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청난 양의 다이어리를 올리는 셈인데, 얼마 전엔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정확히는 25년 동안, 정신분석 혹은 정신의학, 심리학의 일반적인 의학적 테크닉에 힘입어 내가 직접 체득하여 얻은 일반적인 노하우들을 정리하여 올리고픈 생각이 들었다.
자, 그리하여, 아래에 적어본다.
의사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힘들때 견디는 방법 세 가지이다.
하나는 우는 것이다. 우는 것은 건강에 상당히 좋다. 너무 우는 것은 생리학적으로 문제가 좀 생기겠지만, 적당히 자기가 조절해 가며 우는 것은 정신 건강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남자는 울면 안 되, 뭐 이런 멍청한 생각은 앞으로 개나 가져다 주도록!
둘째는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성급히 함부로 판단하거나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사람에게 찬찬히 얘기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즉 당신이 세계에 대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세계는, 타인은 당연히(!) 당신을 모른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몰랐던 자기를 알아가는 행위이며, 자신의 감정을, 느낌을,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가 된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드러낼 용기가 없다면, 당신은 영원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고통받게 될 것이다.
오직 용기 있는 자만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only the brave takes the beauty.
그러나 물론 이는 시도 때도 없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아무에게나 궁상을 떨고 부담을 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당신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 들으려는 상대에게조차 말을 못한다는 것은 그저 당신의 궁상, 무능력, 병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이 용기를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해 없이 왜곡 없이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말을 남의 말들로 듣고 기억하지 않고 자기 단어로 자기 말로 바꿔서 기억한다. 그게 아니라, 그의 말로, 그의 목소리로 듣고 기억해야 한다. 즉 이해는 능력이다. 노력하고 실수하며 조금씩 매일매일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상의 두번째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리고 사실상 그런 사람이 있든 없든, 당신은 당신과 대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번째 방법은 글쓰기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숙고하여 쓰는 글과 자유연상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아, 물론 그전에도 이미 당신이 쓰는 글에는 이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에게 보여주고자 쓰는 글, 예를 들면 싸이 다이어리 같은 글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 결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이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삶을 사는 것처럼,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남에게 보여주는 글에도 가급적 정직하고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다.
여하튼 우선 숙고된 남에 보여주지 않는 글은 그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일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는 무지하게 솔직하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다음으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글쓰기의 두번째 유형으로 자유연상이 있다. 이는 프로이트적 글쓰기, 이후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채택한 자동 기술법과도 유사한 것인데, 자기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 연상, 느낌을 무조건, 즉 아무리 비도덕적이고, 아무리 무의미하고, 아무리 비논리적이고, 아무리 상관없어 보일지라도, 무조건 연상되는 대로 적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런 글쓰기는 쓰다가 자기 스스로가 무서워지는 그런 글쓰기이다. 자기가 생각도 못했던 자기가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에 글쓰는 이는 심리학의 법칙, 즉 "두려워하면 오히려 실현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은 그것을 대면하여 그것을 콘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연상적 글쓰기는 '절대로' 남이 보아서는 안되는 글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숙고하여 쓰는 나만이 보는 일기도 그렇지만, 이 두번째 글은 그저 자기 마음의 연상이므로, 더욱 더 그러하다.
예를 들어, 내 친구가 죽고 내가 그 애인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혹은 우리 부모가 죽고 내가 그 재산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같은 글은 아무리 잠시의 연상이라도 만약 당사자가 보았을 경우, 심지어 그것이 당신의 본심이 아닌 경우에도, 그 당사자는 그것으로부터 일생 동안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이글을 쓰는 당신에게 조언을 해야 한다면, 이를 메일 혹은 한글에서 치고 마지막에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해주겠다.
사람은 누구나 부도덕한, 혹은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소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또 때로는 그것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고' 싶은 경우도 있다.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고 글을 적었다면, 그것은 당신이 반드시 실제로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기보다는, 대개 우리 아버지가 저러지 말았으면, 하지만 그는 사실상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므로, 내게 남은 것은 그저 답답함, 분노 그리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 하는 순간의 소망인 것이지, 그가 실제로 당장 죽기를 바라거나, 그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기 때문에, 더욱 더 큰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자유연상을 통하여 쓰는 글은 자기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연상하는 것이아니라, '당신에게 연상되어지는 대로 받아 적는다'는 개념에 가깝다.
이렇게 글을 받아 적다보면 당신은 보통 당신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데, 나로 말하면, 보통 장수로 팔절지(옛날에 내가 처음 이걸 할 8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 컴퓨터가 없었다)로 3~5 장 정도가 되면 매번 희한하게도 내가 모르던,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랄까, 그런 것에 도달하게 되면서 '저절로 글이 멈추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몰랐던 나를 알게 된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나는 그 사실에 대하여 자유, 그것을 콘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는 마치 내가 내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당신은 항상 그들 둘과 함께 있고자 하며, 실제로 같이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분명히 의식적으로 명확히 알고 있다면, 나는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 나의 책임 하에. 그를 덜 보거나, 혹은 그를 쟁취하기로, 혹은 그에게 고백하기로. 후자는 당신의 자유로 선택한 당신의 책임이며, 전자는 당신이 지는 게임이자 사실상 모르고 싶어했다는 의미에서 더 큰 당신의 책임이다.
당신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자유롭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의 분량이 팔절지 3~5장인 것도 흥미롭다. 이는 마치 고민을 들어줄 때 그 말하는 시간이 40~45분은 되어야 말하는 사람이 좀 이야기를 했다고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40~45분을 내 얘기를 들어주면, 좀 하소연을 제대로 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기분이 나아진다.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40~45분을 잘 들어주라. 그리고 나서는 물론 여러분이 좀 피곤해질테니 그때는 이제 당신도 말을 좀 하라. 그리고 당신이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다면, 이 말을 먼저 하고 그에게 부탁을 하라. 40~45분을 말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니 일단 그 만큼은 내 얘기를 좀 들어줄 수 있겠니, 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들어준다는 것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듣는 것, 즉 마음을 열고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적당한 순간의 반응, 눈빛, 질문, 공감, 때로는 전체적 맥락을 손상하지 않는 정도 안에서의 가벼운 반박와 반대마저도 짧은 순간이나마 종종 섞어가며,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그의 말을, 그를 이해하고자, 듣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왜 그정도를 써야 자기의 모르던 본심을 알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하다. 내 생각하기에, 이것이 말하기, 듣기, 글쓰기의 심리학 혹은 아마도 생리학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내가 개발한 자기와의 대화를 위한 글쓰기의 테크닉 몇 가지가 있다.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대학 입학 이래 25년 동안 해왔다.
하나는 자기에게 편지쓰기인데, 이건 좀 많이 알려진 것이다. 다만 솔직하게 아주 정직하게 쓰지 않으면 다 필요없다. 글쓰기는 자기 연민과 궁상과 원한과 복수와 도덕적 분노, 열등감과 우월감, 자기 혐오의 대축제가 아니다. 정직하게 써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자기를 알려는 것, 자기의 있는 그대로와 대면하는 것, 자기가 되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용기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가 되어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디테일한 것은 틀릴 수 있지만, 그와 내가 오랜 시간을 본 사이라면, 이게 신기하게도 기본적인 느낌과 생각 같은 게 대부분 맞는다. 인간은 역시 상호작용하며 상호이해하는 동물이다. 머리로는 몰라도 몸이 이미 그걸 항상, 늘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신문 기사 혹은 보고서처럼, 당신에게 일어난 일, 특히 당신의 감정을 그때 그 순간의 당신이 되어 객관적으로 기술, 묘사해보는 것이다.
'나'를 주어로 써도 좋지만, 그보다는 '당신'과 '상대의 실제 이름'을 넣어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기술해보는 것이다. 상대는 당신의 친구일 수도, 애인일 수도, 당신의 부모일 수도, 혹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만약 김병민이란 학생이 적어본다면, 이런 식이다.
"김병민은 자기 친구 서민호와 만났다. 서민호는 자신의 애인 김연정과 있었다. 김연정은 어땠는지 몰라도, 김병민은 김연정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후 김병민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는 질투에 사로잡혔고 괴로웠다. 그래서 김병민은 ..."
그러니까 냉정하게 일어난 일, 사실만, 자신의 감정의 사실까지 포함하여, 적어보는 것이다. 이는 물론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글쓰기'이다.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기. 자기를 안다는 것, 자기의 느낌과 생각, 소망, 꿈을 정확히 안다는 것 이상의 미덕이란 이 세상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하여 너를 배려하라.”
이것이 소크라테스에서 푸코로 이어지는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라는 서양 사상의 날줄과 씨줄이다.
나의 윤리학은 당신에게 결국, "어떤 경우에도 자기에게 정직하라"는 말밖엔 해줄 게 없다.
그런데 과연 내가 정직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보다 더 정확히 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하고, 그리하여 나를 배려해주고 싶다.
역시 나는 실존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어떤 경우에도 속일 수 없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나쁜 말만 아니라 좋은 말에 대하여도 자신을 속이는 세상 사람들 그리고 나를 본다. 설령 내가 공부가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라 해도 나는 친구들 앞에서는 보통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 시험 공부하기 지겨워, 수업 너무 졸려, 오늘 휴강 됐어, 너무 신나네."
왜? 다들 그렇게들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나는 좀 공부하는 걸 좀 티내는 그런, 잘 난 척하는 인간이 되기 때문에.
이는 물론 학습된 효과이다. 학습된 효과란 결국 남의 말이며, 사람들의 말, 그리하여 무책임한 말이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모든 문화 혹은 사회는 어떤 일에 대하여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일종의 공식들, 코드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물론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매번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매번 새로 생각해야 한다면, 그것은 좀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남의 말이며 느낌이고 나의 진실된 느낌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남 혹은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만의 참으로 진실된 느낌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한 나의 느낌은 정말 나의 느낌일까? 그리고 나의 감정은 정말 나의 감정일까?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반드시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사람들(그놈의 무책임한 '사람들'!) 앞에서 그걸 항상 찾아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마저도 우리 자신의 연극에 속아넘어 갈 때가 있다. 학교는 재미없고, 휴강되면 좋고, 술 마시는 건, 앗싸, 신나고, 아, 약한 모습, 쫀쫀하게 수업은 .... 등등. 술 마시는 게 신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자기의 느낌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의 말'(그놈의 '말'!)에 파묻히는 게 문제란 말이다. 술 마시는 거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귀찮다. 매 순간의 그 느낌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너 자신을 알고자 하란 말이다.
앞서 나왔던 말로 이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하여 너를 배려하라!"
그런데 희한한 것은 자기에 대한 배려 혹은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순수하게 아무런 꺼리낌 없이 대면했을 때, 그것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좋은 아름다운 보고싶은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한 추악한 보고싶지 않은 모습마저도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을 때, 나에 대한 인간의 참다운 사랑이 샘솟는다. 왜 그것이 그때 샘솟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샘솟는다.
나도 대학생이던 이십대 때 엄청난 자기 혐오에 빠져 거의 이십년 동안 사진 한 장도 안 찍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가증스럽고 특히 도덕적으로 위선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었다. 나는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내가 싫었고, 무의식적으로 갖가지 방식을 통해 '추악한' 나 자신을 처벌했다.
나는 이기주의자이고, 인간 쓰레기이며, 혐오스러운 인간이다. 인생이란 살 가치가 없고, 나의 삶은 특히 그러하며,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고, 오직 차라리 처벌 받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빨리 죽지 못하고 살고 싶어 안달하는 나를 더욱더 경멸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욱더 강력하게 처벌했다. 그리하여 나 자신 대한 자기 혐오는 더욱더 강력해져만 갔다.
나는 그때 양심의 가책 자체가 형성된 것이며 사실상 병이라는 니체의 말, 지나치게 강력한 도덕적 자아, 슈퍼에고 자체가 강력한 정신의 질환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여 그렇게 내가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면, 그래 죽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앞서 말한 글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을 쓰며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도덕적으로 악한 인간도 아니고, 위선적인 인물도 아니며, 인간 쓰레기도 아니고, 그렇게 혐오할 만한 인간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러한 생각 자체가 과거 어린시절의 잘못된 학습에 의한 병이요, 증상이었다. 그것은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었으며, 그래 내가 그렇게 악한 인간이라면, 그리고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면 차라리 죽자, 하고 용기를 내는 순간, "죽긴 왜 죽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후로 그러한 생각은, 이상하게도(!),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왜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저 심리학의 운동 법칙, 메카니즘이 그렇다는 것만을 이해했을 뿐이다.
심지어 내가 그렇게 괴로워하던 나 자신에 대한 자기 합리화, 말만 잘 한는 놈이란 말조차도 병의 한 증상이었다. 진나친 자기 처벌은 그저 병이다. <<노자>>의 "병을 병으로 알면 더 이상 병이 아니다"라는 말이 너무도 정확한 의학적 언사라는 것을 나는 나의 몸으로 이해했다.
나는 자기 합리화를 행하지 않고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나를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니 나는 그렇게 나쁜 놈도 좋은 놈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아마도 남들과 똑 같이, 젊은 시절 지나친 도덕적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그저 평범한 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내가, 나쁜 놈보다는, 차라리 '괜찮은' 놈에 가깝다는 사실마저도 알게 되었다. 나의 자기 존중감은 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행복에 대한 느낌이 있다. 너의 불행은 실제의 불행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린 시절의 학습에 의해 생겨난 병의 증상, 징후이다. 심지어 보통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너의 노력마저도 그 병의 또 다른 증상이다. 너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여 그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저 인생이란 다 원래 불행한 것인 줄 아는 것이다. 너는 행복을 상상하지조차 못한다. 불행이 네 인생의 근본 느낌, 근본 기분이다. 그리하여 너는 불행한 것이 너의 '당연'인 줄 알며, 그것이 다만 만들어진 구성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행복할 수 있다.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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