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7.

잠언 20



0. 철학의 축복과 저주 -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인식론적 자기 반성이 부재한 '선남선녀'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으며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선남선녀의 세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변화하는 '내'가 없으며 상식과 관습이 지배하는 '우리'의 세계일 뿐이다.


1. "아마도 글자 그대로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을 뿐."(there is properly no History: only Biography) - 에머슨, <Essays>, 1841.


2. "우리 민족의 살길은 남북이 하나되는 길 외로는 어떠한 다른 우회로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직시해야만 할 현실이요, 우리 실존의 본래 모습이요, 우리 역사, 우리 민족의 원주소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파워풀하고, 가장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전경련'과 같은 단체서도 남북의 대결이나 불화를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로운 방법에 의하여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합리적인 소통이  확보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경제를 갈망하면서, 남한경제만을 고립적으로 획책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둔한 짓이다. 우리가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남북의 소통으로  마켓의 규모를 키우는 길이다.

'남북통일'이라는 말은 당분간 쓰지 말자! '통일'(unification)이라는 말은 두 개의 정치체제(politeia)가 공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자의 타자에로의 복속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를 수반하며, 또 도식적인 단계론을 제시하는 담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음만을 지어낸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두 집을 한 집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두 집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남북화해'(south-north reconcili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남북화해다. 남북화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매우 간단한 하나의 명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유왕래'(free comings and goings). 여행이든, 학술교류든, 편지든, 테레비든, 인터넷이든, 비지니스든 자유롭게 왕래하자는 것이다.

우선 자유왕래를 해야만 모든 것이 풀려나가고 녹아나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유왕래를 못하는가? 옆집 사람과 자유왕래하려면 가장 선행하는 조건이 무엇일까? 옆집 사람이 사는 삶의 방식이나 그의 가치관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방식을 부정하면 만나는 매순간마다 쌈박질을 하게 되고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유왕래란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통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정'이라는 한 마디에 걸려있다. 북한의 정치체제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를 기준으로 해서 바꾸려고 하면 왕래나 화해는 물건너간다."

- <도올의 중국일기 3>, 2015, 294-297쪽.





3. 내게 일어난 일만큼이나, 내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4. 내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은 내가 평상시에 말하지 못하는 나의 진심을, 적어도 위장된 형태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해준다. 이 사건들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지만 이런저런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말할 수 없었던 나의 느낌을 정당홰해준다. 나의 내적 느낌이 이러저러한 사건이라는 외적 계기를 만나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이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 분석은 이때의 내외가 실체가 아닌 상호적•동시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론적인 것임을 명심한 채 양자를 모두 분석해야 한다.


5.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실로 구조주의적인 말이다. 인간은 본질이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배치가 이른바 '본질'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만든다. 당신의 속한 자리가 이른바 '당신'을 만든다.


6. 하급자로서 날카로운 비판자가 상급자로서 불통의 아이콘이 되는 수가 있다. 그릇이 원래 그것밖에 안 되는 옹졸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7. 이른바 같은 상황, 같은 처지라 해도 실상 모든 것은 천차만별이고, 다 상황나름이다. 일반화할 수 없는 것, 일반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지금 바로 이 위의 명제가 이미 일반화한 명제는 아닌지를 문제 삼았다. 실제로 이 문제가 일정한 진전을 보는 것은 20세기 러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언어철학적 명제를 넘어선 곳에서(우열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 자신의 사유를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서양의 메타적 언어철학이 '말장난'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외부자들이 보듯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말장난'을 행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유의미한 '말놀이'의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철학을 배우기 이전의 존재 곧 선남선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 자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 계몽이란 무엇인가? - 계몽이란 '나' 곧 '큰 나'를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줄 인식과 실천의 여러 조건을 발견•발명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또는 적어도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떤 참다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 기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를 수 있다. 자기와 남을 속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정말 자기 생각과 느낌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진실된 느낌은 반사회적일 수도, 또는 더 빈번하게는 비사회적일 수도 있다. 내가 고통스러운 희한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남들 앞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고 또 해야하는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자신에의 정직, 울기, 글쓰기, 나의 느낌을 왜곡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때로는 전문가로서의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말과 생각은 조작이 가능한 것이지만 느낌은 속일 수도 속여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노자와 중용, 한의학, 더하여 니체의 통찰을 길잡이 삼아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나', 말하자면 '큰 나'를 위한 일이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이것이 내가 제출하는 새로운 계몽의 조건이다.


9. "네 진심을 얘기해 봐. 농담 아니다. 숨겨봐야 실은 다 드러난다. 너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네가 진짜로 생각하는 거, 정말 네 진심을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 봐."


10. 천재도 저주도 없다. 인간이란 오직 스스로가 어떤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구원이란 요행에의 잘못된 기대이며, 오직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용>의 위대한 깨달음이다. 비코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의 삶이란 어떤 섭리나 운명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내가 행했던 무수한 실존적 선택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11. 당신이 불행한 인간이 된 것은 당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당신이 불행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본래적으로 불행한 사건이란 없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불행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를 따라,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불행한 존재로 몰고간다면, 비록 어리석은 이유일지라도, 그 당사자가 그러한 몰고감 속에서 일정한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와 스피노자, 라이히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문제를 설명해준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해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열렬히 스스로 욕망하는가?


12.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려고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상의 밝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것 역시 건강한 태도라 하기 어렵다. 가령 밝은 면만 보려 하고, 또 보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당신의 태도는 당신의 자녀와 심각한 트러블을 일으킬 것이다.

13.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행하지 않은 선택에 대가를 치루며 사는 것이다. 오늘 내 삶의 모습은 나 스스로가 선택한 바 없는 나의 부모, 조상, 사회, 국가, 세계 체제, 그리고 나의 유년기가 선택한 것들이 빚어놓은 결과이다. 이제 내 삶이 내 선택의 결과임을 아는 나는 이제까지의 무능력 무기력하고 무의식적인 수동적 선택(실은 조건화된 선택당함)을 나 자신의 의식적의 숙고와 의지, '선택'의 결과로 전환시켜야 한다(아마도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인연설법,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실상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처럼, 가히 선천개벽을 잇는 후천개벽이라고나 해야 할 이러한 근본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14. "어떤 이의 행복을 파괴하는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 사람은 미지의 적들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게 자기 탓이며 자신이 원인 제공자였음을 깨닫게 된다."(1838년)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정신적으로 그에게 종속된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은 자는 그에 따라 행위를 취한다. 명령한 사람이 죽어도 명령을 받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그 행위를 지속한다."(1843년)

-  '너대니얼 호손', 보르헤스의 <만리장성과 책들>(1949년)


15. "사람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은 물론, 병에 걸리는 것마저 그 사람의 의지의 발현일 뿐이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6. "위대한 작가들은 선구자들을 창조한다." - 루이스 보르헤스, <만리장성과 책들>(1949), 열린책들, 120쪽.


17. 대부분의 부모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의 진정한 성장을 방해한다.


18. 프로이트의 폐기(Verwerfung), 또는 라캉의 폐기(배제, forclusion)는 실로 놀라운 통찰이다!

프로이트 -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효과적인 일종의 방어가 있다. 거기서 자아는 참을 수 없는 표상과, 동시에 그 정동을 폐기한다(verwirft). 그것은 마치 그 표상이 자아에 결코 도달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처신한다."(<방어정신신경증>, 1894)

라캉 - 상징화되었어야 할 것(거세)을 상징화하지 못한 것, 따라서 폐기는 '상징적 폐기'이다. 환각의 공식, "상징계에서 폐기된 것은 실재계에서 다시 나타난다."


19. 라캉의 이론은 권위에 대한 긍정이자, 권위의 작용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다. 이미 정치적인 주제에 대한 비정치적 분석으로서의 라캉 이론이 갖는 정치성.


20. 헤겔의 인정 투쟁은 인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정 받는 기술이다. 이는 프롬이 잘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사랑하는 기술(the art of loving)이 아닌 사랑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loved)로 생각하는 것, 혹은 응용해보자면, 이해를 이해하는 기술(the art of understanding)이 아닌 이해 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understood)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헤겔의 인정 투쟁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인정이 필요 없다."


21. 부드럽고 넉넉한 관대함.






2015.12.03-2015.12.10.

댓글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