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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8.

앎의 본질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 




앎의 본질은 공포와 불안의 해소라는 이 말.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공포를 주며 나의 정체성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내가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곧 위험하지 않은 것,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앎과 지식, 진리와 학문의 본질적 동기라는 니체의 이 말.

앎, 인식이란 내가 아닌 것, 나와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하고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라는 도식 속에 집어넣어 너를 잡아 먹어버리는 행위,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복속이라는 이 말.

니체의 이 말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든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타자로부터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






유신론의 최후 형식으로서의 무신론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 도덕의 계보
27. 바로 우리의 문제, 즉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포기할 수 있다. - 이러한 문제가 어제나 오늘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저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다른 연관성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더 엄격하게 다룰 것이다(‘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준비 중인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전도의 시도 Der Wille zur Macht, Versuch einer Umwertung aller Werthe 』라는 저서를 볼 것을 권한다). [...] 오늘날 정신이 엄격하게, 힘 있게, 화폐의 위조 없이 활동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 이제 정신은 그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절제를 나타내는 통속적인 표현이 ‘무신론’이다 - : 그러나 이러한 의지,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잔여물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건대, 가장 엄격하게,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저 이상 자체이며, 모든 외벽을 제거한 아주 신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이상의 잔여물이라기보다는 핵심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 공기만을 우리, 이 시대의 좀 더 정신적인 인간인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은 따라서 겉보기처럼 저 이상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무신론은 그 마지막 발전 과정의 하나일 따름이며, 그 추리 형식이나 내적 논리적 결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 이것은 2천 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장중한 파국이며, 이것은 마침내 신에 대한 신앙의 허위를 스스로 금지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인가를 입증한다. 똑 같은 이상이 어쩔 수 없이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지점에 이른 것은 유럽의 기원보다 5세기 전에 부처와 더불어서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미 이것은 샹카철학 Sankyam-Philosophie 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부처에 의해 통속화되고 종교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물어본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나의 『즐거운 학문』 357절에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성 자체, 더욱 엄격하게 해석된 성실성의 개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학적 양심이나 지적 결백성으로 번역되고 승화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라는 고해신부의 명민함이 그것이다. 자연을 신의 선의와 보호의 증거인양 보는 것, 역사를 신적 이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윤리적 세계 질서나 윤리적 종국 목적의 영원한 증인으로 해석하는 것, 경건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석해왔듯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모든 것이 섭리이며, 모든 것이 암시이며, 모든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생각되고 보내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이제는 지나갔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 더 섬세한 모든 양심에게는 점잖치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 기만적인 것, 여성적인 것, 나약함, 비겁함으로 생각된다. - 만일 어떤 무엇으로, 우리가 선량한 유럽인이며 유럽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용기 있는 자기 극복의 계승자라고 한다면, 이 엄격성 때문이다.” ...... 모든 위대한 것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기 지양의 작용에 의해 몰락해간다 : 생명의 법칙이, 생명의 본질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 극복’의 법칙이 이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 “그대 스스로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라는 외침은 언제나 마지막으로는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기 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그와 같이 이제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성실성은 하나하나 결론을 이끌어낸 다음, 결국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결론을, 자기 자신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이 성실성이 “모든 진리를 향한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인 것이다 ...... 여기에서 나는 다시 내가 제기한 문제를, 우리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여(-나는 아직 한 사람의 친구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 안에서 저 진리에의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될 때, 이제부터 -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도덕은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다음 2세기를 위해 아껴 남겨둔 100막(幕)의 저 위대한 연극이며, 모든 연극 가운데 가장 무서운, 가장 의심스러운, 아마 가장 희망에 차 있기도 한 연극일 것이다 ...... - 536~539


28.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도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에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하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의심의 여지없이-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갈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 539~541




아돌프

 




<아돌프(이삭줍기 2)> - 뱅자맹 콩스탕 / 김석희


       
"일단 이 일에 착수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들, 게다가 뭔가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무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면 자신도 괴롭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경박하다거나 타락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묘사해보고 싶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주는 고뇌의 모습은 마치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구름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세간의 찬사에 용기를 얻지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여서, 규칙에 따라 주의(主義)를 보충하고 관습에 따라 감동을 보충하고, 추문도 배덕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번거로운 것으로 미워할 뿐이다. 다시 말해 추문만 없으면 악덕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반성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고민이나 배신당한 영혼의 비통한 놀라움이나 완전한 신뢰 뒤에 이어지는 의심, 어떤 한 사람을 의심한 결과가 세간 전체로까지 퍼져가고 스스로 짓밟은 존경을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보고서야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마음 속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함께 느끼지 않고 상태한테만 느끼게 했다고 믿는 그 애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기려면, 우선 마음 속에 있는 관대함을 모두 때려부수고 충실함을 모두 찢어발기고 고상하고 훌륭한 것을 모조리 희생해야 한다. 이 투쟁은 무관한 사람들이나 친구들한테는 갈채를 받지만, 그 승리에서 다시 일어섰을 때는 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남의 동정을 손상시키고 도덕을 자기 냉혹함의 구실로 삼아 능욕해버린 뒤다. 그리고 사람은 자시늬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고, 이 슬픈 성공으로 얻은 치욕과 타락 속에서 덧없이 살아가게 된다.

이상이 <<아돌프>>에서 내가 묘사하고 싶었던 광경이다. 내가 거기에 성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만난 독자들 대다수가 자신들도 이 주인공과 똑 같은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 물론 상대에게 준 고통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회한 속에는 무언가 자기 만족 같은 것이 엿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부러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허영심이 그들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들의 양심은 평안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아돌프>>에 관한 것에는 지극히 무덤덤해져 있다."




- 뱅자맹 콩스탕의 3판 서문(9~11)



"옳으신 말씀입니다. 선생님이 돌려보낸 수기를 발행하기로 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선생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유익하리라 여겨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 고초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기를 읽는 여자들은 모두가 아돌프보다 훌륭한 여자를 만났었고, 자신도 엘레노르보다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이 수기를 출간하려는 까닭은, 이 수기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매우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수기가 교훈적인 면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남성들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이 자랑하는 재능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베푸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정신력, 성실함, 선량함 따위의 성격은 하늘로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점을 이 수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순간적인 뉘우침 때문에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그 초조감이 다시금 벌려놓는 것을 막지도 못하는, 그 부질없는 연민을 나는 선량함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인생을 통하여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형이상학도 자기를 사랑한 여자의 마음을 짓밟는 남자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해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만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고, 자신을 얘기하는 의도 속에는 남의 동정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흑심을 숨기고 있으며, 파멸의 한복판에 태연히 서 있으면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제 자신을 이리저리 따지려드는 그 허영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들고, 죄악은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 의지박약한 태도를 나는 증오합니다. 아돌프가 벌은 받은 것은 그가 지닌 성격 때문이며, 그가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어떤 건실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일시적인 기분에 일생을 내맡기고, 툭하면 변덕이나 부리면서 재능마저 탕진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나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씀 드리자면, 선생께서 아돌프의 신상에 관해 새삼 상세한 기록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처럼 베풀어주신 호의를 이용할지 어떨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벗어나고 싶던 고통을 다른 환경 속에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리를 옮기면서도 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뉘우침 위에 양심의 가책을 보태고, 고뇌에 과오를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155~157


푸코와 역사, 그리스





 <그리스 문명 (살림지식총서 115)> - 최혜영
       
푸코 역시 부르주아 사회의 생명은 합리성, 효율성, 기술성, 생산성이라고 말하며, 이의 대안으로 고대 그리스 사회를 제시한다. 실제와 환상, 역사와 신화, 자연과 인간의 구분이 있기 이전, 이성과 몰이성, 로고스와 미토스가 의좋게 짝지었던 시대로의 복귀를 주장한 것이다 -13쪽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이영남


객관적 선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푸코는 내면의 무의식 세계로 파고들어가지 않고 역사적이고 외재적인 조건, 객관적인 조건을 탐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로 표현했다. - 200쪽


일체의 편견에 대한 배격을 포기하고 자신이 어떤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지를 분명히 한다면, 보편성에 대한 전망을 견지한다면, 나아가 충돌하고 대립하는 가치를 변증법적 긴장에 넣어 포기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푸코의 역사 서술이 갖는 매력은 이런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 240~241쪽


 

***




두 권의 책 모두, 역사학적 저작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푸코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로의 '복귀'를 주장했다고 말한다거나, 푸코를 '객관적 선험 철학자'로 본다거나, 혹은 푸코를 말하면서 '보편성'에 대한 전망을 견지한다거나 '변증법적' 긴장을 언급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그저 단순히 잘못된 이해이다.
그들은 현대 한국어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근대 메이지 일본의 신한어 '역사'가 Historia, Historie, Geschichte, 歷史, 역사로 변천해온 하나의 '고유명사'임을 아는 것일까?








'남을 돕는 일'의 위험성

 





<맹자 사람의 길(상)> - 김용옥
       
2a-2.


송나라에 자기 밭에 파종한 싹이 영 빨리 자라나지 않는 것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밭에 가서 싸을 일일이 다 조금씩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 올라오는 것을 일일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 밭으로 달려가 보니, 아뿔싸 싹들은 이미 다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가 송나라 사람들의 우화 같고 남의 얘기 같지만, 실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기氣를 배양하는 것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조장하는 것은 밭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으로 무익하다고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요,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239~240).


대학시절 이 귀절을 읽은 이후, 나의 삶은 이른바 '남을 돕는다'는 것의 위험성, 그리고 사실은 자기 중심성에 대한 경고를 명심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말하는 규율에 의한 인간 교화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이미 이 맹자에 나와 있다고 보여진다. 이 문장은 내게 비단 맹자 사상만이 아니라, 교육철학 일반의 제일 원리로 보인다.

       
천하를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지지를 얻으면 곧 천하를 얻는다. 인민의 지지를 어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마음을 얻으면 곧 인민의 지지를 얻는다. 인민의 마음을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이 진실로 소망하는 것을 주고 들을 위하여 저축해둔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싫어하는 것은 주지 않는다. 그뿐이다. 그 이상의 복잡한 처방은 없다.(4a-9, 398~399)


인仁은 사람의 가장 안전한 집이다. 의義는 사람의 가장 바른 길이다. 그토록 안전한 집을 비워놓고 그집에 살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토록 바른 길을 저버리고 그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슬픈 비극이리오!(4a-10)
4a-18.


공손추가 여쭈었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기의 친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하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면 반드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게 되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른 도리로써 가르치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시니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바른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서로가 서로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서로를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들을 교환하여 가르쳤으니, 이것은 부자 간에 선善을 강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자간에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슬픈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415)



정말 탁월한 말이다. 선의 강요! 상대를 위해서 대신 판단해준다는 생각은 - 그가 누구이든, 설령 부자 간이라 하더라도 - 사실은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위하여 대신 선을 판단해줄 수는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주의를 합리화,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장 역시 지극히 섬세한 인간의 일상적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유교의 정감주의 Emotionalism 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걸작 파편이라 할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이성적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포괄하는 정서의 유기적/총회적 관회關懷 emotional total care 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418).





 
<논어한글역주 세트> - 김용옥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15-29)


"나는 분발치 아니 하는 학생을 계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의심이 축적되어 고민하는 학생이 아니면 촉발시켜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7-8)


"같은 냇물이라도 맑으면 갓끈을 빨고, 흐리면 더러운 발을 씻는다. 이것은 물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다."<<상서>>, <태갑>(2A-4)



이성복이 <<논어>>를 읽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책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태어나 그 '당연' 안에서 성장했으니 일견 당연한 말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아무 말없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 그러나 사실은 내가 느끼는 이 후자의 소회 역시 전자의 이유 때문이 아닐까?



2012. 7. 27.

선(善)에의 강요

 





<맹자 사람의 길(상)> - 김용옥
       
공손추가 여쭈었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기의 친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이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해야 한다. 그것이 잘 행하여지면 문제가 없지만, 바른 도리로써 하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면 반드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게 되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른 도리로써 가르치시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시니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바른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서로서로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서로를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들을 교환하여 가르쳤으니, 이것은 부자 간에 선善을 강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자간에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그보다 더 큰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415)



맹자의 '도덕주의'는 이런 면에서 도덕주의가 아니다.
'도덕철학'으로부터 '도덕'을 제거해야 한다.





죄책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최근, 강의 준비를 위해 니체의 책을 다시 읽었다. 니체의 입장은 타인에 대한 동정과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그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동기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타인에 대한 동정 혹은 보다 광범위하게는 이타심이 결국 사회 자체, 다수 대중의 유지를 위한 이익의 도구이고, 바로 그런 체계 아래서 '정신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희생당하며,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가치가 없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 역시 인간 통제의 도구이고, 저 고대 유대-그리스도교의 후예들인 권력자들이 인민을 보다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통제의 도구,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와 남들에게 내가 실제로 고통을 주었을 경우, 그저 죄책감만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게 죄책감만을 느끼는 행위 자체가 더욱 더 교묘한 자기 합리화의 도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의 도덕에 관한 가장 커다란 공헌은 우리가 그것을 죄책감이라 부르던 혹은 양심이라 부르던 여하튼 그 어떤 것을 느끼게 된 것이 그저 내가 받은 무비판적이고 비철학적인 전통적 관습의 추종임을 밝히고, 오늘 내가 내게 주어진 도덕적 감정들, 이론들, 주장들을 새롭게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혹은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내가 어릴 적부터 주입된, 그 도덕 혹은 이른바 '도덕적 감정'이 참으로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곧 참으로 인간적인 것인가를 오늘 내가 남에게 기댐이 없이 스스로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반대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혹은 도덕 감정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종 혹은 성실성이지, 성실성 자체가 아니다.

달리 말해,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성실성이지만, 그거은 모든 성실성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주어진 무비판적인 성실성에 대한 비판이지, 자기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충실한 정직한 성실성이 아니다.

니체의 도덕은 차라리 성실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속이지 않고 이 세계를 모두 받아들이는 그러한 지적 정직성, 자기 정직성이다.

니체는 그렇다면 우리에게 타인을 동정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죄를 짓고도 곧 타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도 부끄러운 줄도 미안한 줄도 모르고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당당한 범죄자, 악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니체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다면 니체의 말대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니체와 생각이 다르다. 그의 관점주의와 도덕 비판은 십분 공감하지만, 내게는 우리가 느끼는 이 죄책감을 바라보는 니체의 태도란 주의깊게 검토된 후 받아들여져야만 할 어떤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뭐라고 얘기했던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왕을 죽이고 모두가 자신의 왕이 된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 죄책감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생긴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는 것일까?

혹시 나는 그렇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남에게 부당한 상처와 고통을 주고도 그냥 나 몰라라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혹은 어떠한 이유로든 결국 커다란 혹은 작은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면, 나는 - 기존과 같이 그저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학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가 아닌 - 새로운 건강한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라는 말은 여하한 이유로든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라는 말이다.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기 역시 그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니체의 물음대로,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오늘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할까?

우선 나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고통을 준 상대는 내가 오늘 그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랄까? 나의 어떤 행동이 그를 덜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최종적 결정은 물로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만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해답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 말을 귀기울여 듣고,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무익한 자학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책감을 바라보는 일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니체의 말은 - 물론, 니체를 공부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글자 그대로, 죄책감도 없이 뻔뻔하게 살고 남을 착취하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 또 다른 한편으로 의타적이고 유아기적인 자학적 죄책감이 아닌 네가 스스로 듣고 말하고 판단하는 성숙한 해결책을 찾으라는 명령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말은 죄책감 없이 남에게 고통을 주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내가 한 일이 - 본의던 아니던,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 결코 잘한 일이 아님을, 아니 명백히 잘못된 일임을 분명히 깨닫고 알고, 반성하고 참회하고, 그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행하고 그에 대해 겸허히 용서를 구하며, 이제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 잘못된 행동의 인정, 그에 따른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당신 행동의 진실성 여부는 - 당신 자신이 아니라 - 당신에게 고통받은 자가 느끼고 알 것이며, 그러한 진심이 당신이 고통을 준 사람에게 마음으로 전달되기 전까지 당신은 당신의 진심을 몸과 마음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나 니체 이후의 진정한 문제는 이 '진실' 혹은 '진심'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다만 오직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특정한 해석 곧 관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이른바 '진심'이라는 개념은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나와 당신과 이 '생성'의 변화하는 세계를 '존재'의 이름 아래 묶어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변화하는 나의 마음과 너와 세계를 다양한 관점을 통해-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성을 성실히 유지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결코 '전체'를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 '전체적으로' 곧 '균형잡힌 방식으로' 바라보는 일이다(그리고 <<중용>>의 '신독'이 바로 이러한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책감을 왜 느끼고 있는가? 도대체 나는 왜 어떻게 해서 오늘 나를 짓누르는 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하여, 결정적으로, 나는 이 죄책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 내가 타인에게 준 고통으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밀양>>에서처럼, 나에게 고통받은 이에 대한 사죄도 없이,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하니 내가 나 스스로를 먼저 용서해야만 하는가?

나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나 자신을 물론 용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내가 내가 일으킨 고통에 대한 분명한 인정과 적절한 사과의 행위 이후에 구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다. 나를 구원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이 세상에 나 자신이되, 그렇다고 나의 잘못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가 스스로 나에게 내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그가 결정해야 할 것을 내가 대신 결정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나를 나의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용서를 구하거나 혹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죄책감 혹은 자기 학대는 당신이 타인에게 준 고통을 경감시키는 적절한 방법도, 건강한 방법도 아니다.

당신은 빛을 향해서도 어둠을 향해서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무관심, 성숙의 징표




 

<순수이성비판> - 칸트 / 백종현
       
"이제 (사람들이 그렇게 믿듯이) 시도된 모든 방도들이 허사가 된 후에는 혼란과 밤의 어머니인 싫증과 전적인 무차별주의[무관심]가 학문들을 지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시에, 학문들이 잘못된 열성에 의해 모호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쓸모없게 되어버렸을 때, 장차 학문들을 개조하고 계몽하는 근원이요 적어도 서곡인 것이다. [...] 이 무관심은 각별히 주목하고 숙고할 만한 현상이다. 이 무고나심은 분명히 경솔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된 것이다."(I권, 167~168)



철학, 사려깊음




<쾌락(문지스펙트럼:세계의고전사상 1)> - 에피쿠로스 / 오유석



"LIV. 우리는 철학을 하는 척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32)

"사려깊음(phronesis)은 심지어 철학(philosophia)보다도 소중하다"(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