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 있다, 고로 죄가 있다.” -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서평] “나는 살아 있다, 고로 죄가 있다.” -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 아우슈비츠는 인류에게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구에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다. 아우슈비츠는, 그것의 끔찍한 스케일만큼이나, 하나의 서구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보편사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혹은 적어도 자신들이 스스로 설정한 ‘근대’ 이래, 모든 면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서구 혹은 서양은 범죄와 죄악의 측면에서도 양과 질 양면에서도 역시 압도적인 대표성을 보여준다. 위대한 서양은 아우슈비츠조차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인류 전체의 역사를 ‘공정하게’ 기술하려는 미래의 역사가가 있고, 그녀가 아우슈비츠를 오직 하나의 서구적 현상으로만 파악하여 인류 보편사의 기술에서 제거한다면, 이는 분명 말도 안 되는 불공정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따라, 오늘의 공정한 기술 역시 다음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우슈비츠가 서구의 현상이었기 때문에만 오늘날 그것이 갖는 대표성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가 동시기 비서구의 어느 곳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면, 아우슈비츠는 과연 자신이 오늘 누리는 대표성을 갖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다, 혹은 없다가 되어야 마땅하다. 아우슈비츠로부터 아우슈비츠를 구해내야 한다.
2.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런 ‘새로운’ 관점은 아우슈비츠를 모독하는 위험한 일일까? 아도르노는 불행히도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앵무새 지식인들이 되뇌는 교양, 상식이 되어버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물론 수사학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인들은 시를 쓴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시는 아우슈비츠 이전보다 더욱 더 필요한 무엇인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도르노의 지적은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에 관련된 질문이다. 아도르노는 묻는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하지만, 당신은,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아도르노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도르노가 아니라면, 당신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 자체를 수입하여 그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스스로의 문제의식으로 물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아도르노의 질문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렇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이라는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혹은, 아우슈비츠의 보편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무수히 들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인간을 이처럼 대량으로 살상하는 자동화 시스템, 시체 생산ㆍ처리 공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그런 프로세스, 공정(工程)이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을 오직 대상화하는 합리성, 물건으로 취급하는 합리성을 바로 아도르노 자신과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합리성의 발흥, 이성의 부식(腐蝕)이라 지칭했다. 인간의 생명 혹은 사망이 상품처럼 생산되었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이 물건처럼, 헌신짝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인간들이 취급된 방식은, 오늘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서, 혹은 대한민국에서, 동물들이 취급받고 있는 그 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들의 생명보다 더 존엄한가? 혹은 동물들의 생명은 존엄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명만이 존엄한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3. 당신은 이에 대해 반론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들이 가진 조건반사 및 정서 감수 능력에 더하여,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존엄성을 갖는다고. 하지만 인간 역시 돌고래나 보노보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가령, 인간의 고통을 돌고래와 보노보의 고통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하는가? 가능한 하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돌고래와 보노보만의 고유한 존엄성에는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존엄성의 근거 곧 이성적 능력,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돌고래와 보노보는 몰라도, 인간은 그렇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돼지와 소와 닭은 몰라도 동물계에서 상당한 지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돌고래와 보노보는 그렇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아메바와 별해캄은 몰라도, 돼지와 소와 닭은 그렇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이 논증이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이라고, 이 지점부터는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간다고, 나의 논리에 말려들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이러한 논의에서 주의 깊게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 다름 아닌 기준그 자체이다. 어떤 기준으로 아메바와 소와 돌고래와 인간을 나눌 것인가? 아메바에게는 해도 좋은 일이 소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소에게는 해도 좋은 일이 보노보에게는 돌고래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혹은 결정적으로, 보노보와 돌고래에게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인간에게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은 인간의 윤리적 판정 기준이 당신이 믿는 이른바 ‘신학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겪는 즐거움과 아픔(pleasure and pain)을 느낄 수 있는 그 존재의 쾌고(快苦) 감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공리주의의 창시자 벤담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4. 앞서 인용한 아도르노의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당신은 오늘 당신의 방안에 앉아서 이전처럼 시를 쓰고 있는가? 당신의 무지는 당신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음, 곧 비겁함과 게으름, 어리석음을 드러내주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사회과학적 인식의 결여, 세계사에 대한 무지가 하나의 논증은 아니지 않는가?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 혹은 주체를 바꾸어 기술해보자면, 어떤 인간도 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당신과 내가 모두 포함된) 구경꾼들 모두를 합하여,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일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시를 쓰는가? 또 혹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이 인간을 글자 그대로 물건으로 취급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끔찍한 일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사망을 낳는, 죽음을, 아니 시체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물화, 대상화가 극단에 도달한 것이다. 이 모든 해석을 관통하는 한 마디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이 비인간적인 일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실상 혹은 혹시, 사람들이 비인간적이라 부르는 일은 사실은 그저 늘 일어났던 일, 지금도 당신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앞으로도 늘 일어날 일이 아닌가? 혹은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인간성의 다양한 부분들 중 자신들이 보고 싶지 않은 부분, 알고 싶지 않은 부분, 알아서는 안 되는 부분, ‘모르고 싶은 부분들’을 총칭하여 비인간적이라고 낙인찍은 후, 그 일을,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그런 생각을, 내 마음 속의 성향을 처음부터 나로부터, 곧 인류로부터 삭제 혹은 소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5. 아감벤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도르노가 한 말의 참된 의미는 아마도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물론 서구적 인간중심주의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도르노가 여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실제로 밀고 나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도르노가 말한 시(詩)는 인간성의 정화(精華)로 간주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성의 정의 자체가, 아니 인간성 자체가 전면적으로 변화했는데, 당신은 여전히 그 옛날의 그 시를 쓰고 있는가? 시란 무엇보다도 한 인간 혹은 인류의 자기 인식, 세계인식이고, 또 그래야 할 터인데, 그 인간이, 그 세계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변화했는데, 여전히 그 ‘시’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할 수 있는가? 아도르노의 질문은 물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한, 곧 결정적으로 이른바 ‘시’의 본질과 의미, 더 나아가 오늘날 ‘시’가 발생시키는 기능과 효과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자리에서 묻는 이 질문이 유의미한 것이 되기 위해서,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아도르노가 이 말을 할 당시 그가 전제하고 있었을 인간 이해, 문학ㆍ예술, 특히 구체적으로는 ‘시’ 이해의 다양한 함축 및 그것의 타당성을 오늘 다시 묻는 메타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그리고 이는 아감벤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을 읽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질문이다). 이리하여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아감벤의 질문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가르는 오늘 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된다.
6. 더 나아가, 아감벤은 묻는다.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그 일은 그 일 자체의 성격으로 인하여 그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일을 증언해야 할 이들이 다 죽고 없을 때, 증언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도대체 누가 증인이 될 수 있는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만, 아감벤은 ‘그토록 지겹게 반복된’ 아우슈비츠와 그 해석의 역사를 오늘 우리 앞에 다시금 끌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서 있다. 이 ‘이슬람교도들’은 물론 진짜 이슬람교도들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통용되던 (독일어) 은어(隱語) 무젤만(der Muselmann)은 말 그대로 이슬람교도라는 의미이다. 장 아메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이슬람교도’는 수용소의 어법으로는 [...] 걸어 다니는 시체이자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는 신체적 기능들의 묶음이었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했다.”(61) 보통, 인간이 자기 평소 체중의 1/3 가량을 잃게 되면 신체 기능이 하나씩 죽어간다고 하는데, 수용소에 대한 전후의 한 보고서는 이슬람교도들을 의학적 관점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체중감소가 계속되면 [...]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기간의 길이에 따라 크고 작은 부종浮腫에 시달렸다. [...] 언제나 서 있었기 때문에 몸 안의 모든 액체들이 몸 아랫부분에 모였다. 영양부족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지면 부종들도 크게 늘어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계속 서 있어야만 했던 사람에게서 특히 더 심했다(처음에는 다리 아랫부분에, 그런 다음에는 등과 고환에, 심지어는 복부에도 생겼다). 부기가 생기면 대개 심한 설사가 따랐고, 또 설사가 있고 나면 대개 부종이 진행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그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일에 무관심해졌다. 그들은 주위와의 모든 관계로부터 스스로 차단되었다. 아직 돌아다닐 힘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동작은 굼떴고, 무릎을 굽히지도 못했다. 그들은 몸을 와들와들 떨곤 했는데, 이는 체온이 보통 37 〬C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고 있으면 꼭 아랍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미지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우슈비츠에서 사용된 말인 ‘이슬람교도’라는 말의 발단이었다.”(63-63) 같은 보고서는 그들의 처우에 대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나치 친위대원은 천천히 걸으면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이슬람교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나무 족쇄를 질질 끌면서 걸어가던 그 중생은 곧장 가더니 친위대 사관을 쿵 하고 받고 말았다. 그러자 그 사관은 버럭 고함을 치면서 그의 머리에 채찍질을 한 번 했다. 그 이슬람교도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두 번째 채찍을 맞고, 또 모자를 벗는 걸 잊어버렸다는 이유로 세 번째 채찍을 맞고 나서야 모자를 벗는 시늉을 했는데 그러면서 그만 설사를 하고 말았다. 그의 족쇄가 까맣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똥물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그걸 본 친위대원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그 이슬람교도 위로 몸을 날리더니 그의 복부를 있는 힘껏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 가여운 자가 자신의 배설물 위에 쓰러졌는데도 친위대원은 머리와 가슴을 계속 때렸다. 이슬람교도는 무방비 상태였다. 첫 번째 발길질에 채이고 그의 몸은 두 겹으로 접히더니 몇 대 더 맞고는 그만 죽어버렸다.”(62) 따라서, 이슬람교도들을 포함하여, 수용소에서 죽은 자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죽었으므로, 증언할 수 없다. 그리고 아감벤은 묻는다. 이렇게 증언해야 할 자가 죽고 없을 때, 바로 그때, 증언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역사적 정치적 질문인 동시에, 존재론적 인식론적 질문이다.
7.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구해가면서 아감벤이 가장 먼저 천착하는 것은 - 기묘하게도, 가해자들보다는 - 오히려 피해자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묘한 감정 곧 부끄러움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 곧 생존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편이나 저편이나[가해자나 피해자나] 인간적이지 않기는 똑같았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비열하기는 매한가지다. 수용소의 교훈은 비참 속의 형제애이다.”(23) 물론 주의해야 한다. 가해자들은, 이렇게 말할 자격도 없지만, 이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명령에 의해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었음’을 강변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냐고,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라’고 되묻는다. 이것은 가해자들의 논리이다. 물론 피해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히만이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그를 사형시켜 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같은 곳)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사에는 법률적 판단이 다루지 못하는, 보다 정확하게는, 감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진실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실의 문제quaestio facti는 법의 문제quaestio juris로 축소될 수 없다.” 윤리(학)적 범주들과 법적 범주들을 암묵적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법의 유일한 목적은 판결의 효력을 지니는 것, 곧 기판력(旣判力, res judicta)의 산출이다.(23-24) 이러한 혼동이 아우슈비츠에 대한 법적 판결의 완료를 아우슈비츠의 종료로 보는 잘못된 관점을 낳았다. 아우슈비츠라는 문제가, 단지 그것에 대한 법적 판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문제 삼을 만큼, 그리하여 법 자체를 파멸로 끌고 갈 만큼 엄청난 것임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26) 하나의 변신론(辯神論)적 질문, 곧 ‘하느님이 어떻게 아우슈비츠를 참아낼 수 있었을까?’를 묻고, 결국 그(신)를 용서하는 한스 요나스, 더 나아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오류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혼동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26-28).
8. 그 자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말하는 ‘회색지대’, 곧 ‘(가해자들 아니라) 피해자들, 생존자들이 느끼는 이 기묘한 부끄러움, 피해자와 가해자를 연결하는 긴 사슬이 느슨해져 피억압자가 억압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로 나타나는’ 이 지대는 ‘선과 악이,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전래의 윤리(학)를 구성하는 모든 재료들이 용융점에 이르는, 부단한 회색의 연금술’의 지대이다. 이 지대, 이 영역은, 선과 악의 너머가 아니라, 선과 악 앞에 있는 무책임과 판결 불능의 영역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책임(責任,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 spondeo에서 유래한 것으로 ‘누군가의 보증(인)이 되어주다’라는 의미이며, 고대 로마에서 이러한 보증인은 어떤 잘못의 보상이나 어떤 의무의 완수를 보증하기 위하여 스스로 법적 책임을 지는 자이다. 따라서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말은 어원적으로 법적인 일차적 의미를 갖는 용어이지, 윤리학적인 용어가 아니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는 아이히만 변호인의 말, 그리고 ‘상응하는 법적 결과들을 감수하지 않은 채 정치적 또는 도덕적 책임만을 지겠다.’는 말은 항상 힘 있는 자의 오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28-31)
9. 이는 그 자신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이는 ‘가공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의 평범성’이 드러나는 지대이다(29).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에서 몇 년 전 공쿠르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상 소설 부분의 수상작으로 동시에 선정된 조나탕 리텔의 『착한 여신들』(랜덤하우스)을 강력히 추천한다(리텔은 수상을 거부했다). 나치 장교로, 전후 신분 세탁에 이은 위장에 성공하여, 은퇴한 사업가로 살아남은 노년의 주인공은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대체 누가 죄인일까요? 모두가 죄인일까요, 아니면 아무도 죄인이 아닐까요? 왜 독가스 관을 담당한 일꾼이 그 병원에서 보일러, 정원, 자동차 등을 담당한 일꾼보다 죄인이어야 합니까? 그 끔찍한 작전에 관련된 모든 부분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선로 번경 담당 직원이 철로를 강제 수용소로 행하게 했다고 유대인을 죽인 죄인일까요? [...] 하지만 그 선로 변경원은 유대인 박멸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유대인을 태운 열차는 B역에 도착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둬야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이런저런 행위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변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고 여러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내가 한 짓을 그대로 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덜 적극적이라면 절망도 덜 하겠지만, 어쨌든 나와 똑같은 짓을 어차피 했을 겁니다. 모든 사람,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이 강요된 상황에서는 명령받은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현대 역사에서 기정사실로 입증됐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내가 그랬듯 여러분이 예외일 거라는 행운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도 여러분의 부인과 자식을 죽이러 오지 않고, 누구도 여러분에게 다른 남자의 부인과 자식을 죽이라고 윽박지르지 않는 나라와 시대에 태어났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나보다 운이 좋은 거지 나보다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처럼 오만하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위험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 정말로 국가를 떠받쳐주는 평범한, 특히 불안한 시대에 국가를 지탱해주는 보통 사람들이 정말로 위험합니다. 인간에게 정말로 위험한 존재는 바로 나와 여러분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길게 말해봤자 소용없습니다. 대신, 여러분은 아무것도 이해 못할 것입니다. 화를 내고 분개하겠지만, 그건 여러분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착한 여신들』, I, 32-35)
10. 당신과 내가 나누는 이 악의 평범성, 그리고 그것을 보지 않기로, 생각하지 않기로, ‘모르기로’ 결정했던 그 선택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본 조건이 아닐까? 내가 유학했던 프랑스의 아름다운 중세 도시 스트라스부르 근처에는 프랑스의 수많은 나치 강제수용소들 중 하나가 있다. 스트뤼트호프(Struthof)라 불리는 이 수용소에는 주변의 소규모 수용소들을 포함하여 대략 통틀어 52,000명 가량의 수용자가 수감되어 있었고, 그들 중 22,0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뤼트호프는 스트라스부르 시내에서 자동차로 넉넉잡고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나지막한 산 속에, 험준한 산 속이 아니라, 그저 나지막하고 평범한 산의 ‘뒤편에’ 있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스트뤼트호프를 두 번 정도 방문했는데, 두 번째 방문은 어느 12월 초순 경이었다. 그리고 내가 스트뤼트호프의 인체 해부실, 교수대, 소각장을 방문하고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스트라스부르 시내로 돌아왔을 때, 거리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전통적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상점과 거리에는 온갖 밝고 아름다운 전등과 장식물이 내걸려 있었다. 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손에 든 선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생각했다. 나치가 집권하던 1040년 대 초반의 12월에도, 수용소로부터 이렇게 가까운 스트라스부르 시내에는 이처럼 밝고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전등과 장식물들이 장식되어 있었겠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또한 깨달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밝은 아름다운 전등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오늘도 오늘의 수용소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보여주는 악의 평범성, 이 진부함. 나의 악의(惡意) 없는 일상에 의해 창조되고 지속되는 이 거대한 악.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참여하고 분유(分有, participatio)되는 이 악의 보편성.
11. “살아남은 자의 소명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7) 이슬람교도는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문턱’을 드러내주는 존재이다. 수용소라는 상황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한계상황이다. 한 인간이 한계상황에 이르는 순간, 곧 수용소의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그는 ‘인간성과 책임’을 버리도록 강제된다.(83) 그러나 이때의 한계상황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어떤 규정이 아니다. 오히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설정하고 모든 혹은 대다수의 인류가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면, 그것이 증명해주는 바는 인간의 비인간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의 불충분함과 추상성이다.”(95) 이런 의미에서,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이 참다운 인간성이며, 나치라는 비인간적인 존재들이 그것을 어떻게 유린하고 파괴했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성 자체가 새롭게 규정되어야만 할 필요성, 혹은 그러한 요청이다. 왜냐하면, “어떤 윤리(학)도 인간성의 어떤 부분의 배제를, 그러한 인간성을 보는 게 아무리 불쾌하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96) 따라서 ‘죽음이 사소하고 행정적인 일상이 되는’ 이곳, ‘임종과 임종의 그 방식들이, 죽음과 시체의 제조가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는 이곳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곳일 뿐이다(이런 면에서 프리모 레비 저서의 이탈리아어 제명 Se questo è un uomo[이것이 인간이라면]는 의미심장한 제목이 된다). 이제, 이슬람교도들은 생존자들에게 ‘망각하고 싶으나 망각되지 않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기억해야 하는 것’임에 더하여, ‘증언할 수 없으나 증언해야 하는 것, 증언하고 싶지 않으나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2. 아감벤이 말하는 부끄러움, 오히려 희생자들이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은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다. 그 자신 생존자인 엘리 위젤은 생존자들이 느끼는 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감정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나는 살아 있다. 고로 죄가 있다.” 나는 우연히, 운이 좋아서, 혹은 보다 정확히는 내 대신 누군가, 특히 나보다 더 훌륭하고 더 좋은 누군가가, 더 선한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있다. 이 감정은 오직 희생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감정이며, 가해자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감정이다.(134-135)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분석가 브루노 베텔하임은 이를 이렇게까지 밀고 나간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죄가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140-141)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강제되었던 상황에 대해서조차,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의심스럽다. 프리모 레비는 베텔하임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죄악과 과오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명의 흔적은 대지의 표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144)
13. 미셸 푸코는 자신의 생명관리정치(bio-politique) 논의를 통해, 근대 주권권력을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보다 이후의 새로운 권력 유형을 ‘살리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으로 정의했다. 푸코의 논의를 이어받은 아감벤은 20세기 생명관리정치의 새로운 정식을 ‘살아남게 하는 권력’으로 규정한다. 이제 “우리 시대 생명관리권력의 결정적인 활동은 삶의 생산도 아니고 죽음의 생산도 아닌, 차라리 생존을 생산하는데, 쉽게 변형을 가할 수 있고 또 잠재적으로 무한한 생존을 생산하는데” 있다. 이러한 권력의 최고 야망은 “인간의 몸 안에 생명을 지닌 존재자와 말하는 존재자 사이의, 조에zoē와 비오스bios 사이의,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분리, 곧 생존을 생산하는 것”이다(228-230).
14. 아우슈비츠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더하여, 아우슈비츠는 그저 한번 일어났던 사실이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차라리 “사실상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 항상 이미 반복되고 있는” 사건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아우슈비츠의 보편성, 편재성(遍在性, ubiquity) 아래, 프리모 레비의 현상학, 곧 ‘생존자와 이슬람교도, 거짓 증인과 온전한 증인,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불가능한 변증법’을 재검토한다. “증언이란 말을 못하는 자가 말을 하는 자에게 말하게 만드는 곳에서, 말을 하는 자가 자신의 말로 말함의 불가능성을 품는[견디는] 곳에서 발생하며, 그렇게 침묵하는 자와 말하는 자, 인간과 비인간은 주체의 위치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무차별의 지대, ‘나’라는 ‘상상의 실체’와 (그와 더불어) 참된 증인을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비식별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증언의 주체는 탈주체화를 증언하는 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증언은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흐름이 부단히 가로지르는 힘들의 장”이다.(180-181) 이제 증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처럼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비인간인 한에서 인간이다.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비인간을 증언하는 한에서 인간이다.”(182)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인간적인 자와 비인간적인 자는 둘이 아니다(不二).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어떤 누구, 어떤 무엇이 아니다.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란, 나로부터 분리 가능한 어떤 ‘실체’(substance)가 아니다. 내가 인간적인 자이며, 내가 비인간적인 자이다.
시 전문지 'position', 2013년 겨울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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