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1999년이던가 유학중이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한 한인교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나는 물론 종교가 없으나, 그 교회에 학술부장으로 있던, 역시 철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친구의 제안으로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나의 생각과 그리스도 교 사이의 공통점, 친연성을 발견해 보려 한 글이다. 언젠가 불교에 대해서도 이런 글을 쓸 날이 오면 좋겠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며 정확한 날짜를 보니 1999년 4월 4일에 발표한 글인데, 꼭 9년 전의 글이다.
뱀발. 그리고 이 글은 원래 저장 파일을 잃어버려 복사본을 보고 나의 제자 이성현군이 새로이 워드로 쳐준 글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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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 혹은 신앙의 문제 -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가?
M. 하이데거 씨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참다운 실존으로서의 ‘나’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 군중으로서의 ‘사람들’로서 말하고 행동한다고 썼다. 이때 사유와 행동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군중’이며 ‘대중’이다(이를 하이데거 씨는 “사람들은 지껄인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떼 ‘사람들’ 스스로는 자신이 ‘나’로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피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믿는 그 만큼 오히려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바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며, 심지어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라는 평범한 주장이다. 내가 다루려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이해란 무엇인가’ 즉 이해의 정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해란 우리말은 영어의Understanding 혹은 독어의 das Verständnis, 불어 Compréhension의 일본어 역(理解, りかい)의 우리말 음독이다. 모든 보편명사는 고유명사다. 그러나 ‘이해’란 용어 자체의 분석은 이 자리에서 수행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 글에서 ‘이해’란 용어를 우리가 “난 걔 이해해”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이른바 ‘심정적(心情的) 이해’에 관련된 평범한 일상적 용법으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우리는 먼저 윗 문장에 나타난 ‘~할 수’라는 말을 통해 이해의 문제가 능력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다루려는 문제는 바로 이해에 관한 인간의 수행 능력 여부에 관련된 것이다. 이제 이러한 논지의 전개를 위해 이와 유사한 몇 가지 입장들을 살펴보자.
1) 인간은 다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가? - 물론 이것은 예외가 가능한 특칭 명제(some)가 아니라 예외가 전혀 없는 완벽한 전칭 명제(all)로서 제시된 것이다. ‘완전히’라는 단어를 일반적 의미로, 즉 “내가 너의 모든 생각, 느낌, 감정, 동기 등등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모조리 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이 명제는 쉽게 거부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Nobody knows 혹은 God knows). 따라서 인간은 타인 혹은 타인의 행위에 대한 법리(法理)적 가부를 따질 수는 있을지언정, 그녀의 진실을 심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해와 심판의 구조에는 항상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본질적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생각과 심정을 다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그녀는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더욱이 누군가가 하느님의 의도와 생각을 다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그녀는 이미 신이거나 혹은 신 이상의 어떤 존재이다 -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독교) 『성서』 해석에 궁극적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기독교가 인류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위대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 능력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세상에 대한 겸손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용이다. 왜냐하면 비단 나뿐만 아니라 - 설령 어느 누군가가 『성서』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 우리 모두가 똑 같은 하느님의 자식, 즉 인간이기 때문이다(신앙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은 그것이 일단 전제된 하나의 체계 안에서는 일정한 ‘사실의 영역’을 낳는다. 따라서 신앙의 사실은 말 그대로 ‘믿음이 전제된 사실’이다).
2) 이제 이어서,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이해 받는 사람’(보다 정확히는 ‘이해 받는다고 주장되어지고 있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내’가 (너로부터) 이해 받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대답은 아마도 ‘너’라기보다는 ‘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해’라는 바로 그 말의 의미와는 모순(?)되게도 ‘내가 이해하는 대로의 네가 너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한 입장은 ‘나’에게 편(리)하다 - 그러나 이해 받는(혹은, 이해 당하는?) ‘너’에게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경우, 항상 (그 이해하려는 행위의 수행자인 나의 의지나 동기, 느낌보다는) 그 행위의 수혜자가 받는 느낌이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른바 ‘이해 받는’ 이의 의견이 경청되지 않으며, 그의 느낌과 생각이 존중되지 않는 이해와 사랑이란 단순한 무지이며, 실상 자기 편의에 입각한 일종의 타인에 대한 폭력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역시 대부분의 폭력은 사랑과 이해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다(‘너를 위해서!’).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로서 현대의 인권 개념을 확장해 보고자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왜곡 당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나는 기독교의 ‘영혼의 복지’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생각과의 친연성을 발견한다.
3) 그렇다면, 인간은 타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때 '충분히'란 말은 먼저 ‘~을 위해서, 혹은 ~하기에 충분히’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이는 이해의 본질과 관련된다. 이해란 우선적으로 언제나 보다 약한 자, 보다 억울한 자를 위한 단어이다. 물론 강자와 가해자도 이해 받을 수 있고, 또 이해 받아야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것은 보통 그녀의 이해 받지 못하는 측면, 즉 약점과 상처에 대해서이다(물론 그녀의 긍지와 기쁨 또한 이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 혹은 기득권자란 누구인가? 그것은 ‘피해자 혹은 없는 자의 고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 즉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들을 귀 없는 자’, 바로 우리 모두가 때로 가해자이다(갑골문에 따르면, 성인(聖人)이란 한자의 聖자에 귀 耳변이 들어 있는 것은 그가 바로 “하늘의 말, 남들의 말을 잘 듣는다.”는 뜻이다(壬자는 제사상(祭祀床), 口자는 제기(祭器)이다). 성인이란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넘어) 원래 그들이 가슴 속으로부터 말하고자 했던 바까지 듣는 사람이다 - 그래서 동양에서는 ‘성인은 속일 수 없다’고 한다).
때로 피해자이며 종종 가해자인 우리 모두가 남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때의 ‘충분히’란 결국 ‘아픈 이의 곤혹, 괴로움, 상처가 좀 덜 아플 수 있을 만큼 충분히’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는 바라지도 않지만, ‘충분히’조차도 정말 어렵다. 아니 나는 그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일뿐더러, 심지어 그러한 사고방식 안에 하나의 중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인간은 ‘그녀가 타인에 대해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더 이상 그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는 경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참으로 이해하고 껴안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기조차도 참으로 힘겹다. 하물며 그것이 너임에야, 그녀임에야. 나는 너의 심정을, 너의 영혼의 깊은 소리를, 너의 진실을 모른다. 인간의 말이란 종종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그러한 때에 나의 선택은 ‘사람들’의 눈초리 안에서 재단되고, 나의 진실은 ‘그들’의 웃음꺼리가 된다. 실상 우리가 현실적으로 타인에게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이해가 아니라, 나에게 더 작은 상처만을 입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 나는 내 영혼의 목소리, 그 부름을 듣는가? 아마도 나는 그녀의 진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든, 인간의 ‘진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아마도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등장하는 ‘알고 있으면서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행동의 규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I. 칸트 씨의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진실을 알 능력이 어차피 없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나의 주장은 차라리 도올 김용옥 씨의 말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에 더 가깝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 마치 칸트 씨의 그것처럼 - 다만 인간의 인식과 이해의 능력에 일정한 한계선을 그으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이다(L'éthique aujourd'hui, c'est écouter). 그것은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너의,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듣기’가 ‘말하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강조점은 ‘듣는 것’에 있다. 실상 ‘잘 듣는 자’만이 적절한 때에 ‘잘’ 말할 수 있다.
아마도 한 인간이 ‘내가 너를 조금은 이해했나보다’하고 겸손히 생각해도 좋을 유일한 경우는 이해하는(?) 내가 ‘나를 너를 이해한다고 - 하이데거 씨의 표현대로 - 너에게 ‘지껄이는’ 순간이 아니라, 이해 받는 그녀가 나에게 진심으로 ‘그 때 이해 받았다는 느낌을 받아서 너에게 참 고마웠다’고 언제가 후에 나직이 말하는 그 순간뿐일 것이다 - 나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와 행위가 윤리의 ‘최소치’라기보다는 ‘최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서』에 쓰인 “네가 네 몸을 사랑하듯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명령 앞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본질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야 하며, 더욱이 나의 이웃들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약]의 기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세속에 있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과 똑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의 이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랑’이 그리스도인에게 - 조건부의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는 이유는, 내게는 ‘하느님’과 함께 ‘나의 이웃’이 나를 ‘나’로서 만드는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기를 선택하고, 또 그러한 말씀을 복음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긍정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 없이 그녀는 살아 갈 수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를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자기 사랑’ 혹은 ‘자기이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참다운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 프롬 씨의 말처럼, 이기주의자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되, 실상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이기주의와 참다운 자기 사랑은 다른 것이다. 이기주의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하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나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해 것이다. 내가 나의 건강과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 금연을 행하는 것은 이기주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이해 혹은 사랑이란 자만심과도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참다운 본질이란 바로 그녀에게 나누어져 있는 하느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역시 사랑할 수 없다.
나는 M. 푸코 씨의 다음과 같은 명제를 지지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윤리적으로 우선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보다 언제나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대면, 친교의 시간이 풍부하고 깊어지는 만큼, 자신과 세상을 잘 이해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만 타인을 잘 배려할 수 있다.
*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축복이 이 세상에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Thank you for your kind attention.
1999년 4월 4일, 스트라스부르 한인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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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말하자면, 이 세상에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나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이다.
나는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 중 오늘보다 내일이 더 고통스러우리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신의 느낌을 믿고 이야기할 그 누군가가 없는 사람들만이 자살한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그 누군가를 가진 어떤 사람도 자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커뮤니케이션, 소통의 문제이다.
사랑과 소통.
답글삭제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단어입니다.
철학자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네, 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는 소통은 솥오하려는 노력만이 존재하고, 사랑은 근본적으로 부족ㅎ고 사실상은 때로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렇게 종종 글 남겨주시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삭제솥오? 글을 잘 쓰시는 철학자 선생님의 답글이라 아주 잠깐 이런 단어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
답글삭제감히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말하는 단어의 의미와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단어의 의미는 어떤 맥락만 같이 할 뿐 차이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집 그림으로 보자면
유명한 건축가가 그린 자신의 철학이 담긴 집 그림과
네모 위에 세모를 올려 놓은 유치원생의 집 그림과의 차이라고 해야 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소통과 사랑의 의미,
다는 모르겠지만 공감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진리라고, 정의라고 그리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그것을 위해
노력(어떤 식으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