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인월지곡(千江印月之曲),
또는 현실과 그의 분신들
Cheongang Inworjigok,
ou La Réalité et ses doubles
허경
“현실은 논쟁적인 것이다. Le réel est polémique.”
미셸 푸코
1. 현대 한국어 가상현실(假想現實) 혹은 일본어 가상현실(仮想現実, バーチャルリアリティ)은 영어 virtual reality를 번역한 말이다(일본어로는 인공현실감(人工現実感)이라고도 번역된다). 그리고 virtual reality는 프랑스의 극작가ㆍ배우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1938년 출간된 논문집 『연극과 그의 분신』(Le Théâtre et son double)에 실린 짧은 글 「연금술적 연극」(Le théâtre alchimique)에 등장하는 la réalité virtuelle을 영어로 옮긴 말이다. 아르토의 논문에서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다. “모든 참다운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적 상징이, 마치 연극이 하나의 신기루인 것처럼, 하나의 신기루임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거의 모든 연금술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연극의 원리와 사물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빗댐은 인물, 대상, 이미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연극의 가상적 현실(réalité virtuelle)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생성되어 나아가는 평면과 연금술의 상징들이 펼쳐지는 순수하게 가상적이며(supposé) 환상적인 평면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identité)의 (연금술사들이 극단적으로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느낌(sentiment)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연금술과 그 상징이 있듯이, 연극과 그 분신이 있으며, 결국 현실과 그 분신들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전 세계가 무대라면, 곧 전 세계가 연극이라면, 연극과 그 분신이 있게 되듯이, 이제까지의 전 세계가 현실이라면, 이제는 현실과 그 분신들이 생겨나게 된다.
2. 위키피디어는 아르토가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를 ‘연극에 있어서의 인물과 대상이 갖는 환상적(illusory)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적는다. 위키피디어는 이어지는 부분에서 가상현실, 인공현실이라는 용어의 연원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마이런 크뤼거(Myron Krueger)가 사용한 ‘인공현실’(artificial reality)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이래 사용되어 왔다.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는 대미언 브로데릭(Damien Broderick)의 1982년 사이언스 픽션 소설 『유다의 만다라』(The Judas Mandala)에서 사용되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1987년 판에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표제어가 있지만, 이는 가상현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가상virtual’은 1400년대 중엽 이래 ‘아마도 감각을 통해 어떤 특별한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어떤 것, ‘실제로 혹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본질 혹은 효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가상’이라는 용어는 1959년 이래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프트웨어에 의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컴퓨터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현실reality’이라는 용어는 1540년경부터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quality of being real)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어 réalité, 직접적으로는 중세 라틴어 realitatem(주격의 경우에는 realitas)에서 왔고, 이는 다시 후기 라틴어 realis에서 왔다.” 한편, “가상현실은 ‘가상현실들virtual realities’, ‘몰입형[실감] 멀티미디어immersive multimedia’, ‘인공현실artificial reality’ 또는 ‘컴퓨터 시뮬레이티드 현실computer-simulated reality’이라고도 불린다.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의 사전적 정의는 이 용어가 가상현실의 유사어라고 말한다.”
3. 현실과 가상현실이라는 용어, 그리고 이 용어들에 관련된 명명법의 역사를 읽으며 우리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가히 ‘플라톤적’이라 해야 할 이분법, 곧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dualism of reality and virtuality)일 것이다. 곧 (진짜) 현실이 있고, 가상현실이 있다, 혹은 자연 현실이 있고, 인공 현실이 있다. 플라톤이라면 이를 원본과 사본, 여하튼 진짜와 가짜의 관계로 볼 것이다. 이는 현실(現實)과 가상현실(假想現實, 仮想現實)이라는 일본어 번역에도 잘 나타나 있다(거짓 假, 대한민국학문의 메이지 효과). 관건은 이들 각각의 존재론적 위상을,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플라톤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存在, being)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무지와 착각, 속임수 등으로 인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現象, appearance) 사이의 구분이다. 존재는 현상의 원인이며, 현상은 존재가 발생시킨 효과이다. 존재가 1차적 근원적이며, 현상은 2차적 부수적이다.
4. 서구 근대의 인식론자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존재의 증명 근거를 우선 ‘먼저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질 수 있다’, 곧 시각 및 촉각에 두었다(Esse est percipi). 오늘날에도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말할 때 근거로 드는 것은 대강 이러한 버클리의 논리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무도 보지 않고 만지지 않을 때 그 대상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버클리는 ‘늘 보고 지각하는 자’ 곧 신을 끌어들인다(Esse est percipire).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신학적 논증을 더 이상 타당 근거로 제시하기 어렵다. 나아가, 이러한 논증의 난점은 가령 ‘더 이상 감각되지 않는 세계’를 다루는 오늘날의 물리학을 생각해보면 극단적으로 두드러진다. 양자나, 중성자를 보고 만진 사람이 있는가? 물론 이것들은 설명을 위한 이론적 가설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근거한 순전한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며, 따라서 아예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5. 우리는 현실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곧 실제 존재하는 세계로, 가상현실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계, 곧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프트웨어 조작으로 인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지각되는 세계로 바라본다. 이 경우, 자연은 존재이고, 인공은 가상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핵심에는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 그 자체라는 매우 순진한 소박실재론(naïve realism)이 깔려 있다. 이는 마치 가시광선만이 자연적이며, 비가시광선, 가령 자외선이나 적외선은 자연적이지 않다는 식의 인식론적 인간중심주의를 전제로 한 논의이다. 이른바 가상현실은 우선 시각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지각된다, 그러나 가서 만져 보려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시각은 착각, 곧 잘못된 지각이며, 촉각이 참된 지각이다. 시각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물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따라서 시각은 착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버클리는 자신의 이론을 관념론(idealism)이 아닌, 비(非)물질주의(immaterialism)라는 용어로 즐겨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적절한 지칭이다.
6. 그러나 현대 뇌과학과 생리학이 잘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촉각 역시 우리 뇌 속에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다(영화 <매트릭스>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관념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두 개의 개별적 세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오류를 줄이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가시광선과 비가시광선의 예가 잘 보여주듯이 이는 모두 결국 자연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논의이다. 일반적으로는 가상현실은 인공현실이며, 인공현실은 자연현상이 아니라고 이야기되어 진다. 곧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시각적으로 지각되나 촉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인공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논의의 근본에는 자연현실이 원래 그대로의 근본적 상태이고, 가상현실, 인공현실은 부수적 형태, 이차적 형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그러나, 앞으로는 아마도 촉지 가능한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소프트웨어가 나올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이때 현실 세계와 가상세계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그러나 훗날 가령 간의 세포를 이식,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간(肝)의 실제 자연 세포와 동일한 구성을 갖고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간세포 그 자체를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할 때, 이러한 인공간은 자연간과 완벽히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완벽히 동일한 기능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간세포가 아닐까? 이때 자연과 인공의 차이란 무슨 의미일까?
7. 그러나 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가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라, 특정 문명, 특정 시대의 특정 관념에 의한 자연의 특정 해석이다. 자연과학은 자연 그 자체의 체계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한 인간 관념의 체계이다. 따라서,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존재하게 된다. 인공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가령 ‘자연’(the natural)과 ‘자연 아닌 것’을 더하면 전체집합이 나올 것이다( + =U). ‘자연이 아닌 것’에는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지만, 대강 초자연, 신, 인공, 여하튼 ‘비(非)자연’으로 지칭될 수 있는 무엇일 것이다. 이 비자연(the non-natural) 중의 하나가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인공(the artificial)이다. 초자연적인 무엇을 믿지 않는 무신자론자라면 ‘자연+인공(인위)=전체집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우리 상식의 논리이다. 자연현실로서의 진짜 현실이 있고, 인공적으로 만든 가짜 현실로서의 가상현실이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갈파한 대로, 실은 자연도 현실도 모두 ‘외부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우리가 비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령 초자연, 신, 인공도 실은 모두 ‘자연’의 일부가 아닐까? 가상현실은 현실의 바깥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가 아닐까? 혹은 가상현실은 자연현실의 일부는 아니더라도, 여하튼 현실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가 자연과 현실의 외부라고 생각하는 것들, 초자연, 신, 인공이 모두 실은 그 내부의 요소들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바깥’이 실은 나의 ‘안쪽’이 아닐까? 이러한 큰 자연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바깥이 없는 하나의 구조 혹은 체계, 따라서 무한히 생성되는 내부의 차이(화)들만 존재하는 우주, 곧 하나의 장을 이루며 무한한 전체적 효과들을 발생시키는 우주, 하나의 우주(universe)가 아닌 복수의 다중우주(multiverse), 곧 카오스모스(kaosmos)가 아닐까? 이제 원본인 하나의 자연 현실세계가 파생시킨 복수의 카피들(複寫本들), 인공적인 가짜 가상현실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본들(아니, 원본과 사본의 이분법 자체가 파괴되었으므로 더 이상 원본들이라 불릴 필요도 없는), 그저 가상들, 시뮬라크르들(simulacres), 환영들(phantasma)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8. 들뢰즈의 이러한 차이화/미분화(différenc/tiation), 주름작용(plissement)의 논리와 푸코의 이중ㆍ분신(分身, double)의 논리를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자기 동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고유한 타자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논리이다. 이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주체 그 자체와, 양자 사이에 올바르게 설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인식에 대해서도 여실히 타당한 논리이다. 주체-대상-인식(혹은 매체media)이라는 세 실체가 이루어내는 기존의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이제 주체화-대상화-인식형성(매체형성mediation)이라는 생성적 곧 시공간적 현실태의 논리 아래 새롭게 구성된다. 결국 자연과 외부, 현실과 외부는 더 이상 자연과 인공, 현실과 가상(비현실)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이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타자성의 논리는 자연과 현실 그 자체에도 적용되어 자연이 비자연과, 현실이 비현실과 동시적ㆍ상관적으로 구성되는 쌍둥이의 한 쪽이었음을 드러내준다. 내가 인공을 무엇이라 규정하는가는 내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준다. 내가 가상을 무엇이라 규정하는가는 내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준다(구조주의, 혹은 色卽是空, 空卽是色).
9. 1960년대까지의 푸코와 들뢰즈는 어떤 면에서는 ‘쌍둥이 철학자들’이라 불려도 크게 트린 말은 아닐 것이다. 푸코는 1960년대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논의를 제안한다. 푸코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란 ‘주어진 사회 공간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그 기능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단독적[특이한](singulaire) 공간’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유토피아(utopie)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적인 동시에 신화적인’ 공간들,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곧 ‘일종의 반(反)[대항] 공간’(contre-espaces)이다. 이 대항공간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contestations)를 수행하는 [...] 다른 공간들, 다른 장소들’,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들’이다. 푸코의 대항공간, 곧 헤테로토피아는 한 사회에 의해 정상적이라 규정되는 지배적 동질성ㆍ정체성의 논리를 파괴하고 이제까지 비정상적이라 규정되어 온 이질성ㆍ타자성을 구출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10. 이러한 헤테로토피아 곧 타자성, 이질성 논리의 본질은 푸코 이후의 동성애 담론이 보여주는 지배적 양상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이 정상적 자연이며, 동성애자들이 비정상적 비자연이므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의 유일한 배타적 자연성, 보편성, 정상성을 주장하며 이성애의 반자연성, 반보편성, 병적 비정상으로 규정하지도, 이성애자들에게 동성애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동성애자는 그저 자신들을 내버려두기만 해달라고 말한다. 이것이 푸코 이후 동성애 담론의 민주성이다. 헤테로토피아의 논리는 다수의 보편성에 대항하는 저항의 보편성이 아니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널리 퍼져 있으나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지배적인 큰 동질성 곧 호모토피아(homotopie)에 저항하는 작은 호모토피아가 아니다. 헤테로토피아는 보편성 개념 그 자체를 파괴하는 이질성ㆍ타자성의 논리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른바 모든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적, 정상적 호모토피아가 실은 그 자체로 본질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정상적인 것도 아닌 그저 무수히 가능한 헤테로토피아들 중 단 하나의 헤테로토피아, 곧 일련의 역사적 우연들이 빚어낸 하나의 정치적 효과, 생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1. 이러한 헤테로토피아의 논리를 자연과 인공, 현실과 가상현실의 논리에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현실’이 실은 현실에 대한 당대의 지배적 해석, ‘자연’이 실은 자연에 대한 당대의 지배적 해석임을 이해할 수 있다(자연과 현실에 대한 해석이 권력 정당화의 궁극적 형식이다. 이들은 자신의 해석이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묘사’라고 말한다). 자연(과 인공)에 대한 해석의 역사가 곧 정치학의 역사이다.
12. 이제 아래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모두 요약해주는 하나의 역사적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자. 1630년 로마교황청은 망원경 등을 이용해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새로운 원리를 밝혔다고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로마 교황청의 사제들은 악한 인간들이 아니라 당대의 ‘학문’을 존중하는 매우 상식적인 인간들이었을 것이며, 더욱이 동시대의 인민들은 갈릴레오보다는 ‘태양이 우리 주위를 돈다’는 로마 교황청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이들이 과학ㆍ기술의 진전이 가져온 성과와 당대의 상식적 세계관이 충돌할 때 후자로 전자를 심판하는 우를 범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의 과학적 성과를 자신의 상식적 세계관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이러한 과학ㆍ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충돌이 이제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상식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계기로 삼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의 갈릴레오들을 대하는 태도, 곧 장기이식, 인간복제, 대표적으로는 2045~2060년경에 임계점을 넘어 현실화되리라 예측되는 강(强) 인공지능의 등장, 곧 철학하는 알파고의 등장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의 현실화는 이제까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던 이른바 ‘자연/인공’과 ‘현실/비현실’의 이분법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이러한 강요의 결과 우리가 얻게 될 새로운 세계의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것, 곧 현실과 그 분신들이 지배하는 세계, 그러나 실은 원본이 되는 현실이 없이 분신들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는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에 자신의 그림자를 찍는 세계(月印千江之曲)가 아닌, 천개의 강에 찍힌 달의 그림자들이 자신의 그림자로서 하나의 달을 느슨히 그려내는 세계(千江印月之曲), 곧 천 개의 강 위에 찍힌 천 개의 달들만이 존재하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세계가 될 것이다.
2016.11.25.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ACT 페스티벌 '헤테로토피아'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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