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3.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통치』 - 소개의 글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통치』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잇는 책이다. 니체는 무엇을 말했는가? 니체는 중세의 하느님에 대한 죄(부채)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에 대한 죄(부채)가 되었다가, 오늘날 은행에 대한 부채(죄)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중세의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로 태어나서 살다가 ‘어리석게도’ 죄를 짓는다. 죄를 지었으니 갚아야 한다. 그것이 벌이다. 그는 생전 지상의 온갖 불행과 사후의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근대의 인간은 사회의 은혜로 태어나 살다가 ‘악하게도’ 죄를 짓는다. 모두가 다 같이 잘 살고자 만들어놓은 사회의 규칙을 어떤 개인이 어기는 죄를 범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기만 잘 살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니 악한 것이다. 따라서 악한 인간은 공공의 적이다. 공공의 적은 사회 외부의 적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자이다. 우리가 사회 외부의 적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듯이 우리는 사회 내부의 적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사회 내부의 적인 악한 개인들은 모두가 합의한 사회계약의 위반이라는 가장 큰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감옥에 가게 되거나 또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중세의 신과 근대의 사회계약을 모두 부정한 니체 이후, 오늘날 사람들이 죄(부채)를 짓는 대상, 따라서 죄(부채)를 갚아야 할 은행이다. 오늘날 죄를 지은 자들, 곧 부채를 가진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자, 악한 인간이자, 그 무엇보다도 ‘한심한’ 인간이다. 한심한 인간인 오늘의 개인 곧 채무자는 은행 곧 채권자에 대해 자신의 죗값, 곧 빚을 갚아야 하는 한심한 인간이다. 그가 한심한 이유는 오늘날 현대세계의 은행이 가정하는 인간, 곧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달리 말해 스스로와 타인, 그리고 세계를 관리하는 인간, 합리적 인간이 되지 못한 죄를 지었다. 부채를 진 자, 곧 채무자는 경제적 인간, 곧 관리하는 인간이자 합리적 인간이어야만 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이다.
 
이제 빚을 진 자에게는 온갖 종류의 비난이 쏟아진다. 자기 돈, 자기 씀씀이도 관리하지 못한 자, 자기 관리도 못하면서 그저 자기 욕망의 즉물적 충족에 눈이 먼 자, 욕망의 노예, 아직 정신 못 차린 자, 현실을 모르는 자, 따라서 그는 어리석은 자이자, 부도덕한 자, 한 마디로, 여러 모로 한심한 놈이다.


그러나 니체를 따라 이렇게 생각해보자. 아니, 이런 질문을 스스로, 그러니까 나의 힘으로, 던져보자. 나는 신의 자식인가, 나를 신이 창조한 것이 맞나? 신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제 계급의 장치라면? 나는 나를 착취하는 자들의 신을 믿고 그들에 의해 원죄를 지었다고 심판받고 결국은 그들의 신 앞에서 벌까지 받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원죄를 짓긴 지었나? 나는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하나? 아니 하느님이란 게 확실히 있긴 있나? 이렇게 말하는 자는 사회의 평범한 정상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근대의 사회계약론에서도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을 보는 고3처럼 질문을 던져 보자. 내가 계약을 한 적이 있나? 그 계약은 누가 했나? 내가 북한에 태어났으면 나는 그 사회의 계약을 믿고 준수하고 따라야만 하는가? 질문을 던지면 왜 안 되나? 그러나 여기는 남한이니 그렇게 세뇌된 조작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합의한 것이므로 경우가 다른가? 그런데, 그건 누가 정했나?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정해진 걸까? 실은 사회계약이 신 없는 사회의 자기 정당화 장치가 아닐까? 진실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의 독점, 자연과 당연에 대한 해석의 독점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이지도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이미 정해져 내게 부과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하여 나와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으면 민주주의자가 아닐까?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와 사랑에 대하여, 자유와 정의와 평등에 대하여, 너는 나와 다른 정의를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오늘날 은행에 대하여 부채를 진 자들은 어떨까? 상환능력이 한 달에 500만원인 사람에게 1000만원의 한도를 갖는 카드를 발급해주고 1년 후 결국 이 사람이 카드 값을 내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그가 경제적 인간, 합리적 인간이 못되어서만 그런 것일까? 또는 이 사람이 신용불량자가 되기 직전에 장기 대출, 카드론 대출을 받아 일단 위기를 넘기고 향후 상당기간 동안, 오로지, 엄청난 이자가 붙는 이 카드론 대출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온전히 이 사람만의 책임일까? 또는, 그 결과를 정확히 모른 채, 이 사람이 자기 아파트를 사기 위해, 또는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다니기 위해, 졸업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받아 졸업을 하고 10년 동안 그 빚을 갚는 것은 남의 돈을 썼으니 갚아야 하는 것, 그러니까 당연한 일일까? 혹은 이 똑 같은 사람이 부모님과 자식이 아프고 정말 급한 돈이 당장 필요하여 다급한 심정, 그러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아 평생을 그늘에서 살며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조폭들에게 쫓기며 산다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대학을 간 이 사람, ‘자기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미리미리 충분한 저축을 못해 놓은 이 사람은 다만 어리석고 한심한 판단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장 버전이다. 신자유주의는 삶의 일부인 경제적 부분의 가치를 삶의 여타 영역 모두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 기준으로 격상시킨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오늘 네가 경제적 안정을 갖지 못했다면, 너는 비합리적인 삶을 살아왔다. 또는 너는 비합리적 인간이다. 경제적 합리성이 없다는 것은 현실 감각이 없다는 것이고, 현실감각의 결여는 이 경우 경제적 합리성, 나아가 합리성 자체의 결여와 같은 말이다. 너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너는 할 말이 없다. 네 죄는 네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므로 온전히 네가 갚아야 한다. 아무도 너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네가 한 일은 온전히 네가 한 일이다. 소비도 네가 한 것이고, 대출도 네가 받은 것이다. 너는 자유고 네가 한 모든 일은 너의 책임이다. 그러니 네게 일어난 모든 일, 너의 현실은 온전히 오롯이 너의 책임, 너만의 책임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인가? 조금 야박하기는 하지만, 그럼 자기가 자기 소비 규모를 관리를 못하는 자, 자기 수입 이상의 돈을 쓴 자, 갚을 수 있는 능력 이상의 돈을 먼저 빌려 써놓고 갚지 못하는 자를 어쩌란 말인가? 그것이 신의 책임인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은행의 책임인가? 결국 당사자의 책임이 아닌가? 이러한 합리적 질문에 대해 라자랏또는 이렇게 말한다. 좋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신용불량자가 한 사회의 1% 또는 5%가 아니라, 20%, 30%, 50%, 나아가 대다수라면, 그래도 이것이 오직 개인의 문제인가? 가난한 가족은 일을 안 하고 놀기만 해서 가난한가? 가난한 나라는 일을 열심히 안 하고 놀아서 못 사는가? 이미 수십,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쌓여 온 사회와 국가 내부의, 또는 국가들 사이의 구조적 문제는 아닌가?
 
은행이 가장 좋아하는 고객은 돈을 빌리지 않는 고객이 아니라, 돈을 많이 빌리고 (원금은 물론이고, 특히, 이자를, 이자까지) 착실히 갚는 고객이다. 그러나 실은 갚지 못하더라도 좋다. 가령 단기 대출, 현금 서비스를 갚지 못하는 고객은 돈을 갚지 않을 수 없으므로, 다른 데서 체면을 구겨가며 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카드에서 고리의 장기대출, 카드론 대출을 받아 단기 대출 현금서비스를 갚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은행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국가 간의 경우에도 마차가지다. 독일 은행에 대한 빚을 갚아주기 위해 스페인과 그리스가 국가부도 사태를 맞는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국민들은 독일 국민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도, 그들이 버는 돈은 자신들의 복지가 아니라 독일의 은행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당연한가? 그런데,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왜 열심히 일하는 자가 덜 일하는 자보다 여유롭고 풍족하게 사는가? 어떻게 해서 덜 일하는 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잘 사는 집안, 잘사는 나라에 태어난 자, 한 마디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가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자, 더 열심히 일하는 자보다 더 여유롭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가? 대안도 없으면서 이런 책을 쓰는 저자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이 세계의 변화 불가능한 ‘필연적’ 운행법칙, 또는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본의 운동법칙인가?
 
그렇다. 정말 ‘대안’은 없는 것일까? 원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없는 것일까?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통치』는 그 대안이 ‘원래’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직’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이 책은 그 대안을 사유하려는 책, 세계의 지금과는 다른 운동법칙을 사유하려는 책,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未-來)를 사유하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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