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
[79]목적론은 자연이론에 속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만 하는가
모든 학문은 백과 안에서 이론적 부분이나 실천적 부분으로 나누어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론적 부분이 분류된다면 자연이론과신이론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그렇다면 “목적론에는 어떤 위치가 마땅한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둘 중에 하나에 속해야 하며, 어떤 학문도
다른 쪽으로의 이행로에 결코 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목적론이 신학에 매우 중요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할지라도, 목적론이
신학에 그것의 일부로서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론은
자연산출물들과 그것들의 원인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목적론이 자연 밖에 또 자연 위에
위치한 근거를 후자(자연 산출물들의 원인)라고 지칭한다 해도, 목적론은 이런 일을 규정적 판단력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자연을 고찰하는 반성적 판단력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다.(pp.483-484)
그러나 목적론은 자연과학에 속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학은
자연작용들에 대해 객관적 근거들을 제시하기 위해서, 한낱 반성적 원리들이 아니라, 규정적 원리들이 필요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연을 목적들의 상호관계에
따라 고찰함으로써 자연의 이론을 위해서나마 또는 자연의 현상들의 작용원인들에 의한 기계적 설명을 위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484)
그러므로 학문으로서 목적론은 결코 교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판 속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도 한 특수한 인지능력, 곧
판단력의 비판 속에 속하는 것이다. (p.484)
[80] 사물을 자연목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기계성의 원리의 목적론적 원리 아래로의 필연적 종속에
대하여
자연산물들을 설명하기 위해 개연성이 있을 수 있는 데까지 자연 기계성을 뒤쫓는 시도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소득 있는 일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직관 외에 또 다른 직관이 필요하고, 또
그로부터 특수한 법칙들에 따르는 현상들의 기계성에 대한 근거까지도 제시될 수 있는 자연의 예지적 기체에 대한 규정된 인식이 요구될 터인데, 이런 것은 모두 우리의 인식을 전적으로 넘어서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연구가의 노고가 순전한 낭비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목적들로서 그것들의 개념이 기초되어 있는 사물들을 판정함에 있어서 언제나 어떤 근원적인 유기조직을 기초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pp.485-486)
비교 해부학에 의거해 유기적은 자연물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거기에
하나의 체계 비슷한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산출원리에 따라서 살펴보는 일은 상찬할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갓된 판정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무기력하게 이 분야에서 자연통찰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유의 동물들의 어떤 공통의 도식에서의 일치성은 이 [동물들의] 경우에도 자연의 기계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
흄은 그러한 모든 자연목적에 대하여 목적론적 판정의 원리, 다시 말해 하나의 건축술적 지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안에 목적들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사물의 최초의 산출에 대한 물음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난점은 이 산물 안에서 서로 외적인 다양한 것을 결합하는 근거의 통일에 대한 되물음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p.489)
그래서
그 최상의 근거에 대해 하나의 지성을 용인하지 않고서 물질의 객관적-합목적적인 형식들을 위해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최상의 근거를 찾는 이들은, 순전히 모든 합목적성의 저 조건, 즉 근거의 통일[하나임]을 이끌어내기 위해, 세계 전체를 기꺼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의
실체로 만들거나(범신론), 아니면 유일한 단순 실체에 내속하는 수많은 규정들을 총괄로 만들기(스피노자주의)에 이른다. 여기서
그들은 목적관계에서의 통일을 단순 실체라는 한낱 존재론적인 개념에 의거해 충족시키고는 있지만, 또 다른
조건, 곧 이 단순 실체와 그것의 결과인 목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그러니까 전체 물음에는 전혀 대답하고
있지 않다. (p.490)
[81] 자연목적을 자연산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기계성이 목적론적 원리에 동반함에 대하여
앞에
항에 따르면 자연의 기계성이 그것만으로는 유기적 존재자의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에 근원적으로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유기적 존재자의 순전한 목적론적 근거는, 만약 자연산물의 기계성이 그에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 유기적 존재자를
동시에 자연의 산물로 고찰하고 판정하기에 족하지 않다. 자연산물의 기계성은 이를 테면 의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의 도구로서, 그럼에도 이러한 원인의 목적들에 자연은 그 기계적 법칙들에 있어서 종속해 있는 것이다. 보편적 합법칙성 중에 있는 자연과 이 자연의 특수한 형식에 제한하는 이념의 합일 가능성은 자연의 초감상적 기체
안에 놓여 있으므로 우리는 현상만을 알 뿐, 규정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연의 산물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또한 기계적 법칙들에 따라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는 건, 이런 종류의 인과성이 없다면 유기적 존재자들은 자연의 목적들이기는 하지만 자연이 산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p.491)
사람들은
기회원인설[성]이나 예정설[성]을 그러한 존재자들의 내적으로
합목적적인 형식의 기초로 놓을 수 있다. 전자(기회원인설)에 따르면 최상의 세계원인은 교접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기에서 섞이게 되는 물질에 직접적으로 유기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겠다. 후자(예정설)에 따르면 최상의 세계원인은 이러한 자기의 지혜의 시초 산물들 안에 단지 소질들만 집어넣었겠고, 이 소질에 의해 유기적 존재자는 자기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고, 종은
자기 자신을 부단히 보전하며, 또한 개체들의 쇠퇴는 그것들의 파괴에서 작동한 자연본성에 의해 동시에
연속적으로 보충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유기적 존재자들의 만들어냄의 기회원인설을 받아들인다면, 이 경우에 모든 자연은 전적으로 상실될 것이고, 그와 함께 그러한
종류의 산물들의 가능성에 관해 판단하는 일체의 이성사용도 상실될 것이다. (p.492)
예정설의 경우 다시 두 가지 방식을
취할 수 있는데 ①개체적 전성[前成] 체계 또는 개전설[開展說]이라고 일컬으며, ② 생산물을 낳는 체계는 후성[後成]체계 또는 유적[類的]전성 체계라고 부른다.
① 개전설의 옹호자들은
개개 개체가 직접적으로 창조자의 손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자연의 형성하는 힘에서 제외 시킨다.[…] 그들은
전성에 대해 지지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때그때의 창조에 의해, 세계의 시초에서 형성된 배아가 발달될 때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의 파괴하는 힘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보존되기 위해 요구되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조치들이 절약되지 않고, 또한 언제인가 발달될 터인 무수하게
많은 그러한 미리 형성된 존재자들과 그와 함께 똑같은 수만큼의 창조들도 그로써 불필요하고 무목적적인 것이 되지 않는 양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에서 일체의 자연설명이 없어도 되는 온전한 초물리학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
무엇인가를 자연에 맡기고자 했다. (p.493)
② 이와 반대로 후성
변호자들은 전자에 비해 그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경험근거들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은 큰 장점을 알지 못하다 할지라도, 이성은 이미 애초부터 그의 설명방식에 특별한 선호를 가지고 끌려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설명방식은 자연을,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목적들의 인과성에 따라서만
가능한 것으로 표상할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하여, (적어도 번식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그리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되도록
최소한으로 써서 제일의 시초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일체의 것을 자연에 맡기기 때문이다. (p.494)
후성설에 관해서는 궁정고문관 블루맨바흐(J F
Blumenbach, 1752-1840)가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이런 형성들의 모든
물리적 설명방식을 유기 물질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몫에 대한 물질의 능력은 그에 의해
유기체 안에 있는 하나의 형성충동[추동]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p.495)
[82] 유기적 존재자들의 외적인 관계들에서 목적론적 체계에 대하여
나는
외적 합목적성을 자연의 한 산물이 다른 사물에 대해 목적에 대해 수단으로 쓰이는 데서의 그런 합목적이라고 이해한다. […] 그러나 이런 존재자들은 항상 유기적 존재자, 다시 말해 자연목적들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저 사물들도 수단으로 판정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p.495-496)
외적
합목적성은 내적 합목적성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내적 합목적성은 어떤 대상의 현실성 자신이
목적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그 대상의 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 유기조직의 내적 합목적성과 연관되어
있는 단 하나의 외적합목적성이 있는데 그러한 유기적 존재자가 어떤 종점을 위해 실존했어야만 하는가를 물을 필요는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적 합목적성은 수단의 목적에 대한 외적 관계에 쓰인다.
이것이 자기 종의 번식을 위한 상호관계 맺음에서의 양성의 유기조직이다. […] 여기서 “왜 그러한 한 쌍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에 대해 물을 수
있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비록 유기적 전체를 단 하나의 몸 안에 형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한 쌍이 최초로 하나의 유기화하는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pp.496-497)
무릇
어떤 사물이 무엇을 위해 현존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면, 그 대답은 두 가지다.
① 하나는 그 사물의 현존재와 그 사물의 산출은 의도들에 따라 작용하는 원인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이 경우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들이 자연의 기계성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이해한다. ② 또 하나의 대답은, 한 사물의 현존재를 위한 어떤 의도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상을 유기적 사물이라는 개념과 분리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체 자연을 면밀하게 점검해보면, 우리는 자연의 한에서
자연 안에는 창조의 궁극목적이라는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다.
(p.497)
만약
사람들이 지상의 피조물들의 다양한 유에서의, 그리고 합목적적으로 구성된 존재자들인 이것들의 외적인 상호
관계에서의 객관적인 합목적성을 원리로 삼는다면, 이런 관계에서 다시금 모종의 유기조직과 목적인들에 따르는
모든 자연계의 한 체계를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알맞은 일이다. 특히,
그러한 체계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인간 이외의 어디에도 둘 수 없는, 자연의 최종 목적과 관련해볼 때 그러하다. (p.499)
그러나
위에서 유기적 자연존재자들의 기계적 산출방식과 목적론적 산출방식의 원리들의 이율배반을 해결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았다. 즉 이 원리들은 자기의 특수한 법칙들에 따라 형성하는 자연에 대해서는 한낱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들일 따름이다. 곧 이 원리들은 자연존재자들의 기원을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의 성질에 따라서 이런 종류의 존재자들에 있어서는 그 기원을 목적인들에 따르지 않고서 달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할 따름이다.(p.501)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우리 밖의 또한 우리 안의) 자연의 초감각적 원리에서 자연의 가능성을 표상하는 이 두 방식의 합일 가능성이 놓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목적인들에 따르는 표상방식은 단지 우리 이성사용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기에 말이다. 이성이 대상들을 한낱 현상들로 판정하여 알고자 하지 않고, 이 현상들
그 자신을 현상들의 원리들과 함께 초감성적인 기체와 관련 지을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할 때는 그러하다. 법칙들은 (이성도 가지고 있는 초가성적인) 목적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표상될 수가 없는 것이다. (p.502)
[83] 하나의 목적론적 체계인 자연의 최종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앞 조항에서, 우리가 인간을 모두 유기적 존재자들과 같이 한낱 자연목적으로뿐만 아니라, 이성의 원칙들에 따르면, 여기 지상에서는 그것과 관계해서 여타 모든
자연사물들이 목적들의 체계를 이루는, 자연의 최종 목적으로, 비록 규정적 판단력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반성적 판단력에 대해서는, 판정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연결 할 때에 자연에 의해 충족 될 수 있는 유의 목적과 인간이 자연을 사용할
수 있는 목적의 유능성과 숙련성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자연의 목적은 ① 인간의
행복이고 후자의 목적은 ② 인간의 문화[교화]일 것이다.(p.502)
①
행복 개념은 인간이 가령 자기의 본능들로부터 추상해내고, 그래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동물성에서 가져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 상태를 순전히 경험적인 조건들 아래서 이념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한 상태의 순전한 이념이다. […] 인간이 행복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인간 자신의 최종의 자연목적인 것은 인간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본성은 소유와 향유에 있어서 어디선가 멈추어 충족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 더욱이, 인간 안에 있는 자연소질의 부조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어낸 병폐에 빠지게 하고, 자신과
동류의 다른 인간들을 지배의 압박과 전쟁의 만행 등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그 자신 힘이 있는 한 자신과
같은 인류를 파괴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pp.502-503)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자연의 저 최종 목적을 인간의 어느 점에 놓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궁극목적이기 위해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에 대한 준비를 시키기 위해 수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서, 그것을 오로지 자연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사물들에 그 가능성이 의거하고 있는 다른 모든 목적들과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상에서의
행복은 후자 (오로지 자연에게만 기댈 할 수 있는 사물들에 그 가능성이 의거하고 있는 목적들) 같은 종류의 것으로, 그것은 자연에 의해 인간의 안팎에서 가능한
모든 목적들의 총괄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상에서 인간의 모든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실존에 궁극목적을 두고 그에 부합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인간의 모든 목적들 중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형식적인 주관적 조건, 곧 유능성의 조건뿐이다. 유능성이란 도대체가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자연을 자기의 자유로운 목적들 일반의 준칙들에 알맞게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pp.504-505)
②
이성적인 존재자의 임의적인 목적들 일반에 대한 유능성을 산출하는 것이 문화이다. 그러므로 문화만이 사람들이 인류를 고려하여 자연에 부가할 이유를 갖는 최종 목적일 수 있다. […] 그러나 개개 문화가 이런 최종 목적이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숙련성의 문화[교화]는 물론 목적들 일반을 촉진하는 유능성의 가장 귀중한 주관적 조건이다.
(p.505)
숙련성은
인류에게 있어서 인간 사이의 불평등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마도 발전될 수 없을 것이다. […] 문화가
진보해가면서 병폐들이 양쪽에서 똑같이 강력하게 자란다. 즉 한쪽에서는 외부의 폭력이, 다른 쪽에서 똑같이 강력하게 자란다. 즉 한쪽에서는 외부의 폭력이, 다른 쪽에서는 내부의 불만이 자란다. 그러나 비참한 재난도 인류의
자연적 소질들의 발전과 결합되어 있고, 자연 자신의 목적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닐지라도, 이 재난에서 달성된다. 오로지
그 아래서만 자연이 이 자기의 궁극의도를 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속의 체제인바, 서로
간에 상충하는 자유의 붕괴에 대해서는 시민사회라고 일컫는 전체로서의
합법적 권력이 대치된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 안에서만 자연소질들의
최대의 발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506) 그리고 아무리 인간이 영리하고 지혜롭다 해도, 시민사회를 위해서 국가의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한 체계가 없을 경우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연소질들은
경향성들에 대해 전적으로 합목적적이지만, 이 경향성들은 인간성들은 인간성의 발전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이 둘째 필요요서와 관련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자연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고차의
목적들을 수용하도록 하는 수련을 위한 자연의 합목적적 노력이 드러난다. 그것이 이상화에 이르기까지의
취미의 세련화, 그리고 허영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학문상의 사치가 그로 인해 산출된 만족할 줄 모르는
자수의 경향성들을 우리 위에 쏟아 내는 해악의 과중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84] 세계의 현존재. 다시 말해 창조 자신의 궁극목적에
대하여
궁극목적이란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는 그런 목적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하여 자연의 순전한 기계성이 설명근거로 받아 들여질 때 무엇을 위하여 사물들이 세계 안에 현존하는가를 사람들은 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그러한 관념론적 체계에 따라 단지 사물들의 물리적 가능만이 문젯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안에서의 목적결합을 실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 결합에 대하여 하나의 특수한 종류의 인과성을
곧 의도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을 상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계의 사물들이 이런 혹은 저런 형식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에 대한 이런 혹은 저런 관계 속에 자연에 의해 놓여 있는가 하는 물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p.509)
궁극목적은
무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연이 야기하고 그것의 이념에 따라 산출하기에 충분한 그런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규정근거가 언제나 다시금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닐 터인 그런 것은 자연 안에는 없기 때문이다. (pp.509-510)
이제
도덕적 존재자로서 인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위해 그것이 실존하는가”를
더 이상 물을 수가 없다. 무릇 세계의 사물들이 그것들의 실존의 면에서 의존적인 존재자로서, 어떤 목적들에 따라 활동하는 최상의 원인을 필요로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창조의 궁극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없으면 서로서로 종속적인 목적들의 연쇄가 완벽하게 기초되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오로지 인간에서만, 또한 도덕성의 주체인
이 인간에서만 목적들에 관한 무조건적인 법칙수렵[입법]을
찾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이 무조건적인 법칙수립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체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그에
종속하는 궁극목적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pp.510-511)
[85] 물리신학에 대하여
①
물리신학은 자연의 목적들로부터 자연의 최상의 원인 및 그것의 속성들을 추리하려는 이성의 시도이다. ②
도덕신학(윤리신학)은 자연 안에 있는 이성적 존재자들의 도덕적
목적으로부터 저 원인과 저것의 속성들을 추리하려는 시도라 하겠다. 전자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선행한다. 무릇 만약 우리가 세계 안의 사물들로부터 세계원인을 목적론적으로 추리하고자 한다면, 자연의 목적들이 우선 주어져 있어야만 하고, 그런 연휴에 우리는 이 족적들에 대해 하나의 궁극목적을, 그 다음에
이 궁극목적에 대해 이 최상 원인의 인과성의 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p.512)
물리신학을
제아무리 밀고 나간다 해도, 창조의 궁극목적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열어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물리신학은 지성적 세계원인 개념을 주관적으로 우리 인식능력의 성질에만 적합한,
우리가 목적들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사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 변호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 개념을 이론적인 관점에서도 실천적 관점에서도 더 이상 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물리신학의 시도는
신학을 세우려는 그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지 물리적 목적론에 머무른다. (p.513)
물리신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축소하면, 그 해결은 쉬워 보인다. […] 좀
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전적으로 상이한 이성작용에 의거하고 있는, 최고
존재자라는 이념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어, 이 이념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 안의
목적의 근원근거에 대한 물리적 신학의 결함 있는 표상을 신성이라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보완하도록 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념을, 그와 함께 하나의 신학을 물리적 세계지의
이론적 이성사용에 의해 성립시켰다고, 또 그 이념의 실재성을 증명했다고 잘못 상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pp.514-515)
물리학자로서
동시에 신학자이고자 했던 다른 사람들은 이성이 요구하는, 자연사물들의 원리의 절대적 통일성을 한 존재자의
이념에 의거해 마련해주는 데서 이성에 대한 충족을 발견하려고 생각했다. 유일한 실체인 이 한 존재자
안에서 저 자연산물들은 모두 단지 내속하는 규정들일 따름이다. […] 따라서 (그것은) 목적들에 따라 어떤 것을 산출하는 하나의 존재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 안에서 모든 사물들은 그것들이 그것의 한낱 규정들인 주체의 통일성으로 인하여 아무런 목적과 의도
없이도 필연적으로 서로 합목적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다수의
합목적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실체들의 도출하기 매우 어려운 통일성을 하나의
실체에 대한 인과적 의존성 대신에 하나의 실체 안에서의 내속의
통일성으로 변환시킴으로써, 목적인의 관념론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이 체계는 내속하는 세계존재자들의 측면에서 보면 범신론으로서, 그리고 근원존재자로서 유일하게 자존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후의) 스피노자주의로서, 자연의 합목적성의 제일 근거에 대한 물음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 물음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한 셈이다. (p.516)
물리적
목적론은 우리를 하나의 신학을 찾도록 몰기는 하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자연을 경험을 통해 탐색하고, 자연 가운데서 발견되는 목적결합을 이성이념들을 가지고 도우러간다 할지라도, 물리적
목적론이 신학을 산출하지는 못한다. 이 궁극의도 없이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모든 자연목적들의 공통의 관계점도
만들 수 없고, 한편으로는 목적들을 모두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인식하고,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해서 목적론적으로 반성하는 우리의 판단력에 기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자연의 원인으로서의 최상의 지성을 우리가 이해하기에 충분한 목적론적 원리를 만들 수도 없다. […] 궁극목적은
오로지 순수 이성만이 제공할 수 있고 이 궁극목적만이 나에게, 자연을 목적론적 체계로 판정하기 위해서
내가 자연의 최상 원인의 어떤 속성들, 어떤 정도, 어떤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가르쳐준다. (p.518)
그러므로
우리가 물리적 목적론을 가능한 한 확장한다 해도 위에서든 원칙에 따라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 인식능력의 성질과 원리들에 따라 우리에게 알려진 합목적적인 질서 가운데 있는 자연을 다름 아니라 이 자연이 종속되어 있는 어떤 지성의 산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p.519)
그러므로
물리신학은 하나의 오해된 물리적 목적론으로, 신학을 위한 준비(예비학)로서만 유용하다. 그리고 물리신학은 그것이 의지할 수 있는 별도의
원리가 추가됨으로써만 이러한 의도를 위해 충분하지만, 그 명칭이 보이고자 하는 바와 같이, 그 자체로서는 이러한 의도에 충분하지 못하다. (p.519)
[86] 윤리신학에 대하여
가장
평범한 지성이라도 세계 내의 사물들의 현존과 세계 자신의 실존을 숙고할 때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판단이 있다.
곧, 온갖 다양한 피조물들이 제아무리 위대한 기예적 설비를 갖추고 있고, 제아무리 합목적적으로 서로 관계 지어진 다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온갖 다양한 피조물들은 그리고, 이 피조물들의 그토록 많은 체계들의
전체조차도, 만약 그것들 가운데 인간이 없다면, 아무런 것도
위하는 것이 없이 현존하는 것이겠다. 다시 말해, 인간이
없으면 전체 창조는 한낱 황야로서,
쓸데없고 궁극목적이 없는 것이겠다. […] 인간이 현존할 때, 인간은 행복을 그 자신의 궁극목적으로 삼는다 함이, 인간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현존하는가에 대한, 인간은 그러면 그의 실존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이 목적들의 원리들에 따르는 절대적인 전체로 고찰된다면, 왜
자연이 인간의 행복과 부합해야만 하는가 하는 이성근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이미 창조의 궁극목적으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pp.519-520)
또한
건전한 인간이성의 가장 평범한 판단도, 사람들이 그 판정을 오직 이 물음에만 돌려 그것을 시도해보도록
유발하면, ‘인간은 도덕적 존재자로서만 창조의 궁극목적일 수 있다’는
것에 완전히 부합한다. […] 그리고 만약 창조가 결코 궁극목적이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 인간으로서 그 역시 창조에 속하는 자인 그러한 인간은 악한 인간으로서 도덕법칙들 아래에 있는 세계 안에서 도덕법칙들에
따라 그의 주관적 목적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521)
이제
우리는 인간이 오직 도덕적 존재자로서만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첫째로, 세계를 목적들에 따라 연관되어 있는 전체로, 그리고 목적인들의 체계로 볼 하나의 근거를, 적어도
중요조건을 갖는 바이다. (p.522)
주해
어떤
사람이 그의 마음이 도덕적 감각과 조율되는 순간에 두어보자. […] 그는 그가 실존하는 목적을 위해, 이 목적에 맞게 그의 그리고 세계의
원인일, 한 존재자를 갖기 위해서 하나의 도덕적인 지적 존재자를 필요로 한다. 이 감정들의 배후에 동기들을 꾸며내려는 일은 헛된 짓이다. 무릇
이러한 감정들은 가장 순수한 도덕적 마음씨와 직접적으로 연관해 있다. 왜냐하면 감사, 복종, 공순은 의무에 대한 특수한 마음의 기분들이고, 자기의 도덕적 마음씨를 확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여기서 이 세계에는 없는 한 대상을 자발적으로 생각해내어, 가능한 한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도 자기의 의무를 증명해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자의 실존에 대한 도덕적 필요욕구를 표상하는 것은 적어도 가능하고, 또한 그 근거는 도덕적 사유방식에 놓여 있다. 그러한 존재자 아래에서 우리의 윤리성은 더 강해지고, 또한 더 넓은
범위[외연], 곧 윤리성의 실행을 위한 새로운 대상을 얻는다. (pp.524-524)
이 모든 것을 요약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공포가 처음으로 신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이성은
자기의 도덕적 원리들을 매개로 처음으로 신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현존의 내면적인 도덕적
목적규정은 자연인식에 부족한 것을 보완했는데, 목적 규정은 곧, 그것에
대해 윤리적인 것 외에 어떠한 원리도 이성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모든 사물들의 현존의 궁극목적을 위해, 전체 자연을 저 유일한 의도에
복속 시킬 수 있는 속성들을 가진 최상의 원인을 생각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p.526)
[87] 신의 현존에 대한 도덕적 증명에 대하여
하나의
물리적 목적론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이론적인 반성적 판단력에 대해 지[오]성적 세계원인의
현존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증명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더 많게는 자유를
갖춘 이성적 존재자 일반이라는 개념 안에서 하나의 도덕적 목적론을 발견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 안의
목적관계가 그 목적관계의 법칙과 함께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고, 그러니까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우리 밖에 이 내적 합법직성을 위한 어떤 지성적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제 이러한 도덕적 목적론에서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물음이 나온다. 즉
과연 도덕적 목적론은 우리의 이성적 판정으로 하여금, 자연을 도덕적인 내적 법칙수립과 그것의 가능한
실연과의 관계에서도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하기 위해서, 세계를 넘어가 자연의 우리 안에 있는 윤리적인
것과의 저 관계에 대한 하나의 지성적인 최상의 원리를 찾도록 강요하는가? […] 우리는 저 ① 도덕적
목적론 및 그것의 물리적 목적론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신학에 이루는 이성의 전진을 먼저 다루고, 다음에
② 이러한 추론방식의 가능성과 설득력에 관한 고찰을 하고자 한다. (pp.527-528)
사람들은
어떤 사물들의 현존을 우연한 것으로, 그러니까 단지 다른 어떤 것을 원인으로 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이 인과성에 대하여 최상의 근거를, 그러므로 조건적인 것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근거를 물리적인 질서에서든 목적론적이 질서에서든 찾을 수 있다. (p.528)
만약
사람들이 후자의(목적론적) 질서를 따른다면, ‘만약 어디서건 이성이 선험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도덕법칙들 아래에 있는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인간이성조차도 직접적으로 찬동하지 않을 수 없는 원칙이다. (pp.529-530)
도덕법칙은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는 형식적인 이성조건으로서 그 자신만으로, 질료적 조건으로서의 어느 목적에 의존한
없이, 우리에게 책무를 지운다. 그럼에도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하나의 궁극목적을 그것도 선험적으로 규정해주며, 이 궁극목적을 향해 애쓰는 것을 우리의 책무로 지어준다. 그리고 이 궁극목적이 이 세계에서
자유에 의해서 가능한 최고선이다.
(pp.530-531)
그러나
도덕법칙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궁극목적의 이 두 가지 요건을 우리가, 우리의 모든 능력상, 순전한 자연원인에 의해서 연결된
것으로 그리고 위에서 논한 궁극목적의 이념에 알맞은 것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법칙에 맞는 궁극목적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의 도덕적 세계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궁극목적이 필연적인 한, 그만큼 도덕적 세계원인도
필연적으로 상정해야 한다. 곧, 신이 있다는 것을 상정해야
한다. (p.531)
***
① 어떤 사람이 한편으로 그토록 매우 칭송 받던 사변적 논증들의 약점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윤리세계에서 그이게 나타나는 수많은 불규칙성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 ‘신은 없다’는 명제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사유방식을 가지고서는
무가치한 자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자기의 의무를 그 결과에서 보면 더 요구할 것이 없을
만큼 정확하게 완수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의무를 존중하는 마음씨 없이 공포 때문에 또는 보수를 추구하는 의도에서 한 것이라면 말이다.
② 거꾸로 만약 그가 자기의 의무를 신앙인으로서 그의 의식상 솔직하고 사용 없이 준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없다’는
것을 언제인가 확신할 수 있게 될 경우를 시험 삼아 가정해볼 때마다, 이내 모든 윤리적 책무로부터 해방된다고
믿는다면, 그 안에 내면적 도덕적 마음씨는 오로지 나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③ 마지막으로 우리는 신이 없고 또한 내세도 없다고 확신하는 성실한 사람(가령 스피노자와 같은)을 상정해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행동으로 존중하고 있는 도덕법칙에 이한 그 자신의 내면적 목적규정을 어떻게 판정할까? 그는 도덕법칙의 준수에 대해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나 다른 세상에서나 아무런 이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애씀에도 한계가 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때때로 우연한
협조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결코 목적에 대한 합법적인, 그리고
불변의 규칙들에 따라 일어나는 부합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그의 윤리적인 내면의 사명의 부름에 충실히 머무르려 하고, 윤리 법칙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순종하도록 불어넣는 존경을 유일한, 그
높은 요구에 알맞은 이상적인 궁극목적이 무실하다고 해서 약화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의 도덕적 세계창시자,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88] 도덕적 증명의 타당성 제한
실천
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우리의 인과성의 자유로운 사용을 이념들에 의해서 규정하는 능력으로서 순수 이성은
도덕법칙 안에 우리의 행위들의 규칙적 원리를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또한 동시에, 이성만이 생각할 수 있고,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이 세계에서 저
법칙에 따라서 실현되어야만 할, 객관의 개념 안에 주관적-구성적
원리도 제공한다. 그러므로 도덕법칙들에 따른 자유의 사용에서의 궁극목적의 이념은 주관적-실천적 실재성을 갖는다. (p.535)
이제
물음은, 창조의 궁극목적이라는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이 순수이성의 이론적 요구들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비록 규정적 판단력에 대해서 명증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론적-반성적 판단력의 준칙들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밝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536)
이론적-반성적 판단력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즉
만약 우리가 자연의 합목적적인 산물들에 대해서 자연의 하나의 최상의 원인을 상정할 근거를 가지고 있고, 자연의
현실성에 관한 이 원인의 인과성이 자연의 기계성에 요구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 곧 어떤 지성의
인과성으로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또한 이 근원존재자에게서 자연 어디에나 있는 목적들을
생각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궁극목적도 생각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가질 것이다. (pp.536-537)
그러나
궁극목적은 한낱 우리의 실천 이성을 개념으로서, 경험의 자료부터 자연의 이론적 판정을 위해 추리될 수도
없고 또 자연 인식에 관계할 수도 없다. (p.537)
그런데
이것은 오직 도덕적 목적론에서 출발하여 신학에, 다시 말해 도덕적 세계창시자의 현존에 이르는 추론이
아니라, 단지 이런 방식으로 규정되는, 창조의 궁극목적에
이르는 추론일 따름이다. 이제 이 창조를 위해서는, 다시
말해 하나의 궁극목적에 맞는 사물들의 실존을 위해서는, ① 첫째로 하나의 지성적 존재자가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②
둘째로는 하나의 지[오]성적 존재자뿐만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존재자가 세계창시자로서, 그러니까 신으로서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궁극목적에서 창조의 궁극목적을 상정할 도덕적 근거를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창조의 원근거로서 도덕적 존재자를 상정할 도덕적 근거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통찰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능력의 성질상 그러한, 도덕법칙과 그 객관에 관계하는, 이 궁극목적 안에 있는, 합목적성의 가능성을, 동시에 도덕적 법칙 수립자인 세계 창시자 내지
통치자 없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p.537-538)
그러므로
최고의 도덕적-법칙수립적 창시자의 현실성은, 그것의 현존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이론적으로 규정하지 않고서도, 순전히 우리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는 충분하게 밝혀진다.
(p538)
여기서
이제 일어나기 쉬운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꼭 주의해야 할 것은, ① 첫째로 우리는 최고 존재자의 이러한
속성들을 유비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② 둘째로, 우리는 최고의 존재자를 유사한 것에 의해서도 단지 생각할
수 있을 뿐, 그에 따라 인식하고, 그 자연본성을 최고 존재자에게
가령 이론적으로 부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 여기서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우리 인식능력의 성질상이 최고 존재자를 어떻게 파악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그것의 실존을, 순수 실천 이성이 그러한 일체의 전제 없이 우리에게 전력을 다해서 실현하도록
선험적으로 부과하는 목적에 역시 오직 실천적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오직 의도된 결과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정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pp.539-540)
주해
이 도덕적 증명은 새롭게 발견된 증명근거는 아니고, 기껏해야 새롭게 해설된 증명근거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 증명은
인간의 이성능력이 최초에 발아하기 전에 이미 인식능력 안에 놓여 있었고, 이 이성능력이 계속적으로 개발되면서
점점 더 발전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합목적성을 아직 무관심하게 보아 넘기고, 통상적인 행정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연을 이용했던 시대에 인간들이 법과 불법에 관해서 반성하기
시작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판단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설령 한 인간이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적어도 눈에 띄는 바로는, 그의
덕행에 대해서 아무런 행운도 얻지 못했고, 그의 범행에 대해서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과연 정직하게 처신했는가 거짓되게 처신했는가, 그가 합당하게
처신했는가 난폭하게 처신했는가는 그 결말에 있어서 결코 한 가지일 수가 없다는 판단 말이다. […] 그러나
그러한 경과는 이런 표상과 전혀 부합하지 않았고, 그들이 세계 행정을 일단 사물들의 유일한 질서로 보는
한에서, 그들은 다시금 그들 마음의 저 내면적 복적규정을 이 표상과 합일시킬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불규칙성이 조정될 수는 있는 방식을 여러 가지로 조잡하게나마 표상했겠지만, 그럼에도 도덕적 법칙들에 따라 세계를 지배하는 최상의 원인 이외에 자연과 그들 내면의 윤리법칙들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원리를 결코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에 있는 의무로 부과된 하나의 궁극목적과, 그들의 밖에 아무런 궁극목적 없이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목적이 그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자연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pp.541-542)
[89] 도덕적 논증의 효용에 대하여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념에 관하여 이성을 그 실천적 사용의 조건들에 제한함은, 신의 이념과 관련해서
보자면, 오인할 여지가 없는 효용을 갖는다. 즉 그것은 신학이 신지학[神智學]으로 잘못 올라가지 못하도록, 또는 귀신론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며, 종교가 주술이나 또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p.543)
무릇
만약에 감성세계 너머 있는 것에 관해 궤변을 늘어놓는 허영과 불손에 대해 최소한의 것만이라도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신적 자연의 현존과 성질, 그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이 양자의 법칙들과 이 법칙들로부터 나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속성들을 통찰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자리에서 이성의 월권행위들을 한정하려 하는지 나는 정말
알고 싶다. […] 그럼에도 그러한 요구들에 대한 한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원리에 따라서 일어나야만
할 것이고, 가령 이제까지 그러한 요구들에 의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한낱
그런 근거에서 그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p. 544)
내성의
생에 대한 희망에 관해서는, 만약 우리가 도덕법칙의 지시규정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궁극목적 대신에, 우리의 사명을
위한(에 관한) 이성판단의 실마리를 위해, 우리의 이론적 인식능력에 문의해보면, 영혼론[심리학]은 이 점에서, 위에서
신학이 그러했듯이, 우리 사고하는 존재자에 대한 소극적인 개념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못할 것이다. […] 모든 것이 실천적 필연적 고려에서 우리의 현존에 대해 목적론적으로 판정하는 일과 우리의 [사후] 영속을 상정하는 일이 이성이 우리에게 단적으로 부과한 궁극목적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위임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효용이 드러난다. 즉 신학이 우리에게 신지학이 될 수 없듯이, 이성적 심리학[영혼론]은 결코 [지식을] 확장하는
학문으로서 심령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 심리학[영혼론]이 어떤 물질주의로 전락하지 않을
것도 보증되어 있다. […] 우리의 영원한 실존에 관한 물음과 관련해서는, 이성적 심리학[영혼론]은
전혀 아무런 이론적 학문이 아니고, 도덕적 목적론의 유일한 추론에 의거하는 것으로, 도대체가 이성정 심리학[영혼론]의
전체 사용도 순전히 우리의 실천적 사명으로서의 도덕적 목적론으로 인해 필연적인 것이다. (pp.545-546)
[90] 신의 현존에 대한 도덕적 증명에서 견해의 종류에 대하여
증명근거
내지 추론은 한낱 찬동의 주관적인 (감성적/미감적) 규정근거(순전한 가상)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며, 인식의 논리적 근거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지성은 속임을 당해도 승복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신학에서 어쩌면 선한 의도에서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고의로 은폐하고 이끌어가고 있는 그런 증명은 저런 유의 사이비 증명이다.(pp.546-547)
그러나
확신에 뜻을 두고 있는 증명도 다시금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은 ① 대상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증명이거나, 아니면 ② 대상이
그것을 판정하는, 우리에게 필연적인 이성원리들에 따라 우리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증명이거나 이다. 전자의 경우에
증명은 규정적 판단력에 대해 충분한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한낱 반성적 판단력에 대해
충분한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p.548)
무릇 모든 이론적 증명근거들은 다음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는 충분한 것이다. […] 만약 근원존재자가 이 개념의 전체 내용에 알맞은 의미에서 신, 곧
도덕적 세계창시자이고, 그러니까
세계창시자에 의해 동시에 창조의 궁극목적이 제시되는바, 이 근원존재자가 실존한다는 명제가 증명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이론적 확신을 일으키는 모든 증명근거들은 최고도에서부터 최저도에 이르는 저런 종류의
어떤 견해 중의 하나도 생기게 할 수 없다. (p.549)
①
논리적으로-엄밀한 이성추리에
의한 증명에 대해서
보편에서
특수로 나아가는, 논리적으로-정당한 증명에 관해서 말하자면, [(순수이성)비판]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충분하게 밝혀졌다. 즉 자연을 넘어서 찾아야만 하는 존재자의 개념에는 우리에게 가능한
어떠한 직관도 대응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 개념이 종합적 술어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한에서, 그 개념 자신은 우리에게는 항상 문제성 있는 것으로 남으므로, 단적으로
그 존재자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생기지 않으며, 또 사물들의 자연본성의 보편적 원리들 아래에는 초감성적인
존재자의 특수한 개념이 포섭되어 전자들(자연본성의 보편적 원리들)로부터
후자(초간성적인 존재자)가 추론될 수는 전혀 없는데, 그것은 전자의 보편적 원리들이란 오로지 감관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만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p. 549-550)
②
유비에 의한 추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종적인 두 사물에 대하여, 바로 그것들이 이종적이라는 점에서, 그
중 하나의 다른 것과의 유비에 의해 사고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이종적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하나로부터 유비에 따라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종차의 이러한 징표를 다른 것에다
전용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원존재자의 인과성을 자연목적들로서의 세계의 사물들에 관련하여, 우리가 기예작품들이라고 부르는 일정한 산물들의 형식들의 근거로서의 어떤 지성과의 유비에 의해 생각할 수는 있다. (pp.550-551)
③
개연적 의견[사견]에 대해서
의견은
선험적 판단들에서는 전혀 생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들을 통해 어떤 것을 전적으로 확실하게 인식하거나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출발하는 주어진 증명근거들이 경험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감성세계를 넘어서서는 아무런 의견도 가질 수 없고, 그와 같이 감행된 판단들에는 최소한의 개연성 주장도 승인할 수가 없다.
(p.552)
④
최소한의 것인, 한낱 가능한 설명근거의 상정, 즉 가정에 대해서
어떤
것이 주어진 현상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로 쓰여야만 한다면, 적어도 그것의 가능성은 온전히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설에서는
내가 현실성의인식을 단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나는 그 이상의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p.553)
이상에서
논의한 결말은, 신성으로서 근원존재자의 현존 또는 불사적 정신으로서 영혼의 현존에 대해서는, 이론적 관점에서는 최소한도의 견해라도 내기 위한 증명이 인간 이성에게는 단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 즉 우리에게는 초간성적인 것의 이념들을 규정하기 위한 재료가 전혀 없어서, 이 재료는 저런 객관에는 단적으로 맞지 않으며, 그런데 감성세계의
모든 규정 없이는 초감성적인 어떤 것이라는 개념 외에 더 남은 것이 없는바, 이것이 감성세계의 최종
근거를 함유하기는 하지만, 그 근거는 그럼에도 그 초감성적인 것의 내적 성질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p.553-554)
[91] 실천적 신앙에 의한 견해의 종류에 대하여
인식
가능한 사물들은 무릇 세 종류, 즉 ① 의견의 사상, ② 사실과 ③ 신앙의 사상이 있다.
①
이론적 인식에서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도 전혀 현시될 수 없는 순전한 이성이념들의 대상들은 그러한 한에서 전혀 인식 가능한 사물들이 아니며, 그러니까
그런 사물들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결코 의견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험적인 명제는 확실하거나, 아니면 견해를 취할
수 있는 것을 전혀 아무것도 함유하지 않거나이다. 그러므로 의견의 사상들은 항상 적어도 그 자체로는 가능한 경험인식의 객관들이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한갓된 정도의 이 능력에 의해서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pp.554-555)
②
그 객관적 실재성이 증명될 수 있는 개념들의 대상들은 사실들이다. (기하학에서) 크기의 수학적 속성들이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속성들은 이론적 이성사용에 대하여 선험적으로 현시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더 나아가 경험에 의해 밝혀질 수 있는 사물들이나
사물의 속성들 또한 마찬가지로 사실들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이념으로, 이 이념의 실재성은 하나의 특수한 종류의 인과성으로서, 순수 이성의 실천적 법칙에 의해 그리고 이 법칙들에 준거해서 현실적인 행위들에서, 그러니까 경험에서 밝혀진다. – 이것은(자유의 이념) 순수 이성의 모든 이념들 중에서 그것의 대상이 사실이고, ‘可知的인 것’ 하나로 계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이념이다. (pp.556-557)
③순수
실천 이선의 의무에 맞는 사용과 관련해서는 선험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지만, 그 이론적 사용에 대해서는
초경적인 대상들은 순전히 신앙의 사상들이다. 자유에 의해 이 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할 최고선이
그러한 것이다. 이 개념은 우리에게 가능한 어떤 경험에서도, 그러니까
이론적 사용에 대해서는, 그 객관적 실재성이 증명될 수 없지만, 그[개념]의 사용은 저 목적을 가능한 한 최상의로 실현하기 위하여 실천적 순수 이성에 의해 명령되는 바이고, 그러니까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명령된
결과는,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하게 우리에게 생각될 수 있는 조건들과 더불어, 곧 신의 현존 및 영혼의 불사성과 더불어, 신앙의 사상들이여, 그것도 그렇게 불릴 수 있는 모든 대상들 가운데서 유일한 것들이다.
(p.557)
**
신[의 현존], [의지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불사성은 형이상학의 모든
장비들이 그것의 해결을 형이상학의 최종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있는 과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이론은 실천철학을 위한 소극적 조건으로만 필요할 뿐인 반면에, 신과
영혼의 성질에 대한 이론은 이론철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별도로 밝혀져야 하며, 나중에 이 두
가지가 도덕법칙이 명령하는 것과 연결되어 하나의 종교를 성립시킨다고 믿었다. […] 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념의 규정은, 그 술어들 자신은 초감상적 근거에서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술어들에 이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pp. 563-564)
그러므로
한낱 이론적인 길만으로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사성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실패하는 근거는 초감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자연개념들의) 이 길로는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그에 반해 (자유개념의) 도덕적 길로는 그것이 성공한다 함은 다음의 근거를 갖는다. 즉 이
경우에는 기초에 놓여 있는 초감성적인 것(도덕적 궁극목적과 그 목적의 수행가능성의 조건)의 인식을 위한 재료를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실재성을 행위들에서
사실로서 드러낸다. (p.564)
여기서
다음의 점들은 언제나 아무 주목할 만한 것이다. 즉 세 순수 이성이면들인 신[의 현존]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사성 가운데서 자유의 이념만이, 자기의
객관적 실재성을 (그것에서 생각되는 인과성을 매개로) 자연에서
그 안에서 가능한 이 이념의 작용결과를 통해 증명하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두 이념의 자연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며, 그래서 세 이념을 서로서로 연결시켜 하나의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개념이다. (pp.564-565)
목적론에 대한 일반적 주해
신의
현존을 실천적으로 순수한 이성에 대해 신앙이 사상으로 증명한 도덕적
논증이 철학 안에서 여타의 논증들 가운데서 어떤 지위를 주장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때, 철학의 전
소유물은 쉽게 어림셈이 되거니와, 그때 여기서 선택의 여지없이, 이성의
이론적 능력은 불편부당한 비판에 앞서서는 그의 모든 주장들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입증된다.
(p.565)
모든
사실들은 자연개념에 속하든가 자유개념에 속한다. 자연개념은 자기의 실재성을 일체의 자연개념들에 앞서 주어지는 (또는 주어질 수 있는) 감관의 대상들에서 증명하며, 자유개념은 자시의 실재성을, 이성이 도덕법칙에서 반박할 여지없이
요청하는, 이성의 인과성[원인성]에 의해서 이로 인해 가능한 감성세계 안에서의 어떤 결과와 관련하여 충분하게 드러낸다. 자연개념은 (순전히 이론적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런데 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선험적으로 생각될 수 있든가, 또는
물리적으로, 다시 말해 후험적으로 그리고 오직 일정한 경험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경험으로 전제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자연개념은 존재론적이다. (p.566)
순전히
형이상학적 자연개념을 기초에 두는 (본래-존재론적이라 불리는) 하나의 증명은 최고실재 존재자라는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단적으로 필연적인 실존을 추론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약
최고실재 존재자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최고실재 존재자에게 하나의 실재성이, 곧 실존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p.566-567)
물리적-목적론적 증명이 마치 동시에 신학적인 증명인 것처럼 확신함은 최고 지성의 경험적 증명근거들인 양 자연의 목적들의
이념들을 이용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추론에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면서 인간을 그토록
깊이 움직이는 도덕적 증명근거가 슬그머니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도덕적 증명근거를 따라 사람들은
자연의 목적들에서 그렇게나 이해할 수 없게 기예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존재자에게 또한 하나의 궁극목적을, 그러니까
지혜를 (비록 자연의 목적들을 지각함으로써 그렇게 할 권리를 갖춘 것이기는 하지만) 부가하고, 그리하여 저 논증에 아직도 부착되어 있는 결함을 자의적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pp.569-570)
신의
현존에 대한 도덕적 증명근거는 본래 또한 가령 한낱 물리적-목적론적 증명을 하나의 완벽한 증명으로 보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물리적-목적론적 증명이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근거를 판정함에 있어서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지는, 자연의
우연적인, 그러나 경탄할 만한 질서를 판정함에 있어 이성을, 목적들에
따라 자연의 근거를 함유하는 한 원인의 인과성으로 인도하여, 그의 주목하도록 하고, 그렇게 하여 그러나 이성으로 하여금 도덕적 증명을 더 수용하기 쉽게 하는 것뿐이다. (p.570)
만약
물리적-목적론적 증명근거가 추구한 증명에 충분하다면, 그것은
사변 이성을 매우 충족시키는 일이겠다. 왜냐하면, 이 증명근거는
하나의 신지학을 만들어낼 희망을 줄 터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심리학이 그것을 통해 영혼의 불사성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에 충분하다면, 그것은 사변 이성에게 마찬가지로
환영 받을 심령학을 가능하게 할 터이다. 그러나 이 양자(신지학과
심령학)는, 지적 욕구의 망상에는 제아무리 기꺼운 것일지라도, 사물들의 자연본성에 대한 지식에 기초해야만 할 터인 이론의 관점에서는 이성의 바람을 채워주지 못한다. (p.572)
그러나
물리적-목적론적 증명근거는 신학을 위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의도를 위해 충분히 규정된 근원존재자의 개념을 주지 못하고 또 줄 수도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은
이 개념을 전적으로 다른 곳에서 취해오거나 아니면 그 결함을 자의적인 부가물을 가지고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되니 말이다. (pp.572-573)
이에
반해 도덕적 목적론은, 물리적 목적론 못지않게 확고하게 기초 지어져 있고, 오히려 선험적으로 우리의 이성과 분리될 수 없는 원리들에 의거하고 있음으로써,
우월성을 가진 것으로서, 신학의 가능성을 위해 요구되는 것, 곧 도덕법칙들에 따르는 세계원인으로서의 최상의 원인이라는, 그러니까
우리의 도덕적 궁극목적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원인이라는 규정된[명확한]
개념에 이른다. (p.574)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신학은 또한 직접적으로 종교에, 다시 말해 우리의 의무들을 신의 지시명령[계명]들로 인식함에 이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무와 거기에서 이성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는 궁극목적에 대한 인식이 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러므로 신의 개념은 이미 그 기원에 있어서 이 존재자에 대한 책무와 불가분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pp.574-575)
도대체
왜 신학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자연지식(자연인식) 및 일반적으로 여느 이론을 확장하거나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종교를 위해서, 다시 말해 이성의 실천적인, 특히 도덕적인 사용을 위해서 주관적 관점에서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제 신학의 대상의 정확한 개념에 이르는 유일한 논증 자신이 도덕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러한
논증은 신의 현존을 단지 우리의 도덕적 사명을 위해서만, 다시 말해 실천적 관점에서만 충분하게 밝혀주며, 사변은 이 논증에 있어서 결코 자기의 강점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이 논증을 통해 자기의 구역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고백된다 해도, 그것은 낯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러한 증명근거로부터 나오는 견해가 신학의 궁극목적에 대해 충분하다는 점에 관해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p.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