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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버도, <<프란치스꼬의 여행과 꿈>>, 홍윤숙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1.
프란치스꼬는 새로운 그의 마음이 거둔 최초의 승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나환자는 언제나 무서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아씨시가 가까운 길에서 예수의 영(靈)의 작용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이전의 그였더라면 보기만 하여도 구역질을 했을 정도의 나환자에게 스스로 손을 내밀어 그 상처를 만졌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무릎의 힘이 빠져버리는 듯해서 얼마쯤 떨어져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환자에게 가까이 다가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살 썩는 냄새가 강렬하게 오감(五感)을 찌르고 마치 눈이나 귀로 균이 침입해 들어올 것처럼 느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진 그는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며 눈앞의 병자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떨면서 그를 안고 그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그날과 똑같은 행복감과 자신감이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병자를 팔에 안은 채 침착하게 곳곳이 몸을 일으켰을 때 진정으로 자기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욱 강하게 상대방을 껴안고 싶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더욱이 지금 겨우 손에 잡은 그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깝게 생각되어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놓고 병자에게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에 대답하는 듯한 상대방의 반짝이는 눈을 보자 프란치스꼬는 분명히 자기가 베푼 것 이상의 것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나환자의 눈이 아름다운 것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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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없는 삶
아씨시의 성벽 위로 도마뱀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도마뱀은 갈색의 돌 위에 갈짓자 모양의 그림을 그리면서 재빠른 몸놀림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마을 지붕들의 붉은 색과 분홍색을 배경으로 재빠르게 가고 있는 도마뱀의 녹색 몸뚱이 때문에 벽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비좁은 돌벽 틈으로 바쁘게 들락거리는 도마뱀의 모습에서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해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도마뱀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 속에서 다른 일 따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날의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지금 프란치스꼬의 마음을 특별히 사로잡은 것은 도마뱀의 움직이었다. 그것은 하늘에다 쓴 글씨처럼 씌어진 다음 순간에는 금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 작은 움직임 뒤에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나도 저 도마뱀처럼 살고 싶다'고 프란치스꼬는 생각했다. 하늘에 씌어진 글씨처럼 몹시 서운하겠지만 서명도 무엇도 남기지 않는 것이 되고 싶다. 움직임, 바로 그것이 한 편의 시(詩)와 같은, 도마뱀이 달리는 모습을 닮은 이름도 없는 삶을 살고 싶다…(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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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꼬는 자연 가운데서 어쩌면 비가 제일 좋은 선생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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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인간은 도대체 얼만큼의 고통이나 불쾌함을 참아내고 있는 것일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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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여행이란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일 이 없는 사람들, 프란치스코는 일생 동안에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소년 시절, 아직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형제들 가운데에서조차도 내면의 여행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들은 감수성이 둔하게 보이므로 이네 그것을 드려낸다. 자신의 외면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면을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에 비해 확실히 감수성이 모자란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대응책을 써야 할까? 무엇보다 슬프게 생각되는 것은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가 자신의 핵(核)인 정적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항상 근심이나 걱정으로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정적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참다운 만남을 알게 된다.그러므로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모습 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정된 시야 속에서 자기의 일생이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한다. 나중엔 죽은 후의 일까지 걱정하여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을 뭔가 남겨두려고 바둥댄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애의 나날의 짧음과 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필경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어느날 스바시오 산위에 섰다. 눈앞에 아씨시에서 스뽈레또에 이르는 골짜기의 전모가 펼쳐져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그러나 얼핏 발 밑을 보았을 때 거기에 자그마한 노란 수선화가 피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홀연 그의 마음은 이 작은 꽃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산의 대기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며 피는 꽃의 아름다움! 잠시 동안에 저버리는 생명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될만한 아름다운 삶이 있었다. 그 꽃은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할 일에 대해서도, 후세에 남기고 갈 유산에 대해서도 무엇하나 고민하지 않았다. 생명의 짧음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다만 단순하게 거기서 꽃을 피우고 있을뿐이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인간은 존재 그자체로서 영광의 증거가 되어야 할 의무를 꽃의 몇배나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생명을 낳지 못하더라도 다만 그 사람이 존재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광은 충분히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진실-참으로 마음을 해방 시킬 수 있는 진실-을 알기 위해선 자신의 내면 깊이 내려가서 하느님과 만난다는 체험이 필요하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들여 주신다는 체험이 있음으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자기를 사랑하여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스바시오 산의 은둔처에서 프란치스코의가 체험한 신비였다. 이렇게 험한 산 위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다. 거기서는 온갖 사물이 그냥 존재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보다 더 잘 일해서 존재 이유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내부의 생명의 리듬에 따라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쳐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발밑에 피어 있는 이 꽃만 하더라도 그렇다. 프란치스꼬가 자기보다 키가 크다고 해서 원망하지도 않으며, 자신은 일생동안 뿌리를 내린 이 장소에서 움직일수 없는데 프란치스꼬는 자유로이 걸어다닐 수 있다고 토라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서 본래의 자기가 아닌 것이 되려고 안달을 하며, 그 일에 얼마만큼 성공했는가를 척도로 하여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할까? 프란치스꼬는 모든 사람들이 내면을 향해 사는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원했다. 안으로 향해 갔을때 비로소발밑에 피는 노란 수선화에도, 자신의 참모습에도 눈이 떠질것이다(155-157).
* 위의 책 쪽수는 내가 읽은 1981년 판, 위의 사진은 알라딘에 실린 2010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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