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3.

아줌마를 위한 철학책 한 권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

 
내 평생의 소원 중 하나는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을 써보는 것이다. 이런 나의 소망은 너무 어렵지 않고 쉽게 쓰여 있어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아줌마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 또한 그 결과로 그것을 읽는 분들의 일상생활에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소망은 아마도 내가 철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철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몇몇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철학 개론’ 같은 과목을 가르쳐 보면서, 나는 나의 고등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 혹은 학생들의 일반적 인식은 그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우리가 가진 철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철학은 심오한 학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위대한 명저라는 철학 책을 읽어도 일단 이해가 되지 않는다(워낙 심오하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열심히 읽어 이해가 됐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러니 철학은 나의 일상생활이나 고민과는 상관없는 위대한 철인들의 엄숙한 학문, 한편 반대로 (혹은 동시에) 먹고 살 걱정 없는 배부른 사람들의 말장난이 아닐까?
 

어느새 벌써 10년 훨씬 이상을 ‘철학’을 공부해온 나로서는 이 이야기들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타당해 보이는 점은 현재 우리나라에는 오늘 우리의 고민을 우리의 언어로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철학이 부재해 있다는 측면이고, 그렇지 않아 보이는 측면은 ‘오늘 우리가 그런 철학을 못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철학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의 의무를 - 일단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성실히 따른다는 전제 아래에서 - 두 가지로 생각하는데, 그 한 가지는 자기가 속한 학파 (혹은 종파) 이외의 책들을 성실히 읽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자기 전공 분야의 전문 지식을 비전공인들(즉 마음이 열리고 성실히 배워보고자 하는 동시대의 일반인들 혹은 동료들)이 읽어서 이해가 될 수 있는 용어로 풀어보고자 최대한 노력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내가 언젠가 쓰려는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정향된 책이다. 이러한 의도에는 철학이 단순히 일상과 무관한 지식인들의 엄숙한 학문 혹은 말장난만은 아니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우선 내가 수많은 이른바 [철학개론]들을 읽으며 발견한 사실 중 하나는 모든 [철학개론]은 실상 항상 [(어떤 입장에서 바라본) 철학개론]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제목에는 그렇게 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치 [철학에세이], [철학의 기초이론]이나 [철학에 이르는 길]에서처럼, 그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이 유일한 철학에 대한 올바른 정의로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왜냐하면 철학이란 바로 그 학문에 대한 정의 자체의 새로운 규정에서 시작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유물론 철학의 기초이론]이란 제목처럼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밝혀주는 것이 책을 사보는 초심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낫다고 본다).
 

철학은 한자어 哲學의 우리말 독음이다. 그러나 이 哲學이란 한자어는 중국어가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 씨가 자신의 책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말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선 일본어 ‘테츠가쿠’(哲學)이다 - 1910년 이전 조선에 서구적 의미의 철학이란 개념은 없다. 哲學은 眞理, 理性, 科學, 信仰, 宗敎와 같은 20세기 이후 중국, 한국의 대부분의 개념어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어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植民)이요, 학문의 이식(移植)이다.


물론 테츠가쿠는 그리스어 philosophia의 번역이다. 이는 ‘지식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때의 소피아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것,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즉 이른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코 영속적이지 않은 우리 일상의 고민의 해결에 유용한 실천적 지식은 학문 혹은 철학으로부터 원칙적으로 제거된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보편명사는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갖는 고유명사다.
 

나는 철학에 대한 정의 혹은 조건 지움의 문제에 대해 김용옥 씨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의 입장은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통나무, 1986)에 나타나 있다. 나는 그가 철학을 (그 탐구의 대상 혹은 내용이 아닌) 탐구의 방법 그 자체로 규정하고 있어서, 기존의 정의들이 갖던 편협성을 감소시킨다고 본다. 그는 이 책에서 칸트 씨의 말을 인용한다. 칸트 씨는 자신의 수업 시간 맨 처음을 항상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결코 저에게 철학(die Philosophie)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여러분과 똑 같은 어떤 한 사람이 철학하는 것(philosophieren)만을 보실 수 있을 뿐입니다.”


위의 두 독일어 중 앞의 것은 명사이고, 뒤의 것은 동사이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본다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 타인의 사고 행위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산물(철학, 혹은 소니 워크맨)보다는 - 그들이 그것을 만든 사고방식(철학함, 혹은 과학/기술) 그 자체라는 말이다. 철학은 철학함이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내가 배워본 서구 철학의 ‘이성’이 명사적 측면보다는 동사적 측면이 더 중시된다는 점이었다. 즉 그것은 명사 the Reason(이성)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동사 to reason(이성적으로 추리/추론하다)였다는 말이다. 철학함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무비판적 암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함을 이렇게 규정한다.


철학함이란 내가 주어진 전제의 안팎에서 그 전제의 근거를 짚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다.


‘근거를 짚어가며’란 곧 를 묻는 작업이다. 모든 언명에는 드러난 혹은 암묵적으로 가정된 전제가 있다. 그 전제가 주어진 주장의 타당성을 보증한다. 그것은 그 언명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항상 가정된다. 그러나 철학의 존재 근거는 바로 이러한 자연과 당연에 대한 느낌과 이해가 개인과 사회에 따라 언제나 항상 다르다, 즉 너의 자연/당연과 나의 자연/당연이 항상 현실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기반해 있다.


결국 철학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영원한 질문들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당연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
  
보통 철학에서는 진리를 ‘참인 것으로 증명된 믿음’(Truth is true justified belief)으로 본다. 문제는 오직 어떠한 방식으로 그것이 증명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위의 진리 규정을 따른다면, 진리 또한 하나의 믿음 혹은 신념이다. 따라서 넓게 말해 개개의 철학들 역시 하나의 신념 혹은 믿음, 즉 하나의 신앙 행위라 볼 수 있다. 물론 철학은 하나의 열린 신앙, 비판적 신앙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철학함이란 무엇보다도 자기비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물론 ‘과연 생각대로 그럴까?’를 묻지만, 그보다는 더욱 더 ‘과연 생각대로 그럴까?’를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철학함이라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문적 철학 탐구 사이에는 본질적인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다만 정도의 차이, 체계성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나와 내 친구가 카페에 갔다. 나는 친구에게 음료수를 사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어 본다: “야, 내가 사줄게 ... 난 커피, 넌? 너, 홍차 좋아하지? 커피? 홍차?” 당신 같으면 이 경우에 커피와 홍차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커피, 너는 홍차 ...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 질문의 (드러난)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 즉 콜라를 선택할 수도 있다 - 더구나 우리는 안 먹기를 선택하거나, ‘이 녀석이 평소에 날 안 좋아하더니, 오늘 또 왜 이래? 짜식, 더 싫다’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사주면 먹지,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철학(함)은 이렇게 주어진 전제의 안팎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박탈 불가능한, 고유한 능력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의 주체는 항상 다. 이는 내가 생각할 때 칸트의 문제로 나의 문제를사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나의 문제의식으로 나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아주 시시해 보이지만 그 본질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보다 심오한(?) 질문들과 똑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몇 살에 결혼해야 하는가? 동성애는 정상인가? 효도와 자아실현이 상충될 때 나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신은 있는가? 없는가? 철학은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지식만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대답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제시하게 될 모든 대답에는 일정한 나름의 근거이유가 있다. 그 주어진 이유들(the Reason)에 대해 왜(why)를 따져가며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당신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미 언제나 철학적 사고 행위를 항상 해왔다.


물론 이 말은 당신이 직업적 철학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간이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항상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최소한 그러한 사고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경제학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가려면 직진해서 가지, 특별한 다른 볼 일이 없는 한, 동대문이나 서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와 경제학자의 차이처럼, 당신과 철학자의 차이도 다만 정도상의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철학자이다. 당신의 삶과 고민이 철학의 대상이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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