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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6.

미셸 푸코 -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
- 푸코의 삶과 책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1926년 프랑스의 푸아티에에서 태어났다. 푸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모두 지역의 저명한 외과의사ㆍ해부학자였다. 어린 시절의 푸코는 동시대 프랑스의 일반적인 가톨릭 교육을 받았으며, 1946년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이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 ENS)에 입학한다. 1948년에는 철학, 1949년에는 심리학 학사학위(licence) 및 헤겔에 관한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푸코는 자신의 첫 번째 지적 스승이라 할 루이 알튀세르를 만나 1950년 공산당에 입당하나, 1953년 탈당한다. 푸코의 탈당은 당시의 정통적 스탈린주의에 대한 푸코의 반발 및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푸코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기인한 두 번의 자살 시도를 겪는다. 1951년부터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1952년부터는 릴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가르친다. 파리의 심리학연구소에서 1952년 정신병리학 자격증을, 1953년 실험심리학 자격증을 취득한다.
 
 
I. 여명의 시기(1954-1961)



1954년 공산당에서 탈당한 직후 출간한 현상학적ㆍ마르크스주의적 저작 『정신병과 인격』으로부터 『광기의 역사』가 발표된 1961년에 이르는 이 시기는 푸코 자신에 의해 아직 자신만의 방법론적ㆍ사상적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혼돈’의 시기, 혹은 이후 독자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될 다양한 문제들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여명’의 시기로 규정된다.
 
 
1. 『정신병과 인격』, 1954
 
 
1954년 푸코는 여전히 당시의 주된 사조였던 현상학ㆍ실존주의, 그리고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진 첫 번째 저작 『정신병과 인격』(Maladie mentale et Personnalité, P.U.F.)을 발표한다. 결론 부분에서 푸코는 “완전한 인간학으로서의 참다운 심리학은 인간을 소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désaliéner)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여전히 역사와 무관한 ‘인간 자체’의 ‘본질’로서 이해되는 ‘인격’의 ‘소외’와 ‘해방’을 말하고 있다. 한편 프랑스 주류 ‘프티부르주아 사회’에 불편함을 느끼던 푸코는 1954년부터 1961년경까지 스웨덴 웁살라, 폴란드 바르샤바 및 당시 서독의 함부르크 등지의 프랑스대사관의 문화참사관, 프랑스문화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외국에 체류하게 된다.
 
 
2.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1961



1960년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 푸코는 파리로 돌아와 1961년 소르본대학교에서 주논문으로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와 비이성」(Folie et déraison.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을, 부논문으로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1798)에 대한 번역ㆍ주석 및 연구논문 「칸트 인간학의 생성과 구조」(Genèse et structure de l'Anthropologie de Kant)를 제출하여 국가박사학위를 수여받고, 같은 해 주논문을 동명의 제목으로 출간한다. 푸코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이라 할 『광기의 역사』는 1961년 첫출간 당시에는 몇몇 주요한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한다. 푸코는 이후 1972년 초판의 서문을 제외된 새로운 판을 내면서 책의 제명을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이하 『광기의 역사』)로 확정한다.
 
 
『광기의 역사』 초판 도입부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에서 따온 하나의 인용이 등장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건강함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가 아니다.” 푸코는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포고된 조례에 의해 파리 시민의 1%가 감금되었던 ‘대감금’ 이래의 다양한 역사적 현상들을 언급하면서, 실제의 역사적 전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해준다고 말한다. 곧 범죄자ㆍ매춘부ㆍ광인ㆍ무신론자ㆍ범죄자ㆍ‘마녀’ 등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한 곳에 감금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로피탈 제네랄’(l'hôpital général)이라는 수용기관에 감금한 사건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광기의 ‘행정적 대상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광기의 인식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로피탈 제네랄에 감금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의해 비정상(anormal)으로 규정된 사람들이며, 푸코는 바로 이러한 ‘비정상’에 대한 규정이 사후적으로 정상(normal)의 관념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비정상/정상을 나누는 실천은 이후 푸코가 말하는 ‘근대’(modern) 곧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르러 ‘광기의 정신의학화’로 이어진다. 18세기 말 피넬과 튜크 등에 의해 정신병원에서 광인들을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킨 이른바 ‘계몽주의적ㆍ인도주의적인 광인의 해방’은 이제 푸코에 의해 ‘도덕적 책임 곧 윤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죄의식의 내면화 과정’으로서 이해된다. ‘대감금’ 이후 광기는 이전 르네상스 시기에 자신이 누리던 ‘신적 축복’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 문제가 있는 존재, 위험한 존재로 이해되면서, 점차로 도덕적ㆍ윤리적 죄의식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광기는 18~19세기의 전환기, 곧 ‘근대’의 시기 이르러 하나의 ‘의학적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 모든 역사적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정상/비정상’의 구분이라는 정치적 관심이다.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대의 정신병리학까지도) ‘자연인’ 혹은 모든 질병 경험 이전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되고 평가된다. 사실 이러한 정상인이라는 개념은 창안물이고, 정상인을 위치시켜야 하는 곳은 자연의 공간이 아닌 ‘사회인’을 사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며,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 상태의 주변부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 광인이 우리[서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 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에 관한 ‘실증’ 과학, 그리고 광인을 인간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도주의적 진단은 일단 이러한 종합이 이룩되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 종합은 이를테면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정신병리학 전체의 ‘구체적 아 프리오리’를 구성한다.” 나아가 푸코는 “인간이 광인일 가능성과 인간이 대상일 가능성은 18세기 말에 서로 합쳐졌고, 그러한 합류는 실증적 정신의학의 전제와 동시에 객관적 인간학의 주제를 낳았다(이 경우에 시기상의 우연한 일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의 말미에서 라틴어로 적어 내려간 다음과 같은 명제 아래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된다. “심리학적 인간정신이 사로잡힌 인간의 후손이다.”(L'homo psychologicus est un descendant de l'homo mente captus)
 
 
한편 자신이 준거로 삼고 있던 이전의 비역사적ㆍ실존주의적 인간학 및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이론을 완전히 벗어던진 푸코는 1962년에는 - 1954년에 발간했던 첫 저작 『정신병과 인격』을 전면 수정한 - 개정판 『정신병과 심리학』(Maladie mentale et psychologie)을 새로이 출간한다. 특히 책의 2부 ‘질병의 조건’은 완전히 새롭게 작성되어 ‘광기와 문화’라는 새로운 제목을 갖게 되는데, 이 2부는 『광기의 역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요약ㆍ소개로 간주된다.
 
 
II. 지식의 고고학(1963-1969)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상관적 역사를 구성하려 했던 1963년 『임상의학의 탄생』ㆍ『레몽 루셀』로부터 1966년의 『말과 사물. 인간과학의 고고학』, 1969년의 『지식의 고고학』에 이르는 이 시기는 에피스테메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푸코에 따르면, 에피스테메란 ‘하나의 주어진 시대와 사회(16세기 이래의 유럽) 안에서 지식이 그것을 따라 구성되는 일련의 규칙들이 이루는 인식론적 장’으로 정의된다. 결국 에피스테메는 주어진 사회에 대한 (통시적 접근법을 배제하는) 공시적 접근법 곧 ‘구조주의적’ 함축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 에피스테메는 칸트적 ‘인식가능조건’의 구조주의 버전, 혹은 푸코 버전이라 말할 수 있다. 지식의 고고학은 한 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지식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1. 『임상의학의 탄생』ㆍ『레몽 루셀』, 1963
 
 
1963년 푸코는 스스로 『광기의 역사』의 ‘속편’으로 간주했던 『임상의학의 탄생.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Naissance de la clinique. 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을 출간한다. 『임상의학의 탄생』은 언표가능성(énonçabilité) 및 가시성(visibilité)이라는 ‘서로에 대해 환원 불가능하나 동시적, 상관적인’ 두 개의 축을 따라 18세기 말 19세기 초 나타난 ‘근대’ 해부임상의학 ‘탄생 조건’을 다룬다. 이를 위해 푸코가 탐색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 세부적 지식(savoir) 또는 인식(connaissance)이 아니라, 이러한 지식과 인식 자체의 형성 및 변형을 가능케 한 새로운 (cadrillage) 곧 ‘지식의 새로운 배치(configuration)’이다. “변화한 것은 상호적 위치들을 결정짓는 지식의 보다 일반적인 배치, 인식하는 존재와 인식 대상이 되는 존재 사이의 상호적인 놀이이다. [...] 그것은 축적ㆍ심화ㆍ교정ㆍ세련된 제반 인식의 수준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수준에 나타난 새로운 틀이다.” 근대 임상의학은 이렇게 지식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의 가시성과 언표 가능성, 자연과 언어, 곧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 혹은 사물의 질서, 곧 사물을 구성하는 언어의 질서 자체가 변화하면서 생겨난 하나의 가시적 결과 혹은 효과로 간주된다.
 
 
한편 푸코는 같은 해에 프랑스의 소설가 레몽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에 대한 비평서 『레몽 루셀』을 출간한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미궁이 미노타우로스를 만든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가 이 말에 나타나는 미노타우로스를 ‘주체’로, 미궁을 인식의 장(場) 혹은 ‘담론’ 체계로 본다면, 푸코는 이로써, 주체가 담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으로 담론 혹은 인식론적 장의 효과로서 주체가 발생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주체는 이전과 같은 독자적 실체가 아니라, 이러한 장이 발생시키는 하나의 효과, 곧 주체-효과(effet-sujet), 주체-기능(fonction-sujet)으로 간주된다.
 
 
결국, 푸코가 출간 시기마저 같은 일자로 조정하고 했던 이 두 권의 ‘쌍둥이 저작’, 곧 『임상의학의 탄생』, 『레몽 루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른바 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자연과학 및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학을 아우르는 인식의 공통적 틀, 곧 이후 『말과 사물』에서 ‘에피스테메’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될 무엇, 곧 한 시대의 공시적인 공통분모로서의 ‘인식론적 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는 또한 푸코가 스스로 자신만의 방법론적 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던 『광기의 역사』를 넘어 이후 ‘지식의 고고학’이라 지칭하게 될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로서 해석될 수 있다.
 
 
2. 『말과 사물. 인간과학의 고고학』, 1966



1966년 푸코는 프랑스 지성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소르본 주변에서 ‘모닝 빵처럼 팔렸다는’ 『말과 사물. 인간과학의 고고학』(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을 출간한다. 푸코가 대중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 책의 출간 이후이다. 한편 이 시기는 푸코가 당대 프랑스의 중요한 문학잡지들이자 지성의 산실이었던 『크리틱』(Critique) 및 『텔켈』(Tel Quel)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시기로, 1960년대 중후반의 푸코 사유는 광의의 ‘인간과학’(sciences humaines) 및 ‘문학’에 대한 (비판적) 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말과 사물』은 -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푸코 자신의 말대로 - 르네상스 곧 16세기 아래 이 책이 저술된 1966년까지 유럽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에 대한 탐구로 특징지어진다. 에피스테메, 또는 인식론적 장이란 ‘주어진 한 문화 혹은 사회의 모든 지식 일반에 대한 가능 조건 또는 인식소(認識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인식가능조건이라는 광의의 칸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용어이다. 푸코에 따르면, 모든 시대는 ‘단 하나의’ 에피스테메만을 가질 뿐이다. 푸코는 유럽은 16세기 이래 단 두 차례의 인식론적 단절만을 경험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은 단절은 따라서 세 개의 구분되는 시기를 낳게 되는데, 푸코가 제시하는 각각의 시기 및 에피스테메는 다음과 같다.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끝나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이며, 17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8세기 중후반에 소멸되는 고전주의(classique)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재현작용’(représenatation),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시작되어 1966년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modern)의 에피스테메는 ‘역사’(histoire) 혹은 ‘인간’(homme)이다.
 
 
이러한 각 시대와 그에 상응하는 에피스테메의 분석을 위하여 푸코가 선택한 세 영역은 언어ㆍ생명ㆍ노동이다. 17세기 중반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고전주의를 연 것으로 푸코가 적시하고 있는 세 인물은 언어의 랑슬로(Claude Lancelot, 1615-1695), 생명의 레이(John Ray, 1627–1705), 그리고 노동의 페티(Sir William Petty, 1623–1687)이다. 마찬가지로, 18세기 말 19세기 초, 고전주의와 단절하고 근대를 연 것으로 제시되는 세 인물은 언어의 보프(Franz Bopp, 1791–1867), 생명의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 노동의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오늘날 곧 ‘현대’는 여전히 근대의 파장 안에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푸코를 종종 미국식 연구 경향을 따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푸코는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자신의 저술에서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현대’ 역시 여전히 ‘근대’의 자장 안에 속해 있다고 보는 푸코에게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말과 사물』의 이러한 주장이 갖는 다양한 함축들 중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러한 세 영역의 ‘근대 혹은 현대를 열어젖힌’ 인물들로 생각하는 언어의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생명의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 노동의 마르크스(Karl Marx, 1813-1883)와 같은 인물들이 ‘근본적 단절’이 아니라 일종의 ‘찻잔 속의 태풍’만을 일으킨 인물들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푸코의 시대 구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특히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푸코가 이러한 논쟁적인 시기 구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광기의 역사』로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근본적 주장, 곧 말과 사물의 관계는 - 고정 불변하는 비역사적 ‘자연적,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 주어진 사회에 있어서의 개별적 인식의 내용을 가능케 하는 ‘인식가능조건 일반의 변화’에 의해 매 시대마다 새롭게 구성되며, 하나의 지식은 한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에 의해 가능하게 되고 또 그 의미가 확정된다는 주장이다. 가령 푸코는 “근대는 물론 그 이전의 시기의 생물학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생물학 및 생명의 개념 자체가 근대의 시기에 구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는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곧 ‘근대 생물학’이란 표현은 단순한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ie)이다. 근대 이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바와 같은 의미의 ‘생물학’(biologie) 또는 ‘생명’(vie)의 개념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고전주의 시대에 존재한 것은 오직 ‘박물학’(博物學, histoire naturelle)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전주의적 박물학’이라는 말 역시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주장은 일면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적’ 사유에 의해 강력히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푸코 자신은 『말과 사물』에 등장하는 ‘구조’라는 단어의 ‘언급’(mention)과 ‘사용’(emploi)을 구분하면서, 자신은 오직 구조라는 용어를 ‘언급’ 곧 단순히 ‘인용’했을 뿐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결코 구조주의자가 아님을 강변한다. 이러한 주장의 적실성을 따져보기 위해 아래에서는 『말과 사물』 시기의 푸코 사유와 이른바 ‘구조주의적’ 사유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차이점으로는 푸코의 에피스테메가 구조주의에서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이항대립’의 구도를 넘어 ‘다양한 요소들의 전체적 배치’ 곧 인식론적 (場)의 개념 위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에피스테메가 - 엄격한 칸트주의적 의미의 ‘선험적 아 프리오리’와는 구별되는 - 각 시대의 ‘후험적 곧 역사적 아 프리오리(a priori historique)’로 이해되는 인식가능조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한편,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푸코는 각각의 시대‘들’을 가로지르는 메타적 기준은 부재하지만, 각각의 시대 ‘내부’에는 다양한 현상들을 가로지르는 일정한 준거점이 존재한다고 본다. 또한, 푸코는, 각 시대의 모든 인식은 결국 오직 단 한 개의 에피스테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가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모든 인식의 밑바닥에는 불변의 무의식적 상수(常數, constant)가 존재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는 푸코 자신의 주장과는 별개로, 적어도 『말과 사물』에 나타난 푸코의 주장은 - 비록 그것이 ‘전통적 혹은 정통적’ 의미의 구조주의와는 일정한 차별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 크게 보아 ‘구조주의적 함축’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푸코에 따르면, 언어ㆍ생명ㆍ노동의 개별 영역에서 근대를 성립시킨 인물들은 보프ㆍ퀴비에ㆍ리카도이지만, 궁극적으로 근대적 사유를 가능케 한 것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이다. 푸코는 칸트의 유한성의 분석론(analytique de la finitude)을 근대적 사유의 초석으로 제시하는데, 푸코는 유한성의 분석론이야말로 고전주의 시대가 보여주었던 무한(infini)의 사유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역사적으로 한정된 주체, 곧 인간(homme) 및 인간학(Anthropologie)의 개념 탄생의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동시에 인식의 ‘주체/대상’으로 설정하는 초월적-경험적 이중체(doublet empirico-transcendantal)로 인식하는 이 새로운 ‘근대적 인간’(homme modern)의 모토가 휴머니즘(humanisme)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논의의 과정을 거쳐 푸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근대에 성립된 에피스테메 곧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다했으며, 20세기 중반 프랑스 곧 유럽은 이른바 반(反)-인간주의(anti-humanisme)에 기초한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때의 반-인간주의는 ‘인간에 반대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고유명사로서의 근대적 인간 개념 및 그에 기초한 모든 개념적ㆍ사회적 체제를 파기하자는 의미이다. 이러한 주장은 향후 1971년 네덜란드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이 마련한 ‘인간본성’에 관한 푸코-촘스키 사이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푸코의 주장은 이러한 근대적 ‘인간학’에 기초하여 성립된 모든 개념ㆍ제도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에는 기존의 ‘휴머니즘’ 및 그에 기초한 이른바 진리ㆍ자유ㆍ정의ㆍ사회ㆍ개인ㆍ정치적 좌/우ㆍ역사 등의 개념, 곧 자유주의는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개념들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3. 『지식의 고고학』, 1969



푸코는 1966년부터 튀니지에 거주하며 튀니스대학교에서 강의하는데, 이 시기 튀니지 학생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운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푸코는 『말과 사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비판에 대응할 실천적 방법론을 고심하게 되는데, 핵심적 논점은 『말과 사물』이 이미 일어난 변화의 양상과 내적 체계만을 추적할 뿐, 변화의 이유도 변화를 추동할 동력도 주체도 명시적으로 밝혀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다. 푸코는 1967년 이후 『말과 사물』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그 방법론을 정교화하려는 의도를 갖는 『지식의 고고학』을 저술하나, 정작 출간은 프랑스 ‘68혁명’ 이후인 1969년에 이루어진다. 68혁명의 의의를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문제임이 드러났던 시기로 지칭한다. 한편 푸코는 1968년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같은 해 창설된 뱅센 실험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고, 커리큘럼 및 대학제도의 문제와 연관하여 학생들의 편에서 정부 및 대학당국과의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지식인 투사’로서의 푸코가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더 이상 에피스테메가 아니라 언표(言表, énoncé) 및 담론(談論, discours) 의 개념을 활용하여 변화의 가능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 언표는 더 이상 언어학적ㆍ기호학적 함축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단어ㆍ문장 혹은 명제가 아니다. 담론은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언표들의 집합’으로서 정의된다. 담론이란 단어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어에 존재해 왔지만, 오늘 우리가 아는 담론의 개념이 처음으로 규정된 것이 다름 아닌 『지식의 고고학』이다. 이러한 도입의 결과는 언어학적ㆍ기호학적 방법론의 전면적 포기, 니체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정치적 배제의 메커니즘 또는 힘-관계를 담론 형성의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계보학의 도입이다. 푸코는 19709년대 후반의 한 대담에서 이를 문제는 ‘의미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non relations de sens, mais relations de pouvoir)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푸코를 종종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푸코를 설령 광의의 의미로라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푸코 사유의 초기에 해당하는 1969년까지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푸코 사유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부적절한 용어이다.
 
 
III. 권력의 계보학(1970-1975)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 ‘담론의 질서’로부터 1970년대 초반 ‘감옥에 관한 정보 그룹’(G.I.P.) 활동, 그리고 1975년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의 푸코는 서구 ‘근대’ 권력 곧 규율권력의 탄생조건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푸코는 이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거시적ㆍ경제주의적ㆍ주체중심적ㆍ실체적ㆍ법 중심적 관점을 벗어나, 미시적ㆍ정치적ㆍ상관적ㆍ규율적 관점, 곧 진리의 정치적 역사라는 관점에서 권력을 새롭게 규정하고, 이를 통해 ‘현대의 영도(零度)’로서의 근대의 다양한 현상을 분석한다. 권력의 계보학은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고 또 타인의 그러한 지배를 감당하며 저항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1. 『담론의 질서』, 1971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어 1970년 12월 취임강연 ‘담론의 질서’를 행하는데, 이 강연은 다음해인 1971년에 『담론의 질서』라는 제명의 책으로 출간된다. 담론 효과를 둘러싼 푸코 주장의 근본적 전제는 “모든 사회의 담론 생산은 일련의 절차들(procédures)에 의해 통제ㆍ선별ㆍ조직ㆍ재분배된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담론 생산의 ‘절차들’을 외적 및 내적, 그리고 실행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다시 세분한다. 우선, 기본적으로 배제(exclusion)의 기능을 수행하는 외적 절차는 금기와 같은 금지(interdit), 광기와 이성의 대립과 같은 분할(partage) 및 거부(rejet), 그리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의 대립(opposition du vrai et du faux)의 세 가지로 나뉜다. 한편 담론 생산의 내적 절차 역시 주석(commentaire), 저자(auteur), 분과학문(규율, discipline)의 세 가지로 세분된다. 마지막으로, 실행(effectuation)의 범주는 하나의 담론이 주어진 사회에서 담론의 대상이 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으로서의 의식(rituels) 및 요구 사항(exigences)이다. 이에는 모든 정치적ㆍ경제적ㆍ의학적ㆍ과학적ㆍ기술적 형식들이 포함되며, 특히 “모든 교육 체계는 그 수행주체들이 신봉하는 지식ㆍ권력 및 담론의 소유를 유지ㆍ변형시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방식이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담론의 생산 혹은 ‘한계 짓기’(limitation) 절차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작업이 필요하며, 이의 수행을 위해 ‘계보학’이 요청된다.



이처럼 기존 담론의 질서에 반대하고 그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고안된 푸코의 계보학(系譜學, généalogie)은 물론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연원한 것으로, 푸코의 1971년 논문 「니체, 계보학, 역사」은 담론 개념의 니체적 연원을 밝힌 글이다. 계보학은 ‘역사적 이야기의 단일성(unicité) 혹은 기원(origine)의 추구’에 반대하며, 오히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단조로운 목적성(finalité)을 넘어 선’ 사건의 특이성(singularité des événements)을 추구한다. 계보학은 ‘참된 인식의 이름으로 모든 지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위계화 하며 검열하려는 단일한 이론적 심급에 반대하여, 정당화되지 못했으며 자격을 박탈당한 단절된 국지적 지식을 작동시키려는’ 시도, 모든 ‘역사적 지식을 탈(脫)예속화(désassujettir) 시키려는’ 시도이다.
 
 
2.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1975
 
 
1960대 말 이래 푸코는 점차로 - 이른바 사르트르는 잇는 - ‘투사적 지식인’으로 인식되는데, 1971년 2월에는 질 들뢰즈 등과 함께 감옥에 관한 정보 그룹(Groupe d'information sur les prisons, G.I.P.)을 조직한다. 한편 1972년 푸코는 1963년의 『임상의학의 탄생.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의 부제를 없애고 내용에도 상당한 수정을 가한 『임상의학의 탄생』 개정판을 간행한다. 1975년 푸코는 감옥에 관한 정보 그룹의 활동성과 등을 토대로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출간한다. 『감시와 처벌』은 푸코가 이후 ‘자신의 첫 번째 책’이라고 불렀을 만큼 푸코만의 독특한 사유가 완숙된 저작으로 푸코의 ‘가장 논쟁적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감시와 처벌』은 1757년에 있었던 국왕살해 미수범 다미앙의 처형 장면, 그리고 그로부터 81년 후인 1838년 작성된 파리 소년 감화원을 위한 규칙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살아 있는 상태로 온몸을 고문ㆍ절단당하고 결국 ‘네 마리의 말이 끌어당겨 사지가 절단되어’ 사망한 다미앙의 예와 ‘시간 단위로 모든 일과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짜인’ 소년감화원의 규칙이라는 두 예를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백년이 조금 안 되는 이 두 시기 사이에 벌어진 일은 -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계몽주의적 인도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 ‘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잘, 더 효과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효용성의 논리에 입각한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곧 근대의 시기에 일어난 일로서, 이 ‘근대’가 오늘날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사회의 ‘현대’의 기본적 틀을 확정했다는 주장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자신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밝히는데, 푸코에 따르면, 이 책은 ‘근대 영혼과 새로운 사법 권력의 상관적 역사를 밝히는 것’ 곧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하고 있으며 그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면서 이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ㆍ사법적인 복합적 실체의 계보학’을 구성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이 ‘근대 사회의 정상화와 권력ㆍ지식의 형성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의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푸코는 근대의 권력이 개인적ㆍ사회적 신체(corps)의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서 영혼의 통제를 수행해왔다고 말하면서, 플라톤 혹은 그리스도교의 주장과는 반대로, “영혼(âme)이야말로 육체의 감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영혼 및 신체 통제의 기술은 『감시와 처벌』의 주된 논점인 권력-지식(pouvoir-savoir)의 상호 구성에로 나아간다. 권력-지식의 논점은 권력 혹은 욕망과 지식 혹은 진리의 분리를 주장한 플라톤의 관점과는 반대로 지식과 권력은 분리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권력과 무관한 지식도, 지식과 무관한 권력도 없다는 주장이다. 권력-지식은 논쟁적인 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다. 우선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같은 것임을 말하지는 않는데, 만약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푸코가 그 ‘관계’를 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역시 권력-지식에 대한 대표적 오해로서, ‘따라서 권력은 지식 혹은 진리를 억압하거나 이용ㆍ간섭하려 해서는 안 되며, 지식도 마찬가지로 권력에 영합하거나 권력의 불의에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권력과 지식을 권력-지식의 ‘상관적 복합체’로 보는 푸코의 관점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이는 단적으로 사르트르(Jean-Paul Satre, 1905-1980)적 권력관 곧 ‘권력은 필요악’이라는 관점을 전제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생각과 달리, 권력은 필요악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주체와 대상 그리고 인식이 모두 형성되는 상호적 관계의 망이다. 따라서 이른바 (실체로서의 대문자)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Pouvoir). 푸코는 권력-지식 복합체라는 관점을 통해 기존의 거시적인 국가단위의 권력관에 집중하는 자유주의적 곧 공리주의적이거나 헤겔적인 권력관 및 진리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권력관 모두를 거부하고, 미시적 권력관계의 분석에 집중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physique du pouvoir)을 주장한다. 권력의 미시물리학 또는 해부학은 거시 정치를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며, 거시적 권력을 다만 무한히 다양한 복수의 미시적 권력관계들(relations de pouvoir)이 발생시키는 가장 가시적인 최종적 효과 혹은 결과로서만 인정한다. 푸코의 권력관계론이 거시정치를 무시한다는 비판은 이처럼 푸코의 미시 권력관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자신의 관심을 ‘우파 정치이론도 아니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아닌, 새로운 좌파 정치이론의 수립’이라고 요약한다.



푸코의 권력관계론은 근대 사회 분석에 집중하는데, 그 분석 대상 중 하나가 공리주의의 창시자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고안한 판옵티콘(panoptique)이다. 푸코는 근대 사회의 공간 배치 및 조작(opération/manipulation)의 작동원리를 보여주는 판옵티콘을, 니체를 따라, 근대적 영혼의 구성 메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 곧 총체적 국가화(étatisation)와 파편화되는 개인화(individualisation)의 동시적 형성 또는 ‘이중구속’(double-bind)의 생산 장치로 바라본다. 이는 국가화의 측면에서는 근대 내치학(內治學, Polizeiwissenschaft, Staatwissenschaft)의 탄생으로, 개인화의 측면에서는 도덕적 죄책감의 내면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길들여진 근대적 개인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논의는 『감시의 처벌』의 주된 테제, 곧 근대의 시기에 구성된 제반 인간ㆍ사회ㆍ자연 과학, 특히 심리학과 광의의 정신의학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과학적’,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일종의 과대망상적 심리학화(psychologisation)의 기제, 혹은 감시와 처벌이라는 이른바 정상화(normalisation) 기제를 통해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 통제(contrôle)의 원리가 되었다는 푸코의 가설을 정당화 하는 근원이 된다.



3.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1970~1984
 
 
앞서 말한 것처럼,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된 푸코는 사망하기 직전인 1983~1984년까지 안식년이었던 1976~1977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다른 주제로 강의를 지속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차례로 『앎의 의지에 관한 강의』, 『형벌의 이론과 제도』, 『처벌 사회』, 『정신의학의 권력』, 『비정상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생명존재의 통치에 관하여』, 『주체성과 진실』, 『주체의 해석학』, 『자기의 통치와 타인의 통치 1』, 『자기의 통치와 타인의 통치 2. 진실의 용기』 등의 제명 아래 발간 중이다. 감옥을 위시한 감시와 처벌의 형벌 제도 및 실천, 정신의학적 권력, 개인의 ‘신체’ 및 ‘인구’에 대한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 분석, 사법ㆍ규율ㆍ안전장치 분석, 주체의 해석학, 특히 통치성(gouvernementalité) 분석으로 이어지는 푸코의 지적 관심사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강의 주제의 변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1970년대 중후반 이후 그가 사망한 1980년대 초까지 푸코의 관심은 권력의 계보학으로부터 주체 및 윤리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다. 한편, 푸코 전공자로서 시간이 갈수록 확신하게 되는 하나의 사실은 푸코는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의 저자로도 기억되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통치성 분석에 주력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의 저자로서 더 오래 기억되리라는 점이다.



IV. 윤리의 계보학(1976-1984)



푸코는 1976년 발표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 『지식의 의지』로부터 자신이 사망하던 1984년 발표된 2ㆍ3권 『쾌락의 활용』ㆍ『자기 배려』에 이르는 시기를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이름 아래 묶는다. 이때의 윤리는 ‘성격ㆍ품성ㆍ품행ㆍ관습’ 등의 함축을 갖는 그리스어 êthos에서 기원한 용어로서의 윤리(éthique)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지칭하는 푸코의 독특한 용법이다. 푸코는 1권에서는 유럽의 근대를, 2ㆍ3권에서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다양한 텍스트를 분석하여 한 인간이 어떻게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 스스로를 윤리 혹은 도덕의 주체로 구성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요약하면, 윤리의 계보학은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하는가?’에 관련된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1.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1976
 
 
1976년 푸코는 지난해에 발표한 『감시와 처벌』과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서구 섹슈얼리티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한 ‘성의 역사’ 시리즈의 제1권 『지식의 의지』를 출간한다. 원래 6권으로 예고되었던 ‘성의 역사’ 시리즈는 이후 방법론 및 문제의식상의 변화로 8년간의 긴 침묵을 맞게 된다. 물론 이 이른바 ‘8년간의 침묵’이란 단지 어떤 저작도 발간되지 않았을 뿐, 푸코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다양한 사회활동, 강의, 강연, 저술 활동을 지속한다. 1976년에 발간된 『지식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지난해에 발간된 『감시와 처벌』의 권력-지식론에서 드러난 난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섹슈얼리티’(sexualité)의 문제로 확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곧 19세기 이래, 서구는 성과 진리에 관련된 새로운 종류의 담론을 고안해내는데, 이를 푸코는 섹슈얼리티 장치(le dispositif de sexualité)라 부른다. 섹슈얼리티 장치는 성에 관한 담론을 특정한 종류의 진리 담론 즉 과학 담론에 연결시켜 특정한 성 담론 및 진리 담론이 생산되도록 해주는 하나의 장치이다.
 
 
방법론의 측면에서, 푸코는 -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이해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본질적 ‘성-자연’(sexe-nature)을 다루는 ‘성의 논리학’(Logique du sexe) 혹은 ‘자연학’(Physique)을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 성-역사(sexe-histoire), 성-의미작용(sexe-signifiaction), 성-담론(sexe-discours)에 대한 분석을 제안한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권력-지식 복합체의 효과 또는 구성물로 간주되는 섹슈얼리티는 이제 새로운 인식의 체제 아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푸코는 이를 다음처럼 상징적인 언명으로 정리한다. “법 없는 성과 왕 없는 권력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Penser à la fois le sexe sans la loi, et le pouvoir sans le roi) 우리는 이제 부정적 금지의 기능에만 초점을 맞춘 낡은 권력 및 성의 이론을 폐기하고, 더 이상 법을 표본이나 준칙으로 간주하지 않는 새로운 권력 분석학의 체계를 설립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법을 모델로 삼지 않는 새로운 권력 모델, 즉 ‘전략적 모델’(le modèle stratégique)이다. 결론적으로, 『앎의 의지』는 이처럼 금지ㆍ억압을 수행하는 기제로서의 사법적-담론적 권력 개념에 종속된 당시의 정신분석적-마르크스주의적 욕망 개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한 책이다.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전략ㆍ전쟁의 모델’을 대략 1976-1978년의 짧은 시기 동안만 유지한다.



2. 『쾌락의 활용』ㆍ『자기 배려』, 1984
 
 
동성애자인 푸코는 대략 1970년 대 중반에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데, 생애의 말년에 다가선 푸코가 주력한 것은 이러한 윤리의 계보학에 대한 지적 세련화 작업 및 ‘성의 역사’를 속간하는 일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안 1980년대의 푸코는 자신의 ‘지적 유언장’ 작성이라 할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는데, 그 예로 1982년 미국 버몬트대학교에서 행한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강의, 1983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고대 그리스의 ‘죽음을 무릅쓰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용기 혹은 실천’을 의미하는 ‘파르헤시아’에 대해 행한 강연 「담론과 진리」, 1984년의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1984년 사망하기 직전 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의 제2ㆍ3권 『쾌락의 활용』ㆍ『자기 배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강연ㆍ저술을 통해 푸코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및 진리놀이를 통한 주체화ㆍ문제화 및 통치성의 문제를 자신의 탐구를 요약하는 중심적 개념들로 제시한다.
 
 
푸코는 대략 1977-1978년 경 통치및 통치성의 개념을 주축으로 하는 자기 배려(le souci de soi), 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subjectivation) 및 문제화의 개념으로 점차로 이동해간다. 통치(gouvernement) 혹은 통치성(gouvernementalité) 개념은 ‘타인들의 통치’와 ‘자기에의 통치’를 이어주는 것으로, 이후 ‘스스로를 통치하는 기술’ 혹은 ‘자기 배려’로 이어지면서 대략 1980년 이후 푸코의 사망 시기인 1984년까지의 이른바 ‘말기 푸코’의 주요 개념틀인 주체화 및 문제화로 이행하는 결정적 준거점이 된다. 이전의 ‘법이 없는 성, 왕이 없는 권력’은 이제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자기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자기의 테크놀로지(technologie de soi), 곧 윤리(éthique)에 종속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쾌락의 활용』, 『자기 배려』의 논지를 간략히 정리하면, 쾌락의 활용은, 존재의 부정에 기초한 법의 금지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닌, 스스로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실존의 미학 혹은 주체화에 종속되는 적극적ㆍ긍정적인 자기의 테크놀로지로 이해된다. 쾌락의 활용은 고대 그리스에 있어 욕망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증명해야 할 헬라적ㆍ남성적ㆍ시민적 미덕으로 이해된다. 푸코의 쾌락의 활용 개념은 - 자기 지배와 절도의 측면 즉 능동적 절제와 수동적 무절제의 문제에 한정되어 이해됨으로써 부정적ㆍ억압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욕망 담론의 일면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포괄하고 넘어서서 - 지식ㆍ권력ㆍ윤리를 아우르는 존재론적ㆍ정치적ㆍ윤리적 주체화의 긍정적ㆍ생산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장치이다. 한편 이러한 관심의 이행은 주체화ㆍ대상화ㆍ인식론화를 아우르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문제화(problématisation) 또는 진리놀이(jeux de vérité)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화는 기존 행동의 역사 혹은 표상의 역사에 대립하는 하나의 역사, 즉 ‘인간 존재가 자신의 존재, 자신이 하는 것,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순간을 문제화하는 상황을 정의하는’ 사유 체계의 역사가 다루어야만 할 과제이다. 푸코는 이러한 실천을 그리스ㆍ로마 이래 서구사회를 기본적으로 규정지었던 실천의 문제 즉 ‘인간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규칙을 정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안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되는 실존의 기술(les arts de l'existence)이라는 이름 아래 위치시킨다. 이는 고대 서구의 성적 활동과 쾌락이 어떤 실존의 미학(l'esthétique de l'existence)이라는 기준을 작동시키며, 자기의 실천(les pratiques de soi)이라는 작업을 통해 어떻게 문제화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3. 문제화 - 우리 자신의 역사적ㆍ비판적 존재론
 
 
푸코는 이러한 문제화 혹은 문제설정에 대한 탐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고 이러한 탐구를 참다운 철학 활동과 동일시했는데, 이를 자신이 사망한 해에 발표된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를 통해 우리 자신의 역사적ㆍ비판적 존재론(l'ontologie historique et critique de nous-mêmes)이라고 불렀다. 우리 자신의 변형은 우리 자신을 형성한 역사적ㆍ문화적 한계와 조건의 역사, 곧 문제화의 역사를 분명히 인식하고 비판함으로써만 성취 가능하다. 자기의 변형(transformation de soi)은 자기 스스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곧 자신의 역사적 형성 과정(formation historique de soi)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penser autrement)를 아는 것이다. 푸코에게 사유의 목표란 스스로로부터 벗어나는 것(se déprendre de soi-même), 아는 자 자신으로부터의 일탈(égarement de celui qui connaît)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모든 작업은 모든 형태의 정상화에 대한 문제화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말년의 푸코가 대담 「진리ㆍ권력ㆍ자기」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의 사유 전반을 요약하는 중요한 언명으로서 기억될 필요가 있다.



“나의 목표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풍경의 일부가 실제로는 어떤 매우 정확한 역사적 변화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분석은 인간 실존에 보편적 필연이 있다는 관념에 대립합니다. 나의 분석은 제도의 자의성을 보여주고, 또 우리가 여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은 무엇이며 아직도 얼마만큼의 변화가 가능한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푸코는 1984년 6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에이즈로 사망한다.
 
 
푸코 용어해설
 
지식 savoir. 푸코는 인식과 지식을 명확히 구분한다. 인식connaissance은 인식 주체와 무관하게 대상이 분류ㆍ동일시ㆍ합리화되는 담론의 구성을 지칭하는 것이며, 지식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인식을 얻기 위하여 주체가 수행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인식의 주체 스스로가 변형을 겪게 되는 모든 절차를 의미한다.
 
권력 pouvoir. 푸코는 권력을 일관적이고 안정적이며 정합적인 실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복합적인 출현의 역사적 조건들을 전제하며 따라서 다수적 효과를 함축하는 권력관계(relations de pouvoir)로 바라본다.


윤리 éthique. 푸코가 말하는 윤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한 사회에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치론적 코드의 총체로서의 도덕(morale)이 아니다. 푸코의 윤리는 각자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론적 코드의 총합으로서의 도덕을 대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스스로를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방식’을 의미하는 푸코 고유의 용어이다.
 
고고학 archéologie. 고고학은 주어진 사회의 주어진 시기의 모든 지식들을 가능케 해주는 인식 가능조건들의 배치, 곧 에피스테메(épistémè) 또는 인식론적 장(場)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발생시키는 효과로서의 개별적 인식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론적 가설이다.
 
계보학 généalogie. 계보학은 ‘관념적 의미작용과 무한한 목적론의 메타역사적 전개’와 ‘기원의 추구, 역사적 이야기의 단일성’에 반하여, ‘모든 단조로운 목적론을 벗어나 사건의 특이성’을 찾아나서는 하나의 역사적 탐구 방법이다.
 
담론 discours. 푸코의 담론 개념은 다양한 장(場)에 속해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 동일한 기능 작용의 규칙을 따르는 언표들의 집합이다. 담론은 중립적이라 가정된 이전 언어학의 의미작용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정립된 푸코의 고유한 개념으로, 특정한 효과, 결과(effet)를 발생시키는 언표들의 집합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I. 푸코의 주요 저작 및 우리말 번역본
 
- Histoire de la Folie à l'Age Classique(1961), "Collection TEL", Gallimard, 1972;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03.
 
- Maladie mentale et la psychologie, P.U.F., 1962; 『정신병과 심리학』, 박혜영 옮김, 문학동네, 2002.
 
- Naissance de la Clinique. 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1963/1972), P.U.F., 1963; 󰡔임상의학의 탄생.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 홍성민 옮김, 이매진, 2006.
 
-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Gallimard, 1966;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 L'Arché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1992/2000.
 
- L'Ordre du Discours, Gallimard, 1971; 󰡔담론의 질서󰡕, 이정우 옮김, 새길아카데미, 2012.
 
-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Gallimard, 1975;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 2003.
 
- Histoire de la Sexualité 1: La Volonté de Savoir, Gallimard, 1976; 󰡔성(性)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10.
 
- Histoire de la Sexualité 2: L'Usage des Plaisirs, Paris: Gallimard, 1984; 󰡔성(性)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문경자ㆍ신은영 옮김, 나남, 2004.
 
- Histoire de la Sexualité 3: Le Souci de Soi, Gallimard, 1984; 󰡔성(性)의 역사 3: 자기 배려󰡕, 이혜숙ㆍ이영목 옮김, 나남, 2004.



II. 푸코에 대한 소개ㆍ연구서


- 허경, 「미셸 푸코」, 『처음 읽는 프랑스현대철학』, 동녘, 2013.
 
- 허경, 「미셸 푸코」, 『철학, 책』, 알라딘, 2014.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 2012.
 
- 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이상길 옮김, 산책자, 2009.
 
- 질 들뢰즈, 『푸코』, 허경 옮김, 그린비, 2014.
 
 

2013. 11. 5.

미셸 푸코의 소쉬르 수용 - 『말과 사물』을 중심으로


 
 
 
 
 
 
 
 
미셸 푸코의 소쉬르 수용
- 『말과 사물』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면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에 의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수용은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푸코에게 소쉬르는 무엇보다도 ‘구조 언어학’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광의의 ‘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이해된다. 이의 당연한 귀결로서, 푸코의 소쉬르 혹은 ‘구조주의’ 수용은 주로 1960년대의 시기, 이른바 푸코의 ‘구조주의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1970년대로 넘어가면 푸코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이른바 ‘구조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고 힘에의 의지로 대변되는 니체적 계보학을 채택한다. 그러나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러한 지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첫째, 푸코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구조주의적 사상가임을 긍정한 적이 없으며, 특히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는 자신을 구조주의 사상가로 간주하는 관점에 대한 격렬한 거부의 태도를 보인다. 둘째, 푸코가 1970년대 초 이래 이른바 구조주의적 관점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가령 에피스테메로 대변되는 이전의 ‘구조주의적’ 관점을 대체하기 위해 푸코가 새로이 제시하는 ‘담론’ 개념 안에는 적어도 그 구성상 ‘일정한 구조주의적 배경’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여전히 가능하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고, 푸코에 의한 소쉬르 수용 및 그에 따라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말과 사물』에 나타난 소쉬르 - 기호론과 기호학



우선 푸코는 자신의 저작에서 소쉬르라는 이름을,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거의 언급 혹은 인용하지 않는다. 가령 푸코의 대표적인 ‘구조주의적’ 저작으로 일컬어지는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도 소쉬르라는 이름은 겨우 4회 등장하는 것이 고작이며, 이를 이은 1969년의 『앎의 고고학』에서도 역시 단 1회 등장하는 것으로 그친다. 또 단행본의 형태로 간행되지 않은 푸코의 다양한 저술들을 모은 『말과 글』에도 소쉬르라는 이름은 12회 등장하는데, 특기할 것은 이 12회 중 10회가 1966-1972년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나머지 2회는 각기 1977년 및 1983년의 인터뷰에서 ‘단편적으로’ 곧 회고적 시선에 의해 간단히 언급된다는 점이다. 이 1966-1972년의 시기는 방금 위에서 잠시 지적한 것처럼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푸코의 ‘구조주의적’ 시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는 소쉬르라는 이름을 푸코가 직접 언급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같은 『말과 글』의 색인에서 구조 및 구조주의 사항을 찾아보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구조(structure)라는 용어의 경우에는 모두 129회가, 구조주의(structuralisme)라는 용어의 경우에는 모두 32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의 언급은 양자 공히 1960년대의 이른바 ‘구조주의’의 시기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렇게 196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 소쉬르 및 구조, 구조주의에 대한 푸코의 언급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선택하여 이들 사유를 바라보는 푸코의 기본적 관점을 정리해보자.



푸코의 출간된 모든 글을 통틀어 소쉬르가 등장하는 최초의 언급은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 발견된다. 이 책에서 소쉬르는 모두 3회에 걸쳐 언급되는데, 모두 거의 유사한 특정한 맥락 아래 놓여있다. 우선,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우선, 아래의 첫 번째 언급은 좀 길지만 향후의 논의를 위해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17세기에 출현하는 바와 같은 기호(signe)의 이항배치는 스토아학파 이래, 심지어는 최초의 그리스 문법학자들 이래, 양태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언제나 3원적이었던 구조를 대신하는데, 이 배치는 기호가 그 자체로 이분화되고 이중화되는 재현(une représentation dédoublée et redoublée sur elle-même)을 전제로 한다. [...] 재현은 지시(indication)이자 동시에 출현(apparaître)이며, 대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자 자기 발현이기도 하다. 고전주의 시대부터 기호는 재현이 재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재현의 재현성이다(le signe c'est la représentativité de la représentation en tant qu'elle est représentable). [...] 아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마지막 결과, 기호의 이항 이론(la théorie binaire du signe). 17세기부터 기호의 일반 과학 전체의 근거가 되는 이 이론은 기본적으로 재현의 일반 이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기호가 의미하는 것(signifiant)과 의미되는 것(signifié) 사이의 무조건적인 관계(자의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은, 자발적이거나 강제적인,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관계)라 해도, 이 관계는 재현이라는 일반적 요소 안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의미하는 요소와 의미되는 요소는 둘 다 재현됨에 따라서만, (또는 재현되었거나 재현될 수 있음에 따라서만) 그리고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실제로 재현함에 따라서만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적 기호의 이론이 ‘관념학’(idéologie)(다시 말해 단순한 감각에서 추상적이고 복잡한 관념에 이르는 재현의 모든 형태에 대한 일반적 분석)의 철학적 정당화 및 근거로 자처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소쉬르가, 일반 기호론(sémiologie générale)의 기획을 재발견하면서, 기호에 대해 일견 ‘심리주의적인’ 것(개념과 이미지의 결합)으로 보일 수 있는 정의를 부여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는 소쉬르가 사실상 기호의 이항적 성격을 사유하기 위해 고전주의적 조건(condition)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소쉬르는 17-18세기 고전주의 시기의 에피스테메인 재현(再現, représentation), 특히 이 시기의 언어 이론인 포르루아얄(Port-Royal)의 일반문법(Grammaire Générale)과의 관련 하에 조명되어 있다. 푸코는 17-18세기 일반문법의 재현 이론과 소쉬르 기호학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유사성’을 가정하는데, 이는 인용에서 ‘소쉬르가 기호의 이항적 성격을 사유하기 위해 고전주의적 조건을 재발견했다’는 표현 아래 등장한다.
 
 
소쉬르에 관련된 두 번째 및 세 번째 인용은 17-18세기 고전주의의 일반문법을 잇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이래, 곧 푸코가 말하는 ‘근대’ 이래의 문헌학(文獻學, philologie)과 관련되어 등장한다.


“라스크, 그림, 보프의 등장과 함께 언어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군의 음성 요소로서 취급된다. 일반 문법에 의하면 입이나 입술의 소리가 글자(lettre)로 바뀔 때 언어가 탄생한 반면에, 이제부터는 소리가 일련의 서로 구분된 음성(sons)으로 분절되고 분할될 때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언어의 실체는 이제 온전히 음성적이다. [...] 이제 언어는 다소 막연하면서 실물과 닮은 자의적인 기호, 『포르루아얄의 논리』(Logique de Port-Royal)에서 인물의 초상이나 지도가 직접적이고 명백한 모델로 제시된 기호(signe)가 아니다. 언어는 파동적(vibratoire) 특성을 획득했는데, 이 특성은 언어를 가시적 기호로부터 분리시키고 언어를 음표(note de musique)에 근접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소쉬르는 언어의 역사적 형태들을 넘어 언어(la langue) 일반의 차원을 복원하기 위해, 또한 포르루아얄에서 마지막 관념학자들까지 부단히 이어져 온 사유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유구한 기호의 문제를 오랜 망각에서 구해 내기 위해 19세기 문헌학 전반에서 주요한 사건이었던 말(la parole)의 계기를 우회해야 한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4067762

 
 
“[근대의 시기에] 언어의 역사(l'histoire des langues)가 사유될 수 있으려면, 언어를 기원으로까지 단절 없이 연결하는 광범위한 연대기적 연속성에서 언어가 분리되어야 했고, 또한 붙들려 있는 재현의 넓은 공통 평면에서 풀려나야 했다. 이러한 이중의 단절 덕분으로 문법 체계들의 이질성이 고유한 분할선, 각 문법 체계의 내부 변화를 규정하는 법칙, 그리고 전개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행로와 함께 드러났다. [...] 언어(langage)의 범주에서 일반 문법에 언제나 전제되어 있는 그 무한한 파생과 한없는 혼합의 분석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언어는 결코 내적 역사성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시간의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 [...] 새로운 문법은 직접적으로 통시적이다. 언어(langage)와 재현 사이의 단절에 의해서만 실증성이 성립될 수 있었을 뿐인 만큼, 어떻게 통시적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언어들(langues)의 내부 구조, 즉 언어들이 기능하기 위해 허용하고 배제하는 것은 오직 말(mots)의 형식에 의해서만 다시 파악될 수 있었으나, 말의 형식이 갖는 법칙은 이전의 상태, 일어날 수 있는 변화, 결코 일어나지 않는 변형과 관련될 경우에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히 언어에 의해 재현되는 것으로부터 언어가 단절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언어(langage)가 출현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언어는 역사 속에서만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소쉬르는, 일반 문법의 방식으로, 두 관념 사이의 연결에 의해 기호를 정의하는 일종의 ‘기호론’(sémiologie)을 재구성하게 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재현에 대한 언어(langage)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만 문헌학의 통시적 사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에 의해 수행되는 16세기 이래 서구 사유에 나타난 인식론적 단절, 혹은 에피스테메의 변천에 관련된 이해가 요청된다. 푸코는 16세기 이래 『말과 사물』이 저술된 20세기 중반까지의 서구 사유에는 오직 ‘두 번의 단절을 통한 세 개의 지층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지식 고고학적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으로 이는 16세기 이래 17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르네상스의 시기를, 두 번째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재현(représentation)으로 이는 이후 18세기 중후반 경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가정되는 고전주의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역사(histoire)로서 이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이래 『말과 사물』이 저술된 1966년까지도 ‘여전히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의 시기이다. 그리고 『말과 사물』은 이러한 16세기 이래 서구 지식의 고고학적 지층 형성 및 변형의 과정을 언어ㆍ노동ㆍ생명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서 상세히 논구하는 책이다. 본 논문의 주제가 되는 언어의 경우,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고 고전주의를 연 사람은 랑슬로이며, 다시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고 새로운 근대의 시기를 연 사람은 보프이다. 그리고 랑슬로와 보프에 의해 단절된 세 시기는 각각 그 시기 지식의 일반적 가능 조건을 규정하는 ‘인식론적 배치 혹은 장’ 곧 에피스테메(épistémè)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16세기 초~17세기 중반
17세기 중반
~18세기 중후반
18세기 말/19세기 초~
유사성 ressemblance
재현 représentation
역사 histoire
-
포르루아얄/클로드 랑슬로
(Claude Lancelot, 1615–1695)
일반문법
프란츠 보프
(Franz Bopp, 1791–1867)
문헌학



이제 이러한 일반적 이해의 틀에 따라, 앞서 살펴본 소쉬르 관련 언급들을 검토해보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소쉬르(1857-1913)는 생몰연대나 대표작인 유고 편집본 『일반언어학강의』(1916)가 출간된 시기로 볼 때, 일견 ‘근대’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푸코에 의해 고전주의와의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 푸코에 따르면, 소쉬르의 기호학은 - 근대의 역사문헌학이 아닌 - 고전주의의 기호론과 더 많은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이 『말과 사물』을 작성하던 1966년 당시를 ‘여전히 근대의 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로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쉬르는 그 생몰시기 전체가 오직 근대에만 속하는 인물이다. 더욱이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이 한 시대의 모든 지식에 작용하는 무의식적 상수 곧 인식 가능조건임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관점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도 소쉬르는 근대가 아니라, 고전주의와 더 큰 연관성을 갖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은 푸코가 『말과 사물』을 저술한 근본 의도에서 찾아야 한다. 『말과 사물』을 면밀히 검토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 비록 푸코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 이 책에서 푸코가 말하는 ‘두 개의 단절에 의한 세 개의 지층’ 구분은 사실상 ‘앞으로 도래할 세 번째 인식론적 단절에 의한 네 번째 지층’을 준비하고 있으며, 『말과 사물』 자체가 이런 도래할/도래해야 할 ‘미래의 인식론적 단절’을 준비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소쉬르는 다름 아닌 ‘언어의 영역에서 이러한 미래의 세 번째 단절을 결정적으로 예비한 인물들 중 하나’로 푸코에 의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3. 『말과 사물』에 나타난 구조주의


그러나 소쉬르에 대한 이상의 언급은 『말과 사물』에서 보이는 구조주의에 대한 언급과의 연관성 아래 조명될 경우에만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말과 사물』에는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단 2회만 언급되어 있지만, 그 함축은 결정적이다. 우선, 첫 번째 언급은 앞서 소쉬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전주의와의 연관성이라는 맥락에서 나타난다.
 
“[근대가 시작되는] 19세기에 지식의 대상은 존재의 고전주의적 충만(充滿)이 침묵하게 된 바로 거기에서 형성된다. / 역으로 새로운 철학의 공간은 고전주의적 지식의 대상들이 해체되는 자리에서 곧바로 나타나게 된다. [...] 이런 식으로 근대의 철학적 성찰의 두 가지 중요한 형태가 정립된다. 첫 번째 형태는 논리학(logique)과 존재론(ontologie)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형식화(formalisation)의 경로를 따라 나아가며, 새로운 견지에서 마테시스(mathesis)의 문제에 마주친다. 두 번째 형태는 의미 작용과 시간의 관계를 검토하고, 완결되지 않고 어쩌면 결코 완결되지 않을 베일 벗기기를 기도하며, 해석(interprétation)의 주제와 방법을 다시 부각시킨다. 그때 철학에 제기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아마 이 두 가지 성찰 형식 사이의 관계와 관련될 것이다. 물론 이 관계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이 관계의 근거가 마련되는가를 말하는 것은 고고학에 속하지 않지만, 고고학은 이 관계가 맺어지는 영역, 에피스테메의 어느 장소에서 근대 철학이 통일성을 찾아내려고 하는가, 지식의 어떤 지점에서 근대 철학이 가장 넓은 영역을 발견하는가를 지정할 수 있는데, 그 장소는 해석을 통해 밝혀지는 유의미한 것과 (명제 이론 및 존재론의) 형식적인 것이 합류할지 모르는 곳이다. 고전주의적 사유의 본질적인 문제는 이름(nom)과 질서(ordre)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즉 분류학(taxinomie)이라 할 수 있는 명명법(nomenclature)을 발견하는 것, 또는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투명할 기호 체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사유가 기본적으로 문제시하게 되는 것은 의미가 진실의 형식 및 존재의 형식과 맺는 관계이다. 즉 우리 성찰의 창공에는 존재론인 동시에 의미론일 담론(아마 접근 불가능할 담론)이 군림한다. 구조주의는 새로운 방법론이 아니라, 근대적 지식에 눈을 뜨고 불안해하는 의식이다.”


달리 말하면, 고전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가 시작되던 19세기에 서구의 지식은 새로운 배치를 얻게 되는데, 이 배치는 형식화해석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 지식의 관건은 이 양자가 맺는 관계 설정에 대한 것이 된다. 근대의 지식은 의미가 진실의 형식 및 존재의 형식과 맺는 고전주의적 관계를 의문시하며 성립되었는데, 그 결과 ‘우리의’ 곧 ‘근대의’ 지식은 의미론과 존재론이 만나는 지점에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근대 지식들 중 하나가 구조주의라는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다음처럼 이어진다.


“근대적 사유에서 해석의 방법은 형식화의 기법과 대립한다. 즉 전자는 언어 아래에서, 그리고 언어 없이 언어로 말해지는 것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자 하고, 후자는 모든 잠재적 언어를 통제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의 법칙에 의해 모든 잠재적 언어를 위로부터 지배하고자 한다. 해석하기와 형식화하기는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중요한 분석 방식이 되었다. [...] 사실 해석과 형식화는 두 가지 상관적인 기법인데, 이 기법들에 공통된 토대는 근대의 문턱에서 구성된 언어의 존재에 의해 형성된다. 언어의 결정적 격상은 대상화로 인한 언어의 격하를 보상하는 것으로서, 언어가 모든 말에 내포된 순수한 인식 행위에서, 그리고 우리의 각 담론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언어를 인식의 형식에 대해 투명하게 만들거나, 언어를 무의식의 내용에 깊히 박히게 하거나 해야 했다. 사유의 형식주의와 무의식의 발견 쪽으로, 러셀과 프로이트 쪽으로 나아가는 19세기의 두 갈래 흐름은 이 사실로 명확히 설명된다. 또한 이 두 방향을 서로 근접시키고 교차시키려 하는 경향, 예를 들어 모든 내용에 앞서 우리의 무의식에 부과되는 순수한 형식을 밝히려는 시도, 더 나아가 경험의 토대, 존재의 의미, 우리의 모든 인식에 바탕으로 구실하는 경험의 지평을 우리의 담론으로 이르게 하려는 노력 또한 이 사실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구조주의와 현상학의 고유한 경향과 함께, 구조주의와 현상학의 공통의 장소를 규정하는 일반적인 공간이 발견된다.”


앞서 말한 근대적 지식의 근본적 배치는 해석과 형식화라는 대립적이면서도 상관적인 두 기법, 분석 방식에 의해 구성된다. 고전주의의 ‘질서’(ordre)는 일반성 자체(‘일반’문법의 ‘일반’) 곧 무한(infini)을 전제로 하는 ‘담론’(discours)의 재현작용으로 이해되는데, 이를 파괴하고 성립된 근대 지식은 - 더 이상 담론의 재현작용이 아닌 - 스스로를 인식의 한정된 대상이자 주체로 구성하는 경험적-초월적 이중체(doublet empirico-transcendental), 곧 역사를 갖는 ‘유한한’ 인간의 지식이다. 이것이 근대의 여명 곧 18세기 말에 성립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인간학, 곧 유한성의 분석론(analytique de la finitude)다. 푸코에 따르면, 이후 근대적 지식은 19세기 이후 러셀과 프로이트, 곧 사유의 형식주의와 무의식의 발견 쪽으로 나아간다. 이 대립적인 동시에 상관적인 두 방향을 결합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두 사유’인 구조주의현상학이다.


4. 『말과 사물』 시기의 소쉬르와 구조주의
 
푸코의 이러한 인식은『말과 사물』이 발간된 1966년 전후의 각종 대담, 논문 등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동시기의 소쉬르 및 구조주의에 대한 푸코의 언급은 근본적으로 소쉬르와 그로부터 기원하는 구조주의가 17-18세기 고전주의적 ‘기호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과 사물』의 주장을 확장ㆍ심화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담론이 침묵하는 곳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자, 이제 소쉬르, 프로이트, 후설 이래로 인간 인식의 가장 핵심부에서 의미(sens)와 기호(signe)의 문제가 다시금 등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우리는 기호와 의미, 그리고 기호의 담론이라는 거대한 문제의 이 같은 회귀가 고전주의와 근대성을 구성했던 우리 문화 내에서 발생한 일종의 중첩은 아닌가, 혹은, 이제까지 우리 문화에서 인간의 질서와 기호의 질서는 늘 양립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회귀가 인간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표지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탄생한 기호로 인해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 중 최초의 인물이었던,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 무엇보다도 우선 니체가, 그리고 이후의 소쉬르(구조주의), 프로이트(정신분석), 후설(현상학)가 자신의 모태인 근대 지식 내부의 균열을 보여주는 선구적 인물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근대가 파괴되고 도래해야 할 이후의 시기를 고지해주는 자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푸코의 논거는 16세기 이래 서구의 사유에서 인간과 언어는 한 번도 양립 가능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기호와 담론이 부각되면서 인간이 인식의 대상으로 정립될 수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은 무한한 재현 작용이라는 언어ㆍ기호 메커니즘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근대에 오면, 언어와 담론의 재현 기능이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나면서,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이자 주체로 구성하는 인간이 탄생한다. 그런데 이제 니체, 소쉬르, 프로이트, 후설 이래로 서구 사유의 에피스테메 내부에 근대적 인간이 종말을 고할 것임을 알려주는 표지 혹은 균열이 생겨났다. 소쉬르적 의미의 구조 혹은 체계란 무엇보다도 - 마치 고전주의의 재현 작용처럼 - 작동하는 것, 기능하는 것, 곧 일종의 메커니즘이다.
 
5. 나가면서 - 소쉬르, 근대적 주체의 파괴자
 
이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푸코가 앞서 『말과 사물』과 관련하여 작성하였던 도표를 다음처럼 확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현대?
16세기 초~17세기 중반
17세기 중반
~18세기 중후반
18세기 말/19세기 초~
1950년 이후?
1966년 이후?
유사성 ressemblance
재현 représentation
역사 histoire
언어? langage
-
포르루아얄/클로드 랑슬로
(Claude Lancelot, 1615–1695)
일반문법
프란츠 보프
(Franz Bopp, 1791–1867)
문헌학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언어학, 문학, 신화분석?
 
 
이를 통해, 이른바 ‘근대의’ 사유에서, 소쉬르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가 갖는 결정적인 철학적 의미가 드러난다. 소쉬르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는 멀리는 광의의 ‘근대’를 연 것으로 평가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곧 주체로부터, 가까이는 협의의 ‘근대’를 결정적으로 성립시킨 칸트의 인간학에 이르는 이른바 근대적 사유를 지탱해왔던 인간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구조주의는 근대 주체의 근본성과 기원성의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이다. “주체는 하나의 발생ㆍ형성ㆍ역사를 갖는 것이며, 기원적인 것이 아니다”(le sujet a une genèse, le sujet a une formation, le sujet a une histoire; le sujet n'est pas originaire). 1960년대 중반 푸코가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받아들였던 소쉬르와 그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는 그가 자신의 철학적 주적(主敵)으로 설정했던 근대 인간학적 주체를 파괴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도래해야 할 미래의 에피스테메의 가능조건을 드러내주는 분석 도구에 다름 아니다.
 
 
 
 
참고문헌

 
I. 푸코

 
- MC: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MC], Gallimard, 1966.
- DEQ: Dits et Ecrits, Quarto, Gallimard, 2001.
-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1966), DEQ I.
- 'Entretien avec Michel Foucault'(1976/1977), DEQ II.

 
II. 그 외


-「체계에의 정열 - 푸코의 레비스트로스 수용」, 한국기호학회,『기호학연구』(제24집), 2008년 12월.


 

2012. 11. 14.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저술 초안]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본, 중국, 대만, 곧 동아시아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일본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 학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서양학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정통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서양학문을 접한 후, 서양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특성상 서양의 제반 개념들이 한자표기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메이지 시기 학자들의 번역 및 그들 사이의 논쟁을 거친 제반 서구 번역어들, 곧 新漢語는 이후 결정적으로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기 이래 다양한 침탈의 과정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수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술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야구'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전면적 수용 현상을 가져왔는데, 이 책은 이러한 일본식 서구 번역어 곧 신한어의 한반도에로의 전면적 유입 과정을 대표적인 몇몇 일상 및 학술 용어의 사례를 들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나는 이를 통해 오늘 우리의 서양 사상에 대한 주체적 수용 및 자생적 우리 학문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본어 번역어에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의존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론적 층위에 대한 개념사적, 계보학적 검토 작업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렇게 메이지 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신한어 개념이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오늘-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가령 법률(法律)이라는 한자어 조합은 중국어가 아니라 신한어이며, 이는 오직 law라는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기존 중국어의 法과 律을 조합한 단어로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예로 본서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단어는 他人, 他者, 主體, 客體, 主觀, 客觀, 絶對, 相對, 民族, 哲學, 理性, 社會, 眞理, 科學, 藝術, 眞善美, 自由, 普遍性, 合理性, 近代性 등등의 제반 개념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들을 우리로부터 타자화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들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동시에, 이러한 용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였는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 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 일상적 용어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오늘 우리의 '보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 메이지 효과란 무엇인가?
2.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의 상황
3. 메이지 용어의 성립 과정
4. 메이지 용어의 동아시아 전파
5. 메이지 용어의 한반도 전파
6. 메이지 용어의 사례들 - 개념사적/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
7. 나가면서 - 새로운 '보편학'의 가능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