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2권
http://blog.naver.com/verbum/110158329266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 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 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59~260
2009년
8월 13일(木)
인생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8월 16일(日)
* 사랑도 압제가 될 때에는 해방의 대상일 뿐이다.
* 대오大悟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무여대오無餘大悟를 말하는 돈오자頓悟者는 궁극적으로 사기꾼이다.
9월 11일(金)
* 사람의 과거는 결코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그것을 아름답게 이상화하는 자는 모두 오늘을 잘못 살고 있는 자들이다. 과거가 미화되는 것은 오늘까지의 삶이 퇴행적退行的이기 때문이다.
9월 16일(水)
철학이란 궁극적으로 체계가 아니다. 체계가 되면 그것은 한정되고, 도그마가 되어버린다.
10월 11일(日)
* 나의 몸에 관한 정보는 반드시 나 스스로 증득證得해야 한다. 그리하면 체질론의 금기도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다. 건강에 관한 시중의 정보는 아무리 과학적 검증을 빙자해도 모두 알고보면 의료식품 산업로비와 조작의 결과이다. 건강에 관한 정보는 근원적으로 보편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다양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의 상황성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보'는 몸의 리듬을 무시한 무시간적 관념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텔레비젼을 꺼라!
10월 14일(水)
* 인간은 심오한 타인의 내면에 직접 관여하면 안 된다.
10월 21일(水)
* 합리적 사고란 전체를 보는 것이다.
10월 22일(목)
* 이 세상엔 참 가슴아픈 일이 많다. 인간이 너무도 억울한 일로 터무니없는 좌절을 당했을 때 우선 자신의 정결함으로써 마음의 건강을 다스려야 건강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쓰라림을 되돌아보지 말고 다가오는 앞날의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다. 억울한 일은 반드시 풀린다. 그 억울함 때문에 오늘의 '나'가 다쳐서는 아니 된다.
10월 26일(月)
*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사람, 그러면서 친절과 호의를 베풀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신병자들이다. 타인의 인생은 그 본인의 도움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하여 진지한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평소에 멀쩡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죄악이다.
* 특히 '인간은 구원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성직자야말로 구원이 대상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the object of Salvation)이 아니라 삶의 주체(the subject of Life)이다.
* 구원의 열정에 빠진 사람들은 암암리에 타인의 불행을 희구한다. 행복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아량이 없으며 무엇인가 불행의 씨앗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본다. 그래서 한 꼬투리라도 발견하면 구원의 친절을 베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행복하고 유복한 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기존재의 우위를 확인하고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대개 모든 종교의 본질이다. 구원의 기쁨이란 저주의 기쁨이요 마녀의 희열이다.
10월 27일
* 편식은 건강의 첩경이며, 편식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최악이다. [...] 음식은 적절하게 몸 컨디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과 똑 같다. 그 선택은 편식이다. 편식을 잘하는사람, 그러니까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편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 한국의 지성이라고 한다면 어느 전공을 하는 사람이고를 막론하고 주희와 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근사록>>과 양명의 <<전습록>> 이 두 권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사록(집해)>>은 이광호 역주로 아카넷에서, <<전습록>>은 정인재, 한정길 역주로 청계에서 출판되었다. 둘 다 공들인 번역이다. 읽을 만하다.
11월 2일(월)
*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학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스승을 만드는 것이다. 학생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라 사회에서 스승 노릇할 수 있는 인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기學記>의 논지이다.
2a-2.
송나라에 자기 밭에 파종한 싹이 영 빨리 자라나지 않는 것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밭에 가서 싸을 일일이 다 조금씩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 올라오는 것을 일일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 밭으로 달려가 보니, 아뿔싸 싹들은 이미 다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가 송나라 사람들의 우화 같고 남의 얘기 같지만, 실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기氣를 배양하는 것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조장하는 것은 밭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으로 무익하다고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요,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239~240).
천하를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지지를 얻으면 곧 천하를 얻는다. 인민의 지지를 어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마음을 얻으면 곧 인민의 지지를 얻는다. 인민의 마음을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이 진실로 소망하는 것을 주고 들을 위하여 저축해둔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싫어하는 것은 주지 않는다. 그뿐이다. 그 이상의 복잡한 처방은 없다.(4a-9, 398~399)
인仁은 사람의 가장 안전한 집이다. 의義는 사람의 가장 바른 길이다. 그토록 안전한 집을 비워놓고 그집에 살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토록 바른 길을 저버리고 그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슬픈 비극이리오!(4a-10)
4a-18.
공손추가 여쭈었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기의 친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하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면 반드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게 되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른 도리로써 가르치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시니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바른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서로가 서로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서로를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들을 교환하여 가르쳤으니, 이것은 부자 간에 선善을 강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자간에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슬픈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415)
이 장 역시 지극히 섬세한 인간의 일상적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유교의 정감주의 Emotionalism 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걸작 파편이라 할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이성적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포괄하는 정서의 유기적/총회적 관회關懷 emotional total care 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418).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15-29)
"나는 분발치 아니 하는 학생을 계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의심이 축적되어 고민하는 학생이 아니면 촉발시켜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7-8)
"같은 냇물이라도 맑으면 갓끈을 빨고, 흐리면 더러운 발을 씻는다. 이것은 물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다."<<상서>>, <태갑>(2A-4)
공손추가 여쭈었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기의 친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이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해야 한다. 그것이 잘 행하여지면 문제가 없지만, 바른 도리로써 하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면 반드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게 되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른 도리로써 가르치시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시니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바른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서로서로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서로를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들을 교환하여 가르쳤으니, 이것은 부자 간에 선善을 강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자간에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그보다 더 큰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415)
1-2.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데서 계신戒愼하고, 들리지 않는데서 공구恐懼한다.
-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남들이 보든 말든, 듣든 말든 나 홀로 항상 계신하며 두려움을 갖는 것을 말한다. 결국 '중용'이란 내 존재의 내면의 심화이다(240~241).
1-3.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한다.
- <<중용>>에서는 '숨은 것'과 '미세한 것'이 궁극적인 긍정적 가치로서 언급되고 있다. 숨음과 드러남, 미세함과 나타남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섭되는 것이다. 숨음처럼 잘 드러남이 없고, 미세함처럼 잘 나타남이 없다. 따라서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고 나타낼 필요가 없다. 숨어 있고, 미세한 곳에서 인간 본래 모습의 최대치를 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명을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정도이다. [...] '은미隱微함'이 곧 '홀로있음愼獨'이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의 축복이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하고 하늘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있을 때,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은미한 디테일이 다 수도修道의 대상이 될 때, 그때를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삼가함은 신중함이다. 삼가함은 자기 절제며, 자기 발견이며, 자기 주체의 심화과정이다. 그것은 쉼이 없이 전개되는 주체의 심화과정ever-deepening process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나댐'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주체의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그 검은 바다 속 수 천 미터 아래로 잠수해 내려가는 잠수부의 고독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독'이다.
'신독' 사상은 <<주역>>의 대과大過 괘卦의 상전象傳에도 이런 말로 나타나고 있다: "군자는 위기의 상황에서 홀로 서도 두려움이 없으며, 세상을 등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답답함이 없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성의誠意'의 맥락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뜻을 성실하게 한다" 즉 마음의 지향성을 바르게 갖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악취를 싫어하듯 악을 미워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듯 선을 사랑하는 그 진정성을 보지保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겸自謙'이라 불렀다. <<대학>>에서는 일차적으로 "신기독愼其獨"의 의미를 "홀로 있을 때의 감정을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중용>>의 신독사상이 훨씬 더 포괄적인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고 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독'은 개인의 내면적 사태이므로 사회적 결과에 의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일체의 공리주의적 윤리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 주희장구 朱熹章句
'은'은 어두운 곳이다. '미'는 미세한 사건이다. '독'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자기만 홀로 아는 어떤 경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세미細微한 사건들이 그 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태에서 동태로 바뀌어가는 그 미묘한 갈림길을 타인들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즉, 천하의 사태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보다 더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계구하고 여기에 더욱 삼가함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욕人欲이 싹트려고 하는 것을 미리 막아서,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 자라나서, 도로부터 멀어지는데 이르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다(242~246).
14-3.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 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 윗자리, 아랫자리라는 외적 상황성을 극복하는 실존의 본질태는 '정기正己'이다. 즉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정기'는 곧 나의 실존적 상황의 책임을 타인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곧 '불구어인不求於人'이다.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15-20). 이러한 논리를 구극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타의 궁극은 곧 종교적 '타자'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존재의 책임이나, 실존적 상황의 원인을 나라는 존재 이외에서 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용>>의 심오한 논리이다.
[...]
공자나 [공자의 손자이자, <<중용>>의 저자인] 자사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원초적 '하늘天'의 개념은 분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근원을 인격적 하느님이라는 존재자에게 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사에게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적 개념은 '천지天地의 종교Tian-Ti Cosmos Religion'이다. 우선 이 천지의 종교에 있어서는 기존의 여하한 인격적 개념도 거부된다. '천명天命'의 '천天'은 이미 인격적 존재자가 아니며, 더더욱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투영일 수 없다. 인간의 종교적 감정은 특정한 '존재자'로부터 '천지'라는 대생명의 전체의 장으로 확대된다. 하느님이 근원적으로 탈존재화脫存在化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전체의 장場의 축약태로서 마이크로코스모스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주적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타자the Other라는 객체가 소실된다. 이것이 '정기불구어인正己不求於人'이라고 하는 의미의 본질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타자화된 욕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는 자사의 사상은 '신독' 사상의 궁극적 귀결처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나 기타 여하한 신비주의도 이구동성으로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를 말한다. 그러나 자사는 나 존재로부터 모든 타자를 절대적으로 무화無化시킨다. 나의 존재의 책임은 천天이나 인人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타자에게 전가의 기회를 단절하고 나 스스로 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이야말로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극상의 신비를 논구하고 있는 것이다(391~395).
* 22-1. 주희장구.
타인의 성性이든 사물의 성性이든 그것이 결국 다 나의 성性이다(542).
33-2.
"시詩는 말한다: "물고기 물에 잠겨 깊게 꼭꼭 숨어 있네. 그렇지만 물이 맑아 너무도 밝게 잘 보여라!" 이와 같이 내면을 숨길 길이 없으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보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그 마음의 지향하는 바가 미움 살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범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군자의 훌륭한 점은 오로지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그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이로다!"
- 자사 논의의 핵심은 군자의 지적 통합판단이나 도적적 정직성은 결국 사회적인 승인으로써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홀로의 내면적 판단에서 우러나오는 고독한 실존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629~630).
33-3.
"시詩는 말한다: "그대 방에 홀로 있을 따라도 하느님께 비는 제단 있는 저 구석에서 남이 안 본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말지어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어 자기를 뽐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도 사람들이 믿음을 준다."(630).
33-4
- <<순자>> <불구>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군자는 지극한 덕을 구현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심중을 모든 사람들이 헤아릴 줄 알고, 구태여 은혜를 베풀지 않아도 그에게 친밀하게 가까이 가려하며, 진노를 보이지 않아도 그의 위엄을 존중한다. 대저 사람들이 와 같이 그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가 신독을 실천하기 때문이다."(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