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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4.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 1853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853610, 금요일, 런던
 
 
판에 박힌 형태의 이 자그마한 [인도의 촌락이라는] 사회 유기체는 영국의 징세관과 영국의 병사가 자행한 야수적 간섭에 의해서라기보다 영국의 증기력과 영국 자유무역의 작용에 의해 대부분 해체되고 소멸되었다. 이러한 가족 공동체들은 가내 공업, 즉 손()노동에 의한 방적, 손노동에 의한 경작의 독특한 결합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결합이 이 공동체들에 자급자족의 힘을 가져다주었다. 영국의 간섭은 방적공을 랭카셔에, 직조공을 벵골에 가져다 놓으면서 혹은 인도인 방적공과 인도인 직조공을 일소하면서, 반은 야만적이고 반은 문명적인 이 자그마한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를 폭파시켜 버렸고 그리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의 간섭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 실은 아시아 유일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이 수많은 근면하고 가부장제적이며 무해한 사회 조직이 해체되고 각 구성단위로 분해되어 고통의 바다에 던져지는 과정, 그리고 그 개개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고대문명 형태와 자신들의 전래의 생활 수단을 동시에 상실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아무리 애절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목가적 촌락 공동체가 언제나 동양 전제 정치의 견고한 기초를 이루어왔다는 것, 이 촌락 공동체가 인간 정신을 있을 수 있는 가장 좁은 틀에 제한하였고 또한 인간 정신을 미신의 온순한 도구로, 전통적 관습의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 웅대함과 역사적 정력을 앗아 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야만의 이기주의 때문에 촌락 공동체 주민들은 땅 조각에만 신경을 쓸 뿐이지 제국들의 멸망이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잔학 행위들 또는 대도시 주민들의 학살 따위는 강 건너 불 바라보듯이 방관하게 되어, 결국 그들 자신은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정복자들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적 존엄을 모르고 정체해 있으며 식물과 다름없는 이 생활, 이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 다른 한편으로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맹목적이며 멈출 줄 모르는 파괴력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인을 힌두스탄의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자그마한 공동체가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과 노예제라는 오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인간을 환경의 지배자로 올려 세우는 대신에 외적 환경에 예속시켰다는 것, 자기 발전하는 사회 상태를 결코 변하지 않으며 자연에 의해 부여되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리하여 자연의 지배자인 인간이 원숭이 하누만과 소 삽발라를 숭배하여 그 앞에 무릎을 조아리는 사실에서 인간을 어마나 값어치 없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는 자연 숭배를 낳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세계의 붕괴 광경이 우리의 개인적 감정에 아무리 애통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괴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칠 권리가 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쾌락을 늘리거늘 /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번민할 까닭이 있는가. / 티무르의 지배도 / 무수한 생명을 유린하지 않았던가?”
 
 
Sollte diese Qual uns quälen / Da sie unser Lust vermehrt; / Hat nicht Myriaden Seelen / Timurs Herrschaft aufgezehrt?(416~418)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줄레이카에게>(An Suleika)[티무르 시편(Timur Nameh: Buch des Timur) ], 西東詩集(West-östlicher Divan, 1819/1827), 418.
    
 
- 뉴욕 데일리 트리뷴3804, 1853625일자. 맑스엥게스 저작집, 9, 127-133. 영어 원문으로부터 김태호 번역.
 
 
 
 
 
줄라이카에게
 
 
아름다운 향내로 그대를 애무해서
그대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미꽃 봉오리들이
먼저 불길에 스러져야 한다.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조그만 병 하나, 그대 손가락 끝만큼이나 날씬한
병 하나를 얻는 데에도
하나의 세계가 희생되어야 한다
 
 
솟구치는 그리움 속에서
이미 꾀꼬리의 사랑을,
그 황홀한 사랑의 지저귐을 예감하며
힘차게 움터 나오는 생명의 세계 하나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이 꽃봉오리들의 수난을 우리가 괴로워해야 할까?
티무르의 지배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가야 하지 않았던가?
 
 
Sollte jene Qual uns quälen,
Da sie unsre Lust vermehrt?
Hat nicht Myriaden Seelen
Timurs Herrschaft aufgezehrt?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동시집, 안문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6.
 
 
 

2013. 4. 2.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Marguerite Yourcenar, 1903–1987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누구나 각각 자기 자신의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법이다."(2권, 79)
 
 
 
 
 
나는 쉴 새 없이 책을 읽는다. 아니,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것은, 책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책을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물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며, 결국 읽는 동안의 살아있다는 유쾌한 체험을, 읽은 후의 즐거운 피로를 낳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독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들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저자는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역시 매우 드물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도 평생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저자,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저자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쉽지 않은 행운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저자들 중의 한 사람, 아마도 나의 기질 중 하나에 꼭 들어맞는 작가를 발견했다.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책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가히 우주에 대한 유쾌한 명상을, 삶에 대한 사려로 가득 찬 천착을, 나 자신과 대면하는 나만의 시간을 내게 돌려준다.


 

화자는 2세기 로마의 14대 황제이자 오현제 중 세번째로 일컬어지는 하드리아누스이다. 책의 모든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나로서는 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긴다. 가령, 아래에 내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옮겨 적어놓은 문장은 나의 어린 시절 이래 내가 언제나 억눌러 왔던 나 자신의 한 부분을 상기(想起)시킨다. 삶에 대한, 관념의 진지한 정적(靜寂)주의(quietism).
 
 
 
 
그렇다.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라는 플로베르의 한 문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은 신 없이 사는 나의 감성에 더 없이 꼭 맞는다. 결국, 신 없이 산다는 것 역시 신 안에서 사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 자신의 신 앞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다.
 
 
 
더하여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최상급이다. 공들인, 제대로 된, 원저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탁월한 번역이다. 그리고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의 1951년 이 저작은 단순히 걸작이다. 더하여, 사실 이 책은 모든 이들이 리더가 되고 자기 자신의 통치자가 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 이 시대에 두루 읽혀 마땅한 책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이 책이 정신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점만은 미리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게 유르스나르의 글을 통해 울려퍼지는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바로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의고주의, 격식과 형식을 차리는 언어에의 조탁. 병도 삶의 일부이며, 더욱이 죽음이야말로 삶의 일부이다. '조숙한 애어른'이라는 규정은 타자적이다. 나의 나의 고통을 다스려줄 문학적 기교들, 기법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내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한 스타일로서 추구할 권리를, 아니 의무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수사학 없이 말할 수는 없다. 말하고 글쓰는 일 자체가 초보적인 것일 망정 하나의 수사학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사학 없이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학과 철학에 막 입문한 이들 거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이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도 수사학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선택지를 보여준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의 수사학, 삶의 비참과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수사학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낀지 삼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



 
"이 이야기는 단 한 사람-그는 나 자신인데-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나를 어떤 결론으로 이끌고 갈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규명하고 또 아마도 판단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이 사실 검증에 기대를 걸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인간의 생존을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세 가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자신에 대한 연구 : 이것은 방법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풍요로운 것이고 하다. 둘째, 사람들에 대한 관찰 :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조처한다. 셋째, 독서 : 책들은 글의 행간에서 태어나는 관점상의 특수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역사가들, 시인들, 심지어 이야기 작가들-이 후자들의 경박하다고 평판이 나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쓴 것들을 나는 거의 모두 읽었고, 아마도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삶의 무척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얻었을 것이다. 서한문은 나에게 인간의 말소리를 듣기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은 조상(彫像)들의 움직임 없는 자태가 몸짓들을 분별하기를 가르쳐 준 것과 똑 같다. 반면, 삶은 그 후에 나에게 책들의 내용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책들은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가장 진지한 책들까지도. 가장 능숙하지 못한 책들은, 삶을 함축할 수 있을 단어들, 문장들을 저자가 구사하지 못해, 삶에 대해 평범하고 빈약한 이미지밖에 남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 루카누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중함으로써 무겁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반대로 다른 작가들, 페트로니우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가볍게 하다 못해 속이 텅 빈 튀는 공으로 만들어, 그것을 무게 없는 세계 속에서 쉽사리 던지고 받는다. 시인들을 우리들을,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 세계보다 더 광활하거나 더 아름답고 더 열렬하거나 더 감미로운 세계로 옮겨 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런 만큼 다른,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살 수 없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은 현실은 순수한 상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불이나 절굿공이가 물체에 과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변화를 현실에 과한다. 그러나 그런 연후에,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바의 한 존재나 한 사상(事象)에서 아무 것도, 그 재나 그 결정체 가운데 존속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에 대해 우리들에게 너무나 완전한 체계,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 체계와 인과관계가 결코 전적으로 진리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 다루기 쉬운 죽은 재료들을 재조정하는 것이며, 나는,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언제나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 작가들이나 밀레토스 풍의 우화 작가들은 푸주한들처럼, 파리들이나 좋아해 덤벼들 조그만 고기 조작들을 진열대에 걸어 놓는 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책 없는 세상에 아주 못 만족할 터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책 속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책 속에 전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더더욱 불완전한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악의가 만족을 얻는 아주 저열한 검증만으로 끝난다. 신분, 입장,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우연적인 상황들이 인간 감정가의 시야를 제한한다. 나의 노예는 나를 관찰함에 있어서, 내가 그 자신을 관찰함에 가지고 있는 용이함과는 전적으로 다른 용이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용이함이나 나의 용이함은 똑같이 제한적인 것이다. 나의 늙은 노예 에우포리온은 20년 전 이래 나에게 기름병과 수건을 가지고 와 시중을 들지만, 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시중으로 끝나고, 그가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목욕으로 끝나며, 그 이상 알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황제에게나 노예에게나 곧 무례함의 인상을 준다. 우리들이 타인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혹시 누가 고백을 하는 경우, 그는 자기 입장을 변호할 따름이고, 그의 변호는 완전히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를 관찰하는 경우에도, 그는 혼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로마 치안 당국의 보고서들을 읽기 좋아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나는 그 보고서들에서 언제나 놀라운 화젯거리들을 발견한다. 내 편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잘 아는 사람이든, 거기에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의 미친 짓들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들에 대한 변명이 된다. 나는 옷을 입은 인간을 벌거벗은 인간과 비교하기에 지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너무나 충실하게 상세한 보고서들은 최종 판결을 내리는 데에 나를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채로 나의 서류 더미에 쌓아 올려질 따름이다. 엄격한 외양을 가진, 문제되고 있는 그 행정관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결코 그를 더 잘 알게 하지는 못한다. 이제부터 나는 한 현상이 아니라 두 현상-그 행정관의 외양과 그의 범죄-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에 관한 관찰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의무로 여기는데, 내가 끝까지 그 옆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이 개체와 타협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60여년 간의 친밀성은 이 경우 역시 오류의 가능성을 크게 함축하고 있다. 가장 깊은 내면적 차원에 있어서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은 애매하고, 내심적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이고, 공모처럼 은밀한 것이다. 가장 비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그것은 내가 수(數)에 관해 세울 수 있는 이론들만큼 냉엄한 것이기도 하다 : 이 경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능을, 나의 삶을 멀리서 또 더 높은 데서 바라보는 데에서 사용하며, 이렇게 하여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의 앎은 어렵고, 전자는 자신 내부로의 침잠을, 후자는 자신 외부로의 탈출을 요구한다. 나는 타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 두 방식에 순수히 관례적인 방식들을, -즉 대중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변형된 나의 삶에 대한 생각, 서툰 재단사가 우리 소유의 천을 힘들여 거기에 맞추어 자르는 완전히 준비된 본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 달리 말해 잘못 이루어진 판단을,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모든 방식들은 한결같지 않은 가치를 가진 장비들이요, 다소간 무디어진 도구들이지만, 그러나 다른 것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도구와 장비들을 가지고 그럭저럭,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관찰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무정형하다고 생각됨에 놀란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들려주는 영웅들의 생존은 단순하다. [...] 나는, 위인들이란 바로 그들의 극단적 위치로써 특징지어지며, 그 극단적인 위치를 평생 견지하는 데에 그들의 영웅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극지이거나 대척지인 것이다. 나는 모든 극단적인 위치들을 번갈아 가며 점했으나, 그것들을 견자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그 위치들에서 미끄러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덕 있는, 농부나 짐꾼처럼 중심에 위치한 생존을 자랑할 수도 없다.



나의 나날들을 이루는 풍경은 마치 산악 지대처럼, 마구 뒤섞여 쌓여 있는 갖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서 이미 혼성적인, 균등한 비중의 본능과 교양으로 형성되어 잇는 나의 본성을 만난다. 여기저기 필연의 화강암들이 지표 위로 노출되고, 우연의 낙반은 사방에서 일어난다. 나는 나의 사람을 다시 훑어보고 거기에서 하나의 지도를 발견하여고, 거기에서 납이나 금의 광맥을, 혹은 지하수의 흐름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 전혀 인위적인 지도란 기억의 눈속임일 뿐이다. 때때로 어떤 조우, 어떤 전조, 어떤 확정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서 나는 하나의 숙명을 인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무 많은 수 많은 길들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너무 수많은 금액들은 합산되지 못한다. 그 다양성 속에서, 그 무질서 속에서 나는 정녕 한 인격의 존재를 지각하지만, 그 형태는 거의 언제나 상황의 압력이 그려 놓은 것인 듯하다. 그 용모는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처럼 흐릿하다. 나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을 닮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아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그 행위들 사이에는 규정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증거는, 그 행위들을 평가하고 설명하여 나 자신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내가 끊임없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오래 계속되지 않는 어떤 일들은 물론 무시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전 생애에 걸쳐 있는 활동들 역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가 황제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는 거의 여겨지지 않는다.



[...]




나에게 나의 삶이 너무도 범속하여 기록으로 남겨질 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소라도 오랫동안 관조될 만한 가치조차 없고, 심지어 나 자신의 눈에도 어느 누구의 삶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고, 바로 그 사실로써, 대다수 인간들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기에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아무것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의 미덕들과 악덕들이 그러기에는 충분치 않다. 나의 행복이 나의 삶을 더 잘 설명하지만, 그러나 지속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그럴 뿐이며, 특히 수락할 만한 이유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우연의 손에 받아들여짐을,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신도 주재하지 않는 운의 덧없는 산물에 자나지 않음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삶의 일부분은, 심지어 그 삶이 주목할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출발점을, 근원을 찾는데 흘려보낸다."(1권, 41-49)


2013. 3. 16.

제인 에어 2





 
 
 
 
Charlotte Brontë (1816 –1855)
 









 




"그러나 젊은처럼 외고집을 부리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무경험처럼 맹목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13)



"저를 좋은 부동산 투기나 물색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아시나요?"(49)



"나는 이 조그마한 한 사람의 영국 아가씨를 영양(羚羊)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고 극락의 천녀(天女)처럼 아름다운 터키 황제의 후궁들 전부하고도 바꾸지 않겠어.! / 터키 후궁의 비유가 또 내 비위를 건드렸다. 전 터키 후궁의 대역 같은 건 절대로 안 하겠어요. 그러니 결코 그런 것과 똑같이는 보지 마세요."(64)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오늘처럼 그렇게 사납고 거친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음울하고 신음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 방에 들어와서 비어 있는 의자와 불기 없는 난로를 보자 소름이 끼쳤어요. 그 뒤 얼마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어요. 무언지 모르게 꺼림칙한 내심의 설렘이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바람은 점차로 거세지고 제 귀에는 서글픈 낮은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것같이 들렸어요. 그러나 그게 집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바람이 문득문득 숨을 죽일 적마다 그 소리는 분명하지 않게 구슬피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전 그게 어디 먼 곳에서 개가 짖고 있는 소리라고 판단했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가 멎자 저는 마음이 한결 놓였어요. 잠이 들고서도 꿈속에서 바람 부는 캄캄한 밤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가르고 있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이상하고도 서운한 느낌을 경험했어요. 첫잠이 들면서 줄곧 저는 꿈속에서 꼬불꼬불한 낯선 길을 걷고 있었어요.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비가 저를 후려치고 있었어요. 저는 조그만 어린애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약하디 약한 어린애였어요. 그 어린애는 싸늘한 제 팔에 안겨 떨면서 제 귀에다 대고 가련한 목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저보다 훨씬 앞서서 가신 걸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쫓아가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어요. 그리고 당신을 부르고 가디려달라고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온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고 목소리도 말이 되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자꾸만 멀리멀리 가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86-87)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법이나 원칙은 유혹이 없을 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과 같이 육체와 정신이 그 준엄성에 반기를 들었을 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과 원칙은 엄정한 것이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개인의 편의를 위해 침범되어도 좋은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들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내가 이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그건 내 정신이 이상해진 탓이다. 아주 미쳐서, 혈관은 불 같이 달아오르고 심장은 박동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빨리 뛰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전부터 품어온 의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결심뿐이다. 나는 거기에 꿋꿋이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다."(160)





"이렇게 말하면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농민은 유럽의 어떤 나라의 농민보다도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가장 예의 바르고 가장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프랑스나 독일의 농촌 부녀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내가 가르친 모턴의 소녀들과 비교하면 무지하고 조야하고 어리석어 보였다."(301)




"그녀가 자라남에 따라, 건전한 영국 교육은 그녀의 프랑스적 결점을 많이 교정해 주었다."(423)




***





1권을 읽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2권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녀와 이 소설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에, 대영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것이 보인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처럼, 카뮈의 모든 소설처럼.


그리고 제인 에어(사실은 샤를로트 브론테) 성격의 결점이 보인다. 물론 치명적인 결점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전통 도덕, 영국 성공회 목사의 딸인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쓴 사람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중세인이다. 그녀는, 니체의 말대로, '낙타'인 것이다.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소설적으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특히 그녀의 - 아마도 여성만이 쓸 수 있을(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상하게 여성 화자(話者)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좋았다) -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에 대한 간절한 묘사'는 너무도 섬세하다. 아름답다. 그녀가 서른 아홉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느낌으로 남는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1846년에 쓰여 18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국역본에 근대 혹은 현대라는 번역어가 대략 4-5회(1권 175, 2권 45, 229, 264) 나오는데, 원래 용어가 무엇이었는지 원문을 대조해 확인해 보아야 겠다.













2013. 2. 5.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나의 만남





 
 
erich fromm, 1900-1980
Beyond the Chains of Illusion: my encounter with Marx and Freud [1962]
 
 
 
 
 
 
 
 
 
 
 
 
"인간적인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17)
 
 
 
 
 
 
 
 
 
 
 
 
"어떤 상황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싶다는 소망은 그러한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 자체를 버리고 싶다는 소망이다(마르크스)."(20)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가 분석가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또는 미워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분석가의 현실적 인격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프로이트는 관찰하였다. 그래서 그는 환자가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에 대해 체험한 사랑이나 두려움 또는 미움의 감정을 분석가에게 옮긴다(전이, 轉移)는 가정에 따라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55)
 
 
"사람이 무의식을 발견하는 일은 정확히 개념적 행위에만 머무르지 않는 하나의 감정적 체험이며 언어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무의식적 체험이나 사고, 감정을 자각한다는 일은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체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호흡을 자각하는 일이 호흡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다. 무의식의 자각은 자발적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일로 특징지어지는 체험이다. 그 사람의 눈이 갑자기 열리고 자기와 세계가 다른 빛으로 비치며 다른 관점에서 보이게 된다. 이 체험이 일어나면 커다란 불안이 생기지만 이는 곧 사라지고 그에 이어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 무의식의 발견 과정은 항상 확대되는 일련의 체험으로 기술할 수 있는데, 이는 깊이 느껴지는 것이며 이론적 개념적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다."(96)
 
 
"어떤 체험이 자각되기 위해서는 그 체험이 의식적 사고를 구성하는 범주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의 안팎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해 가능한 범주 체계와 관계와 있을 때뿐이다. [...]
 
더욱이 어떤 체험이 자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각 체계나 그에 대한 범주로서 이해되고 관련되며 질서 속에 위치를 부여해주는 조건의 내부에 존재할 경우뿐이다. 더욱이 이 체계 자체가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다. [...] 이 체계는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체험은 이 필터를 거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을 것이다.
 
 
[...]
 
 
마음에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이 자각되느냐의 여부는 그 체험이 그 문화에서 중요시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감정적 체험 중에는 일정한 언어에서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언어에서는 그 느낌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서로 다른 감정적 체험을 표현하지만 해당 단어를 갖지 않는 언어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이 그 체험을 명료히 자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를 갖고 있지 않은 체험을 거의 자각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적 합리적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체험과 특히 관계가 깊은 말이다. [...] 우리의 언어에는 어떤 종류의 신체적 체험을 기술하는 말이 없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체험이 우리의 사고 도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언어 전체는 삶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 것이어서 일정한 방식으로 체험되는 삶을 결정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
 
 
 
자각을 가능케 하는 필터의 제2의 측면은 일정한 문화로 사람의 사고를 인도하는 논리이다. 자신들의 언어는 '자연'스러우며, 다른 언어는 같은 것을 그저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법칙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문화 체계에서 불합리한 것은 자연의 논리에 위배되므로 다른 문화에서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
 
 
언어와 논리는 일정한 체험을 자각하는 일을 어렵게 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필터의 일부분인데, 이 필터에는 가장 중요한 제3의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 의식에 도달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설령 도달하더라도 의식 영역으로부터 배제해 버리는 경향을 갖는다. 이 필터는 사회적 터부에 의해 형성되는데, 일정한 관념이나 감정을 부당하고 금지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이 의식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방지하려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원시 종족의 예를 들어 보는 게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먼저 다른 종족을 죽이거나 강탈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종족의 어느 누군가는 죽이거나 약탈하는 일에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종족원의 생각과 따를 뿐만 아니라 용납될 수도 없는 이런 감정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모순되는 감정을 자각하면 그는 완전히 고립되고 추방될 위험성이 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충격을 체험한 사람은 이 감정을 자각하는 대신 구토 등의 다른 신체적 증상을 나타낼 것이다. 또 평화로운 농경 종족의 일원이 도망하여 다른 종족을 죽이고 약탈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라는 전혀 반대되는 경우에도, 이 충동은 아마도 자각되지 않은 채 대신 그에게 격렬한 공포 등과 같은 증상을 낳을 것이다.
 
 
 
 
* 원주 17) [...] 사회적 무의식의 개념은 사회적 억압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사회가 자각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 체험의 특수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무의식은 그 사회가 인간으로부터 멀리 하려 한 인간성의 일부이며, 보편적 마음속에서 사회적으로 억압된 부분이다."(114-121)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 학교, 교회, 영화, 텔레비전, 신문 등으로부터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처럼 생각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와 적대되는 사회에서 행해지면 그것을 '세뇌', 혹은 보다 완화된 표현으로 '교화' 혹은 '프로파간다'라 부르며, 우리의 사회가 동일한 일을 행할 경우 그것을 '교육' 혹은 '보도'라 부른다."(124)
 
 
 
"인간은 단순히 한 사회의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 사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느 만큼 자신이 속한 사회의 한계를 넘어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126-127)
 
 
 
"일반 사람들은 자기의 문화형에 맞지 않는 사고나 감정을 자각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이를 억압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말하면, 무엇이 무의식이 되고 무엇이 의식이 되는가는 사회 구조와 그것이 낳는 감정과 사고의 패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법칙은 없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은 선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전부를 항상 대표하며 주어진 문제의 온갖 해답의 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동물적 존재로 되돌아간 듯한 가장 퇴화된 문화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동물적 욕망은 우세해져 의식화되지만 이 수준을 넘어서는 모든 노력은 억압된다. 퇴화한 데서부터 정신적이고 진보적인 목표에 도달한 문화에서 암흑의 힘은 무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느 문화에서든 인간은 자신 속에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은 원초적 인간이고 맹수이며 식인종이고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이성과 사랑과 정의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합리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양자를 모두 겸한 것이자, 이들 모두는 다 같이 인간적인 것이다. 무의식은 인간 전체로부터 그 사회에 적합한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의식은 사회적 인간, 즉 개인이 우연히 내던져져 있는 역사적 조건에 의한 제한 속에 있다. 무의식은 우주 속에 나타난 보편적 인간 곧 인간 전체를 나타내며, 인간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정신을 나타내고, 인간의 과거 곧 인간적 존재의 새벽을 나타내는 것이자, 더욱이 인간이 충분한 인간성을 획득하여 자연이 '인간적으로' 되고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금 획득하게 될' 날에 이르는 인간의 미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자각하는 일은 완전한 인간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사회가 인간 사이에 구축했기 때문에 생겨난 인간과 그 동포들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일이다. 더욱이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생겨난 자기 자신과 인류로부터의 소외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127-128)
 
 
 
 
"과거 2,000년 동안 서양사를 특징지어온 것은 희망의 원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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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 인생이나 역사에는 개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 고통을 정당화해줄 만한 어떤 궁극적 의미도 없다. [...] 어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의상을 걸친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구원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단지 인간만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172-173)
 
 
 
"나는 믿는다 -  설령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결단을 내려준다 해도 우리가 그 사람을 구원해줄 수는 없다. 사람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진실과 애정으로 감사이나 환상에 빠지는 일 없이 그의 앞에 양자택일을 제시해주는 일일 뿐이다. 진정한 양자택일에 직면하면 그 사람의 모든 숨은 에너지가 깨어나며 그 사람은 죽음에 반항하여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삶을 선택할 수 없을 때, 타인이 그에게 삶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려 한다 해도,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73)


 
"나는 믿는다 - 인간성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 있다. 우리는 지능, 건강, 재능 등의 면에서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성자이고 죄인이며, 어른이자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자이거나 심판자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부처와 함께 깨달은 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자이고, 칭기즈칸이나 스탈린, 히틀러와 함께 살육하고 약탈한 것이다."(175)
 
 
 
"나는 믿는다 - 이성도 인간이 희망과 신념을 갖지 않을 때는 무력하다. 괴테가 말한 것처럼 역사상 여러 시기의 가장 큰 차이는 신념과 불신의 차이이다. 신념이 지배하던 모든 시대는 눈부시게 고양되고 풍요했던 것에 비해, 불신이 지배한 시대는 퇴색해 있는데, 그 이유는 공허한 것에 자기를 바칠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19세기는 신념과 희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의 서양 세계는 희망과 신념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인간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기계에 대한 신앙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이 '신앙'이 '종말'을 재촉하게 될 뿐이리라. 그러므로 서양 세계가 생산이나 산업이 아니라 인간성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휴머니즘의 부흥을 이룩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중심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위대한 문명처럼 '서양' 역시 소멸될 것이다."(176-177)
 
 
 
"나는 믿는다 - 서양 자본주의 및 소련과 중공의 공산주의는 모두 미래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관료주의를 만들어내고 인간을 물건으로 전환시켰다. 인간은 자연이나 사회의 힘을 자기의 의식과 합리적 통제 밑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물건과 인간을 관리하는 관료주의의 통제가 아니라,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을 위해 물건을 관리하고 복종시키고 자유롭고 협동적인 생산자에 의한 통제이어야 한다. 양자택일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와 '휴머니즘' 사이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갖는 모든 힘윽 개화시키는 일이 최종적 목표가 되는데, 이에 필요한 조건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ㅇ 민주적이고 지방분권적인 사회주의 밖에 없다."(177-178)
 
 
 
 
 
 
 
 
 
 
 
 
 
 
 
 
 
 
 
 

2012. 11. 14.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저술 초안]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본, 중국, 대만, 곧 동아시아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일본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 학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서양학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정통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서양학문을 접한 후, 서양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특성상 서양의 제반 개념들이 한자표기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메이지 시기 학자들의 번역 및 그들 사이의 논쟁을 거친 제반 서구 번역어들, 곧 新漢語는 이후 결정적으로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기 이래 다양한 침탈의 과정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수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술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야구'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전면적 수용 현상을 가져왔는데, 이 책은 이러한 일본식 서구 번역어 곧 신한어의 한반도에로의 전면적 유입 과정을 대표적인 몇몇 일상 및 학술 용어의 사례를 들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나는 이를 통해 오늘 우리의 서양 사상에 대한 주체적 수용 및 자생적 우리 학문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본어 번역어에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의존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론적 층위에 대한 개념사적, 계보학적 검토 작업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렇게 메이지 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신한어 개념이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오늘-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가령 법률(法律)이라는 한자어 조합은 중국어가 아니라 신한어이며, 이는 오직 law라는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기존 중국어의 法과 律을 조합한 단어로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예로 본서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단어는 他人, 他者, 主體, 客體, 主觀, 客觀, 絶對, 相對, 民族, 哲學, 理性, 社會, 眞理, 科學, 藝術, 眞善美, 自由, 普遍性, 合理性, 近代性 등등의 제반 개념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들을 우리로부터 타자화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들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동시에, 이러한 용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였는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 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 일상적 용어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오늘 우리의 '보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 메이지 효과란 무엇인가?
2.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의 상황
3. 메이지 용어의 성립 과정
4. 메이지 용어의 동아시아 전파
5. 메이지 용어의 한반도 전파
6. 메이지 용어의 사례들 - 개념사적/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
7. 나가면서 - 새로운 '보편학'의 가능 조건


2012. 9. 24.

martin heidegger







 


 
 
1889-1976
 
 
 
 
 
 
 
Heidegger Speaks. Part 1.
 
 
 
 
 
 
The End of Philosophy and The Task of Thinking (English Subtitles)
 
 
 
 
 
Heidegger - life and Philosophy
 
 
 
2
 
 
 
3
 
 
 
4
 
 
 
5
 
 
 
6
 
 
 
 
 
 
Martin Heidegger Biography
Thinking The Unthinkable (BBC)
 
 
 
 
 
Martin Heidegger and Nazism,
"Only A God Can Save Us"
by Jeffrey van Davis
Terrance Edward Davis Producer

An investigation of Heidegger's socalled "flirtation" with Nazism
and his support of Hitler and the National Revolution.
 
 



2012. 9. 19.

불공정은 불가피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6. [...] 너는 모든 가치 평가에서 관점주의적인 것을 터득해야만 했다 - 지평의 이동, 왜곡 그리고 표면상의 목적론과 관점주의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대립된 가치들과 관계하는 약간의 우둔함, 찬성과 반대와 함께 항상 지불되는 지적 희생도 터득해야만 했다. 모든 찬성과 반대 속에 포함된 필연적인 불공정[불공평]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 불공정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삶 자체를 관점주의적인 것과 그 불공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 18쪽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에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목표에 접근하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상실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 개별 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의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얻고자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 54-56쪽





<미셸푸코> - 이광래

       
"Le sens historique, tel que Nietzsche l'entend, se sait perspective, et ne refuse pas le systeme de sa propre injustice."

"니체가 이해한 바의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공정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Dits et ecrits I, p.1018;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이광래 지음, <<미셸 푸코: ‘狂氣의 역사’에서 ‘性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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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지르는 '절대 관점, 보편 관점이 없는' 혹은 달리 말해 '신이 죽은' 이 세계 안에서, 이른바 모든 '포스트주의'의 도덕성은 어떤 관점의 우월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자, 바로 그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론마저도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체계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주장할 뿐인 무수한 가능한 관점들 중 단 하나인데, 그들은 이렇게 보통 말한다.
"다른 모든 이론들은 단지 관점에 불과하다. 진리인 내 이론만 빼고!"
이른바 '포스트주의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스스로를 배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연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논리가 자신의 주장을 - 사실은 모든 이론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성실히 적용시키는 행위'를 '논리의 윤리성'이라 부른다.

2012. 7. 28.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니체전집 8)>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87.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 [...]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유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설령 그가, 잘 쓰지 못하는 것이 국민적 특권처럼 취급되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항상 전할 가치가 더 큰 것을 창안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할 수 있다는 것 ; 이웃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재산은 모두 공유 재산이 되고 자유인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모든 문화를 인도하고 감독한다는 저 위대한 임무가 훌륭한 유럽인의 손에 쥐어질, 아직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 반대의 것, 즉 훌륭하게 쓰고 잘 읽는 법 - 이 두 가지 덕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감퇴한다 - 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떻게 여전히 더 민족주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세기의 질병을 증가시키는 사람이며 훌륭한 유럽인의 적이자 자유정신의 적이다.
- 286-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