 지켜온 이 ‘훌륭한 부모님’에 관한 정의만은 그 어떠한 정의와도 바꿀 수 없는 확고한 것이며, 어머님 아버님의 영향이 저희들에게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영향을 결코 작게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과정과 결과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만 그치지만은 않습니다. 주어진, 또는 선택된 과정에 결과의 상당한 부분이 결정되니까요.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께서 저희를 키우신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바로 제가 말하는 과정의 대부분이며, 또 제가 지금까지 선택해온 순간순간의 결정들, 또 앞으로 제가 선택해 나가게 될 길들, 이 모든 것이 어머님 아버님의 삶의 모습과 다르다 하더라도, 어머님 아버님께서 저희를 키워 오신 그 과정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아버님의 말씀대로 아버님 어미님께서 저희를 무작정 마구 키우신 것도 아니며, 따라서 많은 울타리가―대부분 보이지 않는 울타리들이겠지요―있었던 것도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아버님 말씀대로 저희들의 생활이 이 울타리와 아무런 마찰 없이 지나왔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마도 어머님 아버님께서 저희들을 키우신 그 과정 탓이겠지요.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든 저희들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울타리들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저희들에게 있었으며, 저희들의 그런 주체의식이야말로 있을 수 있는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또 별 숨김없이 자유스럽게 대화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아무 말썽 부리지 않고, 모범생으로 ‘착하고 얌전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이지 않고 언제나 넓은 울타리를 쳐주신 그 과정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더더구나 제게는 이상하리만큼, 혼자 자라시고 외로워 보이시는 아버님의 모습과, 그러기에 더더구나 저희들에게 완벽한 아버님으로 남아 주시려는 아버님의 모습이 언제나―이, 아마도 아들로서의 자격을 감히 넘어선 어떤 연민의 느낌, 마음이 약해지는 저의 감정은 한 번도 저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습지요.―제 가슴 속 깊숙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었기에 저의 의식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저를 타협으로 이끌었고―이 부분은 언젠가 편지에 길게 썼던 기억이 나는군요―스스로 내린 많은 결정들이 이 울타리와의―제게는 이 울타리라 하는 것은 철학적 또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뜨거운, 인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보아 오셨던 어떤 종류의 방황도, 단순하게 말해 보자면, 이 보이지 않는 울타리와 부딪칠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의 방황이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만큼 제가 내렸던 학교 중단의 결정은 절실한 문제였고 벼랑 끝에서 서서 더 이상 홀로 서있을 힘조차 잃고 말았을 때 애달프게 부모님을 찾았던 호소의 결정이었으며, 제가 부딪치기를 두려워하는 그 울타리를 스스로 거두어 주십사고 하소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끝마치시면서 아버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이 폭넓은 울타리는 지켜달라는 명령을 하시더군요. 저희들이 보는 아버님 어머님의 모습과, 이상적인 부모에 대한 저의 정의,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께서 저희들을 키워 오신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리고 아버님의 사전에는 없는 그 명령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 명령을 따르는 길이 과연 저희들을 이렇게 키워 오신 그 정성에 보답하는 길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존중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이것 없이는 사회생활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존중한다는 것과 물리적인 또는 비물리적인 힘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르거나 자기 자신의 독립하여 키워온 의식을 타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금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명령을 하신다는 것은 지금까지 저희를 자율적이고 자유스럽고 창조적으로 키워 오신 그 과정, 아니 아버님의 철학 그 첫 번째 줄을 거꾸로 돌리는 행위이십니다. 이 교육―이 과정은 아버님의 세대뿐 아니라 저의 세대, 아니 훗날 먼 세대까지 이 안(安)씨 집의 한 가훈(家訓)으로 길게 길게 남아야만 하는 철학입니다. 절대로 아버님의 영향을 지금 이렇게 그치셔서는 아니 됩니다.
또 한 가지, ‘부모’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제 자신 그것도 아니지요. 그렇기에 그 어떤 ‘다른 사람’의 대열 위, 그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에 계시는 분들이 부모님입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사람들의 의견보다 먼저 듣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만, 아들딸로서 부모로부터 듣기를 원하는 의견이란 어떤 ‘학자’로서, 또는 ‘역사의 선각자’로서의 ‘학술적 견해’나 ‘역사의 진로에 대한 예언’은 아닙니다. 이 따위 의견은 책방에 수도 없이 쌓여 있는 책들, 매일 저녁이면 쓰레기가 되어 실려 나가는 신문들 속에서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으로서, 그 어떤 선진 학자나 선각자들도 해 줄 수 없는 의견을 저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들이란 반드시 어떠한 말로서 표현될 수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서로가, 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화의 소통이 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들에 대한 믿음.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믿음. 잘 생각해 보아 주십시오. 지금도 예전과 같이 이 믿음이 있으신지요? 제가 미국에 간다했을 때 훌쩍 보내주시던 그런 믿음 말입니다. [동생] 승택이가 인류학을 한다 했을 때 반대하지 않으시고 열심히 밀어주시던 그 믿음 말입니다. 어찌하여 승택이가 집에 없거나 학교 간다고만 하면 겁부터 더럭 내십니까? 승택이에 대한 믿음 없이 승택이가 주체적으로, 자기 소신대로, 창조적으로 생활이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지요. 이 믿음이란 것에 대하여. 자유롭지 않을 때 믿음은 사라집니다. ‘너희들의 현재의 생활과 장래’의 진로 등에 관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이나 리더쉽을 행사했어야 했을 것을 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품으시는 것은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믿음을 부수어 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자유스러움과 믿음―이는 종속 관계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부모ㆍ자식 관계는 절대로 종속관계가 되어서도 아니 되며 될 수도 없습니다. 종속관계가 되는 순간,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자격을 잃고 맙니다. 이것은 독재며, 파쇼며, 탄압이며, 비생태학적 관계입니다. 비굴하고 인공적인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시간이란 흘러갑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생성되어 가는 것이며 계속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지요. 어느 누구도 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는 없다고.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넓게 치고 계시다고 생각하시는 그 울타리를 거두셔야만 하십니다. 지금 당장 그것이 어려우시다면 그런 자신이 생기실 때까지 계속 넓혀 나가셔야만 합니다. 이 자신이 생기시고 울타리가 걷혀질 때 비로소 완전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서로 말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이 울타리를 넓혀가는 과정은 각자가 꾸준한 자기 성찰과 비판, 진지함과 창조적 마음가짐을 가져야 가능한 행위입니다. 어려우시겠지요. 괴롭고 힘드시고 서운하시고 고달프시겠지요. 머리가 좀 더 허예지시고 빠지실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하셔야 합니다. 자식들로서는 그 울타리를 헐어낼 힘이 없으며, 이 울타리를 거둬 주셔야만 저희들은 자유로워지고, 또 새로운 앞날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은 제 자신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도 제 자식을 위해 해주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힘든 작업 없이는 창조적 삶이란 불가능하며, ‘앞날’이란 가정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경험이란 60년, 70년대의(아니 40년, 50년대도 포함해야겠지요) 경험입니다. 중요하고 반드시 저희들이 귀담아 들어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되풀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버님 어머님이 살아오신 길이란 저희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거둬주셔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리며, 그 새로운 세계가 열려오게끔 하는 데에 어쩌면 아버님 어머님으로서의 역할의 바탕이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원만하고, 행복하고, 이상적인 부모ㆍ자녀관계는 이 넓어져가는 울타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부모가 치는 울타리」, 246~251쪽)
참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부모님의 말씀은 내가 귀담아 듣고 존중해야 하지만, 부모님이 걸어오신 길은 존경스러운 길이고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은 아니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이 당연한 한 마디. ‘권력의 계보학자’로 불리는 미셸 푸코를 전공한 나는 부모 자식 관계는 물론 사랑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실은 동시에 권력 관계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푸코의 말대로, 사실 권력 관계를 동시에 자신 안에 품지 않은 관계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라캉의 말대로, 내가 나의 재정적 능력으로,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철회를 무기로, 타인의 삶과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이 권력 관계가 아닐까? 최근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정말 감명 깊게 다시 읽었어. 헤겔이 데카르트를 ‘근대성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헤겔은 데카르트를 ‘지난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이 시대의 첫 번째 인물’이라고 본 것이지. 헤겔이 데카르트를 ‘근대성의 창시자’로 본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데카르트가 자기 삶의 권위와 그것의 근거를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야. 헤겔이 본 데카르트의 근대성은 다름 아닌 데카르트의 ‘주체성’이야. 데카르트 이전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 삶과 생각의 근거를 자신의 바깥에서 찾아. 하느님, 선생님, 부모님, 어른들의 말씀, 내가 읽은 책, 성경책, 신부님, 이른바 관습, 지혜, 속담 등등에서.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에게서 자신의 근거를 찾아. ‘생각하는 나’가 바로 그것이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데카르트는 철학을 하기 전에도 하느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철학을 그렇게 정교하게 그렇게 오래하고도 결론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철학은 결국 가진 자, 배운 자들의 한가한 말장난이 아닌가? 정말 옳은 말이지?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데카르트의 철학을 암기해놓고는 나는 데카르트를 이해했다고 떠드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철학자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거든. 가령, 이제까지 어머니의 말씀을 어머니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듣고 따르던 자식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제 그 자식이 스스로 생각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렇게 자식이 스스로 판단한 결과가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자식은 생각을 괜히 한 것이고, 말장난을 한 것일까? 자식이 스스로 판단한 연후에도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다면, 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이전과 같은 결과를 보여주니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정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겠지? 이 자식은 이번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겠지. 생각해 봐.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이 옳은 것이라고 판단을 했는데, 그것이 어머니의 말씀과 결론이 같다고 해서, 어머니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아마도 다음번에는 이 스스로 판단하는 자식의 판단이 어머니의 말씀과 다를 수 있겠지? 그때 자식은 이제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만의 길을 나서겠지? 아니, 이미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던 그 첫 번째 순간에도 이미 자식은 자신만의 길을 떠난 것이었겠지? 그리고 참다운 부모라면 자식을 나의 소유,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아직 어리석고 어린 존재로 보는 그런 생각을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고, 자식을 늘 나와 대등한 한 인격체, 우리가 아닌 ‘남’이자 ‘타인’,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어야 하겠지? 부모와 스승이 자식과 제자에게 물려주고 가르쳐주어야 할 것은 어떤 재산이 아니라 바로 부모와 스승 없이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일 테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안승준은 학교를 그만두고 어떤 길을 가려 했을까?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안승준은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막내 여동생(내게 책을 선물해주신 바로 그분)에게 편지로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 1989년 5월의 편지야.
“엄마 편지에 함께 보내온 네 시 계속 읽어본다. 그런데 웬 일일까? 절실한 네 마음에 비해 네 목소리가 오빠 가슴에는 전해오질 않는구나. 그 네 마음, 이제부터는 네 목소리로 적어보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모든 형식이라든가 상식에서도 벗어나서, 그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소리가 나오는 그대로 네 모습 그대로 말이야. 그 네 목소리를 믿지 않으면 누구 목소리를 믿겠니. 그 네 목소리를 믿고 따를 때에 비로소 남의 목소리도 들려오는 법이다. 남의 목소리가 우선 남의 목소리로 들려오지 않는다면, 그 목소리의 어느 일부분도 결코 네 목소리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열쇠는 네 자신 얼마나 네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따라라. 뉴욕에서 오빠가.”(「여동생에게 띄우는 편지. 환경문제에의 본격적 접근」, 238쪽)
정말 누군가가 어린 시절의 내게 이런 편지를 써 주었다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다 바뀌었을 것만 같은 그런 글이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안승준은 자신의 꿈을 적어내려 간 것 같아.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관련될 거라는 걸 벌써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자. 아까 읽었던 1989년 1월 28일 스물셋의 안승준이 갓 대학을 입학한 남동생에게 보내는 그 편지 안에 들어있어.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시겠지, 내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나갈 건지 하는 거. 그럼 이번엔 미리 내가 먼저 내 생각을 구체적으로 한번 솔직하게 밝혀봐야겠다. 물론 요 며칠 사이에 구체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이고,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는지도 모르지만, 꽃의 아름다움이란 봉우리진 것이 활짝 핀 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야. 그런 마음으로 들어라.
우선 이 질문의 고리를 풀어나가는 열쇠는 정열이라 생각한다. 얼마만큼 내 자신을 정열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야. 그런데 이 정열이라는 고리는 사회혁명에 걸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회혁명에 어떻게 참가할 수 있느냐에 따라 나에게 어떤 종류의 정열이 생기는가가 상당 부분 정해진다는 거지. 허나, 나는 이제 ‘얼마나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회혁명에 참가하는가?’의 문제는 더 이상 정열의 원천으로 결부시키지 않기로 했다. 적극적이라는 것은 그 목적이 시간의 단축에 있는데, 개인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하는가는 사회혁명의 시간 단축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거지. 적극적으로 사회혁명에 뛰어든 결과가 오히려 수십 년씩 그 시기를 늦출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사회혁명이란 결코 한 사람, 한 분야 또는 한 계급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문화혁명 없이 사회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문화혁명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사회혁명이란 시간이 걸려야만 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모택동의 실수도 바로 문화혁명과 사회혁명의 뒤바뀐 관계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길거리에 나가 데모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문화를 바꾸어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따라서 나는 문화혁명과 사회혁명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다음에 생각되는 것은 방법론의 결정이다. 그 방법론에 어떠한 질적 차이라든가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혁명에 참가하고 노력은 하되 그 노력이 필연적으로 어떤 혁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아니라는 자각이다. 따라서 자기가 선택한 방법을 행하며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에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되는 중요한 요소가 있으며, 자기 능력 혹은 재능에 따라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진다는 것이야. 따라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내가 선택하는 길이 과연 나 자신이 즐기면서 좋아서(따라서 정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과, 그 일을 하면서 내게 있는 재능이―상대적으로 뛰어난 또는 특수한―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가 하는 거야.
이 질문에 대해 지금 내 눈 앞에 떠오르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환경 문제라는 고리를 잡고 그 문제 해결에 전적으로 매달리며 연구소를 통한 사회활동을 하거나, 교육을 통한 어떤 국제적인 조직망을 구성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뛰는 것과(따라서 이것은 정치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영화를 통해 문화를 바꾸어보겠다는 거야. 앞의 선택은 이미 내 입을 통해 많이 이야기된 거고 또 너도 아버지께서도 내 생각에 많이 접해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네게는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에 대해서 좀 얘기해 줄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사실 이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시작은 환경 문제라는 고리다. 내가 환경문제를 공부한 후 현장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도, 그 목적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전 방지가 우선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의 앞과 뒤를 길게 두루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과 문제의 심각성을 어떻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설득시키느냐하고 생각한다. [...]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했을 때에는 설득의 대상자가 있게 마련이다. 곧 설득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말하지. 요컨대 인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쉽게, 부담감 적게 접근하여 갈 수 있는 장르가 영화라는 거지. 이것은 책보다도 더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영화의 단점이기도 한데, 이 단점을 역으로 이용하면 더 강인한 힘으로 설득이 가능해진다. 선택해서 책을 읽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이미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들 아니면(이들은 내 영역 밖의 사람들이다. 때려죽이는 것이 내 직업이 될 수는 없으니까), 이미 충분히 인식이 되어 있어서 설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무분별한 사람들, 순진하기 때문에 때 묻지 않은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 무관심한 사람들, 무감각한 사람들, 머리는 꽉 차있는데 가슴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나의 설득 대상자들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영화만이 보일 수 있는 강력한 현실감이다. 눈을 통한 대화, 현실의 물질세계를 통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을 그려내는데 더욱 더 강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강한 감동이나 절실함이 표출될 수 있는 거지. [...] 그렇다면 이 일을 하며 내가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지.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천성적으로 남과 함께 있는 것, 남과 함께 하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영화라는 것이 결코 감독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종합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공동체의식이란 것이 필요한데, 우선 나는 그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두 번째로,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수많은 예술작품―특히 문학작품―과 접해야 하는데, 이것은 지금 내가 가장 즐기고 있는 일인 만큼 말할 여지가 없겠지. 시간을 내서 책을 읽어야 하고 그것에 관해 생각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도 해봐야 하고, 그리고 직접 영상화시키면서 글로 써야 하고―이건 내가 돈 주고라고 하고 싶은 일인데, 나의 직업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 보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커다란 헌책방 하나 차려놓고 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면 어떨까?). 세 번째로, 나의 방랑기가 헤매고 돌아다녀야만 하는 영화인의 서러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아(단지 하나, 내 마누라는 고생을 좀 해야 하겠는데, 까짓것 같이 데리고 다니지 뭐, 얼마나 좋아).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이면,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있겠지. 정치에 밥줄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눈치 볼 필요 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활동을 할 수 있을 거야. 환경문제를 위해서도 역시 영화인으로서는 얼마든지 뛰어다닐 수가 있을 거야. 마치 하인리히 뵐이나 귄터 그라스 혹은 미카엘 엔데 등이 녹색당의 창당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처럼 말이야. 물론 내가 말하는 정치는 최무×식 얼굴마담 정치는 아냐.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영화제작 공부를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소리를 하면 할머니께서 꼭 한 말씀 하실 것 같다. ‘그래 고작 생각해냈다는 것이 딴따라를 하겠다는 거냐!’”(「철학공부에 대한 회의(2).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 다시 진학할 결심을 하면서」, 209~215쪽)
어때, 안승준의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또 안승준의 영화를 상상하게 만드는 글이지? 이런 젊은이, 너무 멋지고 아름답지 않니? 난 처음에 안승준의 글을 읽고 이런 훌륭한 멋진 친구가 이렇게 죽다니, 정말 너무 안타깝고 아쉽고 허무하다, 이런 사람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멋진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의 꿈대로 생태운동가가 되어 혹은 영화감독이 되어 또 혹은 인류학자가 되어 우리나라와 세계와 인류에 커다란 기여를 했을 텐데,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그리고 급기야는 정말 하늘이 세상을 버렸다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 하지만,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란 걸 곧 깨달았어.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자신의 오늘을 ‘정말 사는 것처럼’ 다 살고 간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를 아쉬워하며 오늘 그의 부재를 슬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 생각된다. 안승준은 멋지게 살다가 그의 모든 것을 펼치고 갔어. 안승준은 안타깝거나 아쉬워해야 할 회고와 회한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 여기 이 글을 읽는 너와 나의 마음속에 같이 살아 있는 거야. 이 책은 적어도 내가 읽은 모든 책들, 특히 젊은이가 쓴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냉정하고 합리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따뜻한 책, 가장 지적이면서도 가장 뜨거운 책이야. 내가 안승준에게 가장 감탄하는 부분은 그가 어떤 황당한 온정주의나 사적인 입신양명에 빠지지도, 황망한 도덕주의나 성실(誠實)주의 담론에 함몰되지도 않고, 자신의 몸과 머리로 느끼고 판단하면서 노력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과 삶을 분리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일치시켜고자 노력한 그의 ‘철학적 태도’야. 고매한 도덕주의에도 맹목적 실천주의에도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 공부, 학문을 자신의 삶, 생활, 사회와 일치시키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변형’시켜나간 그런 참다운 철학적 태도 말이야. 맞아, 안승준의 삶은 우리가 안타까워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야. 우리의 관념 속에나 존재하는 ‘있어야 했던 그러나 부재하는’ 미래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안승준의 삶 그 자체를 충만한 것, 완성된 것, 다 펼쳐진 것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야. 중국철학을 정리하는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라는 김용옥의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안승준의 말대로, ‘꽃의 아름다움이란 봉우리진 것이 활짝 핀 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 아닐까?
처음에는 간단한 편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글이 이렇게 길어져 버렸네. 실은 나도 이렇게 긴 편지는 처음인데, 긴 여행이니 즐거운 일도 곤란한 일도 생길 텐데 어느 날 조용한 자기만의 시간과 여유가 나면 편안한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보라고 적기 시작한 것인데 내가 읽으면서 워낙 즐겁게 감정이입을 하며 읽은 책이라 애정이 넘쳤던 모양이다. 모쪼록 남은 여행 건강하게 즐겁게 잘 다녀오고, 서울에서 보자.
2015년 8월 11일
일산 노루목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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