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30.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 더하여 - 아래 나의 글은 한겨레 신문사에서 발간하는 <나.들> 2013년 10월호(vol. 12) 80-85쪽에 실렸다. 그런데 두 가지 비상식적인 일이 있다.

우선, 책을 받고 보니 제목을 아래 나의 원래 제목에서 '메이지에 물든 한국 학문의 담론', '한국 학문 오염시킨 메이지 유산'이라고 바꿔놓았다. 물론 내게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책을 받고 알았다. 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메이지 학문이 오염시킨 게 아니다.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메이지학문은 한국 학문을 오염시킨 게 아니라, 대한민국 학문 담론의 인식 가능조건이다. '오염시켰다'고? 그럼 '오염'되기 전의 혹은 우리가 앞으로 찾아나가야 할, 어떤 '순수한' '한국'의 학문 담론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웃기는 일이다.

두번째 비상식적인 일은 열심히 써보내니 분량이 초과한다고 줄여달라고 해서 억지로 줄이고 줄였는데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장의 반이 백지 공란이다 ... 그럼 그렇게 말을 해주었으면 그렇게 불필요하게 줄일 필요는 없었을텐데, 여하튼 좀 기분이 심히 즐겁지는 못하다.

2013년 10월 8일 적다.


http://na-dle.hani.co.kr/arti/culture/4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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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1. ‘타자’ - 번역의 문제


19세기 중후반의 프랑스 시인 랭보는 ‘나는 타자(他者)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시 20세기 중후반의 프랑스철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타자’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대한 적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거의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이다. 이 세 가지 ‘타자’는 모두 같은 타자인 것일까? 언어와 사상이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듯이, 어학 곧 해당 언어에 대한 문법적 지식 없는 해당 사유의 정확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상의 용례에 대한 정확한 문법적 해석,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문장이 말해진 정확한 사상적 맥락에 대한 이해이다.
 
2. 랭보 - ‘나는 타자이다’


우선 프랑스의 시인 랭보가 말한 ‘나는 타자이다’의 원어 문장은 1871년 랭보가 보낸 한 편지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정확한 원문은 Je est un autre이다. Je는 1인칭 단수를 의미하는 대명사 ‘나’로서 영어의 I에 해당된다. est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프랑스어 être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으로 영어의 is에 해당된다. est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곧 영어의 am이 아닌 is이다. 1인칭이 되려면 이 문장의 동사는 suis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un은 영어의 a에 해당되는 것으로 프랑스어의 남성형 단수 부정관사이다. 마지막 단어는 문제의 autre인데, 이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 문장의 경우에는 단수형 부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의심의 여지없이 타인(他人) 혹은 타자(他者)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랭보의 문장은 영어로 글자 그대로 직역되어 I is another로 번역된다. 이는 프랑스어 autre가 다른 ‘사람’ 곧 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일반’ 곧 타자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another가 반드시 다른 사람 곧 타인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경우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 프랑스어에는 광의의 다른 것 일반이 아닌 오직 다른 사람들 곧 타인만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가 따로 있는데, autre와 같은 어원을 갖는 autrui가 그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는 타자이다’라는 번역은 ‘옳은’ 혹은, 이 용어가 너무 과하다면, ‘충분히 섬세한’ 것이었을까? 우선 이 문장의 동사가 3인칭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때의 주어 ‘나’는 (1인칭 주어 ‘나’가 아닌) 3인칭 주어 곧 ‘나 일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기존 번역 ‘나는 타자이다’는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그리 섬세한 번역은 아니다. 잘못된 번역이 아닌 까닭은 이를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해도 나의 3인칭적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섬세한 번역은 못되는 까닭은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의 가능성이 현대 한국어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그 주어가 갖는 3인칭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 문장은 차라리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장의 un autre를 ‘나는 타자이다’처럼 타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일까? 이 단어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 것일까? 타인, 타자, 다른 사람? 우선 한국어 네이버 검색에 올라온 관련 학술논문을 보면 현대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하고 있으며, 종종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존재이다’와 같은 다른 번역도 눈에 띈다. 일본어 위키피디어의 랭보 편에도 이 문장은 ‘私は他者である’ 곧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번역이 un autre를 (한 명의) 타인 같은 식으로 한정하여 특칭하지 않고, 타자와 같은 일반적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프랑스어 autre가 갖는 두 가지 의미, 곧 다른 것, 타자 일반과 다른 사람, 타인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며, 이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3. 사르트르 -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이는 현대철학에 관련된 사르트르의 독창적 공헌이라 할 시선론(視線論)의 중심을 이루는 문장이다. 이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서 가르생이 외치는 대사인데, 원어는 L'enfer, c'est les Autres이다. 이는 영어판 위키피디어를 보면, Hell is other people로으로, 일본어판 위키피디어에는 ‘지옥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있다’(地獄とは他人である)로 번역되어 있다. 위 영어 번역을 현대 한국어로 직역하면 아마도 ‘지옥은 다른 사람들(타인들)이다’가 될 것이다. 같은 용어가 우리말에서는 타자로, 일어와 영어에서는 타인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르트르의 문장은 앞서 다룬 랭보 문장의 경우와 달리 다양한 우리말 번역을 갖는다. 이번에도 네이버를 검색해보면, 이 문장은 ‘지옥은 나의 타인이다’, ‘지옥은 타자이다’ 등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원문을 살펴보면, 이 경우에는, 앞서 랭보의 경우와는 달리, 다른 것(들) 일반 곧 타자(성)이라는 의미보다는 일단 복수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단연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보다는 (일어와 영어의 경우처럼)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는 구체적 지칭으로 옮긴 경우가 더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으며, 혹은 적어도 ‘지옥 그것은 타자들이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위 문장의 타인들을 지칭하는 단어 les Autres는 물론 단수 l'Autre의 복수로서 사르트르 초중기 사유의 대표작인 1943년의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 등장하는 중심개념들 중 하나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즉자존재(卽自, l'être-en-soi), 대자존재(對自, l'être-pour-soi)로 나누는데, 즉자존재는 가위나 지우개 같은 의식이 없는 존재 곧 사물이고, 대자존재는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인간을 지칭한다(여기서 대자(對自)와 타자(他者)에 나타난 자(自)와 자(者) 사이의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대자존재는 나(나인 주체)와 타자(내가 아닌 주체)로 구분되는데, 이 때 타자는 나의 ‘대타존재’(對他存在, l'être-pour-autrui)로서 정의된다. 그런데 대타존재의 원어를 보면 타자 일반이 아닌 타인들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l'autrui가 사용되어 있다. 곧 이 ‘대타존재’의 ‘타’(他)는 타자 일반이 아니라 타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대타존재’로 정의되는 존재는 ‘타자’가 아니라 ‘타인들’로 번역되었어야 했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사유에 등장하여 현대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 ‘타자’로 번역되는 용어는 타자와 타인(들)이라는 두 경우로 구분되어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타 혹은 대타존재의 경우처럼, 즉자(卽自)가 아닌 대자(對自)라는 식으로 그 존재의 ‘의식성’이 강조된 경우, 이 용어는 지금처럼 타자로 번역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의식을 가진 내가 아닌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타자(他者)라는 용어는 타인(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4. 현대프랑스철학 - 동일자와 타자


한편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 현대프랑스 사상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타자(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타자(他者, l'Autre, the Other)란 ‘동일자(同一者, le Même, the Same)가 아닌 것’이다. 동일자란 다시 말해 자기와의 동일성(同一性, Identité, Identity)을 유지하는 것, 곧 전통철학의 자기 원인적(causa sui) 실체(實體, Substance)를 의미하고, 인간의 경우, 이는 의식 주체(主體, Sujet, Subject)와 일치한다. 그리고 타자란 바로 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타자를 마치 사르트르에 있어서의 타인처럼 ‘내가 아닌 주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의 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갖는 존재(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곧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갖는 무엇이 아니라, 차이를 갖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동일자가 아닌 성질을 일컬어 프랑스철학에서는 타자성(他者性)이라고 부르는데, 타자성이란 한 마디로 ‘동일성에 기반한 자기 원인적 실체들’ 곧 의식을 가진 주체, 그의 대상이 되는 객체(대상) 및 양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로서의 인식 모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다. 이 경우의 타자는 의식적 주체 관념 일반의 부정에 기반하여 서있으므로 나는 물론 타인들도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의식 혹은 주체에 의하여 인식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같음(동일성)이 아니라 다름(차이, différence)과 달라짐(차이화, différenc/tiation)에 기반한 무엇이다.


결국 라캉, 푸코, 들뢰즈, 데라다, 레비나스 등이 사용하는 타자 개념은 우선 사르트르의 타자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상은 정면으로 대립되는 개념이며, 다음으로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에 등장하는 타자를 (다른 사물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이질적인 것, 곧 ‘의식적 주체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의 타자성(他者性)으로 새길 때의 그 타자와 같은 개념이다.


5. 번역의 층위 - 지식 고고학적 지층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펴본 현대 한국어 ‘타자’의 경우처럼, 원어인 프랑스어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용어들이 왜 우리말에서는 같은 하나의 용어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불필요한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역자의 실력부족 혹은 부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근본적인 인식 층위의 수정을 요구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 학문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하나의 인식론적 효과, 곧 내가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라 명명한 바 있는 지식 고고학적 지층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프랑스어 autre와 관련된 철학 용어의 번역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의 인식과 정확히 어떤 관련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오늘날 우리의 인식, 철학적 이해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 autre는 당시 선진 유럽 문명을 먼저 접한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용어이다. 당시 메이지 지식인들은 이 용어를 위에서 언급된 철학적 의미에서 크게 다른 것 곧 타자(他者)와 다른 사람 곧 타인(他人)의 두 의미로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물론 프랑스어의 autre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autrui는 물론 ‘타인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autre라는 용어를 이른바 오늘날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이들, 곧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뜻하는 그러한 의미의 타자(他者) 혹은 타자성(他者性)이라는 의미로는 번역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물론 메이지 지식인들이 이 용어를 번역했던 19세기 중후반에는 이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 태어나기도 이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autre라는 용어의 현대 한국어 번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의미의 혼탁에 대한 근본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상의 혼탁을 랭보, 사르트르,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라는 세 경우에 맞추어 하나씩 검토해보자.


우선,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라는 언명은 ‘나는 다른 사람(타인)이다’라는 의미와 ‘이른바 나란 의식적 주체에 의해 온전히 포괄될 수 없는 어떤 타자성이다’라는 의미 양자를 모두 갖는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원래의 랭보 문장 자체가 이러한 양의적(兩義的) 효과를 내도록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현대 한국어에서 이러한 양의성은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문장이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됨으로써 전자의 의미에 의해 후자가 가려지는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된 한국어 문장은 원문의 뉘앙스가 상당 부분 소거된 ‘나는 타인이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되고 말 소지가 다분하다. 혹은 랭보의 문장을 타자(성)에 대한 강조로 읽을 수도 있으나, 이는 오직 이러한 타자성의 담론이 철학적으로 부각된 이후, 곧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50~1960년대 이후에만 가능한 사후적 해석이다. 랭보의 문장은 타자성이 부각되기 이전의 시기라면 ‘나는 다른 무엇, 다른 어떤 존재이다’라는 문학적 혹은 일반적 의미 안에 포괄적으로 뭉뚱그려져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러한 설명이 랭보가 이후 프랑스철학자들의 사유를 선취(先取)한 것이라는 관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는 문장은 이제 쉽게 이해된다. 사르트르는 이른바 ‘사르트르 이후의’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의식적 주체가 아닌 다른 사물 혹은 존재로서의 대타적(對他的) 존재 곧 타자(他者)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세계에는 의식 없는 즉자 존재 곧 대상 사물, (나와 타인들로 구성되는) 의식적 주체들, 그리고 의식과 존재가 일치하는 완전한 존재로 설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즉대자적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번역을 주의해서 검토해보자. 왜 사르트르의 이 문장은 타인으로 번역되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타자로 번역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이 문장이 번역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이 문장이 들어있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문>이 발표된 1944년 이후, 혹은 그러한 사유의 배경이 된의 『존재와 무』가 발간된 1943년 이후의 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타자’는 물론 ‘존재와 무’라는 번역 자체가 당시의 한국인들에 의해서 번역된 용어들이기보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미 번역된 용어를 우리말 음가(音價)로 읽은 것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도 사르트르의 이 글들이 번역된 것은 아마도 2차 대전 종전 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른바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일단 어떤 의미로 고정된 단어 혹은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거나 혹은 번역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므로 당시의 일본인들 혹은 한국인들은 분명히 이미 존재하는 당시 철학계의 관용어들을 사용하여 이 용어들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어의 les autres에 해당되는 용어는 메이지 시대에 이미 확정된 하나의 의미, 곧 ‘타인들’(혹은 같은 의미를 갖는 ‘타자들’)밖에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로 번역되었다(한국어에서는 ‘분명히 단복수를 적시하지 않으면, 의미상의 혼동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단복수의 구분 없이 단수로 적는다). 그리고 그 이후 1950~1960년대가 되자,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이 등장하여 프랑스어 autre에 그때까지 프랑스어에서조차 명백히 분절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의미, 곧 ‘타자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오늘 현대 한국어로 프랑스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800년대 후반에 일본어로 번역된 프랑스어 autre에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일군의 새로운 프랑스철학자들이 이전의 프랑스어 혹은 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였으므로, 여전히 1800년대 후반에 메이지 시대의 일본학자들이 만든 용어들로 번역한 오늘날 한국의 철학용어들이 그 새로운 의미를 반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의 ‘타자’ 개념 번역의 경우는 이전의 단순한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주체 중심의 철학관을 넘어서는 곳에 그 근본 의미가 있으므로,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 앞에 놓여진 선택은 전혀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기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는 것 사이에 존재했다. 이들은 선택은 후자였는데, 아마도 이는 준거가 될 현대프랑스철학자들 자신이 어떤 새로운 용어를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용어 autre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했던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들 역시 기존 autre의 번역어인 ‘타자’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한 것으로 보인다.



6.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이제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랭보와 사르트르와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의 세 경우 모두, 현대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의미 해독상의 혼동은 타자(他者)라는 용어가 ‘다른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도 ‘타자’라는 용어를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던 메이지 시대의 번역 관행을 원어인 프랑스어에서 해당 용어에 상당한 의미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무반성적으로 따름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적절한 주의와 변용을 거쳤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 부주의한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실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지층, 곧 지식고고학적 지층의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할 보다 깊은 문제의 표면적 드러남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란 ‘대한민국의 학문 담론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 번역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인식론적 효과’를 말하는 것으로, 단적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 번역어가 없었다면, 혹은 이러한 번역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쳤다면, 생겨나지 않거나 혹은 적어도 다른 방식의 담론 효과를 불러일으겼을 담론 현상을 지칭한다.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동일한 영어 truth가 일본어에서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서는 진리(眞理)로, 일상 및 예술의 경우에는 진실(眞實)로 번역됨으로써(동일한 구분을 따라 번역된 다른 예로는 비판(批判)/비평(批評) 및 근대(近代)/모더니즘 등을 들 수 있다) 원어에는 없었던 특이한 효과를 현대 일본어 및 한국어에서 발생시키게 된다. 이 글에서는 단지 타인과 타자라는 두 용어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상의 검토 작업은 주체(主體), 객체(客體), 주관(主觀), 객관(客觀), 절대(絶對), 상대(相對), 철학(哲學), 이성(理性), 사회(社會), 민족(民族), 과학(科學), 예술(藝術), 진선미(眞善美), 자유(自由), 보편성(普遍性), 합리성(合理性), 근대성(近代性) 등 우리의 일상과 학문을 지배하는 글자 그대로 ‘무수한’ 메이지 개념들에 대한 개념사적이고 계보학적인 분석의 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7. 신한어(新漢語) - 근대 일본식 한자어


대략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날의 이른바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중심은 중국으로부터 서구 열강으로 과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 중국중심의 질서에는 존재하지 않던 다양한 서구의 개념들이 동아시아로 유입되게 되는데, 이러한 유입 곧 번역의 과정은 대부분 중국 및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가령 현대 한국어의 경우, 오늘날 사용되는 서구어 번역 한자어는 대략 중국ㆍ일본ㆍ조선에서 번역된 한자어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특히 이 중에서 근대 일본계 한자어의 영향력은 막강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령 박영섭의 연구에 따르면 1987년 당시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어 중 90% 이상이 중국 고전에서 수용된 근대 이전의 것들이나, 학술어 등 전문어의 경우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일본계 근대 한자어가 무려 82%에 달한다. 일본이 개발한 이 근대 한자어를 일본에서는 새로운 한자어 곧 신한어(新漢語) 혹은 신문명어(新文明語), 화제한어(和製漢語)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신사(新詞)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서는 ‘신한어’로 통칭하고자 한다.
 
8. 메이지 지식인들의 조어(造語) 방식
 
메이지 시기의 일본 학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서양학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정통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서양학문을 접한 후, 서양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명사, 특히 관념적 곧 대부분의 학문적 개념을 한자로 적는 일본어의 특성상 서양의 제반 개념을 자신들의 새로운 조어(造語) 방식을 통해 새롭게 한자어로 번역하게 된다. 심재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신한어 조어 방식은 대략 자주(自主), 수학(數學), 전기(電氣)처럼 근대 중국에서 만든 것을 일본이 습용한 한자어, 자유(自由), 철학(哲學), 기차(汽車)처럼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만든 한자로 양분하는데, 현대 한국어의 경우에는 이 외에도 시장(市場, いちば), 역할(役割, やくわり), 호명(呼名, よびな)처럼 일본에서는 훈독(訓讀)하여 한자어가 아니나 한국에서는 음독(音讀)하여 한자어가 된 것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관념적 개념어의 대부분을 한자로 표기하는 일본어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대부분이 속하는 경우이지만, 기존 중국의 어휘를 일본인들이 습용하여 서구어의 번역에 사용한 경우는 다음처럼 구분 가능하다. 우선 대학(大學)의 경우처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중국어에 변경을 가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university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법칙(法則)처럼 기존하는 법(法)과 칙(則)을 조합하여 rule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문학(文學)의 경우처럼 전혀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literature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이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방식은 물론 두번째와 세번째 방식이다.
 
9. ‘동아시아’ 사유의 근본조건 - 메이지 신한어
 
한편 이러한 일본계 신한어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중국의 신지식인들에 의해, 당시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특히 학문적 영역에서, 현대 중국어에까지 대량으로 유입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이래 다양한 침탈 과정을 통해 이러한 신한어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 전반(어떤 면에서는 ‘동아시아’ 발명의 주체가 바로 이러한 담론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이러는 사실상 글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야구’를 거쳐 특히 ‘학문’에 이르는 전면적 수용 현상을 가져왔다. 이는 사실상 일제 및 이어지는 이후의 미국중심의 학문 담론과 함께,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물론, 대한민국 학문 담론의 근본적인 인식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결정적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0. 새로운 ‘보편학’을 위한 전제조건


오늘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보편학을 구성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우리 학문의 인식가능 조건, 토대에 대한 면밀하고도 세심한 분석은 참으로 그것을 위한 선결과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과거 우리의 (일본을 통한) 서양 사상 유입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대한 오늘의 주체적 수용 및 미래의 자생적인 우리 학문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작업은 오늘 우리의 인식을 -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메이지 시대 번역어에 대한 개념사적ㆍ계보학적 검토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들을 우리로부터 타자화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들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동시에, 이러한 용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였는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 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 일상적 용어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오늘 우리의 새로운 ‘보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립극단 4 - 푸코


국립극단 연극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 '월요일 오후 다섯 시'

9월 강좌 - '연극적인 너무나 연극적인- 니체, 카뮈, 사르트르, 푸코' , 제4강 푸코




http://www.ntck.or.kr/Home/Archive/Video/Video.aspx


http://www.youtube.com/watch?v=6_SJ9u2LhMY

2013. 9. 22.

국립극단 3 - 사르트르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

 

 

- 로버트 베르나스코니, 『HOW TO READ 사르트르』,변광배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 변광배, 「장 폴 사르트르, 타자를 발견하다」, 『처음 읽는 프랑스철학』, 동녘, 2012.

- 변광배,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e-시대의 절대사상, 살림, 2005.

- 로널드 애런슨,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 변광배ㆍ김용석 옮김, 연암서가, 2011.

- 안니 코엔 솔랄, 『사르트르』(상ㆍ중ㆍ하), 창, 2012.

- 변광배ㆍ정명환 외, 『실존과 참여.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1948-2007』, 문학과지성사, 2012.

- 박정자, 『빈센트의 구두.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 기파랑, 2012.

- 조광제,『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1, 2), 그린비, 2013.

- 지영래, 『집안의 천치. 사르트르의 플로베르』,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9.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 1907년. 아버지 사망, 외가인 슈바이처(Schweitzer)가에 들어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한 유명한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사르트르의 어머니의 사촌. 1915년. 파리의는 앙리 4세(Henri IV) 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음. 1916년. 어머니 재혼, 어머니를 따라 라 로셸(La Rochelle)로 이사. 1917년. 라 로셸의 중학교에 입학. 1919년. 파리의 루이-르-그랑(Louis-le-Grand) 고등학교에 입학. 1921년(16세). 대학입학 국가고시 제1부 합격, 1922년(17세). 대학 입학 국가고시 제2부 합격. 1924년(19세).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며(1929년까지) 교수자격 시험(agrégation)을 준비.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만남. 1926년(21세). 나중에 「상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논문 완성. 1928년(23세). 고등 사범학교 졸업.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일반 정신병리학』 공역. 1929년(24세). 교수 자격을 얻음. 1929년(25세) - 군에 입대, 투르(Tours)에서 기상병으로 복무(1931년까지). 1931년(26세). 르 아브르(Le Havre)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 1933년(28세). 독일 유학. 베를린의 프랑스 문화원(Institut Français)에서 1년간 장학금을 받아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연구. 1933년. 코제브(Kojeve)가 헤겔를 강의 시작(1939년까지). 프랑스에 헤겔 사상이 처음으로 도입된 계기. 1934년. 베를린에서 돌아와 르 아브르 고등학교에 복귀. 「자아의 초월」 집필.

 

 

 

1936년(31세). 라옹(Laon) 고등학교 철학 교사. 『상상력』(L'Imagination, P.U.F., 지영래 옮김, 기파랑) 출간. 1937년(32세). 파리의 파스퇴르(Pasteur) 고교로 전근(1939년까지 근무). 『자아의 초월성』(Transcendance de l'Ego) 출간. 1938년(33세).『구토』(La Nausée,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출간. 1939년(34세).『정서론 소묘』(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 단편집 『벽』(Le Mur, 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출간. 「지향성, 후설 철학의 한 기본 개념」 집필. 군에 소집.

 

HOW TO READ 사르트르

 

 

“실재론과 관념론의 논쟁이 문제였던 것이다. 실재론은 전통적으로 물질이 정신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관념론은 대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물은 정신 속에 있는 비물질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 <자, 당신은 이 나무를 보고 있다. [...] 의식과 세계는 동시에 주어졌다. 본질적으로 의식의 외부에 있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이 의식과 상관적이다. [...] 후설은 이처럼 의식이 자기와는 다른 것으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고 부른다. [...] 결국 모든 것은 외부에 있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외부에, 세계 속에, 타인들 틈에 존재하는 것이다.>(「지향성」) [...] 후설은 이 개념[지향성]을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에게서 빌려 왔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을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라고 정의한다. 의식은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사물을 향한 방향성인 것이다.”(31-36) “의식은 관계를 맺는 사물을 떠나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알 수 없다. 「지향성」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존재에게서 ‘실존한다’는 것이 어떻게 ‘세계=내-의식으로서 갑잡스럽게 솟아오르기 위해 세계와 의식의 무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 되는가를 기술한다. [...] 의식과 관계된 ‘무’(無) 개념은 이제[『존재와 무』에서] 하나의 수동적인 ‘비존재’가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의식 자체가 기투를 하는 미래 세계로의 탈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사르트르는 의식과 관계 있는 ‘무’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애]벌레처럼 존재의 한복판에 자리잡는 것’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의식의 의미로 사용되는 대자존재(對自存在)와 사물의 의미로 사용되는 즉자존재(卽者存在)의 구별을 도출해낸다.”(45-46)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 여기가 바로 지옥이군요. 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우리가 고문실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겠지요. 불, 유황, ‘초열지옥’,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 붉게 달군 쇠꼬챙이는 필요 없어요! 타인, 그것이 지옥이니까요.”(<닫힌 방>, 50-52)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 가르생은영웅이 되기보다는 비겁자가 되는 것이 더 쉽다. 적어도 탁자가 되는 방식으로는 말이다.”(54) “하이데거는 인간은 ‘함께 있는 존재’(Mitsein)로 설명한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이 표현은 ‘우리’ 모두가 한 편에 속해 있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의식들 사이에 정립되는 관계의 본질은 함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갈등이다.’”(56)

 

즉자존재(卽者存在 l'être-en-soi): 사물 chose, thing

대자존재(對者存在, l'être-pour-soi): 의식[=나(自我, moi, ego) + 타인(他人, autrui, autre, others)]

즉대자존재(卽對者存在, l'être-en soi-et-pour-soi): 신 dieu, god

 

le regard 視線 - 타인(신),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대상화하는(사물화 하는) 자!

 

* 타자(他者, l'autre, the other) = 타자성(他者性) otherness

 

 

“카페의 종업원을 생각해보자. 그는 민첩하지만, 좀 지나칠 만큼 정확하고 약삭빠르다. 그는 좀 지나치게 민첩한 걸음으로 손님 앞으로 다가온다. 그는 약간 지나치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즉 그의 목소리, 그의 눈은 손님의 주문에 지나칠 만큼 주의를 기울이는 듯하다. 마침내 그가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걸음걸이에 어딘지 모르게 로봇 같은 어색하고 뻣뻣한 태도를 흉내 내려고 애쓰면서 곡예사와도 같은 가벼운 몸짓으로 접시를 가져온다. 접시는 항상 불안정한, 균형을 잃은 상태가 되지만, 종업원은 그때마다 팔과 손을 가볍게 움직여 균형을 되찾는다. 그의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는 놀이처럼 보인다. 그는 카페의 종업원이라는 연기를 하고 있다. 카페의 종업원은 작기 신분을 가지고 놀며 신분을 실현한다. / 내면의 비슷한 상황에서 카페의 종업원은, 이 잉크병이 잉크병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컵이 컵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카페의 종업원으로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카페 종업원의 역할을 완수하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다. 결국 배우가 햄릿인 것과 같이 나는 중립적인 방식으로서만 카페의 종업원일 수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내가 내 신분의 전형적인 몸짓을 기계적으로 행함으로써이며, 내가 ‘유비물’(analogon)로서의 이런 몸짓을 통해 상상적인 카페의 종업원으로서의 나를 지향함으로써이다.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카페 종업원의 즉자 존재다. 마치 내가 온갖 방면에서 그것을 초월하지 않고 현존하는 이 역할을 유지하는 바로 그 사실처럼, 내가 내 신분을 ‘넘어서’ 자신을 구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어떤 의미에서 카페의 종업원으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스스로를 외교관이나 신문기자로 지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카페 종업원으로 있다 해도 즉자 존재의 방식으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방식으로 카페의 종업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존재와 무』, 62-64).

 

 

자기 기만(mauvaise foi). “카페 종업원의 예로서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의식은 결코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사물을 즉자존재(혹은 즉자)로, 의식을 대자존재(대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비록 의식이 자체를 직접 대상으로 삼지는 않지만, 자체를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 인식으로 인해 의식의 한복판에 일종의 균열 혹은 파열이 생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은 결코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신 의식은 부정의 형식으로 그 자신으로부터 항상 벗어나면서 계속 자기 자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 대상을 향한 의식 작용의 직접성은 의식 자체의 초월성 즉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企投, projecter) 그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빛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을 통해 가능해진다. 따라서 나는 이 세계를 존재 가능성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닁 존재 가능성의 입장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 이는 내가 아무리 손님들에게 한 명의 종업원에 불과하다고 해도, 나는 내 자신에게 있어서는 종업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내일이라도 이 직업을 당장 그만둘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오직 나의 다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인간은 사무링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64-69)

 

인간은 -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서의 ‘사물’도, 의식의 존재와 미래가 일치하는 충만한 존재로서의 ‘신’도 아닌 - 단지 하나의 쓸모없는 정열(passion inutile)!

 

1940년. 6월 21일 로렌느지방의 파우두에서 독일군에 포로가 됨. 『상상적인 것. 상상의 현상학적 심리』(L'Imaginaire : Psychologie Ph nom no-logique de l'imagination) 출간. 1941년(36세). 4월 1일 민간인을 가장하여 석방됨. 프랑스로 돌아와 파스퇴르 고교 복직. 1942년(37세). 파리의 콩도르세(Condorcet) 고교로 전근(1944년까지 근무). 레지스탕스 운동.

 

1943년(38세) -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에의 한 시도』(L'Etre et le Néant, Essai d'ontologie phénom nologique, 손우성 옮김, 을유문화사), 희곡 3막극 『파리떼』(Les Mouches) 출간. 희곡 <닫힌 문> 출간. 1944년(39세). 희곡 「출구 없는 방」(Huis clos) 초연. 1945년(40세). 종전. 고교 교사직을 떠나 생-제르멩-데-프레 가의 카페를 전전하며 집필 활동에 전념. 이때부터 실존주의의 대중적 인기 폭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 est un humanisme, 박정태 옮김, 이학사)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 정당을 창당하려 했으나 실패. 미국에서의 순회 강연 시작(1946년까지). 연작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 de la libert ) 제1권 <철들 무렵>(L'Age de raison), 제2권 <유예>(Le Sursis) 출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종이 자르는 칼과 인간.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29).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은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1원칙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 주체성이라는 말로 우리는 인간은 먼저 실존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企投, projecter)하는 일을 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33-34) “그런데 이 말은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가 인간은 스스로를 선택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우선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또한 우리 각자가 이처럼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선택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되기 원하는 인간을 창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또한 우리가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행위 중에 그렇지 않은 행위는 하나도 없습니다.”(35-36)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바로 이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입니다. 실제로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따라서 그 결과 인간은 홀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인간은 자기의 안에서도, 또 자기의 밖에서도 그가 매달릴 만한 그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핑계꺼리를 찾지 못합니다. 만약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결코 응고된 채 주어진 그 어떤 인간 본성에 의존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결정론[운명론]이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인간은 바로 그 자유입니다. 한편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정당화시켜줄 가치나 질서를 우리의 앞에서 찾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어떤 핑계도 배제된 채 홀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고 말하면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고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세계 속에 던져진 이상, 인간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자는 열정[정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자신의 열정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자는 또한 이땅 위에 주어진 그 어떤 징표 속에서 자신에게 방향을 알려줄 도움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기 좋을 대로 징표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퐁주 francis ponge 는 그의 매우 아름다운 글에서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 l'homme est l'avenir de l'homme’라고 말했습니다.”(44-45) 레지스탕스 운동과 홀어머니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제자의 이야기. “하지만 어떤 것이 가장 힘든 길일까요? 전우와 어머니 중에서 과연 누구를 형제처럼 사랑해야 할까요? 어느 일이 가장 큰 효율이 있을까요? 누가 그것을 선천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 내가 그를 보았을 때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어느 한 방향으로 나를 진정 떼미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청년의 경우 어떤 한 감정의 가치를 도대체 어떻게 결정한다는 걸까요? 어너미를 위한 그 감정의 가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머물러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입니다.”(48-49) “이와 같이 그 청년은 나를 찾아오면서 내가 그에게 주어야 할 대답을 알고 있었으며, 나 또한 그에게 주어야 할 대답이 단 하나밖에는 없었습니다. ‘자네는 자유롭네, 그러니 선택하게, 즉 발명하게’라는 대답 말입니다. 그 어떤 도덕도 여러분에게 해야 할 것을 지시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징표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년의 선택, 예수회 사제. 결국 이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그는 징표 해독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것, 그것은 이처럼 우리 존재를 우리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51-53)

 

“만약 졸라가 자신의 소설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이 존재들은 유전으로 인해, 환경과 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유기적[유전적] 또는 심리적 결정론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선언할 경우, 사람들은 곧 안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인 거야. 그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러나 실존주의자가 비겁한 사람을 묘사할 때, 그는 이 비겁한 사람이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겁한 사람은 그가 비겁한 심장, 비겁한 허파 또는 비겁한 뇌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겁한 사람은 결코 생리학적 조직 때문에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겁한 것은 그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비겁한 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겁한 기질이란 없습니다. 신경질을 잘 내는 기질은 있습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소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비겁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을 비겁하게 만드는 것은 포기 혹은 굴복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질은 행위가 아닙니다. 비겁한 사람은 그가 행한 비겁한 행위로부터 정의되는 것입니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 죄가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래부터 비겁하거나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 그 근본을 볼 때, 사람들은 결국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이 비겁하게 태어날 경우 여러분은 완벽한 편안함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비겁하게 태어난 것에 대해 어떤 책임도 없으므로, 여러분은 일생 동안 비겁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영웅으로 태어나도 마찬가지로 완벽한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는 비겁한 사람은 스스로를 비겁하게 만든다는 것, 영웅을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비겁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비겁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영웅에게는 영웅을 그만 둘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적인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입니다.”(59-62)

 

“각각의 인간 속에서 인간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 본질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조건이라는 인간적 보편성은 존재합니다.”(66) 실존주의에 대한 반론에 대한 사르트르의 답변. 그럼 인간들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올바른 문제제기가 아닙니다. 선택은 사실 한 방향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설령 내가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이 경우 나는 여전히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71-72)

 

“차라리 우리는 도덕적 선택이란 예술작품의 제작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미학적 도덕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 예술가가 그려야 할 그림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나요? 반드시 그렇게 그려야 할 것으로 정의된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예술가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자신에게 앙가제한다는 것, 그려야 할 그림이란 정확하게 예술가 자신이 그리게 될 그림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미학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에술과 도덕 사이에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 경우 모두 우리가 창조와 발명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를 찾아온 학생이 칸트의 도덕이나 다른 도덕 등 모든 도덕에 대해 호소해 보았지만 결국 그 어떤 종류의 지시사항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경우를 통해 저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학생은 그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법칙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이지, 이미 다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선택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갑니다.”(72-75)

 

“그러나 스스로를 자기기만적인 방식으로 선택하면 왜 안 됩니까? [...] 자기 기만은 스스로의 정의에 의해서도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기만은 앙가주망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전적인 자유를 은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자기 기만을 원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당신이 그러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그 경우 당신이 자기를 기만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자기 기만이 기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76-77)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말은 삶은 그 어떤 선천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기 이전에 삶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며, 이때 가치는 여러분이 선택하는 바로 그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83)

 

“실존주의자는 결코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바깥에 있습니다. [...] 우리가 말하는 것이 휴머니즘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것을 통해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간 그 자신 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하여 결정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정확하게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일은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 자신의 밖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자유이자 특수한 실현인 어떤 목표를 찾음으로써[발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85-86)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려고 힘을 쏟는 그런 의미에서의 무신론이 아닙니다. 실존주의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신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이 신의 실존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되창아야 하며, 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낙관론이자 행동의 독트린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 고유의 절망과 우리의 절망을 혼동한 나머지 우리를 절망에 빠진 인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의 자기기만 때문입니다.”(87-88)

 

* 나의 논평. 1) “우리는 진리 위에 기초한 독트린을 원합니다.”(64) 사실, 있는 그대로? 진실성, 진정성. 사르트르는 진리와 허위의식, 진실과 오류(혹은 자기기만),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2) 사르트르는 보편성과 절대성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3) 사르트르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갖는 코기토의 단일성을 여전히 신뢰한다. 4) 사르트르의 자유를 향한 의지와 니체적인 힘에의 의지 사이의 관련은 어떤 것일까? 5) 사르트르에게는 서양성과 보편성이 일치되어 있다. 서양인, 아니 1945년의 프랑스인의 실존과 사유가 인간 및 그 사유 구조 자체로 설정되어 있다.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1946년(41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태인 문제 고찰』(Réflexions sur la question juive),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무덤 없는 주검』(Morts sans pulture)출간.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 공동 발기인으로 창간. 1947년(42세). 『출구 없는 방』, 『일은 벌어졌다』(Les Jeux sont faits), 『존경할만한 창녀』(La Putain respectueuse), 『상황 1』(Situations, 1), 『보들레르』(Baudelaire) 출간. 1948년(43세).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 정명환 옮김, 민음사) 출간.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출간. <톱니바퀴>. 사후에 출판될 「진실과 실존(Verité et existence) 집필. 1949년. 『자유의 길』 제3권 <비탄에 빠져>(La Mort dans l'âme), 『상황 3』 <정치논쟁> <단장> 출간. 1951년(46세). 희곡 3막 11장극 『악마와 선신』(Le Diable et le bon Dieu) 출간. 1952년(47세). 카뮈와 논쟁. 『생-주네, 희극배우 혹은 순교자』(Saint-Genet Comédien et Martyr) 출간. 메를로-퐁티, 현대 지의 공동 편집인 사임. 1953년(48세). <앙리 마르텡 사건>(L'Affaire Henri Martin) 출간. 1954년(49세). 러시아와 중국 여행.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킨』(Kean) 각색 출간. 1955년. 메를로-퐁티, <변증법의 모험>(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출간, 사르트르를 비판. 1956년. 희곡 『네크라소프』(Nekrassov). 1957년(52세). 「1957년의 실존주의의 현 상황」(나중에 폴란드 잡지에 「방법의 문제」로 실리게 될 논문.

 

1958년(53세). <프로이트의 일생>에 대한 영화 대본 작업. 3막극 <새로운 길> 출간. 1960년(55세). 『변증법적 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박정자ㆍ윤정임ㆍ변광배ㆍ장근상 옮김, 나남) 제1권을 <방법의 문제>(Question de la methode)를 서문으로 하여 출간. <방법의 문제>는 현대지에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Existentialisme et Marxisme)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바 있음. 희곡 5막극 『알토나의 유폐자들』(Les S questr s d'Altona) 출간. 쿠바 방문. 1961년(56세). 메를로-퐁티 사망. 그를 위한 조사를 발표. 1962년(57세). 「스탈린의 유령」 집필. 1963년(58세). <상황 Ⅳ> 출간.

 

1964년(59세). 노벨 문학상 거부. 『말』(Les Mots, 정명환 옮김, 민음사), <상황 Ⅴ> 출간. 1965년(60세). 일본 도쿄에서 강연 <지식인을 위한 변명>(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 박정태, 이학사)을 행함. 유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자들』(Les Troyennes) 각색. 1966년(61세). 『상황 7』 출간. 1971년(66세). 『집안의 천치』(L'Idiot de la famille) 1, 2권 출간. 1972년(67세). 『상황 8』, 『상황 9』 출간. 『집안의 백치』 3권 출간. 1976년(71세). 『상황 10』 출간. 영화 <사르트르 자신에 의한 사르트르> 출시. 1980년 4월 15일. 파리에서 영면. 향년 75세. 1983년. 『윤리학을 위한 수첩』(1947-48년) 출간. 1985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2권 출간. 1989년 - 『진실과 실존』(1948년) 출간.

 

 

지식인을 위한 변명

 

“지식인을 향한 이 모든 비판에는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 인간과 사회라는 보편 개념(오늘날 인간과 사회라는 개념은 사실상 불가능한 개념, 다시 말해서 추상적이고 그릇된 개념입니다)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기존의 진리와 이 기존 진리 위에 성립된 행위 전체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이 깔려 있습니다. [...] 이 모든 휴머니즘은 모두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입니다.”(12, 30)

 

 

 

2013. 9. 20.

[대담] 철학과 인문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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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한 대학 철학과 학술지에 싣기 위해 한 두 달(?) 전에 행한 인터뷰다.
사실 인터뷰 전체는 현재의 2-3배 분량인데, 녹취록 정리가 어려워
일단 이번에는 앞부분만 학회지에 싣기로 했다. 
 
 
 
 




 
















 

 
 

2013. 9. 16.

국립극단 2 - 카뮈

내가 상상한 대로의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tel que je l'imagine, 1913-1960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알베르 카뮈 출생. 부친 뤼시앵 카뮈는 1871년에 알제리로 이주한 알자스 지방 출신으로 포도농장의 저장창고 노동자였다. 모친 카트린 생테스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 출신으로 9남내 중 둘째였다.


1914년 8월 2일. 제1차 세계대전. “나는 내 또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1차 세계대전의 북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우리의 역사는 그때 이후 끊임없이 살인, 부정, 혹은 폭력의 연속이었다.”(『여름』중 「수수께끼」) 그의 부친은 보병연대에 징집되어, 마른 전투에서 부상, 생 브리외크 병원에서 사망, 생 브리워크에 매장되었다. 그의 모친은 알제로 돌아와 벨쿠르라는 서민 지역(리용 가 93번지)에 정착했다. 카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지내며, 처음에는 화약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가정부 일을 하게 되는 “거의 말을 안하고 지내 벙어리가 되다시피 한”(『안과 겉』 중 「긍정과 부정의 사이」) 어머니나, 자못 권위적이고 희극적인 할머니 카트린 카르도나, 그리고 통 수리공인 불구의 삼촌 에티엔(『적지와 왕국』) 및 형 뤼시앵과 함께 가난하게 자란다. “나는 마르크스를 통해 자유를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시사평론』 제 1권).


1918~1923년. 초등학교 재학시, 교사 루이 제르맹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는 수업 종료 후에도 카뮈를 지도해주고 중고등학교장 선발시험에 추천, 응시하도록 한다. 후에 카뮈는 노벨상 수상 연설집(스웨덴 연설)을 그에게 헌정하게 된다. 1923~1930년. 카뮈, 알제의 뷔조 중고등학교(문리과반의 반 기숙학생). 1926년. 지드의 『사전(私錢)꾼들』, 말로의 『서양의 유혹』. 1928년. 말로의 『정복자』 정독. 1928~1930년. 알제 대학교 축구팀의 골키퍼. “내가 나의 축구팀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석은 충동 때문이었다.”(알제대학 주보)
 
1929~1930년. “처음으로 앙드레 지드를 읽게 된 것은 내가 16세 때였다. 나의 교육의 일부를 책임 맡았던 삼촌이 때때로 나에게 책들을 주곤 했다. 푸줏간 주인인 그는 장사가 아주 잘 되었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거리는 독서와 사상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는 아침 나절에만 장사에 몰두하고, 나머지 시간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동네 카페에 나가 이야기와 토론으로 소일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양피 커버로 너 조그만 책 한 권을 빌려주면서 ‘너의 관심을 끌 책’이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 나는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대던 중이라, 『여인들의 편지』(마르셀 프레보) 읽기를 끝낸 후에, 삼촌이 건네준 『지상의 양식』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의 기도하는 듯 한 문장들은 나에게 모호하게 느껴졌다. 자연이 주는 재화들에 대한 찬송 앞에서 어리둥절했다. 나는 16세 때 알제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풍요함을 벌써 실컷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는 다른 종류의 풍요함을 희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 나는 그 책을 삼촌에게 돌려주면서 아닌 게 아니라 그 책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해변가를 거닐거나 느긋하게 공부하거나 또는 한가하게 독서하면서 그 고달프기만 한 내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리하여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드에게 보내는 경의」)
 
1930년. 말로의 『왕도』, 문과반에서 장 그르니에를 스승으로 삼게 된다. 폐결핵 발병. 요양에 부적당한 집을 떠나, 우선 무정부주의자이며 볼테르 숭배자인 푸줏간주인 귀스타브 아코 삼촌 집에 기거하고, 기흉으로 앓는 동안 입원했다가 후에는 독립생활을 하며,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함께 알제의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생활하게 된다. 1932년. 문과 학업 계속. 학창시절 친구로 클로드 드 프레맹빌과 앙드레 벨라미슈를 사귀는데, 후자에게 카뮈는 나중에 로르카(스페인 시인, 극작가)의 번역을 맡기게 된다. 폴 마티외 교수와 장 그르니에 교수와도 친분을 나누는데, 특히 철학자이며 문필가인 후자와의 친분은 오래도록 변함없이 계속된다(카뮈는 후에 그르니에 교수에게 『안과 겉』, 『반항인』을 헌정하고, 은사의 저서 『섬』의 서문을 쓴다). “장 그르니에 교수를 만났다. 그 역시 나에게 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내밀었다. 『고통』(La Douleur)이라는 제목의 앙드레 드 리쇼Andre de Rechaud의 소설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훌륭한 책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책은 내가 경험해서 아는 것들, 즉 어머니라든가 가난이라든가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책이다. 습관대로 하룻밤새에 그 책을 다 읽어 치웠다. 다음 날 잠에서 깨었을 때, 낯설고 새로운 자유를 가슴에 안고 나는 머뭇거리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책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망각과 심심파적만이 아니라는 교훈을 터득한 것이었다. 나의 집요한 침묵, 지독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기묘한 이 세상, 내 가족들의 그 고결성과 가난,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등, 이 모든 것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이라는 책으로부터 나는, 지드가 장차 나를 유인하여 끝어들이게 될 창작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막연하게나마 우선 엿볼 수 있었다.”(「지드에게 보내는 경의」). 1932년. 잡지 『쉬드』에 4편의 글을 발표.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권력 장악, 카뮈는 앙리 바르뷔스와 로맹 롤랑에 의해 주도된 암스테르담-플레이엘 반파쇼 운동에 가입, 투쟁한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마르셀 프루스트 작품 탐독.(『반항적 인간』 중 「소설과 반항」). 장 그르니에의 『섬』 발간.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은 실존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아이러니하고 시적인 문체로 강한 회의주의를 표명함으로써 카뮈로 하여금 그르니에를 사상적 스승으로 여겨 언제나 그 영향 입은 바를 잊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안과 겉』, 『결혼』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술은 신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신성함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다. 혹자는 우리가 예술을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수단이 목적보다 더 아름답고 탐구가 진리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다.”(「합일속의 예술」, I, 143)
 
1934년 6월. 시몬 이에와 결혼, 2년 후에 이혼. 발레아르로 여행. 1934년 말.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 이슬람 계층에서의 선전 임무가 부여된다. 카뮈의 친구들은 그가 1937년까지 공산당원증을 갖고 다녔다고 말하고 있다.
 
1935년. 말로의 『모멸의 시대』. 『안과 겉』 집필 시작. “나로서는, 나의 원천이 「안과 겉』속에,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계의 추억이 지금도,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만족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카뮈는 그에게 지급된 대여 장학금으로 알제 대학에서 철학공부를 계속한다. 그러나 또한 생계 수단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이 해에 정기적으로 대학 관상대에 나가 일하면서 남부 지방의 기압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곤 했다. 또 그는 자동차 부속품을 팔거나, 선박중개인에게 고용되기도 했고(뫼르소), 시청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그랑은 시청 직원으로 『페스트』에 등장한다).
 
1936년.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한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관계를 주제로 한 철학 졸업논문(D.E.S.S.) 제출. 제목은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 에틱테토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말로, 지드 등의 작품 탐독. 3월 7일. 독일군의 레난 지방 재점령. 5월. 프랑스에서 인민전선 득세. 6~7월. 중앙 유럽 여행, 파경. 7월 17일. 스페인 내란. 1935-193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카뮈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문화원의 책임을 맡았고 ‘노동극단’을 창단하였다. 이 극단을 위하여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아스튀르의 반란」을 집필했으나 상연 금지되었으며, 후에 샤를로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가브리엘 오디치와 샤를로를 중심으로 ‘참다운 풍요’라는 기치 아래 지중해 문학운동이 전개된다.
 
1936년~1937년. 알제 라디오 방송극단의 배우로서 한 달에 15일씩 방방곡곡을 순회공연. 1937년 2월. 문화원에서 새로운 지중해 문화에 관해 강연.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철학교수 자격시험 응시 거부당함. 5월 『안과 겉』 출간.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서문, I, 212) “큰 용기란 빛을 향해서도 죽음을 향해서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안과 겉, 277)
 
1937년 8~9월. 말로에 관한 평론 계획. 요양을 위해 앙브룅에서 체류. 이어 마르세유, 제노바, 피사를 거쳐 피렌체 여행. 명증하고 고뇌에 찬 열정의 시기로서 『결혼』이 그 결실. 미발표의 『행복한 죽음』 집필.
 
“카트린,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 너는 내면에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어.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것으로, 행복의 감각을 가졌어. 오로지 한 남자에게서만 삶을 기대해서는 안 돼. 그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서 삶을 기대해야 해.”(401) “중요한 것은 말이지, 다만 행복의 의지이고 언제나 뚜렷하게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는 거야.”(421) “그는 이제 죽음을 겁낸다는 것이 삶을 겁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39)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기만하거나 비겁해지지 않은 채-자신과 일대일로 짜기 육체와 대면하여-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내들 사이의 문제였다.”(442)
 
시디-벨-아벨스 중학교 교사직을 타성과 침체를 우려하여 거절. 10~12월: 소렐, 니체, 슈펭글러(『서양의 몰락』)등을 탐독. ‘노동극단’이 해체, ‘협력극단’에 흡수.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갈 것을 계획.
 
1938년. 파스칼 피아(후에 『시지프의 신화』를 그에게 헌정)가 주도하는 <알제 레퓌블리캥> 신문의 기자로 취직, 잡보 기사로부터 사설, 의회 기사와 문학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담당했으며, 특히 알제리의 정치적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치기도 했다. 말로의 『희망』, 사르트르의 『구토』. “사르트르의 주인공은, 위대함을 딛고 근원적인 절망에서 일어서려고는 하지 않고 인간의 그 혐오스러운 면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고뇌가 지닌 참된 의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 같다.”(「알제 레퓌블리캥」 1938년 10월 20일자). 『칼리굴라』 집필. ‘부조리에 관한 시론’을 구상하며 『이방인』의 집필에 도움이 될 자료 수집.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상의 황혼』,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탐독. 9월 30일. 뮌헨 협정.
 
1939년 3월. 나치,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합병.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의 책들을 탐독. 오디지오, 로블레스 등과 함께 「리바주」라는 잡지 창간. 앙드레 말로와 상봉. 사르트르의 『벽』. “위대한 작가는 그의 세계와 그의 주장을 항상 느끼게 해준다. 사르트르의 주장은 무(無)이자, 명철성에 있다.”(「알제 레퓌블리캥」 1939년 3월 12일자). 5월: 샤를로 출판사에서 『결혼』 출간.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다는 것이다. [...] 향락을 두려워하는 자를 나는 바보라고 부른다.”(499-500)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소시켜야 할 대상이다.”(521) “태양(soleil)과 바다(mer)”(525)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동시에 부조리도 증대시키기 마련이다.”(526) “저 돈담무심한 태도, 희망을 품지 않는 인간의 저 위대함, 저 영원한 현재, 이것이 바로 분별 있는 신학자들이 지옥이라 불렀던 것이다. [...] 그 대답이란 반드시 썩어 없어지게 마련인 하나의 진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쓴맛과 고귀함을 동시에 지닌 진실인데 그들에게 그 진실을 정면에서 바라볼 용기가 없는 것이다.”(533) “삶이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538)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541)
 
1939년 6월. 카빌리(알제리의 산악지방) 취재 여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지방 경관 한복판의 그 비참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국제적 긴장 고조로 그리스 여행 계획을 포기. “전쟁이 나던 해, 나는 율리시스의 순항 길을 다시 한 번 더듬기 위하여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한 젊은이도 빛을 찾아서 바다를 건너질러 가는 화려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여름』) 9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첫째 할 일은 절망하지 않는 일이다.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자.”(『여름』, 「편도나무들」) “가장 보잘것없는 임무를 가장 고귀하게 여기며 수행해 나갈 것을 결심.”(『작가수첩』). 연대의식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려 했으나 건강 때문에 소집 연기. “자기 나라가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나라에 대하여 연대감을 가져야 한다.”(『작가수첩』)
 
1940년. 「알제 레뷔블리캥」 판매 보급상의 애로 때문에 「수아르 레퓌블리캥」에 합병(전자는 10월 28일에 폐간되고 후자는 9월 15일에 창간되었으니 몇 주일간은 두 신문이 공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 당국의 검열 요구에 불복, 1월 10일 폐간. 카뮈는 안정된 직장을 당국의 압력 때문에 박탈당할 것을 예측하고 알제리를 떠난다. 검열 받는 신문에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을 결심을 하고서 파스칼 피아의 추천을 받아 「파리 수아르Paris Soir」 에 순전히 사무적인 임무를 띤 편집 담당자로 입사한다. “「파리 수아르」에서 일하면서, 파리의 약동과 파리의 핵심을, 여점원 같은 그 천한 정신을 느낀다.”(『작가수첩』) 5월. 『이방인』 탈고. 5월 10일. 독일군 침입. 카뮈는 「파리 수아르」 편집진과 함께 클레르몽으로 피난하나 12월에 신문을 떠난다. 9월. 『시지프의 신화』 전반부 집필. 10월. 임시로 리옹에 기거. 12월 3일. 오랑 출신이며 수학교사인 프랑신 포르와 리옹에서 두번째 결혼.
 
1941년 2월. 『시지프의 신화』 탈고. “악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에 관해서, 그리고 정의로운 인간으로 하여금 우선은 창조와 창조자에 대항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동료와 자기 자신에게까지 대항하게 만드는 저 거역할 길 없는 논리에 관해서,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신화들 중 의 하나인" 『모비 딕』의 영향을 받아 『페스트』를 준비.
 
1941~1942년. 겨울에 재발한 폐결핵 각혈 때문에 샹봉 쉬르 리뇽에서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까지 요양. 11월 8일.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미 함대 상륙(아이젠하워 장군 지휘 아래 오랑, 알제에 상륙) 때문에 카뮈의 알제리행이 중단, 아내와 독일점령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헤어져 있게 된다.
 
1942년. 멜빌, 다니엘 디포, 세르반테스, 발자크, 마담 드 라파예트, 키에르케고르, 스피노자 등의 작품탐독. 7월. 『이방인』 출간.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1955, 미국판 서문, II, 436)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으로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이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사람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선고를 받게 된다. / 따라서 내가 보기에 뫼르소는 표류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뿌리가 깊숙한 정열이 그에게 활력을 공급한다. 절대에 대한, 진실에 대한 열정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직 소극적인 진실로 존재한다는 진실, 느낀다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 없이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 여전히 좀 역설적인 뜻에서 한 것이지만, 나는 내 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436-438)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477)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505) “[나의 변호사가 물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 방청객들이 웃었다. 그러나 검사는 다시 일어서서 법복을 바로 잡고 나더니 존경할 만한 변호인의 순진성을 갖지 않고서는, 그 두 종류의 사실 사이에 근본적이며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바라고 천명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힘차게 외쳤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하였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535)
 
1943년. 『시지프의 신화』 출간.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 3>”(II, 263)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와 자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들 중에서 가장 절박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267-268) “돌연 환상과 빛을 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적(流謫)에는 구원이 없다. [...]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 터이므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감정과 허무에의 갈망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려는 데 있다.”(270-271)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 과연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 것인가 [...] 논리적이 되기는 언제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궁극에까지 논리적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 과연 죽음에 이를 정도의 논리란 존재하는 것일까 [...] 그것이 바로 내가 부조리의 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74)
 
부조리와 벽. “하나의 세계란 곧 하나의 형이상학, 하나의 정신적 태도인 것이다. [...] 한 인간은 그의 솔직한 충동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연기하는 연극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있다. [...]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ㆍ화ㆍ수ㆍ목ㆍ금ㆍ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자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하여 시작되며, 의식에 이한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은 ‘전연 몰랐다’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276-281)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이 세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세계의] 비합리와, 명확함에 이르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열망과의 맞대면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명확함을 얻고자 하는 호소가 메아리치고 있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에 똑같이 관련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만이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288-289)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번만이라도 ‘분명히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그리고 양자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295-296)
 
철학적 자살.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 세 가지 중 어느 한 항목이라도 파괴되면 그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정신 밖으로 벗어나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여건은 부조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 이 부조리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나는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이것을 절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계속적인 거부(이것을 포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족(이것을 젊은 시절의 불안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을 전재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부조리는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다.”(299-301) “셰스토프와 키에르케고르. [...] 셰스토프가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성 저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다. 부조리의 정신이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고 이성 저 너머에 아무 것도 없다. [...]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요구했던 제3의 희생, 신이 가장 기뻐하시는 ‘이지(理智)의 희생’이다. [...] 그[키에르케고르]는 세계의 비합리와 부조리의 반항적 향수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오직 그것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 다만 나는 지성이 명석함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중간적인 길을 고수하고자 할 따름이다. [...]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 [...] 나는 여기서 실존적인 태도를 감히 철학적 자살이라 부르고자 한다. [...] 이것은 한 사상이 스스로를 부정하고서 바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초월하고자 하는 행동을 지칭하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이다. 실존적인 사람들에게는 부정(否定)이 곧 신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 신은 인간 이성의 부정에 의해서만 존립한다.”(301-312)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비합리의 테마는 정신이 흐려진 이성, 그리하여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해방되는 이성 바로 그것이다. 부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다. [...] 자명한 것을 은폐한다거나 방정식의 한쪽 항을 부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는 부조리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319-321)
 
부조리한 자유. “앞에서는 인생이 과연 살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가 문제였었다.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그만큼 더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 대립의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透明)에의 요구다. [...]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자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다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325-328) “그러나 그와 같은 세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나의 관심의 전부다.”(333)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만을 통해서 나는 죽음에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337)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의 인간은 바로 신의 밖에서 살고 있다. [...] 그에게는 변명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무죄라는 원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 이 무죄는 무서운 것이다. ‘무슨짓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342)
 
돈 후안주의. 연극. “모든 것이 그[일상적 인간]를 재촉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보다 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실제의 자기보다 장차 자기가 변해서 될 어떤 존재에 대하여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이다. 연극에 대한 스펙타클에 대한 관심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 그[배우]는 인간이 그렇게 되고자 하는 존재와 실제의 존재 사이에 경계가 없다는 지극히 풍성한 진리를 매월 혹은 매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언제나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그는 어느 만큼이나 외양이 실재가 될 수 있는가를 증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흉내 내는 것, 자신의 것이 아닌 삶 속으로 가능한 한 깊숙이 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이 종국에 이르면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즉, 마음을 다하여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여러 존재가 되고자 전력투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 소멸하고 마는 세계를 흉내 내는 광대인 배우는 오직 외관 속에서만 자신을 단련하고 완성시킨다. 오로지 몸짓으로만, 그리고 육체로만 - 혹은 육체인 동시에 영혼인 목소리로만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연극의 관습이다. 이 예술의 법칙에 따르자면 모든 것을 인간의 육신으로 만들어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육체가 곧 왕이다. 마음에서 바라기만 하는 것은 ‘연극적인 것’이 아니다. 잘못 평가절하되어 있는 이 ‘연극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미학 전체를, 하나의 윤리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절반은 마음에 품은 것을 표면화하지 않은 채 암시하고 얼굴을 돌리고 침묵하면서 보내기 마련이다. 배우는 이런 세계 속으로 불청객인 틈입자처럼 들어온다. 그는 저 사슬에 묶인 영혼을 마술에서 풀어준다. 마침내 온갖 정념들이 그들의 무대 위로 쏟아져 나온다. [...] 바로 여기서 배우는 자기모순을 드러내 보인다. 즉, 동일하면서도 지극히 다양하고, 단 하나의 육체에 의하여 그토록 많은 영혼들이 요약된다는 배우의 모순이 그것이다.”(355-358)
 
정복. “나는 나의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기에 이 시대와 일체가 될 것을 결심했다.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란 것이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승리로 끌날 대의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들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 이 세계는 온갖 소용돌이들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던가, 아니면 그 소용돌이들 외에는 그 어떤 진실도 없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나는 타협하여 시대 속에 살면서 영원을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를 가리켜 동의(同意)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혐오한다. 나는 전체 아니면 무(無)를 원한다. [...] 나는 오직 명확히 보고자 원할 따름이다. [...] 개인을 짓뭉개는 것은 세계요, 그를 해방시키는 것은 나다.”(366-367) “정복자들은 그 자체로 행동이 쓸모없다는 것을 안다. 유익한 행동이란 하나밖에 없다. 즉, 인간과 천지를 다시 만드는 행위가 그것이다. [...] 비록 비천한 것이라 해도 육체는 나의 유일한 확신이다. 나는 오직 육체로서 살 수 잇을 뿐이다. 피조물의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는 이 부조리하고 보람 없는 노력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는 투쟁의 편에 선 것이다. [...] 최초의 현대적 정복자인 프로메테우스의 혁명을 위시하여 혁명이란 무릇 신들에게 항거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운명에 맞선 인간의 권리 주장이다. [...] 그렇다. 인간이야말로,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 되고자 한다면 바로 삶 속에서이리라. 정복자들은 이따금 승리하는 것과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뜻하는 바는 항상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367-368) “사랑하는 사람, 배우 또는 모험가는 부조리를 연기한다. [...] 만약 슬기롭다는 말이, 갖지도 않은 것에 대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슬기로운 사람이라 하겠다. 가령 정복자(단, 정신의), 돈 후안(단, 의식의), 배우(단, 지성의)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372-373)
 
부조리한 창조


철학과 소설.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예술, 오로지 예술. 진리로 인하여 몰락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우상의 황혼)”(378)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 철학자는 창조자이다. [...] 소설가는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내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창조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철학적 소설가다.”(384-386)
 
키릴로프.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주인공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자문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근대적이다. [...] 그[키릴로프]는 바로 하나의 생각, 하나의 사상을 위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는 신이 필요하다는 것,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 자살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어찌하여 그대는 깨닫지 못하는가?” 그는 이렇게 외친다. [...] “나는 나의 불복종, 나의 새롭고 무시무시한 자유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살할 터이다.” 문제는 이미 복수가 아니라 반항이다. [...] 즉 그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려는 것이다. / 이 추론은 고전적 명석함을 보여준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키릴로프가 신이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키릴로프는 자살해야 한다. 따라서 키릴로프는 신이 되기 위해서 자살해야 한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성은 전적으로 지상적인 것이다. [...] 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오직 이 지상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 어떤 불멸의 존재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고통에 찬 독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귀결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 있거니와, 우리는 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니체에게나 키릴로프에게나, 신을 죽인다는 것은 자기가 신이 되는 것 - 이미 지상에서부터 복음서가 말하는 바 영원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이 형이상학적 범죄만으로 인간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면 무엇 때문에 거기에다가 자살을 부과한다는 말인가? 자유를 획득한 다음 무엇 때문에 자살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인가? 이것은 모순이다. 키릴로프는 이를 알고 있기에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느낀다면 그대는 황제다. 그리하여 자살하기는커녕 영광의 절정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시대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내부에 온갖 희망을 키우고 있다(“인간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현재까지 보편사의 요약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길을 인도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설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기에 키릴로프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형제들에게 자기가 앞장서서 가야 할 험난한 왕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하나의 교훈적 자살이다. 따라서 키릴로프는 자신을 희생시킨다. [...] 키릴로프의 피스톨 일발은 궁극적 혁명의 신호가 될 것이다. [...]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잘 되었고, 모든 것이 다 허용되어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런 것이 바로 부조리의 판단이다.”(390-395)
 
내일 없는 창조. “‘부질없이’ 작업하고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신이 만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부서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조리의 사고가 가능케 해주는 예지(叡智)이다. [...] 그것[창조]은 또한 인간이 지닌 유일한 존엄성의 기막힌 증언이기도 하다.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집요한 반항, 불모의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 노력을 계속하는 불굴의 인내가 그것이다. 창조는 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다. 그런 모든 것이 ‘쓸 데 없는 것을 위해서’이고 끝없이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를 얽매어놓고 있었던 것은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이었다. 인간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되어 다시 도약하는 데 있다. 그것은 - 아마도 신화 속에서 - 인간 고통의 깊이 이외에는 다른 깊이가 없는 신화, 따라서 인간의 고통처럼 다할 길 없는 신화 속에서 전개된다. 그냥 재미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눈멀게 하는 신들의 우화가 아니라, 어려운 예지와 내일 없는 정열이 요약되어 있는 지상적 얼굴, 몸짓, 연극 속에서 말이다.”(401-405)
 
시지프 신화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쓸모없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 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있는 드문 순간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의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거역할 길 없는 진리들도 인식됨으로써 사멸한다. [...] 존재하는 세계는 오직 한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내가 판단하노니,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라는 [오이디푸스의] 그 한 마디는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代價)이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어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이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 시지프 역시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 사전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409-414)
 
1943년. 『오해』 초고 탈고.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제1신 발표.


“우리에게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이미 충분할 만큼 가혹한 이 세상의 비참함에 또 다른 비참함을 더해도 되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그 잃었다가 되찾은 시간, 감수했다가 극복해낸 패배, 피의 대가를 치르고 간직한 양심 덕분에 이제 우리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깨끗한 손으로 - 이건 확신에 찬 피해자의 깨끗함입니다 - 전쟁에 휘말렸으며, 역시 깨끗한 손으로 - 그어나 이번에는 불의와 우리 자신에 맞서서 거두어들인 위대한 승리의 께끗함입니다 - 전쟁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고 믿을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는 권능과 지배력을 상실했고 이 상태는 오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순수한 이유들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119-121)
 
1944년. 사르트르와 만남. 「오해」 상연.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제2신, 제3신 발표. 8월 24일. “파리의 모든 총알들이 8월 밤하늘을 수놓는다”(공개적으로 배포된 「전투」 창간호) 파스칼 피아와 함께 『전투』 지 편집, 운영.
 
1945년 5월 8일. 휴전. 파리 세기에 가(街)에 정착. 5월 16일. 알제리(1826-1962년의 135년 간 프랑스의 식민지)의 민중은 자치권 약속을 믿고 프랑스와 함께 나치에 대항하나 프랑스인들은 종전 후 이를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을 학살로 탄압. 1-4만이 살해당한 세티프 학살. 카뮈는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여행한다. http://interojh.blog.me/150126402904 “가난해진 민족을 위한 위대한 정치란 모범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길밖에는 없다. 이 점에 대해 꼭 한 마디 해두어야 할 것은 프랑스가 실제로 아랍 지역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아랍 지역에 있어서 새로운 사상이다. 백만의 군대 그리고 수많은 유전 못지않게 민주주의는 값질 것이다.”(1945년 12월 20일자 인터뷰). 8월 6일,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투하.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단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전투」 8월 8일자) 9월 5일. 쌍둥이 자녀 장과 카트린 출생. 「칼리굴라」상연, 대성공. 「반항인」의 출발점이 되는 「반항론」발표.


1946년. 연초에 미국 방문. 대학생들의 열렬한 환영. 하버드에서는 연극에 관해서, 뉴욕에서는 문명의 위기에 관해서 강연. 『페스트』, 탈고. 1944~1945년에 이르는 모리악과의 논쟁 때문에 카뮈는 폭력 문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사색, 정리.
 
1947년. 마다가스카르 반란. 카뮈는 집단 탄압을 맹렬히 규탄한다. “문제가 사실로 나타났다. 사실은 명백하고 추하다. 우리가 독일 사람들이 저질렀다고 비난했던 짓을 이번에는 우리가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전투」) 공산당, 연합정부에서 이탈. 프랑스 국민연합 출범. 6월. 『페스트』, 출간. 즉각적인 대선풍. 수많은 비평가들이 카뮈를 덕망있는 ‘무신론적 성자’로 찬양.
 
1948년 2월. 알제리 여행. 6월.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공산당 정보국에서 추방. 장 루이 바로와 함께 쓴 「계엄령」 상연, 실패.
 
“그리스 사상은 항상 한계의 관념을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신성(神性)과 인간의 이성 그 어느 쪽도 극단에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성과 인간의 이성 그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에 의하여 어둠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모든 요소를 골고루 다 존중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유럽은 전체성(totalité)을 정복해보겠다고 덤벼든 무분별의 딸이다. ㄷ유럽은 제가 찬양하지 않는 것이면 모두 다 부정하듯이 아름다움을 부정한다. 비록 각양각색의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유럽은 오직 한 가지만을 찬양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 지배하는 미래의 제국이다. [...] 헤겔은 감히 ‘오직 현대 도시만이 인간 정신에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다’고 썼다. 이리하여 우리는 대도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고의에 의하여 이 세계로부터 자연, 바다, 산, 저녁의 명상 같은 그 항구적인 요소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유럽의 위대한 문학작품 속에는 풍경을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길이 없다. 역사는 역사보다 먼저 존재하는 자연세계도, 역사를 초월하는 곳에 있는 아름다움도 설명하지 못한다. [...] 역사 정신이나 예술가는 양쪽 다 세계를 다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그 본성의 명령에 의하여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역사 정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자의 목표는 전제(專制)인 반면, 전자의 열망은 자유인 것이다. 오늘날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 우리들에게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자존심이란 바로 제 한계에 대한 충실함이요, 제가 타고난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랑이다. [...] 스스로를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을 테두리 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여름』 중 「헬레네의 추방」, VI, 55-61)
 
1949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그리스 공산당원들을 위한 구명 호소. 1950년 12월에 또 다른 사형수들을 위한 구명 호소. 6~8월. 남미 여행.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이미 허약해진 카뮈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앞으로 2년 동안 『반항인』 집필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하는 수 없이 한가해진 이 기간을 이용, 자기의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해 반성한다. 12월. 『정의의 사람들』 첫 상연, 성공.
 
1950년. 『시사평론』 제1권 간행. 파리의 아파트에 입주. 1951년 10월. 『반항인』, 출간. 곧 이어 벌어진 논쟁이 1년이상 계속됨.
 
머리말. “범죄에는 격정에 의한 충동적 범죄와 논리에 의한 이성적 범죄가 있다. [...] 어제까지만 해도 심판을 받던 범죄가 오늘은 법이 되어 지배한다. [...] 이 시론(試論)의 의도는 다시 한 번 논리에 의한 범죄라고 하는 시대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갖가지 정당화의 양상을 면밀히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50년 동안에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제 땅에서 몰아내어 노예로 만들거나 살해해 보리는 한 시대는 오직 그리고 우선적으로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리라. [...] 자유의 기치 아래 조성된 노예 수용소, 인간에 대한 사랑 혹은 초인의 지향을 내세워 정당화하는 대량 학살은 어떤 의미에서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족하다. 우리 시대 특유의 기이한 전도(顚倒) 현상으로 인하여 범죄가 무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날에는 무죄한 쪽이 도리어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라는 다그침을 받는다. [...] 문제는 과연 죄 없는 자가 행동에 돌입하는 경우 그 순간부터 그는 살인하지 않을 수 없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 우리 눈앞에 있는 저 타인을 살해할 권리, 혹은 이 타인이 살해됨에 동의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일체의 행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살인으로 귀결되므로 우리는 과연 살인을 허용해야 하는지, 또 허용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행동할 수 없다. [...] 부정(否定)의 시대에는 자살의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일이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시대에는 살인의 문제에 대해 해결을 봐야 한다. 만약 살인이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은 모두 그 살인의 귀결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만약 살인이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모두 광기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어떤 결론을 찾아내던가 아니면 외면하든가 양자택일 이외의 길은 없다. [...] 30년 전에 사람들은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철저히 부정했다. 자살로서 자신을 부정할 정도였다. 신도 속임수를 쓰고, 신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속임수를 쓰고, 나 자신마저도 속임수를 쓰니, 따라서 나는 죽는다. 즉 자살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타인들만을 부정한다. 오직 타인들만이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 이 시론에서 우리는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을 중심으로 시작된 하나의 성철을 살인과 반항의 문제 앞에서 계속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 부조리의 추론의 마지막 결론은 자살을 거부하는 동시에, 인간이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세계의 침묵 사이의 절망에 찬 대결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자살에 조리성(條理性)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살인에도 조리성을 부여할 수 없다. [...] 살인과 자살은 똑같은 것으로, 그 둘은 함께 인정하거나 함께 거부하거나 양자택일을 행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 그리하여 자살의 정당화를 허용하는 절대적 허무주의가 더 쉽게 논리적 살인으로 치닫는다. 우리 시대는 살인에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다고 인정해버리는데, 그것은 허무주의의 특징인 삶에 대한 이 무관심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약 자살에 그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살인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사람이 반쯤만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절대적 부정의 불가능성을 인정한 순간부터,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으뜸가는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생명이다. [...] 부조리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내게 주어진 최초이자 유일하게 자명한 사실은 다름 아닌 반항이다. [...] 반항의 맹목적 충동 가운데서 질서를 요구하고,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가운데서 통일(unité)을 요구한다. 추문은 끝나야 한다고. [...] 반항이 고심하는 바는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변형시킨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인데, 행동한다는 것은 장차 살인으로 변할 것이다. [...] 형싱학적이며 역사적인 지난 두 세기의 반항이 우리의 성찰 대상이다. [...] 여기서 논급되고 있는 놀라운 역사는 유럽의 오만의 역사이다.”(394-404)
 
제1장 반항하는 인간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니오non라고 말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즉 그는 또한 반항의 첫충동에서부터 예oui라고 말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 요컨대 이 아니오는 어떤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 이처럼 반항의 충동은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근거해 있음과 동시에, 어떤 당연한 귄리에 대한 막연한 확신,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할 권리가 있다’는, 반항하는 인간의 느낌에 근거해 있다. 반항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 옳다는 감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반항하는 노예는 아니오와 동시에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 이전에는 타협 속에 안주하던 노예가 단번에(“일이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전체’ 아니면 ‘무(無)’라는 극한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의식이 반항과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 반항하는 인간은 전체가 되고자 한다. [...]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 [...] 그러나 한층 더 분명한 것은 아마도 이제는 개인적인 것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의 선(善)이 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 반항을 분석하다 보면,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동시대 사상의 가정과는 반대로, 적어도 인간에게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심증에 이르게 된다. 인간 내부에 간직해야 할 항구적인 것이 전혀 없다면, 무엇 때문에 반항을 한단 말인가? 노예가 명령을 거역하고 분연히 일어서는 것은 동시에 모든 인간 존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명령으로 인하여 부정된다고 판단하는 자기 내부의 그 무엇은 그 혼자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심지어는 그를 모욕하고 억압하는 자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이 준비된 공동체를 갖는 일반적 논거와도 같은 것이다(피해자들의 공동체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데 결합시키는 공동체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 우선 반항은 이기적인 운동이 아니다. [...] 다음으로 반항은 타인이 억압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생겨날 수 있다. [...] 자기의 조건에 대한 인간 개인의 반항,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된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어서는 개인의 충동.”(407-415)
 
“그러나 결국 이러한 반항과 그것에 수반되는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사실 시대와 문명에 따라 반항하는 이유는 변하는 것 같다. 힌두교의 최하층 천민, 잉카 제국의 전사, 중앙아프리카의 원시인, 또는 초기 기독교 교단의 구성원이 모두 반항에 대하여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심지어 이들과 같은 경우에 반항의 개념이란 아예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생각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희랍의 노예, 농노, 르네상스 시대의 용병대장, 섭정 시대의 파리 부르주아, 1900년대의 러시아 지식인,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노동자 등은 비록 각기 반항의 이유는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반항의 정당성에 대해서만큼은 틀림없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항이라는 문제는 오직 서구 사상 안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셸러의 말대로, 불평등이 대단히 큰 사회(가령 카스트 제도 하에서의 인도)나 혹은 그 반대로 평등이 절대적인 사회(가령 몇몇 원시 사회)에서는 반항적 정신이 표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반항 정신은 이론적 평등이 사실상의 심대한 불평등을 은폐하고 있는 집단에서만 가능하다. 반항의 문제는 그러므로 우리 서구 사회의 내부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반항이란 자기 권리에 대한 의식을 가진 가장 명석한 인간의 행위이다. [...] 반항적 인간은 신성한 것 이전 혹은 이후에 위치하는 인간이며, 인간적인 질서를 요구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다. 그 질서 속에서 모든 해답들은 인간적인 것, 즉 합리적인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모든 물음과 모든 말은 반항이다. [...] 이렇게 하여 인간 정신의 견지에서 보면, 가능한 세계는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신성한 것의 세계(그리스도교적 표현을 빌면 은총의 세계)와 반항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쪽 세계의 사라짐은 다른 한쪽 세계의 나타남과 일치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전체냐 무(無)냐의 문제와 마주친다. 반항이라는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사회 전체가 신성한 것에 거리를 두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 반항은 우리 시대의 역사적 현실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한 우리는 반항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신성한 것과 전래적 가치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인간이 과연 행동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반항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 부조리의 경험에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적 운동을 기점으로 그 고통은 집단적임을 의식하게 되고, 그 고통은 인간 모두가 겪는 모험이 된다. 낯설음의 느낌에 사로잡힌 인간이 최초로 내딛는 진일보는 그러므로 자신이 이 낯설음을 다른 모든 사람과 나누어 느낀다는 사실, 인간의 현실은 전체가 다 자아로부터의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이 거리감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있다. 오직 한 사람이 앓던 병이 집단적 페스트로 변한 것이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 차원의 코기토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반항은 원초적 자명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407-420)
 
제2장 형이상학적 반항
 
“형이상학적 반항이란 인간이 인간 조건과 창조 전체에 대하여 항거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인간과 창조의 목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까닭에 형이상학적이다. [...] [긍정과 부정이라는] 그 두 경우 모두에 있어 우리는 하나의 가치 판단을 발견한다. [...] 반항적 운동은 그[반항하는 인간]에게 있어 명백함과 통일성에의 요구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장 초보적인 반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떤 질서에의 열망을 표현하는 법이다. [...] 형이상학적 반항의 역사는 그러므로 무신론의 역사와 혼동될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심지어 종교적 감정의 현대사라고 볼 수 있다. 반항하는 인간은 부정하기보다는 도전한다. 적어도 원초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은 신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등한 자격으로 신에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정중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는 논쟁인 것이다. 노예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왕의 권리를 원하기에 이른다. 이번에는 그가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봉기는 하늘과 대결하는 엄청난 원정으로 번하여, 거기서 왕을 사로잡아 온 뒤, 처음에는 왕의 실권을, 다음에는 왕의 사형을 선언한다. 인간의 반역은 형이상학적 혁명으로 끝난다. 그 반역은 겉보기에서 혁명으로 나아가고, 댄디에서 혁명가로 나아간다. 신의 옥좌가 전복되면 반역자는 자신의 인간 조건 속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었던 그 정의, 그 질서, 그 통일을 이제는 자기 손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중 몇 가지밖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결과들은 결코 반항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결과는 오직 반항하는 인간이 반항의 근원을 잊고, 아니오와 예 사이의 벅찬 긴장을 견디지 못해 지쳐버린 나머지 마침내 포기하고서 모든 것을 다 부정하거나 전적으로 복종해버리는 데에 기인한다.”(423-426)
 
카인의 후예. “반항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반대하는 것으로써만 상상되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인, 따라서 만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인격신의 개념만이 인간의 항의에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반항의 역사는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하등의 역설이 아니다.”(431)
 
절대적 부정. “역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논리정연한 공격은 사드의 공격이다.”(442)
 
 
문학인. “그들[혁명가들]의 공화국이 신의 권능을 지닌 왕의 시해에 근거하여 성립되었으며, 1793년 1월 21일 신[루이 16세]을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그들이 범죄의 추방과 사악한 본능의 단속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군주제는 군주제 자체와 더불어 법적 근거가 되는 신의 관념을 지탱하고 있었다. 반면에 공화국은 저 스스로를 지탱하며 성립되는 것이어서 거기서 도덕관념은 신의 계명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 단 한번만이라도 일단 살인을 인정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살인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범죄와 욕망이 세계 전체의 법률이 되지 못한다면, 아니 적어도 한정된 영역이나마 지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통일의 원리가 아니라 분쟁의 씨앗이다. 그것은 이미 법률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은 분열과 우연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법률에 정확히 들어맞는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창조해야 한다. 신의 창조에서는 충족되지 못한 통일에의 욕구가 이 소우주에서는 기필코 충족된다. [...] 사드의 경우, 그 권력의 법률은 밀폐된 장소들, 일곱 겹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들을 창조해낸다.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곳에서는 욕망과 범죄의 사회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무자비한 규칙에 따라 영위된다. 무제한으로 고삐가 풀린 반항, 자유에 대한 전적인 요구는 다수의 노예화로 귀결된다.”(447-451)
 
 
댄디들의 반항. “댄디는 미학적 수단에 의하여 자기 고유의 통일을 창조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특이성과 부정이 미학이다. ‘거울 앞에서 살다가 거울 앞에서 죽는다.’ [...] 댄디는 타인과 마주봄으로써만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 타자들은 거울이다. [...] 댄디는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연기한다. 혼자 있거나 거울이 없는 순간을 제외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연기한다. 댄디에게 그가 홀로 있다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낭만주의는 실제로 반항이 댄디즘과 관련된 일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댄디즘의 일면은 바로 겉치레 paraître 라는 측면이다. [...] 낭만주의를 시발로 하여 예술가의 광업은 이제 다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미 자체만을 위한 미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를 분명히 규정하는 데에 있게 된다. 예술가는 이리하여 모범이 되고 본보기로서 제시된다. 예술이 곧 예술의 도덕인 것이다. [...] 하지만 반항은 이제 점차 겉치레의 세계를 떠나 실제 행동의 세계로 접어든다. 반항은 이제 전적인 행동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1830년의 프랑스 학생들과 [1825년] 러시아 12월 혁명의 혁명가들은 그리하여 이 새로운 반항의 가장 순수한 모범으로 등장할 것이다.”(464-468)
 
 
구원의 거부. “이반 카라마조프는 도덕적 가치의 이름으로 신을 공박한다. [...] 이반은 이제 더 이상 그 신비로운 신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정의라는 보다 높은 하나의 원리에 의지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여 은총의 왕국을 정의의 왕국으로 대체하려는 반항의 본질적 기도(企圖)가 시작된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진리를 얻는 데 필요한 고통의 몫을 다 채우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의 고통까지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 못 박아 말하려니와 이 진리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없다.’ [...] 진리에 대한 정의의 투쟁이 바로 여기에서 처음 시작된다. 이 투쟁은 이제 끝이 없을 것이다. 고독한, 그러므로 모럴리스트인 인 이반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돈키호테가 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면 어떤 엄청난 음모가 이번에는 정의를 진리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때가 올 것이다. [...] 영생이 없다면, 상도 벌도, 선도 악도 없다. ‘나는 영생이 없다면 덕이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다만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 죄인이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서로 맞물린 채 덧없이 흘러가고 서로가 균등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덕이 없다면 법도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 이 ‘무엇이나 다 허용된다’는 것에서부터 우리 시대 허무주의의 역사가 시작된다. [...] 이반은 논리적 일관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하게 된다. [...] 이반은 살인자로서의 신에 대항하여 반항하지만 그러나 그가 반항의 논리를 따져보는 바로 그 순간 거기서 살인의 법칙을 이끌어낸다. 무엇이나 다 허용된다면 그는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고, 적어도 아버지가 살해되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라는 우리의 인간 조건에 대한 기나긴 반성이 다만 범죄의 정당화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 형이상학적 반항의 극단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 혁명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그 정당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 받았으니 타도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도 영생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간이 신이 되도록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의 법 이외의 모든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구한 타협적 추론을 늘어놓을 것도 없이 신이 된다는 것은 곧 범죄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신적 해방에의 기도(企圖)를 넘어서는 정치적 해방의 기도가 허무주의에 기원한다는] 그러한 사실을 예견했기 때문에 이렇게 예고했다. ‘만약 알료샤가 신도 영생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근는 곧장 무신론자가 되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란 단지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신론의 문제, 무신론의 현대적 구현의 문제, 그리고 지상으로부터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지상에 끌어내리기 위해 신 없이 건설되는 바벨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470-478)


절대적 긍정.


“인간이 신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도덕의 근거는 무엇인가? 정의의 이름으로 신을 부정하지만 신의 관념 없이 정의의 관념이 이해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니체가 정면으로 접근하는 부조리다. 도덕이란 파괴해야 할 신의 마지막 얼굴인즉 이것을 파괴한 다음에 다시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다.”(479)
 
 
유일자.
 
 
니체와 허무주의. “니체에게 전통 도덕이란 부도덕의 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선(善)이다.’ ‘다름 아닌 도덕적 이유 때문에 앞으로 언젠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487)
 
반항적 시 - 로트레아몽과 범속. 초현실주의와 혁명.
 
허무주의와 역사
 
“사드와 낭만주의자들, 카라마조프나 니체는 오로지 참된 참만을 원했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 들어갔다. [...] 그들이 이르게 된 결론이 불길하거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 것은 오로지 그들이 반항의 짐을 벗어던진 채 반항이 전제로 하는 긴장을 회피하면서 폭압과 굴종이라는 안이함을 택하면서부터였다. [...] 반항하는 인간은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타당한 이유를 요구한다. 그는 죽음에서 귀결되는 결과를 거부하는 것이다. [...] 죽음에 반대하여 투쟁한다는 것은 결국 삶의 의미를 요구하는 것이고 법칙과 통일성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 악과 고통에 대한 반항은 결국 통일성에 대한 요구 바로 그것이다. [...] 창조자에 대한 증오는 창조된 세계에 대한 증오로 변할 수도 있고,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배타적이고도 도발적인 사랑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반항은 살인에 이르게 되어 반항이라 불릴 권리를 잃고 만다. [...] 이처럼 오늘날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반항이나 반항의 고귀성이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우리는 반항의 기원에 있는 진리를 명심하면서 그 반항의 결과들을 추적해보아야 한다. [...] 사드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진보란 신 없는 시대의 인간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광포하게 지배하는 밀폐된 공간의 넓이를 차츰 확장해온 데 있다. 인간은 반항의 끝에 이르러 스스로를 감금해버렸다. [...] 신의 은총의 왕국과 맞서는 유일한 왕국, 즉 정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며, 마침내 신의 공동체가 무너진 잔해 위에 인간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신을 죽이고 하나의 다른 교회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순적이면서도 줄기찬 반항의 운동이다. / 이제 세계 제국과 보편 제국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그 노력에 대하여 논해볼 때가 되었다. 이제부터 반항은 도덕적 허무주의와 더불어 힘에의 의지만을 취할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획득하여 신과 맞서서 그것을 지탱하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반항의 기원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고, 정신적 제국주의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증식되는 살인을 통해 세계 제국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신을 그의 하늘로부터 추방해버렸다. 그러나 그때 형이상학적 반항이 노골적으로 혁명 운동으로 뛰어들면서 자유에 대한 비이성적 요구는 역설적이게도 이성을 무기로 취하게 된다. 반항하는 인간에게 이성이야말로 순수하게 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유일한 정복의 힘이라는 것이다. 신이 죽자 인간들만이 남았다. 다시 말해서 이해하고 건설해야 할 역사만이 남은 것이다. 반항 속에서 창조의 힘을 침몰시키는 허무주의는 인간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인간은 이제부터 자신만이 홀로 사는 고독한 땅임을 아는 터인 대지 위에서 비합리의 범죄에 더하여 인간들의 제국을 향해 행진 중인 이성의 범죄를 추가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에 이어, 온갖 기막힌 계획들, 나아가서는 반항의 사멸까지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다.’”(533-538)
 
제3장 역사적 반항
 
“정의가 자유의 중지를 요구하는 시대가 온다. [...] 반항이 단지 개인적 경험에서 사상을 향해 가는 운동인 반면, 혁명은 사살을 역사적 경험 속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반항운동의 역사는 비록 그것이 집단적일 때조차 언제나 사실 속에서의 해결책 없는 참여의 역사요, 체계도 논리도 ㅇ끌어들이지 않는 막연한 항의의 역사인데 반해, 혁명은 행동을 사상에 맞추어나가려는 기도이며 세계를 어떤 이론의 틀 속에 다듬어 넣으려는 기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항이 인간을 죽이게 되는데 반해, 혁명은 인간과 동시에 원리를 파괴하게 된다. [...]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태동한 사회는 유럽을 손에 넣기 위해 싸우고자 했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태동한 사회는 세계의 지배를 위하여 싸운다. [...] 20세기의 혁명 운동은 그 논리의 가장 명료한 귀결에 이르고자 손에 무기를 들고 역사적 전체성을 요구한다. [...] 즉 이성과 힘에의 의지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혁명, 특히 유물론적이고자 하는 혁명은 다만 과격한 형이상학적 십자군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성이 곧 통일성일까? [...] 1793년에 반항의 시대는 끝나고 단두대 위에서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545-549)
 
왕의 시역자들. “1793년 1월 21일 이전에, 그들은 왕의 자리가 영원히 빈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 신을 부정한다면 필경 왕을 죽여야 한다. [...] ‘아마도 피고를 죽게 하는 명분이 될 원리를 결정하는 일, 그것은 바로 피고를 심판하는 사회가 영위되어 갈 토대의 원리를 결정하는 일이다’라고 그[생 쥐스트]가 외쳤을 때, 이 말은 왕을 죽이려는 자는 다름 아닌 철학자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왕은 사회계약론의 이름 아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550-553) 새로운 복음.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일반의지는 무엇보다도 보편적 이성의 표본이고, 보편적 이성은 정언적(定言的)이다. 새로운 신이 나타난 것이다.”
 
 
왕의 처형. “일반의지의 불가침성과 초월성. 은총과 정의 사이의 투쟁. [...] 군주제란 그 자체로 절대 범죄이다. [...] 이를 만인이 용서한다 해도 일반의지는 용서할 수 없다. [...] 루이 16세는 자기 신상에 가해지는 위해가 겁에 질린 육신이 아니라 신의 소명과 신인 그리스도-왕을 겨냥한 것임을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신의 소명과 하나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보인다.”(558-562)
 
 
덕의 종교. “1789년 혁명은 아직 인간의 신성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인민의 의지가 자연과 이성의 의지와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는 인민peuple의 신성을 확보했다. [...] 인민의 소리는 자연의 소리이다. vox populi, vox naturae. [...] 보통 선거는 반드시 보편적 도덕을 가져온다. ‘우리의 목적은 선을 향한 보편적 경향이 반드시 확립될 수 있도록 사물의 질서를 창조하는 데 있다.’ / 이성의 종교는 극히 자연스럽게 법률의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일반의지는 그 대표자들이 편찬한 법률에 의해 표현된다. ‘인민은 혁명을 만들고, 입법자는 공화국을 만든다.’ [...]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 순수의 원리 위에 역사를 건설한다고 자처함으로써 현대와 동시에 형식적 도덕 시대의 문을 열었다.”(563-567)
 
 
테러(공포정치). “마라는 이렇게 외친다. ‘사람들은 내가 박애주의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한다. 아!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내가 다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소수의 목을 벤다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 이성은 정복자가 되려는 것이다. [...] 바야흐로 역사의 지배가 시작된다. 인간은 인간 자신만의 역사와 하나가 됨으로써 진정한 반항에 충실하지 못한 채 이제부터 20세기 허무주의적 혁명에 몸을 바치게 된다.”(570-579)
 
신의 시역자들. “독일 이데올로기는 그것들[진리, 이성, 정의]을 영원한 가속 운동 속에 던져 넣음으로써 그것들의 존재를 그것들의 운동과 뒤섞어버렸고 또 그 존재의 완성 역시 역사적 생성 변화의 끝(과연 그런 끝이 있기나 한가?)에서 이루어진다고 못 박아 놓았다. [...] 헤겔에게서 영감을 얻은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운동들은 모두가 공공연하게 덕을 폐기해버렸다는 점에 있어서 한결같이 일치한다.”(580-594)
 
개인적 테러리즘
 
 
미덕의 포기. “1830-1840년대 러시아의 비엘린스키. 세계와 세계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순간 그에게 위대한 결심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과 모순을 참아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들의 고통까지도 긍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갑자기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반대 방향에서부터 재출발한다.”(606-607)
 
 
악령에 홀린 세 사람. “피사레프, 바쿠닌, 네차예프. 네차예프는 1866년 경 혁명적 인텔리겐차 사이에 나타났다가 1882년 1월에 세상모르게 죽는다. [...] 그는 자신을 자발적인 혁명의 잔인한 수도승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혁명가는 사전에 이미 형(刑)이 언도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열적인 사랑의 관계도 갖지 말아야 하고ㅛ 좋아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벗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정열, 즉 혁명에 집중되어야 한다.’ [...] 그와 더불어 혁명은 처음으로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확실하게 갈라져 나간다. [...] 혁명만이 유리한 가치가 되어버리면 혁명은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밀고까지도, 친구의 희생까지도 요구하게 된다. [...] 네차예프의 독창성은 형제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데 있다. [...] 네차예프는 혁명의 군사화로 그치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서라면 폭력과 거짓말을 동원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그는 인정하는 것이다. [...] 그때까지 그 어떤 혁명도 인간이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행동 강령의 첫머리에 올려놓은 적이 없었다. [...] 피압박자들로 말하자면, 이번에는 그들을 결정적으로 구원하자는 것이므로 아직은 그들을 좀 더 억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네차예프는 행정부들이 탄압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밀어붙일 것, 인민에게 가장 미움을 사고 있는 대표자들에게 절대로 손대지 말 것, 끝으로 비밀 조직은 대중의 고통과 불행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총력을 기울일 것 등을 원리로 내세운다.”(618-624)
 
 
양심적 살인자들. “1878년은 러시아에서 테러리즘이 탄생한 날이다. 193명의 포퓰리스트들이 재판을 받은 그 이튿날인 1월 24일, 너무나 젊은 처녀 베라 자술리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트레포프 장군을 사살한다. 유럽에서는 1892년 한 해 동안에만도 1,000여 건의 다이너마이트에 의한 테러가 있었고 아메리카에서는 약 500건의 테러가 일어났다. 1905년 사조노프에 의한 플레베의 암살과 칼리아예프에 의한 세르게이 대공의 암살은 30년에 걸친 그 피로 물든 포교의 정점을 이루는 동시에 혁명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위한 순교의 시대를 마감한다. [...] 그러나 이 시기 사형수들의 최후 진술을 읽고 있노라면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그들 눈앞에 있는 재판관들을 마다하고 다른 사람들의 심판, 곧 미래에 나타날 사람들의 심판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고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때 미래에 올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의 마지막 상소 수단이 된 것이다. 미래야말로 신 없는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초월인 것이다. [...] 그들은 역사상 최후의 반항이란 가치 창조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 칼리아예프와 그의 동지들은 허무주의를 극복했던 것이다.”(625-637)
 
 
시갈레프 사상.
 
국가테러리즘과 비합리적 테러
 
 
국가테러리즘과 합리적 테러
 
- 부르주아적 예언. 혁명적 예언. 예언의 실패. 목적의 왕국. 전체성과 심판.
 
 
반항과 혁명. “20세기 혁명은 그 원리들 자체에 남아있던 신의 잔영마저 죽여서 역사적 허무주의를 신성화한다. [...] 역사를, 오직 역사만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반항 자체의 가르침을 거슬러 허무주의를 택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외치면서 비합리의 이름으로 역사에 뛰어드는 자들은 예속과 공포 정치를 만나게 되고 강제 수용소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역사의 절대적 합리성을 설교하면서 역사에 몸을 던진 자들 또한 예속과 공포 정치를 만나면서 강제 수용소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 혁명은 허무주의에 복종함으로써 사실 그 반항적 기원으로부터 등을 돌린 셈이다. [...] 일체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현대의 혁명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 혁명가는 동시에 반항하는 인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에 등을 돌리는 경찰이나 관리가 된다. 그러나 그가 반항하는 인간이라면 그는 결국 혁명에 맞서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이 태도에서 저 태도로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태도가 동시에 병존하면서 서로 간에 모순이 점점 더 커갈 뿐이다. [...] 반항은 인간 내부에 있는, 사물로 취급되고 단순한 역사로 환원되는 것의 거부 바로 그것이다. 반항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본성의 긍정이다. 그 본성은 권력의 세계를 벗어난다. 역사란 물론 한계 중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가는 옳다. 그러나 인간은 반항 속에서 그 자신 역사에 하나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 한계에서 하나의 가치에 대한 약속이 태어난다. [...] 반항의 요구는 통일성이며, 역사적 혁명의 요구는 전체성이다. [...] 혁명이 창조적인 것이 되려면 역사의 광란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도덕적 혹은 형이상학적 규범을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부르주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도덕에 대하여 혁명은 오직 경멸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일체의 도덕적 요구에로까지 이 경멸을 확산시켰다는 데서 혁명의 광적인 면이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혁명의 기원 그 자체에, 혁명의 충동 저 깊숙한 곳에 어떤 규범이 잠재해 있는 것이니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닌, 혁명의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규범이다.”(734-742)
 
제4장 반항과 예술
 
 
소설과 반항.
 
 
반항과 스타일. “천재란 스스로의 절도(節度)를 창조해낸 반항이다.”(772)
 
 
창조와 혁명. “궁지에 몰린 사회 이후 우리가 제기하는 두 질문, 즉 ‘창조는 가능한가’라는 것과 ‘혁명은 가능한가’라는 것은 결국 한 문명의 재생에 관련된 하나의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 20세기의 혁명과 예술은 같은 허무주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같은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양자는 그들의 운동 자체 속에서 긍정하던 것을 부정하고, 둘 다 테러를 통하여 하나의 불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 만약 반항하는 인간이 허무의 광란과 전체성에의 동의를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면 예술가는 형식주의적 광란과 전체주의적 현실 미학을 동시에 벗어나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과 사회, 창조와 혁명은 거부와 동의, 특수와 보편, 개인과 역사가 가장 팽팽한 긴장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반항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반항은 그 자체로서는 문명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반항은 일체의 문명에 선행한다. [...] 이제부터 필요한 문명은 개인에 있어서나 계급에 있어서나 노동자와 창조자를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 창조 역시 형식과 내용, 정신과 역사를 분리시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 창조는 전체성과 마주한 채 통일에의 긍정을 버리지 않는다. [...]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미의 규칙은 또한 반항의 규칙이기도 하다.”(773-779)
 
제5장 정오의 사상
 
반항과 살인. “어쨌든 삶의 그 원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지금 유럽과 혁명은 무섭게 경련하며 소진되어가고 있다. [...] 은총의 왕국을 정복하고 났더니 정의의 왕국마저 붕괴된다. [...] 논리적으로 볼 때 살인과 반항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단 한 사람이라도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느 의미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더 이상 공동체를 - 그의 정당성은 바로 그 공동체에서 온다 - 말할 자격이 없게 된다. [...]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 살인이 사물의 질서에 가하는 침해에는 내일이 없다. 살인은 엉뚱한 것이니 순전히 역사적 태도가 바라듯이 무엇에 이용될 수 있는 것도,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번밖에 도달할 수 없는 한계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죽어야 한다. 반항하는 인간이 살인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살인행위와 스스로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과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살인은 불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죽는다. [...] 이 극단의 경계를 넘어서면 모순과 허무주의가 시작된다.”(783-787)
 
 
허무주의적 살인. “과연 비합리적 범죄와 합리적 범죄는 둘 다 똑같이 반항 운동이 내세우는 가치를 배반한다. 우선 전자가 그렇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살인을 허용하는 자, 사드, 살인적 댄디, 무자비한 유일자, 카라마조프, 미쳐 날뛰는 악당에게 열광하는 자들, 군중에게 총을 난사하는 초현실주의자, 이들은 요컨대 전적인 자유를, 인간의 오만을 마음껏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 그러나 공동 운명에 대한 상호인정과 인간들 간의 교류라는 반항의 이유는 여전히 살아 있다. [...] 반항에 의해 발견된 공모와 교류는 오직 자유로운 대화 속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모든 애매함과 오해는 죽음을 유발한다. 분명한 언어와 단순한 낱말만이 그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다. [...] 반항하는 인간은 전반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한계야말로 바로 그 인간 존재의 반항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반항의 비타협성이 갖는 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항이 정당한 한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반항은 더욱 불굴의 것이 된다. 반항하는 인간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자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는 한, 그는 [자기] 존재와 타인의 자유를 파괴할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반항하는 인간은 그 누구도 욕되게 하지 않는다. [...] 인간 조건의 통일을 요구하는 반항은 삶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다. 반항의 심오한 논리는 파괴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논리이다. [...] 반항이 도달한 귀결은 살인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반항은 원래 그 원리에 있어 죽음에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 만약 그 자신이 결국 살인을 하게 된다면 그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기원에 충실한 반항하는 인간은 그의 진정한 자유가 살인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유라는 것을 희생 속에서 증명한다. 그는 동시에 형이상학적 명예를 발견한다.”(788-792)
 
 
역사적 살인. “역사란, 그것을 변형시키는 가치가 없을 경우, 효율성의 법칙에 지배된다. 역사적 유물론, 결정론, 폭력, 효율성을 지향하지 않는 일체의 자유를 부정하는 태도, 그리고 용기와 침묵의 세계 등은 모두 순수 역사철학의 가장 정당한 귀결들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오직 영원성의 철학만이 비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 철학은 절대적 역사성에 역사의 창조를 대립시키고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그 기원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불의를 인정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신에게 맡겨버린다. [...] 역사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 신과 일체의 초월성을 제거해버린 역사 사이에 가능한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이 양자에 대한 지상의 대표자들은 실제로 요기와 경찰이다. [...] 만일 반항이 어떤 철학을 정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떤 한계의 철학, 정확하게 계산해 본 다음 어느 정도의 무지를 인정하는 철학, 위험을 부담하는 철학일 것이다. [...] 반항은 어떤 한계를 지지한다. 인간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는 그 한계 말이다. 반항의 세계는 상대성의 세계다. 반항은 헤겔과 마르크스처럼 전체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란 가능적인 것이고 또 어떤 한계에 이르면 그 가능적인 것이 자기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말할 따름이다. 신과 역사 사이에서, 요기와 경찰 사이에서 반항은 하나의 어려운 길을 연다. 모순이 살아갈 수 있고 초극될 수 있는 그런 길을 말이다. [...] 목적이 절대적일 때, 즉 역사적 시각에서 목적이 틀림 없는 것이라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희생시키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다.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은 인간 공통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라는 도박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 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가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역사적 사상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이 물음에 반항은 이렇게 대답한다. 수단이 정당화한다.”(793-801)
 
절도와 과도. “한계의 사상. [...] 과연 세상에는 사물과 인간의 절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셈이다. 심리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있어서도 반항은 스스로의 그 심오한 리듬을 찾기 위하여 가장 광란하는 듯 한 폭으로 흔들리는 불규칙한 진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불규칙한 상태가 도를 넘어버리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축 주위를 맴돌 뿐이다. [...] 절도의 여신 네메시스.”(804-807)
 
 
정오의 사상. “이 같은 태도가 우리 시대의 세계 속에서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지 알고 싶어질 때,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전통적으로 혁명적 생디칼리즘(조합주의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곧 상기하게 된다. 이 생디칼리즘은 효율적인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한 세기만에 일당 16시간으로부터 주당 40시간으로까지 노동조건을 놀랄 만큼 향상시켜놓은 것이 다름 아닌 생디칼리즘이다. [...] 제왕적 혁명은 독트린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을 강제로 독트린 속으로 집어넣는데 반하여, 생디칼리즘은 직업이라는 구체적 토대에서 출발했다. [...] 만일 반항이 혁명을 원한다면, 그것은 삶을 위하여 원하는 것이지 삶에 반하여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제왕적 혁명이 생디칼리즘이며 자유주의적인 정신을 누리고 승리를 거둔 바로 그날 혁명 사상은 평형추를 잃고 말았다. 타락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이 평형추, 삶에 절도를 부여하는 이 정신이야말로 태양사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장구한 전통을 형성케 하는 바로 그 정신이다. 그 안에서는 희랍인들 이래로 자연이 언제나 생성 변화와 균형 상태를 이루어왔다. 제1인터내셔널의 역사는 독일 사회주의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적 사상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로, 이는 곧 독일 이데올로기와 지중해적 정신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국가 대 자치군, 절대주의 사회 대 구체적 사회, 합리적 폭정 대 반성적 자유, 끝으로 대중의 식민화 대 이타적 개인주의 등은 고대 세계 이래 서양의 역사에 동력을 제공해온 절도와 과도 사이의 장구한 대립을 다시 한 번 나타내는 이율배반들이다. 금세기의 심오한 갈등은 아마도 독일의 역사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정책 사이의 - 이 둘은 어떤 의미에서 서로 공모 관계라고 할 수 있다 - 갈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일적 꿈과 지중해적 전통, 영원한 청춘의 치열함과 성숙한 사나이의 힘, 지식 및 서책들에 의해 한층 심화된 향수와 삶의 흐름 속에서 개발되고 굳세어진 용기, 요컨대 역사와 자연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점에 있어 어떤 상속자일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선은 역사적 신의 이름으로, 다음에는 신격화된 역사의 이름으로, 2,000년 동안 자연을 상대로 벌여온 헛된 투쟁이 완성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분명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흡수할 수 있는 것을 흡수함으로써만 가톨릭적 성격(보편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지중해적 유산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연을 희생시키고 역사를 강조하게 되었으며, 로마적 양식을 버리고 고딕 양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역사 자체 내부의 어떤 한계를 파괴함으로써 점점 더 세속적 권력과 역사적 역동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 기독교의 진정한 힘이 될 수 있었을 그 중재적 관념들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와서 이러한 경향들이 그것도 기독교 자체에 반하여 득세하게 되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과연 신이 이러한 역사적 세계에서 추방되어 버리자 독일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게 된다. 이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제 행동이 더 이상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순전히 정복, 다시 말해 폭정이 되어버렸다. / 그러나 역사적 절대주의는 그 자체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이 부르짖는 저 억누를 수 없는 요구와 끊임없이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과 강렬한 햇빛과 혈연관계처럼 맺어져 있는 지중해는 바로 그 인간본성의 요구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 유럽은 결코 정오와 심야의 투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유럽은 이 투쟁에서 도망가든가 혹은 낮을 밤의 암흑으로 지워버리든가 할 때는 어김없이 타락했다. 그 균형의 파괴는 오늘날 너무나도 기막힌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 이렇게 되자 이 공동(共同)의 비참 속에서 지난날의 그 해묵은 요구가 되살아난다. 자연이 다시금 역사의 면전에서 몸을 일으킨다. 물론 그 어떤 것을 경멸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떤 문명을 비하하고 다른 문명을 찬양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세계에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 빈사상태의 끔찍한 유럽 속에 내던져진 채, 아름다움도 우애도 빼앗긴 우리는, 가장 드높은 긍지를 가진 종족인 우리 지중해인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햇빛으로 살고 있다. 유럽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태양의 사상이, 두 얼굴을 지닌 문명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 절도는 반항의 반대가 아니다. 반항이 곧 절도이다. 절도를 주문하고 옹호하고 역사와 그 역사의 혼돈을 향해 한계를 재창조하는 것이 반항이다.”(809-815)

 
허무주의를 넘어서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재판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회가 절대를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 현대의 유물론 역시 모든 문제에 답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의 노예인 현대의 유물론은 역사적 살인의 영역을 증가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그 살인을 정당화되지 못한 채로 방치한다. 오직 미래에만 그 살인이 정당성을 얻을지 모르는데 그 미래는 또 신앙을 요구한다. 두 경우에 다 인간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기다리는 동안 죄 없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는다. [...] 극단적인 너그러움이야말로 반항의 너그러움이다. 그것은 지체 없이 사랑의 힘을 주고 당장의 불의를 거부한다. 그것의 명예로움은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리고 현재의 삶과 현재의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앞으로 올 미래의 인간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진정한 너그러움은 현재에게 모든 것을 주는 데 있는 것이다. / 이로써 반항은 그것이 바로 생의 운동이라는 것을, 살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반항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항은 그러므로 사랑이요 풍요다. [...] 유럽의 비밀은 유럽이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 한계를 견디지 못하는 초조, 자신들의 이중적 존재에 대한 거부, 인간됨의 절망 등은 마침내 그들을 비인간적인 과도함 속으로 몰아넣었다. 알맞은 크기의 삶을 거부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우수성을 위하여 내기를 걸어야 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신격화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즉 이 신들은 눈이 먼 것이다. [...]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하여 신이 되기를 거부할 것. / 사상의 정오에서 반항하는 인간은 이처럼 인간 공동의 투쟁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해 신성을 거부한다. [...] 이 기쁨과 더불어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이 시대의 영혼을, 그 어느 것 하나 배제하지 않는 유럽을 새로이 만들리라. [...] 모든 사람이 과연 1905년의 희생자들 곁에서 재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인이 서로를 교정해준다는 것을, 햇빛 속에서는 그 어떤 한계가 그들 모두를 멈추어 서게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조건에서만 재생할 수 있다.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여기서 낭만주의는 끝난다.”(816-822)
 





1952년. 알제리 여행. 8월 사르트르와 결별. 11월. 레카미에 극장 운영 신청. 프랑코 장군 하의 스페인이 국가로 인정받자 유네스코에서 탈퇴. 소설 『최초의 인간』 구상. 『적지와 왕국』을 구성할 중편들, 그리고 희곡 「동쥐앙」 및 「악령」의 각색을 구상.
 

1953년 6월 7일. 동베를린 폭동.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무관심하다면 도대체 우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신용조합에서의 연설」) 1954년. 7명의 튀니지 사형수 구명운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치적, 문학적 활동을 중단하고 일년 내내 아무 글도 쓰지 않는다. 1939-1953년까지 쓴 글들을 모은 『여름』 출간. 1955년 3월. 디노 부차티의 「흥미있는 경우」 각색. 5월. 그리스 여행을 하며, 「계엄령」을 야외 극장에서 다시 상연할 것을 구상하고 연극에 관해 강연. 6월. 기자 활동을 재개하여 「엑스프레스」지에 기고, 특히 알제리 문제를 취급. 1956년. 알제 방문. 1월 23일. 카뮈는 휴전을 호소하나, 그의 동향인들로부터 매우 모욕적인 대접을 받는다. 2월. 「엑스프레스」 기고 중단. 체포된 수많은 알제리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구명 운동에 참여. 9월 20일. 자신이 각색한 포크너의 「어떤 수녀를 위한 진혼곡」 상연, 성공. 헝가리 부다페스트 봉기 탄압 반대 회합에 참여. 이집트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따른 불ㆍ영의 군사작전, 패퇴. 결과적으로 미소 양극체제가 중동에 확립. 『전락』 간행. 『여름』의 후속으로 『축제』 집필 구상. 1957년 3월. 『적지와 왕국』 출간. 6월. 앙제 연극 축제, 로페 데 베가의 「올메도의 기사」 각색. 「칼리귤라」 재상연. 쾨슬러, 블로크 미셀과 공동으로 저술한 『사형에 관한 성찰』에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게재. 10월 17일. 노벨 문학상 수상. 프랑스인으로 아홉 번째이며 최연소. 1958년 2월. 『스웨덴 연설』 출간. 6월. 알제리 연대기 『시사평론』 제3권 출간. 이 저서를 통하여 카뮈는, 알제리의 갈등 및 문제 해결책 강구를 위한 면밀한 분석의 필요성을 제창했으나, 유명 신문들은 아무런 논평도 가하지 않고 무시. 이 해와 다음해에도 카뮈의 건강은 쇠약. 6월 9일. 그리스 여행. 11월. 루스마랭에 주택 구입. 1959년 1월 30일.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각색하고, 자신이 연출 상연. 문화부장관 말로가 카뮈에게 테아트르 프랑세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제의하나, 카뮈는 ‘완전히 새로 시작’을 하고자 함. 거의 1년 내내, 카뮈는 많은 일을 아주 고통스럽게 해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루르마랭 집에서, 그는 자기의 집필 원동력을 다시 되찾기라도 한 듯이 힘들이지 않고 『최초의 인간』의 일부를 써내려갔다. 1960년 1년 4일. 미셀 갈리마르(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의 승용차에 동승한 카뮈, 몽트로 근교 빌블르뱅에서 교통 사로로 사망.

 
 
* 이 연보는 플레야드판 『카뮈 전집』 제1권에 로제 키요(Roger Quilliot)가 작성ㆍ수록된 것으로, 우리말 번역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