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사람의 길(상)> - 김용옥
2a-2.
송나라에 자기 밭에 파종한 싹이 영 빨리 자라나지 않는 것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밭에 가서 싸을 일일이 다 조금씩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 올라오는 것을 일일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 밭으로 달려가 보니, 아뿔싸 싹들은 이미 다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가 송나라 사람들의 우화 같고 남의 얘기 같지만, 실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기氣를 배양하는 것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조장하는 것은 밭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으로 무익하다고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요,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239~240).
대학시절 이 귀절을 읽은 이후, 나의 삶은 이른바 '남을 돕는다'는 것의 위험성, 그리고 사실은 자기 중심성에 대한 경고를 명심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말하는 규율에 의한 인간 교화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이미 이 맹자에 나와 있다고 보여진다. 이 문장은 내게 비단 맹자 사상만이 아니라, 교육철학 일반의 제일 원리로 보인다.
천하를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지지를 얻으면 곧 천하를 얻는다. 인민의 지지를 어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의 마음을 얻으면 곧 인민의 지지를 얻는다. 인민의 마음을 얻는 데 방법이 있다: 인민이 진실로 소망하는 것을 주고 들을 위하여 저축해둔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싫어하는 것은 주지 않는다. 그뿐이다. 그 이상의 복잡한 처방은 없다.(4a-9, 398~399)
인仁은 사람의 가장 안전한 집이다. 의義는 사람의 가장 바른 길이다. 그토록 안전한 집을 비워놓고 그집에 살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토록 바른 길을 저버리고 그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슬픈 비극이리오!(4a-10)
4a-18.
공손추가 여쭈었다: "예로부터 군자는 자기의 친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는데,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 그러합니까?"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은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하는데 자식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면 반드시 분노가 일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게 되면 오히려 자식을 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식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른 도리로써 가르치려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시니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바른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서로가 서로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서로를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들을 교환하여 가르쳤으니, 이것은 부자 간에 선善을 강요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자간에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슬픈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415)
정말 탁월한 말이다. 선의 강요! 상대를 위해서 대신 판단해준다는 생각은 - 그가 누구이든, 설령 부자 간이라 하더라도 - 사실은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위하여 대신 선을 판단해줄 수는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주의를 합리화,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장 역시 지극히 섬세한 인간의 일상적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유교의 정감주의 Emotionalism 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걸작 파편이라 할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이성적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포괄하는 정서의 유기적/총회적 관회關懷 emotional total care 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418).
<논어한글역주 세트> - 김용옥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15-29)
"나는 분발치 아니 하는 학생을 계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의심이 축적되어 고민하는 학생이 아니면 촉발시켜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7-8)
"같은 냇물이라도 맑으면 갓끈을 빨고, 흐리면 더러운 발을 씻는다. 이것은 물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다."<<상서>>, <태갑>(2A-4)
이성복이 <<논어>>를 읽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책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태어나 그 '당연' 안에서 성장했으니 일견 당연한 말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아무 말없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 그러나 사실은 내가 느끼는 이 후자의 소회 역시 전자의 이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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