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KEY BUSINESS 2013/14 가을겨울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제1회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라고 말하면 처음부터 이야기의 입구가 너무 넓어짐으로, 일단 소설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그 편이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고 –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도 실제로 한 사람 있긴 한 거지만 – 비교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대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소설가의 대다수는 –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 원만한 인격과 공정한 시야를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또한 보고 있자면, 그다지 큰 목소리로 말하긴 뭣합니다만, 칭찬의 대상이 되기 힘든 특수한 성향이나, 기묘한 생활습관이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아마도 92퍼센트 정도가 아닐가라고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제로 입으로 말하냐 안 말하냐는 별개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 쓰고 있는 것이 가장 옳다. 특별한 예외는 있지만, 다른 작가는 적든 많든 모두 틀려먹었다’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따라 하루하루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종을 친구나 이웃으로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주 겸손하게 표현하더라도, 그다지 많을 것 같진 않습니다.
작가들끼리 두터운 우정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눈썹에 침을 바릅니다. 그런 일도 있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친밀한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작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라이벌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고, 작가끼리 묶어놓으면 잘 되기 보다는, 잘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저도 몇 번이고 그런 경험을 해봤습니다.
유명한 예로는, 1922년 파리에 있는 한 디너 파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동석한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의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대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침을 넘기며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자존심같은 것이 강했던 거지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영역에 있어서 ‘배타성’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면 – 간단히 말하면 ‘텃새’의식에 대해서 – 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인종은 아마 달리 없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굳이 말한다면 몇 개 안 되는 아름다운 속성 중 하나가 아닐까, 저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봅시다.
가령 어떤 소설가가 노래를 잘하고 가수로서 데뷔한다고 합시다. 혹은 그림에 관심이 있어 화가로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그 작가는 일단 틀림없이, 적지 않은 저항을 받고, 야유와 조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뭐 잘 났다고 돼도 않는 짓을 하고’ 라던가 ‘초자인 주제에 그만큼의 기술도 재능도 없으면서’ 같은 말을 들을 것이고, 전문적인 가수나 화가로부터는 냉대받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래그래, 잘 왔어요’같은 따뜻한 환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 극히 한정된 형식의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소설을 쓰면서, 여태까지 삼십 년 남짓 적극적으로 영미문학의 번역을 해왔습니다만, 처음에는(혹은 지금도 여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꽤 반발을 샀습니다.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들이밀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던가 ‘작가의 번역이라니, 민폐스러운 취미생활이다’같은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썼을 때는, 논픽션 전문 작가들로부터 꽤 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논픽션의 법칙을 모른다’라던가 ‘싸구려 최루성글이다’라던가 ‘경박한 장난짓’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장르적 ‘논픽션’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 생각한 말 그대로 ‘비 픽션’이랄까, 즉 ‘픽션이 아닌 작품’을 쓴 것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논픽션’이라는 성역의 문지기를 하던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버린 셈입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논픽션글에 ‘고유의 룰’이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처음 그 일을 겪고는 상당히 황당했었습니다.
어쨌든 뭐라도, 자기 전문 외의 것에 발을 들이밀면, 그 분야의 전문가는 일단 좋은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그 접근을 쫓아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질기게 하고 있으면 그 사이 점점 ‘그래, 뭐 하는 수 없지’같은 느낌으로 묵인되어, 동석이 허락되는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초기엔 정말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으면 좁을 수록, 전문적이면 전문적일 수록, 또한 권위적일 수록,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받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가령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혹은 번역가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소설가는 그걸로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아마도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쓰고, 번역자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쓰고, 그 작품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소설가가 ‘외부인이 제멋대로 굴고 말야’처럼 화를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욕을 하거나, 야유하거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같은 일도 최소한 제가 들은 바로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소설이 전문이 아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기회가 생기면 얼굴을 맞대고 소설이야기를 하거나, 때로는 격려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뒤에선 작품의 뒷담화를 까거나하는 정도의 일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소설가끼리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말하자면 일상적 영업행위입니다. 외부업종자의 소설진입은 특별히 다를 게 없습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인종은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나와바리’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워 보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답은 꽤 확실합니다. 소설 따위 – ‘소설따위’라는 말이 꽤 난폭하지만 말입니다 – 쓰려고 생각하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서 데뷔할 때는, 작은 어린이시절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훈련이 필요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과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일단 화구도 사놓을 필요가 있지요. 등산가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체력이나 테크닉이나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은 일단 누구라도 쓸 수 있습니다), 볼펜과 노트가 곁에 있다면, 그리고 나름의 작화능력이 있다면, 전문적 훈련따위 없어도, 일단은 쓸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단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됩니다. 대학 문창과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것이니까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우수한 작품을 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긴 뭣합니다만, 저만해도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대학의 연극학과라는 곳에 가긴 했습니다만, 시대상황이라는 것도 있어, 사실상 무엇하나 공부도 안 하고, 머리도 기르고, 수엽도 기르고, 더러운 옷차림으로 언저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작가가 되려는 의도도 없었고 습작을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불현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같은 것)을 써서 그걸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 모른 체로 직업적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도 갸우뚱했을 정도입니다. 암만 해도 너무 간단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문학을 장난으로 보냐’며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만, 저는 그저 그 사안의 기본적인 실존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입구가 넓은 표현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입구의 넓이야말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에너지원의 중요한 일부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제 해석에 의하면, 소설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도리어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는 누구라도 내키면 간단히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링같은 것입니다. 줄의 틈도 넓고 편리한 디딤대도 준비되어 있지요. 링도 꽤 넓습니다. 잠입을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관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아요. 현역레슬러들도 – 즉 이 경우엔 소설가에 해당하지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어서 ‘그래, 자 누구라도 다 올라와 보슈’같은 분위기입니다. 싹싹하달까, 쉽다고나 할까, 융통성이 있다거나 할까, 말하자면 꽤 대충 에라이 같은 분위기라는 겁니다.
하지만 링에 올라가는 것은 간단이라도 거기에 오래 머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소설가들은 물론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을 한 두개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을 오래 써나가는 것, 소설을 써서 생활을 지탱시킨다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에겐 일단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거기에 얼마간의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여러가지 일과 마찬가지로 운과 만남 같은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같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지고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해서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정면으로 이야기되는 일도 드뭅니다. 아마도 그것이 시각화도 언어화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소설가로서 계속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소설가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다른 전문직종의 사람이 다가와서, 줄 사이로 들어와, 소설가로서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너그러운 것일 테지요. ‘자, 올 테면 와보세요’같은 태도를 많은 작가들이 보입니다. 혹은 누가 새롭게 왔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을 안 씁니다. 그 신참이 그 사이 링에서 떨어져나갔다고 해도, 혹은 내가 스스로 내려간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 다 그런 경우이지만), ‘저런저런’ 이라던가 ‘건강하세요’같은 것이 되고, 만약 그나 그녀가 나름대로 노력해서 링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에 대해선 경의를 품습니다. 그리고 경의는 –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 공정하고 정당하게 댓가를 받아야할 것입니다(랄까, 받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소설가가 너그러운 것은, 문학업계가 제로섬사회가 아닌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신인작가가 한 명 등장했다고 해서, 그 대신 전부터 있던 작가가 한 명 직장을 잃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와는 그런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지요. 신인선수가 한 명, 팀에 새로 들어가서 기존의 선수가 한 명 빠지게 된다,같은 것은 문학의 세계에선 일단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소설이 10만부 팔렸다고 해서, 다른 소설이 10만부 덜 팔리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새 작가의 책이 팔리는 것으로 인해 소설전체가 활기를 띄고, 업계전체에 윤기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떤 종류의 자연도태는 적절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 링에는 적정인원이라는 게 있으니깐요.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감개를 느낍니다.
저는 이래저래 삼십 년에 걸쳐 소설을 써왔고 전문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대로 한다면 ‘문예세계’라고 하는 링 위에서 어떻게든 삼십 년 머물고 있고 예전 표현으로 한다면 ‘붓 하나로 먹고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좁게 보면 나름의 성취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삼십 년사이, 꽤 많은 사람들이 신인작가로서 데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작품들이 그 시점에서는 꽤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평론가의 칭찬을 받고 여러가지 문학상을 받고 세간의 화제도 되고 책도 어느 정도 팔렸습니다.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즉 각광을 받고 장대한 테마송을 달고 링에 올라온것이지요. 하지만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데뷔한 사람들 중 어느 정도가 현재도 실질적으로 현역소설가로서 활동하냐를 물어보면, 그 숫자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라고 할까, 실제로는 극소수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많은 ‘신진작가’들이 모르는 사이 조용히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혹은 – 어쩌면 이 케이스가 더 많을지 모르지만 – 소설을 쓰는 것에 질리거나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이 피곤해져서, 다른 분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 당시엔 그걸로 화제도 되고 각광도 받았습니다만 – 지금은 일반사회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작품들은 지금 일반서점에서 찾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소설가의 정원수에는 제한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으니깐요.
제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적합한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이나 교양이나 지식은 소설을 쓰는 데에 필요합니다. 이런 저라도 최소한의 지성이나 지식이 겸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정말 그러냐’고 대놓고 물어보면 사실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너무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은, 혹은 일반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일엔 적합하지 않지 않을까 저는 늘 생각합니다. 소설을쓴다 – 혹은 이야기를 만든다 – 라는 행위는 꽤 저속 low gear로 행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체감으로 치자면, 걷기보다는 빠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늦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흐름이 그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소설가는 자기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바꿔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던 형태와, 거기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형태 사이의 ‘격차’를 통해 그 격차의 다이내미즘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꽤 둘러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것입니다.
자기 머리 속에 있는 어느 정도의 선명한 윤곽을 가진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윤곽을 그대로 스트레이트하게 언어화한 편이 이야기는 빠르고,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전환하려면 반년 정도 걸릴지 모르는 메시지나 개념을 그대로의 형태로 직접표현을 하면 단 삼 일로 언어화시킬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 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십 분이면 퉁 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듣고 있는 사람도 ‘아 그런 뜻이구나’라며 무릎을 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머리가 좋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이야기라고 하는 fuzzy한, 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틀을 가지고 나오거나 혹은 제로부터 무언가를 새로 정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그대로 언어화하면 주변 사람들은 ‘흠흠’하며 납득하고 감탄해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문학평론가가, 어떤 종류의 소설이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 혹은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해를 유용하게 언어화 이론화할 수 없다 – 고 하는 이유는 아마 그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말해, 소설가들에 비해 머리가 너무 좋고, 머리회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느린 vehicle에, 제대로 신체를 맞춰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들, 텍스트의 이야기의 페이스를 일단 자기 페이스대로 번역해서, 그 번역된 텍스트에 따라 자신의 논지를 설파합니다. 그런 작업이 적절한 경우도 있지만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그 텍스트의 페이스가 단지 느린 것 뿐만 아니라 느려터진 것 위에 중의의, 복합적인 것을 품은 경우에는, 그 번역작업은 점점 더 곤란한 일이 되어갑니다. 평론가가 자체적으로 번역한 그 텍스트는 곡해된, 굴절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 평론가가 있다면 그런 작업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아쉽지만 여러분도 아시다피시,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인간은 어떤 분야에서도 꽤 희박한 존재입니다.
그건 그렇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 총명한 사람들이 – 그 대부분은 다른 업종사람들이지만 – 소설을 한두개 쓴 후, 그대로 어디론가로 이동해간 모양새를 전 몇 번이고 이 눈으로 목격해왔습니다. 그들이 쓴 작품의 많은 경우는 ‘잘 쓴’ 소설이었습니다. 몇 개의 작품에는 신선한 쇼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설가로서 링에 오래 머무는 일은,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견학하고선 그대로 나가버렸다’라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분들이 소설을 쓰는 일에, 생각했던 것 만큼의 이점(merit)을 발견못한 것 같습니다. 한두개 소설을 쓰고 ‘아, 알겠다 소설이란 이런 거였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고 추측합니다. 이거라면 다른 걸 한 편이 효율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 기분을 잘 압니다. 소설을 쓴다고 하는 것은 어쨌든 효율이 나쁜 작업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을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설은 그것을 별도의 문맥으로 바꿔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 바꿔 말하기 속에서 불명확한 점, fuzzy한 부분이 있다면, 또 그것에 대해서 ‘그것은말야, 말하자면 이런 거란다’라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하는 것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은 ‘바꿔 말하기’인 것이지요. 열어도 열어도 그 안에서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인형같은 것입니다. 이만큼 효율이 나쁜, 돌아가는 작업은 어딜 가도 없습니다. 처음의 테마가 그대로 명확하고 지적으로 언어화되면 ‘말하자면’이라는 바꿔말하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데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는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선 그러한 불필요한 곳, 돌아가는 곳에서 진실이나 진리가 제대로 잠복해있다고 합니다. 뭔가 합리화 같습니다만, 소설가는 대체적으로 그렇게 믿고 자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설같은 건 없어져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아무래도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는 시간을 취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에 따라도 달라집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효율성이 안 좋은 돌아가는 것들과 효율성이 좋은 기민한 것들이 표리가 되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 결여되도(혹은 압도적 열세가 되도)이 세계는 아마도 뒤틀린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다지 머리가 나쁜 인간은 소설은 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도 소설은 못 쓴다 – 적어도 장기에 걸쳐서 오래 써나가는 것은 어렵다 – 라는 것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린’작업입니다. 거기에는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보기 힘듭니다. 혼자 방에 쳐박혀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라며 문장을 매만집니다. 책상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쓰고 하루종일 걸려 겨우 한 줄의 문장의 밀도를 아주 조금 높였다고 해서 누가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잘 했다’라고 누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혼자서 납득하고 혼자서 ‘그래그래’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한 줄의 문장의 밀도에 주목해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작업인 것입니다. 손은 드럽게 많이 가고 참 테 안 나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년 정도 들여서 긴 핀셋을 써서 성냥같은 걸로 세밀하게 배 한 척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소설을 쓰는 것은 작업으로선 그것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본질적으로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편소설이라도 되면 그런 세심한 밀실작업을 매일매일 해나가야만 합니다. 끝도 한도 없이 해야만 합니다. 그런 작업이 원래 습성에 맞는 사람이 아니면, 혹은 그것을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오래 해나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못됩니다.
어렸을 적, 어떤 책에서, 후지산에 구경간 두 사람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다 후지산을 처음 봅니다. 머리가 좋은 쪽의 남자는 후지산을 몇 개의 각도에서 본 것만으로 ‘아, 후지산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알겠어, 이런 부분을 멋지다고 하는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돌아옵니다. 무척 효율이 좋지요. 하지만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쪽의 남자는 그리 간단히 후지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다리로 후지산 정상까지 올라가봅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걸리고 수고도 듭니다. 체력은 소모되고 지칩니다. 그리고 겨우 그 끝에서 ‘아, 이게 후지산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나 할까, 일단 정리를 합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후자의, 즉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남자 쪽에 속하게 됩니다. 실제로 자기 다리를 써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못하는 타입입니다. 아니, 몇 번 올라가봐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오르면 오를 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진다,라는 것이 소설가들의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효율 이전’의 문제이지요. 이건 아무리 봐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설가는 다른 업종의 재능있는 사람들이 어는 날 불쑥 다가와서 소설을 쓰고, 그것이 평론가나 세간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딱히 놀라지는 않습니다. 위협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소설을 장기간에 걸쳐 계속 써나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임을, 소설가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능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능있는 사람들의 페이스가 있고, 지식인에게는 지식인들의 페이스가 있고, 학자에게는 학자의 페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페이스는 댁의 경우, 길게 보자면, 소설의 집필에는 걸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업적 소설가 속에서도 ‘재능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속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대로라면,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만으로 해나갈 수 있는 세월은 – 쉽게 말하면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 잘해봤자 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을 넘기면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뛰어넘는, 보다 영속적인 자질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시점에서 칼날의 예리함은 다른 종류의 예리함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전환포인트를 제대로 옮겨간 사람은 작가로서 한층 더 커지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습니다. 그것을 못 옮겨간 사람은 적든 많든 도중에 모습을 지우게 – 혹은 존재감이 옅어지게 – 되고 맙니다. 혹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가에게 있어서 ‘정착해야만 하는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라는 것과 거의 동의어라고 보여집니다. 소설가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늘 이동하고 있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자, 이래서 저는, 긴 세월 질리지도 않고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들에 대해 – 즉 저의 동료들에 대해 –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작품 하나하넹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십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 소설가로서 활약하고, 혹은 살아남고, 각자 나름의 고정독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설가로서 무엇인가 근사하고 강한 핵(core)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내적인 동기부여(drive). 그것이 소설가라고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질, 자격,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소설을 하나 써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우수한 소설을 하나 쓰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쉽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것은 정말 꽤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무언가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재능’과는 조금 별개의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단 하나입니다. 실제로 물 속으로 들어가서 뜨는지 안 뜨는지 알아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가혹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소설같은 것은 안 써도(도리어 안 쓰는 편이) 인생은 총명하고 유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을 수 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나갑니다. 그러한 분들은 물론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환영합니다. 링으로 올라온 것을 환영합니다.
글/무라카미 하루키
번역/임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