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2.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에 대하여 [초고]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과 연극에 대한 단상


 
“우리는 신들에게, 또는 우리가 막 유혹한 사람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 미셸 푸코

 
 
 
1. 말과 삶
 
 
 
박솔뫼 소설의 등장인물들, 혹은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무너지는’, ‘어긋나 있는’, ‘한층 쑥 내려가’고 있는 것은 박솔뫼에 의해 다름 아닌 ‘무언가’ 또는 ‘뭔가’로 기술되는 그 무엇이다. 이 ‘한축이 무너지는’, ‘무언가 어긋나있는’,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것은 정확한 용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작가의 어떤 느낌이다. 이 ‘느낌’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정확히 말해질 수 없는 것,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언어가 발견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새롭게 시작하려는 모든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솔뫼에게는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다. 따라서 박솔뫼는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박솔뫼는 단순히 자신의 말을 찾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말과 그 말이 놓이게 될 상황, 말과 사물, 말과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
 
 
2. 시중(時中), 말의 때와 침묵의 때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나아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건 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건, 정확히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의 경계를 정확히 알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앎에 그치지 않는 실천의 문제가 된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듯, 가령 침묵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다. 이는 어떤 일반화된 언어로도 결코 고정시킬 수없는 구체적 상황의 문제, 미학적인만큼이나 동시에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이다. 이 실천적 상황의 문제는 언제가 침묵해야 할 때이며 언제가 말해야 할 때인가를 정확히 아는 상황판단 곧 인식의 문제, 또 이러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해줄 언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나아가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 가의 문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를 어떻게 곧 이렇게 혹은 저렇게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곧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가 놓이는 상황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박솔뫼의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결국 박솔뫼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이러한 인식, 언어, 글쓰기와 상황의 문제에 바쳐질 것임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이는 언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 나아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 곧 왜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단 쓰기로 결정한 연후, 작가의 관심은 ‘언제’라는 윤리적 문제로부터 ‘어떻게’, 곧 완벽하게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가 정확히 말하고자 노력해야만 할 무엇에 대해 어떻게 잘못 쓰지 않고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미학적 방법론의 문제로 이동한다.
 
 
3. 새로운 입말, 글쓰기
 
 
 
박솔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입말의 되살아남이다. 자신이 참여한 여럿의 대화를 녹음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말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대화는 우선 의사소통의 대부분이 실상은 ‘몸짓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대화의 특성, 더하여 참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상호동의에 입각한 논리적 비약과 생략으로 인하여, 심지어 대화의 참여자인 ‘내’가 들을 경우에조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정확하지 않은 것, 나아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곤 한다. 심지어 이 ‘대화’를 글로 적어 남에게 보여준다면, 그것은 대화가 전제하는 암묵적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표현의 막연함, 문법적 부정확성, 생략 등이 어우러져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솔뫼가 선택한 전략, 곧 글투 문어체와 입말 구어체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남들에게 독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입말체를 글쓰기에 도입하는가? 기존의 정형화된 문어체, 구어체가 작가의 느낌과 생각, 삶을 잘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작가란 말과 글에서 자신만의 ‘투’(style)를 찾아가는 자라 할 때, 이는 필연적이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낭독극장의 좌담회에서 작가가 구사하는 말투는 그의 글투와 거의 같았다. 물론 이렇게 작가의 문체와 그의 일상화법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심리주의적 인격주의적 관점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펼치려하는 자들이라 할 때, 한 작가가 자신의 삶과 느낌, 인식이 배어있는 자신의 입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언어가 아닌 여기 오늘 나, 우리의 언어. 나의 말은 내게 쉽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분명하다. 이것이 모든 백화(白話)운동의 근거를 구성한다. 나의 느낌과 생각,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이가 내게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박솔뫼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입말을 그대로 자신의 글말로 사용한다.
 
 
4. 생각말, 몸말
 
 
또한 박솔뫼의 ‘입말’은 박솔뫼의 생각과 관계 맺고 서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혼자 하고 말을 보통 생각이라 하는데, 아마도 몸 전체의 느낌이 관여되었으며 한 사람이 혼자 하고 혼자 아는 이 생각은 흔히 말이라는 형식 아래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렇게 말로 드러난 생각은 물론, 생각 일반이 아닌, 나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난(現象된) 생각이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 안에서, ‘나의 말’이라는 구체적 형식을 빌어 나타난 무엇을 ‘생각말’이라 하자(아니면 ‘마음말’, 또는 우리말의 전통적 의미를 존중하여 몸(=마음+몸)이라는 의미의 ‘몸말’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알게 모르고 말하고 듣는 이 생각말이 내게 늘 정확히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말은 지나가는지 아닌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나를 지나간다. 아니, 내가 생각이, 말이 되어 나를 지나간다. 가령, 데카르트처럼,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을 분리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생각이, 그 말이 아닐까? 말씀과 육체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작기 원인적 실체가 아니라, 가령 말씀이 육화(肉化)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不二, 不異) 않을까? 여하튼, 내 머리를,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몸을 오가는 이 말은 어떤 하나의 기준 아래 통합가능한 동일자(同一者)가 아니다. 이 말, 보다 정확히는 이 말들은 흔히 하나의 생각이라는 형식 아래 내가 하고 있다, 또는 하나의 목소리라는 형식 아래 나를 지나간다, 내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 ‘하나의’ 목소리는 사실은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수의 ‘목소리들’이다. 이 목소리들은 이른바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질러, 나의 정신과 육체를 가로질러, 나의 마음과 몸을 가로질러, 들려온다.
 
 
5. 엄마말, 엄마나라말, 나의 말
 
 
물론 내게 들려오는 이 말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나라말, 곧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는데, 이 나의 말은 이 말이 나의 모국어(母國語)임을 의미하나, 이러한 규정은 이미 ‘국’(國), 보다 정확히는 서구어 nation을 번역한 메이지(明治) 신한어(新漢語)로서의 ‘국가’(國家), ‘국민’(國民), ‘국어’(國語)라는 삼위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근대적 관념이다. 더구나 한 사람이 반드시 한 나라의 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김용옥이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엄마나라의 말’(母國語)과 ‘엄마말’(母語)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구분을 따르자면 차라리 우리는 적어도 처음 어린시절에는 엄마말을 사용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앞서 언급한 국가ㆍ국민ㆍ국어라는 삼위일체와 분리 불가능한 학교(國民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모국어, 곧 ‘표준어’를 배우게 된다. 표준어란 곧 한 언어 공동체에 의해 규정된 기준이며, 이를 확정하는 행위 자체가 다름 아닌 한 사회 언어 사용자들의 이른바 ‘바른 말, 옳은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을 구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언어의 사회성은 이렇게 언어의 정치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의 과정, 달리 말하면 사회적 기준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내게 안착된 또는 나를 언어의 주체로 구성하는, 최초의 엄마말 혹은 이후의 엄마나라말은 글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준다, 또는 나 자체이다. 자, 사람이 말을 만들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 그럴까? 차라리, 푸코 혹은 바디우의 말대로, 사람과 말은 동시적 (비)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연숙이 ‘근대 일본’이라는 국가와 언어의 동시적 탄생 과정을 다룬 『국어라는 사상』에서 탁월하게 밝힌 것처럼, 국어가, 언어가 사상(思想, 생각하고 상상한 것), 곧 생각이다. 국어와 언어는 사상의 표현 또는 그 수단에 그치지 않는, 사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 나름으로 옳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이야말로 언어를 실어 나르는 배(船)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촘스키의 지적대로, 이 ‘나’는 언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운 유한한 언어로 매번의 상황에 적합한 무한한 나만의 상황적 변양(變樣)을 만든다.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이 배운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은 그녀가 그 언어를 ‘변형’시키는 과정과 구분 불가능한 사실상 동일한 과정임을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 말을 한다, 그런데 나를 구성해준 이 말이 때로 가둔다. 늘 변해가고 변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 나를 불변하는 관념 속에 고정된 언어가 늘 정확히 드러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도, 엄마나라의 말도, 내가, 곧 내 말이 아니다. 이리하여 배 자체이자, 선장이자, 승객이자, 선주인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 없는, 이제 와야 할, 자신만의 말과 글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이 어떤 이들을 작가라 부른다.
 
 
6. 들어맞음/어긋남, 이접(離接)
 
 
때로, 내 말, 내 글이 나를 가둔다, 버린다, 죽인다. 내가 하는, 나를 배신하는, 나를 소외시키는 이 말, 이 글이 나를 잘 드러내도록, 나를 살리도록, 나는 노동을 한다. 글쓰기라 불리는 이 노동은 내 진정한 뜻한 어긋나는 이 말들을 나의 생각말, 몸말에 맞추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박솔뫼 글쓰기의 참다운 의미는 작가가 이런 ‘글로써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을 재현(再現)한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서 인용한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라는 말,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글을 잘 썼다,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 등은 모두 작가가 갖고 있는 언어의 이러한 근본적 한계를 자기 글쓰기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즐거운 인식’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모든 참다운 작가처럼, 박솔뫼는 기존의 말들을 자신의 생각 안에서, 몸 안에서, 컴퓨터 안에서 새로이 조합하여, 자신의 말을 만든다. 박솔뫼에게 글쓰기 행위는 문학의 언어를 만드는 행위이자, ‘나’를, ‘우리’를, 나와 우리의 말을, 우리나라말을 새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 말만들기의 행위는 기존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 말과 사물, 말과 삶은, 이제, 들어맞음, 연접(連接)이 아닌, 어긋남, 이접(離接)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연접/이접의 이접’은 기존의 것을 인정하고 사용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파괴한다. 이 이접은 잇기(移接)/잊기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있음, 곧 생성의 글쓰기가 된다. 특히 의식적(意識的) 주체가 갖는 모든 종류의 ‘일원성’에 대한 파괴를 주된 기능으로 갖는 이 생성적/파괴적 이접의 글쓰기는, 따라서, 기존의 논리에서 바라볼 경우, 이해되지 않는 것, 딱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와 구분, 인식의 문제점을 충분히 기억하며 글을 쓰는 박솔뫼 글의 가치는 그것의,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이해되지 않음, 나를 따라 말하자면, 기존 장르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음,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식별불가능성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솔뫼를 역사가 없는 개인의, 파편화된, 체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가벼운 글쓰기라는 식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모두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가령, 박솔뫼의 글쓰기를 사(私, private)소설의 계보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일견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사소설이란, 가령 공(公, public)소설이 아닌 어떤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칸트, 헤겔 이래의 철학적 보편/개별의 구분에 대응하는 문학적 구분이며, 박솔뫼의 소설이 들려주는 이 목소리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은 곳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내용/형식의 구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서구 근대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무반성적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가상의 공간인 해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은 물론, 일본 츠나미와 원전사고, 가상의 고리원전 폭발 사고 등 박솔뫼의 소설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과 형식의 어느 측면에서도 이른바 개인적, 사적인, 몰역사적 인식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박솔뫼 글쓰기의 가치는 오히려 이러한 보편/특수, 공/사, 내용/형식, 의식/무의식, 역사/, 사회/개인 사이에 설정된 기존의 구분 자체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구분을 제시하는 행위에 있다.
 
 
7. 이름 - 봄과 보임
 
이 생성적이고 파괴적인 시바 여신의 그것과도 같은 박솔뫼의 글쓰기는 결국 글 쓰는 자 자신의 의식적 일관성, 플롯상의 논리적 정합성, 등장인물 또는 발화자가 보여주는 말투와 성격에 있어서의 일관성, 기존 한국어 문법 구조에 있어 발화자의 문장 구조 및 이렇게 발화된 언표가 갖는 의미의 일의성 따위를 -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 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그들 사이에서 인정/파괴의 놀이, 합리성/비합리성, 정합성/비정합성의 놀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이 모든 말들은 개념으로 고정된 언어이며,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으므로,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조건이므로. 따라서, 모든 글쓰기가 소설이며, 삶의 모든 행동이 연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란 사실과 허구, 참다운 진실과 근본적 거짓말,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 사이를 넘나들며 놀이를 하는 자이다. 수용, 계승이든, 파괴, 창조이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전통과 놀이를 하는 자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문학이란, 가령 철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대가 스스로의 ‘보편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작가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자기 시대의 보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자, 아직 이름 없는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여주는 자, 그것에 목소리와 행동을 부여해주는 자, 이를을 허구/현실의 구체적 상황 속에, 우리의 마음과 몸 위에, 펼쳐놓는 자이다.
 
이름은 우리를 홀린다(spelling spells). 우리는 이름 없는 자를 홀릴 수도, 그와 사랑에 빠질 수도 없다. 나는 그를, 나를, 부르는 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름 붙여준 것, 자신이 부른 것, 곧 자신이 홀린 언어에, 이제 다시금, 홀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무얼 부르지?”


 
 
 
 
 
 

* 산울림소극장은 2014년 4월 23-27일까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연출로 ‘단편소설 입체낭독 극장 2014’라는 제명 아래 박솔뫼의 세 작품, 「우리는 매일 오후에」(김한내 연출),「도미의 나라」(성기웅 연출),「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강민백)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의식의 분열 및 비현실성을 화자의 분리, 다양한 매체의 사용, 관객의 참여 등과 잘 결합시킨 실험적이면서도 즐거운 좋은 공연이었다. 나는 27일 공연 이후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 - 무대 위의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 겸 사회자로 참여했다. 이 글은 이를 계기로 박솔뫼 글쓰기의 다양한 측면을 짚어본 글이다.
 

2014. 6. 17.

잠언 09

 



0.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가 '민주주의자'인가 아닌가를 알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녀가 타인의 말을 들을 능력이 있는가, 보다 정확히는 그녀가 남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의지와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민주주의자'란 차라리 하나의 무서운 농담이다.



1.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의 인식 버전을 앎의 의지(will to know)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앎의 의지의 철학 버전은 보편에의 의지(will to the universal)이다.



2. 철학자의 참다운 윤리는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도 적용시키는가의 여부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가의 여부는 이에 비하면 차라리 부차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야구와 바둑이 '있는 줄' 알다 - 흔히 가령 야구 혹은 바둑이 인생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맞을 수밖에 없다. 야구나 바둑을 삶으로부터 실체적으로 분리하여 바깥에 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야구와 바둑은 삶의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야구와 바둑은 삶의 일부이고, 따라서 삶의 모든 속성이 야구와 바둑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한 학문의 청년기는 그것의 성숙기이다. 이 시기 이전에, 학문은 - 어린아이가 편견으로 살아가듯 - 편견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 부모들의 세대를 살아가는 것이므로 낡은 것이다." -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1991, 25쪽).



5.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정치였다. 정치 일반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였다. [...] 일단 마르크스-레닌 주의 정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또한 철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마침내 마르크스와 레닌, 그람시의 위대한 테제, 즉 철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테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45쪽)



6.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마땅히 그래야 되므로'라는 식으로 도덕화하는 경우가 있다.



7. 내가 아는 것과 내 몸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가령, 당신이  - 그것이 심지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 당신이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이러한 믿음에 따라 반응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 무엇이 사실인가임과 동시에 - 어떤 면에서는 더욱 더 내가, 나의 몸이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가이다.



8. 친구, 애인, 부모, 직장을 막론하고, 인간관계를 '우격다짐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그녀가 실패해도 문제이지만, 기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 적어도 외견상 - '성공'했을 경우이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룬 반면, '사람'을 영원히 잃는다. 결국, 부작용이 성과를 능가하는 것이다.



9. 라캉의 manque(lack)는 결핍이 아니라 결여이다. 결핍은 무엇인가 '채워넣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고, 결여는 '존재의 본질적 양태', 곧 존재의 존재 조건이다.



10.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는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 이호영, <<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23쪽)



11. "<대학 大學>이라는 책은 남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고 治國',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라 平天下'고 주문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주문하는 정치를 하려면 먼저 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를 직접 실현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모두가 왕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대학>이라는 남자의 규격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태도 '왕 노릇 연기'이다. 한 마디로 <대학>은 왕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남자를 왕으로 느끼게끔 해주는 가상적인 '남자 판타지'라는 얘기다. 남자는 근본적으로 판타지에 목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22-23쪽.



12.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얻기는 참으로 힘들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극이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진심의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이는 그 인격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13. 가령 철학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철학하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철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철학함이란 하나의 능력이며, 가령 누군가가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철학을 배우는 이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 적어도 처음에는 선생님이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철학하는 행위를 직접 보고 이를 모델로 삼아 따라해 봄으로써 - 어떻게 스스로 철학하는가를 배우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가 자신의 수업 시간에 자주 반복했다는 '여러분은 내게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하는 방법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천하의 명언이다).




14. 당신이 가장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몹시 괴롭힌다. 이런 면에서, 내 삶의 목표는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16. 시칠리아의 암소, 혹은 키요틴 - 평생 '단장취의'와 '거두절미'로 타인을 심판하던 자가 이번에는 스스로 그러한 심판의 대상이 되다.




17. 하나의 관점 - 철학자를 '섹시한'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로 나누어 본다.




18. '초심자의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말은 때로 참으로 옳다. 아무 것도 모르나,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며, 나아가 참으로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초심자들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대부분의 질문은 가히 근본적인, 곧 철학적인 질문들이다.




19. 프랑스철학의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과학철학적 전통, 그리고 소쉬르 이래의 구조주의적 사유이다.




20. "종교란 죽음의 해결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 김용옥




21. 현상학이 말하는 이른바 '본질직관'이란 '서양본질직관'이다.




22. 철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철학자 개인에 대한 호감을 철학 행위 자체의 탁월함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철학은 개인에 대한 호감 혹은 악감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철학자가 '유명'해진다면, 이는 곧 그 철학자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따르는 일군의 사람들, 팬들(?)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참된 철학자라면,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 자기 자신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호감이 아닌 - 참다운 사유 행위 자체, 철학 행위 자체를 향하도록 이끌고 격려할 것이다.




23.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가령 엄마에 대한 자식의 묘사는 대개의 경우 '엄마'보다는 오히려 그 말을 한 '자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24. 푸코 효과 -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로부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로.




25. 올바른 교육의 유일한 형태는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고,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교육이다(학생들의 의견이 잘 경청되었고 잘 반영되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학생들 자신이어야만 하며, 이에는 어떤 예외, 혹은 어떤 형식의 대표자(대리인)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이외의 모든 '교육' 형태란 기득권자의 가치관을 피교육자들에게 주입시키는 폭력 혹은 세뇌에 다름 아니다.








 
 
Danzonete Hebreo




2014.05.-2014.06.





 
 

2014. 6. 8.

개인의 성 정체성이라는 정치적 문제 [초고]

 
 
 
 
 

개인의 성 정체성이라는 정치적 문제 - 미셸 푸코(1926-1984)의 ‘성의 역사’ 시리즈 1~3권





‘성의 역사’ 시리즈는 원래 6권으로 계획되었으나 푸코의 사망으로 3권까지만 출간되었다. 1976년 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 1권 『앎의 의지』의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나머지 다섯 권의 리스트가 실려 있다. 2권 『살과 육체』, 3권 『어린이 십자군』, 4권 『여자, 어머니, 히스테리 환자』, 5권 『성도착자』, 6권 『인구와 인종』. 그리고 『앎의 의지』의 본문에서 푸코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진리의 권력』이라는 책을 내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발간된 것은 푸코가 사망하던 해인 1984년 발간된 2, 3권 『쾌락의 활용』과 『자기 배려』뿐이며, 이마저도 원래의 예고와는 전혀 다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기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1권과 2, 3권의 사이에는 8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으며, 이 시기 동안 성의 역사 시리즈는 물론 어떤 책도 발간되지 않았다. 이 8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성의 역사’에 관련된 몇 가지 논점들




우선 몇 가지 기초적 사실의 확인과, 그에 이어지는, 기본적 논점의 확립을 통해, 부정적으로는 대중의 오해를 제거하고 더 나아가 긍정적으로 논의의 초점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연구자들 사이에는 푸코의 이 ‘침묵’이 단절인가 연속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하지만 이 8년이라는 ‘침묵’의 시기 동안 푸코는 단지 저서를 내놓지 않았을 뿐, 각종 논문, 강연, 세미나 그리고 콜레주 프랑스 강의 등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더 활발히 글들을 발표했다. 두 번째로, 실제로 발간된 ‘성의 역사’ 1~3권 중 1976년에 발표된 1권과 1984년 발간된 2, 3권의 관계설정이라는 문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연구자들 사이에 크게 보아 단절을 강조하는 학자들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로 나뉘어져 왔으나, 이에 대한 나의 견해는 단절도 연속도 아닌 ‘포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간단히 논의하도록 하자.



 
 
 
 
앎의 의지 - 섹슈얼리티라는 권력 장치
 
 
 
다음으로 푸코의 사유 내에서 『앎의 의지』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이 있다. 동성애자였던 푸코는 대략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게 되고 이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고자 시도한다. 1980년 이후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자신의 사유를 지식, 권력, 윤리라는 세 가지 영역을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두 가지 방법론으로 조명한 것으로 요약한다. 이는 지식의 고고학, 권력의 계보학,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개의 시기를 낳는다. 우선 1960년대에 걸쳐있는 ‘지식의 고고학’ 시기가 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말과 사물』(1966)과 『지식의 고고학』(1969)이다. 1970년 초에 시작되는 ‘권력의 계보학’의 시기는 『담론의 질서』(1970), 『감시와 처벌』(1975)로 대표된다. 마지막 ‘윤리의 계보학’의 시기에는 1976~1984년에 이르는 ‘성의 역사’ 시리즈 1~3권이 포함된다.
 
 
 
푸코가 말년에 개진한 회고적 분류에 따르면, ‘성의 역사’ 시리즈는 모두 ‘윤리의 계보학’에 속하나, 실상 1976년에 발간된 『앎의 의지』는 오히려 ‘권력-지식’, 곧 권력의 계보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바라본 작품이다. 푸코는 자신의 질문이 ‘왜 우리가 억압받고 있는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이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가 문제 삼는 것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동시대의 지배적 관점, 곧 빌헬름 라이히로 대변되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이다. 푸코에 따르면,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공히 ‘억압’된 진실과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억압-해방’의 담론에 기초하고 있다. 푸코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 혹은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섹스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사실일까?’라는 역사적 질문. 둘째, ‘권력의 메커니즘은 실제로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라는 역사-이론적 질문. 셋째, ‘억압의 시대와 억압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시대 사이에는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할까?’라는 역사-정치적 질문.
 
 
 
이 질문들이 잘 알려주듯이, 『앎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그 전 해에 발간된 『감시와 처벌』의 ‘권력 계보학’을 이어받아 그 논의를 심화시키고 난점을 보완하면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섹슈얼리티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책이다. 푸코는 앞서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출한다. 첫째, 실제의 서구 근대의 역사는 오히려 성에 관한 담론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이는 성이 억압된 적이 ‘없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둘째, 억압, 금지 등 권력의 부정적 기능을 통해서만 권력을 바라보는 것은 권력이 갖고 있는 생산적 기능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셋째, 억압에 대해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해방을 외치는 이러한 담론 자체가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메커니즘, 장치로서 기능한다. 푸코에 따르면, 결국 우리는, 첫째, 성이 억압되었다는 ‘담론’과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 ‘효과’에 대한 분석에로 논의의 방향을 전환해야 하며, 둘째, 억압-해방 담론의 기반을 이루는 기존의 실체적인 거시적 권력 개념 자체를 파기해야 하며, 셋째, 이른바 ‘억압’과 ‘억압-해방 담론’이 동일한 인식론적 층위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는 등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이제 이른바 생물학적 ‘자연적 성’(le sexe)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인위적 구성물’로서의 구체적 인식들, 실천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과 관련된 서구 근대의 제반 인식ㆍ실천은 ‘섹슈얼리티 장치’(le dispositif de sexualité)를 통해 이루어지며, 따라서 이른바 성적 억압이라는 ‘현실’은 물론 이에 대한 각종의 저항-해방 ‘담론’을 포함하는 섹슈얼리티 장치가 분석의 주된 대상으로 드러난다. 『앎의 의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섹슈얼리티 장치의 아이러니는 우리 자신의 ‘해방’이 섹슈얼리티 장치에 달려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
 
 



 
 
 
 
 
주체화 - 진리, 권력, 윤리를 감싸는 문제화



잘 알려진 대로, 『앎의 의지』 출간 이후 1977-1978년의 시기 동안 푸코는 ‘통치성’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윤리의 계보학으로 자신의 관심을 이동하게 된다. 통치성 혹은 생명관리정치의 문제의식은 이 시기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특히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잘 드러나 있다. 통치성의 문제의식으로 근대권력의 탄생 및 20세기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조명한 이 시기의 강의록들은 이후 시간이 가면서 점차로 푸코의 주저에 못지않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감시와 처벌』과 『앎의 의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푸코는 부정적 효과에 집중하는 기존의 권력관을 다시금 사고하면서, 권력의 생산적 기능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지배와 자기에 대한 지배를 연결하는 통치의 문제에 주목하게 되고, 이는 다시 1980년대 초 이후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설정, 곧 주체화에 집중하는 윤리의 계보학에 천착하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성의 역사 2, 3권인 『쾌락의 활용』과 『자기 배려』인데, 2권은 고대 그리스에서 한 시민이 자신의 쾌락을 다루는 방식과 동일한 개인이 사회적 곧 폴리스적 자아로서 형성되는 방식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며, 3권은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 초기 로마에서 있어서의 자기 배려, 곧 자기 형성의 논리가 보여주는 특징에 집중한다.
 
 
유의할 것은 이러한 ‘윤리의 계보학’에서 나타나는 ‘윤리’(éthique)가, 용어의 그리스어 어원 êthos[성격, 품성]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자기와 자기의 관계, 곧 자기 인식, 자기 지배, 자기 배려를 모두 함축하는 용어이다. 이는 푸코는 서양인으로서 자기 문화의 기원을 이루는 고대 문화에 집중한 것으로 특히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서양인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드러내고자 한다. 푸코에 따르면, 서양인들에게 섹슈얼리티는 여타의 영역과는 다른 결정적 중요성을 가지며, 이는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너의 성적 정체성을 말해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마.” 푸코는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진리, 권력, 윤리가 만나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 영역으로 바라본다. 한편 유의할 것은 이때의 지식의 고고학, 권력의 계보학,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개의 ‘영역-방법론’이 시기적으로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부정하고 다음 단계로 이행해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며 상호보완적인’ 세 개의 영역들로 설정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의 영역은 이전의 영역(들)을 감싸 안고 넘어가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윤리의 계보학은 ‘윤리와 계보학’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식-권력-윤리의 고고학-계보학’이다. 푸코의 ‘윤리’는 진리와 관계하면서 철저히 정치적인 윤리 곧, 자기도야와 자기 생산의 논리이며,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의 자기 형성을 통해 자신의 구체적인 모습을 얻게 된다.
 
 
문제화 -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




이는 푸코가 전통적인 주체, 대상, 인식이라는 세 개의 개별적 실체를 주체화, 대상화, 인식(론)화라는 상관적ㆍ동시적으로 형성되는 세 개의 연관관계로 만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푸코는 주체화, 대상화, 인식(론)화를 통칭하여 문제화ㆍ문제설정(problématisation)이라 부르는데, 푸코는 평생에 걸친 자신의 작업이 바로 이 ‘문제화’에 대한 탐구였다고 말한다. 말년의 푸코가 이를 지칭하여 부르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ㆍ비판적 존재론’에 대한 탐구란 지식, 권력, 윤리의 영역에서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되었는가를 고고학적ㆍ계보학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탐구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성의 역사’ 시리즈는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되었는가’라는 역사적 과정, 문제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오늘 우리 자신의 변형(transformation)을 가능케 해줄 제반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수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014.06.08.


 
 
 
 
 
 

2014. 6. 4.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 1853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853610, 금요일, 런던
 
 
판에 박힌 형태의 이 자그마한 [인도의 촌락이라는] 사회 유기체는 영국의 징세관과 영국의 병사가 자행한 야수적 간섭에 의해서라기보다 영국의 증기력과 영국 자유무역의 작용에 의해 대부분 해체되고 소멸되었다. 이러한 가족 공동체들은 가내 공업, 즉 손()노동에 의한 방적, 손노동에 의한 경작의 독특한 결합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결합이 이 공동체들에 자급자족의 힘을 가져다주었다. 영국의 간섭은 방적공을 랭카셔에, 직조공을 벵골에 가져다 놓으면서 혹은 인도인 방적공과 인도인 직조공을 일소하면서, 반은 야만적이고 반은 문명적인 이 자그마한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를 폭파시켜 버렸고 그리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의 간섭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 실은 아시아 유일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이 수많은 근면하고 가부장제적이며 무해한 사회 조직이 해체되고 각 구성단위로 분해되어 고통의 바다에 던져지는 과정, 그리고 그 개개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고대문명 형태와 자신들의 전래의 생활 수단을 동시에 상실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아무리 애절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목가적 촌락 공동체가 언제나 동양 전제 정치의 견고한 기초를 이루어왔다는 것, 이 촌락 공동체가 인간 정신을 있을 수 있는 가장 좁은 틀에 제한하였고 또한 인간 정신을 미신의 온순한 도구로, 전통적 관습의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 웅대함과 역사적 정력을 앗아 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야만의 이기주의 때문에 촌락 공동체 주민들은 땅 조각에만 신경을 쓸 뿐이지 제국들의 멸망이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잔학 행위들 또는 대도시 주민들의 학살 따위는 강 건너 불 바라보듯이 방관하게 되어, 결국 그들 자신은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정복자들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적 존엄을 모르고 정체해 있으며 식물과 다름없는 이 생활, 이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 다른 한편으로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맹목적이며 멈출 줄 모르는 파괴력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인을 힌두스탄의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자그마한 공동체가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과 노예제라는 오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인간을 환경의 지배자로 올려 세우는 대신에 외적 환경에 예속시켰다는 것, 자기 발전하는 사회 상태를 결코 변하지 않으며 자연에 의해 부여되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리하여 자연의 지배자인 인간이 원숭이 하누만과 소 삽발라를 숭배하여 그 앞에 무릎을 조아리는 사실에서 인간을 어마나 값어치 없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는 자연 숭배를 낳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세계의 붕괴 광경이 우리의 개인적 감정에 아무리 애통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괴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칠 권리가 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쾌락을 늘리거늘 /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번민할 까닭이 있는가. / 티무르의 지배도 / 무수한 생명을 유린하지 않았던가?”
 
 
Sollte diese Qual uns quälen / Da sie unser Lust vermehrt; / Hat nicht Myriaden Seelen / Timurs Herrschaft aufgezehrt?(416~418)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줄레이카에게>(An Suleika)[티무르 시편(Timur Nameh: Buch des Timur) ], 西東詩集(West-östlicher Divan, 1819/1827), 418.
    
 
- 뉴욕 데일리 트리뷴3804, 1853625일자. 맑스엥게스 저작집, 9, 127-133. 영어 원문으로부터 김태호 번역.
 
 
 
 
 
줄라이카에게
 
 
아름다운 향내로 그대를 애무해서
그대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미꽃 봉오리들이
먼저 불길에 스러져야 한다.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조그만 병 하나, 그대 손가락 끝만큼이나 날씬한
병 하나를 얻는 데에도
하나의 세계가 희생되어야 한다
 
 
솟구치는 그리움 속에서
이미 꾀꼬리의 사랑을,
그 황홀한 사랑의 지저귐을 예감하며
힘차게 움터 나오는 생명의 세계 하나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이 꽃봉오리들의 수난을 우리가 괴로워해야 할까?
티무르의 지배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가야 하지 않았던가?
 
 
Sollte jene Qual uns quälen,
Da sie unsre Lust vermehrt?
Hat nicht Myriaden Seelen
Timurs Herrschaft aufgezehrt?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동시집, 안문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6.
 
 
 

2014. 6. 1.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말로 - 음성을 통해서건, 혹은 쓰여진 문자를 통해서건 - 무언가를 표현할 때, 우리는 이 표현이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표현이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한 표현(Darstellung für jemanden)’(GW, I. 114)이며, 그런 한에서 모든 표현은 - 그것이 표현인 한 - 이해되어지기를 의욕한다(vgl. GW. I, 480, 485, u. II, 76). 그러므로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 간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좋은 의지(gute Wille, einander zu verstehen)’가 자리잡고 있다. [...] 반면 이해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표현도 있고, 통일성 속으로 소멸되기를 거부하는 개별성도 있다. 언젠가 니체는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모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 니체에게 있어서 이해의 위기는 니체라는 이름의 천재적인 개별성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정신적 고독을 의미한다. 천재 내지 초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이해와 동일에로의 - 형이상학적으로 좋은 -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젠가 브레히트가 인상적으로 표현했듯이 ‘홀로 걷는 자의 위험’(Gefahr der Einzelganger)이다. 이 위험을 니체는 긍정하고 즐긴다. 왜냐하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즉 통일되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니체라는 개별성의 ‘권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로의 좋은 의지(guter Wille zum Verstehen)와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Wille zum Nichtverstandenwerden)가 교차하는 곳, 전체성에로의 ‘귀속Zuordung’(GW. I, 462)과 이 귀속을 거부하는 개별서이 충돌하는 곳 - 바로 여기서 철학적 해석학과 해체주의 간의 논쟁이 시작된다."


 
- 김창래, 「통일과 해체의 이율배반 -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이른바 있을 법하지 않은 논쟁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연구』 vol. 24 no. 1, 2001, 66-68쪽.
 

epiphanies 01


 

 
 
 
 
0. 나 역시, 이 세상에 몸을 갖고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무수한 깨달음을 얻었다.
 
 
 
1. 내 삶에 내가 따를 수 있는 혹은 따라야 하는 '모델'이란 (있을 수) 없으며, 나의 삶은 이 우주 전체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나의 고유한 삶, 곧 '나'를 발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2. 무의식은 현실을, 곧 '시간'을 몰랐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굶주린 아이처럼 나에게 애정을 요구했다. 나는 때로 그 아이의 말을 다 들어주지 않는다.
 
 
 
3. 나는 현실의 내 고통 앞에 무릎꿇고 앉아 속절없이 그 폭력을 감내한다. 나는 내 고통 앞에서 '쩔쩔맨다.' 나의 고통은 하도 깊어 전기고문 후에 온다는 온 몸의 쇼크처럼, 여리고 발갛게 달아올라 그 속이 보이는 상처로 살아 있다. 이럴 때 나는, 넋이라도 있고 없고, 정신이 혼미하다.
 
 
 
4. 어떤 한 젊은이는, 어린 시절, '그렇게 음흉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리라 마음 먹었다.
 
 
 
5. 소중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소중한 것만이 아니라,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다. 삶에는 되돌림이 없다. 오직 눈을 뜨고 앞으로 더 나아가 새로운 삶, 새로운 소중함을 만들어내야 한다.
 
 
 
6. 슬픔은 아름다운 감정이다.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슬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7. 젊음은 광기이고 어리석음이며 눈 뜬 장님이다. 이 폭력적인 젊음이란 것은 자신의 속도, 논리, 이성을 모든 것에 무자비하게 요구하며 관철시키려 한다. 자, 이렇게 말해보면, 실로 개념의 유희에 불과한 '젊음'이란 것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8. 나는 나의 참다운 행복과 너의 참다운 행복이 서로 대립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참으로 잘 되고 따라서 내가 불행해지며, 내가 참으로 잘 되고 따라서 네가 불행해지는 그런 관계는 없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신실한 믿음이다.
 
 
 
9. 고통 받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그래,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너 많이 힘들었구나, 나라도 그랬을 거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잘못했어도 괜찮아, 앞으로만 안 그러면 돼,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괜찮아. 그렇다면, 때로 누군가에게 왜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10. 고통과 기쁨, 불행과 행복의 조건은 서로 맞닿아 있다. 둘 중의 하나만을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 된다. 아무 말없이 양자 모두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역시 그 나름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준다.
 
 
 
11. 나는 육체와 정신이 둘이며 분리되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내 몸으로 실감한 적이 없다. 물론 육체와 정신이 하나는 아니다. 육체와 정신은 둘이 아닐 뿐이다.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상위의 인식, 원리가 있다는 말이다.



12. 때로 새벽에 눈이 떠진다.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혼미하나 마음은 맑다. 이 우연의 결과가 이 짧은 글들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201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