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7.
잠언 20
0. 철학의 축복과 저주 -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인식론적 자기 반성이 부재한 '선남선녀'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으며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선남선녀의 세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변화하는 '내'가 없으며 상식과 관습이 지배하는 '우리'의 세계일 뿐이다.
1. "아마도 글자 그대로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을 뿐."(there is properly no History: only Biography) - 에머슨, <Essays>, 1841.
2. "우리 민족의 살길은 남북이 하나되는 길 외로는 어떠한 다른 우회로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직시해야만 할 현실이요, 우리 실존의 본래 모습이요, 우리 역사, 우리 민족의 원주소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파워풀하고, 가장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전경련'과 같은 단체서도 남북의 대결이나 불화를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로운 방법에 의하여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합리적인 소통이 확보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경제를 갈망하면서, 남한경제만을 고립적으로 획책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둔한 짓이다. 우리가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남북의 소통으로 마켓의 규모를 키우는 길이다.
'남북통일'이라는 말은 당분간 쓰지 말자! '통일'(unification)이라는 말은 두 개의 정치체제(politeia)가 공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자의 타자에로의 복속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를 수반하며, 또 도식적인 단계론을 제시하는 담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음만을 지어낸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두 집을 한 집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두 집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남북화해'(south-north reconcili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남북화해다. 남북화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매우 간단한 하나의 명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유왕래'(free comings and goings). 여행이든, 학술교류든, 편지든, 테레비든, 인터넷이든, 비지니스든 자유롭게 왕래하자는 것이다.
우선 자유왕래를 해야만 모든 것이 풀려나가고 녹아나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유왕래를 못하는가? 옆집 사람과 자유왕래하려면 가장 선행하는 조건이 무엇일까? 옆집 사람이 사는 삶의 방식이나 그의 가치관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방식을 부정하면 만나는 매순간마다 쌈박질을 하게 되고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유왕래란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통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정'이라는 한 마디에 걸려있다. 북한의 정치체제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를 기준으로 해서 바꾸려고 하면 왕래나 화해는 물건너간다."
- <도올의 중국일기 3>, 2015, 294-297쪽.
3. 내게 일어난 일만큼이나, 내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4. 내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은 내가 평상시에 말하지 못하는 나의 진심을, 적어도 위장된 형태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해준다. 이 사건들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지만 이런저런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말할 수 없었던 나의 느낌을 정당홰해준다. 나의 내적 느낌이 이러저러한 사건이라는 외적 계기를 만나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이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 분석은 이때의 내외가 실체가 아닌 상호적•동시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론적인 것임을 명심한 채 양자를 모두 분석해야 한다.
5.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실로 구조주의적인 말이다. 인간은 본질이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배치가 이른바 '본질'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만든다. 당신의 속한 자리가 이른바 '당신'을 만든다.
6. 하급자로서 날카로운 비판자가 상급자로서 불통의 아이콘이 되는 수가 있다. 그릇이 원래 그것밖에 안 되는 옹졸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7. 이른바 같은 상황, 같은 처지라 해도 실상 모든 것은 천차만별이고, 다 상황나름이다. 일반화할 수 없는 것, 일반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지금 바로 이 위의 명제가 이미 일반화한 명제는 아닌지를 문제 삼았다. 실제로 이 문제가 일정한 진전을 보는 것은 20세기 러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언어철학적 명제를 넘어선 곳에서(우열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 자신의 사유를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서양의 메타적 언어철학이 '말장난'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외부자들이 보듯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말장난'을 행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유의미한 '말놀이'의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철학을 배우기 이전의 존재 곧 선남선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 자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 계몽이란 무엇인가? - 계몽이란 '나' 곧 '큰 나'를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줄 인식과 실천의 여러 조건을 발견•발명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또는 적어도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떤 참다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 기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를 수 있다. 자기와 남을 속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정말 자기 생각과 느낌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진실된 느낌은 반사회적일 수도, 또는 더 빈번하게는 비사회적일 수도 있다. 내가 고통스러운 희한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남들 앞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고 또 해야하는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자신에의 정직, 울기, 글쓰기, 나의 느낌을 왜곡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때로는 전문가로서의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말과 생각은 조작이 가능한 것이지만 느낌은 속일 수도 속여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노자와 중용, 한의학, 더하여 니체의 통찰을 길잡이 삼아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나', 말하자면 '큰 나'를 위한 일이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이것이 내가 제출하는 새로운 계몽의 조건이다.
9. "네 진심을 얘기해 봐. 농담 아니다. 숨겨봐야 실은 다 드러난다. 너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네가 진짜로 생각하는 거, 정말 네 진심을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 봐."
10. 천재도 저주도 없다. 인간이란 오직 스스로가 어떤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구원이란 요행에의 잘못된 기대이며, 오직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용>의 위대한 깨달음이다. 비코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의 삶이란 어떤 섭리나 운명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내가 행했던 무수한 실존적 선택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11. 당신이 불행한 인간이 된 것은 당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당신이 불행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본래적으로 불행한 사건이란 없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불행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를 따라,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불행한 존재로 몰고간다면, 비록 어리석은 이유일지라도, 그 당사자가 그러한 몰고감 속에서 일정한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와 스피노자, 라이히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문제를 설명해준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해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열렬히 스스로 욕망하는가?
12.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려고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상의 밝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것 역시 건강한 태도라 하기 어렵다. 가령 밝은 면만 보려 하고, 또 보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당신의 태도는 당신의 자녀와 심각한 트러블을 일으킬 것이다.
13.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행하지 않은 선택에 대가를 치루며 사는 것이다. 오늘 내 삶의 모습은 나 스스로가 선택한 바 없는 나의 부모, 조상, 사회, 국가, 세계 체제, 그리고 나의 유년기가 선택한 것들이 빚어놓은 결과이다. 이제 내 삶이 내 선택의 결과임을 아는 나는 이제까지의 무능력 무기력하고 무의식적인 수동적 선택(실은 조건화된 선택당함)을 나 자신의 의식적의 숙고와 의지, '선택'의 결과로 전환시켜야 한다(아마도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인연설법,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실상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처럼, 가히 선천개벽을 잇는 후천개벽이라고나 해야 할 이러한 근본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14. "어떤 이의 행복을 파괴하는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 사람은 미지의 적들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게 자기 탓이며 자신이 원인 제공자였음을 깨닫게 된다."(1838년)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정신적으로 그에게 종속된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은 자는 그에 따라 행위를 취한다. 명령한 사람이 죽어도 명령을 받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그 행위를 지속한다."(1843년)
- '너대니얼 호손', 보르헤스의 <만리장성과 책들>(1949년)
15. "사람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은 물론, 병에 걸리는 것마저 그 사람의 의지의 발현일 뿐이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6. "위대한 작가들은 선구자들을 창조한다." - 루이스 보르헤스, <만리장성과 책들>(1949), 열린책들, 120쪽.
17. 대부분의 부모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의 진정한 성장을 방해한다.
18. 프로이트의 폐기(Verwerfung), 또는 라캉의 폐기(배제, forclusion)는 실로 놀라운 통찰이다!
프로이트 -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효과적인 일종의 방어가 있다. 거기서 자아는 참을 수 없는 표상과, 동시에 그 정동을 폐기한다(verwirft). 그것은 마치 그 표상이 자아에 결코 도달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처신한다."(<방어정신신경증>, 1894)
라캉 - 상징화되었어야 할 것(거세)을 상징화하지 못한 것, 따라서 폐기는 '상징적 폐기'이다. 환각의 공식, "상징계에서 폐기된 것은 실재계에서 다시 나타난다."
19. 라캉의 이론은 권위에 대한 긍정이자, 권위의 작용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다. 이미 정치적인 주제에 대한 비정치적 분석으로서의 라캉 이론이 갖는 정치성.
20. 헤겔의 인정 투쟁은 인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정 받는 기술이다. 이는 프롬이 잘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사랑하는 기술(the art of loving)이 아닌 사랑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loved)로 생각하는 것, 혹은 응용해보자면, 이해를 이해하는 기술(the art of understanding)이 아닌 이해 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understood)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헤겔의 인정 투쟁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인정이 필요 없다."
21. 부드럽고 넉넉한 관대함.
2015.12.03-2015.12.10.
잠언 19
0. 톨레랑스의 테러 - 지속가능한 지배를 유지하는 장치로서의 톨레랑스가 테러의 근본적인 출현 조건이다.
1. 지라르의 논의를 확장시키면,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하비 콕스의 말대로, 양심수가 바라는 것은 너그럽고 다정한 친구 같은 간수가 아니라, 감옥 자체의 철폐이다.
3. "사람들은 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예속되기 위해 투쟁하는가?" -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1972.
4.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극우들이 우파를 종북 좌파라 부른다.
5. 대한민국 정치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비밀들 중 하나는 경상도 1천만표의 존재이다. 적어도 박정희 유신 정권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바로 이 1천만표의 향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언론인은 직업이 본질적으로 장사이고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두려우므로, 정치가들은 당선이 불가능하게 되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구조이므로 이런 사실은 결코 이슈화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편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로 곧 모르기로 선택한다.
6. 이른바 서구 근대 이후, 비서양인들이 서양인들에 의한 지배의 상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자신과 세계를 스스로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서양인들의 해석을 따라 바라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령 이제 더 이상 한국인들은 자신의 조상인 원효나 퇴계, 다산처럼 세계를 자신의 눈과 이론으로 바라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뉴튼과 아인슈타인, 칸트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에게 맡겨버린다.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이 가련한 동시에 어리석은 이들의 모토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이론은 서양분들이, 도덕적 실천의 순수성과 자괴감은 우리가!"
이때 무지하고도 순수한 개땅쇠 훈장들은 그러니 서양이 아닌 우리 것, 동양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것이나 이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동양'이란 말 자체가 서구의 규정으로 서양/동양의 쌍둥이 구조를 갖도록 구성된 짝패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므로 실제로는 서양에 의한 자신의 대상화라는 지배 구조를 강화하고 말 뿐이다.
7. 철학이란 길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길을 열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직 덜 여문 철학, 설익은 철학이다.
8. 너는 살아있으며 생각하는 인간인가? 그렇다면 너의 이론을 제출하라!
9. 허지웅이 '대안이 없으면 이견을 말하지 말라'는 말의 기만적 허구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 대안을 제출할 능력이 없는 98프로의 대중에게 이의제기마저도 하지 말라는 말은 기득권 구조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만적인 주장이며, 사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주장을 내놓았던 자들이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기억한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대안없는 비판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공공선'을 찾아가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토론과 투쟁을 위한 첫걸음이자 필요조건이다.
10. '이론'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주의적 관념 세계의 궁극에 상당하는 일본어이다. 한번도 관념과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신뢰한 적이 없는 동아시아인들이 오늘날에도 이론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자문화중심주의에 기반한 조건반사적 행동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아주 무근거한 행동만은 아니다. 그들은 천지에 내재하는 상황적 판단력으로서의 옳음이 아닌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관념의 이상태로서의 이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참다운 사유가 자신이 살고 바라보는 삶을 '추상화'하는 것이듯, 오늘날의 동아시아철학은 이론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작업, 재규정 작업에 몰입해야 한다.
11. https://story.kakao.com/ch/subusunewsstory/IHX87K7br4A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이 참다운 철학이고 정치가 아닐까?
12. "괜찮아, 다 괜찮아" - 길게 보고 멀리 생각하고, 발은 여기서 가능한 한 걸음만.
13. 소유와 존재가 둘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누구나 다 조금씩 의존하고 소유하고 집착하고 조금씩은 강박적인 존재이다. 다만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무리하지 않고 너무 강박적으로 의존하거나 너무 소유하거나 집착하지만 않으려 하면 된다.
14. 모든 사랑은 집착이다. 그러나 집착이 곧 사랑은 아니다.
15. 니체의 위대함을 따라 - 마치 진리와 진실처럼, 사랑과 구원이 문제이다. 나는 진리도 진실도 사랑도 구원도 믿지 않는다.
16. 반증불가능한 명제 - 아버지와 문제가 있는 사람은 강박증에, 어머니와 문제가 있는 사람은 신경증에 빠진다.
17. 당신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그의 행동을 바꾸려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예스'라면 당신은 부당한 권력을 행하고 있다. 당장 바뀌어야 할 사람은 실은 당신이다.
18. 침묵하고 경청해야 할 때와 나서서 이야기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넘음!
19. 공부를 하면서도, 혹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이 배우는 것과 자신의 삶이 '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학문이 암기이고 그저 자기가 받는 수동적 인상일 뿐 어떤 능동적인 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개념의 무능력 혹은 무지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무엇을 읽어도 그저 바로 '자기 식으로'(자신의 어리석은 편견으로,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한 마디로 자기 수준에서) 정리하고 판단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실상 이들은 공부를 할수록 '반지성주의적 괴물'이 되어간다.
이들은 학문이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믿도록 조건화되고 길들여진 신념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읽고 무엇을 들어도 바로 자신의 '상식과 당연'으로 정리하고 심판한다. 실로 이들을 자기 성찰과 반성이 불가능한 '권력의지의 화신'이라 부르면 좋을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 정리하고 즉시 심판한다. 자신이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상식과 당연함만 제외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한다. 그들은 결코 무엇이 문제인지,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당연하게 느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부풀어오른 가련한 존재들이며,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것이 자기 생각도 아니며 사회에 의해 자신에게 심어진 것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들은 철학 활동이 자신의 인상에 대한 무지막지한 신뢰가 아니라 차분한 거리두기이며, 특히 그것에 대한 냉정한 검토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 누군가의 어떤 말을 듣거나 읽었을 때 그가 느끼게 되는 인상은 그 말보다는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게 되어 있는가를 더 잘 보여준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세상보다는 차라리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준다. 달리 말하면, 내가 보는 세상은 세상보다는 차라리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세계보다는 차라리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철학이란 바로 나의 '당연의 구조'를 조건 짓는 이 틀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이자 검토이다. 철학이란 나의 당연함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기보다는 나의 당연함의 구조를 이루는 이 조건들, 내게는 하도 당연하여 내가 알지도 못하는, 보통은 내가 그에 종속되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이 무의식적인 인식 조건들에 대한 탐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철학이 '자신의' 상식과 당연, 진리를 믿고, 나아가 '자신의' 진실과 양심과 정의'의 존재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선남선녀'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나아가 오해받고, 폄하 경멸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 중 가장 결정적이며 또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상 이러한 선남선녀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기 생각의 확실성'은 사회에 의해 그들에게 주입된 것일 뿐 그들 자신의 생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 공부를 하고 학문을 시작한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사실, 곧 자신이 이 '선남선녀'의 세계, 상식과 양심과 당연과 진실의 미신적 유아적 세계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또 다시 그들의 상식과 인상으로 제멋대로 판단하듯이 힘들고 외로운 고행이 아니며, 오히려 즐겁고 가벼운 발걸음, 혼자만의 고독한 닫힌 세계에서 함께 걷는 열린 세계에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20.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일을 겪는 당사자의 인식과 대응에 따라 전혀 다른 일로 각인된다. 따라서 현실에서 일어난 '트러블'이 최악으로 치닫거나 혹은 심지어 잘 해결된 경우에조차, 사람은 그 일이 자기 앞에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내준 소중한 기회, 곧 자신의 무의식적 인식 구조를 검토해볼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한 사람은 때로는 남탓 때로는 자기탓만 하고마는 선남선녀가 되고 만다. 그 질문은 대략 이런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21. '상식'이 생각할 때,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22. 사유의 천박성이란 도식적 이분법이다. 타락한 '현실'을 바로 잡아보려는 '나', 혹은 저주받은 나와 아무 생각없이 행복한 그들 같은 식으로!
23. "천하의 악 중에 현인을 시기하고 능력 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큰 악이 없고, 현인을 좋아하고 선한 자를 그리워 함보다 더 지고한 것은 없다." - 동무 이제마, <광제설>(1894)
24. 선생님에 관한 잠언들 http://me2.do/GQoHXcSb
25. 가장 가련한 종류의 인간들은 자기 객관화, 거리두기가 안 되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또는 합리적 역시사지의 입장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즉자적 욕망에 입각한 자기 생존의 당위만을 강변하며, 실은 모든 것을 '우기고 있을 뿐'이다.
2015.11.18.-2015.12.03.
2015. 10. 17.
잠언 18
0.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못하면 자신의 인격적 성숙이 불가능하듯, 자신이 사람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 실망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의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
1. 복음 1 - 내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듯이, 당신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2. 그렇게 적당히 타협적으로 징징대지 마라. 징징대려면 확실히 철저하고 전적으로 징징대거나, 아니면, 남탓 상황탓 하지 말고,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네 인생을 살아라!
3. 기대에의 부응 - 자기 중심주의와 담론 효과가 만나면 모든 것을 관계망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계망상은 자신과는 관계 없는 어떤 하나의 사실을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해석하는 질병이다. 이건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이건 나 보라고 쓴 거야 운운 ... 이는 인식론적 자기 중심주의의 극단적 버전이다. 하지만 이는 실상 정도의 차이일 뿐 망상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일반적인 인간의 일반적 경향인데, 가령 내가 이곳에 올리는 글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특정 개인을 겨냥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게 '버림 받으려면' 남의 뒷얘기를 내 앞에서 하면 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여하튼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이 글이 '나'를 겨냥하여 쓴 것이라 생각되는가? 그렇다, 이 글은 바로 당신을 겨냥하여,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겨냥하여 쓴 글,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관계망상이 실로 얼마나 황당한 자기 중심주의의 병적 형식인가를 알 수 있다.
4.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분석이 다만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실로 타자에 대한 모든 대상화, 주체화 과정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청년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권고와 질타는 실로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독백'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의 푸코가 깨달은 바로 그대로 기성세대의 담론 권력, 곧 자기 정당화 장치의 핵심적 일부를 이룬다.
나는 청년 세대가 아니며, 학벌부터 계급적 기반까지 그들과 모든 것이 다르고, 실상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한다. 기성세대의 급선무는 그들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으로, 제멋대로 청년들의 삶을 규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이와도 상관없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로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상대에 대한 경청과 정직한 내 생각의 토로,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의 하나로 나는 모든 정치적 제도적 개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기 정직의 실천을 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어차피 남들은 속여도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이지는 말자! 우리나라에는 실로 데카르트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근본문제이다. 자생적 데카르트의 탄생이 개인주의와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의 선결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자. 과연 우리에게는 내가 없는가? 과연 그런가? 이 부족한 나, 못난 나, 지지고 볶는 내가 이미 완전한 충만한 나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더 나아가 관념적으로 완전한 이상보다 현실 안에서 불완전한 오늘의 내가 이미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서구가 17세기에 도달한 데카르트적 근대성이 한반도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모델도 비교대상도 없으며, 따라서 나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삶은 내가 만들어나갈 바로 그 삶이라고, 서구적 근대성은 서구의 근대성일 뿐이고, 근본적으로는 근대성 자체가 서구의 지배를 위해 작동하는 완벽한 지배의 장치-기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데카르트에게서 나는 좋은 부분을 배울 것이되,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삶을 존경하고 존경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으로 나의 삶을 살 뿐, 데카르트는 내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내 삶의 모델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나는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설령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데카르트를 존중하고 배우되 동시에 무시하고 경멸하며 데카르트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믿는 바대로,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배우고 타인을 경청하며,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대상화/주체화의 동시적, 상관적 과정'이라 일컫는 것이다.
5. 내가 어떤 누구에게도 조종당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누구도 조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6. 즐거운 자기 긍정 -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7. 복음 2 - 네가 나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너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8. "모든 사람들이 고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 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자기 자신을." - 프리드리히 슐레겔
9. 한국사회의 인식가능조건 곧 에피스테메는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성이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이중적이라면 그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중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다 이중적일만 하니까 이중적이 된 것이 아닐까? 실로 생각과 말과 삶의 분리라는 이 이중성의 태도는 우리시대 인식과 실천, 생각과 삶의 가능 조건이다.
10. 내적 현실의 외적 대상을 향한 투사
11. "현상이 실체를 가리듯, 실체가 현상을 가린다." - 선림고경총서
12. 도덕주의적 인격주의는 지적 현학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악을 생산한다.
13.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지만, 버림 받는다.
14. 현실이라는 이미지 - 어떤 인간도 현실 자체, 현실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이란 내가 보는 현실, 내가 느끼는 현실, 내게 당연하게 보이는 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표상, 파편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념이 현실을 가리듯이, 이 '현실'이 현실을 가린다.
15. '질서'란 늘 이미 그 뒤에 존재론적 위계를 전제하는 사물의 배치행위, 곧 권력 정당화의 장치이다.
16. "토마소 캄파넬라에 의하면 세상은 사악하거나, 죄악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적재적소에 위치하지 않고, 모든 게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는 개인적 자유, 우연 그리고 개별 사항들이 너무 많은 반면 질서가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관리되어야 하고, 모든 사항들은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캄파넬라의 사고 속에는 스페인의 복고주의 외에도 분명히 중세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가령 여러분, 조토의 벽화에 묘사된 위대한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대상들은 각자의 처지에 상응하는 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등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질서를 생각해 보세요. 고립된 모든 존재들은 단테의 작품에서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정해진 공간에 소속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콜라 철학의 질서 체계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제반 사고는 마치 건축물의 부속품처럼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역시 상기한 내용과 유사합니다. 작품 내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잡고 연결시켜 주는 것은 지상에 머물고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질서는 개별적으로 파고 들어 가서,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규정합니다."(326쪽)
-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1950-1956, 1962-1963)>(1977), 열린 책들, 2008.
1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인식의 내용은 인식대상보다는 차라리 인식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실상 세계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에 대한 연구는 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연구가 된다. 신학과 형이상학은 물론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고,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과학이라는 칸트, 포이에르바흐, 니체, 푸코의 말은 이런 뜻이다.
18. 사람들이 너의 열등함이라 부르는 것을 열등함이 아닌 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 나아가 자긍심으로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9. 들뢰즈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닐까?
20. 한문과 일본어를 모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학'은 태어나지 않는다.
21. 효도와 마마보이는 실로 차이가 미묘하여 거의 대부분의 경우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22.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와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북한의 구호는 주체사상이 성리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용, 곧 '충효 마르크스주의'임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23.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한 마디로 전망의 부재, 곧 철학의 부재이다!
24.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랍과 유대인과 스페인인이 공존하던 70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왕권과 가톨릭의 배제 기능, 곧 이른바 가톨릭 '스페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주체화, 자기의 테크놀로지 장치이다.
25. 철학은 볼성상 불온한 것이다. 혹은 불온하지 않은 철학은 체제순응을 위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이다.
26. "말은 거짓말을 해도, 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2015.11.4.-2015.11.17.
잠언 17
0. 어떤 이들은 잘못된 믿음을 위하여 순교한다.
1.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로 행해라!" - 칸트
2. 카뮈는 자신의 희곡 <칼리굴라>에 대한 노트에서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굴라가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적었다. 이는 깊은 고통을 품은 자들에게는 실로 당연하게 가히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의 사유를 자신의 개별 경험을 넘어선, 심지어는 보편적인 것마저도 넘어선 곳까지 밀고 나가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회가 깔아준 정상적 도덕감정의 한도 곧 '정상성'의 한도 내에 머무르고야 만다. 물론 정상성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나, 두려움에 떨며 사회가 설정해준 틀 안에서 생각하고 사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사유란 참으로 존재에의 용기와 관련된 것이라 말해야 한다.
3. 모든 남자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는다.
4. 사랑이 구원과 고향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랑은 사랑에서 어긋난다.
5. 글쓰기 혹은 삶 - 담백한 실력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노력의 양으로 메꾸려는 경우가 있다.
6. 모든 것을 자기가 받은 인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대상이 어떤지 또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자신의 주관적 확신 구조에 의거해 모든 것을 심판한다. 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 이들은 자기 사정을 대며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변하는데, 자기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극히 명확한 형태로 보여주는 이런 대답이야말로 이들의 끔찍함을 배가 시킬 뿐이다.
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상식'만 빼고.
8. 철학함이란 내가 학습받은 모든 당연함, 정상성, 상식의 안팎에서 스스로 생각하는것인 것만큼 '불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모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이 철학을 반기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철학은 고분고분하고 길들여진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9.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 수줍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모순이나 한계보다 그 선의와 순수함을 알아주며 호응해준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말이 옳은 말이어서 타인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준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너그러운 공감과 호의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뒤섞어서는 안 된다.
10.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 - 해설을 대신하여 옮긴이가 아들에게 보내는 네 통의 편지
네게 보내는 편지를, 또는 이 번역에 붙이는 해설을, 여기서 끝낸다.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은 말라르메나 그의 <시집>과는 크게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 시집을 번역하면서 시인에게 바쳤던 존경심을 네가 기억해주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한다는 것의 끝에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게다가 지금 인간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항상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2005년 겨울, 아버지
-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문학과지성사, 45쪽.
11. 유년의 끝 - 철학에 입문한다는 것, 곧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 안에서 커왔으며 따라서 바로 오늘의 자기 자신이기도 한 자신의 '순수'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 그것을 검토해보는 일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와 검토 행위는 실로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두려운 일이며, 바로 이것이 참다운 철학자와 소설가가 그토록 드문 이유이다.
12. 완벽히 멸균된 세계 - 순수란 글자 그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배제와 거부의 장치이다. 순수는 허구적인 동일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순한 타자성'을 솎아내는 권력기제이다. 순수는 '순수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내 주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선별의 기제이다.
13. 다른 사람은 다른 삶을 산다(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14. 자신이 해야만 하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못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병, 강박관념일 뿐이다.
15. 내가 인류학적 코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 나는 이른바 '합리성'만이 옳교 그름의 유일한 기준인 줄로만 알았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젊은 날의 나는 나와 다른 합리성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 결과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고 관계를 맺게 될 때 나의 말이 그들의 신뢰를 얻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한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훗날 푸코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에피스테메가 바로 이러한 주어진 특정 시점에 있어서의 한 사회가 작동시키고 있는 인식 가능조건들의 집합, 곧 인식론적 장임을 바로 이해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마치 패션 디자이너가 소비자의 (자신이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심지어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무의식적 심성구조, 행동패턴을 정확히 이해하면 옷이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16. '현실'로 보이는 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관습적 관념이다.
1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진실'만 빼고.
18.
「바다의 미풍」 - 스테판 말라르메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
새들 도취하여 있음을 내 느끼겠구나!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오, 밤이여! 백색이 지키는 빈 종이 위
내 등잔의 황량한 불빛도,
제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한 권태 있어, 잔인한 희망에 시달리고도,
손수건들의 마지막 이별을 아직 믿는구나!
그리고, 필경, 돛대들은, 폭풍우를 불러들이니,
바람이 난파에 넘어뜨리는 그런 돛대들인가
종적을 잃고, 돛대도 없이, 돛대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저 수부들의 노래를 들어라!
번역: 황현산
19. 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류학적 코드를 모르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과 이러한 코드를 정확히 알고 더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단적으로 전자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다. 후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코드의 작용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구분하는 일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속한 사회의 인류학적 코드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그러한 코드에 대한 복종과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포함된 이 세계의 작동원리를 모른 채 학교에서 배운 서양적 합리성으로 한국사회가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자는 가장 좋게 보아 순진한 자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 대화가 불가능한 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뜻한 바를 실제로 이루어 내려는 긴 호흡 혹은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가는 화이부동은 다만 비겁한 자기 합리화로만 비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타인들을 자신의 합리성에 입각한 도덕적 심판구조 내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실상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자신이 홀로 외롭고 힘겨우나 '올바른' 싸움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들은 현재 자신의 합리성이 합리성의 유일하고도 보편타당한 형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다.
20.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만 빼고.
21. 가령 세 사람이 있고 그들이 대화를 한다고 하자.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사정과 관심에 대해서 말할 뿐 셋 모두를 위한 대화의 주제나 공통의 관심을 찾으려는 생각조차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는 즉물적 현상에 대한 감상의 토로만이 가능할 뿐, 어떤 공통의 관심과 미래에 대한 차분한 대화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최악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경우 자신의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대화를 가로 막으며 다시 예의 그 자기 중심적 세계관으로 돌아가고 마는 경우이다. 쉽게 말해 그들과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능할 뿐, 나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무엇이 결여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모두 곧 공통의 이익에 대한 감각, 공공선에 대한 관심, 한 마디로 보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결여라고 말하겠다.
나는 물론 그들을 다만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여길 뿐 미워하거나 단죄하지는 않는다. 악의도 없이, 몰라서, 자기 열등감 때문에, 자기보호, 자존감 유지 차원에서, 안 돼서, 못해서 못한 일에 화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친교는 실로 '일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컨디션이 좋아 내가 그들의 관심에 맞추어줄 수 있으면 우리 사이는 좋다. 그러나 내가 피곤하고 괴로운 인생의 날에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필요한 지지와 이해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는 대등한 두 인격의 만남이 아니라, 어처구니 없게도 일방적 '보살핌'의 관계에 가까워진다. 이건 당연히 친구가 아니다. 사람은 너무 어린아이와 놀아줄 수는 있어도 같이 '친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2. 나이가 어리면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도록 젊은이들을 키우는 사회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나이가 어릴 경우 실제로 이해의 폭이 좁다.
2015.10.19.-2015.11.04.
잠언 16
0. 혼자 있는 것이 외롭고 무섭고 싫은가? 그럼 천천히 벗어나라. 나도 혼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10년이 걸렸고, 혼자 있는 것을 즐기게 되기까지 또 다른 10년이 걸렸다.
1. 푸코 1 -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된 것들이다.
2. 푸코 2 -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혹은 적어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어떤 참다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3. 늘 지나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진한 얼굴로 타인에게 과도한, 실은 무례한 관심을 보이는 이런 사람들은 설령 악의가 없다 해도 상당히 난감한 사람들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사회적 센스(혹은 컨센서스)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아 최소한의 인격적인 배려는 고사하고 종종은 봉변을 당할 우려마저도 있다. 나는 물론 이런 사람들과의 자리를 가급적 피한다.
4. 감시와 처벌은 악한 권력만 강자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무조건 행하게 되는 삶의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감시와 처벌은 악한 의도만이 아니라 선한 의도로도 혹은 (가령 피아노 배우기와 같은) 이른바 '선악과 무관한' 여하한 목적 의식적 행위에서도 수행된다. 실상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 나아가 눈짓 손짓 생각 하나가 모두 감시와 처벌의 주체화 대상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제 권력에는 중립도 바깥도 없으며 따라서 권력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조차 아니다. 권력을 수행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 곧 '나'다. 권력은 권력관계 곧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이 발생시키는 전반적 효과이며, 궁극적으로 매번의 수행 작용에 의해 자신의 규칙을 새로이 구성하는 하나의 놀이이다.
5. 폭력의 가장 끔찍한 유형은 스타일의 강요이다. 가령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나도 직설적으로 말할 테니 너도 직설적으로 말하라'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우. 이러한 경우가 진짜 끔찍한 폭력으로 전화되는 이유는 그 말의 발화자가 자기 말의 폭력성을 꿈에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 폭력의 또 다른 형식은 이른바 도덕의 강요이다. 성실, 효도, 정직으로부터 신뢰와 이해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도덕적 가치의 종류는 많고도 많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한 개의 도덕적 가치들 중에서 자신의 도덕적 가치들을 고르고 자신이 판단한 경중에 따라 이들 사이에 위계의 순서를 설정한다. 그리고 어느 두 사람이 이렇게 고른 도덕적 가치들과 그들 사이의 위계가 같을 확률은 실상 전무하다. 그런데 각자는 자신이 고른 도덕적 가치와 위계에 입각하여 타인들의 도덕적 가치와 위계를 심판하고 힐난한다. 가령 성실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은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이 조금은 불성실한 존재로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은 직장에의 성실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무엇인가 소외된 가정적이지 못한 사람처럼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정직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도덕적 덕목들 밎 그들 사이의 위계가 실은 자신의 자의적인 선택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조차 아니라는 점에서 실로 자의적이다. 결국 이제까지 정당한 도덕적 권리 혹은 심판으로 생각되었던 판단과 행동의 대부분은 자신의 자의적인 취향 곧 자기 스타일의 강요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심판의 밑바닥에는 나의 생각과 다르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의 보편주의, 나의 느낌과 다른 것들이 싫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악의적 권력의지가 놓여 있다.
7. 그러나 폭력이 갖는 최악의 형식은 - 니체의 정확한 지적처럼 - 정의와 나의 복수가 일치할 때이다.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피해자의 복수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한다. 이때 가해자는 온전히 피해자(혹은 피해자를 대리하는 자)의 처분에 맡겨진다. 아무리 부당한 피해자의 보복도 가해자의 죄에 의해 덮히게 되고 따라서 가해자가 '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피해자의 권리는 하나의 권력이다. 우리가 권력을 쥐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가해자란 정의상 나에게 부당한 해를 입힌 사람 곧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나는 나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공정해야 하는가? 타인의 불공정함은 나의 불공정함을 정당화하는가?
8. 배은망덕 혹은 적반하장 - 내가 네게 나의 비밀스런 진실을 말했으니 너도 나에게 너의 비밀스런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9. 죄책감과 열등감이 인간 행동의 결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강력한 동기가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지적 허영심도 때로는 처음으로 한 인간을 학문으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동기가 될 때가 있다.
10. 인간은 자신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11.
"166. 어려운 일은 우리 믿음의 무근거성을 통찰하는 것이다."(53)
"256. 언어놀이는 시간과 더불어 변한다."(70)
"559. 당신은 말하자면 언어놀이란 미리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 말뜻은 언어놀이가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어놀이는 이성적 혹은 비이성적이지 않다. / 그것은 거기에 있다-우리의 삶처럼."(134)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1949-1950)>(1969), 책세상, 2006.
12. 이른바 '정상적'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13. 학문적으로는 엄격한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학문과 인격을 혼동하면 학문과 삶이 분리된 '선남선녀'로 삶을 마칠 뿐이다.
14. 푸코의 파르헤시아 - 상대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결과를 감수하는 것.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이 실제 '진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아는 것.
15. 조언
1. 삶은 살되 고통은 피하고 싶다고? 온몸을 던져 삶을 살고, 삶의 비극과 고통마저도 받아들여라!
2. 사랑은 하되 상처는 받기 싫다고?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의 상처마저도 받아들여라!
16. '어른'이 되는 법 - 사정도 모르는 남 얘기, 지나치게 일반화된 책 속 얘기는 듣지 말 것. 네게 맞지도 않는다! 잘 듣되, 어디까지나 네가 생각하고 네가 판단해라,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만큼이나 그 책임도 네가 져야만 한다.
17. 폭력의 근거와 기원 - 관심과 공감 그리고 배려가 없다면 실로 이 세상은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사랑'이라 불러야 한다고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문제이다. 이러한 '사랑'은 때로 네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를 네 의견, 네 기분, 네 생각과도 상관없이 내가 정해준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은 나로서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확실한 체험과 삶에서 나온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는 늘 자기가 수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또 가능케 만드는 인식론적 장치이다.
18. 급하고 쫓기면 쉬어라. 쉬어야 보인다. 그러나 언제까지 어느 정도 쉬어야 하는가? 보일 때까지. 이것이 '쉬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의 참뜻이다.
19. 나의 글쓰기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이런 글을 써온 적이 있다. "나의 부모님은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문제로 수많은 갈등을 겪었고 그런 와중에서 두 분이 여하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러나 두 분은 자신들의 문제가 너무나도 엄청나고 엄중하여 자신들의 삶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낸 듯 싶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이 방식은 자신들 각자와 자신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유지해주는 것에는 성공하였는지 몰라도 정작 가족의 또 다른 구성원인 나와 오빠의 삶을 잘 츠스리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또 실은 폭력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 전체를 살리려는 이러한 인식과 관심의 결여야말로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20. "인식 자체가 인식 대상을 변화시킨다!" - 헤겔
21. 회고적 주체화의 한 형식 - "너한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22. 기억의 법칙 -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선명해지며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2015.10.12~2015.10.19.
2015. 10. 12.
잠언 15
1. 글쓰기는 평생을 바쳐야 하는 과업이다.
2. 타인들과 잘 지내는 방법, 실은 무엇보다도 내가 내 삶을 잘 사는 방법들 증 하나는 혼자 있을 때 남들에게 의존하거나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내 시간을 즐겁게 잘 보내는 기술을 터득하는 일이다.
3. 항상성(homeostasis) - 철학 혹은 공부란 내 마음과 몸의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기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4. 삶이 어려울 때 못난 생각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은 그러한 현상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낳은 자신과 세계의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고 책을 읽고 대화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의지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적절한 방향을 잡아주기 위해서이다. 결국 나의 모든 성심성의와 노력은 '나'를 위한 것이다. 적절한 인식 없는 적절한 행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세계가 인식을 바꾸듯 인식이 세계를 바꾼다. 실로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세계를 변경시킨다. 헤겔의 놀라운 점은 세계와 인식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할 뿐만아니라 세계와 인식 사이의 괴리 곧 소외가 나쁜 것도 아니라는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 소외는 차라리 세계와 인식의 존립 조건 자체이다. 이러한 소외를 도덕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관점 자체가 하나의 소외된 현상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오직 충만히 소외된 자만이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가령 이러한 인식 자체가 인식하는 자의 자기 인식을 변경시킨다. 이러한 인식 안에서 이제 소외는 차라리 하나의 축복이다.
6. 네 광기와 환상 곧 신화를 억압하지 마라. 신화라는 일본어는 이야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mythos의 번역어이다. 이야기란 이때 내러티브 곧 요소들의 배치를 통해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야기, 내러티브, 맥락이 없다면 개별 요소들의 특성 곧 의미가 발생되지 않는다. 너의 광기와 환상은 온전히 너의 일부분이다. 실상 로고스가 하나의 미토스이다. 이성과 현실, 로고스는 놓아두고 광기와 환상, 미토스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좋은 바이러스와 좋은 콜레스테롤만을 남긴 채 나쁜 바이러스와 나쁜 콜레스테롤만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시도 자체는 무익한 일이 아니나 그러한 시도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할 경우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일 수밖에 없다. 불행과 행복의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양자를 모두 감싸안고 나아가야 한다. 비극이 없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비극마저도 받아들이는 불완전한 세계를 살고자, 다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7. 싼초가 말했다. "나리, 참으로 용감한 심장을 가진 자들은 번영할 때 즐거워할 줄 알 듯이 불행해지면 아픔을 느낄 줄 알지요. 이건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겁니다요."
"대단한 철학자가 되었네그려, 싼초." 돈 끼호떼가 대답했다. "아주 사려 깊은 말이야. 누가 자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지 모르겠구먼. 내가 자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운수나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쎄.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만 특별히 하늘의 명이나 운명의 섭리로 오는 것들은 없다는 게야. 여기에서 우리가 늘 하는 말의 진실이 나오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창조자라고, 내가 내 운명을 만든 사람이지."
-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 끼호떼 2>, 민용태 옮김, 창비, 2012, 776~777쪽.
8. 일어난 불행한 일 자체보다 더 큰 '진짜 불행'은 현실의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두려움, 실은 무능력이다. 이 모든 것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삶의 조건 그 자체인 불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불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가령 훌륭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통사고를 안 당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불행해야 할 때 불행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불행마저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경우조차 있다. 불행은 은총이 아니라 그저 불행이다. 불행을 받아들여라.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불행과 고통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이유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불행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힘들면 되는데 말이다! 이제 당신은 묻고 싶을 것이다. 과연 이 글을 쓰는 너는 삶의 진정한 고통과 불행을 피하지 않고 겪어보았는가?
9. 누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최대의 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안이함이라고 대답하겠다.
10. 그러나 실패와 불행, 비극에 매혹된 인간들이 또한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면 이 비극에 결코 매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11. 비극과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은 실로 삶을 미학화하는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연극화 작업이다.
12. 삶을 망치는 세 가지 기술 - 비교, 희생 그리고 자기 연민.
13. 은총 효과 - 은총이 발생시키는 효과. 은총의 발명. 은총은 어떤 세계, 어떤 개인을 만들어내는가? 은총의 기능.
14. 한 사회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 혹은 달리 말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느끼는 사람은 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끊임없는 지적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각이 골수에 사무쳐 그녀가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을 잃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녀는 한 가지를 잃게 된다. 삶의 안정성. 이제 그녀는 이후에 자신에게 일어날 여러가지 사건에 의해 흔들리게 되고 때로는 무너지겠지만, 이 모든 것은 실로 그녀가 온생애 동안 쉼없이 맞아온 가랑비의 축적이 낳은 최종적 결과에 불과하다.
15. "어떤 텍스트가 희생양 효과에 대해 덜 언급할수록 또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수록, 그것은 희생양 효과에 더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197)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없는 법이다.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욕망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그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216)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십자가에 못질을 하는 것이다."(256)
"어떤 사람에 대한 심리학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조서(調書)를 꾸미는 일이다."(256)
"자신이 해방자라고 믿었던서구는 오늘날에 와서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333)
-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1998/2007.
16. 사랑을 하면, 네가 늘 품고 있던 그러나 한번도 알지 못했던 온갖 무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사랑인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 너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17.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사랑을 너무 오래 못받은 사람들, 한번도 혹은 너무 적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은 실제로 사랑을 받게 되면 두려움에 떤다. 사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이 두려움은 사랑하는 자를 시험에 빠뜨린다. 길고도 안정적인 사랑은 이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용기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자 보상이다. 용기있는 이들만이 아름다움을 얻는다(only the brave takes the beauty)는 말은 실로 옳은 말이다.
18. 라 로쉬푸코적 잠언 - 여성의 허영과 남성의 허세에 대한 치유책으로서의 소박함과 진실함.
19. 믿음을 얻으면 마음도 얻는다.
20. 충고는 백해무익이다.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두어라.
21. 너를 받아줄 그릇이 안 되는 사람, 조직에 정성과 충성을 바치지마라.
22. 가장 매력없는 인간 유형들 중 하나는 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그치며 '어떻게' 하자는 방법론도, 하려는 의지도 결여된 사람들이다. 실은 인식의 결여.
23.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
24. 더 젊었을 때 더 많은 보르헤스가 번역되지 않았던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다행스럽게도 나는 보르헤스가 아니다.
2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부모의 말을 잘 듣거나, 부모를 존경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유일한 의무는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26. 더 젊은 시절에 보르헤스를 더 많이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불운이었다!
27. 나는 전화받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정말 예외적인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화를 하는 것이나 받는 것이나 무척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불가피한 공무가 아니라면 늘 문자를 한다. 수신벨은 늘 무음으로 해놓고, 전화 통화도 어림잡아 모두 합해서 한달에 열 통화도 되지 않을 것이다. 편집자들부터 친구들까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내 습벽을 알아서 아무도 내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생각에 메일이나 문자로 해도 될 일을 한국은 보통 전화로 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 선택이지만, 이 글을 보는 분들께 내게만은 문자로 해주길 부탁한다. 이유는 알고 싶지도 말해주고 싶지도 않다(여러분도 이런 자신만의 '비사회적인' 습벽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길 바라본다). 그런데 이런 나의 습벽은 괴상한 것일까?
28.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곧 상상도 하지 못한다.
29. 너그러움은 능력이다.
30.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가령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모든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2015.9.29.-2015.10.11
2015. 9. 16.
잠언 14
01. "반항마저도 기존 형식을 따라한다" - 그렇다면 반항이란 기존 형식을 무시하며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실로 반항마저도 무형식으로 할 수 없다는 곧 기존 형식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는 자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일까?
02. 이미지와 언어 - 모든 인간은 자기 이미지의 노예이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늘 자신이 품고 있는 이미지의 틀 안에서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못 하느냐고, 왜 너는 내가 설정한 이 틀 안에서 행복하지 못하느냐고, 왜 세계는 나의 이미지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고 화를 내고 채근한다. 이 이미지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이미지를 정확히 아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인간 지각의 조건 자체이므로 문제는 이미지와 함께 혹은 없이 지각하고 사유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지각하고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 두 가지 유익한 조언이 있다. 이미지는 일종의 자동 기계이므로 적절한 외적 간섭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무한히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미지의 인식 자체가 이미지를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이 글은 당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이미지를 발생시켰는가. 결국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감옥도 지옥도 아닌 인간 지각 및 인식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 모든 논의의 방법론적 핵심은 이미지의 언어화로 정리될 수 있다.
03. 내 삶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은 어떤 무엇인가에 대한 재현이거나 모방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원본, 이데아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한다.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존재론적 우열도 없으며, 모든 존재는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족한 존재이다. 이제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가지 근본적 태도, 비교와 희생은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가령 내가 남을 속이거나 게으른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내가 흑인이거나 여성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한계는 실상 내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른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04. 사람들은 묻는다. 왜 세상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왜 너는 내가 짜준 이 틀 안에서 행복해 하지 않느냐고,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나외 상호작용하는 우리 관계가, 내가 만들어가는 나는 모두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만들며 변해가는 법이다(푸코는 이를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이 갖는 세 영역 곧 지식, 권력, 윤리라 불렀다). 이 길을 모르면 이 길을 따르고 존중하고 만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노자가 이르는대로, 나와 남과 세계를 존중하는 길이란 어떤 조작도 어떤 억지스러운 작위도 없이 세상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길뿐이다. 내가 말이 없을 때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남의 모습을 내가 정하지 않고 남의 말과 그 말 너머의 느낌을 들을 때 남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로되,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05. 이미지와 감정을 '다 살다' - 어떤 이미지는 때로 강렬한 고통의 감정을 수반한다. 그때 해야 할 일은 이 이미지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일, 이 감정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느껴보는 일이다. 그것이 스러질 때까지 혹은 적어도 조절 가능한 것이 될 때까지. 그것은 5분이 될 수도 5일이 될 수도 5개월 혹은 5년이 될 수도 있으나, 인생에서 이러한 작업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06. 글은 생각이다. 생각의 결여를 자료나 양이나 노가다 혹은 기교, 혹은 진정성으로 때우려 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차분히 생각하되 과감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07. 글이 생각이다.
08. 글이 그 사람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글에는 내가 온전히 드러난다. 내 삶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듯이 내 글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실상 그러한 욕망은 소아적 욕심이며, 오히려 글쓰기란 그러한 소아적 집착을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글쓰기란 글짓기가 아니다. 글쓰기에는 나의 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믿는 나의 진심구조가 드러난다. 글과 생각과 삶은 서로를 만든다. 나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가 다 바뀌어야 내 글이 바뀐다. 글쓰기의 왕도란 없으며, 오직 이 순간 내가 믿는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할 뿐이다(이 말은 이해도 받지 못할 타인들에게 나의 결점을 무조건 '까발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 진실을 짜는 나의 말이 그대로 내 삶의 피륙인 것이다. 글쓰기는 나를 만들어가는 주체화의 금욕적 실천이다. 글쓰기란 이처럼 내 삶을 가꾸는 실천, 지금 나의 진실을 적어내려감으로써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려는 실천이다.
09. 나는 나의 글을 고치고 또 고친다. 내 몸이 '됐다'고 말할 때까지.
10. 나의 만족감이 나의 인식론적 장, 곧 나를 지배하는 무의식적 에피스테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의 자연이 인위이다.
11. 좋은 글은 자기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용기, 참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에서만 나온다.
12. 철학의 시제 - 철학이란 남이 짜준 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따라서 그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나의 과거도 지금의 내게는 남이다. 철학의 주체는 늘 지금의 나이며, 철학의 시제 또한 늘 현재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이처럼 오직 정치적이다.
13. "나는 한 평생 나의 삶을 의탁할 생각과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어떤 책,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의 그림자도 따라 걷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 더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14. 나는 고등학교 이래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학교의 비합리적인 강제적인 규율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제와 규율이라는 말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졌다. 아마도 이것이 훗날 대학원 시절 푸코를 읽으며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공감하게 되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그 전의 일이지만 대학시절 에리히 프롬의 <종교와 정신분석>을 읽으며 모든 권위가 아니라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하고 후자는 거부하되 전자는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생각을 조금은 고쳐먹게 되었다. 물론 더 훗날 과연 이 '합리성'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러한 기준은 또 누가 정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지만. 여하튼 잃을 것이 없었던 '영혼의 프롤레타리아'였던 나는 모든 권위를 의심하는 가히 철학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긴 어느날 나는 드디어 중용과 절제의 참다운 의미를 내 삶속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이에는 대학 시절 이래 나의 심령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던 <노자>의 '휴머니즘적' 해석의 영향이 컸다. 이에는 역시 대학시절 이래 내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용>의 '때에 맞음' 곧 시중의 영향도 동시적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불이론' 역시 내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제 나는절제와 중용을 노자적으로 내 몸에 닦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의 이러한 절제와 시중, 중용의 사상을 타인에게 보편적으로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과 상황과 또 그로부터 나온 삶의 깨달음과 각자만의 틀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사상의 기틀이 잡힌 이십대 후반 이래 <중용>의 시중과 노자의 사상을 통하여 서양의 모든 사상을 바로 이러한 의미의 '아나키즘적 민주주의'의 정치철학, 윤리로 해석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실로 나의 공부와 삶은 둘이 아니다. 오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절제와 중용을 나와 세계에 닦는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이러한 깨달음과 즐거움을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15. 한 번도 학문에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이분법' 안에서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들이 학문을 자신의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숭상하든 혹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여 폄하하든 그들은 삶과 생각, 공부, 학문을 자신의 삶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인간도 자기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를 알 수 없다. '한 인간의 참다운 깊이는 그녀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나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6. 진실을 말하기, 잘못 행동하기(truth-telling, wrong-doing)
푸코가 말하는 '진실 말하기' 곧 파르헤시아는 도덕적인 것이자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인식론적 장을 드러내는 과정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있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무의식적 진실을 명료히 언어화함으로써 그것을 구성하는 동시에 변형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진실을 공격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만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라는 푸코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의 진실이란 실제의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믿는 바의' 진실이다.
'나는 너희들보다 우월하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 니네들이 가난을 알아?, 공부도 못 하는 게, 나는 존중해줄 필요 없는데, 책밖에 모르는 새끼가, 못 생겨가지고, 난 느낌이 마비되었다, 난 곧 죽을 것이다'처럼 반사회적이고 특히 비사회적인 진실을 (남들에게보다는 자신에게) 정확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반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데, 실로 인간은 사회속에서 합리화되며 언어와 욕망을 습득하여 자기가 되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욕망과 언어가 '말이 되도록' 곧 합리적 설득력을 갖도록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실로 반사회적 욕망은 사회적 욕망의 일부이다. 따라서 반사회적인 것보다 비사회적인 것 곧 일반적으로 자신과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보다 정확히는 합리적이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하는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정상적 사고의 한도 내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은 그저 '정상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나치를 피해 도망가다가 에스에스가 내일 아침에 자신을 잡으러 도착할 것을 알면서도 '피곤해서' 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잠자기를 선택한 어느 유대인 지식인처럼 정상적 사회성의 관점에서는 '말하기도 뭣한' 비사회적 욕망의 인식구조가 그런 것이다.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때로 '(실은 자신 안에 내면화된) 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인간은 결국 이기주의자들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같은 도식을 믿고 사는 '순수한' 혹은 '천박한' 인식에 머무르는 사람은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자존감이 전혀 없고 따라서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여 이래도저래도 상관없는 사람, 혹은 악한 부모를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진실 말하기란 사람들이 그 말에서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 곧 사회적 진실을 기본적으로 자신 앞에 그리고 때로는 남들 앞에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진실 말하기란 자신의 기존 생각과 관념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말하기, 용기 모두에 대해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작업이다. 기본적으로 진실하기란 자기 앞에서 하는 것이지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실을 알고 말하는 인간은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옳은 일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잘못된 일 곧 실수를 할 뿐이다. 실수가 없다면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대가, 괴물이 된다. 실수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조건이다.
그러나 파르헤시아에 관련된 이 모든 논의는 실로 철두철미 서양적인 것으로, 가령 서양화된 사회이나 여전히 비서양사회이기도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과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가령 파르헤시아 곧 진실 말하는 이는 한국에서 그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돈 키호테',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짧은 이로 이해되어 그녀의 권력과 신망이 상실되는 결과만을 낳기가 십상이다).
17. "한 사람의 정신적인 폭과 깊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실을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18. "이기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패하는 길이다."
19.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20. 나의 유학시절 말미를 버티게 해준 <<중용>>(中庸)의 한 마디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한다.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내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유사함이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14장, 김용옥 옮김)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 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正鵠, 反求其身.”
21. 신영복이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내고 출소한 것은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 때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영복은 그 당시 '시국강연'을 하러 이곳저곳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내가 학생이던 대학교에도 강연을 왔다. 나는 출소 전부터 그의 채을 감명 깊게 읽고 존경의 념을 품고 있었기에 그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연이 끝나고 어떤 여학생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신영복은 그 때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이제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되새기는 말이 되었다.
"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늘 이런 일을 무엇인가를 찾으며 '오늘'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매일매일의 노력이었을 것 같다."
23. '나'도 내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 Le moi est sans moi.
My mind has been wandering
I hardly noticed
It's running on its own steam
I let it go
내 마음은 언제나 방황했어
마음이란 자기 스스로의 흐름을 따라
달려가는 거라는 걸 난 몰랐어
달려가는 거라는 걸 난 몰랐어
이제 난 내 마음이 흘러가게 내버려둬
david sylvian
fire in the forest [remix]
2015.09.16-2015.09.28.
잠언 13
1. 기억의 물질성 - 스페인에서 쓰다 가져온 치약이 다해가 듯 스페인의 기억도 점차로 희미해져 간다.
2.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1쪽.
3. "삶은 언제나 사후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미래의 가치를 여실히 깨달아 간다." - 조용섭
4. 평생에 걸친 푸코 작업의 지향점들 중 하나는 세계관, 가치관의 독점과 그에 따르는 일방적 재단, 세뇌, 교정, 처벌의 정당 근거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의 주요한 개념 장치가 절대, 객관, 중립이며, 그리고 이런 모든 개념들의 궁극 근거로서의 보편성의 관념이다. 따라서 푸코가 수행하는 모든 작업은 보편성의 관념에 대한 공격, 곧 계보학적 제도적 분석으로 수렴된다.
5. 프랑스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내가 타인들과, 우리가 그들과 잘 살기 위해서.
6. 우리나라 축구 피파랭킹은 이번 달에 57위다. 사람들이 말하듯 나의 꿈은 대한민국이 피파랭킹 1위 하는 날까지! 이렇게 말하자면 스무살 중반 이래 나의 꿈도 이렇게 적어볼 수 있을 거다. 우리 국악 가요가 빌보드 1위 하는 날까지!
백인 배우들을 쓰는 광고들 촌스럽지 않은가? 우리 국악을 듣는 젊은이 멋지지 않은가!
7. 누군가가 말하는 이른바 '현실'이란 다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자기 '당연함'의 일반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이 누군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구조, 곧 자신이 어쩔 수 없다고 믿는 '현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8.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9. 큰 착각 - 어떤 사람이 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오류.
10. "위험은 똑바로 노려보면 사라지는 법이다." -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11. 낭만주의와 정신분석의 위대한 통찰 - 주인공이 바라보는 '외적 현실'은 그의 내면 세계가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리하여 나와 나의 적이 서로에 대한 거울,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난다.
12. 동아시아 학문의 메이지 효과, 유럽 학문의 고대 그리스 효과.
13.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른 사람, 곧 다른 사람들, 나의 과거 혹은 미래와 비교하지 않는 것,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되었어야만 하거나 또는 되어야 할 그런 상태의 나와 비교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현실을 어떤 가능성, 잠재성, 또 혹은 당위성과도 비교하지 않는 것.
나는 학생이거나 배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지금 이대로 그 자체로 충만한 존재이다.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며,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포용한다.
14. 네가 고민하는 문제는 네 어머니의 문제다.
15. 네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는 없으나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그 일'은 무엇인가?
16. 번역이 철학이다.
17. 네가 너 자신 그리고 모두를 위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한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네 주변의 사람들이 '꽃 피고 있는지, 아니면 시들어 가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라. 특히 네 자신이.
18. 이른바 사람들이 믿는 보편적 진리, 객관적 합리성이란 무한히 다양한 세계의 특정 부분이 배타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니체적 힘관계의 논리.
19. 신 - 신은 deus 혹은 god이란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메이지 일본인들이 채용한 번역어이다. 신, 메이드 인 저팬.
20.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존재를 향한 용기 - 사람은 누구나 때로 이유없는 막연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실로 '이유 없는 불안'이란 없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다 그럴만해서' 느끼는 불안을 무작정 어거지로 누르려고 해봐야 오히려 불안만 가중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방법은 오히려 불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안을 느낄 때, 특히 신체 반응이 수반되는 극심한 불안을 느낄 때, 잠시 동안이라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이 아니므로, 모든 불안은 어떤 느낌, 생각, 신체적 반응을 동반한다. 다시 한번 나의 경험을 돌이켜본다면, 바로 이때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다.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생각들을 피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에는 적어도 나만의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며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인정이 반드시 긍정은 아니다.
이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들 중 어떤 것은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 일치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다.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불합리한' 생각이라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이 믿는' 나의 현실과는 일치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불합리한' 생각은 아니다. 실상 그것은 내가 믿는 현실, 내가 걱정하는 현실과 일치하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생각이다.
모든 인간들 곧 '나'는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존재이므로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적 현실의 차원 이외에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현실이라는 차원을 갖는다. 불안은 때로 전자와 후자의 차이에서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자의 차원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불안한 이유는 '나'만이 알 수 있다. 내가 불안한 이유를 네가 설명할 수도 네가 풀어줄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따라서 주어진 한도 내에서의 보편성을 갖지만, 동시에 그만큼 홀로 서 있는 자 곧 단독자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인간과 홀로 있는 단독자가 모두 언어라는 그물망이 빚어낸 효과라는 것이 라캉의 복음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언어의 동일성은 타자성과 동시적 상관적으로 구성된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동물과 달리, 인간인 내가 불안한 이유, 내 몸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내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내게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생각이 내게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내가 모르거나 부정할 경우,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파르헤시아 곧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용기'란 이렇게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믿는, 스스로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알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정직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말하는 자기에 대한 정직은 감당도 못할 진실을 스스로에게 폭로하고 붕괴되라는 말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시습지란 배우고 '때로' 익힌다가 아니라 배우고 '때에 맞게' 곧 내가 들은 바를 내 몸과 상황에 맞게 잘 응용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치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를 아끼고 섬겨라. 인간은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라는 두 날개로 난다. 모든 공부는 내 몸에 이 자기 배려를 실천하는 나만의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불안을 치유하는 방법이란 내가 듣고 읽고 배운 말을 내가 내 몸에 적용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방법에 다름 아니다.
객관적 합리성, 우리의 합리성만큼이나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도 중요하다.
나의 불안, 내 몸을 떨게 만드는 이 불안은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드러내주는 고마운 메신저이다. 남들이, 아니 내가 '비합리적'이라 말하는 내 믿음의 합리성 구조는 바로 내가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사는 세계, '진심'의 세계이다. 나의 진심을 모르는 내가 내게 잘해주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는 함께 간다.
그리고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이에게 나는 오직 나 자신이 경험한 나의 진심구조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은 노자에 나온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어 빈틈투성이처럼 보이지만 빠져나가는 것이 없다."
노자에 좋은 길과 나쁜 길은 서로 기대어 있고 내 몸이 망한 것도 이 길이지만 이 길에서 나가는 길도 이 길이므로, 내가 어찌 어리석고 악한 사람을 남이라 비웃고 탓하기만 할 수 있으랴. 흥해도 이 길로 흥하고 망해도 이 길로 망하니, 불행의 조건이 행복의 조건이며, 죽음의 조건이 삶의 조건이니, 두 길은 다른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길이 귀히 여겨지는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남과 나를 모두 너그럽게 바라보되, 남과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조작도 없이 내가 믿고 보고 그 안에서 사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지옥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단 말인가?
21. 때로 사랑과 외로움은 같이 걷는다. 쓸쓸함 역시.
22. 나의 참다운 행복과 너의 참다운 행복은 모순되지 않으며 실로 일치한다. 이것은 인식이나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23. 어떤 위로도 위안도, 변명도 상황의 조작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을 견딘다.
vaughan williams, lark ascending, hilary hahn
2015.05-2015.09.
2015. 5. 2.
잠언 12
montserrat figueras, lux feminae 900-1600, 2006
0. 모든 진리는 전혀 하나로 통하지 않는다. 이른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진리들 사이에 설정 가능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단죄와 살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진리들의 전쟁'만이 가능하다. 니체의 말대로, 그러나 니체와는 다른 의미로, '진리'가 문제이다.
1. 고통받는 이들의 심정이 보여주는 일반형식 - "화가 난다. 억울해. 왜 하필이면 내게만 이런 일이. 재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제 고통받는 이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불행하다."
고통과 불행이 등가로 이해된다는 점 이외에도 이러한 담론에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에 의해 (때로는 합당하게 때로는 성급하게) 정당화된 수많은 논리적 비약이 포함되어 있다.
2. 천천히 걸어라. 서두르지 말고. 네가 도달해야 할 유일한 장소는 네 자신이다.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어디까지 어디에서부터 네 자신이고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아는지만이 문제이다. 산티아고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인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허명이며, 산티아고란 그저 마음의 상태이다. 산티아고는 네가 걷는 등굣길이자 출퇴근길며 슈퍼에 가는 길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바로 그 길이다.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 밑에는 섬들이 원래 둘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땅이 있고, 그 땅은 한번도 이어져 있지 않은 적이 없다. 신토불이. 생각이 이러하니 산티아고길을 끝까지 걸을 이유가 내게는 원래 없었다. 산티아고는 치유의 길이고 성찰의 길인 만큼이나 고통의 길이고 집착의 길이다. 산티아고를 도대체 왜 걷는가? 이것이 이 길의 물음이며 화두이다. 산티아고를 온전히 끝까지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그 끝에 도착한다면 상상치 못한 성취감이 있고 그것을 바라는 사람을 그것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바로 이것, 진정성의 문제가 산티아고를 어린시절부터 막연히 꿈꾸게 만든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한걸음 한걸음 무소의 뿔처럼 남들 쳐다보지 않고 나만의 길을 나만의 걸음으로 걷는다는 이 유가의, 불가의, 그리스도교의,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성 담론이야말로 나의 성실-죄책감-자기 처벌으로 이어지는 정체성 형성의 핵심으로 작용한 가공할 이데올로기 담론, 주체의 해석학임을 알겠다. 산티아고라는 이 이름이 그저 하나의 이름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내가 산티아고길을 걸은 것은 무슨 거창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얻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산티아고길을 걸은 것은 아무도 없는 들길 산길에서 만나는 가녀린 벚꽃,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손을 흔들면 반갑게 흔들어주는 운전자들의 밝고 짧은 인사, 고통과 행복이 둘이 아님을 말해주는 부르튼 발, 그리고 마음을 흔들며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과 비참과 행복과 불행, 사랑과 사람들과 삶의 기억 때문이었다. 나는 산티아고길에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했으며, 모든 것을 버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산티아고 길을 걷지 않는다.
3. 악인이 그렇게 악한 줄 아는가?
4. 모욕이 준비되었을 때 인생이 시작된다 - 그런데 인생에 대한 순진한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조건임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인생의 끝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모욕을 받아들이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이다. 비극이 없는 혹은 인정되지 않는 세계가 완벽한 세계, 순수한 세계이며, 라캉이 말하는 어머니와 나의 완전한 유대가 가정되는 상상계이며, 이러한 충만하고도 완전한 상상계가 파괴되지 않는 한 그는 한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건강한 인격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5. "나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가 자기와 타인에 대한 관계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한, 윤리적으로도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 미셸 푸코
자기를 배려하기 이전에 타인을 배려해서는 안 된다. 이기주의도 희생도 아닌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과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이루어진다.
6. 언어의 흥미로운 역설적 현상 - 당신은 이유가 무엇이든 당신이 속한 모임의 누군가가 좀 맘에 안 든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당신은 문제를 일반화하여 공개적으로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신랄히 비난한다. 그런데 당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완벽한 자기 방어기제를 발동시켜 신경도 쓰지 않는 반면,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당신의 말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시켜 스스로를 비난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설과 우회의 상황을 적절히 구분하고 판단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상황 일반이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당신의 말은 늘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에 의해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글을 당신이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처럼.
7. 인간 실존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 상황 -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8. 미셸 푸코는 합리성과 폭력이 양립불가능하거나 상호배제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폭력이 양립불가능하거나 상호배제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9.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원칙을 지키고 산다. 마치 그것이 삶 자체의 원칙이기라도 한 것처럼.
10. 17살 때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 실존 무의식의 일반적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늘 사후(afterwards)에 가서이다. 바로 여기에 사건에 대한 선택과 해석의 중요성이 놓여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지금이 아니라 사후의 관심과 해석에 의해 '사후적으로' 규정된다. 인간이란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수동성과 중립성을 넘어서서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해석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존재이다.
11. 네 욕망을 소중히 해라.
12.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위한 최선의, '잡음'이 일어나지 않는 사실상의 유일한 방법은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시간과 상황을 제공하여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모두 제시하고 충분히 토론한 이후에 자유롭게 이루어진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다.
13. 객관성과 보편성을 말하는 이들의 저 지독한 폭력적 자기 중심주의 - 누군가가 자기 생각의 '객관적 합리성'을 말할 때 실상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자신이 결정한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가 칸트이든 하버마스이든 나든 당신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이로부터 합리성과 보편성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이 나온다. 합리성과 보편성이야말로 권력의지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그 실현수단이며, 이는 '자신도 모르는 이기주의'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14. 인식주체의 자기인식 - 자신에게 옳은 것으로 보이는 '진리'의 보편타당성, 나아가 절대성을 믿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항상 상황 외적으로, 곧 인식주체로서의 자신의 판단을 인식대상의 상황에 대하여 외적인 것, 인식대상과 무관한 것, 상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들에게 진리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절대진리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신의 상황 외적인 '객관적' 진리와 다른 관점은 모두 '오류'와 '교정대상'으로 취급된다. 철학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부분도 바로 이런 '인식주체의 자기 인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15. 남성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16. "아무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17. 마음이 열려 있지도 않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주장만 강한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그는 당신의 평화와 성장을 현격히 방해하며, 나아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편함과 갈등을 조장한다. 결국 당신이 그와 보내는 시간은 가장 좋은 경우에도 '시간 낭비'이다.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과 굳이 안 되는 일을 도모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 그러나 때로 세상에는 보지 않을 수 없는 관계 역시존재한다. 이 경우 가능한 현실적 최선은 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형식적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18. 정체성의 정치성 - 미셸 푸코의 탁월한 통찰처럼, 모든 정체성 곧 자기 동일성(identity)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제와 거부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정체성보다 정치적인 것은 없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내가 너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정체성과 동일성은 그 자체로 다름과 타자성에 대한 거부와 배제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이다. 푸코의 모든 논의는 다름과 타자성에 대한 긍정에 입각하여 기존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예외없이 오로지 '정치적'이다. 정치라는 용어를 국가와 정당과 같은 거대정치의 의미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정치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다.
19. 나의 자부심 - 내가 이십대 말미에 정한 내 학문의 3가지 방향성을 나는 오늘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첫째 더 쉽게, 둘째 더 낮게, 셋째 스스로 그러하게.
20. 잠언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 놀랍게도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하나의 글을 자신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나의 글과 말은 나와 남 '사이'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는 실상 그저 당연한 현상인데, 언어 자체가 이미 어떤 '누가' 아닌, 우리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21. 미필적 고의 -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안 할수는 없으니 해야지' 하는 식으로 그것을 의무화하여 자신이 원래 하고싶었던 바를 정당화하며 행한다.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가족, 사랑, 직장, 인간관계 등 인간 사회생활 일반에 공히 통용되는 진리이다. 이는 실상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못 견뎌서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하는 일을 의무라는 식으로,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상대를 위해서 할 수 없이 한다는 식으로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일은 한편으로 매우 흥미로운 측면을 갖는데 그것은 행위와 사고의 당사자가 단순한 현상적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고 정당화되며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 자체의 변경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태는 그것의 정신분석적 철학적 차원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이런 측면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2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해자의 편이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III, 167)
23. "작은 투쟁들 속에서 많은 위대한 행위들이 이루어진다. 궁핍과 치욕 들의 피할 수 없는 침입에 대하여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저항하는 남모를 끈덕진 용맹들이 있다. 어떤 눈도 보고 있지 않으며 어떤 명성도 얻지 못하고 어떤 갈채도 받지 않는 고결하고 은밀한 승리들. 실생활, 불행, 고립, 고독, 빈곤은 그들의 영웅을 가지고 있는 싸움터들인데, 이 영웅들은 때로는 고명한 영웅들보다 더 위대한 이름없는 영웅들이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III, 189)
21. 사랑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생명을 살린다. 그것은 우주의 진화론적 생성에 관련된 동어반복이다.
2015.03-04. 스페인에서.
잠언 11
john cage, in a landscape, 1948.
0. 당신은 누구를 왜 경멸하는가?
1. 권력의 최대 형식은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이는 자신의 관점이 관점이나 해석이 아닌, 있는 그대로, 곧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의 자연이 자연 자체"라고 선언하는것이다. 이때 '나의 자연과 다른 모든 자연'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 이상한 것,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계몽과 교정의 대상으로 치부된다.
2.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에 등장하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집단에 대해서는 불변의 진리이다. 때로 개인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넘어 의식, 곧 도덕적인 이유로 어떤 일을 행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에 대하여 이러한 도덕성을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따라서 도덕적 개선을 넘어선 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3. 고진을 읽으니 내 안의 고진이 드러난다.
4. 글이란, 사유란 모름지기 내가 세상의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쓰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5. 무겁지 않은 글쓰기란 무겁지 않으니 가벼운 글을 쓴다는 식의 이분법이 아니라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던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벼움, 새로운 무거움의 글쓰기이다. 이처럼, 글쓰기란 - 마치 삶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 이미 존재하는 어떤 모델을 따르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글쓰기의 새로운 모습을 오늘 내가 여기서 발명해내는 일이다.
6. 신중히 생각하고 가벼이, 그러나 경박하지 않게.
7. 모든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 - 나의 마음과 외적 상황 모두를 어떤 조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8. 내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하다면, 네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9. 폭력이 보여주는 최악의 형태는 실상 자기 '스타일'의 강요이다. 더구나 그것이 강요하는 자가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합리성'의 형식을 갖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10. 자기 비하의 핵심이 이기적인 자기 중심주의인 것처럼, 지속되는 죄책감이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궁극 형식이다.
11. 위안과 위로, 가능성과 희망이 남아있는 한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는다. 새로운 길은 완벽한 절망, 희망의 완전한 결여, 비유가 아닌 실제로 몸이 덜덜 떨리는 육체적 두려움, 겁이나 숨도 못쉬는 심리적 지옥의 상태를 어떤 조작도 도피도 위안도 없이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수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 곧 내 몸을 던지겠다고 마음 먹은 용기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지금 이 삶이 살만 하고 견딜만한 것인 한, 위로와 위안이 있는 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한,
새로운 삶은 네게 자신의 문을 열어보여주지 않는다. 죽어야만할 때 죽을 용기가 없는 자는 제대로 살 수조차 없다. 모든 길이 끊어지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그리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어떤 조작도 없이 온전히 다 받아들일 때에만,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실로 신비스러운 일이지만, 내 몸 안에서 내가 모르던 힘이 저절로 솟아나온다.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이는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인데, 이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을 던져 이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다.
12. 설득권력으로서의 철학 - 내가 생각하는 철학에 따르면, 설득력이 없는, 자신과 타인을 설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담론은 철학이 아니다. 설득력이 없는 담론이란 타인들로부터의 공감도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는 담론이다. 그런데 철학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오직 합리적 논증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와 힘 곧 설득력을 얻으려한다. 이 설득력이야말로 설득하고 설득시키는 힘, 곧 철학의 현실적 권력이다. 당신의 말이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 적어도 찬성 혹은 반대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바로 그만큼 당신의 담론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것이며 바로 그만큼 무력하다.
이제 당신은 물을 것이다. 설득력이란 무엇이며, 설득력은 꼭 얻어야 하는 것인가를(혹은 때로는 이 글이 자신을 겨냥해 쓰인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나는 - 무라카미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신의 모든 질문은 타당하며 유의미하다.
그렇다. 이해했는가? 바로 당신이 정당하게 묻고 질문한대로, 설득력이 권력이며, 설득력이 힘의 논리이다. 설득권력!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이, 생각이, 공부가, 글이란 이미 권력추구 행위이다. 물론 이때의 권력은 필히 니체적 힘에의 의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따라서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면서도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려는 생각도 의지도 능력도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헤겔의 말대로 인간 의식의 모든 행위 곧 노동이 나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나의 노동은 설득력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득력은 어떻게 얻을수 있는가? 당신의 삶, 가치관, 진심, 한마디로 당신의 인생 전체가 당신의 동시대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것이 될 때이다. 당신은 당신의 진심 일상생활은 변화하지 않은 채로 당신이 보여주는 당신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공감과 설득력을 얻기를 바라는가? 좋다. 그러나 당신이 바라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과 외적 언어와 행동는 당신의 진심 평상시 태도의 필연적 반영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당신의 말과 행동이 사랑이 오늘 당신이 사랑하는 자의 되돌아오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비극이다. 이는 당신의 생각과 사랑이 당신의 머릿속에 갇혀있을 뿐 상대의 공감과 되돌아오는 사랑과 존중을 불러일으킬 현실적 힘과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의 말대로, 공감과 설득력의 획득은 평생을 두고 오늘 담담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만의 나인 동시에 우리인 나를 위해 스스로 행하는 작은 실천,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함, 곧 중용의 실천에서만 조금씩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없이 힘과 억지로 자신의 사정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자, 스스로를 설득하고 스스로가 설득되는 기나긴 지난하고도 지루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걷지 못하여 어떤 합리적 논리도 없이
궤변과 교언과 폭력과 심정적 호소로만 타인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자에게
세상은 비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소한 이 작은 일에 있어서의 타인에 대한 경청, 이 시시한 이 비소한 일에 있어서의 자기 배려만이 공감과 설득력을 낳고, 그리하여 천하를 바꿀 힘을 만든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는 많아도 이에 성공하는 이는 드물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실제로 바꾸는 힘은 오직 자신의 진심과 세상의 이치를 맞닿게 하는데 성공한 자에게서만 나온다.
13.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그리고 그 실천)은 어떤 사람을 만들까?
14. 이른바 '고집'을 너무 부리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러나 이른바 사람들이 고집이라 부르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그의 가치관, 인식의 근본구조, 쉽게 말해 '진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해주어야 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가치관,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집과 진심의 문제는 가치관들 사이의 수적 충돌, 곧 인정투쟁, 권력투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사람들과 교섭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혹은 혼자 죽거나) 혹은 현실의 이러한 속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에 반응하며 같이 살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집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되고 유린되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교섭이라는 사회적 속성을 갖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파기해야만 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며, 어떤 부분이 당신의 성숙을 위해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를 누가 알고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철학이 내 머리속, 몸 속 생각, 느낌과 나 바깥의 현실과의 무한한 대화라고 할 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란 영원히 지금-여기-나의 삶이다.
15. 요령이 아니라 실력, 요행이 아니라 정도
16. 공과 사를 불문하고 자신이 듣고 보는 모든 일을 개인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상에 입각해서 모든 일을 지각하고 판단하며 모든 일을 자신과의 관계에 입각해서만 바라본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을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어떤 행동이나 말이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라고, 자신에게 이렇게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의 사태를 오직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해석하면서 그것이 해석이 아닌사실 자체라고 믿는다. 그 결과가 앞서 말한 개인화, 사적 사건화, 심리학화. 나아가 도덕화이며, 이들은 자신이 말이나 행위의 당사자보다 그들의 의도와 본의를 더 정확히 잘 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니체와푸코가 정확히 지직한대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서, 가령 현재의이 글을 개인화, 심리학화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즉이 글을 읽으며 이 글이 자신이 보라고 쓴 것은 아닌가라는 자신만의 생각에 함몰되지 않을 능력을 갖춘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다. 이처럼 내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나의 문제는 실상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며, 이런 부정적인 자기중심주의적 자동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이 아니라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역능을 니체적인 긍정의 의지로 끝까지 밀어부치는 들뢰즈의 작업이다.
17. 철학이란 무엇인가? 논점의 이해이다. 논점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어떤 논지를 찬성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논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철학이란 이런 면에서 논점의 분명한 이해를 통한 합리적 논의라 할 수 있다.
18. 어느 날의 편지 - "심지어 저로서는 이것이 인생이 숨겨놓은 비밀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드러내야 할 때 무엇인가를 용기있게 드러내면 나와 세계가 변화하고 무엇인가를 얻지만(가장 좋지 않은 경우에조차 나는 '나의' 실패를 얻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 말입니다."
19. 민주주의 정치윤리의 간략한 규준 - "나의 일은 내가, 너의 일은 네가, 너와 나의 일은 너와 네가 같이 판단하도록 한다."
20. 공부란 섬세한 차이를 읽어내고 존중하는 것이다. 디테일이 학문의 최소요건이다.
2014.11.-2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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