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이삭줍기 2)> - 뱅자맹 콩스탕 / 김석희
"일단 이 일에 착수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들, 게다가 뭔가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무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면 자신도 괴롭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경박하다거나 타락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묘사해보고 싶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주는 고뇌의 모습은 마치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구름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세간의 찬사에 용기를 얻지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여서, 규칙에 따라 주의(主義)를 보충하고 관습에 따라 감동을 보충하고, 추문도 배덕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번거로운 것으로 미워할 뿐이다. 다시 말해 추문만 없으면 악덕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반성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고민이나 배신당한 영혼의 비통한 놀라움이나 완전한 신뢰 뒤에 이어지는 의심, 어떤 한 사람을 의심한 결과가 세간 전체로까지 퍼져가고 스스로 짓밟은 존경을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보고서야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마음 속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함께 느끼지 않고 상태한테만 느끼게 했다고 믿는 그 애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기려면, 우선 마음 속에 있는 관대함을 모두 때려부수고 충실함을 모두 찢어발기고 고상하고 훌륭한 것을 모조리 희생해야 한다. 이 투쟁은 무관한 사람들이나 친구들한테는 갈채를 받지만, 그 승리에서 다시 일어섰을 때는 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남의 동정을 손상시키고 도덕을 자기 냉혹함의 구실로 삼아 능욕해버린 뒤다. 그리고 사람은 자시늬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고, 이 슬픈 성공으로 얻은 치욕과 타락 속에서 덧없이 살아가게 된다.
이상이 <<아돌프>>에서 내가 묘사하고 싶었던 광경이다. 내가 거기에 성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만난 독자들 대다수가 자신들도 이 주인공과 똑 같은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 물론 상대에게 준 고통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회한 속에는 무언가 자기 만족 같은 것이 엿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부러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허영심이 그들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들의 양심은 평안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아돌프>>에 관한 것에는 지극히 무덤덤해져 있다."
- 뱅자맹 콩스탕의 3판 서문(9~11)
"옳으신 말씀입니다. 선생님이 돌려보낸 수기를 발행하기로 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선생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유익하리라 여겨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 고초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기를 읽는 여자들은 모두가 아돌프보다 훌륭한 여자를 만났었고, 자신도 엘레노르보다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이 수기를 출간하려는 까닭은, 이 수기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매우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수기가 교훈적인 면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남성들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이 자랑하는 재능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베푸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정신력, 성실함, 선량함 따위의 성격은 하늘로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점을 이 수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순간적인 뉘우침 때문에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그 초조감이 다시금 벌려놓는 것을 막지도 못하는, 그 부질없는 연민을 나는 선량함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인생을 통하여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형이상학도 자기를 사랑한 여자의 마음을 짓밟는 남자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해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만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고, 자신을 얘기하는 의도 속에는 남의 동정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흑심을 숨기고 있으며, 파멸의 한복판에 태연히 서 있으면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제 자신을 이리저리 따지려드는 그 허영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들고, 죄악은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 의지박약한 태도를 나는 증오합니다. 아돌프가 벌은 받은 것은 그가 지닌 성격 때문이며, 그가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어떤 건실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일시적인 기분에 일생을 내맡기고, 툭하면 변덕이나 부리면서 재능마저 탕진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나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씀 드리자면, 선생께서 아돌프의 신상에 관해 새삼 상세한 기록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처럼 베풀어주신 호의를 이용할지 어떨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벗어나고 싶던 고통을 다른 환경 속에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리를 옮기면서도 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뉘우침 위에 양심의 가책을 보태고, 고뇌에 과오를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15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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