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년 3월 14일~1961년 5월 4일)
Original Fre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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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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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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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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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tructure du comportement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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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ructure of Behavior, trans. Alden Fisher, (Boston: Beacon Press, 1963; London: Methue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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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구조』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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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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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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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Colin Smith (New York: Humanities Press, and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
trans. revised by Forrest Williams (1981; reprinted, 2002);
new trans. Donald A. Landes (New York: Routledg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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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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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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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sme et terreur, essai sur le problème communiste
(Paris: Gallimard,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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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sm and Terror: An Essay on the Communist Problem trans. John O'Neill, (Boston: Beacon Pres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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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폭력.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에세이』
박현모ㆍ유영산ㆍ이병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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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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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 et non-sens (Paris: Nagel, 1948,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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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e and Non-Sense trans. Hubert and Patricia Allen Dreyfus,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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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무의미』
권혁면 옮김
서광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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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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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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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ce et l'acquisition du langage (Paris: Bulletin de psychologie, 236, vol. XVIII, 3–6, Nov.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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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ousness and the Acquisition of Language, trans. Hugh J. Silverman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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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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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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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leau-Ponty à la Sorbonne: résumé de cours, 1949-1952
(Grenoble: Cynara,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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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 Psychology and Pedagogy: The Sorbonne Lectures 1949-1952, trans. Talia Welsh (Evanston, Ill.: Northwestern Univ. P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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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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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Relations avec autrui chez l’enfant
(Paris: Centre de Documentation Universitaire, 1951,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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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ild’s Relations with Others, trans. William Cobb,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9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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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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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loge de la Philosophie, Lecon inaugurale faite au Collége de France, Le jeudi 15 janvier 1953
(Paris: Gallimard,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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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aise of Philosophy trans. John Wild and James M.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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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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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Paris: Gallimard,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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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ntures of the Dialectic trans. by Joseph Bien,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3; London: Heineman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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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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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Sciences de l’homme et la phénoménologie
(Paris: Centre de Documentation Universitaire, 1958,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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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nomenology and the Sciences of Man, trans. by John Wild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by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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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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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loge de la Philosophie et autres essais (Paris: Gallimard,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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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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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es
(Paris: Gallimard,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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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s trans. Richard McCleary,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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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번역]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김화자 옮김
책세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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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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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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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 and Mind trans. by Carleton Dallery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by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159-190. Revised translation by Michael Smith in The Merleau-Ponty Aesthetics Reader
(1993), 12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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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마음. 메를로-퐁티의 회화론』
김정아 옮김
마음산책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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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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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isible et l’invisible, suivi de notes de travail
Edited by Claude Lefort
(Paris: Gallimard,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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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Followed by Working Notes, trans. Alphonso Lingis,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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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수인ㆍ최의영 옮김
동문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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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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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ésumés de cours, Collège de France 1952-1960
(Paris: Gallimard,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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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s from the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52-1960
trans. John O’Neill,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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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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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rose du monde
(Paris: Gallimard,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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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se of the World, trans. John O’Neill,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 1973; London: Heineman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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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편역본]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옮김
서광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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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를로-퐁티: 몸의 현상학자 - 서동욱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실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다. 생각하는 실체가 육체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우리 영혼의 판단을 흐리는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 또 이런 문제도 생각해 보라.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실체인데, 저 바깥에 걸어 다니는 개와 고양이 같은 짐승들은 무엇인가? 그들에게도 영혼불멸을 보증해줄 생각하는 실체 같은 것이 있는가? 천만에! 저것들은 모두 동물기계들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만들어놓은 근대적 세계관이다. 여기서는 명석판명한 정신이 떠받들어 올려지고, 몸이란 이 정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몸이 없었다면 보다 잘 인식하고 보다 자유로웠을 텐데!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 대부분의 구간에서 이런 한탄이 메아리친다. 메를로-퐁티는 바로 이러한 세계관에 맞서서 ‘몸’의 불가결한 근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철학자다.
프랑스 현상학의 대표자 - 사르트르와의 엇갈린 길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누구인가? 그의 주저의 명칭 [지각의 현상학](1945)이 알려주는 것처럼, 그는 ‘현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친구로서 같이 유명한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했고, 또 냉전 시대의 정치적 문제로 갈라서기도 했으며, 세잔(Paul Cézanne)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론을 남기기도 했고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지막 주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8)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여러 굴곡들보다도 저 ‘현상학’이라는 명칭이 더 우리를 매혹시킨다. 거기 메를로-퐁티 철학의 진수가 들어있을 것만 같으니까.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에 대한 추도사 [길목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동등했고 친구였지만 동류(同類)는 아니었다.” 이 말은 정치적인 문제에서만 진실인 것이 아니라, 후설(Edmund Husserl)로부터 발원하여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거쳐 이 두 사람이 계승하고자 했던 현상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그렇다면 얼마간 사르트르와의 비교를 통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의 정체를 드러내 볼 수 있지 않을까?
후설의 발견 - 의식의 지향성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는 개념이다. 종래에 의식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라는 개념에서 보듯 일종의 고립된 사물처럼 다루어져 왔다(저 표현에서 res란 라틴어로 사물(thing)을 뜻한다). 그러나 의식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 실험해 보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이 가 닿는 각종 대상, 상념, 수학적 개념, 물리학적 이론, 기억 등등으로부터 의식을 고립시키려고 해보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잠을 잠으로써 의식 없음(무의식)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깨어있는 의식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과 무관하게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의식이 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은, 대상은 항상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의식 바깥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대상의 존재 양식이 별도로 있고, 그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형태가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의식에게 존재하는 그 자체의 모습대로 자신을 내주는 대상을 ‘현상(Phänomen)’이라고 부른다. 왜 굳이 여기에 ‘현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이 말의 어원을 조사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적 어원을 가지는 이 현상이라는 단어, 즉 파이노메논(ϕαινμενον)은, ‘자신을 그 자체로 내보여준다’를 의미하는 동사 파이네스타이(ϕανεσϑαι)에서 나왔다.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인들이 애초에 부여했던 ‘현상’의 의미인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말하는(논하는) 일'이 바로, ‘현상(Phänomen)’과 ‘말함(logos)’이 결합된 단어인 ‘현상학(Phänomeno-logi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사르트르 식의 현상학 - 자유와 선택을 가능케 하는 텅 빈 의식
현상, 즉 의식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그 대상의 존재 방식을 기술하는 일과 동일하다. 앞서 말했듯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현상을 제대로 기술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참다운 존재 양식을 가능케 하는 대상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대상들이 저 마다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이 다르다면, 이 다양한 방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의 작업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런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 지난 세기 현상학을 사회학, 정치학, 미학 등등 여러 학문에 그토록 널리 파급되도록 했다.
현상학의 저 파급력에 감염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사르트르다. 그는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을 기술하는 후설의 현상학을 '자아(ego)'의 문제 쪽으로 가져갔다.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 자아의 성격이 무엇이냐가 사르트르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나’란 뭘까? 이것은 의식의 주인인가? ‘태권브이’를 타고 있는 훈이처럼 자아는 의식 안에 거주지를 가지는가? 사실 책을 읽고 있을 때 책의 내용을 지향하는 의식은 있고, 떠나는 버스를 잡으려고 뛰어갈 때 버스를 지향하는 의식은 있지만, 이 의식 안에 ‘자아’가 들어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대상(책, 버스 등)을 지향하는 익명적 의식이 있을 뿐이다. 자아 역시 다른 실재적 대상이나 관념적 대상처럼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주어지는, 의식 바깥의 대상일 뿐이다. 즉 텅 빈 내용 없는 익명적 의식이, 어떤 내용을 지닌 자아, 기질과 역사와 개인적 관계 등등의 내용을 지닌 자아를 ‘대상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은 그 안에 자아라는 내용물을 가지지 않는 완전히 텅 빈 의식이다. 그리고 지향적 광선을 외부로 쏘아대고 있는 의식의 이 텅 비어 있음이 바로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유’를 이룬다. 이 의식은 준수해야 할 어떤 내용(개인의 성격, 창조주의 작품, 어머니의 기대를 받는 아들 등등)을 가지는 인격적 자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텅 비어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며, 이 자유에 입각한 ‘선택’만이 이 의식이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메를로-퐁티는 반대 길로 가다 - 우리는 텅 비지 않고 늘 충만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런 철학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우리는 결코 무(無)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 속에 있다. 마치 얼굴이 쉬고 있을 때나 심지어 사망해 있을 때도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처럼.”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텅 빈 ‘무’였다. 나의 자아나 신체를 비롯해 내용을 지니는 것들은 이 텅 빈 의식이 바라보는 외적 대상들일 뿐이었다. 메를로-퐁티는 반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사르트르가 말하는, 아무런 내용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텅 빈 의식 같은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충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이 빠져나간 죽은 얼굴조차 늘 충만한 내용(표정)을 지니지 않는가? 외부의 세계는 바로 프리즘으로 들어오는 빛이 굴절되어 들어오듯 이 충만한 내용과 뒤섞이며 우리 의식에게 주어진다. 외부 대상이 우리에게 의식되는데 불가결하게 개입하는 조건인 이 충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몸은 의식 외부의 대상이 아니다 - 몸을 통해서 비로소 외부 대상은 주어진다
“우리를 세계에 연결하는 지향적 단서”는 무엇인가? 여느 현상학자들처럼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이런 물음과 더불어 사색을 시작한다. 혹시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가? 즉 과학과 철학의 이론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우리의 근본적 지각인가? 오히려 과학의 이론적 그물망은 그 그물코가 너무 커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지각은 모두 그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답해나가는 가운데 메를로-퐁티는 몸을 우리의 원초적 지각의 ‘선험적 근거’로서 발견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하나의 간격’을 통해서만 세계에 연결된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인 그러한 빈틈, 세계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빈틈을 지울 수 없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바로 세계에 대한 이러한 간격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각 그 자체가 “거대한 다이아몬드의 흠집” 같은 이 간격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간격의 정체는 바로 우리의 ‘몸’이다.
지금껏 철학은 고작해야 몸을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다를 것이 없는 시공을 채우고 있는 연장(延長)으로 보았다. 몸을 인식 주관의 개념적 틀이 파악하는 대상으로만 보았지, 그것이 모든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라는 점은 모르고 있었다. 즉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규정된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의식이 지각하는 대상이기 이전에, 몸 때문에 바로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 바깥에 있는 비신체적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는 없으며, 세계 안의 몸과 뒤섞여 있는 의식이 주체가 된다. 피부의 조직끼리 갈라낼 수 없이 얽혀 있듯 의식은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알려주는 것들 - 화가의 시선은 신체와 얽혀 있다
세계가 비신체적인 명증한 의식(데카르트의 코기토, 사르트르의 익명적 의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체 자체를 통해 굴절되는 모습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지각 자체라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림의 영역’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메를로-퐁티가 말년의 『눈과 정신』(1964)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까닭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 바깥의 명증한 의식에 비견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허구적인 원근법을 이렇게 비판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들은, 그때까지의 회화의 탐구와 역사를 마감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회화의 기초를 확립한 척 한에 있어서 거짓된 것들이었다. 반면 화가들은 어떤 원근법의 기술도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요컨대 원근법은 실재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기보다는 작위적으로 구성된 비전(vision)을 보여주는 허구적인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안의 존재인 몸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 세계 바깥에 위치하는 의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에 대해 작위적으로 설정된 허구적인 지점이다.
http://it.wikipedia.org/wiki/Melozzo_da_Forl%C3%AC
http://it.wikipedia.org/wiki/Melozzo_da_Forl%C3%AC
화가의 시선이란 신체와 떨어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가 아니라 ‘눈’이라는 신체와 얽혀 있으며 이 눈이라는 신체는 세계 안의 다른 대상들 사이에 있다. “인간이 자기 집에 살고 있듯이 화가의 눈은 존재의 조직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비전을 절대적으로 보여줄 세계 바깥의 절대적인 한 지점에서 시작되는 원근법이란 없고, 존재의 조직 안에 들어있는 눈의 관점에 따라 그때그때 나타나는 비전만이 있다. 그렇기에 세계가 가시적이 되는 방식은 무궁한 것이고 이에 따라 그림 역시 무한하게 생산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역시 마찬가지다.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한 기술 역시 세계 안에서 몸이 사는 방식이 무한한 만큼 종결 지어 질 수 없는 무한한 내용을 가질 것이다.
이처럼 메를로-퐁티를 통해, 의식이 바라보던 외부 대상에 불과하던 신체가, 우리 의식적 활동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 권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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