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줄리앙, 『무미예찬』, 산책자, 2010.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038)
프랑수아 줄리앙(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은 쥘리앙이나, 일단 인용서 표기를 존중) 책을 유학시절에도 읽었지만 제대로 차분히 전권을 다 읽기는 처음이다. 잘 썼다. 아주 특급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일단 동양의 사유에 대해 헛소리는 거의 전혀 없는 수준이다. 사실은 탁월하다.
일본식 서구화가 완료되고도 50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역설적으로 이른바 동양사상은 이른바 동양인들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오묘하다거나, 신비하다거나, 과학적이지 못하다거나, 서양과학을 넘어선다든가 하는, 여하튼 요점은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만 아는' 괴상한 사람들의 괴상한 이해만이 난무한다(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전을 우리 할아버지들의 용어와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개념을 통해 해설하고 설명할 때 더 이해가 잘되는 수준에 도달할 정도의 서양화/근대화를 이루었다.
'性卽理'를 '性이 곧 理요', 라고 번역(?)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의미한 동어반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이를 "Nature is principle."이라고 옮긴 애매한 영어가 오히려 앞의 번역보다 더 많은 것이 이해하게 해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설하여, 줄리앙은 둘 다를 안다. 일단 줄리앙은 불어, 영어, 독어를 하고, 그리스어, 라틴어를 하고, 더하여 중국어와 한문, 일어를 한다(아마 몇 가지 언어를 더 할 줄 알 것이다).
한문 문법을 모르고, 동양 고전에 토를 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저 자기 무지의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직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진중권은 분명 나름 의미도 있었고,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 유능한 학자임에 틀림없지만, 진중권의 책에서 서양 이외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듣기란, 홍세화의 책에서 프랑스 비판을 찾아내기와 같이 지난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줄리앙은 - 아직까지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 서양과 동양을 둘 다 아는 희귀한 서양 지식인이다(그의 인격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부분은 관심 없다).
줄리앙은 이 책에서 위에 적은 이 한 마디를 쓰고 있다. 이 말은 이른바 서양의 지식인은 물론, 한국의 지식인에게서도 거의 들어본 바가 없는 적확한 통찰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줄리앙이 하수가 아님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얻어 배울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쥘리앙은 이미 프랑스인 학자 혹은 유럽인 학자, 서양인 학자가 아니라, 그냥 '학자'이다.
줄리앙은 '인식론적 오리엔탈리즘'을 거의 완전히 벗어던진 최초의 주요한 서양 사상가인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줄리앙이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급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고, 일정한 지적 영향력을 갖는 서양 학자들 중 여하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초라는 의미에서).
다음 학기부터 '줄리앙과 함께 읽는 동양 고전' 같은 시리즈 강의를 한번 해볼까 한다.
“참된 군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옛 병서에서 이르듯이 훌륭한 전술가에 대해 칭찬할 것이 없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전술가는 자신의 덕을 가까이 자신의 가족 가운데 베풀며 극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유익은 결코 이목을 끌지 않으며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는 적대적인 상황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끔 조금씩 변화시킴으로써, 점차 얻어진 승리가 결코 찬미의 대상이 되거나 공적으로 일컬어지지 못하게 한다. 참된 효능은 항상 은미隱微한 반면, 이목을 끄는 것은 미혹케 한다. 군자와 전술가는 눈에 띄고 피상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맛'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맛없음 淡'은 깊고 널리 퍼져서 그만큼 더 강력히 작용하는 성질이다.”(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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