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3.

근세조선정감 上








 
박제형 / 이익성


"정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책은 철종이 즉위하던 때부터 시작되었고 중점은 대원군의 인물됨과 그의 시정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수정의 서문을 보면 "일본인 궁천씨가 나에게 조선정감 두 권을 보이면서 서문을 청하는데, 곧 이순이 짓고 배차산이 평한 것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감은 원래 상하 두 권으로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권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고, 역자의 과문인지는 모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정감 저자가 기록한 연대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 수가 없다."

- 이익성의 <역자해제>, 4쪽

"조선 근대사에 대한 서적을 얻어 읽을 수가 없다."(朝鮮近代之史 不可得而讀, 119쪽)

- 배차산의 <근세조선정감 서>의 첫문장(11쪽)



***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책은 '근세'와 '근대'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국내 문헌이다.

modern의 일어 번역 '신한어'인 '근세'라는 말은 니시 아마네의 1784년 저작 <<백일신론>>에 처음 보이고, 역시 같은 용어를 번역한 '근대'는 오히려 그보다 1년 빠른 1873년 아리마사학교에서 나온 영일사전 <<영화장중자전>>에 처음 나온다.

우선, '근세'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우리나라 문헌으로은 - 물론 다른 글에서도 앞으로 더 나올 수도 있지만 - 1886년 발간된 이 책이 최초로 보인다.

더욱이 이 글이 발간될 당시 함께 수록된 배차산의 <서문>에는 '근대'라는 말조차 나온다! - 우리말 번역본에 부록으로 실린 원문 119쪽에 나온다.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인터넷에서 찾으니 모두 절판인데 오직 교보에만 아직도 있었다. 당장 주문하여 읽는 중인데 이런 뜻밖의 큰 수확을 얻었다.

이런 때 나는 - 가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아무도 지나지 않는 어느 시골의 낡은 무덤 안 창고에서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편> 양피지를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러한 작업에 바보같은 그러나 행복한 스릴과 보람을 느낀다.

물론 이보다 이른 근세 혹은 근대의 용례가 박영효 등이 1884년 경부터 적은 국한문 혼용체 혹은 한글일기, 김옥균 혹은 서광범, 박영교 등의 글에 등장할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이런 조사 작업은 국내에서는 이전에 - 글자 그대로 - 아무도 수행한 적이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용례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러한 용례가 보여주는 의미상의 차이에 따라 moderne의 일어 번역어인 근대와 근세의 국내 수용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