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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4.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 <정신현상학1>(1807),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IV. 자기 확신의 진리
 
 
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중화한 의식이 통일된다는, 자기의식 속에 실현되어 있는 무한성의 개념은 다면적이고 다의적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를 정확하게 식별하여 구별된 가운데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것, 또는 구별된 것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잡아내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구별된 것이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기의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 자기의식이란 스스로 무한한 운동을 펴나가는 가운데 일단 정립되고 난 성질과 정반대의 것으로 즉각 전화(轉化)한다. 이렇듯 이중화한 자기의식의 정신적 통일이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 ‘인정’의 운동이다.
  
자기의식에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대치될 때 자기의식은 자기의 밖에 벗어나 있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를 상실하여 타자를 두고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참다운 자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식으로 타자를 지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자기의식은 자기를 타자로 보는 그런 일은 지양해야만 한다. 이는 지금 얘기된 이중의 의미를 지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서 여기에는 또 다른 이중의 의미가 발생한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 이외의 다른 자립적 존재를 지양하고 이로써 자기야말로 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이 타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중의 의미를 지닌 타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지양은 동시에 이중의 의미에서 자체 내로의 복귀(eine doppelsinnige Rückkehr in sich)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기가 타자라고 하는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일체화된 자기의식은 자기를 되돌려왔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기의식은 타자 속에 있던 자기의 존재를 지양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완전히 방임함으로써 여기에 다시금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이쪽 편에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식과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운동이 여기서는 한쪽 편의 행위로만 표상되어 있지만, 한쪽의 행위라는 것은 이미 한쪽 당사자의 행위인 동시에 또 다른 쪽에서의 행위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인 완연한 존재이므로,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모두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자기의식도 단지 욕망(Begierde)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생명체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자존하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려 하건 간에 상대 쪽에서도 자기가 그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운동은 어김없이 두 개의 자기의식이 행하는 이중의 운동으로서, 양쪽 모두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양쪽 모두가 자기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고 상대방이 그와 동일한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자기도 또한 동일한 것을 해하게 되므로 한쪽에서만의 행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정말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쌍방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행위는 일차적으로 자기에 대한 행위인 것 못지않게 타자에 대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서로가 불가분 한쪽의 행위인 것 못지않게 또한 다른 쪽의 행위라는 점에서도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힘의 유희로 표현되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의식 내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힘의 유희에서는 방관자인 우리에게만 보여졌던 것을 여기서는 양극에 위치한 두 개의 자기의식이 바라보고 있다. 이 양쪽 중심에 있는 것도 자기의식으로서, 이것이 양극으로 분열되면서 두 개의 극이 서로의 역할을 교환해가며 저마다 반대의 역할로 무한히 이행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의 운동인 이상 자기의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자기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동시에 자체로 되돌아와 자기를 고수하는 것이어서 결국 자기가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명확히 의식되어 있다. 자기가 직접 타자의 의식이면서 또한 타자의 의식은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타자가 독자적 존재가 되는 데서도 스스로 독자적 존재임을 포기하여 타자의 독자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마다가 상대방에 대하여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이렇듯 중간항을 이루는 상호적인 타자를 매개로 하여 각기 저마다가 자기와의 매개 아래 자기와 합일된다. 결국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이중화한 자기의식이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인정의 순수한 개념으로서, 이제 이 인정의 과정이 자기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고찰해야만 하겠다. 우선 처음에 타나나는 것은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부등한 위치에 있는 경우인데, 여기서는 매개체로서의 중간항이 양극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한쪽은 인정될 뿐이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기만 하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의식은 우선 단일한 독자존재로서,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다. 이때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자아’로서, 자기의식은 직접 이 ‘자아’와 어우러진 가운데 ‘자아’라는 독자적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는 타자와 맞서 있는데, 이때 타자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성격지어진 비본질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타자 역시 자기의식인 까닭에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형성된다.
 
 
그러나 갓 출현했을 때의 이들 개인은 서로가 마주치는 대상일 뿐이어서, 비록 독립된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식은 생명(Leben)이라는 존재-여기서는 생명과 대상이 같은 존재이다-속에 매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의식은 서로가 직접적인 자기존재를 송두리째 말소해 자기동일적 의식을 지닌 순수한 부정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절대적인 추상화운동을 행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서로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자기의식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 자기존재를 확신하고는 있으면서도 타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진리가 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독자존재가 자신에게 자립적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서 순수한 자기확신으로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인정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타자에 대해서 있고, 또 각기 서로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행위를 통해서도 저마다 독자존재일 수 있는 순수 추상화운동(diese reine Abstraktion des Fürsichseins)을 펼쳐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순수한 추상운동으로서 상호간의 행위가 나타날 때, 이들은 각기 자기의 대상적인 양식을 순수하게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반적인 개별 사안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이중의 행위로서, 즉 타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은 각자가 서로 타자의 죽음을 겨냥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째로 또한 자기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reine Fürsichseins)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타인은 추호도 자기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지 않고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 밖으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는 다양한 일상사에 매여 있는 그런 의식이지만,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타자로서 맞서려고 하는 것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절대적 부정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한 이러한 확증을 필경 이로부터 발현되어야 할 진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확신마저도 전적으로 무산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의식을 떠받쳐주는 자연적인 기점(基點)이며 절대적 부정성까지는 갖추지 않은 자립적인 힘으로서, 그의 자연적인 부정 상태로서의 죽음은 아무런 자립성도 없는 부정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은 인정의 의의를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을 통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것은 확증되지만, 이러한 확증은 싸움을 견뎌낸 당사자에게 안겨지지는 않는다. 죽음을 걸고 맞서 있는 두 당사자는 자연적 존재라는 생소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파기하고 자립성을 고수하려는 양극에 자리한 자기의식으로서 서로가 맞서는 경우라고는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관계 속에 양극으로 대립해 있다는 본질적인 게기는 상실한 채 다만 죽은 통일체라고나 할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니, 이렇게 죽음의 궁지로 내몰린 상태에서는 이 중간 지점도 역시 대립 없는 양극에 묻혀버리게 된다. 양극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체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은 채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생사를 건 투쟁은 무의미한 부정으로서, 이는 상대를 타파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 파국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의식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험의 와중에서 생명이 순수한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본질적이라는 것이 자기의식에게 깨우쳐진다. 간신히 자기를 의식하기에 이른 의식에게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매개를 거쳐 나타난 것으로서, 자립적 생명을 본질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자아’라는 단순한 통일체는 최초의 경험의 결과로서 와해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그러나 일단 이 양자는 서로 부등한 상태에서 대립해 있는 가운데 서로가 통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잡이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형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
 
 
주인은 자주ㆍ자립적인 의식으로서, 단지 개념상으로만 그런 존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를 띤 자립적인 존재와 함께 묶여 있는 타자의 의식과 매개된 가운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다. 주인은 욕망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물성을 본질적으로 여기는 의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와 관계한다. 이때 주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은 ① 독자적으로 직접 상대방과 관계하는 측면과 ② 타자를 통하여 비로소 자립적일 수 있는 매개의 측면을 지니는 것과 함께, ① 위의 두 측면과 직접 관계하는 경우와 ② 어느 한쪽을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주인은 사물이라는 자립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여 노예와 관계한다. 노예는 바로 사물에 속박되어 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物性)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관계한다. 노예로서도 자기의식은 갖고 있으므로 사물에 부정적인 힘을 가하여 사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은 노예에 대하여 자립적인 존재이므로 노예는 부정의 힘을 가한다 해도 사물을 아예 폐기해버릴 수는 없고 사물을 가공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하여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은 마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물의 자립성으로 인하여 욕망의 의식에게 그러한 결과가 성취되지 못하던 참에 주인은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개재시킴으로써 사물의 자립성을 미끼로 하여 사물을 고스란히 향유한다. 이때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은 노예에게 위임되고 노예는 이를 가공하는 것이다.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노예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물을 지배하고 사물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는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행위자이다. 그러나 노예에 의한 주인의 인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인이 상대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주인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하고, 또 노예가 그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역시 그의 상대인 주인에 대해서도 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조성되어 있는 상태는 일방적인, 부등한 인정의 관계이다.
 
 
이렇게 해서 비본질적 의식이야말로 주인에게 있어서의 대상이며 또한 주인의 자기확신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진리라고 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대상은 본질적인 의미의 자기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주인의 자기실현으로 여겨지는 이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은 자립적인 의식과는 전혀 별개의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주인은 의식의 독립성을 객관적 진리로서 확신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 객관적 진리로서 있는 것은 비본질적 의식과 이 의식에 의한 비본질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되면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에 있는 것이 된다. 물론 노예의 의식은 일단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진리를 체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의 과정에서 바로 이 지배의 본질이 스스로를 지향했던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전도되었듯이 예속의 본질도 역시 그것이 관계가 실현되는 가운데 직접 드러나 보이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된다. 노예의 의식은 자체 내로 떠밀려 들어가서 자기복귀할 때 참다운 자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지배와의 관계 속에서 예속은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속되는 것도 자기의식이므로 이런 점에서 예속이 의미하는 그의 전체적인 실상이 고찰되어야만 하겠다. 우선 예속된 의식에서는 주인이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주인 쪽의 자립 자존하는 의식이 예속된 의식에서 객관적 진리를 이루지만 아직도 이 진리는 예속된 의식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은 예속된 의식이야말로 스스로가 부정성을 지닌 독자존재라는 진리를 사무치게 깨우친다고 하겠으니,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고나한 불안도 그리고 특정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도처에 생겨나는 이 순수한 운동, 즉 존립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유동화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인 절대적 부정성의 발로로서, 자기의식의 순수한 자립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노예의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순수한 독자적 요소도 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노예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자립성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식에 단지 막연한 심정상(心情上)의 자괴감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노예노동 속에서 현실적인 붕괴에 직면하게 한다. 이렇듯 노동을 수행하는 매순간마다 노예는 자기에게 가해진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뜻에서 사물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서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 비록 주인에 대한 공포가 지혜의 실마리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 채 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Durch die Arbeit kommt es aber zu sich sewlbst).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되는 셈인데, 어쨌든 노동에서 사물의 자립성이 유지되는 이상 노예는 사물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란 대상의 형식을 다듬어가며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노예에게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립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場)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die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물의 형성은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이 존재하는 모습을 띤다는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공포라고 하는 첫째가는 요소를 불식시키는 부정적인 작용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맞서 있다. 말하자면 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조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도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사물의 형식은 외면에 자리 잡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의식과 별개의 것은 아니며, 오직 형식만이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을 갖춘 진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eigner Sin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봉사하는 의식이 이렇듯 반성적인 자기복귀를 이루는 데에는 공포와 봉사라는 두 요소와 함께 사물의 형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하며 더욱이 이들 요소가 노예생활 전반을 뒤덮고 있어야만 한다. 봉사와 복종의 기강이 잡히지 않고서는 공포는 형식적인 데 그칠 뿐, 현실생활에 의식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는다. 또한 사물의 형성이 없이는 공포는 내면에 잠겨있을 뿐이어서 의식이 이를 명확하게 의식할 리가 없다. 더욱이 최초의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게 된다면 의식은 다만 자기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에 나타난 의식의 부정성이 역시 자기마저도 부정하난 힘이었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이 본질적인 자기실현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절대적인 공포를 실감하지 않은 채 다만 어쩌다 불안감에 젖어들 뿐이라면 자기를 부정하는 힘은 자기 밖을 맴도는 데 그치며, 자기의 심혼마저도 뒤흔들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적인 의식이 안주해 있던 스스로의 지반이 여지없이 동요하는 데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딘가에 기댈 만한 언덕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존립을 지탱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는 것은 속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라는 것도 예속된 상태의 자유에 그칠 뿐이다. 사물의 순수한 형태가 그대로 자기의 본질로 화하지 않는 한, 개개의 사물에 각인된 모습이 의식 전체를 감싸 안는 절대적 개념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물을 잔재주를 통하여 가공하는 손놀림에 그칠 뿐, 보편적인 자연력이나 대상 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220~234쪽
 


 

2012. 7. 27.

헤겔 - 역사철학강의


       



*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철학 강의』, 김종호 옮김, 삼성출판사, 1990.

“철학은 역사를 하나의 재료로서 다루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 사상에 적용시켜, 따라서 이른바 선천적으로(a priori) 역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68)

“이 형식적인 절대적 진리와 더불어 우리들은 역사의 최후 단계에, 우리들의 [게르만] 세계에, 우리들의 시대에 도달한다.”(477)

“세계사는 자유 개념의 전개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 철학은 다만 세계사 안에 반영되는 이념의 광휘만을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철학은 현실계 안의 직접적인, 미숙한 정열의 움직임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고찰하는 것이다. 철학의 관심은 ‘자기를 실현하는 이념의 전개과정’, 그것도 자유의 의식이라는 형태에서만 나타나는 자유 이념의 전개과정을 인식하는데 있다.”(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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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강의> - G. W. F. 헤겔 / 권기철

<역사철학강의(세계사상전집 20)> - 헤겔 / 김종호

<역사철학강의(삼성세계사상 15)> - 헤겔 / 김종호

<헤겔의 역사 철학> - B.T.윌킨스 / 최병환

<헤겔 역사철학 강의> - 심옥숙

칸트 - 역사철학





<칸트의 역사철학> - 칸트 / 이한구



       
* 임마누엘 칸트,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역사는 이러한 현상들[인간 행위]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들의 원인이 아무리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역사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발휘되는 과정을 긴 안목으로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그 속에 어떤 규칙적인 진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21~22)

제1명제. 생명체의 모든 자연적 소질은 언젠가는 완전하게, 그리고 목적에 맞게 발현되도록 결정되어 있다.”(25)

제9명제. 인류의 완전한 시민적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연의 계획에 따라서 보편적 세계사를 편찬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가능한 것으로서, 또 이런 자연의 의도에 공헌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40)

* 임마누엘 칸트, 「헤르더의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인류 일반의 목적은 끊임없는 진보이며, 이 목적의 완성은 간단하지만 모든 면에서 유용한 - 우리가 섭리의 목적에 맞게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 목표에 관한 이념이다.”(73)

* 임마누엘 칸트,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완전성을 향한 진보로서의 인류의 운명”(83)

“우리는 중국의 경우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중국은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 적어도 몇 번 예측하지 못한 외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 강력한 적대국을 갖지 않았으므로 모든 자유를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인류가 현재 누리고 있는 수준의 문화에서도 전쟁은 그 인류 문화를 계속 진보하게 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다.”(92)


* 임마누엘 칸트, 「만물의 종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원주 2) 항상 반계몽주의적 현인들(혹은 철학자들)은 선을 지향하는 인간성의 자연적 경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없이 인류가 사는 이 세계를 완전히 경멸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적대적이고 부분적으로 혐오스러운 비유에 몰두해왔다. (1) 이 세상은 어떤 수도승이 바라보듯이, 여관(여인숙)이다. 그곳에서 인생이란 여행 동안에 그 곳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은 다음 사람에 의해 곧 대체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 세상은 교도소[감옥]이다. 이 견해는 바라문교, 티베트인 및 다른 동양의 현자들(심지어 플라톤까지도)이 강한 애착을 느꼈던 견해인데, 천상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지금은 인간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이 타락한 정신의 징벌과 정화를 위한 장소가 곧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3) 이 세상은 정신 병원이다. 이 곳에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깊은 슬픔을 야기시키며, 무엇보다 그의 기술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 이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오물이 집결하는 똥구덩이이다. 이 마지막 평가가 어떤 의미에서는 원초적이다.”(100~101)

신비주의. [...] 이로 인해 최고선이란 허무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즉 신성과의 융합을 통해, 따라서 자신의 개성을 파괴시킴에 의해 신성의 심연으로 몰입됨을 느끼는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노자(老子)의 괴이한 교의가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를 예감하기 위해 중국의 철학자들은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고 허무를 명상하려고 한다. 이것으로부터 범신교(티베트와 동방의 여러 민족의)가 나타나고, 이 범신교의 승화에서 스피노자주의가 그 후에 나타난다. 이것들 모두는 인간의 영혼은 신성으로부터 나왔다는 (그리고 끝내는 신성 안으로 다시 함몰된다는) 고대의 유출설(Emanationssystem)과 자매 관계에 있다. 이것들 모두는 사람들이 결국 영원한 휴식-만물의 축복된 종말이라고 그들이 믿는-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이런 관념이야말로 사실 사람들의 오성이 해체되고 모든 사유 자체가 종말을 고하는 관념인 것이다.”(106~107)

* 임마누엘 칸트, 「다시 제기된 문제: 인류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는가?」(칸트, 『학부간의 논쟁』 중 제2부 ‘철학부와 법률학부 간의 논쟁’),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인류가 (전체적으로)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에 관한 자연사(앞으로 새로운 인간 종족이 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가 아니라 도덕사(Sittengeschichte)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인류라는 개념은 유개념(singulorum)에 따른 인류가 아니라, 지상에서 사회를 이루고 민족으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는 인간 전체(universorum)로서의 인류를 의미한다.”(113~114)

“3. 우리가 미래에 관해서 미리 알고자 하는 것에 관한 개념의 분류

세 가지 경우를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즉 인류가 사악한 상태로 계속 퇴보하고 있거나, 도덕적 성향에 있어서 더 나은 상태로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거나, 혹은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현재의 도덕적 단계에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지 상태는 동일한 점의 주위를 궤도로 하여 영원한 회전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우리는 첫 번째 주장을 도덕적 공포주의로, 두 번째 주장을 행복주의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번째 주장은 또한 진보의 목표를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 천년기설(Chiliasmus)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 번째 주장은 기계주의[아브라데주의]라 할 수 있다.”(116)

“인류는 항상 더 나은 것으로의 진보 과정에 있어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진보해 나갈 것이다.”(126)


헤겔 - 역사 속의 이성

       





  *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 속의 이성』,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92.




“철학적 고찰은 우연적인 것을 떨쳐 버리는 것(das zufällige zu entfernen) 이외의 다른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우연성이란 외적 필연성, 즉 그 자체가 한낱 외적 사정에 지나지 않는 원인에 귀착되는 필연성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 즉 세계의 궁극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 정신이나 심정이 지닌 어떤 특수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이때 우리는 그 궁극목적을 이성을 통하여(durch die Vernunft), 즉 그 어떤 특수한 한정된 목적이 아닌 오직 절대적 목적에만 스스로의 관심을 두고 있는 이성을 통하여 포착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 궁극목적은 자기 자신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이 자기의 관심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스스로의 지주(支柱)를 마련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다. 이성적인 것은 즉자 대자적 존재자로서 모든 것은 이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다. 이성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러나 실로 정신 자체가 흔히 국민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 개진(開陳)되고 현현(顯現)되는 데서처럼 이성의 명백한 목적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의욕의 세계(die Welt des Wollens)는 결코 우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믿음과 사상을 안겨주어야만 한다. 모든 국민이 겪어나가는 사건 속에서는 궁극목적이 지배적인 것이며, 또한 이성이 세계사 속에 있다는 것(Vernunft in der Weltgeschichte ist)-그러나 어떤 특수한 주관의 이성이 아닌 신적이며 절대적인 이성(die göttliche, absolute Vernunft)-이 우리가 전제로 하는 진리이거니와 이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곧 세계사 자체의 논구이며, 다시 이 논구야말로 이성의 상(像)이며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본래적 증명은 바로 이성 그 자체의 인식(Erkenntnis der Vernunft selber) 속에 깃들어 있거니와, 이 이성은 오직 세계사 속에서 입증될 뿐이다(in der Weltgeschichte erweist sie sich nur). 세계사란 오직 이와 같은 성질의 이성이 현상화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이성이 현현되는 특수한 형상 가운데 하나일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모든 국민이라고 하는 특수한 요소 속에서 표현되는 원형(原型)의 모상(模像)이다.”(50~51)










1930년대 노랫가락 담긴 음반을 보고 듣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2/05/01/0901000000AKR20120501063400005.HTML


*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nfm.go.kr/index.nfm
<일상생활과 근대음성매체: 유성기 라디오> -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한국 유성기음반 세트> -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색인> - 송방송
<일제강점기 유성기음반속의 대중희극> - 최동현 외
<유성기음반 가사집. 1> - 이보형

서유견문 - 유길준의 목소리





유길준, <서유견문(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 (오래된 책방08)



       

"우리나라의 글자는 우리 선왕[세종]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 유길준, <서문>, 26쪽.



"유길준이 1895년에 간행한 '서유견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체 저서이자 최초의 서양 문물 계몽서라고 예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다. 그 뒤에도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에, 책 이름만 보고는 세계 일주 기행문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1993년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서유견문'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유길준이 머물렀던 집과 유학하였던 학교를 찾아다니다가, 국한문혼용 저술이니 한문으로 된 저술보다 쉬울 거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한문으로 된 책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할 때 한문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이유는 문법이 다르다는 점에과 일본식 외래어가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일본식 한자어 자체가 새롭고 낯설었겠지만, 일본식 한자어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우리 세대 독자들에겐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일본식 한자어가 어느새 우리말이 된 셈이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문체가 당대 지식인들에게서 부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고도 이 책을 국한문혼용체로 썼다. 한문을 모르는 국민들까지 읽게 하려면 국한문혼용체가 낫다고 여긴 것이다. '한글'을 '우리 글자'라고 한 것에서부터 사상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국한문혼용체는 에전에도 일부 시행되었지만, 그가 이 책을 국한문혼용체로 쓴 까닭은 나라마다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문법 교재와 정치학 교재를 함께 썼던 학자는 우리 역사에서 유길준밖에 없다. 계몽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유길준은 이 두 가지 교재를 자신이 함께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국한문혼용체라는 문체를 시도하여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였다. 국한문혼용이라는 국어 의식과 '득중 得中'이라는 정치 노선은 그에게 하나였기에 그러한 인식에서 '서유견문'을 읽어야 하겠다."

- 허경진, <글을 시작하기 전에>, 5~6쪽.


"일본사람 가운데 견문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새로 나온 기이한 책들을 보며 거듭 생각하는 동안, 그 사정을 살펴보고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진상을 파헤쳐보니, 그들의 제도나 법규 가운데 서양[泰西]의 풍을 모방한 것이 십중팔구나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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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은 내가 상상하던 바와 전혀 다른 책이었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서양문물을 접한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1882년 미국에 외교 사절로 가서 유학생으로 남아 서양문물을 공부한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다.

유길준은 1885년 유럽을 거쳐 귀국하면서 '서유견문'을 쓰기 시작하여 1890년 완성, 임오군란 등으로 출간하지 못하다가, 1884년 갑오경장을 거쳐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다름 아닌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순사에서 이 책을 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본격적인 국한문 혼용체로 적어내려간 이 탁월한 책은 그후 대한제국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불행한 책이었다.

한글을 우리 글자(我文)라 칭하고, 진서를 한자(漢字)라 칭하는 이 민족주의의 선구적 저작은 당시인들에게는 오히려 읽기 어려웠을 일본식 조어인 신한어로 쓰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완벽히(자기가 그런 줄조차 모를만큼) '메이지화된' 오늘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쉽게 읽힌다.

유길준의 글은 요즘에도 보기 드문 상식의 목소리, 건강한 시민의 양식을 가진 것이었다. 허경진의 번역 덕도 있겠지만, 원래 문체 자체가 좋았다.

일제병탄을 반대하고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양심적 지식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닌, 이 '개화기'의 지식인에게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