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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 누구의 어떤 개혁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올해 6월이면 정확히 사망 30주년을 맞는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984년 5월 발간된 칸트의 계몽에 관한 한 기고문에서 칸트 철학의 새로운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로 정식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서, 현재의 문제, 동시대성의 문제에 관련된 것들이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로서 구성된 이 ‘지금’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의 앞바다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476명의 인원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한 달 이상이 지난 5월 30일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구조시스템은 침몰 전에 구출되었던 174명을 제외하고 배에 남아있던 300여명이 넘는 승객들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였다. 이는 침몰과 구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선원들과 청해진해운은 물론, 구조회사,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를 포함한 관료, 정치시스템 전체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단적으로, 이는 천재가 아닌 인재이며,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승선인 전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 다시 물어보자.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의 오늘, 여기 지금,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지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도덕주의적’ 답변의 문제점 -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결여
이 질문의 중요성은 우리가 오늘 이 질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리라는 명백한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가령, 이는 매우 비극적인 참사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사건에 대한 도덕적 답변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대응은 - 아마도 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 이러한 불행한 사태의 반복만을 낳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부터,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 참사를 거쳐, 바로 얼마 전 2월의 대학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가건물 붕괴 참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전 국민적 차원의 도덕적 반성이 수없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바로 오늘 세월호 침몰 사건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무책임한 선원과 비도덕적 탈법을 일삼은 청해진해운, 이를 비호하고 편의를 보아준 ‘공범적 공생관계’의 공무원, 관료집단 등 명백한 책임주체가 있는데도 ‘우리 모두의 책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 설령 그것이 순수한 자기 성찰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 현실적 문제점의 인식 자체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도덕적 반성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거나, 비도덕적 개인 혹은 집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비도덕적 개인과 집단은 늘 존재하며, 개인의 부도덕함은 비난받아야 하고, 집단의 비도덕적 음모는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 혹은 집단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은 정작 문제의 핵심이라 할 보다 큰 사회적 차원의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
나는 승객들의 탈출과 자신들의 탈출이 양자택일적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자신들만 탈출한 선원들에 대하여 분노를 금치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정당한 분노를 인정하지만, 세월호의 선원들만이 유난히 부도덕한 인물들로 우연히 구성되어 있었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없다. 세월호의 선원들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평균적인 대한민국의 선한 직장인들이었으며, 아마도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여객선의 선원들과 현격히 구별될 만한 질적인 도덕적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세월호의 선원들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마도 대한민국 선원들의 ‘평균적인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진 세월호의 선원들, 청해진 해운은 오늘 이 시각에도 자신들의 과오와 범죄 행위보다는 ‘하필 자기 회사의 배가 침몰한’ 불운을 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비극적 해체의 운명을 맞이한 해경과 해수부 관료 마피아, 넓게는 대한민국의 관료집단 전체가 갖고 있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재수가 없어서 하필 우리 영역에서, 우리 관할에서, 우리 회사에서, 우리 배가’ 침몰했으며,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면책을 도모하며, 이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국민들이 세월호를 잊을 때까지 납작 엎드려 지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을 내버려두고 가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 안전하게 탈출하는 이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단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해도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이렇게 해왔어도 직장에서 자리를 잃지 않으며, 다른 선원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다른 회사도 모두 다 이러하며, 이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공무원, 관료 집단 전체도 다 그러하며, 대한민국의 다른 영역들도 세월호 같은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나라는 개인과 우리 회사와 내가 만나는 관료 집단,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 전체가 하나로서 그러한 ‘공생적 악순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유지 가능한 것이다. 물론 부도덕한 개인은 비난받아야 하고, 부패와 법범 행위는 엄단되어야 하며, 음모는 밝혀져야 하고,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인적 도덕적 반성의 촉구와 그에 이어지는 해당 기업 및 관료의 사법적 처벌에 만족하고 만다면, 이러한 불행한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덕적 단죄와 사법적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세월호’를 막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서는가?
따라서, 어떤 특정 개인, 회사 혹은 집단에 대한 도덕적 비난 혹은 사법적 처리라는 기반 위에,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능케 했던 제반 조건 자체의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한 국가의 평균적 도덕성 혹은 직업윤리, 관료윤리는 물론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의 개혁을 포기하거나 방기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선원들은, 기업인들은, 관료들은 언제 이러한 ‘관행’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의 집단은 언제 자신들의 부당한 ‘기득권’을 타파하고 올바른 길로 나설 것인가? 이에 대한 역사의 답변은 간명하다. 하나의 집단은 그들이 ‘바꾸지 않고서는 안 될 때, 바꾸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관행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탁월한 개인의 도덕적 회심은 개별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수만에서 수십만, 수백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평생 익혀왔던 요령과 관행, 곧 기득권을 버린 경우란 역사에 전무하다. 그들이 그것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버릴 ‘의지’가 없기 때문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시스템의 일부이며, 자기 정체성의 원천이 바로 그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설령 스스로를 혁파하고자 해도 그러한 일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의 결여’인 동시에 ‘능력의 결여’이다. 기업이든 관료이든, 한 집단의 개혁은 자율적 부분과 타율적 부분이 결합될 때 성공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기업과 관료의 자율적 반성이라는 기초 위에 제도적 곧 타율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존재는 바로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에 세월호 사태에 대한 도덕적, 사법적, 행정적, 관료적 처리 이상의 정치적 결단의 차원, 곧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의 논리가 놓여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라는 정치적 행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이에 대한 확고한 개혁의지, 대통령 자신의 표현을 따른다면, ‘국가개조’,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모두 좋은 말이다. 나는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 의도에 대해 그 순수성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으며, 차라리 그러한 언명의 순수성을 믿는 편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준을 놓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정치 집단인 전교조를 순수한 교육현장에서 몰아내자’는 주장 이상의 정치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존재하는가? 주어진 시스템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그와 달리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사유가 있는가? 나와 같이 생각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나와 달리 생각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있을까? 국민은 정부와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달리 생각하는 순간, 불순한 비정상이 되어 엄단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일까? 만약 세월호 사건이 일부의 주장처럼 ‘순수한’ 사고였고, 따라서 대통령은 ‘순수한’ 유족만을 만날 것이며,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세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이자 정치인인 박근혜 대통령은 왜 ‘순수한’ 사고인 세월호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했는가? 이는 21세기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인 나는 정부와 달리 생각할 ‘자유’가 없으며, 사실상 오늘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말일까? 정부에서는 참으로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문제가 있고 불순하며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는 - 서구 중세의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無誤說)을 패러디하여 - ‘정부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정부무오설이라도 주장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자유롭지도 민주주의이지도 않은’ 정부를 여하튼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을 ‘해석권력’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이른바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때, 자신의 해석을 ‘현실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하고 이를 강요하는 힘이 해석권력이다. 그리고 그 해석권력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있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대한민국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석권력이 과연 국민에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해석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직 국민 스스로가 할 수 있을 뿐이다.
국민이 ‘해석권력’의 주체임을 보여주어야
다시 한 번 문제는 의지의 문제인 동시에 능력의 문제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순수한 의도에 입각한 것이라 해도 그 실천, 실현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현재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수많은 저항과 난관이 예상되며,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안위조차 위태로운 개혁에 나서지 않아도 정권이 유지된다고 믿을 때, 과연 한 나라의 정부는 개혁에 나선 경우가 존재하는가? 불편하고 무섭지 않은 복종하는 말 잘 듣는 국민,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는 착한 국민을 위해 정부가 알아서 자신의 존립 기반 자체를 흔드는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김용옥의 지적대로, 국민적 합의 없이 특정 정치인 개인의 의지대로 해석된 ‘정상화, 국가개조’는 문제의 책임자가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황망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자각이다. 박근혜 정부는 ‘안 해도 되는 개혁’을 시도할 리도, 시도할 수도 없다. 성공 여부와도 무관하게, 오직 국민들이 ‘정부가 진정한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스스로의 힘을 보여줄 때에만’ 박근혜 정부는 참다운 개혁에 나서고자 할 것이다. 논점은 언제 박근혜 정부가 언제 개혁에 나서는가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나름의 개혁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참다운 문제는 ‘누가 주체가 되는 어떤 개혁인가’의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개혁은 실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버린 전도된 상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푸코는 서두에서 언급한 오늘, 현재의 문제와 관련된 한 강의에서 정치 혹은 통치성과 관련하여 현재의 문제를 이렇게 정의했다. “어떻게 특정인, 특정집단에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의 위대성은 정치철학의 근본적 주체를 통치자로부터 피통치자에게로 영원히 바꾸어놓았다는 점이다. 푸코는 정치와 통치성의 문제를 피통치자의 관점과 관심에서 다시금 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바로 이러한 혹은 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푸코가 ‘주체와 권력’이라는 말년의 논문에서 대답하고자 노력했던 바이다. 푸코의 대답은 이러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더 이상 이전처럼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렇다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타율적으로 규정된 우리의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권력의 문제는 가장 철학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영원한 ‘오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14.5.27.
201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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