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6.

국립극단 1 - 니체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 ‘진리’의 부정

 

 

* 세계와 언어에 관한 네 가지 명제

 

1.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의 역사에 불과하다” - A. N. Whitehead.

2. “감각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며, 이념(idea)이 믿을 만한 것이다.” - 플라톤

3. “이념(Idee)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며, 감각이 믿을 만한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4.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 『노자, 길과 얻음』, 김용옥 옮김, 통나무, 1989, 제1장.

 

* 니체 연보

 

 

1844. 10. 15. 독일 색소니의 뤼켄에서 출생. 부계와 모계는 공히 전통적 루터교파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목사, 어머니 역시 목사의 딸이었다. 여동생 엘리자베트. 니체 5세때 부친 사망. ‘어린 목사.’

1864. 본대학의 고전학 장학생으로 입학. 대학시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철학을 발견 - 󰡔의지(意志)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1847).

1868-9.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그의 아내 코지마 폰 뷜로(Cosima von Bülow)를 처음 만나다.

1870. 스위스 바젤대학의 고전학 정교수가 되다.

1872.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니체 작곡 「만프레드 명상」(Manfred Meditaion) 초연.

1873-6. 󰡔반(反)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 I, II, III, IV부.

1878-188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편지에서 자신을 ‘삶의-철학자’(der Lebensphilosoph)라 칭함.

1879. 건강 악화로 교수직 사퇴. 이후 1889년경까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유럽 등지로의 여행.

1881. 󰡔서광: 도덕적 편견에 관한 사상󰡕(Morgenröte, Gendanken über die moralischen Vorurteile)

1882. 󰡔즐거운 학문󰡕(Fröhliche Wissenschaft). “신은 죽었다.”

1883-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를 위한 책, 동시에 누구도 위하지 않은 책󰡕(Also sprache Zarathustra). “나는 이제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독립적인 인간일 것이다...”

1886. 󰡔선악을 넘어서: 미래의 철학에 대한 서언󰡕(Jenseits von Gut und Böse)

1887. 󰡔도덕의 계보학󰡕(Genealogie der Moral)

1888. 󰡔바그너의 경우: 한 음악가의 문제󰡕, 󰡔우상의 황혼󰡕, 󰡔반(反)-그리스도: 기독교에 대한 저주󰡕(Antichrist, 1911년 출판), 󰡔니체 대 바그너, 한 심리학자의 공문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디오니소스 찬가󰡕 등을 쓰다.

1889. 1. 45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착란에 의한 졸도에 뒤이은 정신의 총체적 붕괴. 이후 사망 시까지 11년 동안 독일 바이마르에 은거.

1900. 8. 25. 사망. “나는 언제나 나의 온 육신과 삶을 다해 책을 썼다.”

1906. 생전 계획에 따른 미완성 저작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추구󰡕(Der Wille zur Macht. Versuch euner Umwertung aller Werte) 출간. 엘리자베트 니체의 문제.

 

* “모든 인간 공동체에는 건강한 자들에 대한 병든 자들의 투쟁이 존재한다.” 절대적인 것은 병적이다 - 이견(異見), 일탈, 건전한 불신(앙), 경멸, 파괴, 조롱이 바로 건강의 징표다. 도덕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 그것은 공포다.

 

 

* 아포리즘(箴言, aporism). 자유로운 정신(ein freier Geist): ‘진리’를 믿지 않는 자. 삶에 대하여 디오니소스의 정신(=긍정)으로 말하는 자. 낙타-사자-어린이. “인간은 원숭이와 초인(Übermensch)의 사이에 놓인 끈이다.”(󰡔짜라투스트라󰡕). 귀족적 급진주의 -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에도 우월, 등급이 있다. ‘고급문화’, 기독교는 잔인성의 정화(淨化), 심화(深化)에 기반한다 - 우리가 재발견하고 재고해야 할 것은 잔인성이다.

 

* “나는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이다. 나는 그것을 끝까지 살아 냈다.”

천상에서 대지로! 하늘에서 땅으로!

 

ⓐ kosmos. 절제, 질서, 척도, 형식, 조화, 철학, 도덕(das Apollinische).

ⓑ kaos. 도취, 관능, 창조, 예술의 근원적 힘(das Dionysische).

ⓒ 합리성, 혹은 추상적 계몽(das Sokratsche=Platonische).

 

* 플라톤주의(=소크라테스주의): 우주, 세계, 인간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는 본질적인 객관적, 보편적, 절대적 진리가 있다. 1+1=2 ?

 

 

*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한다. 세상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

 

 

* 존재(存在, Being)와 생성(生成, Becoming). ‘있음/~임’과 ‘됨’.

 

 

예술ㆍ삶

 

진리ㆍ이론

디오니소스적인 것

아폴론적 것

소크라테스적인 것

도취

이론화

삶 자체ㆍ전체

개체화 원리

(Principii Individuationis)

형식화ㆍ도식화

의지의 직접적 표현으로서의 음악

조형적 형상화ㆍ가상ㆍ환영

으로서의 조각ㆍ미술

(아름다움의 베일)

이론ㆍ철학ㆍ학문

비극적 신화

음악

(음악과 신화의)

형상화

합리화ㆍ탈신화화ㆍ세속화

호메로스ㆍ르네상스

종교개혁ㆍ루터

-

소크라테스(플라톤)ㆍ

그리스도교/예수(바울)

니체

-

민주주의ㆍ자유주의ㆍ공리주의

자본주의ㆍ사회주의ㆍ공산주의

바그너의 총체예술

(Gesamtkunstwerk)ㆍ 악극(Musikdrama)

-

오페라

* 비극의 탄생에 나타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비교

 

 

* 퇴폐(데카당스, decadence) - 이제까지 원인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은 단지 어떤 다른 것의 한 가지 결과에 불과하다; 데카당스는 필연이다. 종교, 철학, 도덕은 데카당스이며, 그 반대의 운동이 예술이다. “진리는 추하다.” 도덕의 계보학. 원한(ressentiment) = 물귀신 작전? 주인의 도덕(자신의 혈통에 대한 열광적 긍지)과 노예의 도덕(주인에 대한 공포와 예종, 예속의 도덕. 기독교). 기독교 = 대지와 삶의 부정. 도덕에 있어서의 노예 반란: 인간의 내면화 - 모든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을 그 본능의 소유자인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바로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양심의 가책’의 발명 - 그것은 하나의 병이다. 종교의 본질은 노이로제다. “(기독교의) 이타주의, 만인이 서로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각각 개인들이 언제나 보호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열등한) 약자들의 대중적 이기주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 “누군가가 자기 이웃의 비이기성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대부분 개인에게 유해한 덕목들에 대한 찬미이다.” 동정(同情)과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도덕이란 자연에 반(反)하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은 도덕의 자살을 요구한다.”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내게는 세네카나 키케로처럼 철학을 교훈적으로 예찬하는 것보다 구역질 나는 짓은 없다. 철학은 도덕성(Tugend)과는 무관하다.”(󰡔힘에의 의지󰡕, 420번.); 도덕의 계보학: 쇠퇴의 본능과 융성의 본능; “자연의 회복, 즉 도덕에 구속받지 않는 것.”

 

* “신은 죽었다” = 진리는 없다 = 이 세상에 정답은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도스토예프스키) = 허무주의(nihilism): 모든 것의 의미없음. 진리, 도덕, 종교와의 결별. 영원회귀; 영원한 무의미의 반복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기존에 존재하던 지고의 여러 가치(의미)가 그 가치를 박탈당하는 것, 목표(목적)의 결여, ‘왜?’(Warum?)에 대한 대답의 결여.”

 

* 따라서, 사실 혹은 진리가 아닌 오직 관점들, 해석들만이 존재한다. 소극적 허무주의와 적극적 허무주의. 원근법주의(遠近法主義, Perspektivismus): “관점이 가치다.” “자기 자신을 사물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척도로 간주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과장된 유치함이다.”

 

 

* 진리(die Wahrheit), 참된 존재자, 항상적인 (=영구불변한) 것, 확정된 것은 항상 어떤 일면만의 원근법이다. 이는 실재가 아닌, 인간 인식의 편의, 편리를 위한 고안물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류이며, 허구이고,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발명품이다 - 따라서 현재 인정되고 있는 세계는 단지 세계 해석의 여러 가능성들 중 하나이다. “진리(=도덕)란 그것이 없다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생물이 살아갈 수 없었던 일종의 오류이다. 궁극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생(das Leben)을 위한 가치이다.” - 진리에 대한 인식은 도덕을 낳는다. “생(=생명(체), 삶) 그 자체가 힘에의 의지이다.” “그것은 착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이란 기만이다.” 이 때의 생이란 생물학적 의미도 실천적 의미도 아닌, 형이상학적 의미이다(M. 하이데거). 그러므로, 내가 이해하는 이 ‘가상’의 세계야말로 유일한 사물의 실재성이다(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끝난다”). 그렇다면 가상의 세계가 ... 그러나, ‘참된’ 세계를 없앰으로써 우리는 ‘가상의’ 세계도 없앴다. 그림자가 가장 짧은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간성의 절정, 정오(正午)의 사상. 초인이란 최초의 인간이다. 가치의 창조자. 자기 찬미, 자기 창조, 자기 긍정의 도덕. “고귀한 영혼은 자기 자신을 숭배한다.” 신에 대한 인식의 역사는 인간의 자기 인식(자각)의 역사이다.

 

* 허무주의는 종착점이 아닌 통과점이며, 인간 또한 하나의 통과점이며, 몰락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초인이다. 그는 “지식의 엄밀함과 창조의 위대한 양식 안에서 존재를 새롭게 근거짓는 인간이다.” 초인=어린아이=궁극적 긍정=최초의 인간=짜라투스트라=니체. “나를 다 사는 것.” 나의 모든 현실과 나의 모든 가능성을 다 사는 것, 그것은 나의 육체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야 한다. 세계에 의미나 목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창조(=고안)해내야 한다. “진정한 철학자란 입법자이며, 명령자이다.” (본질(本質)주의(Essentialism)에 반하는) 실존(實存)주의(Existentialism). 영원회귀: “충족을 모르고 피곤을 모르는 생성 - 영원히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1. 니힐리즘(虛無주의, nihilism). 2. 영원 회귀(永遠 回歸, ewige Widerkehr des Gleicher). 3. 초인(超人, Übermensch). 4.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5.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

 

* “이것이 여러분에 대한 하나의 요구이다 - 그것이 여러분의 귀에는 극히 거슬리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 즉, 여러분은 도덕적 가치평가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기서 굴복을 바라고 비판을 원하지 않는 도덕적 감정의 충동에 대해 ‘왜 굴종인가?’를 묻고 그것에 대한 정지를 요구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 ‘왜?’에의 요구, 도덕에 대한 비판에의 요구가 바로 도덕성의 현대적 형식이며, 동시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시대의 명예가 되는 가장 숭고한 종류의 도덕성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여러분의 정직성과 솔직함, 여러분의 속지 않겠다는 의지는 ‘왜 그래서는 안되는가?’, 그리고 ‘도대체 누구의 심판을 두려워해서인가?’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에게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힘에의 의지󰡕, 6. 도덕 비판에의 결론적 고찰, 399번, 249쪽, 청하)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1878),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6. [...] 너는 모든 가치 평가에서 관점주의적인 것을 터득해야만 했다 - 지평의 이동, 왜곡 그리고 표면상의 목적론과 관점주의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대립된 가치들과 관계하는 약간의 우둔함, 찬성과 반대와 함께 항상 지불되는 지적 희생도 터득해야만 했다. 모든 찬성과 반대 속에 포함된 필연적인 불공정[불공평]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 불공정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삶 자체를 관점주의적인 것과 그 불공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 17쪽.

 

25. 개인 도덕과 세계 도덕 - [...] 아무튼 인류가 이와 같은 의식적인 전제적 통치에 의해 파멸되어서는 안 된다면, 지금까지의 정도를 모두 넘어서는 문화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이 보편적 목표를 위한 학문의 척도로서 사전에 이미 발견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음 세기의 위대한 정신들이 해야 할 엄청난 과제이다. 49쪽.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에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목표에 접근하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상실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 - 54-55쪽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 개별 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의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얻고자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 55-56쪽

 

* "Le sens historique, tel que Nietzsche l'entend, se sait perspective, et ne refuse pas le systeme de sa propre injustice." "니체가 이해한 바의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공정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Dits et ecrits I, p.1018;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이광래 지음, 『미셸 푸코: ‘狂氣의 역사’에서 ‘性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350쪽.

 

- 모든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도덕성은 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지르는 '절대 관점, 보편 관점 혹은 신이 죽은'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관점의 우위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 정신에 입각하여 자기 이론마저도 하나의 관점이고, 따라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체계임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필연적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주장할 뿐인 무수한 가능한 관점들 중 단 하나인데, 그들은 이렇게 보통 말한다. "다른 모든 관점들은 관점이다. 진리인 나의 이론만 빼고!"

 

 

이른바 '포스트주의들'은 바로 이점에 대해 스스로를 배제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연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논리가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적용 대상에서 빼놓지 않는 것'을 '논리의 윤리성'이라 부른다.

 

33.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모든 믿음은 순수하지 못한 사고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인류의 보편적인 삶과 고뇌에 대한 동감이 개인에게는 아주 미약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하게 불평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고 있고, 이로써 삶의 가치를 믿고 있다. [...]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의 총체적인 의식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현존을 저주하면서 쓰러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그 속에서 위로와 의지가 아니라 회의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무목적성을 보게 될 때,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의 활동도 낭비라는 특징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꽃이 자연에 의해서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보듯이 바로 우리가 인류로서(그리고 단순히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낭비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느낄 수 있는가? 분명 시인뿐이다; 시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다. - 56-57쪽

 

50.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라 로슈푸코가 자신의 자화상(초판 1658)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에서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은 동정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런 일은 서민들에게 맡겨버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서민들은 고통받는 자를 돕거나 불행에 처했을 때 힘차게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정열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을 통해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 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불행한 사람의 그러한 욕구를 정녕 어리석음과 지적 결함, 불행이 수반하는 일종의 정신장애로 간주하지 않고 (라 로슈푸코는 아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르며 의심스러운 것으로 해석할 때, 사람들은 이런 동정을 갖지 않도록 더욱 강력하게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을 관찰해보라. 그들은 울거나 소리침으로써 동정받고 자신들의 상태가 눈에 띌 순간을 기다린다 ; 병자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과 교제하며 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 그들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힘, 즉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함께 있는 사람이 표현하는 동정은 약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불행한 자는 동정 베풂이 자신에게 입증해주는 우월감으로 인해 일종의 쾌감을 얻는다 ; 자신은 아직도 세상에 고통을 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그의 자만심도 커진다. 그래서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 때문은 아니다. 사교적인 대화에서는 모든 질문과 대답의 4분의 3이 상대편을 조금이라도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사교를 갈망한다. 사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악의가 힘을 떨치고 있는 이같이 많은, 그러나 극히 적은 양의 약에서도 사교는 삶의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다. 그것은 마치 같은 형식으로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호의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는 치료제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 그러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고백할 정직한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생각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모멸하고, 악의라는 작은 탄환을 그들에게 퍼붓는 것을 가장 즐기고 - 기꺼이 즐기고 있다고 고백할 정직한 사람이 있을까? 이런 치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기에는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부정직하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선하다. 따라서 차라리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 할지라도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가 한 다음의 말은 옳다.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없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 77-79쪽.

 

114. 그리스도교에서 비그리스적인 것 - [...] 그리스도교의 모든 심리학적 발명은 감정의 이러한 병적인 과도함과 거기에 필요한 머리와 마음속의 깊은 파괴를 향해 작용했다 : 그리스도교는 파멸시키고, 파괴하고, 마비시키고, 도취시키려고 한다. 단 한 가지 척도만은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말하면, 야만적이고 동양적이며, 천박하고 비그리스적이다. - 138쪽.

 

304. 신뢰와 친밀함-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 289-290쪽

 

310. 기다리게 하는 것 - 사람들은 흥분하게 하고 그들 머릿속에 나쁜 생각을 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도덕적으로 만든다(291)

 

311. 친밀한 사람들에 대해 - 우리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뢰를 얻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잘못된 추리다. 선물로 권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 - 291쪽

 

314.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 292쪽

 

379. 부모의 존속 - 부모의 성격과 성향에 관련된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은 어린아이의 본질 속에서 계속 울리게 되고 그의 내면적인 고뇌의 역사를 형성한다. - 323쪽

 

381.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 324쪽

 

390. 여성의 우정 - 여성은 남성과 아주 좋은 우정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마 약간의 생리적인 반감이 협조해야 할 것이다. - 326쪽

 

396. 반하고 싶어 한다 - 관습에 따라 결합된 약혼자들은 흔히 그들의 차갑고 타산적인 유용성을 비난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익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경건해지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종교적 무언극이 그들에게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 327쪽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483.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 391쪽.

 

499. 친구 - 고통의 나눔 곧 동정이 아니라, 기쁨의 나눔이 친구를 만든다. - 395쪽.

 

 

 

 

* 질 들뢰즈 지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생성과 창조의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 「플라톤과 그리스인들」(1992) - 질 들뢰즈

 

플라톤의 ‘철학’(φιλοσοφία, philosophia) - 이데아론: ‘근거 없는’ ‘부당한’ 주장과 ‘근거 있는’ ‘정당한’ 주장을 구분해주는 ‘선별의 독트린’. “만약 각각의 시민이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경쟁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주장들이 근거가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 플라톤에게 있어서 질서를 재확립할 필요성, 주장들이 근거가 있는지를 판단해줄 심급들을 창조할 필요성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이데아들이란 바로 이 심급들을 말한다.”

 

페르시아ㆍ동방

그리스ㆍ아테네

신화의 초월성ㆍ황제의 초월성

신화의 초월성ㆍ철학적 초월성

황제-신하의 위계적 사회

동등한 친구들, 곧 경쟁자들의 사회

초월성(超越性)

transcendance

내재성(內在性) immanence

= 플라톤적 초월성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로부터 스피노자와 니체를 아우르는 순수 내재성의 철학들만이 플라톤주의를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 「플라톤주의를 뒤집다(환영들)」(1966)

 

* 세계를 읽는 두 방식

 

 

- “오직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낳는다.”: 유사성ㆍ동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이를 사유. 사본들의 세계. 재현ㆍ표상(représentation)의 세계. 세계 자체를 재현으로 제시.

 

- “오직 차이만이 서로 유사하다.”: 유사성, 동일성을 일종의 생산물처럼, 즉 바탕을 이루는 같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생산물처럼 생각하도록 인도. 세계 자체를 환영으로 제시. 다름 disparité. 유사성은 내적 차이의 생산물, 효과로 간주된다(41-42).

 

 

플라톤주의를 뒤집다 - 니체. 본질의 세계와 외양의 세계의 소멸? 플라톤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동기를 밝히는 것! 이데아 이론을 구성하는 동기는 ‘선별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의지의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데아 이론은 차이를 드러내는 것 faire la différence = 나눔 division 의 방법

 

‘사물’ 자체

그 이미지들

본래적인 것

그 사본(寫本)

모델 idea

그 환영(幻影) simulacre

 

* 신플라톤주의의 삼자론(三者論, triade): 분유불가자(l'imparticipable, 근거, 아버지), 분유되는 자(le participé, 주장의 대상, 딸), 분유하는 자(le participant, 주장하는 자, 구혼자)

 

* 플라톤의 세 텍스트 - 『파이드로스』ㆍ『정치가』ㆍ『소피스테스』. 환영(幻影, )의 존재, 혹은 비존재(non-être), 소피스트 자신, 사티로스, 켄타우로스, 프로테우스 - 환영이란 단순하게 거짓된 사본이 아니라 오히려 사본과 모델의 개념 자체를 의문시한 것. 혹시 플라톤 자신이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데 있어서 최초로 그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31)

 

도상적 사본들(copies-icônes) vs. 환상적 환영들(simulacres-phantasmes)

 

플라톤의 이론은 환영에 대한 사본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 동일성(모델)/유사성(사본). 모델 - 자기와의 동일성, 사본 - 모델과의 유사성.

 

* 환영(幻影, phantasma, simulacre)의 악마적 성격 세 가지 -

 

 

1. 환영은 [모델의 내적이고 관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같지 않음 disparité 위에 건설된 것이며, 일종의 다름, 상이성을 내화한 것이다. 환영은 사본처럼 외적 유사성이 아닌 내화된 상이성 안에 존재한다.

 

 

2. 환영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이미 자신 속에 필연적으로 차등적인 différentiel 관점을 포함하며 그것을 내화한다.

 

 

3. 환영에게는 결코 앎이나 올바른 견해가 불가능하다(34-36).

 

* 현대 예술. 어떤 문학적 기법들은 동일한 것으로 가정된 어떤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관점들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가능한 수렴(收斂, convergence)의 규칙에 종속되기 마련인데 반해서, 이러한 기법들은 마치 완전히 구분된 어떤 경치가 그것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각에 따로따로 대응하는 것과도 같이 그들 자체가 서로 다르며 발산(發散)하는(divergent) 그런 이야기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법들에 따르면 발산 중인 계열들[이야기들]로 이루어진 합치가 존재하며, 이 합치는 곧 그 자체가 위대한 작품 Grande Oeuvre과 구분이 되지 않는 그 어떤 혼돈 chaos 을 필연적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성된 비정형적 혼돈은 아무래도 좋은 그런 무조건적 혼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혼돈이 발산하는 모든 계열을 혼돈 자신 속에 ‘접혀진 compliquées’ 상태로 취하면서 모든 계열을 접고 compliquer 있다면, 이와 동시에 각각의 현실적인 계열은 이 혼돈을 펼치고 expliquer 있으며, 또 잠재적인 모든 계열은 이 혼돈을 잠재적인 자신의 계열 속에 감싸고 impliquer 있기 때문이다(36-37).

 

이제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다는 것은 도상 또는 사본에 맞서서 환영의 권리, 환상의 권리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 환영은 격하된 사본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것과 그의 사본을, 모델과 그의 재생산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역능이다. [...] 환영은 그 자신이 새로운 근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둔 채, 모든 근거를 먹어치운다. 환영은 보편적인 와해를, 하지만 적극적이며 즐거운 사건으로서의 보편적 와해를, [...] 그런 탈근거(effondement)로서의 보편적인 와해를 보장한다(47-48).

 

동일자의 영원회귀. 플라톤적으로 제압된 영원회귀? 혼돈의 우주 카오스모스 chaosmos (51).

 

 

*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1967)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는 [자신의 글 「동일자의 영원회귀에 대한 실제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망각과 기왕증」에서] 신의 죽음 또는 죽은 신이 자아(Moi)로부터 자아가 동일성과 관련하여 지니는 유일한 보증을, 말하자면 통일을 이루는 자아의 실체적 기반을 빼앗아버린다고 말하였다. 즉 신이 죽었기 때문에 자아는 이제 소멸되거나 증발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자아는 이제 그의 계열이 그 계열의 수만큼의 우발적 사건들이 되어 가로질러짐에 틀림없는 그런 모든 다른 자아에, 다른 역할에, 다른 인격에 개방되게 된다. “나는 샹비주이고 바딩게이고 프라도이다. 나는 역사에 나타난 모든 이름인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장 발은 [자신의 글 「니체의 사유에 있어서의 질서와 무질서」에서] 니체가 그의 질병 이전에 보여준 이 같은 기막힌 소모, 이같은 동성(動性), 이 같은 다양성, 이 같 은 변신 역능을 대상으로 일람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 자신을 대상으로 니체 자신이 직접 실시한 니체의 모든 심리 분석은 일종의 가면(假面)의 심리학, 가면의 유형학에 해당하며, 따라서 여기에서는 각각의 가면 뒤에 언제나 또다른 가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22-223).

 

니체에게는 ‘그 어떤 것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해석만이, 의미의 복수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니체에 따르면 마치 서로 끼워 맞춰진 가면들이 그런 것처럼,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포함된 언어들이 그런 거서처럼 해석은 다른 해석 속에 숨겨져 있다. [...] 해석은 이제 기준으로서의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소유하기를 멈춘다. 그 대신 고상한 것과 천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해석과 가치평가의 내재적인 원리를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논리학이 위상학(位相學, topologie)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유하고 느끼는 행위, 심지어는 존재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낮거나 천한 방식을 전제하는 해석이 존재하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고상함, 관대함, 창조성 ... 을 증언하는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석은 무엇보다도 먼저 해석하는 자의 ‘유형’을 판단하게 되며, 또 이런 이유로 해서 해석은 ‘누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무엇을?’이라는 질문은 포기하게 된다. /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보면 진리를 ‘물리치도록’ 해주며, 참된 것 또는 거짓된 것의 배후에서 그보다 훨씬 깊은 심금(審級, instance)을 발견하도록 해주는 니체적 가치 개념이다. [...] 만약 이처럼 모든 것이 가면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해석이며 가치평가라면, 더 이상 해석할 것도, 평가할 것도, 가면을 씌울 그 어떤 것도 없는 최후의 심급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최후의 심급에는 그 자체가 돌변의 역능(力能), 가면들의 모양을 결정하는 역능,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역능인 힘에의 의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222-224).

 

 

신은 자아의 유일한 보증이다. 따라서 신이 죽으면 자아는 반드시 증발하여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부터, 즉 신이 죽고 그에 따라 자아의 동일성이 파괴되면서부터 비로소 서로 작용하며 서로 침투하는 변동 또는 강도(强度, intensité)의 원리로서의 힘의 의지가 유래하며, 자기의 모든 변화를 거쳐서 되돌아오고 다시 지나가는 변동 또는 강도의 원리로서의 영원회귀가 유래하게 된다. 결국 간단히 말하자면 영원회귀의 세계는 강도로 이루어진 세계, 차이의 세계로서, 그것은 일자나 동일자를 가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반대로 동일한 자의 폐허 위에서, 유일신의 무덤 위에서 건설되는 세계이다(235).

 

영원회귀의 진정한 이유는 동등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것’이 되돌아오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동등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회귀는 오로지 생성(生成)을 통해서만, 오로지 다수성(多數性)을 통해서만 이야기된다. 그것은 존재, 합치, 동일성이 배제된 세계의 법칙인 것이다. 일자(一者)나 동일자(同一者)를 가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영원회귀는 그 모습 그대로의 다수와 유일한 합치를 이루며, 차이를 낳는 것과 유일한 동일성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기만이 생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로서의 영원회귀가 하는 기능은 결코 동일시하는identifier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 다수, 차이를] 증명하는authentifier 것이다(239).

 

우리는 힘에의 의지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본 바 있다. “통용되고 있는 가치들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과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설상의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 본성상의 차이가 영원회귀의 차이이며, 영원회귀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차이이다. [...] 영원히 새롭고 영원히 반시대적이며 그들의 창조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인 가치들, 그리고 겉으로 보아 한 사회에 의해 인정되고 동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때마저도 실제로는 다른 힘들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사회 자체 속에서 또 다른 본성의 아나키적 역능들을 추구하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오로지 이러한 가치들만이 역사를 넘어선 supra-historique 가치들이며, 오로지 이러한 새로운 가치들만이 기막힌 혼돈을 증명하고 또 그 어떤 질서로도 환원이 불가능한 창조적인 무질서를 증명한다. 니체가 그것은 영원회귀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회귀 그 자체라고 말한 것, 그것이 바로 이 혼돈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창조들은 역사-상부적 바탕으로부터, ‘반시대적인’ 혼돈으로부터 시작하며, 또 그렇게 시작된 위대한 창조들은 우리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영역의 그 한계에 이를 때까지 나아간다(242-243).

 

우리는 니체는 아마도 깊이 있는 연극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연극의 철학(디오니소스)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 자체 속에 연극을 도입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철학을 변형시키는 표현의 새로운 수단들이 연극과 더불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니체의 경구가 그것이 마치 연극연출가의 원칙이나 평가인 것처럼 이해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구상하는 것은 철학 속에서뿐만이 아니라 연극무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245).

 

 

* 아리아드네의 비밀(1963)

 

영원회귀는 반드시 변환을 동반한다. 생성의 존재 또는 영원회귀는 이중 긍정의 산물이며, 이때 이 이중긍정은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되돌아오게 하고 오로지 적극적인 만 생성되도록한다(255).

 

 

* 유목적 사유(1972/1973)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니체를 읽고 있으며 니체를 발견하는 젊은이들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257). 그러나 오늘의 니체적 젊은이들이란 누구일까?(259)

 

각각의 강도는 어떤 것이 작용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다른 강도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체험된 상태 또는 강도 또는 흐름이 앞에서 언급한 코드들 아래에 있는 것이자, 그 코드들을 벗어나는 것이요, 또 코드들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바꾸며 화폐로 주조하듯 일률적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강도에 관한 그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도를 결코 재현과 바꾸지 마십시오. 강도는 사물들의 재현과 같은 기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어휘들의 재현과 같은 기표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탈코드화의 동인이면서 동시에 그 대상과도 같은 이 강도는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니체에게 있어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강도는 고유명사와 더불어 보아야 하는데, 이때의 고유명사들을 사물들의 (또는 사람들의) 재현도 아니요 어휘들의 재현도 아니다. [...] 그것들은 차라리 땅의 신체일 수도 있고, 책의 신체일 수도 있으며, 그것들은 차라리 고통받는 신체일 수도 있는 그런 신체 위에서의 강도들을 가리킨다. 나는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이름이다 ... 라는 구절은 이런 의미에서 교유명사들에 의해 지칭되는 강도들이 그 어떤 충만하게 꽉 찬 신체 위에서 살아짐과 동시에 이 강도들에서 저 강도들로 서로서로 침투하는, 강도들의 계속적인 자리이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강도는 이처럼 하나의 신체 위에 강도 자신이 동적으로 옮겨 앉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한 고유명사가 지니는 동적인 외성(外性)과의 관계를 통ㅅ해서만 살아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고유명사가 언제나 하나의 가면, 즉 작용자의 가면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271-272)

 

만약 니체가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니체가 반-철학이라는 또 다른 유형의 담론을 최초로 지각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는 행정적인 합리 기계에 의해 또는 순수 이성의 관료들인 철학자들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전쟁기계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게 되는 담론,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유목적인 담론을 지각한 것이다. 니체그 자신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자기 고유의 계급에 맞서 대항하는 모의라고 클로소프스키가 부른 것)가 시작된다고 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우리의 체제 속에서 유목민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결코 약화되지 않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그만큼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다. 니체 또한 하숙집에서 하숙집으로 전전하면서 [덧없는] 그림자로 깍아내려진 이런 유목민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유목민이 꼭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소 위에서의 여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도 속에서의 여행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면, 유목민들은 이주민의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 사람들, 즉 코드를 벗어나되 같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 유목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에 있어서의 혁명의 문제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 또는 국가장치의 전제군주적이고 관료적인 조직 속에 결코 다시 빠지지 않는 엄격한 투쟁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국가장치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전쟁 기계를 발견하는 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적인 전제군주적 단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유목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를 이처럼 전쟁기계로 만들고 유목적인 역능으로 만든 것, 아마도 이것이 니체에게서 보이는 가장 심오한 것일 것이며, 아마도 이것이 경구 속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의 철학과의 결별이 함축하는 진수일 것이다(276-277).

 

 

 

* 서양철학사는 거개가 실체(實體)에 대한 탐구의 역사다.

 

 

* 실체란 무엇인가?: substance(sub + stantia = essence 本質)와 stantia(appearance 現象) - 무엇이 이 우주, 세계, 자연, 인간에 관한 영원불변한 眞理인가? 그 영원불변하는 眞理(the Truth) 혹은 本質(the Essence)을 서양철학에서는 實體(substance)라 부른다. 實體는 어떤 무엇이 그 무엇이 되게 해주는 그것.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이것이 그것에 없으면 그것이 그것이 아니게 되는 그 무엇.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이 되도록 하는 것; scientia, logos, sophia, episteme, Wissenschaft, knowledge, the Truth...

 

 

* 한마디로, 실체란 -주의(-主義, -ism) 앞에 붙는 것이다.

 

 

* 본질(本質 - Essence, 實體 - Substance, 原質 - Archē, Arkē, Urstoff, 存在(있음) - Being, Existence, Existenz, 實在 - Reality ... ): What really exists (beyond, behind, or under our appearance). 진짜로 있는 것. 理性적 推論의 대상.

 

* 현상(現象: appearance, 비본질적, 부차적, 가변적): 실제로는 없는데 무지, 속임수, 착각 등으로 인해 진짜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感覺, 感情의 대상.

 

 

* 實體의 숫자와 성질 혹은 속성에 따르는 구분들(-ism들)

 

☞ 虛無주의(nihilism), 懷疑주의(skepticism), 不可知論(agnosticism) ...

 

- 실체의 갯수에 따라: 一元論(monoism), 二元論(dualism), 多元論(pluralism)...

- 실체의 주요 구성 성분에 따라: 唯物論(materialism)과 唯心論(spiritualism=精神主義), 唯氣論과 唯理論 ...

- 실체가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實在論(raelism), 觀念論(idealism) ...

- 우리가 실체를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經驗論(empiricism), 理性論(=合理論, rationalism), 科學주의(scientism), 實證주의(positivism), 檢證 이론(verification theory), 反證 이론(falsification theory) ...

 

* 形而上學(metaphysics), 存在論(ontology)+認識論(epistemology), 論理學(logic), 倫理學(ethics), 美學(=藝術哲學, aesthetics).

 

 

* 辨證法的 唯物論의 ‘철학의 근본문제’: 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파악가능한가? 실체의 본성과 그것의 파악 방식에 따른 구분:

 

形而上學的(=종교적, 신학적) - 機械論(=실증주의) - 辨證法

 

觀念論 - 不可知論 - 唯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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