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chevalier, la femme et le prêtre : le mariage dans la France féodale
Paris, Hachette, 1981
조르주 뒤비
Georges Duby (1919–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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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12. 유럽인의 왜소화와 평균화는 우리의 최대 위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모습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위대해지려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더욱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좀 더 빈약한 것, 좀 더 선량한 것, 좀 더 영리하고 안락한 것, 좀 더 평범하고 무관심한 것, 좀 더 중국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더 좋게’ 된다 ...... 여기에 바로 유럽의 운명이 있다 - 인간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우리는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인간에 대한 희망, 아니 인간에 대한 의지도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의 모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 이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오늘날 무엇이 허무주의란 말인가? ... 우리는 인간에게 지쳐 있다 ......
- 376~377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382
올림픽 경기는 기원전 776년에 창설되어 기원후 393년에 종말을 고하기까지 1168년의 역사를 겪었다(147).
* 에필로그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오랜 박해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아니 그 최후의 승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10년 뒤 로마 제국의 단독 지배를 건 결전에서 리키니우스는 고대의 신들에게 의지하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그린 깃발 아래 싸웠다. 그 승리는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신들이 죽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치세(361-363년) 동안에 '신들의 부흥'을 기도한 율리아누스 황제의 노력도 헛된 것이었다. 그가 죽게 되자 "갈리리 사람아, 당신이 이겼다"고 말했다지만, 실은 "태양신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대의 신은 그를 도울 힘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379년 황제로 추대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그는 381년에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거나 그것으로 점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신전에 참배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때부터 신전의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기본은 <<로마제국쇠망사>>에 "로마의 모든 속주에서 광신자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마구 평화로운 주민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건조물들의 폐허가 아직도 야만인들이 파괴한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야만인들만이 그와 같이 힘든 파괴를 할 시간과 성미를 가진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제 293회 경기가 열린 393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올림피아의 제전을 금하였다. 그리고 426년에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모든 신전의 파괴를 명령하고, 올림피아에도 파괴와 약탈의 손이 미쳤다. 그리하여 페이디아스의 걸작인 제우스 신상의 머리를 멀리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천 년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올림픽 경기가 그냥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다시 금령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5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농민의 제식에서 나온 그 경기는 그때 다시 그들의 제식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의 소원인 풍작을 위해 끈질기게 지속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177~179
"영혼은 육체의 감옥이다."(62)
"니체가 나에게 준 상처들은 깊고 신성해서, 베르그송의 신비주의적 위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다. 잠깐 아물기는 했지만 상처는 곧 다시 터져 피가 났으니, 젊었을 적에 내가 바라던 바는 치료가 아니라 상처였기 때문이다."(458)
"나중에, 훨씬 뒤에, 나는 절벽의 언저리에서 꿋꿋하게 서서 교만람의 기미도 없고 두려움도 없이 심연을 내려다보았다."(459)
"그들은 꽃 피는 나무 밑에서 얼마 동안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켰고, 붓다는 천천히 자비롭게 사랑하는 제자의 머를 쓰다듬었다. <구원이란 모든 구세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 그는 잠깐 잠잠했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꽃송이를 손가락에 끼고 비틀며 말했다.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가 구세주이니라.>"(484)
"엣날에 40년 동안이나 고행의 수도를 하고도 아직 신에 다다르지 못했던 위대한 성자가 살았다. 무엇인가 도중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마실 물을 담으면 식혀 주기 때문에 그가 굉장히 좋아하던 작은 항아리였다. 그는 항아리를 깨뜨리고 당장 신과 하나가 되었다. / 내 경우 작은 항아리란 자그마하고 뿌리치기 어려운 젊은 여자의 육체임을 알았다."(499~500)
"<구원을 받게 되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낡은 설명은 힘이 빠져서 인간의 지적 체계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위한 새로운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대마다 나름대로의 <외침>이 따로 마련되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외침을 듣고 그것에 따라 노력하는 인간은 행복하다. 오직 그만이 구원을 받는다."(577~578)
"언젠가 러시아의 경종학자(耕種學者)가 이스트라티와 나를 아스트라한 부근의 사막으로 안내했다. 그는 팔을 벌리고 가없는 모래밭을 의기양양하게 포옹했다. <나에게는 일꾼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은 뿌리가 길어서 빗물과 흙을 놓아주지 않는 그런 종류의 풀을 심어요. 몇 년만 지나면 사막을 몽땅 과수원이 될 것입니다.> 그의 눈이 빛났다. <봐요! 마을과, 과수원과, 물이 어디에서나 다 보이지 않아요?> <어디 말이에요?> 이스트라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 말이에요? 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 경종학자는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지나면 보일 겁니다.> 선서를 하듯 지팡이를 모래밭에 박으며 그가 말했다.
이제 나는 그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같이 항해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갖게 될 황폐한 땅을 둘러보니 내 눈에는 사람과, 과수원과, 물이 풍족한 광경이 선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미래의 성당에서 울리는 종과, 운동장에서 뛰놀며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고 ... 내 앞에는 아몬드나무 꽃이 피었으니, 손을 뻗으면 만발한 가지를 하나 꺽을 수도 있으리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믿음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을 창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란 우리들이 충분히 갈구하지 않았으며, 비존재의 음산한 문턱을 지나 전진하기에 충분할 만큼 우리들의 피를 쏟아 붓지 못한 무엇이다."(603~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