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위대하다. 당당히 나의 길을 갑시다.
무한 가능성을 간직한 나입니다. 무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만 해도 앞날이 기대로 흥분됩니다. 내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는 가능성을 하나씩 꺼내어 창조해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재밌고 즐거운 날뿐이겠습니다. 이 말도 멋있네요. 나는 무한 창조자다.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려고 공부하는 거 아닐까요? 나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창조의 힘을 키우려고요. 왜? 사는가요? 이렇게 신나게 살면서 행복하려고 사는게 아닐까요? 무한 가능성을 창조하는 그 시간을 만들려고요. 어떠세요? 10대 여러분은 어떤가요? 그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2. 너는 지금 이런 상태야. 내가 가르쳐 줄게.
나를 고정시킵니다. ‘너는 지금 이런 상태야’ 이 말 어떤가요? 주변에서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말로 흔히 듣습니다.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내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과 지금 해야 할 것을 알게 합니다. 계획을 세우게 하는 면에서는 도움을 줍니다.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지요. ‘중간고사 영어 성적이 82점이야.’, ‘성격이 외향적이야.’, ‘I.Q.가 120이다.’, ‘양로원 봉사활동 실적이 있네.’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나요? 그 다음 말은 이런 말입니다. ‘수도권 대학에 못 가.’, ‘움직이는 동아리로 바꾸지.’, ‘간호사나 상담사로 진로를 잡아 봐.’ 너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어, 너의 준비정도가 여기까지니까 너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질문하게 됩니다. ‘그거 이상이 되려 하면 안 되나요?’, ‘그거와 다른 거 되려고 하면 안 되나요?’ 변화의 가능성을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 텐데요. 결과는 나를 고정시키는 효과를 만들고 있지 않나요? ‘너는 이런 정도의 아이야’ 이런 말로 나를 고정시키네요.
나를 부정하게 됩니다. ‘너, 지금 네가 얻은 국어성적 그리고 너의 활동으로는 네가 생각하는 목표에 다가가기에 조금 부족해. 그러니 더 열심히 노력해서 바꾸자.’ 목표에 가기 위해 힘내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까지 가려면 더 해야겠다고 합니다. 고마운 말입니다. 그러나 ‘너 말고! 지금 네 모습 말고! 목표에 있는 네 모습을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할 너만 남습니다. ‘지금의 나’는 부정됩니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위해 부정됩니다. 처음에 저기(목표)는 분명 나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꾸로 저기 저 놈이 나를 윽박지르고 비하하는 꼴이 된 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틀렸어, 부족해, 아직 아니야, 한참 부족한데 쫌 더 하지!’ 저기 목표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참자. 이 말인데요. 이 참자는 말은 어떻게 나를 만들까요?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의 유보, 연기, 억제,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눈 감고, 귀 막고, 욕구를 가두는 겁니다. 공부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렇게 말을 하지요. 예술적 감각 죽이기, 건강한 체력 키우지 않기, 세상을 보는 여행 안하기, 다른 사람의 삶 관심 가지지 말기, 세상을 학습노트에 있는 걸로만 외우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배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세상을 알기 위해 배운다면 이런 모습은 배우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는 것은 배움을 거부하는 겁니다.
무엇을 안다는 걸까요? 저기(목표)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결과를 중시하는 말이지요. 지행합일이나 언행일치라는 말을 들어봤지요. 지와 행이 따로 있은 개념이니 둘을 하나로 일치시켜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는 만큼 행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이런 질문 던져볼게요. 지 즉 아는데, 행 즉 행동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는 건가요? 알지 못하는 건가요?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학교공부가 어떠냐는 겁니다. 잘 살기 위해 배우는 중이니까요. 학교에서 엄청난 지식을 습득합니다. 삶의 가치도 배우고 도덕 윤리도 배우고 이웃과 민족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그러면 그런 도덕심과 윤리의식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 시민이 되나요? 수업시간은 일방적으로 듣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주관적 생각과 가치관은 주목받지 못합니다. 객관적 지식을 외우고 잘 외웠나 평가를 합니다. 행위나 실천이나 가치관이 어떤가는 관계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의 행동은 빠집니다. 나를 교육과정에서 소외시킵니다. 배운다는 것이 나의 창조 능력을 키우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만들고 그런 힘을 키우는 과정이라면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나를 배제하는 교육은 재미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활기찬 활동을 하고 주체로 참여해야 재미있습니다.
배우면서 자존감 있는 당당한 나를 만들려 했습니다. 무한가능성의 창조자라는 포부는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열심히 공부하는데 거꾸로 나는 부정되고, 자존감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뭔가 불행해질 거 같군요. 어떤가요? 대한민국 학생들의 행복도와 공부 만족도는요? 우리가 알고 있는 수치들이 혹시 이런 모습의 결과는 아닐까요?
3. 내가 가야만 하는 세상, 진짜 세상. 그런 세상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영화 메트릭스를 보았나요? 영화 장면 초반에 기계에 매달려서 가짜 이미지를 정보로 주입받고 기계의 에너지로 쓰이기 위해 갇혀서 키워지는 인간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엄청 놀랍습니다. 혹시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생각하게 합니다. 즉 진짜 세상은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달콤한 현실세계는 이미지로 만든 가짜세계라는 설정입니다. 감각으로 느끼는 현실세계는 가짜고 진짜 세계인 본질의 세계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진짜세계로 가야한다는 거죠. 이런 사고방식이 여러분이 학교에서 늘 듣는 훈계와 부모님으로부터 듣는 잔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스스로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너의 모습은 틀렸고 부족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가르쳐 줄게.’, ‘그렇게 하지 마. 앞으로 나가기 위해 이렇게 해보란 말이야.’, ‘내가 한 일이 이게 뭐야. 하긴 했는데 내놓기가 정말 부끄럽네.’ 이렇게 해서는 자존감과 행복감이 키워지기 어렵겠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프랑스어: simulacre)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원본과 복제라는 생각 틀에서 원본은 없다는 생각 틀을 제시하는데요. 원본이 없는 세상은 가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면 그 자체를 감각적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원본이 없다면 삶의 나침반이 없어서 무서울까요? 기댈 곳이 없어서 무서울까요? 어떨까요? 이런 변화도 생길 겁니다. ‘너를 비난할 기준이 없어.’ 원본 세상이 나를 부정하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모습으로 당당한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모든 세상이 긍정적으로 살아나지요. ‘나 이번 말하기 대회에서 10명 중 5등 했어. 2등은 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너무 부족한가봐. 나는 도대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이런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나 이번에 말하기 대회에 나갔는데 너무 재미있었어. 나도 소질이 충분하다는 걸 발견했어. 기뻐. 다음에 또 나가야지.’ 나의 현재 모습은 내가 걸은 당당한 시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 그런 나를 뭐라고 합니까? 나는 계속 가고 있는데요. 내가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소중히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은 이런 일상의 긍정에서 만들어집니다. 내 것이 소중할 때입니다.
삶의 나침반이 없다면 더 외롭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찬란하고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롯이 나의 몫일 겁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하고, 즐기고 그리고 모두 전적으로 책임지는 겁니다. 배움은 그런 과정을 밟아가면서 내가 만들어가는 거지요.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일천하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중하고 그것이 정말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배움의 장입니다. 세상을 만나러 갑시다.
4. 세상을 만나는 재미난 방법을 말해 볼게요
등장하는 겁니다. ‘완득이를 당장 끄집어내서 내 코앞에 데려다 놔요.’ 가좌중학교 인문학동아리 시간에 한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재밌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시간, 바로 여기 이곳에서 주인공을 만나는 겁니다. 독서는 간접체험이라는 말은 직접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해요. 흐릿합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재미가 덜 합니다. 지식 탐구자나 구경꾼처럼 책을 읽게 됩니다. 이렇게 해 보세요. 완득이를 읽는 순간에 완득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놓으세요. 변화가 생깁니다. 내 앞에 있는 순간 나는 완득이와 인사를 하게 됩니다. 악수하고 말도 건네죠. ‘너 정말 킥복싱 잘 하더라. 너 여자 친구에게 잘 좀 해줘라.’, ‘난 네가 운동하는 거 찬성해. 응원할게. 근데 살짝 드는 생각인데 공부도 조금 하면 안 될까?’,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이 말 멋졌어. 하하 나도 그렇게 빈단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수다를 떨 수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런 등장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나도 주인공이 되지요.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에 나의 바람, 기준, 가치관 등 여러 모습이 같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영상세대이니 이 순간 영상을 떠올려 보세요. 내가 거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구경꾼이 절대 아닙니다.
구경꾼은 이런 모습입니다. 재난 영화 ‘해운대’는 쓰나미 관련 영화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장면 앞에서 나는 태연합니다. 화면이니까요. 영화 속 사람이 위험해도 나는 침착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쓰나미의 위험성을 생각합니다. 나는 구경꾼입니다. 어떤 행동이나 선택 결정을 안 합니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구경꾼은 선택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그에겐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겐 배움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등장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그것도 지금 당장 등장하는 겁니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다.’ 이 말을 바꿉시다. ‘우리는 지금 항상 주인공이다.’ ‘나를 주인공이 못되게 하지 마세요!’ 라고 하세요. 여러분이 즐기는 게임 생각해 보면 더 빠르겠습니다. 게임 속에서는 늘 전략을 세우고 선택하고 과감하게 움직입니다. 내가 전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재미납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구경꾼이 아닌 등장하는 자는 선택하고 행동하고 변화를 맛봅니다. 이렇게 세상을 만나는 과정에서 배움이 생깁니다.
다름을 만나요. 김유정의 ‘동백꽃’은 청소년기의 두 남녀가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묘사한다고 해설합니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집 수탉이 점순네 수탉에게 해코지를 당한다. 점순이가 슬쩍 건네주는 감자를 안 먹는다고 하자 점순이는 홍당무가 되어 씩씩 거리며 갔다. 다음날 점순이는 우리 집 씨암탉을 두들겨 팬다. 나는 우리 집 수탉에 고추장을 먹여 점순네 수탉과 싸움을 붙인다. 우리 집 수탉이 싸움에서 이기다가 막판에 진다. 다음날 나무를 해오는데 점순이가 또 싸움을 붙여 놓았다. 화가 나서 점순네 수탉을 때려 죽였다. 나는 걱정에 운다. 점순이와 동백꽃 속으로 넘어진다. ‘동백꽃’를 읽고 어느 독서모임에서 중학생이 말했답니다. ‘닭싸움이네. 네, 닭싸움이 주제 맞네요. 계속 닭싸움하는 얘기만 나오잖아요.’, ‘여기 어디에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나와요?’ 정말 이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답니다. 처음엔 기가 막혀서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시선으로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더래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이 중학생들의 생각이 기발하지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동인의 ‘감자’를 읽고 독서토론을 했을 때입니다. ‘감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복녀는 15세에 동네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 갑니다. 복녀가 이일저일 하지만 남편이 너무 게을러서 결국은 사대문 밖 칠성굴로 쫓겨나고 복녀는 몸을 팔게 됩니다. 왕서방을 만나서 돈을 벌다가 왕서방에게 죽게 됩니다. 그녀의 송장은 돈으로 팔려 버려집니다. 어려운 생활상이 그려집니다. 생활고 속에서 변해가는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자연주의 기법으로 묘사합니다. ‘감자’를 읽고 하는 토론 주제는 복녀의 타락은 복녀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인가? 정도로 보통 이야기 하는데요. 용현여중 3학년 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복녀가 정말로 왕서방을 사랑한 겁니다. 그래서 질투하고 싸움이 난겁니다.’ 이 말은 복녀의 모습을 사회의 도덕적 잣대로 보지 않고,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해 나간 여인으로 보는 겁니다. 복녀는 악착같이 살려했다. 그녀는 비겁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주체적인 삶의 시선을 던진 겁니다. 놀라운 발언이었습니다. 이렇듯 같은 책을 읽어도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차이에서 배웁니다. 배움은 나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생깁니다. 인천 서구 가좌동 지역에 Freedom Books Individual-thinking(F.B.I. 사제동행인문학동아리)가 활동했습니다. 5개 중학교의 선생님들과 제자들이 한 달에 한번 한권의 책을 읽고 오전10시부터 3시간 동안 토의 토론 발표 등을 했습니다. 20~25명 정도의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갈매기의 꿈’을 읽고 조별 토의를 합니다. 다른 학교의 학생, 다른 학년의 학생과 나누는 대화는 답을 찾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그런 조별활동을 내용을 그대로 발표합니다. 전지에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와 율동으로도 표현합니다. 연극으로 발표하고 웅변으로도 합니다. 배우는 이유가 세상에 나를 등장시키고 무언가 이루어내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를 어떤 경우에도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이 조별 활동 모습은 웃고 떠들고 재밌는 풍경입니다. 다른 조의 발표 내용이 같을까요? 표현 방법이 같을까요? 전혀 다른 생각과 표현을 보면서 다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배움의 자세로 존중하게 됩니다.
5. 세상이 배움터, 활동하라.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등장하라. 그리고 나와 다름, 차이를 만날 때 배움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다름이 거부되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리낌 없이 다름을 찾아 세상구경을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배움터니까요. 직업체험의 날 행사로 직업체험부스를 구경꾼처럼 쭉 돌면 배움이 일어날까요? 정말 바리스타, 제과제빵사, 세무회계사, 은행원, 교수, 과학자가 되고 싶나요? 어떻게 하면 구경꾼이 아니라 나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찾아가는 겁니다. 직접 만나는 거예요. 30명, 200명 이렇게 다니지 말고요. 혼자나 관심 있는 친구 서너 명과 같이 가는 겁니다. 미리 편지나 사전 인사를 통해 약속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정말 여러분이 듣고 싶은 것을 묻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그보다 소중한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인천청소년기자단 친구들이 하는 활동 중에 자신이 만나보고 싶은 직업인을 인터뷰하는 활동이 꼭 있어요. 김진초 작가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작가라는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뭔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지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아이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독서를 시작했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버릇은 결혼 후 까지도 계속 되었는데 어느 순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어요. 그래서 바로 그 길로 서점에 달려가 휘트 버넷 공저의 <소설 작법>을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청소년기자가 인터뷰에서 어떻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작가가 되어보니 어떤지? 작가 지망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등을 묻는다면 청소년기자는 그것을 정보로 들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소중한 시간입니다. 인생이야기를 대선배에게 듣고 있는 겁니다. 청소년기자에겐 황홀한 배움의 시간이 됩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만남입니다. 가좌동에 김광성 화백이 삽니다. 동네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중학생이 찾아옵니다. 만화에 소질도 있고 만화 그리기를 정말 하고 싶은 거지요. 김광성 화백이 어떻게 할까요? 동네에서 이런 만남이 불가능 할까요? 바리스타를 배우고 싶은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학원에서 배울 수도 있지요. ‘희망을 만드는 마을사람들’이라는 단체에서 학생들에게 바리스타 교육을 합니다. 직업인의 세계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을 어른들이 만든 거죠. 여러분도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해서 만나고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 배움의 장을 넓히세요.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 마을과 지역으로 나가보세요. 체험학습을 구경하지 마세요. 자신이 경험하고픈 일을 선택하고 계획해서 직접 하는 겁니다.
기억해보세요. 역사체험은 학교에서 박물관 체험학습 또는 수학여행 때 합니다. 어떻게 하나요? 어떤 것을 배워 오나요? 길게 줄지어 한 바퀴 도는 모습입니다. 구경하는 곳이죠. 당연히 재미도 없습니다. 2015년 5월에 역사공부에 관심 있는 5명의 청소년이 민족문제연구소에 다녀왔습니다. 스스로 신청하고 조사하고 김승은 자료실장에게 한 시간 동안 보관 중인 자료에 관한 설명을 듣고, 한 시간 동안 인터뷰 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했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따른 우리의 올바른 대응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최근 일본 아베정권의 역사왜곡이 날로 심해지면서 민족문제 연구소와 같은 시설이 더 늘어나고 확충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는 많은 체험활동에 참가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능동적으로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우는 모습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고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세상에 내 생각을 드러냅니다. 내가 활동의 장을 넓힙니다. 스스로 나의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행함으로써 능력을 키웁니다. 내 능력을 키운다는 것은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즐겁고 자존감을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나가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나를 등장시키면서 말입니다.
6. 다름을 만나면 싸울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배운 것 중 역지사지란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는 거지요. 이게 쉽지가 않다는 게 문제지요. 중1학생이 수행평가 과제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나눔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나는 나눠주고 싶지 않다. 나눠주다 보면 내가 힘들어진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본 부모님이 불같이 화를 내고 글을 고쳐 쓰게 했습니다. 일장연설을 하면서요. 어때 보여요? 이 부모는 자녀와 대화로 만난 걸까요? 아니었겠지요.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른들 친목회에서 강원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순두부 식당에 갔는데요. 빨간 고추기름과 채소와 조개 등이 들어간 순두부가 아닌 거예요. 그냥 순두부만 있고 양념이 안 된 강원도 순두부였습니다. ‘순두부가 뭐 이래? 이런 식으로 음식을 만들면 안 되지.’ 누가 말했습니다. 경우는 달라도 나와 다른 것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많지 않나요? 처음 참석한 모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첫 인상으로 ‘저 아이 이상해’하고 외면하거나, 프로그램에 참석했는데 ‘나와는 안 맞아. 더는 안할래.’ 이런 경우 떠오르지요. 반대로 내가 상대방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꾸중하실 때 섭섭한 마음이 드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서운한 이유도 그렇지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죠. 이런 모습이 일상에서 나와 다른 세계를 만나는 모습입니다. 다름과 차이를 만났을 때 배움이 생긴다고 앞에서 말했는데요. 역지사지가 과연 가능할까요?
만남은 나와는 다른 세계를 가진 타인을 만나는 겁니다. 타인을 만나는 게 가능할까요? 역시사지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보는 방식으로 타인을 보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례를 보세요. 내가 아는 방식이 정답이지요. 타인은 틀립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가 보입니다. 내가 변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다름을 만나야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름을 거부하고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갑니다. 이럴 때 다름을 만나면 싸우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삿대질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때 필요한 것이 ‘판단중지’입니다. 나의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보는 시선을 멈춰야 합니다. 그건 폭력입니다. 판단중지. 그리고 이때부터 역지사지를 기억하세요. 그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 걸까? 그의 방식대로 생각하면 무엇을 얻게 되나? 무엇을 희망하는 거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읽어보는 겁니다. 이럴 때 나와 다른 타인을 조금은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배움의 가능성이 이 순간에 생깁니다.
7. 자유롭게 나의 세상을 만들자
어디에서도 구경꾼처럼 살지 맙시다. 주인은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은 무언가를 하려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구경꾼보다 훨씬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도전해 볼 것이 무진장 많이 생깁니다. 아슬아슬한 모험의 세계가 널려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변화합니다. 그게 배움입니다. 배움의 과정 속에 창조하는 내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무한 창조자입니다.
새로워지고 싶습니까? 변화를 통해 성장하기를 원하나요? 그렇다면 낯섦, 다름을 반기세요. ‘이래야만 해!’ 와 같이 당위로 만들어진 세상에 살기보다 ‘나는 이거 하고 싶어!’ 와 같이 내가 직접 만드는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럴 때 세상은 온통 배움터입니다. 즐거운 놀이터가 됩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나의 세상을 창조합시다.
YouTube에서 'Sweet Baby Experiences Rain for the Very First Time' 을 보세요. 비를 처음 맞아보는 어린아이의 반김과 즐거움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아이는 처음 비를 만난 겁니다. 맨발로 뛰어나가 비를 맞고 두 팔로 반기며 깔깔깔 웃는 장면입니다. 그런 장면처럼 우리가 다름, 낯섦을 맞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이 늘 새로울 것입니다. 늘 활기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