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의 시금석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 미셸 푸코
1.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칸트의 계몽에 관한 1984년의 한 기고문에서 칸트가 제기한 새로운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로 정식화 했다. 이 일련의 질문들은 다름 아닌 동시대성 곧 현재라는 문제를 다룬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로서 구성된 이 ‘지금’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의 앞바다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476명의 인원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1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구조시스템이 침몰 전에 구출되었던 174명을 제외하고 배에 남아있던 300여명의 승객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침몰과 구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선원들과 청해진해운은 물론, 구조회사,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를 포함한 관료, 정치시스템 전체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단적으로, 이는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이며,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승선인 전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 다시 물어보자.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의 오늘, 여기 지금, 2015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지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2. ‘도덕주의적’ 답변의 문제점 -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결여
이 질문은 우리가 오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실제로 달라지리라는 점에서 극도로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가령, 이는 매우 비극적인 참사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사건에 대한 ‘도덕(주의)적’ 답변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주의)적 대응은 - 아마도 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 이러한 불행한 사태의 반복만을 낳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 참사로부터만 따진다 해도, 셀 수도 없는 무수한 일련의 사건ㆍ사고를 겪은 대한민국은 무수한 ‘전 국민적 차원의 도덕적 반성’을 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월호라는 비극을 전혀 막을 수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무책임한 선원과 비도덕적 탈법을 일삼은 청해진해운, 이를 비호하고 편의를 보아준 ‘공범적 공생관계’의 공무원, 관료집단 등 명백한 책임주체가 있는데도 ‘우리 모두의 책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 설령 그것이 순수한 자기 성찰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 현실적 문제점의 인식 자체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도덕적 반성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거나, 비도덕적 개인 혹은 집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비도덕적 개인과 집단은 늘 존재하며, 개인의 부도덕함은 비난받아야 하고, 집단의 비도덕적 음모는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 혹은 집단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은 정작 문제의 핵심이라 할 보다 큰 사회적 차원의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3.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
나는 승객들의 탈출과 자신들의 탈출이 양자택일적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자신들만 탈출한 선원들에 대하여 분노를 금치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정당한 분노를 인정하지만, 세월호의 선원들만이 유난히 부도덕한 인물들로 우연히 구성되어 있었다는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세월호의 선원들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평균적인 대한민국의 선한 직장인들이었으며, 아마도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여객선의 선원들과 현격히 구별될 만한 질적인 도덕적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세월호의 선원들이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아마도 대한민국 선원들의 평균적인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진 세월호의 선원들, 청해진 해운은 오늘 이 시각에도 자신들의 과오와 범죄 행위보다는 ‘하필 내가 속한 우리 회사의 배가 그때 그렇게 침몰한’ 불운을 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비극적 해체의 운명을 맞이한 해경과 해수부 관료 마피아(일명 ‘해피아’), 넓게는 대한민국의 관료집단 전체가 갖고 있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재수가 없어서 하필 우리 영역에서, 우리 관할에서, 우리 회사에서, 우리 배가’ 침몰했으며,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면책을 도모하며, 이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국민들이 세월호를 잊을 때까지 납작 엎드려 지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을 내버려두고 가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 안전하게 탈출하는 이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단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해도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이렇게 해왔어도 직장에서 자리를 잃지 않으며, 다른 선원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다른 회사들도 사실은 대부분 모두 다 이러하며, 이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공무원, 관료 집단 전체도 다 그러하며, 대한민국의 다른 영역들도 세월호 같은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 사실은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나라는 개인과 우리 회사, 그리고 내가 만나는 관료 집단,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이 하나의 전체로서 그러한 ‘공생적 악순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유지 가능한 것이다. 물론 부도덕한 개인은 비난받아야 하고, 부패와 범법 행위는 엄단되어야 하며, 음모는 밝혀져야 하고,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도덕적 반성의 촉구와 그에 이어지는 해당 기업 및 관료의 사법적 처벌에 만족하고 만다면, 이러한 불행한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덕적 단죄와 사법적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세월호’를 막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4.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서는가?
따라서, 어떤 특정 개인, 회사 혹은 집단에 대한 도덕적 비난 혹은 사법적 처리라는 기반 위에,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능케 했던 제반 조건 자체의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한 국가의 평균적 도덕성 혹은 직업윤리, 관료윤리는 물론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의 개혁을 포기하거나 방기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선원들은, 기업인들은, 관료들은 언제 이러한 ‘관행’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의 집단은 언제 자신들의 부당한 ‘기득권’을 타파하고 올바른 길로 나설 것인가? 이에 대한 역사의 답변은 간명하다. 하나의 집단은 그들이 ‘바꾸지 않고서는 안 될 때, 바꾸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관행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탁월한 개인의 도덕적 회심은 개별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수만에서 수십만, 수백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평생 익혀왔던 요령과 관행, 곧 기득권을 버린 경우란 역사에 전무하다. 그들이 그것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버릴 ‘의지’가 없기 때문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시스템의 일부이며, 자기 정체성의 원천이 바로 그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설령 스스로를 혁파하고자 해도 그러한 일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의 결여’인 동시에 능력의 결여이다. 기업이든 관료이든, 한 집단의 개혁은 자율적 부분과 타율적 부분이 결합될 때 성공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기업과 관료의 자율적 반성이라는 기초 위에 제도적 곧 타율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존재는 바로 행정부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에 세월호 사태에 대한 도덕적, 사법적, 행정적, 관료적 처리 이상의 정치적 결단의 차원, 곧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의 논리가 놓여있다.
5.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라는 정치적 행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이에 대한 확고한 개혁의지, 대통령 자신의 표현을 따른다면, ‘국가개조’,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모두 좋은 말이다. 나는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 의도에 대해 그 순수성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으며, 차라리 그러한 언명의 순수성을 믿는 편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정치 집단인 전교조를 순수한 교육현장에서 몰아내자’는 주장 이상의 정치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존재하는가? 주어진 시스템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그와 달리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사유가 있는가? 나와 같이 생각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나와 달리 생각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있을까? 국민은 정부와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달리 생각하는 순간, 불순한 비정상이 되어 엄단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일까? 만약 세월호 사건이 일부의 주장처럼 ‘순수한’ 사고였고, 따라서 대통령은 ‘순수한’ 유족만을 만날 것이며,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세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이자 순수한 정치인인 박근혜 대통령은 왜 ‘순수한’ 사고인 세월호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했는가? 이는 21세기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인 나는 정부와 달리 생각할 ‘자유’가 없으며, 사실상 오늘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말일까? 정부에서는 참으로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문제가 있고 불순하며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는 - 서구 중세의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無誤說)을 패러디하여 - ‘정부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정부무오설이라도 주장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자유롭지도 민주주의이지도 않은’ 정부를 여하튼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을 해석권력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이른바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때, 자신의 해석을 ‘현실에 대한 유일한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하고 이를 강요하는 힘이 해석권력이다. 그리고 그 해석권력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있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대한민국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석권력이 과연 국민에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해석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되돌여주는 것은 오직 국민 스스로가 할 수 있을 뿐이다.
6. ‘해석권력’의 주체는 국민
다시 한 번 문제는 의지의 문제인 동시에 능력의 문제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순수한 의도에 입각한 것이라 해도, 그것의 실천, 실현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현재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수많은 저항과 난관이 예상되며,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안위조차 위태로운 개혁에 나서지 않아도 정권이 유지된다고 믿을 때, 과연 한 나라의 정부는 개혁에 나선 경우가 존재하는가? 불편하고 무섭지 않은 복종하는 말 잘 듣는 국민,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는 착한 국민을 위해 정부가 알아서 자신의 존립 기반 자체를 흔드는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김용옥의 지적대로, 국민적 합의 없이 특정 정치인 개인의 의지대로 해석된 ‘정상화, 국가개조’는 문제의 책임자가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황망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자각이다. 박근혜 정부는 ‘안 해도 되는 개혁’을 시도할 리도, 시도할 수도 없다. 성공 여부와도 무관하게, 오직 국민들이 ‘정부가 진정한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스스로의 힘을 보여줄 때에만’ 박근혜 정부는 참다운 개혁에 나서고자 할 것이다. 1년이 지난 오늘 분명 일정한 성과는 있다. 이 부분을 폄하하지 말자.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세월호 특위’가 우여곡절을 거쳐 결성되었고, 제반 법령에 대한 개정 작업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박근혜 정부가 사건 발생 직후 몇 개월 동안 보여주었던 최소한의 인색하기 그지없고 사실상은 지극히 모욕적인 겉보기만의 ‘제스처’마저도 이미 완벽히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년이 지난 지금, 이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었거나, 혹은 이제 ‘그 일’이 그만 잊히기를 바라고만 있다. 사실, 박근혜 정부는 나름의 최선을 그나마 다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월호 특위를 통해 세부 사항을 좀 더 자세히 밝히고, 몇몇 관련자들을 문책하고, 몇 개의 법령을 개정하고, 그리고 문제를 ‘일단락’ 짓는 일이다. 이렇게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7. 다시 오늘, 세월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세월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먼저, 세월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층위로 구분될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세월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나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제반 사항들을 처리해야 한다. 다음으로,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세월호와 관련하여 기억하고 찾아나가야 만들어나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미 첫 번째 문제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행정적ㆍ실정법적 차원의 범위를 넘어서도록 만든다. 어떤 가치에 입각한 어떤 기준으로 세월호를 바라볼 것인가? 이는 곧 바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를 두 번째 문제로 이끈다. 우리는 세월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를 통하여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사태와 관련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관련자를 엄중 문책해야 한다. 사태의 분명한 책임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두의 책임’,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월호의 선원, 선주, 청해진해운에 대한 처벌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근본적으로 선원과 선주의 개인적 부도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순진한 관점이다. 마찬가지로 해경과 ‘해피아’ 및 관료사회 일반에 대한 비판과 처벌 역시 분명히 수행되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관점은 선원과 선주, 해경과 ‘해피아’ 등의 개인적 처벌에 만족함으로써, 그러한 사태를 가능케 했던 근원적인 원인, 곧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척결은 어떤 일개 공무원, 행정가가 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척결, 이른바 ‘적폐’ 타파의 실제적 결행 여부는 정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헌법에 의해 이러한 일을 수행해야 할 의무와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존재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일인밖에 없다. 따라서 세월호에 관련된 문제는 단순한 행정적 처리가 아닌 정치적 결단의 문제, 통치 행위의 문제이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행정부와 국회는 물론,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개입과 결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원칙적 차원의 엄정한 처벌에 대한 몇몇 언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개입도,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입장 표명고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명백한 정치적 개입의 또 다른 형식이다. 나는 선원들과 선주가, 청해진 해운이 학생들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 그리고 관료와 언론이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처음부터 괴롭히고 죽이려고 아무런 개입도 대책도 내놓지 않으며 나아가 망언을 일삼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할 아무런 절실한 동기가 없으며,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이른바 ‘적폐’를 정말 그 뿌리로부터 발본색원, 척결한다고 하자. 적폐의 원인과 근원, 그 뿌리와 가지는 어디까지일까? 정권과 여당, 관료집단은 물론 언론에서 학계,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기득권자들, 이 적폐들은 스스로 조용히 물러날까? 아니, 자신이 적폐라는 것을 인정할까? 아마도 대한민국 기득권 집단 전체일 이 ‘적폐’는 결코 순수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예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 적이 없다. 어떤 일개인이 양심과 도덕적 반성에 의해 자신의 삶을 팜으로 개혁한 경우는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몇 십만에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기득권 집단이 모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도덕적으로 반성하여 알아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자는 여전히 ‘순진한 자’란 말을 듣지 않기 어려울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득권자들은 언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가? 내놓지 않으면 죽게 될 때이다! 아니, 역사는 죽게 되더라도 내놓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다반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그러한 내려놓기의 행위가 의도의 문제 이상으로 능력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어떤 정부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드는 개혁을 알아서 먼저 하지는 않는다. 개혁하지 않고 관례와 관행에 따라 행동하면, 내가 구속된다는 것을, 우리 회사가 망한다는 것을, 나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시켜줄 때,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이 안 해도 되는 개혁을, 더구나 그러한 개혁이 자신의 권력 지지 기반 자체를 흔들 때, 권력자가 먼저 알아서 개혁에 나서기란 만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해야 할 일은 관료가, 기업이, 정부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압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을 현실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헌법상 대통령 일인이다. 따라서 국민은 대통령이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철저히 압박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왕조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존재 이유와 주권은 국민인 나와 당신에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의 보호와 앙양이 민주공화국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가, 정권이, 이를 착각할 때, 이를 최우선적 가치로 간주하지 않을 때, 국민은 국가와 정권에게 이를 각성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고, 그러한 국가에서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놀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는, 공화국의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도 안 된다. 어떤 자유이고, 어떤 민주주의인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국가와 정부의 공식의견과 다르게, 때로는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할 자유,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약자와 달리, 혹은 나와 대등한 자와 달리 생각할 자유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며, 자유가 나보다 강한 자의 생각과 달리 생각할 자유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이때의 자유란 어떤 실제적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공허한 말에 그치게 되며, 바로 이때 그러한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선구자, 로크의 말대로, 자유민주주의라는 허명만을 내건 채 어떤 실제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면, 이는 처음부터 계약 위반이라 볼 수밖에 없다. 상호 간의 계약을 이미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경우, 어떻게 나머지 한쪽에만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가! 이것이 서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정당화한 로크의 논의이다.
8. 세월호의 근본 문제는 인식틀의 부재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이상적 주장들과는 달리, 세월호로부터 약 100여 일이 지난 후 치러진 2014년의 7.30 재보궐 선거에서 야당이 아닌 여당이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개혁 피로감’과도 같은 ‘도덕성 피로감’의 결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국민이 정부 여당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기만당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공천 파동을 비롯한 지리멸렬한 야당의 문제였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경상도 천만 인구의 힘이라는 말을 한다. 아마 모두 일정 부분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월호 사건이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 하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이보다 더 나은 구조(救助) 성과가 있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과거부터 켜켜이 쌓인 적폐의 부분이 실제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현 정권의 지지자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단순한 정치 공세로 치부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민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국민이 새누리당’이라는 말에 한 표를 던지는 편이다. 새누리당이 총칼로 직접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닌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문제가 될 것도 없으며, 나는 이를 폄하의 의도로 말하는 것조차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국민들의 정서와 도덕감정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집단, 아니 파악하고 있는 수준을 넘어 국민의 정서적 도덕감정과 일체가 되어 국민을 리드하고 있는 집단은 - 가령 야당과 한겨레신문이 아니라 - 새누리당과 조선일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이 80년대식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념론/유물론’라는 관념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민 대다수의 정서를 이해하지도 리드하지도 못한다고 본다. 나는 방금 ‘국민 대다수’의 정서라고 말했다. 정치는, 선거는 숫자 싸움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펼쳐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표를 받지 못하면 현실 정치에서는 질 수밖에 없다. 맹자의 말대로, 왕과 신하가 잘못되었으면 바꾸면 된다. 그러나 국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국민을 죽이고 바꿀 수는 없다. 정치는 국민의 인식과 마음을 바꾸려 노력할지언정, 국민 자체를 죽이고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폴 포트나 스탈린, 마오, 김일성이 했던 일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국민을 알고 이해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국민을 알고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세월호를 통해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는 이제껏 국민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어떤 인식의 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준엄한 인식이다.
9. 세월호, 대한민국의 ‘작은 아우슈비츠’
어떤 면에서, 세월호는 전 국민에게 남긴 트라우마의 정도로 보아 대한민국의 작은 아우슈비츠라고 말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시를 쓸 수 있는가? 세월호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수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피해자의 고통은 어떻게 위로받고 보상받아야 하는가? 피해자의 고통은 늘 이해받아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국가가 해야만 하는 일, 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상의 모든 질문들에 앞서는 보다 근본적인 하나의 질문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1년에 가까운 시간을 극한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라. 피해자들이 안 괜찮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는데, 이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하라고, 너희만 국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 경청하고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닌 관료와 정치인들은 이제 되었다고,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이 치유되었는지 아닌지, 이제 그만하면 되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고통 받는 자 자신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자, 그에 관련된 행정 업무를 보는 자라는 말인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월호 유족들은, 안 됐기는 하지만, 결국은 가족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국가에 대하여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가? 그런 식으로 세월호 유족들에게만 예외적으로 현재의 실정법적 관례 이상의 배려를 행한다면,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지만, 이후에 발생할 모든 유사한 사건ㆍ사고들에 대하여도 이러한 특별대우를 행할 것인가?
우선,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자. 첫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하여 그 고통이 이제는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그 고통 받는 자를 바라보는 자들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 자신이다. 도대체 누가 나의 고통을 대신하여 나의 고통이 이제는 치유되었다고, 이제 그만하면 족하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얼마 전의 신문에도 보도된 것처럼, 일본인들의 81%는 ‘과거의 총리들이 한국ㆍ중국에 충분히 사죄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연합뉴스 2015년 2월 25일자 보도). 이는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충분히 사과했는지의 여부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논리이다. 당신은 이러한 논리에 동의하는가? 물론 세월호와 일본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관리ㆍ감독을 다하지 못한 포괄적 책임 여부를 따질 수는 있을지언정, 국가와 정부가 세월호 침몰의 직접적 원인, 곧 가해자는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상 오늘의 일본정부도 2차 대전 당시의 일본정부가 행한 일에 대한 직접적 책임, 곧 가해자는 아니다). 우리의 관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이 어떤 상태이며, 얼마나 깊고 또 얼마나 치유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누가 정할 수 있고, 정해야 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하다.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논의의 핵심은 우선 제3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논리에 반대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손에 맡겨야 할 것이다. 당사자를 대신하여 타인의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다름 아닌 폭력이다! 심지어 이러한 행위는 때로 ‘당사자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지기조차 한다. 어떤 타인의 행동이 그 행동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를 ‘실제로 위한 것인지’의 여부를 누가 정할 수 있는가? 누가 정하도록 해야만 하는가? 바로 당사자이다!
둘째, 베버의 지적대로,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세월호 희생자의 유족들은 분명 국민이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 유가족들의 고통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두에 관련된 국가의 공무를 온정주의로 처리할 수는 없다. 모든 처벌과 보상은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정법에 따라 엄정히 집행되어야 한다. 이는 분명 우리가 기억해야 할 타당한 논의이다. 만약 세월호 유족이 어떤 ‘비합리적인 과도한’ 주장을 한다면, 국가가 이를 경청하고 존중해야 할 하등의 의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유족들의 ‘합리적이고 합당한’ 요구마저도 ‘과도한 이기주의적’ 주장으로 매도당하는 상황에 가깝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합당한 합리적’ 요구와 ‘비합리적인 과도한’ 주장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누구의 합리성인가? 유족들과 행정가, 정치가들, 언론인들이 생각하는 합리성은 같을까?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합리적이지 않은지를 현실의 상황 속에서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합리성들이 충돌할 경우, 나의 합리성으로 타인의 합리성을 재단하는 것은 사실상 일방적인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상황일 뿐이다.
10. 국가의 존재이유 – 국민의 생명ㆍ재산ㆍ자유의 수호자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대하여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이제 견딜만한지 견딜 수 없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누가 판단하도록 해야만 하는가?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고통 받은 위안부 할머니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생존자들, 세월호의 유족들이 겪고 있는 이 현재 진행형의 고통에 대한 위로와 치유, 보상이 ‘이제 그만 되었다,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질문들은 가히 ‘섬세한 정신’을 요구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과도한 주장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우슈비츠 유대인들이 비상식적 요구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비합리적인 주장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사례와의 형평성은 어떻게 하는가? 관련 실정법과 관례가 현재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를 뛰어넘어 특별한 예외 사례를 만들어도 되는가? 이러한 예외는 추후의 유사한 사례들에 대한 처리의 일정한 규준으로 작용할 것인데, 바로 이 사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가 세월호를 통하여 명확히 인식해야 할 과제 상황이며, 신중히 검토하고 확정함으로써 우리의 관례를 만들어나가야 할 질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평등하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동시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부 당국자들, 일본의 행정 관료들, 전후 독일 행정 관료들의 합리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이처럼 ‘합리성’이란 당사자의 입장과 관점, 관심과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어떤 것이 합리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서 기존의 어떤 합리성을 제출하는 행위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준의 제출과 검토, 확정은 어떤 일군의 개인들이 특정 시기에 모여서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여러 사람이 자신의 명확한 입장과 철학에 입각한 해결책을 제출하고, 이를 다수의 공중이 검토ㆍ논의하는 오래고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정되어야만 하는 성질의 일이다.
아래에서는 이상의 논의에 대한 나 자신의 간단한 몇 가지 판단 기준을 제출해보고자 한다. 우선, 세월호에 관련된 책임자의 문책과 처벌, 희생자에 대한 보상, 유가족들의 고통과 분노에 대한 위로와 처우의 문제는 오직 희생자와 유족의 결정이 더 잘 존중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해 나간다는 대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사건ㆍ사고의 희생자가 느끼는 고통의 경감, 나아가 그러한 고통의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그러한 처벌과 보상, 위로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 국민주권의 사상 위에 성립된 근대 민주주의 국가라면, 우리가 직접적인 관련 당사자들을 처벌하는 목적은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엄중히 물음으로써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타인들의 인적, 물적, 심적 피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지, 그들을 개인적으로 괴롭히고 그들에게 어떤 복수를 가하려는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 오늘의 현행 법체계, 행정 시스템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 들을 수 있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런 부분도 존재하지만, 대체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실로 거국적인 국민여론조사를 해보아야 할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국민들은 우리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이 안 되고 있고 모든 것이 관료적 편의주의와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 이러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를 가진 공무원들 스스로가 우리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잘 듣고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국민들의 의사와 이해와 무관하게 독선적인 행동을 일삼아 왔는가를 반증해주는 사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공무원 혹은 정치인, 언론인들이 개인적인 도덕적 반성을 수행하여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한다는 식의 훈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공무원들이 듣지 않고 못한다면, 그들이 그러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그렇게 해도 되는 이유가 존재할 것이며, ‘개혁’이란 바로 이러한 이유 곧 그러한 상황을 가능케 한 근본조건 자체에 대한 혁파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개인의 도덕적 반성과 열린 마음이라는 자율적 부분과 외적 강제와 처벌이라는 타율적 부분이 조화를 이룰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저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국가가 개인의 내적 부분을 강제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개혁은 제도적 개혁에 집중되어야 한다(가령, ‘김영란법’을 생각하라). 이러한 제도적 개혁이 해당되는 당사자 개인에게는 ‘관행에 비추어 지나치다’는 불편한 감정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바로 ‘당신이 그렇게도 편안하게 느끼는’ 그 관행이며(이는 오염된 물에서 자라난 물고기에게는 갑자기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맑은 물에서 살라는 요구와도 같이 느껴질 것이다), 또한 불편한 긴장이 존재하지 않을 때 권력은 필연적으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보다 근본적인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다. 왜 이런 일을 국가가 해야 하는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조선과 같은 왕조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다. 조선의 왕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유일한 주인이며 조정과 관아는 그의 뜻을 받들기 위한 도구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과 입법ㆍ사법ㆍ행정 기구는 모두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한 도구이다. 근대 주권론의 선구인 로크로부터 시작되는 근대 자연법론의 규정에 의하면,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가 구성원의 생명, 재산, 자유를 지키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자란 오직 이러한 일을 효율적으로 잘 수행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만 국민들로부터 일정한 권한을 위임받고 또 국민들의 세금으로 녹을 받는 존재이다. 따라서 국민의 대리자에 불과한 공복(公僕) 곧 공공의 하인이라 할 당대의 위정자 스스로가 자신의 안위와 정권의 유지를 위해 공권력을 사적인 이익의 편취를 위해 사용하거나, 여타의 공무원들이 위정자를 위해 자신의 유일하고도 참된 주인인 국민을 저버리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인 시민 사회계약을 근본적으로 위반하는 행위로서, 이러한 자들은 국가의 공적(公敵)이자, 국가 반역자, 나아가 국기(國基)를 문란케 한 이적(利敵) 행위자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겁고도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국가는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가? 국가의 유일한 존재이유가 바로 그거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의 보장은 어떤 경우에도 두 번째로 밀릴 수 없는 국가의 유일한 항구적 최우선 과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실정법적 관례를 외치는 모든 이들의 정치철학적 무지를 폭로한다.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도구인 국가의 모든 시스템과 제도, 법령은 국가의 이러한 유일한 목적을 위해 항구적으로 개혁되어야만 한시적 수단인 것이다. 실정법의 가치는 이러한 근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수단을 방편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일 뿐, 그러한 규정 자체가 자신의 근본 목적을 거꾸로 규정하는 월권을 행하는 주체로 전화되어서는 안 된다. 법의 안정성은 물론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법의 만들어진 이유와 목적 곧 ‘법의 정신’이 제대로 오늘의 현실에서 반영될 수 있도록 법을 개선ㆍ보수해나가는 일이다.
11. 세월호,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의 시금석
나는 앞에서 우리가 세월호를 겪으며 얻게 된 가장 큰 깨달음이란 우리가 세월호를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근본적 인식의 틀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의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과 이론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사유를 강요한다. 북한식의 기만적인 ‘우리식 주체사상’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 세월호를 바라볼 수 있는 틀은 근대정치철학의 여러 사상가들로부터도, 아우슈비츠를 겪은 유럽의 사상가들로부터도, 미국과 일본의 탁월한 학자들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일정한 보편성이 존재하는 이상, 그러한 훌륭한 좋은 이론들을 더 많이 배우고 수입해서 갈고 닦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수입과 학습ㆍ적용의 과정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유의미한 관점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 부분이야말로 세월호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특히 우리의 지식인들이 논의해야 할 핵심이지만, 이러한 부분이 충분히 인식되지도 논의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크가 이미 누군가가 완성해 놓은 이론을 따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펴고자 하던가, 마르크스가 이미 누군가가 완성해 놓은 이론을 추종하며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던가? 아도르노가 누군가의 이론을 답습하며 아우슈비츠를 사유하던가, 푸코가 누군가의 이론을 반복하며 자신의 담론 투쟁을 전개하던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그들은 모두 기존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상황을 자신의 고유한 논리로 이론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기존의 어떤 올바르고도 객관적인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인 이론 구조와 세계관, 가치관을 현실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과 객관성, 진리와 과학의 관념 자체를 현실과의 상호작용 아래 새롭게 규정하고 정의하는 과정이다. 정답의 수입, 문제의식 자체의 수입이야말로 정신의 파산, 사유의 파산이다.
이미 존재하는 과거 어떤 때 어떤 누구의 이론을 오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돋보기로 사용하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필터에 들어오는 것만을 사건의 전체이며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그의 의도와도 무관하게, 사건의 참다운 ‘해결’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 여기 고통 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과거 누군가의 이론에 의해 재단하고 필터링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심은 우리의 눈을 통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해결책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하며, 노자와 공자의 책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푸코의 책에 그 모범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이 이미 세상을 살았던 어느 누구의 모범을 따라 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듯이, 당신과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 어느 소설, 어느 영화, 어느 누군가의 사랑을 흉내 내어 그들의 사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랑의 모습을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듯이, 우리가 세월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서구 또는 중국 어느 나라의 성현 혹은 철학자의 말을 우리의 세계에 적용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민주주의 개념과 절차를 만들어가고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하듯이 말이다. 오늘의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눈과 우리의 생각으로 재정의ㆍ재규정하는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인류가 이룩해온 모든 위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오늘의 우리가 행해야만 할 과제이다. 12세기 중국의 육상산(陸象山)의 “ "육경(六經)이 나를 주석하고, 내가 육경을 주석한다.”(六經注我, 我注六經)”, “육경이 모두 내 삶의 각주이다.”(六經個我柱脚)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월호 유족들의 목소리는 바로 이러한 길고도 지난한 작업 과정에서 하나의 길잡이, 시금석,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월호 문제의 처리에 관련되는 한, 세월호의 유족들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국가 중심주의적 사유, 효율성에 매몰된 관료주의적 사유, 성과 위주의 기업 만능주의적 사고, 편의 위주의 자기 중심주의적 사고에 물든 우리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 나가는 것, 그러한 경청을 가로막는 우리의 모든 기존 관념, 개념, 제도, 법, 이론을 수정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하나의 관념, 곧 한 인간의 목소리가 다른 인간들에 의해 경청되는 세계라는 관념을 탄생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타인을 ‘대신하여’, ‘타인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타인의 의사에 반하여, 내가 결정하지 않는 것, 타인의 목소리를 내가 ‘대변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 이러한 새로운 민주주의는 ‘나의 일은 내가, 너의 일은 네가, 너와 나의 일은 너와 내가 함께 결정하도록 한다’라는 일반 언명 아래 형식화될 수 있으며, 이는 다름 아닌 대의(代議, representative) 민주주의의 한계에 관한 역사적ㆍ비판적 검토 작업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 세월호 1주기를 맞아 '현실문화연구'에서 발행되는 세월호 관련 단행본에 실리게 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