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6.

잠언 14







01. "반항마저도 기존 형식을 따라한다" - 그렇다면 반항이란 기존 형식을 무시하며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실로 반항마저도 무형식으로 할 수 없다는 곧 기존 형식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는 자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일까?


02. 이미지와 언어 - 모든 인간은 자기 이미지의 노예이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늘 자신이 품고 있는 이미지의 틀 안에서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못 하느냐고, 왜 너는 내가 설정한 이 틀 안에서 행복하지 못하느냐고, 왜 세계는 나의 이미지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고 화를 내고 채근한다. 이 이미지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이미지를 정확히 아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인간 지각의 조건 자체이므로 문제는 이미지와 함께 혹은 없이 지각하고 사유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지각하고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 두 가지 유익한 조언이 있다. 이미지는 일종의 자동 기계이므로 적절한 외적 간섭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무한히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미지의 인식 자체가 이미지를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이 글은 당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이미지를 발생시켰는가. 결국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감옥도 지옥도 아닌 인간 지각 및 인식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 모든 논의의 방법론적 핵심은 이미지의 언어화로 정리될 수 있다.


03. 내 삶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은 어떤 무엇인가에 대한 재현이거나 모방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원본, 이데아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한다.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존재론적 우열도 없으며, 모든 존재는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족한 존재이다. 이제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가지 근본적 태도, 비교와 희생은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가령 내가 남을 속이거나 게으른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내가 흑인이거나 여성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한계는 실상 내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른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04. 사람들은 묻는다. 왜 세상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왜 너는 내가 짜준 이 틀 안에서 행복해 하지 않느냐고,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나외 상호작용하는 우리 관계가, 내가 만들어가는 나는 모두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만들며 변해가는 법이다(푸코는 이를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이 갖는 세 영역 곧 지식, 권력, 윤리라 불렀다). 이 길을 모르면 이 길을 따르고 존중하고 만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노자가 이르는대로, 나와 남과 세계를 존중하는 길이란 어떤 조작도 어떤 억지스러운 작위도 없이 세상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길뿐이다. 내가 말이 없을 때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남의 모습을 내가 정하지 않고 남의 말과 그 말 너머의 느낌을 들을 때 남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로되,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05. 이미지와 감정을 '다 살다' - 어떤 이미지는 때로 강렬한 고통의 감정을 수반한다. 그때 해야 할 일은 이 이미지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일, 이 감정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느껴보는 일이다. 그것이 스러질 때까지 혹은 적어도 조절 가능한 것이 될 때까지. 그것은 5분이 될 수도 5일이 될 수도 5개월 혹은 5년이 될 수도 있으나, 인생에서 이러한 작업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06. 글은 생각이다. 생각의 결여를 자료나 양이나 노가다 혹은 기교, 혹은 진정성으로 때우려 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차분히 생각하되 과감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07. 글이 생각이다.


08. 글이 그 사람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글에는 내가 온전히 드러난다. 내 삶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듯이 내 글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실상 그러한 욕망은 소아적 욕심이며, 오히려 글쓰기란 그러한 소아적 집착을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글쓰기란 글짓기가 아니다. 글쓰기에는 나의 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믿는 나의 진심구조가 드러난다. 글과 생각과 삶은 서로를 만든다. 나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가 다 바뀌어야 내 글이 바뀐다. 글쓰기의 왕도란 없으며, 오직 이 순간 내가 믿는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할 뿐이다(이 말은 이해도 받지 못할 타인들에게 나의 결점을 무조건 '까발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 진실을 짜는 나의 말이 그대로 내 삶의 피륙인 것이다. 글쓰기는 나를 만들어가는 주체화의 금욕적 실천이다. 글쓰기란 이처럼 내 삶을 가꾸는 실천, 지금 나의 진실을 적어내려감으로써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려는 실천이다.


09. 나는 나의 글을 고치고 또 고친다. 내 몸이 '됐다'고 말할 때까지.


10. 나의 만족감이 나의 인식론적 장, 곧 나를 지배하는 무의식적 에피스테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의 자연이 인위이다.


11. 좋은 글은 자기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용기, 참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에서만 나온다.


12. 철학의 시제 - 철학이란 남이 짜준 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따라서 그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나의 과거도 지금의 내게는 남이다. 철학의 주체는 늘 지금의 나이며, 철학의 시제 또한 늘 현재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이처럼 오직 정치적이다.


13. "나는 한 평생 나의 삶을 의탁할 생각과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어떤 책,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의 그림자도 따라 걷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 더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14. 나는 고등학교 이래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학교의 비합리적인 강제적인 규율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제와 규율이라는 말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졌다. 아마도 이것이 훗날 대학원 시절 푸코를 읽으며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공감하게 되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그 전의 일이지만 대학시절 에리히 프롬의 <종교와 정신분석>을 읽으며 모든 권위가 아니라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하고 후자는 거부하되 전자는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생각을 조금은 고쳐먹게 되었다. 물론 더 훗날 과연 이 '합리성'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러한 기준은 또 누가 정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지만. 여하튼 잃을 것이 없었던 '영혼의 프롤레타리아'였던 나는 모든 권위를 의심하는 가히 철학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긴 어느날 나는 드디어 중용과 절제의 참다운 의미를 내 삶속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이에는 대학 시절 이래 나의 심령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던 <노자>의 '휴머니즘적' 해석의 영향이 컸다. 이에는 역시 대학시절 이래 내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용>의 '때에 맞음' 곧 시중의 영향도 동시적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불이론' 역시 내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제 나는절제와 중용을 노자적으로 내 몸에 닦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의 이러한 절제와 시중, 중용의 사상을 타인에게 보편적으로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과 상황과 또 그로부터 나온 삶의 깨달음과 각자만의 틀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사상의 기틀이 잡힌 이십대 후반 이래 <중용>의 시중과 노자의 사상을 통하여 서양의 모든 사상을 바로 이러한 의미의 '아나키즘적 민주주의'의 정치철학, 윤리로 해석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실로 나의 공부와 삶은 둘이 아니다. 오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절제와 중용을 나와 세계에 닦는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이러한 깨달음과 즐거움을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15. 한 번도 학문에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이분법' 안에서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들이 학문을 자신의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숭상하든 혹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여 폄하하든 그들은 삶과 생각, 공부, 학문을 자신의 삶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인간도 자기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를 알 수 없다. '한 인간의 참다운 깊이는 그녀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나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6. 진실을 말하기, 잘못 행동하기(truth-telling, wrong-doing)


푸코가 말하는 '진실 말하기' 곧 파르헤시아는 도덕적인 것이자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인식론적 장을 드러내는 과정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있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무의식적 진실을 명료히 언어화함으로써 그것을 구성하는 동시에 변형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진실을 공격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만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라는 푸코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의 진실이란 실제의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믿는 바의' 진실이다.

'나는 너희들보다 우월하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 니네들이 가난을 알아?, 공부도 못 하는 게, 나는 존중해줄 필요 없는데, 책밖에 모르는 새끼가, 못 생겨가지고, 난 느낌이 마비되었다, 난 곧 죽을 것이다'처럼 반사회적이고 특히 비사회적인 진실을 (남들에게보다는 자신에게) 정확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반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데, 실로 인간은 사회속에서 합리화되며 언어와 욕망을 습득하여 자기가 되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욕망과 언어가 '말이 되도록' 곧 합리적 설득력을 갖도록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실로 반사회적 욕망은 사회적 욕망의 일부이다. 따라서 반사회적인 것보다 비사회적인 것 곧 일반적으로 자신과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보다 정확히는 합리적이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하는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정상적 사고의 한도 내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은 그저 '정상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나치를 피해 도망가다가 에스에스가 내일 아침에 자신을 잡으러 도착할 것을 알면서도 '피곤해서' 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잠자기를 선택한 어느 유대인 지식인처럼 정상적 사회성의 관점에서는 '말하기도 뭣한' 비사회적 욕망의 인식구조가 그런 것이다.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때로 '(실은 자신 안에 내면화된) 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인간은 결국 이기주의자들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같은 도식을 믿고 사는 '순수한' 혹은 '천박한' 인식에 머무르는 사람은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자존감이 전혀 없고 따라서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여 이래도저래도 상관없는 사람, 혹은 악한 부모를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진실 말하기란 사람들이 그 말에서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 곧 사회적 진실을 기본적으로 자신 앞에 그리고 때로는 남들 앞에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진실 말하기란 자신의 기존 생각과 관념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말하기, 용기 모두에 대해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작업이다. 기본적으로 진실하기란 자기 앞에서 하는 것이지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실을 알고 말하는 인간은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옳은 일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잘못된 일 곧 실수를 할 뿐이다. 실수가 없다면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대가, 괴물이 된다. 실수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조건이다.


그러나 파르헤시아에 관련된 이 모든 논의는 실로 철두철미 서양적인 것으로, 가령 서양화된 사회이나 여전히 비서양사회이기도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과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가령 파르헤시아 곧 진실 말하는 이는 한국에서 그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돈 키호테',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짧은 이로 이해되어 그녀의 권력과 신망이 상실되는 결과만을 낳기가 십상이다).

17. "한 사람의 정신적인 폭과 깊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실을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18. "이기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패하는 길이다."


19. "진인사 대천명"()


20. 나의 유학시절 말미를 버티게 해준 <<중용>>(中庸)의 한 마디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한다.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내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유사함이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14장, 김용옥 옮김)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 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正鵠, 反求其身.”


21. 
신영복이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내고 출소한 것은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 때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영복은 그 당시 '시국강연'을 하러 이곳저곳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내가 학생이던 대학교에도 강연을 왔다. 나는 출소 전부터 그의 채을 감명 깊게 읽고 존경의 념을 품고 있었기에 그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연이 끝나고 어떤 여학생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신영복은 그 때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이제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되새기는 말이 되었다.


"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늘 이런 일을 무엇인가를 찾으며 '오늘'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매일매일의 노력이었을 것 같다."


23.  '나'도 내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 Le moi est sans moi.
 
 
My mind has been wandering
I hardly noticed
It's running on its own steam
I let it go


내 마음은 언제나 방황했어
마음이란 자기 스스로의 흐름을 따라
달려가는 거라는 걸 난 몰랐어
이제 난 내 마음이 흘러가게 내버려둬

 
 
 
david sylvian
fire in the forest [remix]






2015.09.16-201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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