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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

michel foucault - l'usage de la parole - 1963/1974



 
 Le discours de la folie 3
- La persécution (1963)  
 
 
 
 
 
Le discours de la folie 4
- Le corps et ses doubles (1963)  
 
 
 
 
 
 
interview 1974
radioscopie
 
 
 

2014. 8. 2.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과 연극에 대한 단상

 

 

 

“우리는 신들에게, 또는 우리가 막 유혹한 사람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 미셸 푸코

 

 

 

 

 

1. 말과 삶

 

 

박솔뫼 소설의 등장인물들, 혹은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 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무너지는’, ‘어긋나 있는’, ‘한층 쑥 내려가’고 있는 것은 박솔뫼에 의해 다름 아닌 ‘무언가’ 또는 ‘뭔가’로 기술되는 그 무엇이다. 이 ‘한축이 무너지는’, ‘무언가 어긋나있는’,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것은 정확한 용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작가의 어떤 느낌이다. 이 ‘느낌’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정확히 말해질 수 없는 것,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언어가 발견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새롭게 시작하려는 모든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솔뫼에게는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다. 따라서 박솔뫼는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박솔뫼는 단순히 자신의 말을 찾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말과 그 말이 놓이게 될 상황, 말과 사물, 말과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

 

 

2. 시중(時中), 말의 때와 침묵의 때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나아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건 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건, 정확히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의 경계를 정확히 알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앎에 그치지 않는 실천의 문제가 된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듯, 침묵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다. 이는 어떤 일반화된 언어로도 결코 고정시킬 수없는 구체적 상황의 문제, 미학적인 만큼이나 동시에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이다. 이 실천적 상황의 문제는 언제가 침묵해야 할 때이며 언제가 말해야 할 때인가를 정확히 아는 상황판단 곧 인식의 문제, 또 이러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해줄 언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나아가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를 어떻게 곧 이렇게 혹은 저렇게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곧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가 놓이는 상황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박솔뫼의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결국 박솔뫼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이러한 인식, 언어, 글쓰기와 상황의 문제에 바쳐질 것임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이는 언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 나아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 곧 왜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단 쓰기로 결정한 연후, 작가의 관심은 ‘언제’라는 윤리적 문제로부터 ‘어떻게’, 곧 완벽하게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가 정확히 말하고자 노력해야만 할 무엇에 대해 어떻게 잘못 쓰지 않고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미학적 방법론의 문제로 이동한다.

 

 

3. 새로운 입말, 글쓰기

 

 

박솔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입말의 되살아남이다. 자신이 참여한 여럿의 대화를 녹음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말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대화는 우선 의사소통의 대부분이 실상은 ‘몸짓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대화의 특성, 이에 더하여 참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상호동의에 입각한 논리적 비약과 생략으로 인하여, 심지어 대화의 참여자인 ‘내’가 들을 경우에조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정확하지 않은 것, 나아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곤 한다. 심지어 이 ‘대화’를 글로 적어 남에게 보여준다면, 그것은 대화가 전제하는 암묵적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표현의 막연함, 문법적 부정확성, 생략 등이 어우러져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솔뫼가 선택한 전략, 곧 글투 문어체와 입말 구어체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남들에게 독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입말체를 글쓰기에 도입하는가? 기존의 정형화된 문어체, 구어체가 작가의 느낌과 생각, 삶을 잘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작가란 말과 글에서 자신만의 ‘투’(style)를 찾아가는 자라 할 때, 이는 필연적이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낭독극장의 좌담회에서 작가가 구사하는 말투는 그의 글투와 거의 같았다. 물론 이렇게 작가의 문체와 그의 일상화법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심리주의적 인격주의적 관점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펼치려 하는 자들이라 할 때, 한 작가가 자신의 삶과 느낌, 인식이 배어 있는 자신의 입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언어가 아닌 여기 오늘 나, 우리의 언어. 나의 말은 내게 쉽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분명하다. 이것이 모든 백화(白話)운동의 근거를 구성한다. 나의 느낌과 생각,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이가 내게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박솔뫼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입말을 그대로 자신의 글말로 사용한다.

 

 

4. 생각말, 몸말

 

 

 

또한 박솔뫼의 ‘입말’은 박솔뫼의 생각과 관계 맺고 서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혼자 하는 말을 보통 생각이라 하는데, 아마도 몸 전체의 느낌이 관여되었으며 한 사람이 혼자 하고 혼자 아는 이 생각은 흔히 말이라는 형식 아래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렇게 말로 드러난 생각은 물론, 생각 일반이 아닌, 나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現象)된, 생각이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 안에서, ‘나의 말’이라는 구체적 형식을 빌어 나타난 무엇을 ‘생각말’이라 하자(아니면 ‘마음말’, 또는 우리말의 전통적 의미를 존중하여 몸(=마음+몸)이라는 의미의 ‘몸말’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알게 모르게 말하고 듣는 이 생각말이 내게 늘 정확히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말은 지나가는지 아닌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나를 지나간다. 아니, 내가 생각이, 말이 되어 나를 지나간다. 가령, 데카르트처럼,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을 분리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생각이, 그 말이 아닐까? 말씀과 육체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자기 원인적 실체가 아니라, 가령 말씀이 육화(肉化)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不二, 不異) 않을까? 여하튼, 내 머리를,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몸을 오가는 이 말은 어떤 하나의 기준 아래 통합가능한 동일자(同一者)가 아니다. 이 말, 보다 정확히는 이 말들은, 흔히 하나의 생각이라는 형식 아래, 내가 하고 있다, 또는 하나의 목소리라는 형식 아래 나를 지나간다, 내게 들려온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하나의’ 목소리란 실상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수의 ‘목소리들’일 뿐이다. 이 생각들, 목소리들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질러, 나의 정신과 육체를 가로질러, 나의 마음과 몸을 가로질러, 내게 들려오는 것이다. 아니, 이 목소리들, 이 생각들이 ‘나’이다. 늘 생겨나고 흘러가는 이 목소리들, 생각들이 늘 생겨나고 흘러가는 나, 자아를 만든다. 우리가 저항하고자 하나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목소리들의 다수성(多數性)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이중인격자, 다중인격자들로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차라리 하나의 통일적 실체로 가정되며, 따라서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이 ‘인격’의 일원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의 통일된 실체라고 가정되어 있는 이 ‘인격’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저 이름, 우리를 홀리는 이름,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생각들, 목소리들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인격이란 이 ‘묶일 수 없는’ 목소리들, 생각들을 ‘묶기 위해’, 사후적으로 그리고 방편적으로, 생겨난 하나의 인식론적 도구, 규합 개념에 불과하다. 일원론적인 정상적인 불변의 통일된 인격이 허구이며, 혼돈된 비정상적인 늘 변화하는 분열된 ‘그 무엇인가’만이 존재한다. 랭보의 말처럼, 그리고 이후의 해석들처럼, 나란 다른 것, 붙잡히지 않는 것, 하나의 타자이다(Je est un autre).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와 불교는 만난다.

 

 

5. 엄마말, 엄마나라말, 나의 말

 

 

물론 내게 들려오는 이 말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특정한 나라의 말, 곧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말들이 나의 모국어(母國語)임을 의미하나, 이러한 규정은 이미 ‘국’(國), 보다 정확히는 서구어 nation을 번역한 메이지(明治) 신한어(新漢語)로서의 ‘국가(國家)’, ‘국민(國民)’, ‘국어(國語)’라는 삼위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근대적 관념이다. 더구나 한 사람이 반드시 한 나라의 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김용옥이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엄마나라의 말(母國語)’과 ‘엄마말(母語)’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구분을 따르자면 차라리 우리는 적어도 처음 어린시절에는 엄마말을 사용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앞서 언급한 국가ㆍ국민ㆍ국어라는 삼위일체와 분리 불가능한 학교(국민[國民]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모국어, 곧 ‘표준어’를 배우게 된다. 표준어란 곧 한 언어 공동체에 의해 규정된 기준이며, 이를 확정하는 행위 자체가 다름 아닌 한 사회 언어 사용자들의 이른바 ‘바른 말, 옳은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을 구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언어의 사회성은 이렇게 언어의 정치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의 과정, 달리 말하면 사회적 기준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내게 안착된 또는 나를 언어의 주체로 구성하는, 최초의 엄마말, 또는 이후의 엄마나라말은 글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준다. 자, 사람이 말을 만들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 그럴까? 차라리, 푸코 혹은 바디우의 말대로, 사람과 말은 동시적 (비)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연숙이 ‘근대 일본’이라는 국가와 언어의 동시적 탄생 과정을 다룬 『국어라는 사상』에서 탁월하게 밝힌 것처럼, 국어가, 언어가 사상(思想, 생각하고 상상한 것), 곧 생각이다. 국어와 언어는 사상의 표현 또는 그 수단에 그치지 않는, 사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 나름으로 옳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이야말로 언어를 실어 나르는 배(船)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촘스키의 지적대로, 이 ‘나’는 언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운 유한한 언어로 매번의 상황에 적합한 무한한 나만의 상황적 변양(變樣)을 만든다.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이 배운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은 그녀가 그 언어를 ‘변형’시키는 과정과 구분 불가능한 사실상 동일한 과정임을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 말을 한다, 그런데 나를 구성해준 이 말이 때로 나를 가둔다. 늘 변해가고 변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 나를 불변하는 관념 속에 고정된 언어가 늘 정확히 드러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도, 엄마나라의 말도, 내가, 곧 내 말이 아니다. 이리하여 배 자체이자, 선장이자, 승객이자, 선주인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 없는, 이제 와야 할, 자신만의 말과 글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이 어떤 이들을 작가라 부른다.

 

 

 

6. 들어맞음/어긋남, 이접(離接)

 

 

때로, 내 말, 내 글이 나를 가둔다, 버린다, 죽인다. 내가 하는, 나를 배신하는, 나를 소외시키는 이 말, 이 글이 나를 잘 드러내도록, 나를 살리도록, 나는 노동을 한다. 글쓰기라 불리는 이 노동은 내 진정한 뜻과 어긋나는 이 말들을 나의 생각말, 몸말에 맞추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박솔뫼 글쓰기의 참다운 의미는 작가가 이런 ‘글로써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을 재현(再現)한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서 인용한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 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라는 말,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글을 잘 썼다,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 등은 모두 작가가 갖고 있는 언어의 이러한 근본적 한계를 자기 글쓰기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즐거운 인식’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모든 참다운 작가처럼, 박솔뫼는 기존의 말들을 자신의 생각 안에서, 몸 안에서, 컴퓨터 안에서 새로이 조합하여, 자신의 말을 만든다. 박솔뫼에게 글쓰기 행위는 문학의 언어를 만드는 행위이자, ‘나’를, ‘우리’를, 나와 우리의 말을, 우리나라말을 새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 말 만들기의 행위는 기존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제 말과 사물, 말과 삶은, 잘 들어맞음, 연접(連接)이 아닌, 어긋남, 이접(離接)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연접/이접’ 또는 ‘연접/이접의 이접’은 기존의 것을 인정하고 사용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파괴한다. 이 이접은 ‘잇기(移接)/잊기’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있음’, 곧 생성의 글쓰기가 된다. 특히 의식적(意識的) 주체가 갖는 모든 종류의 ‘일원성’에 대한 파괴를 주된 기능으로 갖는 이 생성적/파괴적 이접의 글쓰기는, 따라서, 기존의 논리에서 바라볼 경우, 이해되지 않는 것, 딱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와 구분, 인식의 문제점을 충분히 기억하며 글을 쓰는 박솔뫼 글의 가치는 그것의,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이해되지 않음, 나를 따라 말하자면, 기존 장르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음,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식별불가능성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솔뫼를 역사가 없는 개인의, 파편화된, 체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가벼운 글쓰기라는 식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모두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가령, 박솔뫼의 글쓰기를 사(私, private)소설의 계보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일견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사소설이란, 가령 공(公, public)소설이 아닌 어떤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칸트, 헤겔 이래의 철학적 보편/개별의 구분에 대응하는 문학적 구분이며, 박솔뫼의 소설이 들려주는 이 목소리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은 곳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내용/형식의 구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서구 근대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무반성적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가상의 공간인 해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은 물론, 일본 츠나미와 원전사고, 가상의 고리원전 폭발 사고 등 박솔뫼의 소설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과 형식의 어느 측면에서도 이른바 개인적, 사적인, 몰역사적 인식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박솔뫼 글쓰기의 가치는 오히려 이러한 보편/특수, 공/사, 내용/형식, 의식/무의식, 사회/개인 사이에 설정된 기존의 구분 자체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구분을 제시하는 행위에 있다.

 

7. 이름 - 봄과 보임

 

 

이 생성적이고 파괴적인 시바 여신의 그것과도 같은 박솔뫼의 글쓰기는 결국 글 쓰는 자 자신의 의식적 일관성, 플롯상의 논리적 정합성, 등장인물 또는 발화자가 보여주는 말투와 성격에 있어서의 일관성, 기존 한국어 문법 구조에 있어 발화자의 문장 구조 및 이렇게 발화된 언표가 갖는 의미의 일의성 따위를―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그들 사이에서 인정/파괴의 놀이, 합리성/비합리성, 정합성/비정합성의 놀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이 모든 말들은 개념으로 고정된 언어이며,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으므로,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조건이므로. 따라서, 모든 글쓰기가 소설이며, 삶의 모든 행동이 연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란 사실과 허구, 참다운 진실과 근본적 거짓말,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 사이를 넘나들며 놀이를 하는 자이다. 수용, 계승이든, 파괴, 창조이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전통과 놀이를 하는 자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문학이란, 가령 철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대가 스스로의 ‘보편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작가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자기 시대의 보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자, 아직 이름 없는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여주는 자, 그것에 목소리와 행동을 부여해주는 자, 이를 허구/현실의 구체적 상황 속에, 우리의 마음과 몸 위에, 펼쳐놓는 자이다.

 

 

이름은 우리를 홀린다(spelling spells). 우리는 이름 없는 자를 홀릴 수도, 그와 사랑에 빠질 수도 없다. 나는 그를, 나를, 부르는 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름 붙여준 것, 자신이 부른 것, 곧 자신이 홀린 언어에, 이제 다시금, 홀리게 될 것이다. 작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무얼 부르지?”

 

 

 

 

-

 

 

 

 

* 산울림소극장은 201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연출로 ‘단편소설 입체낭독 극장 2014’라는 제명 아래 박솔뫼의 세 작품, 「우리는 매일 오후에」(김한내 연출),「도미의 나라」(성기웅 연출),「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강민백 연출)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의식의 분열 및 비현실성을 화자의 분리, 다양한 매체의 사용, 관객의 참여 등과 잘 결합시킨 실험적이면서도 즐거운, 좋은 공연이었다. 나는 27일 공연 이후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 무대 위의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 겸 사회자로 참여했다. 이 글은 이를 계기로 박솔뫼 글쓰기의 다양한 측면을 짚어본 글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는 잡지 <f>에 실린 글의 최종고이다.

 

* 초고

 

http://naoshimaisland.blogspot.kr/2014/06/blog-post_22.html

 


2014. 6. 22.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에 대하여 [초고]


 
 
 


 
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과 연극에 대한 단상


 
“우리는 신들에게, 또는 우리가 막 유혹한 사람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 미셸 푸코

 
 
 
1. 말과 삶
 
 
 
박솔뫼 소설의 등장인물들, 혹은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무너지는’, ‘어긋나 있는’, ‘한층 쑥 내려가’고 있는 것은 박솔뫼에 의해 다름 아닌 ‘무언가’ 또는 ‘뭔가’로 기술되는 그 무엇이다. 이 ‘한축이 무너지는’, ‘무언가 어긋나있는’,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것은 정확한 용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작가의 어떤 느낌이다. 이 ‘느낌’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정확히 말해질 수 없는 것,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언어가 발견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새롭게 시작하려는 모든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솔뫼에게는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다. 따라서 박솔뫼는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박솔뫼는 단순히 자신의 말을 찾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말과 그 말이 놓이게 될 상황, 말과 사물, 말과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
 
 
2. 시중(時中), 말의 때와 침묵의 때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나아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건 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건, 정확히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의 경계를 정확히 알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앎에 그치지 않는 실천의 문제가 된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듯, 가령 침묵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다. 이는 어떤 일반화된 언어로도 결코 고정시킬 수없는 구체적 상황의 문제, 미학적인만큼이나 동시에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이다. 이 실천적 상황의 문제는 언제가 침묵해야 할 때이며 언제가 말해야 할 때인가를 정확히 아는 상황판단 곧 인식의 문제, 또 이러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해줄 언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나아가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 가의 문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를 어떻게 곧 이렇게 혹은 저렇게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곧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가 놓이는 상황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박솔뫼의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결국 박솔뫼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이러한 인식, 언어, 글쓰기와 상황의 문제에 바쳐질 것임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이는 언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 나아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 곧 왜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단 쓰기로 결정한 연후, 작가의 관심은 ‘언제’라는 윤리적 문제로부터 ‘어떻게’, 곧 완벽하게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가 정확히 말하고자 노력해야만 할 무엇에 대해 어떻게 잘못 쓰지 않고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미학적 방법론의 문제로 이동한다.
 
 
3. 새로운 입말, 글쓰기
 
 
 
박솔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입말의 되살아남이다. 자신이 참여한 여럿의 대화를 녹음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말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대화는 우선 의사소통의 대부분이 실상은 ‘몸짓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대화의 특성, 더하여 참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상호동의에 입각한 논리적 비약과 생략으로 인하여, 심지어 대화의 참여자인 ‘내’가 들을 경우에조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정확하지 않은 것, 나아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곤 한다. 심지어 이 ‘대화’를 글로 적어 남에게 보여준다면, 그것은 대화가 전제하는 암묵적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표현의 막연함, 문법적 부정확성, 생략 등이 어우러져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솔뫼가 선택한 전략, 곧 글투 문어체와 입말 구어체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남들에게 독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입말체를 글쓰기에 도입하는가? 기존의 정형화된 문어체, 구어체가 작가의 느낌과 생각, 삶을 잘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작가란 말과 글에서 자신만의 ‘투’(style)를 찾아가는 자라 할 때, 이는 필연적이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낭독극장의 좌담회에서 작가가 구사하는 말투는 그의 글투와 거의 같았다. 물론 이렇게 작가의 문체와 그의 일상화법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심리주의적 인격주의적 관점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펼치려하는 자들이라 할 때, 한 작가가 자신의 삶과 느낌, 인식이 배어있는 자신의 입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언어가 아닌 여기 오늘 나, 우리의 언어. 나의 말은 내게 쉽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분명하다. 이것이 모든 백화(白話)운동의 근거를 구성한다. 나의 느낌과 생각,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이가 내게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박솔뫼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입말을 그대로 자신의 글말로 사용한다.
 
 
4. 생각말, 몸말
 
 
또한 박솔뫼의 ‘입말’은 박솔뫼의 생각과 관계 맺고 서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혼자 하고 말을 보통 생각이라 하는데, 아마도 몸 전체의 느낌이 관여되었으며 한 사람이 혼자 하고 혼자 아는 이 생각은 흔히 말이라는 형식 아래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렇게 말로 드러난 생각은 물론, 생각 일반이 아닌, 나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난(現象된) 생각이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 안에서, ‘나의 말’이라는 구체적 형식을 빌어 나타난 무엇을 ‘생각말’이라 하자(아니면 ‘마음말’, 또는 우리말의 전통적 의미를 존중하여 몸(=마음+몸)이라는 의미의 ‘몸말’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알게 모르고 말하고 듣는 이 생각말이 내게 늘 정확히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말은 지나가는지 아닌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나를 지나간다. 아니, 내가 생각이, 말이 되어 나를 지나간다. 가령, 데카르트처럼,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을 분리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생각이, 그 말이 아닐까? 말씀과 육체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작기 원인적 실체가 아니라, 가령 말씀이 육화(肉化)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不二, 不異) 않을까? 여하튼, 내 머리를,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몸을 오가는 이 말은 어떤 하나의 기준 아래 통합가능한 동일자(同一者)가 아니다. 이 말, 보다 정확히는 이 말들은 흔히 하나의 생각이라는 형식 아래 내가 하고 있다, 또는 하나의 목소리라는 형식 아래 나를 지나간다, 내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 ‘하나의’ 목소리는 사실은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수의 ‘목소리들’이다. 이 목소리들은 이른바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질러, 나의 정신과 육체를 가로질러, 나의 마음과 몸을 가로질러, 들려온다.
 
 
5. 엄마말, 엄마나라말, 나의 말
 
 
물론 내게 들려오는 이 말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나라말, 곧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는데, 이 나의 말은 이 말이 나의 모국어(母國語)임을 의미하나, 이러한 규정은 이미 ‘국’(國), 보다 정확히는 서구어 nation을 번역한 메이지(明治) 신한어(新漢語)로서의 ‘국가’(國家), ‘국민’(國民), ‘국어’(國語)라는 삼위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근대적 관념이다. 더구나 한 사람이 반드시 한 나라의 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김용옥이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엄마나라의 말’(母國語)과 ‘엄마말’(母語)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구분을 따르자면 차라리 우리는 적어도 처음 어린시절에는 엄마말을 사용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앞서 언급한 국가ㆍ국민ㆍ국어라는 삼위일체와 분리 불가능한 학교(國民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모국어, 곧 ‘표준어’를 배우게 된다. 표준어란 곧 한 언어 공동체에 의해 규정된 기준이며, 이를 확정하는 행위 자체가 다름 아닌 한 사회 언어 사용자들의 이른바 ‘바른 말, 옳은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을 구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언어의 사회성은 이렇게 언어의 정치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의 과정, 달리 말하면 사회적 기준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내게 안착된 또는 나를 언어의 주체로 구성하는, 최초의 엄마말 혹은 이후의 엄마나라말은 글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준다, 또는 나 자체이다. 자, 사람이 말을 만들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 그럴까? 차라리, 푸코 혹은 바디우의 말대로, 사람과 말은 동시적 (비)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연숙이 ‘근대 일본’이라는 국가와 언어의 동시적 탄생 과정을 다룬 『국어라는 사상』에서 탁월하게 밝힌 것처럼, 국어가, 언어가 사상(思想, 생각하고 상상한 것), 곧 생각이다. 국어와 언어는 사상의 표현 또는 그 수단에 그치지 않는, 사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 나름으로 옳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이야말로 언어를 실어 나르는 배(船)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촘스키의 지적대로, 이 ‘나’는 언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운 유한한 언어로 매번의 상황에 적합한 무한한 나만의 상황적 변양(變樣)을 만든다.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이 배운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은 그녀가 그 언어를 ‘변형’시키는 과정과 구분 불가능한 사실상 동일한 과정임을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 말을 한다, 그런데 나를 구성해준 이 말이 때로 가둔다. 늘 변해가고 변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 나를 불변하는 관념 속에 고정된 언어가 늘 정확히 드러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도, 엄마나라의 말도, 내가, 곧 내 말이 아니다. 이리하여 배 자체이자, 선장이자, 승객이자, 선주인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 없는, 이제 와야 할, 자신만의 말과 글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이 어떤 이들을 작가라 부른다.
 
 
6. 들어맞음/어긋남, 이접(離接)
 
 
때로, 내 말, 내 글이 나를 가둔다, 버린다, 죽인다. 내가 하는, 나를 배신하는, 나를 소외시키는 이 말, 이 글이 나를 잘 드러내도록, 나를 살리도록, 나는 노동을 한다. 글쓰기라 불리는 이 노동은 내 진정한 뜻한 어긋나는 이 말들을 나의 생각말, 몸말에 맞추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박솔뫼 글쓰기의 참다운 의미는 작가가 이런 ‘글로써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을 재현(再現)한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서 인용한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라는 말,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글을 잘 썼다,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 등은 모두 작가가 갖고 있는 언어의 이러한 근본적 한계를 자기 글쓰기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즐거운 인식’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모든 참다운 작가처럼, 박솔뫼는 기존의 말들을 자신의 생각 안에서, 몸 안에서, 컴퓨터 안에서 새로이 조합하여, 자신의 말을 만든다. 박솔뫼에게 글쓰기 행위는 문학의 언어를 만드는 행위이자, ‘나’를, ‘우리’를, 나와 우리의 말을, 우리나라말을 새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 말만들기의 행위는 기존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 말과 사물, 말과 삶은, 이제, 들어맞음, 연접(連接)이 아닌, 어긋남, 이접(離接)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연접/이접의 이접’은 기존의 것을 인정하고 사용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파괴한다. 이 이접은 잇기(移接)/잊기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있음, 곧 생성의 글쓰기가 된다. 특히 의식적(意識的) 주체가 갖는 모든 종류의 ‘일원성’에 대한 파괴를 주된 기능으로 갖는 이 생성적/파괴적 이접의 글쓰기는, 따라서, 기존의 논리에서 바라볼 경우, 이해되지 않는 것, 딱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와 구분, 인식의 문제점을 충분히 기억하며 글을 쓰는 박솔뫼 글의 가치는 그것의,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이해되지 않음, 나를 따라 말하자면, 기존 장르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음,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식별불가능성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솔뫼를 역사가 없는 개인의, 파편화된, 체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가벼운 글쓰기라는 식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모두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가령, 박솔뫼의 글쓰기를 사(私, private)소설의 계보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일견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사소설이란, 가령 공(公, public)소설이 아닌 어떤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칸트, 헤겔 이래의 철학적 보편/개별의 구분에 대응하는 문학적 구분이며, 박솔뫼의 소설이 들려주는 이 목소리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은 곳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내용/형식의 구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서구 근대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무반성적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가상의 공간인 해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은 물론, 일본 츠나미와 원전사고, 가상의 고리원전 폭발 사고 등 박솔뫼의 소설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과 형식의 어느 측면에서도 이른바 개인적, 사적인, 몰역사적 인식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박솔뫼 글쓰기의 가치는 오히려 이러한 보편/특수, 공/사, 내용/형식, 의식/무의식, 역사/, 사회/개인 사이에 설정된 기존의 구분 자체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구분을 제시하는 행위에 있다.
 
 
7. 이름 - 봄과 보임
 
이 생성적이고 파괴적인 시바 여신의 그것과도 같은 박솔뫼의 글쓰기는 결국 글 쓰는 자 자신의 의식적 일관성, 플롯상의 논리적 정합성, 등장인물 또는 발화자가 보여주는 말투와 성격에 있어서의 일관성, 기존 한국어 문법 구조에 있어 발화자의 문장 구조 및 이렇게 발화된 언표가 갖는 의미의 일의성 따위를 -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 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그들 사이에서 인정/파괴의 놀이, 합리성/비합리성, 정합성/비정합성의 놀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이 모든 말들은 개념으로 고정된 언어이며,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으므로,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조건이므로. 따라서, 모든 글쓰기가 소설이며, 삶의 모든 행동이 연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란 사실과 허구, 참다운 진실과 근본적 거짓말,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 사이를 넘나들며 놀이를 하는 자이다. 수용, 계승이든, 파괴, 창조이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전통과 놀이를 하는 자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문학이란, 가령 철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대가 스스로의 ‘보편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작가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자기 시대의 보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자, 아직 이름 없는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여주는 자, 그것에 목소리와 행동을 부여해주는 자, 이를을 허구/현실의 구체적 상황 속에, 우리의 마음과 몸 위에, 펼쳐놓는 자이다.
 
이름은 우리를 홀린다(spelling spells). 우리는 이름 없는 자를 홀릴 수도, 그와 사랑에 빠질 수도 없다. 나는 그를, 나를, 부르는 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름 붙여준 것, 자신이 부른 것, 곧 자신이 홀린 언어에, 이제 다시금, 홀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무얼 부르지?”


 
 
 
 
 
 

* 산울림소극장은 2014년 4월 23-27일까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연출로 ‘단편소설 입체낭독 극장 2014’라는 제명 아래 박솔뫼의 세 작품, 「우리는 매일 오후에」(김한내 연출),「도미의 나라」(성기웅 연출),「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강민백)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의식의 분열 및 비현실성을 화자의 분리, 다양한 매체의 사용, 관객의 참여 등과 잘 결합시킨 실험적이면서도 즐거운 좋은 공연이었다. 나는 27일 공연 이후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 - 무대 위의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 겸 사회자로 참여했다. 이 글은 이를 계기로 박솔뫼 글쓰기의 다양한 측면을 짚어본 글이다.
 

2014. 5. 15.

la part maudite


 
 
 
 
 
 






 
 
 
 
 
* 「소모의 개념」(1933) - 『저주의 몫』
 
 
“인간의 행위가 생산(production)과 보존(consommation)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 첫째, 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 둘째, 또 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 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dépense)라고 부르겠다.”(32)
 
 
“고전경제학에서는 원시적 교환이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고전경제학에서는 교환과 같은 획득의 수단이 획득의 욕구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파괴와 파멸의 욕구를 그 근원에 가지고 있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고대의 교환 형태는 물물 교환의 인위적 관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형태는 모스에 의해 미국 북서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를 통해 확인되었다.”(36)
 
 
*** 『저주의 몫』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오늘 출판하게 된) 책에서는 정치 경제적 사실들을 기존의 전문적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고찰하였고, 나의 관점은 곡물의 판매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 인간의 희생, 교회의 건축, 보석의 선물 등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갖는다. [...] 요컨대 나는 부의 ‘소모’(소비)를 생산과 관련해서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일반경제’(économie générale)의 원칙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 이 최초의 에세이는 개별적인 원리들을 벗어나서 지상의 에너지와 충동을 고찰하는 각각의 원리 - 지구과학에서 출발해서 사회학, 역사학, 생물학을 거쳐 정치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의 원리 - 가 제기하는 문제들의 열쇠가 되는 문제, 여태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초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리학,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조차도 경제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예술, 문학,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연구하는 운동과 관련이 있다. 다름아닌 과잉 에너지의 운동, 삶의 비등(沸騰, effervescence)이 그것이다. [...] 내가 고찰하는 비등, 지구를 부추기는 비등은 또한 나의 비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연구 대상은 연구 주체와, 더 정확히 말해서 ‘비등점의 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51-53)
 
 
“생물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그에 반하는, ‘사치’이다.”(54)
 
 
“총체적으로 산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사회 갈등과 세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총체적으로 발전하는 산업 경제의 일반적 전제를 연구할 때만, 한마디로 인간의 총체적 업적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만 파악이 가능하다.”(60)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한 산업의 성장을 합리적으로 방출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든지, 에너지의 축적이 결코 불가능한 비생산적 또는 낭비의 방법을 통해서든지 생산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가 지체 없이 밝히고 싶은 것은, 성장의 발산이 경제 원칙들의 전복-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럴의 전복-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 사상과 모럴의 전복은 제한된 경제 관점들로부터 일반적 경제의 관점들로 넘어갈 때만이 가능하다.”(66)
 
 
“원칙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삶을 유지해주는 활동(기능적인 활동, 동물에게 필요불가결한 근육활동, 먹이찾기 등)에 필요한 양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며 그 초과 에너지 덕분에 성장이나 번식도 가능하다. 식물이란 동물에게 초과분이 없었다면 성장도 번식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하는 생체화학작용은 과잉의 수익자이자 창조자인데, 이는 생명체의 대원칙이다.”(67)
 
 
2. 성장의 한계. 우선 삶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한 가지는 ‘태양 에너지는 풍요와 발전의 원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이 없이 준다. 천체물리학이 태양의 사치를 측정해내기 전부터 인간들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곡물이 익는 것도 태양 덕분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받지 않고 주는 사람을 태양의 광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지점에서 도덕적 판단의 두 가지 근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옛날에는 가치를 영예로운 비생산에서 찾았던 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가치를 생산에 결부한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은 에너지의 소모보다는 획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날의 명예란 유용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결과에 의해 정당화될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감정이 현실적 판단에 의해 -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해 - 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고대의 감정은 특히 부르주아 세계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의 반발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힘을 잃는 것은 오직 고전적인 경제 개념 속에서이다. / 태양 광선은 지표면에 에너지의 과잉을 초래해한다. 그러나 일단 생물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여서 그 에너지를 할 수 있는 한 남은 공간에 축적한다. 그런 다음 생물체는 그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낭비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발산에 앞서 생물체는 성장을 위해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한다.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때만 낭비에 자리를 내준다. 진정한 잉여는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이 일단 제한을 받을 때 시작된다. / 개인이나 집단은 일차적으로 다른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유일한 한계는 다름아닌 지구(정확히 말해서 생물체의 접근이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생물권)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다른 개인이나 그룹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살아있는 자연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총체적 성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지구라는 방대한 공간이다.”(69-70)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순간 행위의 유용성utilité을 고찰해야 한다. 유용성은 유지, 성장 또는 이익을 내포한다. 물론 성장에 과잉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는 그 점을 배제한다. 가능한 성장이 멈췄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死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박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불유쾌한 파멸보다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71)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성장은 없고 단지 모든 형태의 에너지의 사치스러운 낭비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사실 주로 광적 분출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사건은 사치의 발전이고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생명 형태들의 생산이다.”(74)
 
 
“성(sexualité)은 애초부터 욕심 사나운 자기만의 성장과는 다르다. 성행위는 종의 차원에서 보면 성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사치이다. [...] 동물에게 생식행위는 어느 순간 가능성의 극단에 이른 에너지의 원천을 갑작스럽게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기회가 된다. 그 낭비는 종의 성장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며 순간적으로 보면 개인의 실행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경우 그 소비는 파괴의 모든 가능한 형태들을 수반하며 재산의 탕진 - 육체의 탕진 - 을 부르고 최종적으로 죽음이라는 비합리적 사치 또는 과잉과 결합한다.”(76)
 
 
* 스페인 작가였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Bernardino de Sahagún, 1500-1590)에게 어떤 늙은 아즈텍인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87).
 
 
“내밀한 세계는 마치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명철한 의식과 도취의 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와 대립한다. 정상은 대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성은 대상의 확인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고, 명철성은 대상들에 대한 뚜렷한 인식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반면 주체의 세계는 어둠이다. 한 없이 의심스럽고 유동적인 이 어둠은 이성이 잠드는 사이를 기다려 괴물들을 잉태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가정한다. 즉 광기가 아니면 현실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 오직 현재에만 열중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고. 주체는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떠나 현실적 질서의 사물들에 종속된다. 주체는 노동에 구속되는 순간 소진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의 어떤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만을 걱정한다면 무슨 이유로 비축에 힘쓰겠는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일순간에 무질서하게 탕진할 수 있다. 내일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무익한 소모는 나를 즐겁게 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물이 내밀한 질서로 회귀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소모이다. 소모의 세계라고 폭력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제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희생제의에서 문제는, 여전히 파괴를 끌어들이되 제물 이외의 나머지를 치명적인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희생 제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위험에 빠져있다. 그러나 일정한 제의의 형태는 통상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 희생 제의는 공동의 작업 체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밀성을 되찾게 해주는 광적 행위이다. 폭력은 희생 제의의 원칙이다. 그러나 작업은 폭력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희생 제의의 폭력은 여전히 공공의 사물들을 보존하거나 통합하려는 우려에 대해 종속적이다. 개인들은 광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지 못하게 하는 그 광란은 그들을 다시 속세적 시간의 작업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그것은 부의 무한한 발전을 목적으로 한 행위라거나 과잉의 힘을 흡수하는 이익 추구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업은 유지만을 염두에 둔다. 작업은 축제(풍성한 작업은 축제를 부르며 축제는 다시 풍성한 작업의 기원이 된다)의 한계를 사전에 결정짓는다. 그러나 파멸을 모면하는 것은 공동체일 뿐이다. 제물은 여전히 폭력에 내맡겨진다.”(100-101)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제물은 부의 일부로서 잉여의 부분이다. 그리고 제물은 아무런 이익 없이 소모되기 위하여, 즉 영원히 파괴되기 위하여 유용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제물로 뽑힌 순간 제물은 폭력적인 소모에 약속된 저주의 몫이다. 그러나 저주는 제물을 사물의 질서에서 끌어내 그 빛이 살아있는 존재들의 내밀성, 고뇌, 심연을 비추게 한다. / 제물을 둘러싸고 우려가 확산되는데, 그 우려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사물이기 때문에 제물을 사물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면 파괴를 통해 제물의 유용성, 사물성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제물이 바쳐지는 순간 봉헌과 죽음은 분리되며, 제물은 제의 집행자의 소모적 제의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 현실적 [사물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제물뿐이다. 제물만이 축제의 극단적 충동에 온통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제의 집행자는 신적 특성을 띠더라도 주저하면서 그럴 뿐이다. 그의 내부에 무겁게 남은 미래가 그를 짓누르는 것이다. [...] 제의에서는 고뇌와 광란이 뒤섞인다. 광란이 고뇌보다 더 강한데, 조건이 있다. 제의의 결과가 바깥의 죄에, 즉 밖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제의 집행자는 자신의 재산이 될 수도 있었을 제물을 거부해야 한다. / 그러나 엄격하지 않다고 해서 의식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 경계를 넘어서는 과잉, 소모이며 그것만이 신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은 이러한 소모를 대가로 타락에서 벗어났고, 또한 현실적 질서의 냉혹한 타산과 인색함이 인간 내부에 끌어들인 사물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다.”(101-103)


이슬람 사회, 티벳 사회.
 
 
“경제의 일반법칙. 한 사회는 총체적으로 보면 항상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생산하므로, 사회는 잉여를 갖고 있다. 어떤 사회가 잉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태가 결정된다. 잉여는 사회적 동요의 원인이고, 구조의 변화, 모든 역사적 변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잉여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은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어떤 성장이든지 일정한 성장 뒤에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149)
 
 
산업사회. 부르주아의 세계. 소련의 산업화. 마셜 플랜.
 
 
10. 부의 궁극적 사용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 [...] 자아의식은 본질적으로 충실한 내밀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확보는 속임수이다. 의생제의는 신성한 물건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물건은 내밀성을 외재화한다. 말하자면 신성한 물건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과잉 성장에 맡겨져 있다. 대개 인간들은 생존의 목적이나 존재 이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장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에 매몰된 나머지 존재는 때로 자율성을 잃고 만다. 존재는 이따금 자원의 증가 때문에 미래에 있을 어떤 것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실 성장은 자원이 소비되는 순간과 관련시켜볼 때만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확인하기 어렵다. 의식은 그런 순간과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의식은 순전한 소비와는 달리 무가 아닌 어떤 것,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순간과 대립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식이란 성장(어떤 것의 획득)이 소비로 끝나는 순간의 결정적인 의미에 대한 의식이며, 다른 아무것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의식이다. / 명철성이 우위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완성되면 사회적 실존이 제자리를 찾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제자리를 찾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란 어떤 의미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변화와 비교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일은 최종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가 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트루먼이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은밀하고도 궁극적인 최종 목적에 맞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분명 허망한 것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정신은 낡은 목적론 대신 침묵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232-234)
 
 
 

2014. 4. 17.

소립자

 
 
 





"돌이켜 보면, 소년 브뤼노의 마음속에는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59쪽)
 

2013. 3. 16.

제인 에어 2





 
 
 
 
Charlotte Brontë (1816 –1855)
 









 




"그러나 젊은처럼 외고집을 부리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무경험처럼 맹목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13)



"저를 좋은 부동산 투기나 물색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아시나요?"(49)



"나는 이 조그마한 한 사람의 영국 아가씨를 영양(羚羊)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고 극락의 천녀(天女)처럼 아름다운 터키 황제의 후궁들 전부하고도 바꾸지 않겠어.! / 터키 후궁의 비유가 또 내 비위를 건드렸다. 전 터키 후궁의 대역 같은 건 절대로 안 하겠어요. 그러니 결코 그런 것과 똑같이는 보지 마세요."(64)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오늘처럼 그렇게 사납고 거친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음울하고 신음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 방에 들어와서 비어 있는 의자와 불기 없는 난로를 보자 소름이 끼쳤어요. 그 뒤 얼마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어요. 무언지 모르게 꺼림칙한 내심의 설렘이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바람은 점차로 거세지고 제 귀에는 서글픈 낮은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것같이 들렸어요. 그러나 그게 집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바람이 문득문득 숨을 죽일 적마다 그 소리는 분명하지 않게 구슬피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전 그게 어디 먼 곳에서 개가 짖고 있는 소리라고 판단했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가 멎자 저는 마음이 한결 놓였어요. 잠이 들고서도 꿈속에서 바람 부는 캄캄한 밤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가르고 있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이상하고도 서운한 느낌을 경험했어요. 첫잠이 들면서 줄곧 저는 꿈속에서 꼬불꼬불한 낯선 길을 걷고 있었어요.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비가 저를 후려치고 있었어요. 저는 조그만 어린애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약하디 약한 어린애였어요. 그 어린애는 싸늘한 제 팔에 안겨 떨면서 제 귀에다 대고 가련한 목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저보다 훨씬 앞서서 가신 걸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쫓아가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어요. 그리고 당신을 부르고 가디려달라고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온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고 목소리도 말이 되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자꾸만 멀리멀리 가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86-87)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법이나 원칙은 유혹이 없을 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과 같이 육체와 정신이 그 준엄성에 반기를 들었을 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과 원칙은 엄정한 것이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개인의 편의를 위해 침범되어도 좋은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들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내가 이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그건 내 정신이 이상해진 탓이다. 아주 미쳐서, 혈관은 불 같이 달아오르고 심장은 박동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빨리 뛰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전부터 품어온 의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결심뿐이다. 나는 거기에 꿋꿋이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다."(160)





"이렇게 말하면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농민은 유럽의 어떤 나라의 농민보다도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가장 예의 바르고 가장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프랑스나 독일의 농촌 부녀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내가 가르친 모턴의 소녀들과 비교하면 무지하고 조야하고 어리석어 보였다."(301)




"그녀가 자라남에 따라, 건전한 영국 교육은 그녀의 프랑스적 결점을 많이 교정해 주었다."(423)




***





1권을 읽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2권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녀와 이 소설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에, 대영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것이 보인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처럼, 카뮈의 모든 소설처럼.


그리고 제인 에어(사실은 샤를로트 브론테) 성격의 결점이 보인다. 물론 치명적인 결점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전통 도덕, 영국 성공회 목사의 딸인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쓴 사람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중세인이다. 그녀는, 니체의 말대로, '낙타'인 것이다.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소설적으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특히 그녀의 - 아마도 여성만이 쓸 수 있을(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상하게 여성 화자(話者)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좋았다) -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에 대한 간절한 묘사'는 너무도 섬세하다. 아름답다. 그녀가 서른 아홉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느낌으로 남는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1846년에 쓰여 18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국역본에 근대 혹은 현대라는 번역어가 대략 4-5회(1권 175, 2권 45, 229, 264) 나오는데, 원래 용어가 무엇이었는지 원문을 대조해 확인해 보아야 겠다.













2013. 3. 5.

두두




 
 
 
 
 
 
***
 
 
 
 

 
 
그대와 산
- 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아이와 강
 
 
 
아이 하나 있습니다
강가에
 
 
아이 앞에는 강
아이 뒤에는 길
 
 
 
 
 
***
 
 
 
"제발 내 시 속에 와서 머리를 들이밀고 무엇인가를 찾지 마라. 내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것은 없다. 이우환 식으로 말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읽으라. 어떤 느낌을 주거나 사유케 하는 게 있다면 그곳의 존재가 참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현상이 참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길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참되다)의 세계이다. 모든 존재가 참이 아니라면 그대도 나도 참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시는 의미를 채운다. 의미는 가득 채울수록 좋다.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그러니까 바닥까지 다 비운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한다.

원천적으로 주관의 개입 없는 시 쓰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관의 개입 없는 시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모든 시에서의 주관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날이미지시에도 주관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 주관은 현상에 충실한 현상의 의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날이미지시의 주관은 현상화된 주관이며 날이미지시는 주관까지도 현상화하는 시다.

날이미지시를 읽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존재의 편에 서라. 그리고 시 속의 현상을 몽상하라. 날이미지의 시 세계는 돈오의 세계가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환유로 시를 쓰고 있지 않다. 환유로 시를 쓰고 있지 않고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 즉 환유적 언어 체계로 쓰고 있다. 환유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의 변두리에는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끝없이 투명해지고자 하는 어떤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것을 비우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두두시도 물물전진을 곁에 두고 있으랴."(뒤표지, 시인의 유고)
 
 
 
 
 
 
 
 

2013. 2. 28.

시인이 뽑은 좋은 시집들




* 아래는 제가 좋아하는 문학평론가 김익균 선생님께 부탁드려 받은
우리나라 좋은 시인, 시집 목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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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결과는 그때그때 다르니까 대략 경향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열 명 정도는 전집을 읽는 게 좋겠죠.



* 문학사 최고의 시집 설문조사(1위 10위) (2012년 『시인세계』)
1위 김소월 『진달래꽃』(1925년)
2위 서정주 『화사집』(1941년)
3위 백석 『사슴』(1936년)
4위 한용운 『님의 침묵』(1926년)
5위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
6위 정지용, 『정지용시집』(1935년)
7위 이상, 『이상선집』(1956년)
8위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959년)
9위 임화, 『현해탄』(1938년)
10위 이육사, 『육사시집』(1946년)

전집을 읽어 주면 좋은 시집으로
임화, 김영랑, 이용악, 오장환, 김춘수, 김종삼, 신동엽 등

* 그 외의 추천 시집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년)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
 
 
신경림 『농무』(1973년)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년)
박노해, 『노동의 새벽』(1984년)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1988년)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년)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1988년)
고은 『만인보』(1986~2010년)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1982년)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1978년)
정호승 『서울의 예수』(1982년)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1975년)
고정희 『초혼제』(1983년)『지리산의 봄』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년)『두두』(2009년)
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년) 『대설주의보』
허수경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년) 『혼자 가는 먼 집』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2005년)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년)
신용목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2007년)『아무 날의 도시』(2012년)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2012년)
* 그외

나희덕, 장석남, 문태준, 김선우, 진은영, 서효인, 유승도, 김진완

 
 
 
 

2012. 12. 28.

모비 딕,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herman melville(1819-1891)
 




 
 
 
 




제23장.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몇 장 앞에서 벌킹턴이라는 선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뉴버드퍼드의 여인숙에서 우연히 만난, 바다에서 갓 상륙한 키다리 선원 말이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운 그 겨울 밤, '피쿼드' 호가 차갑고 심술궂은 파도 속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뱃머리를 찔러 넣었을 때, '피커드' 호의 타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벌킹턴이었다. 나는 경외감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겨울에 4년 동안의 위험한 항해에서 갓 돌아온 사람이 쉬지도 않고 사나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또다시 나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육지에 있으면 발이 타는 모양이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고, 깊은 추억은 묘비명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이 짧막한 장(章)은 벌킹턴의 묘석 없는 무덤이다. 벌킹턴은 폭푸에 시달리며 바람이 불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해변을 따라 떠밀려 가는 배와도 같다는 말만 해두겠다. 항구는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다.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와 저녁식사, 따뜻한 담요, 침구들, 우리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 강풍 속에서 항구나 육지는 그 배에 가장 절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한다. 배가 육지에 닿으면, 용골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 전체가 몸서릴 칠 것이다. 배는 돛을 모두 펴고 전력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를 고행으로 데려가려는 바로 그 바람과 맞서 싸우고, 또다시 거친 파도가 배를 때리는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애쓴다. 피난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벌킹턴이야, 이제 알겠는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진실을 그대는 어렴풋이나마 보는 것 같다. 무릇 깊고 진지한 생각은 망망한 바다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영혼의 대담한 노력일 뿐이며, 또한 하늘과 땅에서 가장 사나운 바람은 서로 공모하여 인간의 영혼을 배반과 굴종의 해안으로 내던지려 한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하지만 가장 숭고한 진리, 신처럼 가없고 무한한 진리는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할지라도, 수치스럽게 그쪽으로 내던져지기보다는 사남게 으르렁대는 그 무한한 바다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벌레처럼 육지를 향해 기어가고 싶어 하겠는가! 무시무시한 것의 공포! 이 모든 고통이 그렇게 헛된 것인가?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 벌킹턴이여! 완강하게 버텨라, 반신반인의 영웅이여! 그대가 죽어갈 바다의 물보라, 그곳에서 그대는 신이 되어 솟아오르리라!


- 151-152쪽.







2012. 12. 6.

필경사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 월스트리트 이야기
(bartleby, the scrivener, 1853/1856)
 
 
 
 
 
 
"하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2012. 11. 11.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 무라카미 하루키 강연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 무라카미 하루키 강연
 
MONKEY BUSINESS 2013/14 가을겨울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제1회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라고 말하면 처음부터 이야기의 입구가 너무 넓어짐으로, 일단 소설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그 편이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고 –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도 실제로 한 사람 있긴 한 거지만 – 비교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대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소설가의 대다수는 –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 원만한 인격과 공정한 시야를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또한 보고 있자면, 그다지 큰 목소리로 말하긴 뭣합니다만, 칭찬의 대상이 되기 힘든 특수한 성향이나, 기묘한 생활습관이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아마도 92퍼센트 정도가 아닐가라고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제로 입으로 말하냐 안 말하냐는 별개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 쓰고 있는 것이 가장 옳다. 특별한 예외는 있지만, 다른 작가는 적든 많든 모두 틀려먹었다’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따라 하루하루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종을 친구나 이웃으로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주 겸손하게 표현하더라도, 그다지 많을 것 같진 않습니다.
작가들끼리 두터운 우정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눈썹에 침을 바릅니다. 그런 일도 있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친밀한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작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라이벌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고, 작가끼리 묶어놓으면 잘 되기 보다는, 잘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저도 몇 번이고 그런 경험을 해봤습니다.
유명한 예로는, 1922년 파리에 있는 한 디너 파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동석한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의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대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침을 넘기며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자존심같은 것이 강했던 거지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영역에 있어서 ‘배타성’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면 – 간단히 말하면 ‘텃새’의식에 대해서 – 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인종은 아마 달리 없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굳이 말한다면 몇 개 안 되는 아름다운 속성 중 하나가 아닐까, 저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봅시다.
 
가령 어떤 소설가가 노래를 잘하고 가수로서 데뷔한다고 합시다. 혹은 그림에 관심이 있어 화가로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그 작가는 일단 틀림없이, 적지 않은 저항을 받고, 야유와 조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뭐 잘 났다고 돼도 않는 짓을 하고’ 라던가 ‘초자인 주제에 그만큼의 기술도 재능도 없으면서’ 같은 말을 들을 것이고, 전문적인 가수나 화가로부터는 냉대받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래그래, 잘 왔어요’같은 따뜻한 환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 극히 한정된 형식의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소설을 쓰면서, 여태까지 삼십 년 남짓 적극적으로 영미문학의 번역을 해왔습니다만, 처음에는(혹은 지금도 여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꽤 반발을 샀습니다.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들이밀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던가 ‘작가의 번역이라니, 민폐스러운 취미생활이다’같은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썼을 때는, 논픽션 전문 작가들로부터 꽤 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논픽션의 법칙을 모른다’라던가 ‘싸구려 최루성글이다’라던가 ‘경박한 장난짓’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장르적 ‘논픽션’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 생각한 말 그대로 ‘비 픽션’이랄까, 즉 ‘픽션이 아닌 작품’을 쓴 것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논픽션’이라는 성역의 문지기를 하던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버린 셈입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논픽션글에 ‘고유의 룰’이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처음 그 일을 겪고는 상당히 황당했었습니다.
어쨌든 뭐라도, 자기 전문 외의 것에 발을 들이밀면, 그 분야의 전문가는 일단 좋은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그 접근을 쫓아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질기게 하고 있으면 그 사이 점점 ‘그래, 뭐 하는 수 없지’같은 느낌으로 묵인되어, 동석이 허락되는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초기엔 정말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으면 좁을 수록, 전문적이면 전문적일 수록, 또한 권위적일 수록,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받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가령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혹은 번역가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소설가는 그걸로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아마도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쓰고, 번역자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쓰고, 그 작품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소설가가 ‘외부인이 제멋대로 굴고 말야’처럼 화를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욕을 하거나, 야유하거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같은 일도 최소한 제가 들은 바로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소설이 전문이 아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기회가 생기면 얼굴을 맞대고 소설이야기를 하거나, 때로는 격려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뒤에선 작품의 뒷담화를 까거나하는 정도의 일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소설가끼리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말하자면 일상적 영업행위입니다. 외부업종자의 소설진입은 특별히 다를 게 없습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인종은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나와바리’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워 보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답은 꽤 확실합니다. 소설 따위 – ‘소설따위’라는 말이 꽤 난폭하지만 말입니다 – 쓰려고 생각하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서 데뷔할 때는, 작은 어린이시절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훈련이 필요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과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일단 화구도 사놓을 필요가 있지요. 등산가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체력이나 테크닉이나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은 일단 누구라도 쓸 수 있습니다), 볼펜과 노트가 곁에 있다면, 그리고 나름의 작화능력이 있다면, 전문적 훈련따위 없어도, 일단은 쓸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단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됩니다. 대학 문창과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것이니까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우수한 작품을 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긴 뭣합니다만, 저만해도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대학의 연극학과라는 곳에 가긴 했습니다만, 시대상황이라는 것도 있어, 사실상 무엇하나 공부도 안 하고, 머리도 기르고, 수엽도 기르고, 더러운 옷차림으로 언저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작가가 되려는 의도도 없었고 습작을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불현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같은 것)을 써서 그걸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 모른 체로 직업적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도 갸우뚱했을 정도입니다. 암만 해도 너무 간단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문학을 장난으로 보냐’며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만, 저는 그저 그 사안의 기본적인 실존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입구가 넓은 표현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입구의 넓이야말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에너지원의 중요한 일부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제 해석에 의하면, 소설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도리어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는 누구라도 내키면 간단히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링같은 것입니다. 줄의 틈도 넓고 편리한 디딤대도 준비되어 있지요. 링도 꽤 넓습니다. 잠입을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관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아요. 현역레슬러들도 – 즉 이 경우엔 소설가에 해당하지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어서 ‘그래, 자 누구라도 다 올라와 보슈’같은 분위기입니다. 싹싹하달까, 쉽다고나 할까, 융통성이 있다거나 할까, 말하자면 꽤 대충 에라이 같은 분위기라는 겁니다.
하지만 링에 올라가는 것은 간단이라도 거기에 오래 머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소설가들은 물론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을 한 두개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을 오래 써나가는 것, 소설을 써서 생활을 지탱시킨다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에겐 일단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거기에 얼마간의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여러가지 일과 마찬가지로 운과 만남 같은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같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지고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해서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정면으로 이야기되는 일도 드뭅니다. 아마도 그것이 시각화도 언어화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소설가로서 계속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소설가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다른 전문직종의 사람이 다가와서, 줄 사이로 들어와, 소설가로서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너그러운 것일 테지요. ‘자, 올 테면 와보세요’같은 태도를 많은 작가들이 보입니다. 혹은 누가 새롭게 왔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을 안 씁니다. 그 신참이 그 사이 링에서 떨어져나갔다고 해도, 혹은 내가 스스로 내려간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 다 그런 경우이지만), ‘저런저런’ 이라던가 ‘건강하세요’같은 것이 되고, 만약 그나 그녀가 나름대로 노력해서 링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에 대해선 경의를 품습니다. 그리고 경의는 –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 공정하고 정당하게 댓가를 받아야할 것입니다(랄까, 받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소설가가 너그러운 것은, 문학업계가 제로섬사회가 아닌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신인작가가 한 명 등장했다고 해서, 그 대신 전부터 있던 작가가 한 명 직장을 잃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와는 그런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지요. 신인선수가 한 명, 팀에 새로 들어가서 기존의 선수가 한 명 빠지게 된다,같은 것은 문학의 세계에선 일단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소설이 10만부 팔렸다고 해서, 다른 소설이 10만부 덜 팔리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새 작가의 책이 팔리는 것으로 인해 소설전체가 활기를 띄고, 업계전체에 윤기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떤 종류의 자연도태는 적절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 링에는 적정인원이라는 게 있으니깐요.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감개를 느낍니다.
저는 이래저래 삼십 년에 걸쳐 소설을 써왔고 전문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대로 한다면 ‘문예세계’라고 하는 링 위에서 어떻게든 삼십 년 머물고 있고 예전 표현으로 한다면 ‘붓 하나로 먹고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좁게 보면 나름의 성취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삼십 년사이, 꽤 많은 사람들이 신인작가로서 데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작품들이 그 시점에서는 꽤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평론가의 칭찬을 받고 여러가지 문학상을 받고 세간의 화제도 되고 책도 어느 정도 팔렸습니다.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즉 각광을 받고 장대한 테마송을 달고 링에 올라온것이지요. 하지만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데뷔한 사람들 중 어느 정도가 현재도 실질적으로 현역소설가로서 활동하냐를 물어보면, 그 숫자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라고 할까, 실제로는 극소수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많은 ‘신진작가’들이 모르는 사이 조용히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혹은 – 어쩌면 이 케이스가 더 많을지 모르지만 – 소설을 쓰는 것에 질리거나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이 피곤해져서, 다른 분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 당시엔 그걸로 화제도 되고 각광도 받았습니다만 – 지금은 일반사회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작품들은 지금 일반서점에서 찾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소설가의 정원수에는 제한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으니깐요.
제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적합한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이나 교양이나 지식은 소설을 쓰는 데에 필요합니다. 이런 저라도 최소한의 지성이나 지식이 겸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정말 그러냐’고 대놓고 물어보면 사실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너무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은, 혹은 일반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일엔 적합하지 않지 않을까 저는 늘 생각합니다. 소설을쓴다 – 혹은 이야기를 만든다 – 라는 행위는 꽤 저속 low gear로 행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체감으로 치자면, 걷기보다는 빠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늦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흐름이 그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소설가는 자기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바꿔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던 형태와, 거기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형태 사이의 ‘격차’를 통해 그 격차의 다이내미즘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꽤 둘러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것입니다.
자기 머리 속에 있는 어느 정도의 선명한 윤곽을 가진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윤곽을 그대로 스트레이트하게 언어화한 편이 이야기는 빠르고,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전환하려면 반년 정도 걸릴지 모르는 메시지나 개념을 그대로의 형태로 직접표현을 하면 단 삼 일로 언어화시킬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 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십 분이면 퉁 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듣고 있는 사람도 ‘아 그런 뜻이구나’라며 무릎을 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머리가 좋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이야기라고 하는 fuzzy한, 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틀을 가지고 나오거나 혹은 제로부터 무언가를 새로 정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그대로 언어화하면 주변 사람들은 ‘흠흠’하며 납득하고 감탄해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문학평론가가, 어떤 종류의 소설이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 혹은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해를 유용하게 언어화 이론화할 수 없다 – 고 하는 이유는 아마 그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말해, 소설가들에 비해 머리가 너무 좋고, 머리회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느린 vehicle에, 제대로 신체를 맞춰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들, 텍스트의 이야기의 페이스를 일단 자기 페이스대로 번역해서, 그 번역된 텍스트에 따라 자신의 논지를 설파합니다. 그런 작업이 적절한 경우도 있지만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그 텍스트의 페이스가 단지 느린 것 뿐만 아니라 느려터진 것 위에 중의의, 복합적인 것을 품은 경우에는, 그 번역작업은 점점 더 곤란한 일이 되어갑니다. 평론가가 자체적으로 번역한 그 텍스트는 곡해된, 굴절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 평론가가 있다면 그런 작업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아쉽지만 여러분도 아시다피시,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인간은 어떤 분야에서도 꽤 희박한 존재입니다.
그건 그렇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 총명한 사람들이 – 그 대부분은 다른 업종사람들이지만 – 소설을 한두개 쓴 후, 그대로 어디론가로 이동해간 모양새를 전 몇 번이고 이 눈으로 목격해왔습니다. 그들이 쓴 작품의 많은 경우는 ‘잘 쓴’ 소설이었습니다. 몇 개의 작품에는 신선한 쇼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설가로서 링에 오래 머무는 일은,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견학하고선 그대로 나가버렸다’라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분들이 소설을 쓰는 일에, 생각했던 것 만큼의 이점(merit)을 발견못한 것 같습니다. 한두개 소설을 쓰고 ‘아, 알겠다 소설이란 이런 거였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고 추측합니다. 이거라면 다른 걸 한 편이 효율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 기분을 잘 압니다. 소설을 쓴다고 하는 것은 어쨌든 효율이 나쁜 작업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을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설은 그것을 별도의 문맥으로 바꿔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 바꿔 말하기 속에서 불명확한 점, fuzzy한 부분이 있다면, 또 그것에 대해서 ‘그것은말야, 말하자면 이런 거란다’라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하는 것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은 ‘바꿔 말하기’인 것이지요. 열어도 열어도 그 안에서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인형같은 것입니다. 이만큼 효율이 나쁜, 돌아가는 작업은 어딜 가도 없습니다. 처음의 테마가 그대로 명확하고 지적으로 언어화되면 ‘말하자면’이라는 바꿔말하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데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는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선 그러한 불필요한 곳, 돌아가는 곳에서 진실이나 진리가 제대로 잠복해있다고 합니다. 뭔가 합리화 같습니다만, 소설가는 대체적으로 그렇게 믿고 자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설같은 건 없어져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아무래도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는 시간을 취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에 따라도 달라집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효율성이 안 좋은 돌아가는 것들과 효율성이 좋은 기민한 것들이 표리가 되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 결여되도(혹은 압도적 열세가 되도)이 세계는 아마도 뒤틀린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다지 머리가 나쁜 인간은 소설은 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도 소설은 못 쓴다 – 적어도 장기에 걸쳐서 오래 써나가는 것은 어렵다 – 라는 것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린’작업입니다. 거기에는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보기 힘듭니다. 혼자 방에 쳐박혀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라며 문장을 매만집니다. 책상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쓰고 하루종일 걸려 겨우 한 줄의 문장의 밀도를 아주 조금 높였다고 해서 누가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잘 했다’라고 누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혼자서 납득하고 혼자서 ‘그래그래’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한 줄의 문장의 밀도에 주목해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작업인 것입니다. 손은 드럽게 많이 가고 참 테 안 나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년 정도 들여서 긴 핀셋을 써서 성냥같은 걸로 세밀하게 배 한 척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소설을 쓰는 것은 작업으로선 그것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본질적으로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편소설이라도 되면 그런 세심한 밀실작업을 매일매일 해나가야만 합니다. 끝도 한도 없이 해야만 합니다. 그런 작업이 원래 습성에 맞는 사람이 아니면, 혹은 그것을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오래 해나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못됩니다.
어렸을 적, 어떤 책에서, 후지산에 구경간 두 사람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다 후지산을 처음 봅니다. 머리가 좋은 쪽의 남자는 후지산을 몇 개의 각도에서 본 것만으로 ‘아, 후지산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알겠어, 이런 부분을 멋지다고 하는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돌아옵니다. 무척 효율이 좋지요. 하지만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쪽의 남자는 그리 간단히 후지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다리로 후지산 정상까지 올라가봅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걸리고 수고도 듭니다. 체력은 소모되고 지칩니다. 그리고 겨우 그 끝에서 ‘아, 이게 후지산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나 할까, 일단 정리를 합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후자의, 즉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남자 쪽에 속하게 됩니다. 실제로 자기 다리를 써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못하는 타입입니다. 아니, 몇 번 올라가봐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오르면 오를 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진다,라는 것이 소설가들의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효율 이전’의 문제이지요. 이건 아무리 봐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설가는 다른 업종의 재능있는 사람들이 어는 날 불쑥 다가와서 소설을 쓰고, 그것이 평론가나 세간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딱히 놀라지는 않습니다. 위협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소설을 장기간에 걸쳐 계속 써나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임을, 소설가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능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능있는 사람들의 페이스가 있고, 지식인에게는 지식인들의 페이스가 있고, 학자에게는 학자의 페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페이스는 댁의 경우, 길게 보자면, 소설의 집필에는 걸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업적 소설가 속에서도 ‘재능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속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대로라면,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만으로 해나갈 수 있는 세월은 – 쉽게 말하면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 잘해봤자 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을 넘기면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뛰어넘는, 보다 영속적인 자질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시점에서 칼날의 예리함은 다른 종류의 예리함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전환포인트를 제대로 옮겨간 사람은 작가로서 한층 더 커지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습니다. 그것을 못 옮겨간 사람은 적든 많든 도중에 모습을 지우게 – 혹은 존재감이 옅어지게 – 되고 맙니다. 혹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가에게 있어서 ‘정착해야만 하는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라는 것과 거의 동의어라고 보여집니다. 소설가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늘 이동하고 있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자, 이래서 저는, 긴 세월 질리지도 않고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들에 대해 – 즉 저의 동료들에 대해 –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작품 하나하넹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십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 소설가로서 활약하고, 혹은 살아남고, 각자 나름의 고정독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설가로서 무엇인가 근사하고 강한 핵(core)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내적인 동기부여(drive). 그것이 소설가라고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질, 자격,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소설을 하나 써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우수한 소설을 하나 쓰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쉽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것은 정말 꽤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무언가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재능’과는 조금 별개의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단 하나입니다. 실제로 물 속으로 들어가서 뜨는지 안 뜨는지 알아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가혹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소설같은 것은 안 써도(도리어 안 쓰는 편이) 인생은 총명하고 유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을 수 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나갑니다. 그러한 분들은 물론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환영합니다. 링으로 올라온 것을 환영합니다.
글/무라카미 하루키
번역/임경선
 
 
 

2012. 8. 13.

고통 - 앙드레 드 리쇼









 

andré de richaud, la douleur, 1931
앙드레 드 리쇼, 이재형 옮김, 문학동네, 2012.







"1914년 8월. 대위가 군대에 동원되자 그녀는 아들만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전쟁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여겨 짐을 풀지는 않았다. 버들가지로 엮은 커다란 트렁크들은 살짝 열린 채 어두운 현관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그 안의 내용물이 찬장이나 옷장과 같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정돈되기 시작했다. 몇 달 뒤 트렁크들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이제 더는 여행을 하지 않는 다른 트렁크들을 만났다. 모든 물건이 놓여할 자리에 놓이고 테레즈 들롱브르가 다시 도시로 가서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즈음, 그녀는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지내고 있는 곳이 사뭇 적막하고 쓸쓸해서 감정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던 터라 충격이 격렬하기는 했어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아들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 여드레를 울고 난 뒤, 이제 혼자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나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아들이 덜컥 홍역에 걸리고 말았다. / 여위기는 했지만 훌쩍 커버린 아들이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 테레즈 들롱브는 남편을 거의 잊은 상태였다. 어린 환자를 문병 온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미래를 암시했다. 죽을 때까지 그늘에 묻혀 살아야 한다는. 아들 조르제를 위해서 ...... / 그녀는 자신이 처한 비장한 상황에 경탄했다. 자기 희생과 용기를 주제로 삼은 어느 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10)




나는 앙드레 드 리쇼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아름다운 책을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 책은 처음으로 내가 아는 것, 어머니, 가난, 하늘에 비치는 아름다운 저녁 같은 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고통』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을 풀어주었고 속박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 책을 하룻밤 사이에 다 읽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자 어떤 낯설고 새로운 자유가 용솟음쳐 머뭇거리며 미지의 땅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통』은 나에게 창작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 알베르 카뮈




이 소설은 어머니와 아들의 복잡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욕망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의 인질로 삼는다. 아이는 슬픔과 고독에 사로잡힌다. 카뮈 역시 어린 시절 무관심한 어머니로 인해 불안을 느껴왔다. 고통, 욕구, 혐오, 이 모든 감정이 뒤엉켜 그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통』은 이러한 감정을 수면 위로 떠올려, 카뮈가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 안도 도모코(큐슈 대학교 불문과 교수)














2012. 8. 9.

연극의 하찮음, 소설의 해로움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1961



그러나 인간을 감성적인 것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것에는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 자체도 있다. 더 이상 자연의 움직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갖 습관에 의해, 사회생활의 온갖 요구에 의해 지배되는 감성. 근대인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낮을 밤으로, 밤을 낮으로 삼아 왔다.



“파리에서 여자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자연에 의해 정해진 시간과 동떨어져 있어서, 하루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흘러갔고, 가장 맑은 공기는 사라졌으며, 아무도 아름다운 시간과 맑은 공기를 누리지 못했다. 독기와 해로운 악취는 태양의 열기에 이끌려 벌써 대기 속으로 올라간다. 그때에야 미녀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꾸물거린다.”(보쉬네, 1783)



이러한 감각의 불순(不順)은 환각이 길러지고 헛된 정념과 영혼의 가장 음침한 움직임이 인위적으로 야기되는 연극에서 계속되는데, 특히 여자들은 “열광과 흥분을 자아내는” 그러한 연극을 좋아하고, 여자들의 영혼은 “그토록 심하게 뒤흔들리어, 사실은 일시적이지만 통상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는 충격이 신경에 가해지며, 여자들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박탈되는 현상이나 여자들이 근대의 비극을 관람하면서 쏟는 눈물은 연극의 공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사건일 뿐이다.”



소설은 착란된 감성에 더 인위적이고 더 해로운 환경을 형성하며, 근대 작가들이 소설에서 나타내려고 애쓰는 그럴듯함 자체, 그리고 그들이 진실을 모방하는 데 이용하는 기법 전체는 그들이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싶어하는 격렬하고 위험한 감정에 더 많은 위력을 보탤 뿐이다.



“프랑스에서 예절과 여자들에 대한 친절이 시작된 처음 몇 세기 동안 여자들의 덜떨어진 정신은 믿을 수 없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사실과 사건에서 만족을 느꼈다. 여자들은 이제 그럴듯한 사실, 그러나 몹시 이상해서 감정을 혼란시키고 뒤흔들 그토록 경이로운 감정을 원하며, 뒤이어 불가사의한 현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주변의 모든 것에서 구현하려고 시도하지만, 자연에 없는 것을 찾아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모든 것은 감정도 생명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전형적으로 감성 전체의 왜곡된 환경을 형성하고, 영혼을 감성적인 것에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것 전체로부터 분리시켜,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격렬하고 자연의 부드러운 법칙에 의해 덜 규제되는 감정의 상상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토록 많은 작가가 다수의 독자로 하여금 알 껍질을 깨고 나오게 만들고, 지속적인 독서는 온갖 신경증 환자를 낳게 되는 바, 여자들의 건강에 해로운 모든 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100년 전부터 시작된 소설의 한없는 증가였을 것이다. ... 10살 무렵에 달리기 대신 책을 읽는 소녀라면 20살 무렵에는 틀림없이 좋은 유모가 아니라 심한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가제트 살뤼테르, 1768)


 
18세기에는 광기와 광기의 위협적 증가에 대한 의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범주의 개념들이 여전히 매우 산만한 방식으로 서서히 형성된다. 17세기가 광기를 위치시켰던 비이성의 풍경에서 광기는 어렴풋이 도덕적 의미와 기원을 감추고 있었고, 17세기의 불가사의에 의해 광기는 과오에 연관되었으며, 광기에 곧장 깃들인 것이라고들 인식한 동물성은 역설적이게도 광기를 더 결백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기에는 인간을 아득한 옛날의 타락이나 한없이 현존하는 동물성 쪽으로 근접시키는 것에서 더 이상 광기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게 되고,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자연의 직접성을 통해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에 대해 유지하는 그 간격 안에 광기를 위치시킨다. 광기는 감성적인 것, 시간, 타자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변질되는 그러한 ‘환경’(milieu) 속에서, 인간의 삶과 변전(變轉)에서 직접적인 것과의 단절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제 광기는 자연이나 타락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영역에 속하는데, 이 영역에서는 역사가 예감되기 시작하고, 의사들이 말하는 ‘정신이상’(l'aliénation des médecins)과 철학자들이 말하는 ‘소외’(l'aliénation des philosophes)라는 두 형상, 이를테면 인간의 진실이 어떻게든 변질되는 조건이지만 일찍이 19세기에 헤겔 이후로 유사성의 흔적을 모두 잃어버린 두 형상이 본래의 막연한 연관성 속에서 형성된다(582-584).



201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