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2.
2012. 9. 23.
안심 담요
라이너스의 담요, show me love, 2011
Comfort object 안심담요
A comfort object, transitional object, or security blanket is an item used to provide psychological comfort, especially in unusual or unique situations, or at bedtime for small children. Among toddlers, comfort objects may take the form of a blanket, a stuffed animal, or a favorite toy, and may be referred to by (English-speaking) toddlers as blankey and lovey.[1]
안심 대상, 이행 대상 혹은 안심 담요는, 특히 평범하지 않은 혹은 특별한 상황에서,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물건으로, 보통 어린아이들이 침대에서 쓰는 물건이다. 보통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이 사용하는 부드러운 담요 혹은 헝겊으로 만든 동물 인형 혹은 좋아하는 장난감 등으로, 영어권의 아기말에서 담요[blanket] 혹은 사랑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사람[lovey]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Comfort objects for therapy
치유를 위해 사용되는 안심 대상
Stuffed toys are sometimes equipped in emergency vehicles and police patrol cars, to be given to victims involved in an accident or traumatic shock, to provide them comfort. Paramedics are trained to treat physical shock with a wide array of blankets designed to preserve heat, blood, and wounds for life threatening traumas.
헝겊 혹은 털로 된 장난감은 자동차 사고 혹은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며, 응급차 혹은 경찰차 등에도 구비되어 있다. 낙하산 부대의 의무병과 같은 경우에도 생명을 위협하는 트라우마에 의한 상처, 혹은 온기나 혈액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넓은 담요 역시 육체적 심리적 충격으로부터 피해자를 구하기 위한 담요 사용법을 숙지하도록 되어 있다.
Often charities will provide comfort objects such as blankets and quilts to survivors of disasters.[2]
Psychologists are experimenting with the use of heavy thick fleece blankets to replace restraints such as straight jackets. They have noted through experiments with autistic children that weighted blankets have a desirable soothing effect to help calm agitated patients.[3]
자선 단체의 구호 요원 역시 재난 희생자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담요 혹은 부드러운 재질로 된 천을 때로 제공한다. 심리학자들은 구속복 대신 무겁고 두꺼운 담요를 사용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무거운 담요를 사용하는 것이 자폐아의 발작상태를 상당히 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In child psychology
아동 심리학
Legend:
In human childhood development, the term transitional object is normally used. It is something, usually a physical object, which takes the place of the mother-child bond. Common examples include dolls, teddy bears or blankets.
인간 유아 발달의 경우, 보통 '이행 대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행 대상은 보통 어머니-아이 사이의 유대를 대체하는 물질적 대상을 가리킨다. 보통 인형, 테디 베어 혹은 담요 등을 가리킨다.
Donald Woods Winnicott introduced the concepts of transitional objects
and transitional experience in reference to a particular developmental sequence. With "transition" Winnicott means an intermediate developmental phase between the psychic and external reality. In this "transitional space" we can find the "transitional object."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우즈 위니콧(1896–1971)이 발달의 특정 단계를 지칭하기 위해 이행 대상 및 이행 체험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행'(移行, trasition)이라는 말로써 위니콧은 심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 사이의 중간적 발달 단계를 지칭하였다. 이 '이행 공간'에서 '이행 대상'이 나타난다.
When the young child begins to separate the "me" from the "not-me" and evolves from complete dependence to a stage of relative independence, it uses transitional objects. Infants see themselves and the mother as a whole. In this phase the mother "brings the world" to the infant without delay which gives it a "moment of illusion," a belief that its own wish creates the object of its desire which brings with it a sense of satisfaction. Winnicott calls this subjective omnipotence. Alongside the subjective omnipotence of a child lies an objective reality, which constitutes the child’s awareness of separateness between itself and desired objects. While the subjective omnipotence experience is one in which the child feels that its desires create satisfaction, the objective reality experience is one in which the child independently seeks out objects of desire.[citation needed]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고 완전한 의존 상태로부터 일정한 독립 상태로 이행할 때, 어린아이는 이행 대상을 사용한다. 어린아이는 자신과 어머니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데, 이 단계에서 '어머니'는 어린아이에게 지체 없이 '환상의 순간'을 제공하는 '세계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자기 자신의 소망으로부터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욕망의 대상을 창조한다. 위니콧은 이 대상을 '주관적 전능성'이라고 불렀다. 한 아이의 주관적 전능성 곁에 자신과 욕망 대상 사이의 분리에 대한 어린아이의 자각을 구성하는 '객관적 현실'이 놓여 있다. 주관적 전능성의 경험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창조된 만족의 경험이라면, 객관적 현실은 어린아이가 독립적으로 욕망 대상을 찾아나서는 경험이다.
Later on the child comes to realize that the mother is separate from it through which it appears that the child has lost something. The child realizes that it is dependent on others and thus it loses the idea that it is independent, a realization which creates a difficult period and brings frustration and anxiety with it. In the end it is impossible that the mother is always there to "bring the world" to the baby, a realization which has a powerful, somewhat painful, but ultimately constructive impact on the child. Through fantasizing about the object of its wishes the child will find comfort. A transitional object can be used in this process. The transitional object is often the first "not me" possession that really belongs to the child. This could be a real object like a blanket or a teddy bear, but other "objects," such as a melody or a word, can fulfill this role as well. This object represents all components of "mothering," and it means that the child itself is able to create what it needs as well. It enables the child to have a fantasized bond with the mother when she gradually separates for increasingly longer periods of time. The transitional object is important at the time of going to sleep and as a defence against anxiety.[citation needed]
이후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무엇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존해 있음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욕구불만과 불안을 가져오는 어려운 시기로 어린아이를 이끈다. 결국 어머니가 언제나 어린아이에게 '세계를 가져다 주기 위해' 곁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경험은 어린아이에게 강력한, 때로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결국에는 건설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린아이 자신의 자각을 가져오게 된다. 이행 대상은보통 어린아이 자신에게 참으로 속하는 최초의 '내가 아닌' 소유물이다. 이는 담요나 테디 베어 같은 실제의 물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어떤 멜로디나 단어와 같은 하나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행 대상은 '어머니 같은 보살핌'을 나타내며, 이는 어린아이 스스로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행 대상은 점차로 길어지는 어머니와의 점진적인 분리 기간 동안 어린아이가 갖는 어머니와의 환상적 유대를 제공한다. 이행 대상은, 불안에 대한 하나의 방어기제로서, 잠자러 가는 시간 등의 경우에 특히 중요하다.
In a later stage of the development the child no longer needs the transitional object. It is able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me" and "not-me," and keeping inside and outside apart and yet interrelated. This development leads to the use of illusion, symbols and objects later on in life.
대부분의 경우 이후의 유발달 단계에서 어린아이는 더 이상 이행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어린아이는 이제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으며, 구분되어 있지만 여전히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안과 밖을 구분한다. 이러한 발달은 이후의 발달 단계에서 개인으로 하여금 환상, 상징, 대상을 사용하도록 이끈다.
Winnicott related the concept of transitional object to a more general one, transitional phenomena, which he considered to be the basis of science, religion and all of culture. Transitional objects and phenomena, he said, are neither subjective nor objective but partake of both. In Mental Space, Robert Young has provided an exposition of these concepts and has generalized their role into psychic phenomena in adult life.[4][5]
위니콧은 이행 대상의 개념을 자신이 과학, 종교 및 문화의 기초로 간주했던 이행 현상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과 연결시켰다. 이행 대상 및 이행 현상은 주관적 현상도 객관적 현상도 아니며, 다만 이 양자의 결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로버트 영은 저서 '정신적 공간'에서 이러한 개념들을 확장시켜 성인의 심적 현상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일반화 시켰다.
Research with children on this subject was performed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Milwaukee by Richard H. Passman and his associates. Among other findings, they showed that security blankets are appropriately named — they actually do give security to those children attached to them. Along with other positive benefits, having a security blanket available can help children adapt to new situations, aid in their learning, and adjust to physicians' and clinical psychologists' evaluations. Passman's research also points out that there is nothing abnormal about being attached to them. In the United States, about 60% of children have at least some attachment to a security object.
리차드 패스먼과 동료들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위스콘신-밀워키 대학에서 수행한 아동 연구에 따르면, '안심 담요'란 이름은 아이들에게 실제로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것에 대해 붙여진 이름으로 그야말로 적절한 명칭이다. 여타 긍정적 효과 중에는, 아이들은 안심 담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혹은 임상 심리학자의 평가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받게 된다. 패스먼의 연구는 또한 아이들이 안심 담요에 집착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증해주었다. 미국의 경우, 전체의 대략 60% 정도의 아이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안심 대상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Use by adults
성인의 경우
Adults may also use comfort objects. In a 2008 study, the Sony AIBO robotic pet was found to decrease loneliness in the elderly in nursing homes.[6]
어른들 역시 안심 대상을 사용한다. 2008년의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소니 아이보 로보트 인형은 간호를 필요로 하는 노인들의 외로움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Japanese adults use comfort objects to cope with modern stress.[7]
일본의 성인은 현대적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하여 안심 대상을 사용하고 있다.
Stuffed animals may be given by emergency medical services workers, police, and others to victims of disasters such as fires and crime. After the September 11 attacks, writes Marita Sturken in Tourists of History, "the Oklahoma City National Memorial sent six hundred teddy bears and then the state of Oklahoma sent sixty thousand stuffed animals to New York, which were distributed to children in schools affected by 9/11, family support organizations, and New York fire stations."[8]
응급의료서비스 근무자, 경찰 역시 화재나 범죄와 같은 재난 희생자에게 헝겊으로 된 동물 인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쌍둥이 빌딩 9.11 공격 이후, 마리타 스터큰은 자신의 저서 <역사 관광>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국립 추모관'이 뉴욕에 6만 개의 헝겊 인형을 보냈으며, 이는 9.11에 의해 상처를 입은 학교의 아이들, 가족 지원 기구, 뉴욕 소방서 등에 분배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Many adults consider the comfort that security blankets provide as essential to their mental and emotional well-being.[9]
많은 어른들 역시 안심 담요가 제공하는 안정감을 자신들의 정신적 감정적 복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Adults will take comfort objects away on business trips to remind them of home. According to a 2011 survey by Travelodge, about 35 percent of British adults still sleep with a teddy bear.[10]
어른들 역시, 출장 등의 경우, 집이 주는 평온감을 얻기 위해 안심 대상을 가지고 간다. <트레블로지>에 의해 수행된 2011년의 연구에 의하면, 약 35%의 영국 성인이 여전히 테디 베어를 안고 잔다.
In popular culture
대중 문화
It is commonly believed, the term security blanket was popularized in the Peanuts comic strip created by Charles M. Schulz, who gave such a blanket to his character Linus van Pelt. Linus called it his "security and happiness blanket," in Good Grief, More Peanuts printed in 1956[11]However, the concept of a comforter blanket existed prior to Peanuts. In an article for, the November 1954, Review Report, writer "Bev," wrote about her daughter. "Security blanket. My younger child is one year old. When she finds a fuzzy blanket or a fleecy coat she presses her cheek against it and sucks her thumb." Since 1920, blankets which clipped onto sleeping infants to prevent them from rolling out of bed and keep the body covered were dubbed "Security blanket fasteners."[12]
안심 담요는 특히 챨스 슐츠의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여 대중화 된 것으로 말해진다. 등장 인물 중 '라이너스 반 펠트'는 항상 안심 담요를 끌고 다닌다. 라이너스는 1956년 발행된 <좋은 슬픔, 피너츠 속편>에서 이를 '안심 행복 담요'(security and happiness blanket)라고 불렀다. 그러나, 안심 담요는 <피너츠>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가령 1954년 11월의 한 기사에서 리포터 '베브'는 자신의 딸에 대해 쓰면서, "안심 담요, 나의 작은 아이는 한 살이다. 내 딸은 부드러운 담요나 털이 달린 코트를 자기 볼에 대고 비비면서 손가락을 빤다"고 적었다. 1920년 대 이래, 담요는 아이들이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고 온기를 보존할 수 있도록 '안전 담요 벨트'로서 사용되었다.
The most common popular name for such a blanket is blanky – sometimes banky, if a child has not acquired the ability to pronounce complex onsets – with terms including wubby (popularized by the 1983 film Mr. Mom) and wink. A security blanket was also featured quite prominently and used by main character, Leopold Bloom, portrayed by Gene Wilder in the 1968 Mel Brooks comedy The Producers, and its subsequent, 2005 musical remake The Producers in which the character is played by Matthew Broderick.
안심 담요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명칭은 '블랭키'이다 - 혹은 때로 아이들이 발음하기에 보다 용이한 '뱅키', 혹은 1983년 마이클 키튼이 주연한 영화 <미스터 마마> 이래로 대중화된 '우비' 혹은 '윙크'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안심 담요는 1968년 멜 브룩스의 코미디 <더 프로듀서>에서 진 와일더가 연기한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 그리고 이를 이은 2005년의 뮤지컬 리메이크 <더 프로듀서>의 매튜 브로더릭에 의해서도 잘 알려졌다.
The appropriateness of a 27-year-old adult sleeping with a comfort blanket was discussed on the British television chat show, The Wright Stuff, on the 29th November 2010. It was revealed that people who sleep with comfort blankets are in fact more independent than those who do not. The theory is that children who use a comfort blanket are more likely to detach themselves from their parents because of the increase in security which the blanket provides.
2010년 11월 29일 영국의 티비 대담 프로 <더 라이트 스터프>에서는 27살 어른이 안심 담요를 안고 자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안심 담요를 안고 자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독립적인 사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이론은 안심 담요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안심 담요가 제공하는 안정감에 의해 부모로부터의 분리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논거로 삼고 있다.
The concept was mentioned in the television series Friends in the episode "The One with the Pediatrician," when Ross reminds Chandler of the security blanket he brought to college.
한편 안심 담요의 개념은 티비 시리즈 <프렌즈>의 '소와과 의사' 편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이 드라마에서 로스는 챈들러에게 대학에 안심 담요를 가져갔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다.
See also
참고
References
참고문헌
^ Iannelli, M.D., Dr. Vincent (Dec. 12, 2004). "Security and Comfort Objects". About.com. http://pediatrics.about.com/od/infantparentingtips/a/04_loveys.htm. Retrieved 2009-07-17.
^ http://crafthope.com/2011/05/security-blankets-for-tornado-survivors/
^ http://www.ot-innovations.com/content/view/51/38/
^ Young, R. M. (1994). Mental Space. London: Process Press. ch. 8
^ Young, R. M. (1989). "Transitional phenomena: production and consumption," in B. Richards, ed., Crises of the Self: Further Essays on Psychoanalysis and Politics.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pp. 57-72.
^ "Study: Dogs, Robots Cheer Elderly". Fox News. March 3, 2008. http://www.foxnews.com/story/0,2933,334529,00.html. Retrieved 2009-07-17.
^ Security Blankets for Adults Kathi's Mental Health Review, March 25 2002
^ The recent history of such comfort objects, particularly teddy bears, as well a critique of their comfort-providing function can be found in Marita Sturken, Tourists of History: Memory, Kitsch, and Consumption from Oklahoma City to Ground Zero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here p. 7.
^ Do You Still Have a Security Blanket? Dr. John Grohol, PsychCentral, October 13 2010
^ 35 percent of British adults sleep with bear United Press International, February 21 2012
^ http://www.phrases.org.uk/meanings/security-blanket.html
^ http://www.phrases.org.uk/meanings/security-blanket.html
Further reading
보충 참고문헌
Abram, J. (1996). The Language of Winnicott. A Dictionary of Winnicott’s Use of Words, Karnac Books, London
Dell’Orto, S. (2003). W.D. Winnicott and the transitional object in infancy. Pediatric Medicine Chirurgic 25(2), 106-112.
Mitchell, S. A., Black, M. J. (1995). Freud and beyond: A history of modern psychoanalytic thought. New York: Basic Books.
Passman, R. H. (1977). Providing attachment objects to facilitate learning and reduce distress: The effects of mothers and security blankets. Developmental Psychology, 13, 25-28.
Passman, R. H. (1987). Attachments to inanimate objects: Are children who have security blankets insecure?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55, 825-830.
Passman, R. H., & Halonen, J. S. (1979). A developmental survey of young children's attachments to inanimate objects. Journal of Genetic Psychology, 134, 165-178.
Passman, R. H., & Lautmann, L. A. (1982). Fathers', mothers', and security objects' effects on the responsiveness of young children during projective testing.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50, 310-312.
Winnicott, D.W. (1971). Playing and Reality, Routledge, London
Young, R. M. (1989). 'Transitional phenomena: production and consumption', in B. Richards, ed., Crises of the Self: Further Essays on Psychoanalysis and Politics.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pp. 57-72.
Young, R. M. (1994). Mental Space. London: Process Press.
Creature Comforts, People and Their Security Objects by Barbara Collopy O'Halloran and Photographed by Betty Udesen.
2012. 8. 13.
고통 - 앙드레 드 리쇼
andré de richaud, la douleur, 1931
앙드레
드 리쇼, 이재형 옮김, 문학동네, 2012.
"1914년 8월. 대위가 군대에 동원되자 그녀는 아들만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전쟁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여겨 짐을 풀지는 않았다. 버들가지로 엮은 커다란 트렁크들은 살짝 열린 채 어두운 현관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그 안의 내용물이 찬장이나 옷장과 같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정돈되기 시작했다. 몇 달 뒤 트렁크들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이제 더는 여행을 하지 않는 다른 트렁크들을 만났다. 모든 물건이 놓여할 자리에 놓이고 테레즈 들롱브르가 다시 도시로 가서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즈음, 그녀는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지내고 있는 곳이 사뭇 적막하고 쓸쓸해서 감정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던 터라 충격이 격렬하기는 했어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아들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 여드레를 울고 난 뒤, 이제 혼자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나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아들이 덜컥 홍역에 걸리고 말았다. / 여위기는 했지만 훌쩍 커버린 아들이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 테레즈 들롱브는 남편을 거의 잊은 상태였다. 어린 환자를 문병 온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미래를 암시했다. 죽을 때까지 그늘에 묻혀 살아야 한다는. 아들 조르제를 위해서 ...... / 그녀는 자신이 처한 비장한 상황에 경탄했다. 자기 희생과 용기를 주제로 삼은 어느 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10)
나는 앙드레 드 리쇼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아름다운 책을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 책은 처음으로 내가 아는 것,
어머니, 가난, 하늘에 비치는 아름다운 저녁 같은 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고통』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을
풀어주었고 속박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 책을 하룻밤 사이에 다 읽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자 어떤 낯설고 새로운 자유가 용솟음쳐
머뭇거리며 미지의 땅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통』은 나에게 창작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 알베르 카뮈
이 소설은 어머니와 아들의 복잡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욕망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의 인질로 삼는다.
아이는 슬픔과 고독에 사로잡힌다. 카뮈 역시
어린 시절 무관심한 어머니로 인해 불안을 느껴왔다. 고통, 욕구, 혐오, 이 모든 감정이 뒤엉켜 그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통』은
이러한 감정을 수면 위로 떠올려, 카뮈가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 안도 도모코(큐슈 대학교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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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8.
나 자신, 나의 연애, 나의 고뇌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 유종호
이 말을 듣고 그녀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정원을 같이 산보하자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간 우리는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 년 전에 런던에 가서 지낸 멋진 겨울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거기서 그녀가 불질러 놓았던 남성들의 찬미, 그녀가 한 몸에 받았던 주목 등. 나는 그녀가 어떤 귀족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실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오후가 지나고 밤이 되면서부터 그 짐작은 점점 확정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가지가지 달콤했던 대화가 내 귀에 전해지고 센티멘털한 장면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한 마디로 말해 그날 하루는 그녀가 나를 위해 그 자리에서 써주는 상류 사회를 그린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다. 이 야기는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화제는 늘 마찬가지 - 자기 자신, 자기의 연애, 자기의 고뇌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자기 어머니의 병환이나 오빠의 죽음, 또는 집안의 장래를 생각할 때 암담하기만 한 현재 상태 따위에 대해 한미디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흘러간 나날의 열락에만 취해 있고 장래의 쾌락을 열망하는 데에만 사로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병실에 하루 오 분씩밖엔 더 있지를 않았다.(435)
이 글을 읽으며, 바로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잠시나마 '바로 내가 이런 인간은 아닌가' 하고 혼자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이렇게 해서 '길들여지는데' - 물론 이는 사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이상 어느 정도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 때로, 그러니까 항상, 이러한 자기 검열은 과도한 양상을 띠거나 혹은 턱없이 부족하다. 스스로의 건강하고 균형잡힌 의식에 의한 조절, 적도, 중용이란 이 경우 매우 드물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자동적으로' 곧 '무의식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생각을 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2012. 7. 27.
무라카미 류
<라인>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그가 보고 들은 한, 이 세상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73)
넌, 그렇지 않은가?
-
<미소 수프> - 무라카미 류 / 정태원
<스트레인지 데이스>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반도에서 나가라 (전2권 세트)> - 무라카미 류 / 윤덕주
<교코> - 무라카미 류 / 양억��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개정판)> - 무라카미 류 / 한성례
<악마의 패스> - 무라카미 류 / 이윤정
<코인로커 베이비스 1>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중용한글역주> - 김용옥
1-2.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데서 계신戒愼하고, 들리지 않는데서 공구恐懼한다.
-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남들이 보든 말든, 듣든 말든 나 홀로 항상 계신하며 두려움을 갖는 것을 말한다. 결국 '중용'이란 내 존재의 내면의 심화이다(240~241).
1-3.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한다.
- <<중용>>에서는 '숨은 것'과 '미세한 것'이 궁극적인 긍정적 가치로서 언급되고 있다. 숨음과 드러남, 미세함과 나타남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섭되는 것이다. 숨음처럼 잘 드러남이 없고, 미세함처럼 잘 나타남이 없다. 따라서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고 나타낼 필요가 없다. 숨어 있고, 미세한 곳에서 인간 본래 모습의 최대치를 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명을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정도이다. [...] '은미隱微함'이 곧 '홀로있음愼獨'이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의 축복이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하고 하늘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있을 때,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은미한 디테일이 다 수도修道의 대상이 될 때, 그때를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삼가함은 신중함이다. 삼가함은 자기 절제며, 자기 발견이며, 자기 주체의 심화과정이다. 그것은 쉼이 없이 전개되는 주체의 심화과정ever-deepening process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나댐'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주체의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그 검은 바다 속 수 천 미터 아래로 잠수해 내려가는 잠수부의 고독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독'이다.
'신독' 사상은 <<주역>>의 대과大過 괘卦의 상전象傳에도 이런 말로 나타나고 있다: "군자는 위기의 상황에서 홀로 서도 두려움이 없으며, 세상을 등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답답함이 없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성의誠意'의 맥락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뜻을 성실하게 한다" 즉 마음의 지향성을 바르게 갖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악취를 싫어하듯 악을 미워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듯 선을 사랑하는 그 진정성을 보지保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겸自謙'이라 불렀다. <<대학>>에서는 일차적으로 "신기독愼其獨"의 의미를 "홀로 있을 때의 감정을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중용>>의 신독사상이 훨씬 더 포괄적인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고 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독'은 개인의 내면적 사태이므로 사회적 결과에 의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일체의 공리주의적 윤리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 주희장구 朱熹章句
'은'은 어두운 곳이다. '미'는 미세한 사건이다. '독'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자기만 홀로 아는 어떤 경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세미細微한 사건들이 그 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태에서 동태로 바뀌어가는 그 미묘한 갈림길을 타인들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즉, 천하의 사태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보다 더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계구하고 여기에 더욱 삼가함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욕人欲이 싹트려고 하는 것을 미리 막아서,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 자라나서, 도로부터 멀어지는데 이르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다(242~246).
14-3.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 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 윗자리, 아랫자리라는 외적 상황성을 극복하는 실존의 본질태는 '정기正己'이다. 즉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정기'는 곧 나의 실존적 상황의 책임을 타인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곧 '불구어인不求於人'이다.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15-20). 이러한 논리를 구극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타의 궁극은 곧 종교적 '타자'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존재의 책임이나, 실존적 상황의 원인을 나라는 존재 이외에서 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용>>의 심오한 논리이다.
[...]
공자나 [공자의 손자이자, <<중용>>의 저자인] 자사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원초적 '하늘天'의 개념은 분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근원을 인격적 하느님이라는 존재자에게 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사에게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적 개념은 '천지天地의 종교Tian-Ti Cosmos Religion'이다. 우선 이 천지의 종교에 있어서는 기존의 여하한 인격적 개념도 거부된다. '천명天命'의 '천天'은 이미 인격적 존재자가 아니며, 더더욱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투영일 수 없다. 인간의 종교적 감정은 특정한 '존재자'로부터 '천지'라는 대생명의 전체의 장으로 확대된다. 하느님이 근원적으로 탈존재화脫存在化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전체의 장場의 축약태로서 마이크로코스모스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주적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타자the Other라는 객체가 소실된다. 이것이 '정기불구어인正己不求於人'이라고 하는 의미의 본질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타자화된 욕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는 자사의 사상은 '신독' 사상의 궁극적 귀결처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나 기타 여하한 신비주의도 이구동성으로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를 말한다. 그러나 자사는 나 존재로부터 모든 타자를 절대적으로 무화無化시킨다. 나의 존재의 책임은 천天이나 인人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타자에게 전가의 기회를 단절하고 나 스스로 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이야말로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극상의 신비를 논구하고 있는 것이다(391~395).
* 22-1. 주희장구.
타인의 성性이든 사물의 성性이든 그것이 결국 다 나의 성性이다(542).
33-2.
"시詩는 말한다: "물고기 물에 잠겨 깊게 꼭꼭 숨어 있네. 그렇지만 물이 맑아 너무도 밝게 잘 보여라!" 이와 같이 내면을 숨길 길이 없으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보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그 마음의 지향하는 바가 미움 살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범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군자의 훌륭한 점은 오로지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그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이로다!"
- 자사 논의의 핵심은 군자의 지적 통합판단이나 도적적 정직성은 결국 사회적인 승인으로써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홀로의 내면적 판단에서 우러나오는 고독한 실존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629~630).
33-3.
"시詩는 말한다: "그대 방에 홀로 있을 따라도 하느님께 비는 제단 있는 저 구석에서 남이 안 본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말지어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어 자기를 뽐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도 사람들이 믿음을 준다."(630).
33-4
- <<순자>> <불구>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군자는 지극한 덕을 구현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심중을 모든 사람들이 헤아릴 줄 알고, 구태여 은혜를 베풀지 않아도 그에게 친밀하게 가까이 가려하며, 진노를 보이지 않아도 그의 위엄을 존중한다. 대저 사람들이 와 같이 그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가 신독을 실천하기 때문이다."(633)
단식광대 - 감시와 처벌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채찍을 들고 자기 자신을 감시합니다. 조금이라도 하기 싫어하면 채찍으로 마구 후려치는 겁니다."(255)
"어느 누구도 밤낮으로 단식 광대를 줄곧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찰하는 바로는 정말 단식이 중단 없이 완벽하게 행해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식 광대 자신만이 이를 알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만이 이와 동시에 자신의 단식에 완전히 만족하는 구경꾼이었다."(275)
"단식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도 이런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275)
<단식광대>, 빨간 피터의 고백
제인 에어 1, 샬롯 브론테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1>, 유종호 옮김, 민음사, 2004.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법이다."(48쪽)
"정치적 반란을 제외하고서도 얼마나 많은 반란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동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00쪽)
하지만, 샬럿 브론테나 제인 에어나 모두 너무 가엽다. 내가 여자 자매가 없어서 그런지, 나도 누이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리고 실제의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제인 오스틴, 혹은 가공의 제인 에어, 모두 내게는 너무도 가엽게만 느껴진다. 물론 누군가는 그렇게 여성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대상화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고, 그리고 아마도 나 역시 그러한 감정 혹은 감상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들의 글을 읽을 때 마음이 아프고 그들이 가엽다. 물론 그들도 힘차게 자신의 주어진 삶과 때로는 투쟁하며 때로는 고통받으며 살아간 그냥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렇게 느끼는' 사실이 있다. 이러한 말은 물론 그들에 대해서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왜 남성들은, 아니 인간들은, 이토록 여성들에게 잔인한 것일까?
당신이 저지른 과실의 결과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 유종호
"그래, 그럼 제인, 상상력의 도움을 빌려요. 가령 말이오, 당신이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고 훈련된 소녀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오늘날까지 제멋대로 자라난 장난꾸러기 소년이라고 가정해 보란 말이오. 머나먼 외국 땅에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거다란 과실을 저질렀다고 생각해요. 어떤 성질의 것인지, 어떤 동기에서인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고 하고, 다만 과실의 결과가 일평생 당신의 생애를 따라다니고, 그 오점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시다. 알겠소? 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범죄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니까. 범법자에게 법률의 제재를 받게 하는, 피를 흘리게 한다든가, 또는 어떠한 범죄 행위를 말하는 건 아니오. 내가 말하는 건 과실이란 말이오. 당신이 저지른 과실의 결과가 머지않아 당신에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당신은 구원을 얻으려고 방법을 강구한단 말이오. 정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법률에 저촉되지도 않고 문책을 받을 성질의 것도 아니야. 그러나 역시 당신은 불행하단 말이오. 왜냐하면 당신의 바로 문 앞에서 희망이 당신을 저버렸기 때문이오. 당신의 청춘은 일식 때문에 대낮인데도 어두워지고, 해가 질 때까지 그 암흑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 쓰디쓰고 치사한 연상이 당신의 유일한 양식이 된거야."(402)
2012. 7. 26.
커피의 해악과 효능
<내 이름은 빨강 1> - 오르한 파묵 / 이난아
"자기 얘기에 도취된 후스렛 호자는 더욱 흥분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계속 열변을 토했습니다.
<오, 나의 헌신적인 신도들이여! 커피를 마시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께서는 커피를 들지 않으셨소. 커피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위궤양과 허리 디스크와 불임의 원인이 되는 사탄의 음료임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또한 커피숍은 쾌락을 탐닉하는 돈 많은 한량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온갖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장소요. 그러므로 수도원보다 먼저 커피숍을 폐쇄해야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커피 마실 돈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그들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잔뜩 마시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그곳의 천한 잡종견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짜로 믿습니다. 나와 우리 종교를 비방하는, 바로 이런 자들이야말로 진짜 똥개들입니다!>"(32)
<내 이름은 빨강 2> - 오르한 파묵 / 이난아
"그들은 커피의 해악, 즉 눈과 위를 나쁘게 만들고 머리를 몽롱하게 하여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한다는 걸 강조하고, 유럽인들의 독(毒)인 커피를 아름다운 여자을 한 악마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었다가 거절당했다는 에피소드도 얘기해 줬어요. 마치 밤의 여흥으로 교양을 배우는 것 같았죠. 집에 돌아가면 남편에게 <독을 많이 마시면 안 되요.>라고 잔소리를 할 생각도 했답니다."(240)
<광기의역사> - 미셸 푸코 / 이규현
"(2) 정화.
내장의 협착, 들끓는 잘못된 생각, 술렁이는 독기와 격한 감정, 체액과 정기의 부패 ... 광기는 동일한 정화 작업에 결부될 수 있는 일련의 치료법 전체를 불러들인다. [...]
그러나 주된 작업은 몸 속에 형성되어 광기를 결정적으로 유발한 모든 동요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것으로는 우선 쓴 맛의 액체가 있다. 쓴 맛은 바닷물의 매서운 힘을 모두 지니고 있고, 정화 작용을 하며, 병으로 인해 육체나 영혼에 쌓인 무익하고 해로운 모든 불순물을 부식시킨다. 쓰고 강한 맛의 커피는 <뚱뚱한 사람, 그래서 진한 체액이 가까스로 순환하는 사람>에게 유익하고, 위험한 열기 없이도 필요 이상의 습기를 없애주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물질에 고유한 속성이므로, 태우지 않으면서 건조시키고, 불꽃 없는 물과 같은 것으로서, 태우지 않고 정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불순물을 줄여준다.
<커피를 오랫동안 마셔온 사람은 커피가 위장병을 고친다는 것, 커피가 위장의 과도한 습기를 빨아들인다는 것, 커피가 장 속의 가스를 없애주고 장의 점액을 녹여 부드럽게 청소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느끼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커피가 머리로 올라오는 술기운을 막고, 따라서 흔히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완화시키며, 요컨대 생명의 정기에 힘과 활기를 주고, 생명의 정기를 청결히 유지시키면서도,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에게조차 상당한 열기의 느낌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1763년 퐁타무송에서 제출된 티리옹의 박사학위 논문 <커피의 사용과 남용에 대하여>, Thirion, De l'usage et l'abus du cafe, these soutenue a Pont-a-Mousson, 1763(Gazette salutaire, n. 37, 1763년 9월 15일 서평 참조))"
(498~501쪽)
2012. 7. 12.
광기와 정상의 정치적 역사
미셸 푸코, 1926~1984
디디에 에리봉, 박정자 옮김, 그린비, 2012.
"자신의 합리성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합리성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근거가 결코 과학적으로 구성된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80쪽)
번역된 책을 읽다가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 원문을 찾아보았는데, 국역본의 뉘앙스가 조금 애매한 듯하여 원문과 나의 번역을 올려본다.
우선 원문은 <<말과 글>>(Dits et ecrits) 두 권짜리 2001년 카르토판 167쪽이다.
"il faut demander compte à la recherche du choix de sa rationalité; il faut l'interroger sur un fondement dont on sait déjà qu'il n'est pas l'objectivité constituée de la science; il faut l'interroger enfin sur le statut de la vérité qu'elle confère elle-même à la science puisque c'est son choix qui fait de la vraie psychologie une psychologie vraie."
“우리는 [심리학적] 연구에 자신의 합리성 선택에 대한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과학으로부터 구성된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하나의 기초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심리학적 연구가 과학에 대해 스스로 부여하는 진리의 지위에 대해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심리학으로부터 하나의 ‘참된’ 심리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심리학의 [배제라는] 선택 자체이기 때문이다.”(167)
그런데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한 페이지 전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형식의 심리학이 갖는 역사적 아 프리오리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과학적인가 아닌가라는 배제의 양식에 기초한 가능성이다.”(166)
그리고 이 말은 다시 그로부터 4년 후인 1961년에 발표되는 푸코의 박사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설명해준다.
“광기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ㆍ의학적 지식은 암묵적으로 그에 앞서는 비이성에 대한 윤리적 경험의 성립에 바탕을 두고 있다.”(185)
“금기가 신경증으로 변화되는 과정의 중간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도덕적 책임 곧 윤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죄의식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192)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대의 정신병리학까지도) ‘자연인’ 혹은 모든 질병 경험 이전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되고 평가된다. 사실 이러한 정상인이라는 개념은 창안물이고, 정상인을 위치시켜야 하는 곳은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인’을 사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며,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 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 광인이 우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 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에 관한 ‘실증’ 과학, 그리고 광인을 인간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 인도주의적 진단은 일단 이러한 종합이 이룩되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 종합은 이를테면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정신병리학 전체의 구체적인 ‘아 프리오리’를 구성한다.”(244)
“순수한 심리적 의학은 광기가 죄의식의 영역으로 양도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523)
“인간이 광인일 가능성과 인간이 대상일 가능성은 18세기 말에 서로 합쳐졌고, 그러한 합류는 실증적 정신의학의 전제와 동시에 객관적 인간학의 주제를 낳았다(이 경우에 시기상의 우연한 일치는 없다).”(709)
그리고 이 모든 말은 푸코가 같은 책에서 라틴어로 적어 내려간 다음과 같은 명제 형식 아래 명료히 정식화된다.
“심리학적 인간은 정신이 사로잡힌 인간의 후손이다.”(804)
"l'homo psychologicus est un descendant de l'homo mente captus."(원서, 549)
그리고 이 말은 푸코가 1961년 플롱 판 『광기의 역사』 맨 앞부분에 제사(題辭)로 사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일기』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과는 정반대의 의도에서 이 책을 썼음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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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의 ‘상식’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가 아니다.”(원서 1961, 7)
결국 푸코가 라틴어로 적어 내려간 위의 한 마디 말이야말로 방대한 『광기의 역사』 전체를 요약해주는 한 마디이자, 후에 1975년 푸코가 발표하는 『감시의 처벌』의 주된 테제 곧 심리학과 광의의 정신의학, 사실은 인간과학 전체가 -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과학적’이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 일종의 ‘과대망상적인’ ‘심리학화’(psychologisation)의 기제, 곧 ‘감시와 처벌’이라는 ‘정상화’(normalisation) 기제를 통해 근대 사회를 ‘통제’하는 핵심적 원리로 기능하고 있다는 푸코의 가설을 정당화해주는 근원이다.
2012. 7. 7.
확신을 가진 사람
나는 그 사람이 내 블로그를 보러 들어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혹 그분이 읽는다면, 그 분만은 이 이야기가 자신이 한 이야기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강의를 수강한 분이라 내가 단체 메일로 이 블로그의 주소를 알려드렸지만, 그분은 지금은 아마도 6개월도 더 전에 내 강의를 들으셨던 것 같고, 당연히 그 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 그 강의의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아마도 종강날 뒤풀이였던가? 그 분과 아마도 또 다른 분과 우리는 서로 옆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이 한 말이 계속 오늘까지 내 귀에 울린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참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분은 자신이 한 그말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성격상 아마도 기억하실 듯하고, 내게는 위에 적은 것처럼 여전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생생해진다.
어떤 맥락에서 그 얘기가 나왔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그 분이 한 이런 말이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떤 일을 겪은 이후, 시간이 갈수록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확신을 단순히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아예 고려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이 나는 세상에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고, 그때나 저때나 그 말은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그분이 이 말을 하면서 지었던 표정과 그 말투, 그 장소가 생각이 난다. 왜 그런 것일까? 물론 그 사이에 이 말을 내게 더욱 더 실감시켜줄 그런 종류의 사건은 전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말을 처음 들을 때에도 공감을 했고(누군들 안 그러랴!)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을 햇지만, 나도 내가 왜 이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생생한 인상으로 내게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분은,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럴 만한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번쯤은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것일까? 때로는 피해자이고 때로는 가해자인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은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말이 너무도 옳은 말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말한 것처럼, 그런 사람이란 정말 생각할수록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 뱀발. 이 글을 적다보니 니체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물론 내 강의를 수강한 분이라 내가 단체 메일로 이 블로그의 주소를 알려드렸지만, 그분은 지금은 아마도 6개월도 더 전에 내 강의를 들으셨던 것 같고, 당연히 그 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 그 강의의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아마도 종강날 뒤풀이였던가? 그 분과 아마도 또 다른 분과 우리는 서로 옆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이 한 말이 계속 오늘까지 내 귀에 울린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참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분은 자신이 한 그말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성격상 아마도 기억하실 듯하고, 내게는 위에 적은 것처럼 여전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생생해진다.
어떤 맥락에서 그 얘기가 나왔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그 분이 한 이런 말이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떤 일을 겪은 이후, 시간이 갈수록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확신을 단순히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아예 고려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이 나는 세상에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고, 그때나 저때나 그 말은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그분이 이 말을 하면서 지었던 표정과 그 말투, 그 장소가 생각이 난다. 왜 그런 것일까? 물론 그 사이에 이 말을 내게 더욱 더 실감시켜줄 그런 종류의 사건은 전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말을 처음 들을 때에도 공감을 했고(누군들 안 그러랴!)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을 햇지만, 나도 내가 왜 이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생생한 인상으로 내게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분은,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럴 만한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번쯤은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것일까? 때로는 피해자이고 때로는 가해자인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은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말이 너무도 옳은 말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말한 것처럼, 그런 사람이란 정말 생각할수록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 뱀발. 이 글을 적다보니 니체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2012. 7. 1.
잠언 02
0. 인간이 타인에게 행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은 무엇인가? -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그녀를 '대신해서' 결정해주는 것이다.
1.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 칼 마르크스
2. 진짜 '무섭도록 효율적인' 권력 테크놀로지의 배제 장치는 자신이 속한 혹은 속하고자 하는 집단의 지배적 담론과 상이한 (혹은 그것과 충돌을 불러일으켜 자신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릴 것 같은) 생각과 느낌들을 처음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 속에서 제거하고, 또 그러한 자기 검열의 연장선상에서, 주변의 모든 타인들에 대해 동일한 검열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3.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오늘의 철학은 ‘서양의 시녀’이다. 철학을 서양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4. 진보란 무엇인가? 일본말이다. ‘진보’를 말하면서 헤르더, 칸트, 헤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5. 진보란 무엇인가? 이 말은 - 반드시 역사철학적으로가 아니라 - 이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말에, 기쁨에, 아픔에 귀를 열어놓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6. ‘역사철학’이 고유명사인 줄 모르는 서구주의자들이 있다. 역사철학이야말로 통치와 지배의 도구이며, 당신의 일상을 학문적 세계에 의해 식민화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역사철학과 진보는 억압의 도구이다.
7. 우리는 서기 2012년 극동의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산다.
8. 최근 독일과 그에 동의하는 우리 지식인들이 말하는 '성찰적 반성적 근대성'이란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인간은 - 인식론적이든 도덕적이든 - 이른바 '반성'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일까? 더욱이 '시대정신'은 반성할 시간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바쁜 것이다!
9. 이른바 '근대'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대신해 왕의 목을 잘라준 이후, 모든 개인은 자신에 대한 주권자요 왕이다. 고대로부터 마키아벨리에 이르는 모든 '제왕학' 서적들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10.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1. 나는 예전에 동양과 서양이 진짜 이 세상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 실제 세계가 아니라 - 지도 위에 혹은 내 머리 속에 남들이 그어놓은 하나의 금(線)이었다.
12. 현대 혹은 오늘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시대'라는 말은 오늘이 '역사의 최정점이자 가장 찬란한 시대'라는 말과 꼭 같은 유치한 자기(시대) 중심주의이다. 오늘은 그저 오늘이고, 다른 어제 혹은 내일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하루, 시대이다.
13. 근대로부터 벗어나고 근대를 초극하고 근대를 넘어서려는 태도 자체가 서양적 근대의 일부이다. 서양적 근대는 성공한 쿠데타이자,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친위 쿠데타를 수행하는 하나의 성공적 양식이다. 서양적 근대를 감싸 안는, 서양적 근대와는 다른, 보다 큰 게임을 발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14. 서양적 근대성은 하나의 문화적 에피스테메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 곧 서양의 고유한 문화적 현상으로 읽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적 근대성은 철학과 사회학 혹은 정치학만이 아니라, 동시에 문화인류학 혹은 문화정치학의 탐구 대상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정치사'만이 아닌, '진리의 지정학적 문화정치사'를 써야 한다.
15. “운동은 궁상이 아니다!”
16. 푸코의 철학적 의미는 이제까지 그저 의학의 영역에 속해 있었을 뿐인 하나의 개념 곧 '정상/비정상'의 쌍을 철학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인 점이다. 이른바 '정상화'(normalisation)의 개념 앞에서 푸코는 묻는다. 이 '정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 '정상'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는가? '정상적인, 너무나 정상적인' 사회를 위한 물음.
17. 모든 집단에는 그 집단이 수용하는 지배 이념(감성) 이외의 이념들(감성들)에 대한 검열 행위가 존재한다. 그 주요한 감시, 배제 및 검열의 방식으로는, 무시, 냉소적 비웃음, 직설적 비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자기 검열' 등이 있다. 이 태도들이 그 집단이 -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 실천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 및 대상화 방식을 구성한다.
18. “소녀들이여, 야망을 품어라! girls, be ambitious!”
19. 대문자가 없는 세계. a world without any majuscule.
20. 모든 콤플렉스의 궁극은 '정상 콤플렉스'다. 내가 정상이 아니며, 사람들과 다르고, 다르게 느끼며, 결국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정상 콤플렉스는 나도 '보통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불가능한, 불합리한, 결국 불필요한 콤플렉스이다. '비정상'이란 이 세상에 없으며 오직 '사태에 대한 정상적 반응들'만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그녀처럼, 정상이다.
21. 이른바 '고백'이란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고백'하지 않는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 말해도 되는 것을, 그저 내가 말하기로 결정했으므로, 말할 뿐이다.
22. 푸코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혹은 타인들에 의해 칭해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실상은 ‘이른바 진리라는 명칭으로 칭해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특정 시기의 특정 지역에서 역사적ㆍ문화적으로 설정된 특정한 규칙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형식’임을 밝힌다. 이른바 ‘진리’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담론, 곧 하나의 진리담론이다.
23. '인간들'이 아니라, 인간의 '성향들'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항상 '선한 우리 편'에, 나와는 다른 이들은 '그들' 곧 '악인들' 편에 속한다. '인간들'을 나누는 것은 보통 살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24. “젊은이들이 꿈꾸는 혁명은 보통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혁명이다.” - 버트런드 러셀
25. 때로, 희생자 담론은 가해자 담론보다 더 무섭다. 자신이 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6. 어떤 논리가 자신의 죄책감에 들어맞기 때문에 - 때로는 아무런 비판적 관점도 없이 -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이지, 논리가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를 심리의 영역에 남겨두고 그 안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철학의 문제와 섞어버리고 심리적 안정감을 논리적 혹은 철학적 해결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27. 나는 괜히, 시시때때로, 정치적인 저항의 언사를 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 그들은 인식의 깊지 못함(비난이 아니라, 그냥 사실 판단)으로 말미암아, 오래 못 간다(오래 가면 인정해준다).
28.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그러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29. 하버마스의 철학적 중요성 - 인간은 '자신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옳은 것' 곧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철학의 진정한 출발은 바로 이렇게 -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라 - 자기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져서, 자기가 받아들인' 이른바 '진리'가 각자에게 늘 모두 다르다는 '사실' 위에 기초해야 한다.
30.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바라보는 자들! - 푸코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통찰들 중 하나는 그가 개인적 도덕주의와 그 확장 버전으로서의 집단적 음모론을 피할 수 있는 분석의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도덕으로만 세상을 보는 자들은 자기의 권력 확장을 향한 끔찍한 지배욕구를 보편적 도덕, 인류를 위한 도덕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그러한 욕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권력 욕구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31. 자신의 권력욕구를 선의(善意)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9. 하버마스의 철학적 중요성 - 인간은 '자신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옳은 것' 곧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철학의 진정한 출발은 바로 이렇게 -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라 - 자기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져서, 자기가 받아들인' 이른바 '진리'가 각자에게 늘 모두 다르다는 '사실' 위에 기초해야 한다.
30.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바라보는 자들! - 푸코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통찰들 중 하나는 그가 개인적 도덕주의와 그 확장 버전으로서의 집단적 음모론을 피할 수 있는 분석의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도덕으로만 세상을 보는 자들은 자기의 권력 확장을 향한 끔찍한 지배욕구를 보편적 도덕, 인류를 위한 도덕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그러한 욕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권력 욕구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31. 자신의 권력욕구를 선의(善意)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2년 2-6월.
잠언 01
2.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사랑만 빼고!
3. “합리성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적인' 방식 곧 '우연을 통해' 구성되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4. 에피쿠로스는 틀렸다. 고통의 부재는 쾌락이 아니라, 권태이다. 가령, 고통 받는 자는 권태를 모른다.
5. “진실은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고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 밥 멀리
6. “나란 타자이다. je est un autre.” - 아르튀르 랭보
*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 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어 번역 문장을 들을 때 불어 원문의 주어와 동사가 모두 1인칭인 듯한 (도덕적?)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je suis un autre가 아니란 말이다. 영어로는 i is another( i is the other)와 i am another(i am the other)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요약하면, '내'가 타자인 것이 아니라,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타자란 말이다. 시인의 말을, 더군다나 한국어와 일본어와 불어와 영어를 왔다갔다 하며 옮겨야 하니, 사실은 안 헷갈리면 그게 신기한 일일 듯하다. 철학 없는 문헌학(어학)도 없지만, 어학(문헌학) 없는 철학이란 귀여운 농담에 불과하다. 문법의 한도를 벗어난 '자유로운 의역'이란 그저 어학 실력의 부족에서 오는 '오역'에 불과하다.
7.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라는 생각은 상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너는 내 입장이 결코 될 수 없다.
8. “동일한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이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다.”라는 생각은 '동일한 두 개의 상황'이란 전혀 없으며, 모든 상황이 그 자체로 ‘고유한 사건’(événement)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체도, 대상도, 상황도, 맥락도, 그들의 디엔에이도 모두 전혀 다르다. 이것이 니체가 “관념(=개념)이 인간을 속인다.”고 말한 의미이다.
9. 책을 안 읽는 사람, 성실하지 않은 사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때로 책을 성실히 읽는 사람,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을 비웃는 일이 있다. 양자 모두는 각자의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다만 전자는 붕괴되는 것에 그치고, 후자는 그것을 감싸 안아 뚫고 나아간다.
10. 가해자란 누구인가? 피해자의 고통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자,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이다. 이제,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와 너이다. 이렇게 때로 가해자이며 또 때로 피해자인 우리는 듣고자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듣지 못하는 자이다.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이다.
11. 학문이란, 공부란 결국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깨닫는, 알게 되는 과정이다.
12.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말로 때로 가장 교묘한 자기 합리화의 방책이다. 이때, 그는 여하튼 자신이 고통 받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이러한 자신의 고통 받고 있음을 남들이 알아줌을 알고,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죄책감과 고통 속으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음을 안다.
13.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 올바른 이유에서 해라!” - 이마누엘 칸트
14.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령 살인을 저지른 것 정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기 일로 다들 너무 바빠서, 나를 알려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를 속이는지는 더더욱 알려고 하지 않으며, 만의 하나, 알고자 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걸 꼭 알아내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15. 사랑이란 어떤 존재에 대하여, 그것 혹은 그녀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16.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는 일련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두 단어라도 말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 o. p.
17.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슬픔을 느낀다.
18.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하여 하는 말은 예외없이 모두 너무나 부분적 말, 따라서 그녀의 인격 혹은 그녀가 한 일을 왜곡하는 말, 부당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조건이다.
19. 나의 소원은 어린아이가 아무도 없는 한밤에 홀로 깨어나 외로움과 두려움과 목마름에 떨며 울 때, 아이의 곁에 말없이 다가가 앉아 아이의 이마를 짚어 안아주며 시원한 물을 한 잔 떠주고는, 아이의 곁에 누워 아이를, 그러니까 당신을, 나를, 안아 재워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것이다.
20. 그냥 부러워하고, 지면되는 것 아닐까? 사람은 모름지기 '잘 지는 법', '잘 부러워하는 법'을 배워야.
21. 약한 모습을 못 보이는 것이야말로 약한 것이다(단, 시도 때도 아무데서나, 특정 목적 하에, 혹은 그냥, 약한 모습으로 ‘징징’대는 것은 제외). 약한 모습을 드러낼 만할 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담담히 드러낼 수 있는 자야말로 강한 자이다. 달리 말해, 오직 강한 자만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강한 자는 - 강해 보이는 자가 아니라 - 부드러운 자, 여유 있는 자, 미소를 머금은 자이다.
22. 속물이란 누구인가? 바로 '나'다!
23. 너도 합리적이며 나도 폭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핵심은 폭력과 합리성이 너무도 당연히 '함께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누구에게? 특히 ‘나’에게!
24. “그래, 좋다, 지옥은 내가 간다.”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25. 무너지려는 자신을 붙잡고 관념으로 세뇌하면서 억지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무너지면 된다. 무너져서 모든 것을 잃고, 죽게 될까봐 두려운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얻을 수도 살 수도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아가란 불교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한계란 내가 생각하는 한계이다.
26. 부자연스러울 때, 어색할 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 그럴 만해서 그렇지 않겠는가? 어색과 부자연스러움을 자신의 만남과 주변에서 추방해버려서는 안 된다. 어색함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몰랐던 자연스러움의 세계가 스스로 꽃 피어난다. 아름답지 않은가?
27. 우월감의 폭발, 열폭의 뒷면. 혹은, 동전의 양면. 우폭도 열폭도 없이, 생각하고 살기.
28. '논점' 곧 '문제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제출된 명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에 대한 비판적 주장 앞에서, 논점을 이해도 못한 채,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함 자체일 것'이라는 식(!)의 - 반박은 그저 무의미하다. 찬성 혹은 반대는 논점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선행된 이후에만 의미를 갖는다.
29. "나는 (너무 깊은?) 확신을 가진 사람, 자신이 틀릴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보지 못하는 혹은 않기로 한 사람이 피곤하다 못해 무섭다."
30. 알고 보니 '희생자'가 - '가해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똑 같이 타인을 이용하는 - 이기적인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는 수가 있다.
31. 때로, '가해자'와 '희생자'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때로, 그들은 겹친다.
32. ‘모든, 항상’(전칭명제)과 ‘어떤, 때로’(특칭명제)의 구분.
33. 무엇인가에 대해,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나아졌음을 의미한다.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인간은 그것에 대해 (여하튼 적절히) 말을 할 수 없다.
34. '적절한'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그러나 '지나친' 고통은 인간을 파괴한다.
2012년 3-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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