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7.

잠언 19



0. 톨레랑스의 테러 - 지속가능한 지배를 유지하는 장치로서의 톨레랑스가 테러의 근본적인 출현 조건이다.


1. 지라르의 논의를 확장시키면,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하비 콕스의 말대로, 양심수가 바라는 것은 너그럽고 다정한 친구 같은 간수가 아니라, 감옥 자체의 철폐이다.


3. "사람들은 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예속되기 위해 투쟁하는가?" - 들뢰즈/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1972.


4.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극우들이 우파를 종북 좌파라 부른다.


5. 대한민국 정치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비밀들 중 하나는 경상도 1천만표의 존재이다. 적어도 박정희 유신 정권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바로 이 1천만표의 향배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언론인은 직업이 본질적으로 장사이고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두려우므로, 정치가들은 당선이 불가능하게 되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구조이므로 이런 사실은 결코 이슈화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불편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로 곧 모르기로 선택한다.


6. 이른바 서구 근대 이후, 비서양인들이 서양인들에 의한 지배의 상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자신과 세계를 스스로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서양인들의 해석을 따라 바라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령 이제 더 이상 한국인들은 자신의 조상인 원효나 퇴계, 다산처럼 세계를 자신의 눈과 이론으로 바라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뉴튼과 아인슈타인, 칸트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에게 맡겨버린다.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이 가련한 동시에 어리석은 이들의 모토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이론은 서양분들이, 도덕적 실천의 순수성과 자괴감은 우리가!"

이때 무지하고도 순수한 개땅쇠 훈장들은 그러니 서양이 아닌 우리 것, 동양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것이나 이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동양'이란 말 자체가 서구의 규정으로 서양/동양의 쌍둥이 구조를 갖도록 구성된 짝패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므로 실제로는 서양에 의한 자신의 대상화라는 지배 구조를 강화하고 말 뿐이다.


7. 철학이란 길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길을 열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직 덜 여문 철학, 설익은 철학이다.


8. 너는 살아있으며 생각하는 인간인가? 그렇다면 너의 이론을 제출하라!


9. 허지웅이 '대안이 없으면 이견을 말하지 말라'는 말의 기만적 허구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 대안을 제출할 능력이 없는 98프로의 대중에게 이의제기마저도 하지 말라는 말은 기득권 구조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만적인 주장이며, 사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주장을 내놓았던 자들이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기억한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대안없는 비판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공공선'을 찾아가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토론과 투쟁을 위한 첫걸음이자 필요조건이다.


10. '이론'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주의적 관념 세계의 궁극에 상당하는 일본어이다. 한번도 관념과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신뢰한 적이 없는 동아시아인들이 오늘날에도 이론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자문화중심주의에 기반한 조건반사적 행동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아주 무근거한 행동만은 아니다. 그들은 천지에 내재하는 상황적 판단력으로서의 옳음이 아닌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관념의 이상태로서의 이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참다운 사유가 자신이 살고 바라보는 삶을 '추상화'하는 것이듯, 오늘날의 동아시아철학은 이론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작업, 재규정 작업에 몰입해야 한다.


11. https://story.kakao.com/ch/subusunewsstory/IHX87K7br4A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이 참다운 철학이고 정치가 아닐까?


12. "괜찮아, 다 괜찮아" - 길게 보고 멀리 생각하고, 발은 여기서 가능한 한 걸음만. 


13. 소유와 존재가 둘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누구나 다 조금씩 의존하고 소유하고 집착하고 조금씩은 강박적인 존재이다. 다만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무리하지 않고 너무 강박적으로 의존하거나 너무 소유하거나 집착하지만 않으려 하면 된다. 



14. 모든 사랑은 집착이다. 그러나 집착이 곧 사랑은 아니다.


15. 니체의 위대함을 따라 - 마치 진리와 진실처럼, 사랑과 구원이 문제이다. 나는 진리도 진실도 사랑도 구원도 믿지 않는다.


16. 반증불가능한 명제 - 아버지와 문제가 있는 사람은 강박증에, 어머니와 문제가 있는 사람은 신경증에 빠진다.


17. 당신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그의 행동을 바꾸려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예스'라면 당신은 부당한 권력을 행하고 있다. 당장 바뀌어야 할 사람은 실은 당신이다.


18. 침묵하고 경청해야 할 때와 나서서 이야기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넘음!


19. 공부를 하면서도, 혹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이 배우는 것과 자신의 삶이 '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학문이 암기이고 그저 자기가 받는 수동적 인상일 뿐 어떤 능동적인 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개념의 무능력 혹은 무지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무엇을 읽어도 그저 바로 '자기 식으로'(자신의 어리석은 편견으로,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한 마디로 자기 수준에서) 정리하고 판단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실상 이들은 공부를 할수록 '반지성주의적 괴물'이 되어간다.

이들은 학문이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믿도록 조건화되고 길들여진 신념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읽고 무엇을 들어도 바로 자신의 '상식과 당연'으로 정리하고 심판한다. 실로 이들을 자기 성찰과 반성이 불가능한 '권력의지의 화신'이라 부르면 좋을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 정리하고 즉시 심판한다. 자신이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상식과 당연함만 제외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한다. 그들은 결코 무엇이 문제인지,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당연하게 느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부풀어오른 가련한 존재들이며,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것이 자기 생각도 아니며 사회에 의해 자신에게 심어진 것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들은 철학 활동이 자신의 인상에 대한 무지막지한 신뢰가 아니라 차분한 거리두기이며, 특히 그것에 대한 냉정한 검토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 누군가의 어떤 말을 듣거나 읽었을 때 그가 느끼게 되는 인상은 그 말보다는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게 되어 있는가를 더 잘 보여준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세상보다는 차라리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준다. 달리 말하면, 내가 보는 세상은 세상보다는 차라리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세계보다는 차라리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철학이란 바로 나의 '당연의 구조'를 조건 짓는 이 틀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이자 검토이다. 철학이란 나의 당연함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기보다는 나의 당연함의 구조를 이루는 이 조건들, 내게는 하도 당연하여 내가 알지도 못하는, 보통은 내가 그에 종속되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이 무의식적인 인식  조건들에 대한 탐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철학이 '자신의' 상식과 당연, 진리를 믿고, 나아가 '자신의' 진실과 양심과 정의'의 존재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 '선남선녀'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나아가 오해받고, 폄하 경멸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 중 가장 결정적이며 또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상 이러한 선남선녀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기 생각의 확실성'은 사회에 의해 그들에게 주입된 것일 뿐 그들 자신의 생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 공부를 하고 학문을 시작한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사실, 곧 자신이 이 '선남선녀'의 세계, 상식과 양심과 당연과 진실의 미신적 유아적 세계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또 다시 그들의 상식과 인상으로 제멋대로 판단하듯이 힘들고 외로운 고행이 아니며, 오히려 즐겁고 가벼운 발걸음, 혼자만의 고독한 닫힌 세계에서 함께 걷는 열린 세계에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20.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일을 겪는 당사자의 인식과 대응에 따라 전혀 다른 일로 각인된다. 따라서 현실에서 일어난 '트러블'이 최악으로 치닫거나 혹은 심지어 잘 해결된 경우에조차, 사람은 그 일이 자기 앞에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내준 소중한 기회, 곧 자신의 무의식적 인식 구조를 검토해볼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한 사람은 때로는 남탓 때로는 자기탓만 하고마는 선남선녀가 되고 만다. 그  질문은 대략 이런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21. '상식'이 생각할 때,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22. 사유의 천박성이란 도식적 이분법이다. 타락한 '현실'을 바로 잡아보려는 '나', 혹은 저주받은 나와 아무 생각없이 행복한 그들 같은 식으로!


23. "천하의 악 중에 현인을 시기하고 능력 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큰 악이 없고, 현인을 좋아하고 선한 자를 그리워 함보다 더 지고한 것은 없다." - 동무 이제마, <광제설>(1894)


24. 선생님에 관한 잠언들 http://me2.do/GQoHXcSb


25. 가장 가련한 종류의 인간들은 자기 객관화, 거리두기가 안 되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또는 합리적 역시사지의 입장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즉자적 욕망에 입각한 자기 생존의 당위만을 강변하며, 실은 모든 것을 '우기고 있을 뿐'이다.



2015.11.18.-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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