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근거 - 김근태씨의 최근 책에 바치는 헌사
1. 自書: 무엇을 말해야 할까. 해야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모두들 - 어쩌면 이미 벌써 지나간 것이지만 - 신세대의 도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말한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또한 나는 이 자리에서 모던의 부흥과 더구나 구세대의 자기 위상 선언이라는 시의가 지났고 그렇기에 호응을 얻지 못할 때늦은 한판굿을 벌일 의도는 없다. 다만 나는 오늘 서점의 진열대에서 본 김근태씨의 책에 대해, 그리고 그 책에 대한 나의 감상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그 책의 제목에 깊은 공감을, 아니 심지어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그것은 아마도 장기표씨의 저작 전집인 ‘사랑의 정치를 위하여’라는 다소 상당히 황당한 책제목 이후, 정말 오랫만에 느껴보는 공감의 파도를 내 마음 속에 몰고왔다. 이 공감은 그 제목들을 내가 나의 글 혹은 책에 사용해보고 싶은 욕구를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이하 아래 부분에서 그의 이름이나 책을 들먹이지는 않겠다 - 나는 그를 너무나도 가깝게 느끼어 그를 결코 존경하지는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글은 온전히 한국의 어느 한 철학도가 한 소박한 혁명가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다. 그리고 나 또한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나의, 혹은 우리의 희망의 근거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나는 참으로 늦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너무도 때늦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나의 부끄런 고백을 하고 싶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내 가슴으로 느끼는 말들, 나의 말들, 내 삶의 근거에 대하여.
2. 이른바 ‘신세대’ 개념에 대하여1: 전번 모임에서도 내가 소략하게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이른바 ‘신세대’의 개념이 - 전혀 의미없는 무의미한 조작개념은 아니라 할지라도 - 그리 적절하거나 타당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모임에서 타불선생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나 또한 이에 약간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즉 보편 혹은 일반 명사로서의 ‘구’(舊)세대에 대비되는 ‘신’(新)세대는 언제나 있어 왔다. 이에는 무슨 특징적 혹은 일회적 - 그리하여 그것만에 고유한 - 특성이 강조될 이유가 없다. 언제나 어느 시대에나 신세대, 즉 새로이 나타난 보다 젊은, 보다 새로운 세대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른바 ‘젊고, 패기에 차있고,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이며, 또한 경험이 적고, 때가 타지 않았고, 또 뭘 모른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우리 시대에 이른바 90년대 이후 새로이 나타난 혹은 나타나고 있는 이 새로운 세대는 (보편 혹은 일반 명사가 아닌 그 세대를 특칭하는) 이름이 바로 ‘신세대’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일반 명사로서의 새로 나타난 보다 젊은 세대를 ‘새세대’ 혹은 ‘새로운 세대’로, 그리고 이른바 90년대 이후 우리 남한 사회에 새로이 나타난 새로운 세대를 특칭하는 명칭을 고유명사로서의 ‘신세대’로 부르기로 약속하자.
3. 생성적 보편성: 인류학은 처음에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그것을 스스로 부정한다, 아니 적어도 하고자 한다. 요즘 전경수의 똥이 자원이다(통나무, 1992)를 일고 있다. 그 앞에 김용옥의 서문이 붙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當然을 보았다: “... 철학의 보편성은 사유의 주체로서의 이성의 보편성인데 반하여 인류학의 보편성은 이성을 포괄한 동물로서의 총체적 행위의 보편성이다. 철학의 보편성은 존재의 보편성인데 반하여(the Universality of Being) 인류학의 보편성은 생성적 보편성인 것이다(the Universality of Becoming) ... (중략) ... 철학이 이성주의적 신택스의 질곡에 철저히 빠져들어갈 때(분석철학 등의 경향), 이러한 이성주의의 편협성에 반기를 든 학문이 바로 인류학이라는 학문이었고, 인류학은 철학이 단지 이성주의적 방법론의 편협한 틀 속으로 퇴색되어갈 때, 인류를 알 수 있는 모든 분과과학의 성과(the World of Becoming)를 종합하면서 만학의 제왕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서구라파 인문과학의 주류는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언어학과 인류학이라는 이 두 학문이 장악하였고 철학은 과거의 분석명제만을 되풀이할 뿐 하등의 새로운 종합명제를 창출하는데는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30-31쪽).
4. ‘나’(Ich)? : 이 글을 나는 엄청나게 많이 뜯어 고쳤다. 이 글의 내 삶의 한 단면 혹은 한 단층을 나타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웠고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 하지만, 언제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었던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 시도해볼만한 적절한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다만 나의 글을 평상과 다름없이 또 한 편 썼을 뿐이다. 그것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이 글은 무엇보다도 ‘나’이다.
5. 김용옥의 말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1: “나의 희비와 무관하게 막은 오른다. 8-1: 나는 지금 팔리앗치의 카니오를 생각한다. 자기 인생의 희비와 무관하게 막이 오르는 무대의 삶을 저주하는 카니오의 울부짖음을 나는 듣는다. 나는 시간의 그림자의 늙은이를 생각한다. “그대는 누구요? 어둠을 홀로 헤매는 그대는 누구요? 뭘 찾고 계시오?” 나의 삶은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오로지 좌절 속에서만 나는 성장했고, 나의 알라야식은 업보를 낳았다. 나는 나의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위선과 오만을 감지한다. 좌절을 오만으로 극복한 나의 삶의 끊임없는 좌절을 다시 체험할 뿐이다. 나의 기철학은 이러한 좌절 속에서도 죽을 수 없었던 나의 혼의 독백이다.”(김용옥, 氣哲學散調, 71쪽, 통나무, 1992; 강조는 인용자)
6. 이른바 ‘신세대’ 개념에 대하여2: 나의 생각에 이른바 ‘신세대’라는 개념은 이전의 8.15 세대, 6.25 세대, 4.19 세대, 5.18 혹은 광주 세대, 민중 세대 등등의 세대 규정과는 달리 타자에 의한 자기의 타자적 규정이다 - 물론 이들 중 앞의 3자에 대한 규정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타당하고도 적절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3자는 각기 해방과 6.25 동란, 4.19 혁명이라는 명백한 (세대 규정적) 정치사적 사건이 있다. 혹자는 이를 논점선취의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앞의 3자와 후의 양자가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른바 후자의 둘에는 (학생과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광의의) ‘민중’이라는 목적 의식적 자기 규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이는 아마도 우리 신문 만화가들 중 안의섭이나 오룡과 같은 4.19 이전 세대, 4.19를 거쳤고, 따라서 일정 정도의 시민사회적(?) 각성이 엿보이는 김성환(고바우)이나 정운경(왈순아지매) 그리고 특히 이홍우(나대로선생) 등과 같은 보다 이후 세대, 그리고 박재동(한겨레 그림판) 혹은 최정현(반쪽이) 혹은 이희재 등의 최근 세대로 가장 적절히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대략적 구분은 그것이 갖는 도식성, 즉 이두호나 허영만 같은 탁월한 작가들을 이러한 이론틀이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각설하면, 이른바 ‘신세대’라는 개념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자기 규정이 아니다. 어느 신세대도 자신을 신세대라고 스스로 규정하지 않았다(이는 이른바 이전의 ‘광주’ 혹은 ‘민중’ 세대라는 명칭이 부여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훨씬 명확해진다. 그것은 명백히 그들 자신이 그 사건 혹은 그러한 계급에 대한 복권과 옹호를 자기 의식적으로 천명,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세대란 명칭은, 나의 견해로는, 오직 기자들(journalists)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의 의식 세계 혹은 그들의 행태를 뜻하는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주는 의미 중 한 가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한겨레신문 김중배 논설위원의 지적대로, ‘독재’라기보다는 ‘자본의 음모’에 가까운 것이었다 - 플리즈, 저주 있으라! 마음이 악한 너 저널리스트들이여! 내가 아는 바로는 이른바 ‘신세대’는 기자들의 명명 이전에 한번도 자신들을 ‘신세대’란 용어로 지칭한 적이 없다.
7. 두 개의 학교: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두 개의 학교가 있다. 그것은 물론 제도로서의 학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인생학교’라는 의미이다. 하나는 내가 학부때부터 관여했던 연합써클 문화연구회이고, 또 하나는 내가 창간독자이며, 지금도 집에서 구독하고 있는 한겨레신문이다. 문화연구회의 경험에서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고, 한겨레신문에서 나는 내가 자신의 주변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배운다 - 만약 ‘배우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비판적 자기 숙고를 한다. 그 둘은 나에게 정말 인생의 학교이다.
8. 김용옥의 말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2: “이 책, 여기 이 주책없는 용어로 토해놓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이 책은 이 집필과정 그자체가 나의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의 압축이다. 내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성장하여 그 세계관을 탈피하기까지의 과정을 토로한 것이다. 물론 탈피된 내용인 나의 기철학 그자체는 여기 언급되어 있질 않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시대를 같이 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세계관을 탈피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이 땅의 모든 이상주의적 성향의 자각인들이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감히 말하건대 그 탈출에 최초로 성공한 이 역사의 단 한사람이 바로 도올 김용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자만이나 과시가 아니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현실이다!”(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에필로그」, 296쪽, 통나무, 1989)
9. 마지막 글쓰기: 타자에 의한 이른바 신세대의 ‘자기 선언’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라는 (계몽주의의 적통을 이어받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의 입장에서 보면, 물론 아직 그들의 ‘자기 각성’이나 ‘자기 선언’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저널리스트들에 의한 타자적 자기 규정이며, 그 뒷배경으로서의 자본의 음모에 의한 하나의 조작 개념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며, 또 나는 자본의 음모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자본의 음모라 ... 그것은 과연 오늘의 우리에게 곤혼스런 이중적 개념이다.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최소한 현실적 대응 능력을 상실한 오늘, 너는 자본주의자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는 실현불가능하고 실현되지 않을 비현실적 급진적 선언과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어 ... 라는 류의 변명(Bullshit!)을 남기고 결국 체제 속으로 흡수되어 그곳에 적당히 잘 안착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장정일이 자신의 독서일기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영화일과 먼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영화에 대해 가차없고 단언적 비판을 한다’는 말이 비단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리라 - 인샬라, 그들에게는 하늘의 성기지만 놓치는 적이 없는 그물이 적절한 댓가를 치뤄주리라. 나는 언제나 ‘여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 물론 이 말이 지금 신한국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삶의 중심에 서서 사물을 인식해라라는 정언 명법, 아니 차라리 도구적 조언이다. 자본과 자본의 음모라는 말 사이에는 커다란 현실 인식의 간격이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해 현금의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인정은 긍정이 아니지만 그 두 가지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서는 나 자신 회의적이다 ...
10. 시작(beginning): 나는 이제 이전까지의 근대적 글쓰기를 좀 안 써볼까 ... 하고 생각한다. 벌써 몇일이 지났다. 결국 신세대 개념 구성의 계보학이라는 이 글의 목표도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모든 것은 중단된다. 나는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해볼까 생각해본다.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시작으로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il faut commencer par le commencement).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말대로 영원한 시작, 끊임없는 시작, 언제나 새로운 자기 부정으로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글을 시작하고 싶다. Start!
11. 김용옥의 말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3: “교보문고같은데 나가서 책을 휘둘러 보면 문학부분에서는 죽이됐든 밥이됐든 애숭이 같은 작가들을 놓고서라도 그들보다 공부를 많이 하신 거대한 석학들께서, 대학교수의 존경스러운 직함을 지니신 평론가들께서도 서슴치 않고 “×××論”을 쓰고 계시다. 나의 이러한 표현에는 조금의 야유도 들어가 있질 않다. 이것은 매우 정당한 것이며 그래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존작가들에 대한 서로의 탐구가 이론적 분석의 시각이 엇갈리며 활발히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분야에 가보면 하바드나 기타 외국대학의 애숭이 철학교수들의 위대한 철학을 골머리아픈 언어로 치밀하고 거룩하게 소개를 하고 계시면서, 우리나라 기존의 철학자에 대한 평가나 평론은 쥐뿔개뿔도 없다. 예를 들면, 박종홍선생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찬양을 해야하든 가혹한 비판을 해야하든, 그분 자신의 철학에 대한 비평논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책을 쓰며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조차도, 내가 애지중지하는 직접제자들 조차도, 프랑크프루트학파니 뭐니 하는 외국의 애숭이 철학자들의 사상은 위대하게 생각하고 논문을 쓰면서도 이 “김용옥철학”이라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으며, 하물며 “김용옥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논저를 써보겠다는 불경스러운 생각은 생각조차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왈, 김용옥은 아직 미완성품이다 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김용옥의 완성품은 이 우주의 시공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나의 몸부림, 바로 그것이 완성된 오늘의 철학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없는가? 언제 그대들의 사유는 그렇게도 철저하게 철학이라는 유토피안적 환상의(utopian illusion called philosophy) 노예가 되어버렸는가? 기철학이고 뭬이고 나는 내일 뒈져도 상관없다! 나를 쳐다보지 말고 너를 쳐다봐라! 그대 너 그대의 오늘을 직시하라!”(라오서지음, 루어투어 시앙쯔, 최영애옮김/김용옥풀음, 「푸는글: 잔잔한 미소, 울다 울다 깨져버린 그 종소리 -최근세사의 한 반성으로-」, 윗대목 171-172쪽, 통나무, 1986; 강조는 인용자)
12. 희망의 근거1: 희망의 최대근거는 그가 희망을 갖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13. 신부족언, 유불신언(信不足焉, 有不信焉) - 아, 성인이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나는 나 자신의 인간 관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 그들과 내가 다른 것도 또 그들과 내가 앞으로 더 많이 달라질 것도 알고 있었고, 그들도 나에게 많은 말들을 하고, 또 그들과 많은 서약도 하였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시각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들과 내가 계속 이전과 같은 인간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보다 성숙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그만 여기에서 그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 인생의 문제들은 언제나 언어와 논리 이전의 어떤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나의 그것과는 많이 다름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다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드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듯이 문제는 그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들은 고통받고 있다. 아파한다. 나는 그들이 안스럽다. 나는 기다린다. 광폭한 혹은 극단적 선택은 반드시 인간의 몸에 앙금을 남길 것이다. 말이란 한 번 내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아직도 나는 우정과 함께 나눈 추억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 몸에 업(業)이 아니라 덕(德)을 쌓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작은 슬픔과 또 그보다 더 커다란 고통에 떤다. 나의 머리통은 찢어진다.
하지만 또 같은 일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So What? 도대체 그 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천하의 단 한 사람 바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에게 앙금이 남으면 또 어떻겠는가? 사람이란 아무도 괜히 그러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행동에는 자신만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 그럴만 하니까 그러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앙금(찌꺼기)조차 과거로 흘려버리면 그 또한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보다 좋은 것이다. 더우기, 나는 성인이 아니다. 嗚呼 痛哉! 성인, 성인이란 도대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오늘에 와서 살펴보면, 어쩌면 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대상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이 ‘생성의 보편성’이 만약 비극(悲劇)이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철학을 하지 않겠다.
14. 사랑으로? - What a Bullshit!!!: 나는 이제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사랑으로? 나는 그런 것은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부족한 것(love is not enough in itself)이라고 나는 느낀다 - 아, 지금 老子가 생각났다. 나는 그들을 ...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자. 나를 잘 아는 나는 그때 그들에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하고 대답하게 되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인생인 것이다(C'est la vie). 그렇다. 죽어야 할 놈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패배한 자들은 패배한 자들대로, 승리한 자들은 승리한 자들대로, 견디어 내는 자들은 견디어 내는 자들대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나가게 될 것이다.
15. 오해를 사는 말1 - 인간성: 그 좋은 humanity 라는 용어의 번역인 ‘인간성’이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부정적인 뉘앙스만을 갖게 되었을까? 우리 말에서, 어떤 그 혹은 그녀의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그 사람에 대한 치명적 독이 된다. 물론 사람은 仁(human)과 不仁(inhuman)의 두 날개로 나는 한 마리 새임을 사람들은 모른다. 세상에는 이해하며 사는 사람과 이해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쌍히 여겨지는 사람과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 사람이란 그칠 때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큰 화는 없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적을 가벼이 여기면 세 가지 보물(부드러움, 아낌, 하늘아래 앞서지 않음)을 다 잃는다고 했다 - 나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할까? 하고 궁금해 한다.
16. 두 명의 젊은 사상가: 요즘 내가 좋아하는, 이 말은 내가 그의 책을 읽을만 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두 명의 젊은 작가가 있다. 하나는 최근 박영률출판사에서 와우!!라는 책을 낸 김용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문학동네에서 소설의 운명을 낸 서영채이다. 소위 문화비평(?)과 문학비평(?)이라는 쟝르가 갖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눈앞에 펼쳐진 진흙탕 속에서 앞으로 그곳에 피어날 연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카스토리아디스와 김병익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책을 읽는 것은 요즘 나만이 갖는 작은 기쁨이다.
17. 희망의 근거2: 이 세상에는 말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18. 오해를 사는 말2 - 낙관적 회의주의자: 나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프로이트가 말년에 말했던 대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쓰레기들이다 - 이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 흉중의 속내 얘기를 남몰래 듣는 특권을 누렸던 의사 프로이트가 평생의 의료 실천 후에 발한 비관적 언사이다! 내 짧은 30여년 남짓을 평심하게 살펴본다면, 나는 이제까지 근거없는 비현실적 낙관주의자였다. 나이 서른이 넘은 오늘 이제는 근거없는 비현실적 회의주의자가 되고 싶다. 이 양자의 공통점은 근거없다는 것, 비현실적이란 것,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염세주의가 되질 못하리라는 것이다. 어찌! 그래도 나는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싶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이 모든 말들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적이다. 더우기 나 아닌 다른 인간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나는 낙관적 회의주의자다.
19. 우리 갈기회의 멤버인 전기철군이 오늘 4월 19일(금) 12시 30분, 대구 수성관광호텔 예식부에서 결혼식을 한다. 평일 낮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시간들이 되면 다 같이 참석했으면 좋겠다. 광화문 경복고등학교 정문 옆의 새사람선교회 앞에서 당일 아침 7시에 대구로 가는 버스를 대절했다고 한다. 신혼여행은 나와 같은 하와이 호놀루루, 그것도 나와 같은 힐튼호텔이다. 나는 기철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내가 항상 끼고 다니는 하와이언 웨딩 링(hawaiian wedding ring)을 거기서 구하라고 말했다 - 그 하와이언 웨딩 링은 세상에서 오직 하와이에만 있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행신에 있는 새집에서 우리 갈기회 모두를 집들이로 초대한다고 했으니 모두들 가서 눈도장을 쾅! 찍고 옵시다. 다시 한번 그와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결혼을 축하한다. 또 금방 새로운 생명, 아기(!)가 태어날테니 ...
20. 나의 행운: 그러나 역시 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리고 바로 정확히 老子的 의미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세상이란 그럴 수 없는 그가 그러리라고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 나는 역시 나를 믿는다. 물론 나는 인생을 지나보낼 줄을 아직 모른다. 나는 그러나 그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 자신이 좋아질 것으로 믿는다. 나는 지난 십년 동안 한 번도 근본적으로 후퇴하거나 인생에 지지 않았다. 이 어찌 큰 행운이 아니랴! 나는 그간, 그 십년 동안 전체적으로 - 全觀하건대 꾸준히 나를 더 아끼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 어찌 큰 행복이 아니랴! 그 비결은 아마도 내가 무엇인가를 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 되리라.
21. 희망의 근거3 - 뭐, 희망의 근거는 절망의 근거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러니까 내가 이 글을 이렇게 쓰고 있는데!: 나는 나 자신과의 관계(le souci de soi)에 대해 희망적이다. 희망의 근거는 내게 인생의 쓴 맛을 강조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 괜찮은 사람들, 혹은 옳은 선택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내 주변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good people!)을 많이 갖고 있고 또 그들을 알게 된 것에 대해 굉장히 행복해하고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아니, 어쩌면 거기에 단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나의 희망의 근거를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세의 선악(즉, 윤리적 흑백론)이란 원래 덧없고 더우기 위험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곳에 착한 혹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선과 악을 넘어서는 그 좋은 ‘초’(超)윤리 혹은 땅 위에 엎드려 모든 것을 안고 기어넘어가는 ‘포월’(匍越) - 나는 김진석의 이 말을 ‘包越’로 읽고 싶다. 아마 이러한 독해도 김진석이 포월이란 말을 선택한 하나의 의도였을 것이다 - 이란 오직 온밤을 깨어 지새운 자에게만 오는 법이리라. 요즘은 심지어 돈도 안내고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하지만, 낙타가 아닌 것은 사자가 될 수 없으리라. 하물며 사자도 아닌 것임에랴!). 물론 나는 이제 더 이상 ‘착한’ 사람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괜찮은’ 사람들만을 믿는다. ‘착한’과 ‘괜찮은’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거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자부와 행복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며 더우기나 희망의 근거를 갖고 있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나의 희망의 근거이며, 나 또한 그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근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나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1996. 3. 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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