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르트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5.
제10절 현상학: 후설
1. 머리말: 개별 과학이 없는 철학
* 현상학(現象學): 형상학(形相學, Eidologie)이라 불리는 본질 직관(Wesensschau)에 관한 철학적 이론. 의식 주관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현상학의 목표는 ‘보편인식’(mathesis universalis) 곧 ‘체계적 학문성 일반에 관한 이론’의 기획으로, 개별 과학은 이 인식 안에서 자신의 척도를 발견한다.
19세기에 철학과 사실 간의 관계에는 점증적으로 개별과학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은 다소 이들 개별 과학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철학적으로 다시금 학문적으로 편견을 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 통로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이 같은 점에 대하여 점차로 스스로를 방어하게 되었다. 삶의 철학(니체 이래로)과 아울러 정신과학적 철학(딜타이 이래로)은 계속하여 이러한 동기를 갖는다. 이러한 사조에서는 학문성의 상실은 아닐지언정 일정한 엄밀성의 상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1900년 경 후설은 모든 개별 과학의 감독(수학의 감독을 포함하여)이 없이 그가 현상학이라 부르는 ‘현상에 대한 본질 직관의 이론’에서 직접적으로 사실에서 그리고 동시에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2. 후설의 본질직관의 철학
1) 수학으로부터 본질론으로
후설은 철학과 개별 과학의 위치를 교환한다. 개별과학은 19세기 말 상호관계에서 그리고 자신의 내용으로 철학을 소유하였다. 더 이상 개별 과학은 철학이 개별과학의 결과에 집착하도록 철학의 내용을 미리 가다듬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개별 과학은 철학을 모든 사태 영역의 원칙적인 사전 검토를 위한 심급으로 명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철학은 후설이 라이프니츠를 따라 보편인식ㆍ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이라 일컬은 ‘체계적 학문 일반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후설의 생애와 저술
(메렌의) 프로스니츠 출신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1902년 이래 괴팅겐 대학, 1916-1927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였다. 저술: 『논리적 탐구』(Logische Untersuchungen, 전2권, 1900),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에 대한 이념』(Ideen zu einer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I. Einführung in die reine Phänomenologie, 1913).
3) 사실과 본질
* 의식의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ät). 만일 의식이 대상적인 내용을 암시한다면 그것은 지향적이다. 이 경우 그것은 ‘어떤 것에 관한 의식’(Bewußtsein von etwas, consciousness of something)이다. 여기에서 의식 자체는 실재적이지만,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은 지향적, 비실재적이다. 이러한 지향적 대상에서 사실적인 것은 본질과 결합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때의 본질(Wesen)이란 ‘개별적인 대상 자체의 고유한 존재에서 자신의 무엇으로서(als sein Was) 현존하는 것’이다. 즉 사실로부터 (인식에 이르는) 길은 본질에 이를 수 있지만, 본질로부터는 어느 누구도 사실에 도달할 수 없다. 말하자면 본질 지식은 현실성에 관하여 아무 것도 언명하지 않는다.
* 더 이상 사실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본질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의식이 순수의식(das reine Bebußtsein)이다. 이 순수의식은 후설이 말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판단중지(Phänomenologische Epoche, epoché), 곧 차단, 괄호 안에 넣기를 통해서 성립한다. 여기에서 의식은 일상성, 논리학, 수학, 심리학,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그리고 신학의 관점을 배제한다. 이러한 순수의식의 비지향적 완성의 총체를 질료라 부르고, 이에 대응하는 지향적 완성 곧 활동ㆍ작용을 노에시스(das Noësis)라 부르고, 지향적 대상을 노에마(das Noëma)라 부른다. 형상(Eidos)이란 다름 아닌 이러한 노에마 혹은 노에마 집합의 핵심이다.
대상의 세계는 의식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의식은 대부분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며, 또한 ‘지향적(志向的) 의식’이라 일컬어진다. 그러한 의식은 실재하며, 그것의 개별적 실행(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실재적인 실행(활동)의 지향적 대상 자체는 실재적이지 않고 실재를 통하여 의도된 지향적인 것이며, 따라서 비실재적이다.
의식의 지향적 대상에서 후설은 ‘사실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한다. 여기서 본질은 ‘개별적 대상에 고유한 존재에서 그것의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모든 사실로부터 그것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반대로 그러한 본질로부터 사실에 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현상학은 어떠한 존재론도 아닐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도 아니다.
현상학은 지향적 객관으로서 어떠한 사실에 더 이상 직면하지 않고 단지 그러한 객관의 본질(形相, das Eidos)에 직면하는 그와 같은 의식의 종류를 발견하려는 과제를 던진다. 여기에서 후설은 순수의식을 언급한다.
현상학적 판단중지에 의해 자연적 일상성, 논리학과 수학, 심리학,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신학의 관점이 차단된 이후, 그리고 동시에, 무엇보다 먼저 그것들에 의해 야기된 의식의 피안, 곧 초월적인 것에 관한 언명조차 차단된 이후, 남는 것은 오직 순수의식, 곧 잔재(Residuum)이다.
4) 질료-의식작용-의식대상-대상
오로지 ‘순수의식’의 기초 위에서만 본질에 관한 ‘근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가능하다. 본질직관(Wesensschau)이 실제로 성립할 경우, 본질 직관은 본질 지향(본질을 직관적으로 향함)과 함께 시작되며, 자신에게 속하는 본질 지향의 충족과 아울러 끝난다. 그러나 후설에 의하면, 언제나 예외 없이 모든 경우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질을 근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의 모든 가능성 자체가 결코 본질 내용의 전체적인 충만함을 다시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에도 역시 비지향적 상태가 존재한다. 후설은 그것을 질료(Hyle) 혹은 질료적인 것(das Hyletische)이라 불렀다. 후설은 순수의식의 지향적 실행을 노에시스(das Noësis. 의미로 충만한 의식 작용)라고 부르고, 이 노에시스의 지향적 대상 내지 내용을 노에마(das Noëma. 의미로 충만한 활동의 대상)라 부른다. 결국 해당되는 노에마의 ‘대상적 핵심’으로서 대상 자체가 (그것의 본질에 따라) 노에마의 집단에 속한다.
생활세계 Lebenswelt, 삶의 형식 Lebens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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