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윤리학에 대한 11개의 노트
“나는 인간을 이해하고픈 정열을 가지고 있다.”
(J'ai la passion de comprendre l'homme)
- J.-P. 사르트르
1. 이 글의 ‘나’는, 물론, ‘너’이다. 아래의 글들은 칼 마르크스 씨가 좋아했다는 라틴 속담 “인간의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Nihil humanum a mihi alienum puto)라는 말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에서 나온 것이다.
2. 함석헌 씨는 “윤리는 삼각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로써 윤리가 어떤 단순한 계약 혹은 거래 이상의 것임을 말하고 했을 것이다. 물론 윤리에서 이기(利己)의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윤리가 그 이상의 어떤 것임을 믿는다.
3. 나는 윤리학의 제1원리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참다운 윤리는 무엇보다도 존재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윤리가 그 자체의 본질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긍정임을 뜻한다. 따라서 나는 나의 윤리학을 존재론적 윤리학이라 부른다. 그러한 나의 윤리 사상이 갖는 윤리의 실천적 제1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이때의 ‘이해(理解)한다’라는 동사는 물론 영어 understand 혹은 독어 verstehen, 불어 comprendre의 일역(日譯)이다. 이 understand, verstehen, comprendre 세 단어는 공히 그들 언어의 상식적 사용법 안에서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되는 객체의 존재를 각기 하나의 실체들로서 전제한다.
따라서 이해란 바로 또 하나의 실체인 ‘(참다운) 인식’이다. 인식이란 그 그리스어의 어원 épistémè가 잘 보여주듯 바로 ‘진리’이다. 하지만/따라서 위에서 내가 제시했던 윤리학의 제1원리는 김용옥 씨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김용옥, 「求原諒」, 老子哲學 이것이다(上), 20쪽, 통나무, 1989) 얼핏 보아 이렇게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위의 두 언명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의해 서로를 보완하게 된다.
첫째, “만약 내가 너와 똑 같은 입장이었다면(if I were in your shoes ... ), 나도 너와 똑 같이 행동했으리라”는 가정(=대전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것이 하나의 가정이며, 또한 대전제에 대한 신념인 이유는 ‘모든 것이 똑 같은 상황’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reason)가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합리적(rational)이다 - 윤리에 있어서의 ‘숫자’의 문제. 이는 그러한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정상, 사이코, 변태, 기형이란 오직 타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 속도의 윤리학.
4. 내가 위에서 말한 명제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관적 혹은 냉소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 혹은 제한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것은 차라리 임마누엘 칸트 씨가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 행했던 바와 같은, 인간의 감성 혹은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주장이다 - 완벽히? 충분히?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에 가장 근접하는 이는 오직 나 자신일 것이다 - 이것이 J.S. 밀 씨가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모두는 그 사람 자신, 즉 그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주권자이다”라고 말한 의미이다.
5. 이러한 말이 윤리학의 영역에서 의미 있게 주장되어 질 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모든 시대의 폭력은 그것이 사랑과 이해와 이성의 이름 아래 저질러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우리와 그들의 ‘현실’에 대한 약간의 냉정한 고찰만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사랑의 최소 요건 혹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의 사랑에서 사랑받는 이의 의견과 느낌과 감정을 존중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며 또한 이른바 사랑받고 있다고 말 되어지는 이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 모독이며 궁극적으로 폭력이다. 사랑이란 그의 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love is listening to his words, his voice) - 聖人. 따라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면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무지, 오해, 왜곡, 위증이다. 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 자신의 주장보다는, 이른바 ‘이해받는다.’고 주장되어지는(혹은 ‘이해당하는’) 이가 갖게 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점이 적절히 이해되지 못한 경우, 이제 나의 진실은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 의해 그들의 웃음꺼리가 된다. 나의 느낌은 왜곡 당한다(너를 위해서!). 가해자란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고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설정함으로써 현대적 인권(human rights)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의견을 왜곡 당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6. 이제 이러한 전제에 입각해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 필연적 결론은 아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 나의 욕구와 소망을 알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지어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향한 나 자신의 최소 요건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진심으로 기쁘지 않고는 너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씨는 이를 “나 자신에 대한 배려 이전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윤리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우선합니다. 그 근거는 나와 자신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보다 우선하기 때문이죠.”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배려하기 이전에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친교와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만, 그리고 바로 그 만큼만 타인들에게 참으로 잘 해줄 수 있다(너무 절망하지 말자. 참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이미 만난 것이다 ... 정말 그럴까?).
7. 이때의 나를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이기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기주의란 내가 이득을 얻으며 동시에 반드시 나의 그러한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건강을 위하여 담배를 끊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 도덕 철학(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 1986)의 저자 제임스 레이첼스 씨는 ‘자기 이익’(self-interest)과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이와 비슷하게 에리히 프롬 씨는 ‘자기애’(self-love)와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주의자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자기를 찾는 인간: 윤리학의 정신분석학적 탐구, 116쪽, 박갑성ㆍ최현철 옮김, 종로서적, 1985)
8. 나는 왜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윤리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며, 긍정이다. 다만 문제는 나란 누구인가? 나란 어디까지인가? 나란 누구까지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동일한 DNA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윤리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김용옥 씨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따르는 동일한 몸(Homo Mommiens)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란 인간의 정신에 관여하는 의학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진실하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의 절대적 진실성을 보장한다. 인간은 진실에서 벗어날수록 아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의 진실이 어떠한 관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있는가 하는 점일 뿐이다.
9.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은 무한하며, 나의 세계 해석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해석의 방식 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나의 생각과 나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 씨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너와 나의 ‘몸’으로 인하여, 나는 바로 너이다(그런데, 정말 나는 너일까?) - “만약 우리가 남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요, 우리로부터 남들을 보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다.”
10. 인간의 고통 혹은 느낌이 소중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공리주의의 주장대로 그것은 오직 인간이 유정적(有情的, sentient)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흑인이, 한 여성이 학대받는다면 그것은 왜 나쁜가? 그가 고통 받기 때문이다 ... 이제 윤리의 대상은 나의 행위에 의해 영향 받는 모든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로 확대된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아픔만이 아니며, 모든 존재의 느낌이다 - 이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행동․실천의 문제이다. ‘냉정한 객관성’은 인식론적 오류다. 더구나 한편으론 이 세상에는 말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11. 나는 왜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더구나 나는 왜 너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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