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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8.

aletheia - pythagoras, platon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피타고라스 교설의 핵심은 인간 혼의 불멸성과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의 육신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육화(肉化ㆍ化身, incarnation)을 통한 혼의 진행에 관한 믿음이었다. 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동물의 살을 먹는 것에 대한 금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먹는 짐승이나 새 안에 어쩌면 나의 할머니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혼의 윤회가 가능하고 흔히 있는 일이라면, 모든 생물이 동족이며, 이와 같은 자연의 동족관계는 피타고라스학파의 또 하나의 교설을 이룬다. 이 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확대되는데 그 이유는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생물의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로 전체로서의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이오니아학파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도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시메네스에게는 낯선 것, 곧 합리적 근원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신비적인 종교적 근원에서 유래한 함축적 의미를 알았다. 그들은 우주는 무한량의 공기 혹은 숨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것이 전체에 스며들어가 생명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개개의 살아있는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된 이러한 통속적인 믿음의 잔재에서 이제 하나의 종교적 교훈이 이끌어내어진다. 사람의 숨 혹은 생명은 무한하고 신적인 우주의 숨 혹은 생명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우주는 하나이며 신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럿이며 각기 다르고 또 사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 곧 혼은 사멸하지 않는 것이고, 그 불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혼은 신적인 혼이 잘려나가 사멸하는 육신 안에 갇힌 것으로, 신적인 혼의 파편 혹은 불꽃이다.
 
 
사람은 이리하여 하나의 삶의 목표, 곧 육신의 더러움을 털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이 되어 자신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보편적[우주적 universal] 정신과 다시 결합하는 목표를 갖는다. 혼이 스스로를 완전히 정화할 수 있기 전까지는, 혼은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감으로써 계속해서 일련의 윤회를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해진 출생의 순환이 완결되지 않는 한, 개체성이 유지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가 신적인 것과의 재결합[合一]에 의한 자신의 적멸(寂滅)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믿음을 피타고라스학파는 다른 신비주의 종파와 나누어 갖고 있었는데, 특히 신화적인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름으로 가르친 사람들과 그러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은 정화 및 신적인 것과의 결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부분이다. 그때까지 순결은 종교적 의식에 의해 그리고 시체들을 피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금기들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에 의해 추구되어 왔다. 피타고라스 역시 이러한 금기의 많은 부분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만의 방식, 곧 철학자의 방식을 더하였다.
 
 
피타고라스 교설의 첫째 원리라 할 수 있을 자연의 동족관계설은 고대 신앙의 잔재이며, 마법적인 ‘함께 느낌’의 관념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째 원리는 합리적이고 전형적으로 희랍적인 것이다. 연구의 진정한 대상으로서의 형상 혹은 구조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강조,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도 혹은 한정(限度, 限定, peras, limit) 관념의 강조가 그것이다. 만약 희랍인들의 독특한 점이 ‘(환상적이고 모호하며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지적이며 확정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에 대한 그들의 선호라면, 피타고라스야말로 헬라스 정신의 가장 앞 선 주창자였다. 확신에 찬 도덕적 이원론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계열을 제시했다. 좋은 것에는 빛, 단일성, 남성, 한정 혹은 한도가 온다. 나쁜 것에는 어둠, 다수성, 여성, 한정되지 않은 것 혹은 한도지어지지 않은 것(無限定者, to apeiron, the unlimited)이 온다.
 
 
피타고라스의 종교는 일종의 범신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세계는 신과 같으며, 따라서 세계는 선하고, 하나의 단일한 전체이다. 만일 세계가 선하고 살아있고 하나의 전체라면, 이는 세계가 한정되어 있으며(peperasmenon, limited), 자신의 상이한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질서(kosmos, order)가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충만하고 유능한 삶은 조직화(organization) 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를 개개의 생물에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이를 유기체(organism)라 일컫는 것은 그것이 각기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정돈하여 전체를 살려가는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그리스어 organon은 연장, 도구의 뜻이다). 세계가 좋은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물론, 하나의 단일한 전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가 정해진 한계 혹은 한도를 가지며 따라서 그렇게 조직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세계 현상의 규칙성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낮과 밤이 그리고 계절들이 제 때에 맞추어 변함없이 질서 속에서 이어진다. 선회하는 별들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영원하고 완전히 원형인 운동을 보인다. 요컨대, 세계는 하나의 코스모스(kosmos)라 불릴 수 있는 것인데, 이 단어는 질서, 적절함, 아름다움의 관념들이 결합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피타고라스는 세계를 이러한 이름으로 부른 첫 번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천성이 철학자여서 만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와 동족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우주와 동일하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옛날의 종교적 규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주의 방식을 연구하고 우주가 어떤 것이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을 우주가 드러내주는 원리에 한층 더 가깝게 부합시켜 이끌어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물론, 우리를 우주에 한층 더 근접시켜 줄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코스모스 혹은 질서 정연한 전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하나의 작은 코스모스이다. 우리는 대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재현하는 작은 유기체이다. 그리고 이들을 관통하는 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형상과 질료의 요소를 발전시키고 조장한다. 코스모스(kosmos)를 연구하는 학자는 자신의 혼 역시 코스모스적인(kosmios) 것이 된다. [...] 피타고라스 자신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數, numbers)였다(54-58쪽)
 
 
* 비율(比率, proportion).
  
 
 
 
 
 
 
테트락티스(tetraktys)
 
 
 
 
 
 
 
 
 
 
 
 
 
 
 
 
 
* 탈레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3. 헤로도토스(DK14A1)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들이다. 즉 사람의 혼은 불사적이며 몸이 소멸할 때면 그때마다 태어나는 다른 동물 속으로 들어가고, 육지나 바다에서 살거나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거쳐 윤회하고 나면, 태어나는 사람의 몸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혼의 윤회(periēlysis)가 3,000년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한다. 헬라스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앞서서, 어떤 이들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이용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만 기록하지 않는다.(『역사』 II. 123)
 
* 프리맨은 헤로도토스가 혼의 전이설을 이집트인들의 설로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이집트의 종말론에서 이 지상의 삶은 또 다른 세상에서의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위한 짧은 준비 기간이며, 되돌아옴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66, 78쪽). KRS도 혼의 옮겨감(metempsychōsis)이란 것은 이집트의 기록이나 작품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지적한다(KRS 220쪽).
 
 
 
24. 포르퓌리오스(DK14A8a)
 
 
[...] 그[피타고라스]는 말하기를, 우선 혼은 죽지 않는다고, 그 다음으로 혼은 다른 동물들로 옮겨간다고, 게다가 일어났던 일들은 어떤 주기에 따라 언젠가 다시 일어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혼을 지니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동족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실로 피타고라스가 이런 교의(dogma)들을 처음으로 헬라스에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의 생애』 19)
 
 
2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21B7)
 
 
그[크세노파네스]가 그[피타고라스]에 대해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그는, 개가 심하게 맞고 있을 때, 곁을 지나가다가 불쌍히 여겨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멈추어라. 매질하지 마라. [나의] 친구인 사람의 혼이니까.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혼을 알아보았다’라고 말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VIII. 36)
 
 
(176-179쪽)
 
 
 
 
 
***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플라톤
 
 
그래서 완전하고 영구적인 본(本)의 존재가 가정되면 그리고 또 일단 그것이 가정되었으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상들에 우리가 어떤 실재성을 귀속시키든 그 실재성은 초월적인 형상(形相, εἶδος, eidos, form; from εἴδω, eidō, 'I see')들의 실재성에 제한된 정도에 있어서 그것들이 관여하는 덕택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저 영원한 형상들을 알게 되었기에, 이를테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는 생물들이 어떤 형상들에 속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또 어떤 실행된 행위가 좋음(善)이나 아름다움에 관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또 언급할 수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가르침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측면을 발전시키고 확실히 했다. 나는 앞서 확대와 옹호가 필요한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옹호는 ‘자신의 (魂, Ψυχή, psychē, soul or breath of life)을 보살피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플라톤이 땅에 얽매인 인간의 마음과 초월적 이데아들의 세계 사이의 다리를 보게 된 것은 혼의 본성에 관한 종교 개혁가들의 이론에 있어서였다. 보통의 희랍인의 믿음에 있어서는 앞서 내가 말했듯이 육신이 소멸하게 되면 이제 정처가 없어진 단지 망령에 불과한 혼은 - 호메로스가 표현했듯이 ‘연기처럼’ - 슬며시 빠져나와 마음도 힘도 없는 창백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는데, 마음과 힘은 혼이 신체적 기관들에 부여된 결과로서 또 같이 혼에 주어진 것이었다. 강풍이 불 때 죽는 것이 아마도 특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던 날에 장난스럽게 친구들의 그러한 믿음을 나무란 바 있다.) 그들이 그렇게 믿게 된 것은 강풍이 혼을 잡아채서는 이 지상의 사방으로 흐트러뜨리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와 믿음의 상황에 있어서는 이 육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며 육신을 희생하고서라도 보살펴야만 되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단언에 대해 친구들이 이를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스승의 확신을 지지하여, 혼은 본질에 있어서 영원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지 일시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피타고라스 교설의 진리를 재차 확인했다. 혼은 지상에서의 여러 차례에 걸친 삶을 살았고 그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그리고 삶과 삶 사이에 육신을 떠나있는 동안 초월적인 실재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었다. 육체적인 죽음은 혼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삶의 회복이다. 육신은 감옥과 무덤에 비유되고, 혼은 이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친히 지내던 이데아(ἰδέα, idéa, notion or pattern)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이 육체로부터 풀려나오길 원한다. 이데아설은 혼은 불멸성에 대한 믿음 - 또는 적어도 혼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믿음 -과 존립여부를 같이 한다. 이데아설은 배움, 이승에서의 지식획득을 상기(想起, ἀνάμνησις, anamnesis, reminiscence)의 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지각하는 사물들이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보편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처음으로 우리 안에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참된 실재들에 대한 직관을 이미 했기 때문에 이 지상에 있어서의 이들 실재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영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과거에 이미 알았으나 혼이 육신의 물질적인 불순물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해 버렸던 것을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설의 기본적인 가정은 불완전한 것이 제 혼자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것의 인식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물도 둘이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같은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같다’는 말의 참된 의미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의 정신 혹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지팡이나 우리가 긋게 되는 선에 대한 검토 혹은 비교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접근 역시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성(이성, nous)이 한때 가졌었고 따라서 지금은 지성 속에 잠재해 있는 완전한 지식을 되찾는 일에 오직 지성만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의 감각의 역할이다. 그것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은 모든 지식은 사실상 상기의 결과이므로 철학자가 일단 감각적 지각에 의해 출발하게 된다면, 그는 혼을 [플라톤의 경우에는 지성을] 자유롭게 혼으로 하여금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형상들에 대한 앎을 다시 갖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육신은 무시하게 될 것이고 또 육신의 욕망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철학은 ‘죽음 위한 준비’인데, 이는 철학이 하는 일이 혼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치 못하는 구조의 한계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저주로부터 풀려나 이데아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도록 적응시켜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혼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인식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의 궁극적 설명으로서 『파이돈』 전체에 퍼져 있는데, 이 책에서 이러한 견해는 물론 문답 형식으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끝부분에서는 신화라는 상징적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다른 대화편 『메논』에서도 상기설을 논리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경우에 상기설이 내포하고 있는 종교와 철학의 결합은 소크라테스가 이 대화편에서 처음에 철학을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남녀 사제(司祭)들’이 주장하는 교리로서 언급할 때 시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플라톤 철학의 이 측면은 퍽 많은 대화편에 있어서 대미를 장식하곤 하는 일종의 관례적 장치로서의 대신화(大神話)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대의 신화는 『국가ㆍ정체(政體)』 말미의 에르(Er) 신화이다. 이곳에는 혼의 전체 역사, 곧 혼의 육신으로의 연속적 환생이 혼이 지상에서 사는 삶과 삶 사이에 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며 또 혼이 마침내 정화(淨化, κάθαρσις, katharsis, catharsis, purification or cleansing)되었을 때, 어떻게 혼이 윤회(輪廻, reincarnation)에서 벗어나게 되는지가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 본 진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 신화에서 혼이 막 육신으로 재탄생할 즈음에 어쩔 수 없이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의 강물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로 설명되고 있다. 혼은 불볕더위의 물도 없는 들판을 방금 건너야만 했던 터라 물을 마시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 때 혼은 유혹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나타내 보이는 힘에 의해 [이승에 있어서] 자신이 수행한 철학의 정진(精進) 정도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혼이건 - 육신에서 벗어나 진리와의 영원한 교섭 속에 있게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한 - 모두가 적어도 조금씩은 망각의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 망각의 주제는 희랍에 있어서의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즉 신화와 종교 의식에 있어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플라톤이 전설의 자료를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아마도 육신이라는 장애물에 의한 오염의 실제적 영향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었을 것이다(126-130쪽).
 
 
 

2012. 9. 29.

플라톤, <국가/정체> - 음악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606237



* 플라톤, 『국가ㆍ政體』(개정증보판),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5.



 
 
- 소크라테스: “됐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런데 선생은 어떤 이는 시가(詩歌, 음악, mousikē)에 능하다(교양이 있다: mousikos)고 하되, 또 어떤 이는 시가(음악)를 모른다(교양이 없다: amousos)고 말하겠구려?”
 
- 트라시마코스: “저는 그럽니다.”(107, 1권 349d-e)


 
  
* 역주 66) 본격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의 활동인 철학(philosophia)이 있기 이전의 헬라스인들에게 있어서는 시가(mousikē)가 그들의 교육 또는 교양의 전부인 셈이었다. 따라서 시가에 능하거나 밝은(mousikos) 사람이 곧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 호메로스의 『일리랑스』나 『오디세이아』는 가히 경전적(經典的)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의 등장은 이런 지위를 누려온 시가에 대한 도전처럼 시인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헬라스에 있어서 철학과 시(詩) 사이의 불화가 여기서 발단한다(107).

 
  
- 소크라테스: “그러니, 글라우콘! 시가를 통한 교육[양육: trophē]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겠지? 즉, 리듬과 선법(線法, 和音, harmonia)은 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또한 어떤 사람이 옳게 교육을 받는다면, 우아한(고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반대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말일세. 그리고 또 시가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을 받은 이는 빠져서 없는 것들과 훌륭하게 만들어지지 못한 것들 또는 훌륭하게 자라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알아볼 것이며, 그야말로 옳게 싫어할 줄을 알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고 기뻐하여 혼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이것들에서 교육을 받아, 스스로 훌륭하디 훌륭한 사람으로 되는데, 일찍이 어려서부터, 그 논거(이론: logos)도 알 수 있기 전에, 추한 것들은 비난하고 미워하기를 옳게 하다가,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인지라,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서는 제일 반길 것이기 때문에 말일세.”
 
- 글라우콘: “제게는 어쨌든 그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시가 교육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220-221, 402d-402a)
 

 
 
* 역주 59) 여기에서 시가를 통한 교육의 원어는 en mousikēi trophē이다. 헬라스인들은 성격 또는 인격(ēthos) 형성과 관련해서 아주 체계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용어 사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ēthos는 ethos(습관, 버릇)에서 형성되고, ‘습관’은 반복되는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으로 굳어진 습성(굳어진 상태, hexis)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플라톤의 교육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德論)도 이에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시가 교육과 관련해서 하고 있는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400c-e에서 보자. to eurhythmon(eurhythmia: 좋은 리듬), eulogia(좋음 말씨), euarmostia(조화로움), euschēmosynē(좋은 모양, 우아함), euētheia(좋은 성격, 좋은 성품) 등은 모두 eu(잘, 훌륭하게: well)라는 말과 결합된 복합어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반복성’이나 굳어진 상태(hexis)를 전제로 한 말이다. 그런 성격 또는 인격을 다듬어 가고서야 훌륭한 사고(dianoia)의 틀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220).
 

 
* 역주 60) ‘시가 교육’은 곧 ‘시민 교육’이다. 이는 시가 교육을 통해서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ēthos) 형성과 함께 건전한 생각, 즉 그런 ‘의견’이나 ‘판단’ 또는 ‘소신’(doxa)을 갖도록 하고, 이를 지키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교육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단련과 주입의 과정이다(221).
 

 
- 소크라테스: “내가 생각하기에는 ‘움직이는 운동’(phora: 장소적 이동의 운동, 운동 일반은 kinēsis)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종류가 있는 게 틀림없으이. 누구든 현자라면야 아마도 그 모두를 말할 수 있을 걸세. 우리에게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일세.”
 
- 글라우콘: “어떤 것들인데요?”

- 소크라테스: “천문학에 더해 이것과 상관적인 것이 있네.”

- 글라우콘: “어떤 것인가요?”

- 소크라테스: “눈이 천문학에 맞추어져 있듯이 귀는 화성학적 운동(enarmonios phora)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학문들(epistēmai)은 서로 자매관계에 있는 것 같으니. 여보게 글라우콘! 피타고라스학파가 그렇게 주장하고 우리도 동의하듯이 말일세. 아니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글라우콘: “동의합니다.”

- 소크라테스: “그러면 이는 큰 일거리이므로 그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그리고 이것들 이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 그들한테서 들어볼 걸세.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맞서서 우리의 주장을 지킬 것이네.”

- 글라우콘: “그건 어떤 것들인가요?”

- 소크라테스: “우리가 양육하게 되는 사람들이 이것 가운데 어느 것이나 결코 불완전한 형태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방금 천문학과 관련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이르러야만 되는 거기에 언제나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로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혹시 화성(和聲, 線法, harmonia)과 관련해서도 사람들이 또 다른 유의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을 자네는 모르고 있는가? 그들도 들리는 협화음(協和音, symphōnia)들과 소리들을 대비적으로 측정함으로써, 천문학자들처럼 헛수고를 하기에 말일세.”

- 글라우콘: “단연코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그들은 어떤 것들을 조밀음정(稠密音程, pyknōmata)으로 부르며, 마치 이웃의 소리를 엿들으려는 사람들처럼 귀를 갖다 댑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에 있는 음마저도 듣는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좁은 ‘음정’(diastēma: 음정의 폭이 가장 작은 것)이라 부르며 이것으로써 음들을 측정해야만 한다고 말하나, 다른 이들은 그걸 이미 내어본 소리와 같은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들은 양쪽 모두 지성(nous)보다도 귀를 앞세웁니다.”

- 소크라테스: “자네는 현(絃)들을 괴롭히며 줄감개에다 이것들을 조이면서 고문하는 그 훌륭한 양반들을 두고 말하는 게로구먼. 그러나 채로써 하는 현들에 때림이라든가 또는 비난에 대한 현들쪽의 거부나 엄살 등의 관련된 비유가 더 길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를 그만 두거니와,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방금 우리가 화성과 관련해서 묻고자 한다고 했던 그 사람들일세. 그들은 천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똑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세. 그들은 이들 들려오는 협화음들에 있는 수(數)들을 찾되, 문제들로 올라가지는 않는다네. 즉 어떤 수들이 협화음들이고 어떤 것들이 아닌지를,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각각의 경우악 그러한지를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네.”(482-484, 530c-531c)
 
 

* 역주 49) 피타고라스 학파는 실험에 의해 한 옥타브에 있어서 제일 낮은 음과 8도음, 5도음 및 4도음 간에는 현의 길이로 따져서 각각 2:1, 3:2, 4:3의 비례 관계가 성립함을 알게 되었다. 이 실험은 하나의 줄을 갖고서 기러기 발 같은 것으로 이동시키며 측정한 것이다(483).
 
 

* 역주 50) 조밀음정: pyknōmata (단수는 pyknōma)는 어원상으로 ‘조밀한’(pyknon) 음정(diastēma)의 뜻이다. 아리스토크세노스(Aristoxenos)는 그의 『화성학』 I. 24. 10-15d에서 이를 pyknon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리고 있는 그것의 의미 규정에 따르면 ‘4음 음계의 음정에 있어서 결합된 두 음정이 나머지 음정보다도 더 작은 쪽’의 음정을 가리킨다. 이를 테면 두 4분음의 음정 또는 반음들의 음정이 그런 경우이다(483).
 

  

2012. 7. 28.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탈레스 / 김인곤



8. 파르메니데스

8. 단편 2. 프로클로스(DK28B2)

자,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그대는 이야기(mythos)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5]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알게 될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9. 단편 3. 클레멘스/플로티노스(DK28B3)

...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 (클레멘스 『학설집』VI.23 / 플로티노스 『엔데아데스』 V.1.8)

12. 단편 6. 심플리키오스(DK28B6)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나는 그대에게 명한다. 왜냐하면 그대를 탐구의 이 길로부터 우선 <내가 제지하는데>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죽어야 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5]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는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무기력함이 헤매는 누스를 지배하고 있기에) 그 길로부터 [그대를 제지하기에]. 그들은 귀먹고 동시에 눈먼 채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판가름 못하는 무리로서, 이끌려 다니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의 길이 되돌아가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17)

13. 단편 7. 플라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DK28B7)

그 이유는 이렇다. 이것,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 그리고 습관이 [그대를] 많은 경험을 담은 이 길로 [가도록], 즉 주목하지 못하는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5] 못하게 하라. 다만 나로부터 말해진, 많은 싸움을 담은 테스트를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1-2행: 플라톤 『소피스트』 237a, 258d / 2-6행: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한 반박』VII. 111)

14. 단편 8. 심플리키오스(DK28B8)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5]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10]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15]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아낭케)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20]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이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25]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이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30]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35]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40]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새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 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45]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 균일하게 있기에.
[50] 여기서 나는 그대를 위한 확신할 만한 논변과 사유를 멈춘다.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시적인 의견들을 배우라, 내 이야기들의 기만적인 질서를 들으면서. 왜냐하면 그들은 이름 붙이기 위해 두 형태를 마음에 놓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래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헤맸던 것이다.
[55] 그리고 그들은 형체에 있어 정반대인 것들을 구분하였고 그것들 서로 간에 구분되게 표지들을 놓았다. 즉 한편에는 에테르에 속하는 타오르는 불을, 부드럽고, 아주 가벼우며, 모든 방면에서 자신과 동일하되, 다른 하나와 동일한 것이 아닌 [불을 놓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저것도, 그 자체만으로 정반대인 어두운 밤도, 조밀하고 무거운 형체인 [밤도 놓았다].
[60] 이 배열 전체를 그럴듯한 것으로서 나는 그대에게 설파한다. 도대체 가사자들이 그 어떤 견해도 그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1-52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45-146 /
50-61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38-39)

27. 콘포드 단편. 플라톤

그런 부동(不動)의 것은, 전체로서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
( 『테아이테토스』 180e)




         
*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니체전집 3.유고(1870~1873년)』,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1.



파르메니데스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성질들을 서로 비교하여, 이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가 빛과 어둠을 비교하면, 두 번째 특성은 오직 첫 번째 성질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긍정적 성질과 부정적 성질을 구별하려고 했으며, 자연의 전 영역에서 이 대립을 다시 발견하고 명시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그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예를 들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같은 몇 가지 대립들을 채택했으며, 이들을 전형적인 대립인 빛과 어둠으로 분류했다. 밝은 것에 상응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어두운 것과 일치하는 것은 부정적인 성질이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은 어두운 것의 편에 속했다. 따라서 무거운 것은 그에게는 단지 가벼운 것의 부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벼운 것은 긍정적 성질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부터 이미 감각의 간섭을 차단하면서 추상적-논리적 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산출된다. 무거운 것은 사실 우리의 감각에 긍정적 성질로 와 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무거운 것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흙을 불과 대립시키고, 차가운 것을 따뜻한 것과 대립시키고, 두꺼운 것을 얇은 것과,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과 그리고 수동적인 것을 능동적인 것과 대립시켜 이들 모두를 오직 부정의 형식으로만 표시했다. 그래서 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 즉 - 밝고 불과 같고 따뜻하고 가볍고 얇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 긍정적 성질들의 영역과 부정적 성질들의 영역으로 나뉜다. 후자의 성질들은 오직 다른 긍정적 성질들이 결여되어 있는 영역을 어둡고, 흙과 같고, 차갑고, 무겁고, 두껍고,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성질들로 표현한다. 그는 ‘긍정적’과 ‘부정적’이라는 표현 대신에 ‘존재적’과 ‘비존재적’이라는 확고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낙시만드로스와는 모순되는 명제, 즉 우리의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비존재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공식에 이르렀다. 우리는 존재자를 세계의 밖에서 그리고 우리의 지평 너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바로 앞에, 도처에 그리고 모든 생성 속에는 존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활동 중이다(396~397쪽).

파르메니데스는 공동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대립을 탐색했다. - 이 대립들의 욕망과 증오는 세계와 생성을 구성하고, 존재자와 비존재자 그리고 긍정적 성질들과 부정적 성질들을 구성한다 - 그리고 그는 갑자기 부정적 성질인 비존재자의 개념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거기에 매달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성질일 수 있는가? 또는 더 근본적으로 질문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즉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인식의 형식은 ‘A는 A다’라는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ie)이다. 그런데 바로 이 동어반복적 인식이 그에게 가차 없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는 갑자기 엄청난 논리적 죄악이 자신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부정적 성질들, 간단히 말해 비존재가 존재한다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A≠A’라고 아무 주저 없이 가정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을 세운다는 것은 완전히 도착된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 그는 모든 인간 광기의 저편에서 세계의 비밀에 이르는 열쇠, 즉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제 존재에 관한 동어반복적 진리라는 확고하고 가공할 만한 손에 이끌려 사물들의 심연으로 들어간다(401~402쪽. 인용자 강조).

그[파르메니데스]는 이제 경악할 만한 추상적 개념들의 목욕탕에 들어갔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것이 있었다’ 또는 ‘그것은 있을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생성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존재로부터란 말인가? 그렇지만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존재자로부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생성처럼, 즉 모든 변화, 증가, 감소와 같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명제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과거에 존재했다’ 또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분할될 수 없다. 그것을 분할할 수 있는 제2의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존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도대체 어느 곳으로 움직인다는 말인가? 존재자는 무한히 크지도 또 무한히 작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주어진 무한성이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제한[한정]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고, 부동(不動)적이고, 마치 하나의 공처럼 어느 곳에서나 균형을 이루고 어느 지점에서나 완성된 형태로 부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공간은 두 번째 존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존재자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하나의 가정이다. 따라서 오직 영원한 통일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파르메니데스가 예전에는 풍부한 의미의 사상들을 통해 그 실존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생성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이 생성 일반을 보고 있으며 또 자신의 귀가 생성 일반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제 그의 명법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우둔한 눈을 따르지 말라, 메아리처럼 울리기만 하는 저 귀 또는 혀를 믿지 말라, 오직 사유의 힘만으로 확인해보아라!” 이로써 그는 인식기관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수행했다. 그것이 설령 불충분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과 감각을 마치 두 개의 분리된 능력인 것처럼 예리하게 떼어놓음으로써 지성 자체를 파괴했으며, 완전히 그릇된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그런데 이 분리는 특히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모든 감각적 지각은 오직 착각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판단한다. 그리고 이 지각들의 주된 기만은 그것들이 비존재자 역시 존재하며 또 생성 역시 하나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위장한다는 점이다. 경험적으로 알려진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이 세계의 성질들의 변화, 이들의 상승과 하강에서의 질서는 단순한 가상과 공상으로서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었다. 이것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고 꾸며진 그래서 철저하게 가치 없는 이 세계에 쏟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처럼 그렇게 전체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것에서는 자연 탐구자이기를 그만둔다. 현상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들어버리고, 이 감각의 영원한 기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난다. 진리는 이제 내용이 다 빠져버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일반성들 속에서만, 즉 아무것도 규정해주지 않는 말들의 빈 껍데기 속에서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거미줄로 이루어진 집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런 ‘진리’의 곁에 이제 철학자가 앉아 있다. 마치 하나의 추상적 개념처럼 핏기 없이 온통 공식들의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거미들은 제물의 피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적 철학자는 바로 이 제물의 피를 증오한다. 그에 의해서 희생된 경험의 피를(403~405쪽).




 
***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비존재(결여)' 사이, 혹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에 설정한 이러한 이른바 '본질적' 구분을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이라 부르겠다.






철학자, 지혜를 추구하는 자

 




<파이드로스> - 플라톤 / 조대호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지혜(sophia)'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처음으로 구분한 것은 피타고라스(Pythagoras)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일컬어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자'라는 뜻에서 'philosophos'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플라톤은 <<국가>> 475b에서 '철학자'를 지혜, 특히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pases sophias epithymetes)로 정의한다.



- 151쪽. 역주 428.

인간, 폴리스적 동물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서양철학의 뿌리> - G.L.디킨슨 / 박만준 외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 218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는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 G. L. 디킨슨,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 서양철학의 뿌리』(1961), 박만준ㆍ이준호 옮김, 서광사, 1989.



그리스에는 교회나 교의(敎義), 그리고 지켜야 할 강령조차 없었다. [...] 사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단지 일정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 위해 임명된 관리에 불과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에는 성직자와 속인의 구별이 없었다. 시와 교리의 구별도 없었다(13~14)
사람들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이 세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이다. [...] 결국 신적인 것, 즉 그리스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맹목적인 운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16~17).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없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에는 교회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국가가 승인하는 종교도 없었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교는 국가의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전반적이고도 세부적으로 국가의 전체 구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의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즉 국가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조직으로서의 교ㅚ가 그리스에 없었던 까닭은, 어느 측면에서 국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으며 또한 국가는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자연 세계를 주재하고 있는 동일한 신들로부터 승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리스 종교가 정치적 생활의 정신적 측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1~22).
그리스 종교는 논리적인 문장으로서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의 프로테스탄트보다는 로마 가톨릭에 더 가까운 것이다. [...] 불완전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과 우리의 견해로 추정해보면, 디오니소스 축제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종교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의 천재성. [...] 그리스 종교는 종교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인의 독특한 성격이 고찰된 그 초기에 있어서는 그들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분리시키 고찰하려는 의도는 잘못된 것이다(25~26).
그리스 신들은 그 형상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존재인데, 그것은 정신적 혹은 무형적 속성에서가 아니라, 힘, 아름다움, 불멸성 등과 같은 외부로 나타나는 재능에서 탁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인과 신의 관계는 내면적ㆍ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적ㆍ기계적인 것이었다(30).
인간과 신의 모든 관계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성격을 지닌 관계이다. “만약 너희들이 할 일을 다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한 쪽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적(계약적)인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종교적 의미의 죄나 양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34).
외형적인 의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신체적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
오직 은총으로서만 멀리 쫓아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도교) (37)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주제는 바로 죄와 그 죄에 대한 벌로 일관한다. [...] 그의 주제는 참된 의미에서 죄를 지은 자의 도덕적 양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은 죄에 가해지는 객관적 결과에 대한 것이다. [...] 흔히 말하는 비극은 “피는 반드시 피를 부른다”는 외면적ㆍ객관적 법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며, 단지 그것이 전부이다. [...]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적 관념은 내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며 기계적인 것이다(37~40).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무신론자는 필연적으로 반사회적ㆍ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 [...] 이 시의 지은이[아리스테파네스]에 의하면, 이성에 대한 예찬은 사리사욕에 대한 예찬과 동일한 것이다. 그가 뜻하는 바는 곧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가족이나 국가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71).
그리스의 국가 규모가 그 형성 과정에서 극히 우연적인 성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국가의 본질적 성격은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 국가의 규모는 바로 국가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80).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공적 생활’이란 [...]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것이었다. [...] 국가의 이상과 개인의 이상은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거의 구분조차 될 수 없었다. [...] 우리는 개인을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보아야 한다(82~84).
이[데모스테네스의 연설]와 같이, 보편적 원리인 법은 개인적 성향으로서의 본성과는 대립되는데, 이러한 대립 속에는 법과 정의는 동일하다는 묵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85).
고대 그리스 국가는 일차적으로 군사 조직되었으며 또 그렇게 존속되었다. [...] 사실 『국가』 전체를 통해 플라톤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인 계급이 아닌 군인 계급이다. [...] 시민에 대한 귀족적 관념. [...] 그리고 우리가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대체적인 그리스인의 관점이 바로 이러한 귀족적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93).
우리는 스파르타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한 그리스 정치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리스의 독자적인 정치 모형에 가장 근접한다고 볼 수 있겠다. [...] 무조건적인 국가 유지는 곧 개인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목적이 되었다(109).
플라톤이 주장한 이상 국가는 대개 스파르타를 그 전형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파르타 정치 체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군사적인 덕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한 것, 그리고 삶의 조화로운 측면을 지나치게 억압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14).
아테네의 정치 체제는 마지막에 극단적인 민주주의로 끝나는데, 이것은 그리스 국가의 일반적인 정치 체제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118).
“간단히 말해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이며, 고유의 인격을 갖춘 아테네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최고의 품위와 재능을 갖추고 자신을 다양한 형태의 현실에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헛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이다.” -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125)
우리는 그가[플라톤이] 가르친 주제가 바로 정의의 이념을 강한 자의 이해와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정의의 이념을 만인의 보편적 이해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29).
오늘날 우리가 덕(德, virtue)이라 옮기는 단어[arete, ἀρετή]는 탁월성(excellence)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며, 또 그것은 영혼에 대한 의미만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 “아름다운 육신 안에 아름다운 영혼” [...] 그리스인에게 훌륭한 육체와 훌륭한 영혼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이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균형과 조화였다. 육신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지 않은 한 그들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거의 믿지 않았다(137~141).
중용. 델포이의 신전. “지나치면 쓸모 없다.” [...]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균형을 잃거나 그릇된 욕망의 방종이라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분별 있는 사람’(êthos의 학, ethikē)이 “당연한 경우에 적정한 시간 동안 적절한 방식으로 상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절대적 법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르는 유동적 작용 = 실천적 지혜 pronesis] 모든 삶은 그 삶을 사는 인간에 의해 구체화된 예술 작품이다. 그 작품의 질은 예술가 자신의 능력에 일치할 것이며, 모든 경우에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대체될 수 있는 일반적 규칙은 결코 없다. 선은 올바른 비례, 올바른 방식, 올바른 경우이다. 반면 악은 ‘옳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선이나 악이 구체화될 수 있는 순수한 소재일 뿐이다.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147~148).
육체의 욕망과 영혼의 정념을 제어하는 이성이라는 마부. 그리스 최고의 금욕주의자 플라톤조차도 우선 그리스인이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금욕주의자인 것이다(149).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연인의 관계인 동시에 친구의 관계였다(159).
우리가 아는 한, 고대 그리스에서 혼인과 관련된 연애는 거의 없거나 전무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 우리는 [...] 아테네에서 혼인이 당사자의 관심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나이, 재산, 친분 관계 등에 따라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이 혼인 제도를 명령했다는 크세노폰의 말(164~165).
그리스에서 우정은 하나의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175). 테베군단. 플라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지혜의 실마리이다. 그리고 모든 사랑의 형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남성이 다른 사람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고, 정신적 사랑이며, 또 특정한 육체와 영혼에 대한 정열로부터 최고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탁월성에 대한 열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이며, 그 사랑의 완전한 인간적인 형태는 단지 희미하고 불충분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한 사랑이 보다 고차적인 삶에로의 출발인 동시에 덕과 철학과 종교의 원천이다(180).
인간의 탁월성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그리스 예술이 추구하는 바이다. 그 탁월성은 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그리고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묘사하는 것은 또한 무엇이 선한가를 묘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201~202).
그리스인의 경우에 조각과 회화는 미학적 쾌락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 생활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양식이기도 했다. 조각의 기본적 목적은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며, 각각의 경우에 순수한 미적 쾌락 또한 종교적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 실제로 조각은 종교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으며, 종교를 통해 국가 생활에 예속된다(202~204).
한 마디로 예술은 윤리적 이상에 종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윤리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이 분리되지 않았다(206).
‘음악’ - 좁은 의미로 무용과 서정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 은 그리스 교육의 중심이었으며, 따라서 음악의 도덕적 성격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 도덕적 성품은 음악이 갖고 있는 감화력에 기인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인이 일반적으로 윤리적 기준과 미적 기준을 동일시했다는 데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충격적인 설명일 것 같다. [...] 그리스인의 견해에서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구성되어 있는 비율이며, 올바른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올바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의 상호 관계는 음악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음악과 도덕] 음악은 성격을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206~207).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의 ‘음악’은 가락과 운문 및 무용의 긴밀한 결합이었으므로, 리듬과 선율이 간직하고 있는 특수한 인간적 의미는 언어와 몸짓을 수반함으로써 완전히 명료해진다(209).
언어에 의해 정신으로 전달되고, 선율에 의해 전달되는 감성적 성격은 이제 몸짓, 자세, 발동작에 의해 눈에까지 이르는 등 훨씬 잘 이해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세 양식이 결합하여, 그리스적 의미의 ‘미메시스’ 예술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음악과 마찬가지로 무용 역시 뚜렷한 윤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용이 성격, 감정 및 행위를 모방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론에서 무용을 음악과 함께 법률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9~210).
그들[그리스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윤리적 상태는 음악적 상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덕이 영혼의 조화(harmonia)라는 것은 비유적인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음악의 목적은 윤리적 목적과 일치한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이며, 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 덕과 아름다움은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즉 단 하나의 사실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다. [...] 선함과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품었던 이상의 전부이다(211~212).
실제로 시인들의 저술, 특히 호메로스의 저술은 그리스인과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 보고서이다. 오늘날은 추상적 용어로 도덕 수업을 받지만, 그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구체적 묘사로부터 도덕 수업을 받았다(213).
스트라보, “당신은 먼저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훌륭한 시인도 되기 어렵다.”(214)
그리스 비극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비극이 공연된 기간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였다(216).
아리스토텔레스. 참된 비극의 영웅은 천박하지 않은 본성을 타고나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며, 죄를 범했을 때 자기 행위에 대한 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다(218).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그리고 이 전제를 파괴하는 것은 곧 비극의 참된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다(218~219).
*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성격보다 행위를 강조했다. [...] 그리스 연극의 주제는 보편적 인간이며, 근대 연극의 주제는 개인이다(220~221).
그리스 연극은 음악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페라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극은 서정시로부터 발전되었으며, 처음에 서정시의 유일한 요소였던 합창단의 무용과 노래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율동적 동작과 풍부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부담이 덜어졌고 생동적 사실은 답가의 영역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구성의 명석하고도 엄밀한 의미는 절정에 달해서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가슴의 정열은 음악 속에서 자각되므로 이념은 서정적 운문으로 구체화되고 운문은 노래에 의해 이념화되었다. 노래와 운문은 온몸의 몸짓에 의해 거울 같은 눈에 반영되고 눈은 몸짓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연극의 행위를 연출하는 송시(頌詩)의 성격은 지금 말한 바와 같지만, 행위 그 자체는 정열과 지성보다 눈과 귀에 더 호소력이 있다. 공연의 환경 즉 개방된 분위기의 거대한 청중석은 낭송 등에 적합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극 행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배우는 보통 장화보다도 훨씬 긴 것을 신고 무대에 오르는데,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고, 목소리도 가성이다. 이것은 그 연극적 효과를 위해 배우들이 표정 연기, 목소리 혹은 빠른 몸짓의 섬세한 변화가 아니라, 자세의 균형 및 빠른 회화적 말투 때문에 운율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장엄한 이암보스 시의 단조로운 억양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연은 눈에 대해서는 움직이는 조각이며, 귀에 대해서는 합창단이 부르는 격렬한 간주곡 사이에 있는 음악적 휴지부와 같은 것이다(222).
그리스 희극 역시 비극과 마찬가지로 노래와 무용이 기초이다(229).
전체 속에서만 부분이 실현된다. [...] 덕이라고 정의되는 성질은 오직 폴리스 속에서만 그 의의를 갖는다. 개인은 폴리스의 시민인 한에서만 완전한 한 인간이다(236).
그리스에 대한 이해 없이 니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영혼, 육체의 감옥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 오생근



"영혼은 육체의 감옥이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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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혹은 플라톤, 구약 혹은 예수 이래 '서양'을 구성한 문명 도식이었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말을 뒤집은 푸코의 결정적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