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흐트러진 칼리그람
“언어의 관습이라는 게 있다: 이 그림은 무엇인가? 그것은 송아지이다. 그것은 사각형이다. 그것은 꽃이다라고 말하는 관습 말이다. 근거가 전혀 없지도 않은 오래된 관습이다. 이처럼 도식적이고, 교과서적인 그림의 기능이란 바로 자신의 인식시키는 것, 즉 그것이 재현(再現, représenter, représentation)하는 것을 주저함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 그것은, 텍스트를 데생과 관련시키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우리가 여기에 지시사(指示辭), 파이프라는 명사의 의미, 이미지의 유사성을 끌어오듯이), 그런데도 그 단언이 사실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모순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줄 근거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18-19)
“마그리트가 은밀하게 만들었다가 조심스럽게 흐트러뜨린 칼리그람(글자그림, caligramme)이라는 조작(操作, opération).”(19) “천년의 전통 속에서 칼리그람은 삼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알파벳을 보완하고, 수사학의 도움 없이 되풀이 말하고, 사물을 이중적 서기라는 덫으로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시킨다: 대상의 형태를 그리는 선과 일련의 문자들을 배열하는 선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그리하여 형상의 공간 속에 언표를 거주시키며 그림이 재현하는 것을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20) “칼리그람은 그러므로 동어반복이다”(21). “칼리그람은 우리의 알파벳 문명의 가장 오래된 대립들, 그러니까,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그리기와 말하기, 복제하기와 분절(分節)하기(articuler, articulation),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jeu, game)로 지워버리려 든다.”(21-22)
* 칼리그람[글자그림] calligramme - guillaume apollinaire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http://en.wikipedia.org/wiki/Calligram
http://blog.naver.com/shjung860408?Redirect=Log&logNo=150136446625
Fumées 연기
oeillet 카네이션
*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
https://en.wikipedia.org/wiki/Ren%C3%A9_Magritte
https://pendientedemigracion.ucm.es/info/especulo/numero27/magritte.html
9.
1926년 la trahison des images, ou ceci n'est pas une pipe
1966 les deux mystères
1966년
l'aube a l'antipode
“칼리그람 속에서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와 ‘더 이상 재현하지 않는다’가 서로 길항하고 있다. 마그리트의 <파이프>에서는, 이 부정문들이 태어나는 자리와 그것이 적용되는 지점이 완전히 다르다. [...] 칼리그람의 중복(redondance)은 일종의 배제관계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그리트에 있어서의 두 요소의 어긋남, 데생에서의 문자의 부재, 텍스트에 표현된 주정은 단호하게 두 개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28-29) “마그리트는 칼리그람의 말의 대상에 대해 그것이 닫아 버렸던 함정을 다시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물 자체가 날아가 버렸다. 그림책에서 우리들은 그칠 줄 모르고 문단들에 공통의 경계선 노릇을 하는, 저, 말들 위와 그림 아래를 달려가는 조그만 흰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거기, 그 몇 밀리미터의 흰 공간, 이 고적한 사막과 같은 페이지 위에서 말과 형태 사이의 지시, 명명, 묘사, 분류의 모든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칼리그람은 이 간극을 삼켜 버렸다. 그러나 일단 다시 열리자 칼리그람은 그 간극을 복구하지 못한다. 함정은 허공에 부서져 버렸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각자 그들의 고유한 중력에 따라 떨어져 버린다. 그들에겐 더 이상 공통의 공간이 없으며, 그들이 서로를 간섭하는 자리, 말들이 형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미지들이 어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더 이상 없다. [...]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공간 부재, 글씨의 기호들과 이미지의 선들 사이의 ‘공통의 자리lieu commun’의 말소이리라. [...] 그들 사이에선 이혼 서식만이, 데생의 이름과 텍스트의 지시물을 동시에 부인하는 언표만이 있을 수 있다.”(32-34)
“어디에도 파이프는 없다. / 여기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두 번째 판본을 이해할 수 있다. 파이프 데생과 그림 설명 노릇을 하는 언표를 어떤 판의 아주 한정된 표면에 놓고(이 판이 그림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 문자들은 문자 이미지들일 따름이다. 칠판이라면, 형상은 어떤 담론의 교육적 연장일 따름이다), 다시 이 판을 두껍고 견고한 목재 삼각대 위에 놓음으로써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언어의 공통의 자리를 복구하기 위해(예술작품의 영원성에 의해서건, 실물 교육의 진실에 의해서건) 필요한 모든 것을 한다. / [...] / 그 [선생의] 목소리는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말하자마자, 또한 다음처럼 말을 바꾸며 떠듬거렸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데생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말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문장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화폭, 이 씌어진 문장, 이 파이프 데생, 이 모두는 파이프가 아니다.’”(34-37)
“그러니 이것은 파이프가 전혀 아니다. [...] 공통의 자리-진부한 작품 혹은 상투적인 수업-는 사라졌다.”(37)
13. tombeau des lutteurs 싸움꾼들의 무덤 1960
bataille de l'argonne 아르곤의 싸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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