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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말로 - 음성을 통해서건, 혹은 쓰여진 문자를 통해서건 - 무언가를 표현할 때, 우리는 이 표현이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표현이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한 표현(Darstellung für jemanden)’(GW, I. 114)이며, 그런 한에서 모든 표현은 - 그것이 표현인 한 - 이해되어지기를 의욕한다(vgl. GW. I, 480, 485, u. II, 76). 그러므로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 간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좋은 의지(gute Wille, einander zu verstehen)’가 자리잡고 있다. [...] 반면 이해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표현도 있고, 통일성 속으로 소멸되기를 거부하는 개별성도 있다. 언젠가 니체는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모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 니체에게 있어서 이해의 위기는 니체라는 이름의 천재적인 개별성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정신적 고독을 의미한다. 천재 내지 초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이해와 동일에로의 - 형이상학적으로 좋은 -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젠가 브레히트가 인상적으로 표현했듯이 ‘홀로 걷는 자의 위험’(Gefahr der Einzelganger)이다. 이 위험을 니체는 긍정하고 즐긴다. 왜냐하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즉 통일되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니체라는 개별성의 ‘권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로의 좋은 의지(guter Wille zum Verstehen)와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Wille zum Nichtverstandenwerden)가 교차하는 곳, 전체성에로의 ‘귀속Zuordung’(GW. I, 462)과 이 귀속을 거부하는 개별서이 충돌하는 곳 - 바로 여기서 철학적 해석학과 해체주의 간의 논쟁이 시작된다."


 
- 김창래, 「통일과 해체의 이율배반 -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이른바 있을 법하지 않은 논쟁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연구』 vol. 24 no. 1, 2001, 66-68쪽.
 

2012. 9. 30.

부채인간 - 옮긴이 서문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12



알라딘:
로쟈 서평, 주간경향
 
 
 
 
 
 
 
 

한국어판 서문
해제
옮긴이 서문


머리말

I. 부채를 사회의 기반으로 파악하다

왜 금융 경제가 아닌 부채 경제에 대해 말하는가
부채의 생산
특수 권력관계로서의 부채

II. 부채와 채무자의 계보학

1. 부채와 주체성 : 니체의 공헌
1)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서 채권자-채무자 관계
2) 가능성ㆍ선택ㆍ결정으로서의 부채 시간
3)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경제

2. 두 명의 마르크스
1) 매우 니체적인 마르크스
2) 《자본》에 등장하는 객관적 부채

3. 부채 논리에 있어서의 행동 및 신용

4. 들뢰즈와 가타리: 부채의 짧은 역사
1) 무한 부채
2) 야만적 흐름
3) 자본주의적 흐름

III. 신자유주의에서 부채의 영향력

1. 푸코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2. 부채에 의한 주권ㆍ규율ㆍ생명관리 권력의 재배치
1) 주권권력
2) 규율권력
3) 생명관리권력

3. 부채의 시험에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헤게모니인가, 통치성인가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 서브프라임 위기
3) 국가 부채의 위기

4. 부채와 사회적 세계
1) 세 가지 부채: 사적 부채, 국가 부채, 사회 부채
2) 부채 주체성의 테크닉 안에 존재하는 위선, 냉소주의 및 불신
3) 가치평가와 부채
4) 사회적 예속화 및 기계적 노예화로서의 부채
5. 반생산과 반민주주의

결론

주석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2838.html



경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12019305&code=900308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851



시사IN - [특집/'부채 인간'의 탄생] 악마의 속삭임 '부자 되세요'

빚이 삶의 중심이 된 우리는 '부채 인간' 이다.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금융기관들은 미친 듯이 서민에게 대출을 해주며 부동산·주식 열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빚 때문에 힘들지만 빚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다.

'금융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철학자 라차라토 인터뷰

http://www.sisainlive.com/cover2/viewContent.php?idxno=255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22018001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30679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801032530159002






* 옮긴이 서문 [원본]




옮긴이 서문

부채인간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통제하는가?

1. 부채인간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당신과 우리의 오늘에 대한 책이다. 라짜라또는 청년 마르크스의 신용과 통화에 관한 소논문 「대출과 은행」 및 완숙기의 『자본』, 니체의 『도덕의 계보』, 그리고 이에 영향 받은 들뢰즈ㆍ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원용하여 현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지, 그리고 신용과 부채의 문제가 어떻게 ‘당신이 열심히 일을 할수록, 더 많은 빚은 지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라짜라또가 핵심으로 삼는 개념은 물론 특히 니체적 의미로 해석된 부채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상기 사상가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친 독자적인 저술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공정한 평가라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메커니즘을 드러내주는 키워드이다. 왜 기존 경제학의 개념이 아닌, 부채인간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분석에 요청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저자 인터뷰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 즉 사실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통화를 중립적인 것,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간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통화 경제이고, 신용 통화란 경제적 순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통화의 창조는 부채를 통해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신용/부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시장 경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금융화(그리고 오늘날 지상권을 갖고 있는 부채)는 사회적 생산성 및 부의 포획(capture)을 위해 작동하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오늘날 부채 상환은 이윤을 대체해 버렸는데, 이는 기업의 이윤조차도 필연적으로 금융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채와 신용은 경제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의 진실입니다. 통화/부채의 발행을 통제한다는 것은 경제 금융을 통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발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채 인간은 부채 경제의 주체적 형상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니체의 입장을 재구성하려 했는데, 그 주장의 기원은 오늘날에서야 겨우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 관계는 경제적인 동시에 주체적인 것입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이다.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더 이상 경제적 혹은 상징적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짜라또는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부채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자신의 주요 저작, 특히 『도덕의 계보』(1887)를 통하여 근대 영혼 및 신체의 통제 메커니즘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논의의 핵심은 죄책감, 혹은 부채의 관념이 근대 사회의 인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아래에서는 라짜라토의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죄책감 혹은 부채에 관한 니체의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니체의 죄책감, 빚

니체는 우선 죄책감, 곧 양심의 가책 기원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제안한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인(Schuld)는 , 곧 부채(Schulden)라는 매우 물질적인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두 독일어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갖는 용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손해와 고통 사이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근본적으로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적 관계, 사법적 개인의 존재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며 그 자신 교통ㆍ교환, 가치의 구입이라는 근본적 형식에로 또 다시 돌아가는 하나의 관계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이러한 관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고대인의 일반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 따라서, 정의 자체가 - 그 기원에 있어 - 주어진 어떤 순간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보아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죄’, ‘양심’,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바로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이로부터 형을 치르는 것에 대한 하나의 은유, “빚을 갚는다.”라는 일상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내적ㆍ외적 처벌의 기초로서의 양심의 가책은 하나의 ‘질병’이다.

한편, 어떤 범죄자가 스스로를 사회의 ‘적’ 혹은 ‘비행인’(?)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의 내면화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회에 의해 정복 혹은 ‘포괄ㆍ이해’(conquis et "compris")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및 도덕의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사회는 자신의 보존ㆍ보호ㆍ번영이라는 자신의 명확한 이해(利害) 기준에 따라 가치들 및 도덕들을 판단한다. 달리 말해, 모든 가치와 도덕은 오직 주어진 사회 내에서만 타당하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관심은, 결코 자신의 ‘참다운 진보’가 아닌, 오직 자신의 단순한 보존, 현상 유지(statu quo)에 있다. 사회적 가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이기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기능에 관련된 효용성에 준하여 판단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회의 이익을 위한 덕들은 그 기원이 망각됨으로써 오늘날 이익이 아닌 어떤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행해지고 있다.
“근본 동기, 즉 유용성이라는 동기가 망각된 그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행위라고 불린다. [...]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의 근원인 사회는 분명 이익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가 도덕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되도록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격렬하게 개인의 사리사욕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마치 이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근원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며, 모든 개인적인 이익에 맞서 자신을 관철시켜나가고 더 높은 품위를 얻기 위해 애써왔다.”
하나의 사회는 자신에게 ‘부적합한’ 모든 것들을 억압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예외들’을 자신에 대한 위험 요소로서 배제한다. “예외자를 범죄자로 다루고 억압하기 위한 심문, 불신, 관대하지 않음의 정도-자신들의 예외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병들 정도로 그들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갖게 하기 위해서.”따라서, 한편으로는 “살해하고, 고문하고, 자유아 재산을 빼앗”으며, “교육을 제한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로서)” “속이고, 기만하고 쫓아” 다니는 사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최면에 걸리고”, “뭉그러진”, “실패한”, “길들여진” 범죄자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과 신체에 있어 ‘근대인’으로 ‘형성’되고 ‘개선’되었으며 ‘변형’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의무와 마찬가지로 죄,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 역시 이제는 그 기원이 잊혀진 과정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결코 양심의 가책의 존재 이유,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 내력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도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 발명된 것이며, 그 자신이 구성된 계기들, 곧 역사를 갖는다.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을 수행해야 한다.

3. 부채의 인간학 - 경제 인간, 부채 인간

결국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이 전통적인 기존 경제학적 관념만으로는 분석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도덕적인 것, 한 마디로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가치’를 경제적 효용가치로 환원한다. 오늘날의 이른바 ‘스펙’이란 용어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권력 효과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신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좋은 영어 성적을 받지 못하며, 좋은 직장을 가지 못했고,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개인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품행을 통제하는 도덕적 가치를 구성한다.
“현실을 봐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래? 네가 지금 그럴 때니?”
그리고 이는 바로 니체의 단언처럼 스스로에 대하여 내면화 된다.
“아, 난 왜 이러지?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난 왜 이렇게 끈기가 없지, 그래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야.”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구조적 문제이다. 현대 세계를 살면서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도덕주의적 담론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경제학적 분석은 부채인간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 새롭게 포괄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경제적 인간의 생산과 실존적 인간의 생산은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가 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달리 말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위해 고안된 비판적 인간학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 연금 신청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복지 기관의 ‘상담’을 받고 나온 신청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내게 주요 관심사나 일생에 하고 싶은 일 혹은 예전에 하던 일을 왜 선택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질문으로 답했죠. “그럼, 당신은 왜 이 복지 기관에서 일을 하기로 선택했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이 너무 지나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야만 할 의무는 전혀 없는 거죠. […] 그녀가 계속 그런 질문을 고집하는 건, 나에 대해 그녀가 갖는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그녀가 나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보기에 나는 아직 나의 직업, 내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고, 그저 내가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겁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나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나를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능력 평가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더하여, 내밀함에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나는 심도 있는 능력 평가를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는 고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관습대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역겨운 용어들을 쏟아 내면서 당신에게 당신의 삶에 대한 심사숙고를 강요한다.”

“수당 수령자는 ‘개별 조사’에서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혹은 지어내고), 그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수당 수령자가 사생활 침해와 개인과 주체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려고 해도, 기관이 강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에 의해 그는 이 폭력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생각과 삶을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 도덕화하고, 당신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복지기관과 국가는 당신의 공적 생활은 물론 사생활을 통제하며, 이러한 통제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곳, 곧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이른다.

“더 나아가, ‘신청자의 사생활 염탐’은 복지 기관의 종사자들에 의해 점점 더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내심으로는 가난한 자, 실업자, 임시직 종사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을 ‘사기꾼’ 혹은 ‘모리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 기관은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당 수령자들의 품행을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개인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복지 기관은 수령자의 집에 들어가 생활 방식을 조사하고 질문할 권리를 갖는다. 수당 수령자의 방을 살펴보고 화장실을 들여다보며 칫솔이 몇 개나 있는지 확인한다. 또 전기세와 전화세, 집세 영수증을 요구하고,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특히 그가 혼자 살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그가 어떤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이 배우자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하는 존재로 가정되기 때문에, 복지 수당은 중단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학습의 과정을 거쳐, 당신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는’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당신의 마음, 품행, 일상을 통제한다.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사생활, 취미, 습관, 생각, 품행, 태도, 자세, 가치관, 세계관을 새롭게 빚어낸다. 당신은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일은 당신은 그러한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진짜 자기’인 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주체로서 조립ㆍ제조ㆍ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잃고 그저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의해 조건화 된 채로 느끼고 생각하는 자동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라짜라또는 이렇게 말한다.

“부채의 활동 범위는 단순히 금융과 화폐 정책을 세심히 조작하고 막대한 양의 돈을 굴리는 일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용자의 실존을 생산ㆍ통제하는 기술을 형성ㆍ배치하는 것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경제는 결코 주체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가 당신 앞에 제시하는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게임, 다른 삶을 살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라짜라또에 의하면 계급투쟁이다. 더하여, 이는 또한 당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위한 투쟁이다.

가장 효과적인 지점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려면 부채에 대한 이 죄책감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 죄책감은 신에 대한 부채가 아닌, 지상의 부채, 우리의 지갑을 짓누르고, 우리의 주체성을 조정하며 포맷하는 부채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하거나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이런 일들이 매우 유용할 때조차도 - 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다. 우리는 부채에 대해 우리를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우리를 잃었다. 모든 정당화는 이미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 2차적 순수를 정복하고, 모든 죄책감과 의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혜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투쟁의 문제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타리의 말을 인용하여, 당신이고 나인, 그리하여 우리 모두인, 대한민국의 모든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 곧 그들의 단어로는 ‘열등생들’에게 건네는 이런 한 마디 말을 상상해본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같은 열등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강요되는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당신이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

2012년 9월 13일,

옮긴이들을 대표하여

2012. 9. 19.

불공정은 불가피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6. [...] 너는 모든 가치 평가에서 관점주의적인 것을 터득해야만 했다 - 지평의 이동, 왜곡 그리고 표면상의 목적론과 관점주의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대립된 가치들과 관계하는 약간의 우둔함, 찬성과 반대와 함께 항상 지불되는 지적 희생도 터득해야만 했다. 모든 찬성과 반대 속에 포함된 필연적인 불공정[불공평]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 불공정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삶 자체를 관점주의적인 것과 그 불공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 18쪽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에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목표에 접근하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상실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 개별 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의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얻고자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 54-56쪽





<미셸푸코> - 이광래

       
"Le sens historique, tel que Nietzsche l'entend, se sait perspective, et ne refuse pas le systeme de sa propre injustice."

"니체가 이해한 바의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공정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Dits et ecrits I, p.1018;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이광래 지음, <<미셸 푸코: ‘狂氣의 역사’에서 ‘性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350쪽.




***



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지르는 '절대 관점, 보편 관점이 없는' 혹은 달리 말해 '신이 죽은' 이 세계 안에서, 이른바 모든 '포스트주의'의 도덕성은 어떤 관점의 우월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자, 바로 그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론마저도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체계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주장할 뿐인 무수한 가능한 관점들 중 단 하나인데, 그들은 이렇게 보통 말한다.
"다른 모든 이론들은 단지 관점에 불과하다. 진리인 내 이론만 빼고!"
이른바 '포스트주의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스스로를 배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연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논리가 자신의 주장을 - 사실은 모든 이론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성실히 적용시키는 행위'를 '논리의 윤리성'이라 부른다.

2012. 9. 2.

도덕성의 최근 형식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2[191] 나의 주장 : 도덕적 가치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라고 물음으로써 저지해야 한다는 것.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 열망은 바로 정직의 고상한 감각으로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것. 우리의 정직, 즉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 “왜 안 되지?” -어떤 법정 앞에서?-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정복과 착취에 대한 주의, 삶의 정당 방어 본능. // 이것이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다 - 그 요구들은 너희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 : 너희가 도덕적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비판이 아닌 예속을 요구하는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 예속을?”이라는 질문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너희가 너희 시대를 명예롭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정직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



내가 생각하기에, '네게 주어진 도덕적 명령, 명제 혹은 네가 느끼는 도덕 감정을 지금 현재의 네가 능동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그 행위야말로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이 문장이야말로 공자, 소크라테스 이래 인류 윤리학 3000년 역사에 던져진 진정한 혁명이다.



2012. 8. 2.

니체, 계보학, 역사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1971), DEQ I, pp. 1004-1024.
<니이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미셸 푸코>>, 민음사, 1989.



 
“이로부터 계보학의 필요불가결한 신중함이 생겨난다. 계보학은, 모든 단조로운 목적론의 외부에서, 사건들의 특이성을 지적해내야 한다. 계보학은 감정ㆍ사랑ㆍ양심ㆍ본능처럼 아무도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 영역들에서 사건들을 기다려야 한다. 계보학은 사건들의 회귀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는 결코 어떤 진화의 완만한 곡선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들이 다른 역할을 수행했던 다른 장면들을 다시금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계보학은 심지어 사건들이 누락된 지점,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지점들을 정의해야만 한다(시라큐즈의 플라톤은 마호메트가 되지 않았다...).”(1004; 330)



 
“계보학은 철학자의 도도하고도 심오한 견해가 현자의 두더지 같은 시선에 대립되듯이 역사에 대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계보학은 관념적 의미작용들 그리고 무한한 목적론들의 메타 역사적 전개에 대립된다. 계보학은 ‘기원’(l'origine)의 추구에 대립된다.”(1004-1005; 330)




 
“그런데, 만일 그 계보학자가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지속시키기보다는 역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사물의 초시간적이며 본질적인 비밀이 아니라, 사물은 본질이 없다는 비밀, 사물들의 본질은 그에게는 낯선 형상들로부터 한 조각 한 조각 구성된 것이라는 비밀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어떠한가? 하지만 이성 역시 전적으로 ‘이성적인’(raisonnable) 방식, 즉 우연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 하지만 자유는, 인간의 근원에서, 존재와 진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는, 사실상, ‘지배계급의 발명품’이다. 우리가 사물의 역사적 시작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기원으로부터 보존되어온 동질성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의 불화(不和), 부조화이다.”(1006; 333)
 



“계보학자는 역사로 하여금 기원이라는 환상을 반박할 것을 요청한다.”(1008; 336)




 
“결국 내력(provenance)은 신체에 속한다.”(1010; 339)




 
“규칙들의 세계는 폭력을 순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 규칙이란 증오의 계산된 쾌락이며 약속된 유혈극이다. 규칙은 끊임없이 지배의 놀이를 다시금 시작하며, 섬세히 반복된 폭력을 무대 위로 불러온다. [...] 인류는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며 규칙이 전쟁을 영원히 대치하는 보편적 상호성에 도달할 때까지 천천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며, 인류는 각기 자신의 폭력들을 규칙들의 체계 안으로 정착시키면서 지배에서 지배에로 나아가는 것이다.”(1013; 343)



 
“니체는 계보학을 ‘진정한 역사’(wirkliche Historie)로서 묘사된다. 니체는 반복해서 계보학을 ‘역사적 감각’(sens historique) 혹은 ‘정신’(esprit)으로서 규정짓는다. [...] 니체가 ‘진정한 역사’, 역사적 감각을 실천할 때, 그는 우리가 인간에게 있어 불멸이라 믿었던 것을 생성(devenir) 안으로 다시금 집어넣는다. [...] 실제적(effective) 역사는 어떤 상수(常數, constance)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가들의 역사와 구분된다. [...] 이는 지식이 이해가 아닌 절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1014-1016; 344-347)
 




“우리는 사건을 어떤 결단, 계약, 통치 혹은 전투가 아니라, 서로 역전되는 힘들의 관계, 탈취된 권력, 그 사용자들에 반해 다시금 포착되고 되돌려진 단어들, 스스로 약화되고 완화되며 손상되는 지배, 가면을 쓴 채로 들어오는 타자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 실제적 역사는 어떤 섭리도 최후의 원인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연의 주사위를 흔드는 철의 손’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왕국을 알뿐이다.”(10106; 347)




 
“이러한 실제적 역사의 마지막 특성은 그것이 관점적(perspective) 지식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지식에서 자신들의 열정이 갖는 필요불가결함을 해칠 수도 있는 것, 즉 그곳으로부터 자신들이 사물을 응시하는 장소, 그들이 존재하는 순간, 그들이 취하는 입장을 가능한 한 삭제해 버리고자 노력한다. 니체가 이해하는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임을 알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부당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1018; 349-350)




 
“역사가가 취하는 담론은 선동가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 역사가의 친족도는 소크라테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그러나 이러한 선동은 위선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선동은 보편이라는 가면 밑에 자신의 고유한 앙심(rancune)을 숨긴다. 선동가가 진리, 본질의 법칙 및 영원한 필연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꼭 같이, 역사가는 객관성, 사실의 엄밀성, 변경 불가능한 과거에 대해 말한다. [...]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을 뒤흔들기 위해 그것을 허구적인 보편 기하학으로 대치한다.”(1018; 352)




 
“실제적 역사는 역사철학 위에 기초 지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역사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계보학적 사용, 즉 철저히 반(反) 플라톤적인 사용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실제적 역사는 초역사적인 역사(histoire supra-historique)를 넘어설 수 있다.”(1020; 353-354)




 
“인류를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앎에의 의지[원한으로서의 지식](vouloir-savoir)에 대한 분석은 따라서 부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없다(따라서 인식 자체 안에는 진리에의 권리 혹은 참된 것의 기초는 없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인식 본능은 악하다(그 안에는 살인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또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행할 수도, 행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야만 한다.”(1023; 357)




 
“이제 19세기 이래 철학적 사유를 양분했던 두 문제(진리와 자유의 상호적 기초, 절대적 지식의 가능성), 즉 피히테와 헤겔에 의해 반복되어왔던 이 거대한 두 개의 주제를 ‘절대적 인식의 포기가 존재 기초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라는 주제로 대치할 시간이 되었다.”(1024; 358)






 

2012. 7. 28.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니체전집 8)>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87.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 [...]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유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설령 그가, 잘 쓰지 못하는 것이 국민적 특권처럼 취급되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항상 전할 가치가 더 큰 것을 창안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할 수 있다는 것 ; 이웃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재산은 모두 공유 재산이 되고 자유인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모든 문화를 인도하고 감독한다는 저 위대한 임무가 훌륭한 유럽인의 손에 쥐어질, 아직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 반대의 것, 즉 훌륭하게 쓰고 잘 읽는 법 - 이 두 가지 덕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감퇴한다 - 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떻게 여전히 더 민족주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세기의 질병을 증가시키는 사람이며 훌륭한 유럽인의 적이자 자유정신의 적이다.
- 286-287쪽.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탈레스 / 김인곤



8. 파르메니데스

8. 단편 2. 프로클로스(DK28B2)

자,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그대는 이야기(mythos)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5]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알게 될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9. 단편 3. 클레멘스/플로티노스(DK28B3)

...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 (클레멘스 『학설집』VI.23 / 플로티노스 『엔데아데스』 V.1.8)

12. 단편 6. 심플리키오스(DK28B6)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나는 그대에게 명한다. 왜냐하면 그대를 탐구의 이 길로부터 우선 <내가 제지하는데>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죽어야 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5]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는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무기력함이 헤매는 누스를 지배하고 있기에) 그 길로부터 [그대를 제지하기에]. 그들은 귀먹고 동시에 눈먼 채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판가름 못하는 무리로서, 이끌려 다니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의 길이 되돌아가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17)

13. 단편 7. 플라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DK28B7)

그 이유는 이렇다. 이것,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 그리고 습관이 [그대를] 많은 경험을 담은 이 길로 [가도록], 즉 주목하지 못하는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5] 못하게 하라. 다만 나로부터 말해진, 많은 싸움을 담은 테스트를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1-2행: 플라톤 『소피스트』 237a, 258d / 2-6행: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한 반박』VII. 111)

14. 단편 8. 심플리키오스(DK28B8)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5]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10]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15]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아낭케)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20]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이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25]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이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30]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35]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40]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새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 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45]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 균일하게 있기에.
[50] 여기서 나는 그대를 위한 확신할 만한 논변과 사유를 멈춘다.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시적인 의견들을 배우라, 내 이야기들의 기만적인 질서를 들으면서. 왜냐하면 그들은 이름 붙이기 위해 두 형태를 마음에 놓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래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헤맸던 것이다.
[55] 그리고 그들은 형체에 있어 정반대인 것들을 구분하였고 그것들 서로 간에 구분되게 표지들을 놓았다. 즉 한편에는 에테르에 속하는 타오르는 불을, 부드럽고, 아주 가벼우며, 모든 방면에서 자신과 동일하되, 다른 하나와 동일한 것이 아닌 [불을 놓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저것도, 그 자체만으로 정반대인 어두운 밤도, 조밀하고 무거운 형체인 [밤도 놓았다].
[60] 이 배열 전체를 그럴듯한 것으로서 나는 그대에게 설파한다. 도대체 가사자들이 그 어떤 견해도 그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1-52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45-146 /
50-61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38-39)

27. 콘포드 단편. 플라톤

그런 부동(不動)의 것은, 전체로서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
( 『테아이테토스』 180e)




         
*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니체전집 3.유고(1870~1873년)』,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1.



파르메니데스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성질들을 서로 비교하여, 이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가 빛과 어둠을 비교하면, 두 번째 특성은 오직 첫 번째 성질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긍정적 성질과 부정적 성질을 구별하려고 했으며, 자연의 전 영역에서 이 대립을 다시 발견하고 명시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그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예를 들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같은 몇 가지 대립들을 채택했으며, 이들을 전형적인 대립인 빛과 어둠으로 분류했다. 밝은 것에 상응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어두운 것과 일치하는 것은 부정적인 성질이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은 어두운 것의 편에 속했다. 따라서 무거운 것은 그에게는 단지 가벼운 것의 부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벼운 것은 긍정적 성질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부터 이미 감각의 간섭을 차단하면서 추상적-논리적 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산출된다. 무거운 것은 사실 우리의 감각에 긍정적 성질로 와 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무거운 것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흙을 불과 대립시키고, 차가운 것을 따뜻한 것과 대립시키고, 두꺼운 것을 얇은 것과,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과 그리고 수동적인 것을 능동적인 것과 대립시켜 이들 모두를 오직 부정의 형식으로만 표시했다. 그래서 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 즉 - 밝고 불과 같고 따뜻하고 가볍고 얇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 긍정적 성질들의 영역과 부정적 성질들의 영역으로 나뉜다. 후자의 성질들은 오직 다른 긍정적 성질들이 결여되어 있는 영역을 어둡고, 흙과 같고, 차갑고, 무겁고, 두껍고,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성질들로 표현한다. 그는 ‘긍정적’과 ‘부정적’이라는 표현 대신에 ‘존재적’과 ‘비존재적’이라는 확고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낙시만드로스와는 모순되는 명제, 즉 우리의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비존재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공식에 이르렀다. 우리는 존재자를 세계의 밖에서 그리고 우리의 지평 너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바로 앞에, 도처에 그리고 모든 생성 속에는 존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활동 중이다(396~397쪽).

파르메니데스는 공동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대립을 탐색했다. - 이 대립들의 욕망과 증오는 세계와 생성을 구성하고, 존재자와 비존재자 그리고 긍정적 성질들과 부정적 성질들을 구성한다 - 그리고 그는 갑자기 부정적 성질인 비존재자의 개념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거기에 매달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성질일 수 있는가? 또는 더 근본적으로 질문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즉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인식의 형식은 ‘A는 A다’라는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ie)이다. 그런데 바로 이 동어반복적 인식이 그에게 가차 없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는 갑자기 엄청난 논리적 죄악이 자신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부정적 성질들, 간단히 말해 비존재가 존재한다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A≠A’라고 아무 주저 없이 가정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을 세운다는 것은 완전히 도착된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 그는 모든 인간 광기의 저편에서 세계의 비밀에 이르는 열쇠, 즉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제 존재에 관한 동어반복적 진리라는 확고하고 가공할 만한 손에 이끌려 사물들의 심연으로 들어간다(401~402쪽. 인용자 강조).

그[파르메니데스]는 이제 경악할 만한 추상적 개념들의 목욕탕에 들어갔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것이 있었다’ 또는 ‘그것은 있을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생성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존재로부터란 말인가? 그렇지만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존재자로부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생성처럼, 즉 모든 변화, 증가, 감소와 같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명제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과거에 존재했다’ 또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분할될 수 없다. 그것을 분할할 수 있는 제2의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존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도대체 어느 곳으로 움직인다는 말인가? 존재자는 무한히 크지도 또 무한히 작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주어진 무한성이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제한[한정]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고, 부동(不動)적이고, 마치 하나의 공처럼 어느 곳에서나 균형을 이루고 어느 지점에서나 완성된 형태로 부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공간은 두 번째 존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존재자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하나의 가정이다. 따라서 오직 영원한 통일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파르메니데스가 예전에는 풍부한 의미의 사상들을 통해 그 실존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생성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이 생성 일반을 보고 있으며 또 자신의 귀가 생성 일반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제 그의 명법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우둔한 눈을 따르지 말라, 메아리처럼 울리기만 하는 저 귀 또는 혀를 믿지 말라, 오직 사유의 힘만으로 확인해보아라!” 이로써 그는 인식기관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수행했다. 그것이 설령 불충분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과 감각을 마치 두 개의 분리된 능력인 것처럼 예리하게 떼어놓음으로써 지성 자체를 파괴했으며, 완전히 그릇된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그런데 이 분리는 특히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모든 감각적 지각은 오직 착각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판단한다. 그리고 이 지각들의 주된 기만은 그것들이 비존재자 역시 존재하며 또 생성 역시 하나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위장한다는 점이다. 경험적으로 알려진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이 세계의 성질들의 변화, 이들의 상승과 하강에서의 질서는 단순한 가상과 공상으로서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었다. 이것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고 꾸며진 그래서 철저하게 가치 없는 이 세계에 쏟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처럼 그렇게 전체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것에서는 자연 탐구자이기를 그만둔다. 현상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들어버리고, 이 감각의 영원한 기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난다. 진리는 이제 내용이 다 빠져버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일반성들 속에서만, 즉 아무것도 규정해주지 않는 말들의 빈 껍데기 속에서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거미줄로 이루어진 집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런 ‘진리’의 곁에 이제 철학자가 앉아 있다. 마치 하나의 추상적 개념처럼 핏기 없이 온통 공식들의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거미들은 제물의 피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적 철학자는 바로 이 제물의 피를 증오한다. 그에 의해서 희생된 경험의 피를(403~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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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비존재(결여)' 사이, 혹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에 설정한 이러한 이른바 '본질적' 구분을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이라 부르겠다.






유럽의 운명 - 중국인과 그리스도교인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도덕의 계보

*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12. 유럽인의 왜소화와 평균화는 우리의 최대 위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모습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위대해지려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더욱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좀 더 빈약한 것, 좀 더 선량한 것, 좀 더 영리하고 안락한 것, 좀 더 평범하고 무관심한 것, 좀 더 중국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더 좋게’ 된다 ...... 여기에 바로 유럽의 운명이 있다 - 인간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우리는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인간에 대한 희망, 아니 인간에 대한 의지도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의 모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 이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오늘날 무엇이 허무주의란 말인가? ... 우리는 인간에게 지쳐 있다 ......

- 376~37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







합리성

 


<유고(1870년-1873년)(니체전집 3)>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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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완전히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완벽히 비합리적인 일이다." - 존 케이지





진리와 자유정신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아직까지 오랫동안 자유정신이란 없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앎의 본질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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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본질은 공포와 불안의 해소라는 이 말.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공포를 주며 나의 정체성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내가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곧 위험하지 않은 것,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앎과 지식, 진리와 학문의 본질적 동기라는 니체의 이 말.

앎, 인식이란 내가 아닌 것, 나와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하고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라는 도식 속에 집어넣어 너를 잡아 먹어버리는 행위,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복속이라는 이 말.

니체의 이 말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든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타자로부터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






진리의 적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83.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391).

499. 친구 - 고통의 나눔이 아니라, 기쁨의 나눔이 친구를 만든다(395).



유신론의 최후 형식으로서의 무신론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 도덕의 계보
27. 바로 우리의 문제, 즉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포기할 수 있다. - 이러한 문제가 어제나 오늘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저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다른 연관성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더 엄격하게 다룰 것이다(‘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준비 중인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전도의 시도 Der Wille zur Macht, Versuch einer Umwertung aller Werthe 』라는 저서를 볼 것을 권한다). [...] 오늘날 정신이 엄격하게, 힘 있게, 화폐의 위조 없이 활동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 이제 정신은 그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절제를 나타내는 통속적인 표현이 ‘무신론’이다 - : 그러나 이러한 의지,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잔여물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건대, 가장 엄격하게,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저 이상 자체이며, 모든 외벽을 제거한 아주 신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이상의 잔여물이라기보다는 핵심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 공기만을 우리, 이 시대의 좀 더 정신적인 인간인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은 따라서 겉보기처럼 저 이상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무신론은 그 마지막 발전 과정의 하나일 따름이며, 그 추리 형식이나 내적 논리적 결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 이것은 2천 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장중한 파국이며, 이것은 마침내 신에 대한 신앙의 허위를 스스로 금지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인가를 입증한다. 똑 같은 이상이 어쩔 수 없이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지점에 이른 것은 유럽의 기원보다 5세기 전에 부처와 더불어서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미 이것은 샹카철학 Sankyam-Philosophie 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부처에 의해 통속화되고 종교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물어본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나의 『즐거운 학문』 357절에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성 자체, 더욱 엄격하게 해석된 성실성의 개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학적 양심이나 지적 결백성으로 번역되고 승화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라는 고해신부의 명민함이 그것이다. 자연을 신의 선의와 보호의 증거인양 보는 것, 역사를 신적 이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윤리적 세계 질서나 윤리적 종국 목적의 영원한 증인으로 해석하는 것, 경건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석해왔듯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모든 것이 섭리이며, 모든 것이 암시이며, 모든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생각되고 보내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이제는 지나갔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 더 섬세한 모든 양심에게는 점잖치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 기만적인 것, 여성적인 것, 나약함, 비겁함으로 생각된다. - 만일 어떤 무엇으로, 우리가 선량한 유럽인이며 유럽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용기 있는 자기 극복의 계승자라고 한다면, 이 엄격성 때문이다.” ...... 모든 위대한 것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기 지양의 작용에 의해 몰락해간다 : 생명의 법칙이, 생명의 본질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 극복’의 법칙이 이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 “그대 스스로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라는 외침은 언제나 마지막으로는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기 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그와 같이 이제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성실성은 하나하나 결론을 이끌어낸 다음, 결국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결론을, 자기 자신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이 성실성이 “모든 진리를 향한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인 것이다 ...... 여기에서 나는 다시 내가 제기한 문제를, 우리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여(-나는 아직 한 사람의 친구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 안에서 저 진리에의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될 때, 이제부터 -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도덕은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다음 2세기를 위해 아껴 남겨둔 100막(幕)의 저 위대한 연극이며, 모든 연극 가운데 가장 무서운, 가장 의심스러운, 아마 가장 희망에 차 있기도 한 연극일 것이다 ...... - 536~539


28.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도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에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하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의심의 여지없이-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갈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 539~541




영혼, 육체의 감옥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 오생근



"영혼은 육체의 감옥이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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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혹은 플라톤, 구약 혹은 예수 이래 '서양'을 구성한 문명 도식이었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말을 뒤집은 푸코의 결정적 한 마디.

나 자신, 나의 연애, 나의 고뇌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 유종호
       
이 말을 듣고 그녀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정원을 같이 산보하자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간 우리는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 년 전에 런던에 가서 지낸 멋진 겨울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거기서 그녀가 불질러 놓았던 남성들의 찬미, 그녀가 한 몸에 받았던 주목 등. 나는 그녀가 어떤 귀족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실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오후가 지나고 밤이 되면서부터 그 짐작은 점점 확정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가지가지 달콤했던 대화가 내 귀에 전해지고 센티멘털한 장면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한 마디로 말해 그날 하루는 그녀가 나를 위해 그 자리에서 써주는 상류 사회를 그린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다. 이 야기는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화제는 늘 마찬가지 - 자기 자신, 자기의 연애, 자기의 고뇌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자기 어머니의 병환이나 오빠의 죽음, 또는 집안의 장래를 생각할 때 암담하기만 한 현재 상태 따위에 대해 한미디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흘러간 나날의 열락에만 취해 있고 장래의 쾌락을 열망하는 데에만 사로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병실에 하루 오 분씩밖엔 더 있지를 않았다.(435)



이 글을 읽으며, 바로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잠시나마 '바로 내가 이런 인간은 아닌가' 하고 혼자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이렇게 해서 '길들여지는데' - 물론 이는 사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이상 어느 정도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 때로, 그러니까 항상, 이러한 자기 검열은 과도한 양상을 띠거나 혹은 턱없이 부족하다. 스스로의 건강하고 균형잡힌 의식에 의한 조절, 적도, 중용이란 이 경우 매우 드물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자동적으로' 곧 '무의식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생각을 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