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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6.

l'impossible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성귀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4.
- 제2부. 디아누스(몬시뇰 알파의 비망록에서 발췌한 메모들) 중 「에필로그」
 
 
잠의 늪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무신경하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그걸 우리는 잊고 있으며, 그런 무사태평함이 우리의 ‘명징한’ 태도에 거짓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당장, 최근 꿈에서 체험한 도살장의 야수성(내 주위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국 진정되었다)이 나로 하여금 죽음이 유발하는 ‘위반’의 감정에 눈뜨게 한다. 내 눈에는 금속의 무진장한 부식상태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지면의 곰팡이를 가까스로 모면하는 양지바른 곳의 확신 또한 마찬가지다. 삶의 진실은 그 상극과 유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죽음의 냄새로부터 도망치면, ‘감각의 일탈’이 그 냄새와 연결된 행복감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 중요한 건, 죽음과 그로 인한 삶의 무한한 재생을 우리는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숨겨진 뿌리의 그물망을 통해 대지를 그러쥐듯, 우리 역시 죽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정신적인’ 나무일 뿐 - 그래서 툭하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일 테다.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비밀을 안겨주는 고통의 샘에서 정직하게 물을 긷지 못한다면, 결코 웃음이 열광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계산으로 얼룩진 탁한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음란 자체는 고통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으나, 그 분출에 워낙 ‘경쾌하게’ 연결되다 보니, 온갖 고통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광적이면서, 가장 탐낼 만한 유형이 된 것이다.
 
 
때로는 구름까지 치솟게 해주고, 때로는 모래 위에 죽어 나자빠지게 방치하는 이 욕동(欲動)의 전모를 놓고 볼 때, 그 이중적 행태가 큰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의 실패로부터 영원한 쾌락이 탄생한다는 상상은, 녹아웃 상태에서는 구차한 위안일 것이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쾌락의 파랑(波浪)이란 단 하나의 조건 즉, 고통의 역류 현상 또한 그에 못지않게 끔찍하다는 전제하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 커다란 불행이 낳은 의혹은 오히려 쾌락을 만끽하는 이들, 행복이란 것을 불행의 어두운 후광 속에서만, 오직 변모된 상태로 감지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은 양면성을 해결할 수가 없는 거다. 궁극의 행복은 그 지속을 내가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확신을 갖는 순간부터, 궁극의 행복은 무언가 거북한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오로지 양면적인 상태 속에서만 정신 차려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불행과 쾌락 사이에 극명한 차이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의 의식은 공포 속에서조차 완전히 압살당하지 않는다. 고통을 현기증 나도록 증식시키는 것이 바로 쾌락의 의식이지만, 반대급부로 고문을 견뎌주게 해주는 것 역시 그 쾌락의 의식이다. 사물의 양면성에 그런 경쾌한 작동 원리가 워낙 현저히 구현되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무겁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근심 가득한 사람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교회의 진정한 오류는 윤리와 도그마에 있다기보다, 일종의 놀이인 비극적인 것과 노동의 징표인 심각한 것을 혼동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142-144).
 

lascaux




 
 
 
 
 
 
 
 
 
 
 

georges bataille + les larmes d'eros


   
* 조르주 바타유 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 1897–1962
 
 
 
 
연도
원서명
국역본
1928
Histoire de l'oeil
『눈 이야기』
(푸른숲, 1999)
1930
Un Cadavre
「시체」,
『문학과 의식』(2002년 겨울호)
1941
Madame Edwarda
「마담 에드와르다」,
『현대문학』(1982년 1월호)
1949
La Part maudite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1957
La littérature et le Mal,
『문학과 악』(민음사, 1995)
1957
L'Erotisme
『에로티즘』
(민음사, 1989/2009)
1961
Les larmes d'Éros
『에로스의 눈물』
(문학과의식, 2002)
1962
L'Impossible
(La Haine de la Poésie, 1947): Histoire de rats(1947) suivi de Dianus(1947) et de L'Orestie(1945)
『불가능』
(워크룸 프레스, 2014)
1973
Théorie de la Religion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소묘』(문예출판사, 1999)
1976
L'Histoire de l'érotisme
(1950-1951, 1953-1954)
in Œuvres complètes VIII
『에로티즘의 역사』
(민음사, 1998)

 
 
* 유기환, 『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ㆍ에로티즘』, 살림, 2006.
 
* 미셸 푸코, 「위반에 대한 서언」, 이규현 옮김, 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1989, 92~112쪽.
* 베르그손, 프로이트, 쉐스토프(Léon Chestov, 1866-1938), 니체
 
 
*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 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échange dans les sociétés archaïques(1925); 『증여론』(한길사, 2002).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fait social total). 여러 사실들을 그것이 속해 있는 사회적 단위들의 총체적인 관계 속에 놓고 이해한다. 하나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제도나 표상들은 통합된 전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개념을 정리함으로써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간주되었던 제도ㆍ법률ㆍ의례ㆍ결혼ㆍ신화와 같은 것들이 구체적 총체성(totalité concrète) 안에 포함되면서 체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24-25).
 
모스의 『증여론』은 뒤르켐의 사회중심론 또는 사회결정론과 역사결정론을 극복하고 있다. 전자에서 뒤르켐은 사회와 개인을 주체와 객체로 보고 있으며, 후자에는 역사적 방법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기능론을 취한 결과, 역사적 기원을 찾는 것과 그 기능을 분석하는 방향을 혼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점을 모스는 ‘증여’의 개념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사실로서의 ‘증여’를 규범ㆍ내용ㆍ가치체계 등을 통해 고찰하는 대신 ‘형태’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 분석에서 얻어진 것이 바로 ‘호혜성’ 이론과 ‘교환’ 개념이다. / 이 호혜성을 단순히 규범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의미에서 파악한 결과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추출되었다. 이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체계가 내표하는 구조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규범에 따라 구조가 결정되어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 내에 규범을 구성하는 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호혜성의 원리는 등가물의 교환체계를 전제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사회’와 ‘개인’ 사이의 단절은 사라지게 된다. 즉 뒤르켐의 사회중심이론과는 대조적으로 모스는 사회의 존립기반을 개인 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찾고 있다. 증여란 그것을 증여로서 갖고 있는 것, 즉 교환의 수단인 동시에 수단의 교환이기도 한 것에 따라 사회적 장치가 된다고 보는 것이 모스의 주장이다. /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선물은 서로 구분될 수 있는 것으로, 모스에 따르면 선물은 사실상 주기와 받기 그리고 답례라는 삼중의 의무를 뜻한다. / [...] / 말하자면 모스는 전체적인 현상으로서의 증여에 나타나는 사회적ㆍ종교적ㆍ법률적ㆍ경제적ㆍ도덕적 의의를 교환 개념에 의거하여 분석하고, 그 배후에 잠재해 있는 호혜성의 원리를 추출해간다. [...]
 
연구의 중심적 가설은 ‘교환의 태고(太古)적 형태’이다. 여기에는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회에서 나타난다고 모스는 말한다. 이것은 사회를 유지시키고, 사회적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 또한 그것을 주어진 사회의 전체성 속에서 분석하면 사회의 정수를 볼 수 있고, 그것의 작동방식과 삶의 측면까지도 볼 수 있으며, 사회와 그 구성원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적 교류와 서로에 대한 시각 역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선물 교환은 종교적ㆍ법적ㆍ경제적ㆍ심미적ㆍ형태론적 신화론적이기 때문에, 교환되는 물건은 그것을 교환하는 사람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28-30).
 
전체적인 급부(給付)체계(système de prestation totale)의 대표적인 예가 아메리카 북서부에서 나타나는 포틀래치(potlatch)로서, 이는 ‘식사를 제공한다’, ‘소비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모스는 이러한 급부형태를 세분화한다. 그는 먼저 포틀래치 같은 전체적인 급부형태가 있고, 단순한 유형의 전체적인 급부형태로는 프랑스인들이 연말연시에 주는 향연, 결혼 잔치, 단순한 초대 같은 것을 예로 들고 있다(31).








* georges bataille - a perte de vue
 

 
 
 
 
* georges bataille - france-culture
 
 
 
 
 
* la litterature et le mal, 1958
 
 
 
 
 
 
* sylvia bataille [maklès], 1908-1993
 
 
 
 
* jean renoir - une partie de campagne, 1936
with sylvia bataille
 
 
 
 
 
 
 
 
 
 
 
 
 
 
 
 
 
 
 
 
 
 
 
 
 
 
 
 
 
 
 
 
 
 
 
 
 
 
 
 
 
 

l'erotisme

 
 
 
 
 
 
 
 
 
 
* 『에로티즘』(개정판, 조한경 옮김, 민음사, 2009)
 
 
 
시기
인간유형
인식의 대상
증거
100만 년 전
노동하는 인간
노동
연장
1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
죽음
무덤
2-3만 년 전
지적 인간
에로티즘
발기된 남성 성기를 그린 동굴벽화
 
 
 
책머리에
 
“에로티즘은 노동의 역사와 구분해서 또한 종교의 역사와 구분해서 독립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 나는 인간 정신의 통일성이 발원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 이러한 전제적 조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작업을 하는 동안 나를 붙드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청년기 시절에 나를 사로잡은 어떤 이미지, 즉 신의 이미지를 총체적 시각으로 복원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청년 시절의 신앙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 나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충동과 에로티즘의 충동이 상당한 동일성을 지니고 잇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6-7)
 
서문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드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비결은 너무 자명하다. 조금이라도 악습에 뿌리를 내린 방탕아라면 살해가 관능에 대해 얼마나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다음과 같이 더 기이한 말을 했다. ‘죽음과 친숙해지려면 죽음과 방탕을 결합시키는 일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11-12) “번식은 죽음과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들의 번식과 죽음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결국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표현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둘 다 매혹적이다. 그리고 에로티즘을 지배하는 것 역시 연속성 또는 죽음에 깃든 매혹이다. [...] 우리는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 외롭게 죽어가는 개체, 불연속적 개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연속성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우연한 개체, 덧없이 소멸하는 개체로 떠미는 현재의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가 지속되기를 애타게 염원하는 동시에 우리를 보편적 실재로 이어주는 최초의 연속성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한다. [...]실재에의 이 향수는 모든 사람에게 세 가지 형태의 에로티즘을 촉발한다. / 나는 이 에로티즘의 세 가지 형태, 즉 육체의 에로티즘, 심정의 에로티즘 그리고 신성의 에로티즘에 대해 차례로 언급하겠다. 내가 그것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존재의 고립감, 불연속성 대신 심오한 연속성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바로 그 세 가지 형태의 에로티즘이기 때문이다. / 육체의 에로티즘과 심정의 에로티즘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쉽게 납득이 간다. 그런데 신성의 에로티즘에 대한 개념은 조금 생소하다. [...] 현세 너머의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집요한 탐구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방식과 관계하는데, 서양에서는 아주 친숙한 형태로 나타나는 신성의 에로티즘은 신의 추구, 더 정확히 말해서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신의 개입이 없는 유사한 추구가 있다. 특히 불교는 신의 개념을 모른다.”(14-17)
 
“에로티즘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폭력의 영역이며 위반의 영역이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미세 존재들의 불연속으로부터 연속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출발하자. 미세 존재들의 이행 과정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참조해서 말하자면, 불연속적 존재로부터 존재를 박탈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이 없다. 우리에게 가장 폭력적인 것은 죽음이다. [...] 물론 번식 중에 있는 미세 존재들의 충동과 우리 인간들의 심적 충동을 간단하게 동일시 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미세해도 폭력이 없이 내부의 존재를 위기에 몰아넣는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미세 존재는 오히려 불연속에서 연속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존재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폭력만이 그렇게 모든 것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름 없는 폭력과 불안이 존재와 맺는 관계! 안정된 (불연속성 안에 안정된) 존재에 대한 모독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한 상태로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상태로의 이행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번식 중인 미세 동물의 혼란스러운 이행 과정은 우리에게 육체적 에로티즘의 숨 막히는 폭력의 진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내밀한 의미까지도 밝혀준다. 짝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모독, 죽음으로 몰아가는, 살해로 몰아가는 고독! 만약 에로티즘이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인가? / 모든 에로티즘 작업은 감히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건드린다. 정상(正常) 상태로부터 에로티즘의 욕망 상태로의 이행은 불연속적 질서, 또는 안정된 존재의 상당한 와해를 전제한다. [...] 어떤 에로틱한 행위든 에로틱한 행위는 폐쇄적 존재로서의 구조를 갖는 정상적 상태의 상대방을 파괴함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17-19)
 
“[사랑의] 이런 광적 열광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어떤 가능한 연속성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 인간적 한계를 무너뜨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이는 심정의 결합 가능성을 관능의 결합 가능성에 보태는 정의하기 어려운 교감에 기인하는데)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의 완정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은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열정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열정은 피상적으로 보면 언제나 우연한 조건에 좌우되는 협약의 추구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언제나 불가능에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 사랑에 빠진 두 연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그가 갖는 모든 의미를 드러내는 때는 오직 개체의 고립이 범해질(죽음과 동일할 정도로) 때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의 스크린이다. 이제 그에게 비쳐 보이는 것은 조금 뒤에 언급할 신적인 또는 신성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불연속성조차 제한이 불가능한 충만하고도 무한한 존재이다. 한 마디로 그는 연인이라는 존재에서 출발하지만 일종의 해방과도 같은 존재의 연속성에 이른다.”(22-23)
 
죽음은 존재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종교적 제의를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에로틱한 행위는 거기에 빠진 사람들을 용해시키면서 격랑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연속성을 계시해준다. 제의에는 발가벗기기만이 아니라 희생자의 죽음까지 따른다(만약 제의 대상이 살아 있는 생물체가 아닌 경우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제물의 파괴행위가 따른다). 제물이 죽으면 참관자들은 그 죽음이 계시하는 어떤 본령(本令)에 참여한다. 그 본령이란 종교사가들의 용어를 빌리면 신성(神聖)이라고 하는 것이다. [...] 격렬한 죽음은 불연속적 존재에 파열을 초래한다. 침묵이 감돌고, 제사를 참고나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느끼는 것은 제물이 도달한 존재의 연속성이다. [...] 모든 점으로 고래해 보건대, 원시 시대의 제의에 깃든 신성은 오늘날 종교의 신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24-25)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란 육체의 에로티즘에서도 그렇고 심정의 에로티즘에서도 그렇고 죽음에 대한 무차별한 도전이다. 생명이란 존재에 이르는 길이다.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존재의 연속성은 불멸의 어떤 것이다. 연속성으로의 접근, 연속성의 도취는 죽음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우선, 에로티즘 행위가 야기하는 즉각적인 동요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제 불연속적 존재 상황이 가져다주던 암울한 전망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혈기 왕성한 젊은 우리는 도취된 채 죽음도 불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마침내 거기에서 전에는 알지 못하던 그리고 이해할 수도 없던 연속성을 향해 열린 문, 에로티즘의 비결, 에로티즘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에로티즘만의 비결을 보기에 이른다. [...] 에로티즘의 영역은 자신에게로의 웅크림의 의지를 거부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열리는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다. 에로티즘은 죽음의 문을 열어준다. 죽음은 개인적으로 존속하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자, 그런데 이때, 우리를 극단까지 몰고 갈 수도 있는 이 부정을 아무런 심적 혼란 없이 감당할 수 있을까? / 요컨대, 내가 여러분을 데려가려고 하는 곳은 여러분에게는 아주 낯설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곳은 아주 격렬한 혼미의 십자로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꼈으면 좋겠다. / 나는 신비 체험에 대해서 말했지 시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면 더 깊은 미궁에 빠져 들어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느낀다. 시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은 시에 대한 언급은 피하겠다. 다만 신학자들에 의한 신의 연속성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강력하게 살다 간 시인 랭보의 다음 시는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연속성의 개념을 좀 더 분명히 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되찾아졌다.
무엇이? 영원성이
태양과 함께
바다는 떠나가고.
 
시는 상이한 에로티즘의 형태다 마침내 이르는 같은 곳, 즉 상이한 사물들이 뒤섞이는, 불명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를 영원성에 이르게 하고, 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연속성에 도달하게 한다. 시는 영원이다. 태양과 함께 바다는 떠나가고.”(26-28)
 
 
1부 금기와 위반
 
1장 내적 체험의 에로티즘
 
“에로티즘은 인간의 내적 삶의 한 측면이다. [...] 인간의 에로티즘이 동물의 성행위와 다르다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내적 삶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인간 의식 내부의 어떤 것이다. [...] 한 마디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된다. 인간은 또한 금기(禁忌, taboo)라는 이름의 구속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그 금기들은 주로 (그리고 분명히) 죽은 사람들 앞에서의 태도와 관계가 깊다. 그리고 아마도 동시에(거의 동시에) 금기는 성행위와도 관계한다. [...] 노동이 죽음에 저항하는 태도라고 한다면 성행위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금기도 죽음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아서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모든 기본적 행위(노동, 죽음의 의식, 성에 관한 금기)들은 모두 같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의 흔적은 전기 구석기 시대(paleolithique inferieur)의 것이며, 가장 오래전의 매장 흔적은 중기 구석기 시대(paleolithique moyen)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다. 사실 오늘날의 계산법으로 계산해보면 수십만 년이 흘렀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인간은 태초의 동물성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노동을 하게 되면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끄럼 없이 행하던 성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면서 인간은 동물성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동류(同類)로 간주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은 동굴벽화시대(이때는 후기 구석기 시대(paleolithique superieur)이다.)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의 인간은 종교적 차원으로 자리 잡은 위 세 가지 변화를 모두 겪고서, 자신의 배후에 그것들을 모두 간직한 인간이었다.”(31-33)
 
“위반(違反, transgression)은 ‘자연으로의 회귀’와는 다르다. 위반이란 금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한번 걷어 올리는 행위이다[이것이 헤겔이 aufheben(유지하면서 극복함, 止揚)라고 표현한 변증법적 순간과 일치함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로티즘의 근본은 거기에 있으며, 종교의 근본 또한 거기에 있다. 내가 먼저 법과 위반 간의 깊은 공모 관계를 밝힐 수 있다면 우리의 연구는 한결 진전이 있을 것이다.”(39) “요컨대 금기 없이는 의식(意識)이 이해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금기들을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오류로 대하기보다는 인간성을 좌우하는 근본적 감정의 결과들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금기의 진리는 인간의 태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금기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바로 알 수 있다. 금기를 범할 때, 특히 금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직 옭아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충동에 무릎을 꿇을 때, 금기의 진리는 우리에게 드러난다. 금기를 준수하고, 금기에 복종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의식할 수 없다. 그러나 위반의 순간 우리는 고뇌(고뇌가 없다면 금기도 없을 것이다.)를 느끼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의 체험이다. 원죄의 체험은 완성된 위반, 성공한 위반으로 이어지고, 그 위반은 이제 금기를 유지하되 즐기기 위해 유지한다. 에로티즘의 내적 체험은 체험자에게 우리를 금기의 위반으로 안내하는 욕망뿐 아니라 금기를 떠받쳐 주는 고뇌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도록 요구한다. 욕망과 두려움, 짙은 쾌락과 고뇌를 긴밀히 연결하는 그 감정은 종교적 감정과도 다르지 않다. / 낭만주의의 19세기 처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고뇌, 구토, 공포의 감정을 모르거나 또는 어쩌다가 느끼는 사람은, 또는 그러한 감정을 억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결코 병적인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은 나방에게 번데기 상태가 있듯이 인간에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마치 번데기가 껍질을 깨고 나올 때 그것은 바깥 세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파열을 의식하는 순간이듯이, 인간의 내적 체험도 그렇게 얻어진다. 번데기의 껍질에 갇혀 어둠을 벗어나지 못하던 객관적 의식의 초월은 이 전복(顚覆, subversion)과 관계가 깊다.”(42-43)
 
 
2장 죽음과 금기의 관계
 
 
노동 또는 이성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 사이의 대립.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인간은 삶을 파열시키는 두 세계 중 이쪽에 또는 저쪽에 속한다. 노동 또는 이성의 세계가 인간 생활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노동이 우리를 완전히 몰두케 하지는 못한다. 이성이 우리를 지배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무한정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활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원래 난폭한 것이 자연이 아니던가! 우리가 아무리 합리적이려고 해도 폭력은 다시 머리를 쳐들곤 한다. 이때의 폭력은 원래의 자연적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복종하려 해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성을 잃고 충동에 복종하고 마는 이른바 이성이라고 하는 존재, 인간의 폭력이다.”(44) “부분적으로는, 노동에 바쳐진 인간집단은 이렇게 금기에 묶인 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다. 금기가 없다면 인간 집단은 인간 집단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세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얼핏 보기에 서로 대립적인 번식 행위와 죽음 사이에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나중에 구체적으로 밝히기로 하겠다. 다만 그것들 사이의 외적인 관계는 에로티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듯이 사드의 세계에서 금방 드러난다. 사드(사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는 대체로 그를 찬양하는 체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뇌스러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바로 ‘사랑의 극한 충동은 죽음의 충동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말이다. 이 관계는 역설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번식을 낳는 극단과 죽음이라는 극단은 서로의 도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다. 어쨌든 금기와 관계하는 근본적인 것들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죽음과 관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과 관계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46-47)
 
 
“‘살인하지 말라.’고 한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따금 웃는데,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우리는 착각하는 것이다. 금기는 뒤집혀도 조롱당해도 위반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아무리 잔인무도한 살인자라도 자신을 사로잡는 저주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저주가 영광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위반도 금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금기는 그것이 거부하는 것을 저주로 엄습하는 영광스러운 방법에 다름 아니다. / 위의 말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 공포감에 근거한 금기는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그것을 준수하게 하지 않는다. 그 반대도 결코 없지 않다. 장애물을 뒤집어엎는 일은 그 자체가 매력이다. 어떤 행위가 금지되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 일단 거기에서 물러나지만, 그러나 영광의 훈영이 금기 행위 주변에 감돌기 시작하면 금기의 위반은 전과는 다른 이미를 띤다.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 ...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사드는 말한다.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폭력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54-55)
 
3장 번식과 관련된 금기
 
 
“폭력은 무서운 동시에 황홀한 것이다.”(58)
 
 
4장 번식과 죽음의 친화성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기의 외설성과 번식의 기능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라는 통렬한 말을 한 바 있다.”(65) “내가 지금까지 말하려 한 것은 공허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 공허는 어떤 한 순간에 열리는 공허이다. 예컨대 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시체 안에 끌어들이며 그 부재와 관계하는 것은 부패이다. 나는 부패(직접적 체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이 아닌 상상력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부패의 체험)에 대한 나의 혐오감과 외설에 대해 느끼는 나의 감정을 비교해보고 싶다. 나는 혐오감, 공포감을 나의 욕망의 원칙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죽음보다 더 깊은 공허를 내게 열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은 처음에는 내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킬지 몰라도 이내 나의 욕망을 충동질한다. / 일단 이러한 생각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66-67)
 
“인간의 생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생명이란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한다. 다른 말들은 윤리학자의 객소리일 뿐이다.”(68)
 
5장 위반
 
 
위반은 금기를 부정하는 대신 오히려 금기를 초월하고 완성시킨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엄숙한 계명을 생각하면 우리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축복받은 군대와 찬양의 신이 동시에 그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금기와 살해는 어쩔 수 없는 공모 관계에 있다.”(71)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세계를 받쳐주는 금기들이 합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 터부는 원칙적으로 폭력이 그렇듯이(인간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계산이 아닌, 분노, 공포, 욕망 등의 감정 상태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그 자체로는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금기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금기를 무시하는 논리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금기의 비합리적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고찰이 벗어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영역에서는 이런 말이 가능하다. ‘신성불가침의 금기는 어쩌다가 한번 범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심지어 ‘금기는 점해지기 위해 거기에 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제까지 가능하다.”(71-72) “금기와 위반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한 학자는 뛰어난 종교사 해석학자 마르셀 모스이며, 그는 강의를 통해서 그 진리를 체계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출판 저서를 보면 금기와 위반에 관한 내용은 몇 개의 단편적인 무장에서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로제 카유와(roger caillois, 1913-1978)는 독보적이다. 그는 마르셀 모스의 강의와 조언을 참조한 ‘축제의 이론’이라는 항목을 통해 처음으로 위반의 양상을 정교하게 밝힌 작가이기 때문이다.”(73-74)
 
끝없는 위반. “대체로 금기가 그렇듯이 금기의 위반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반이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때, 거기까지, 그것이 가능하다.가 위반의 의미이다.”(74) “인간의 위반은 위반의 보완물인 세속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인간 사회가 오직 노동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게는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위반을 구성하며, 둘은 위반의 두 가지 보완적 형태들이다. 세속의 세계는 금기의 세계이다. 신성의 세계는 제한된 위반으로 열린 세계이다. 그것은 축제의 세계이고 군주들의 세계이고 신들의 세계이다. [...] 신성의 육화(肉化)인 신들은 경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인간들은 두 가지 충동에 동시에 복종한다. 하나는 두려움에 의한 거부적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매혹에 이끌린 경배이 충동이다. 금기 또는 터부는 신성과 한 가지 점에서 다를 뿐인데, 요컨대 신성은 금기의 매혹적 양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성은 금기의 어떤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주제는 바로 그러한 것들에서 출발하며, 적어도 그런 것들로 얽혀 있다. / 경제적 양상만이 신성과 금기에 대한 명백하고도 분명한 구분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 금기란 노동을 의미하며 노동이란 생산을 의미한다. 노동이라는 세속의 시간에는 사회는 재원을 가능한 한 축적하는 반면, 소비는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으로 억제한다. 반면 축제는 신성의 시간이다. 축제가 반드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왕의 죽음과 그에 이은 금기의 대대적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축제의 시간에는 일상적으로 금기이던 것이 허용되어 이따금은 오히려 위반이 강요되기도 한다.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축제의 시간으로 건너가면 카유아가 말한 것처럼 어떤 가치 전도가 발생한다.”(76-77)
 
6장 살해, 사냥 그리고 전쟁, 7장 살해와 제사
“인간성을 이루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고뇌, 아니 극복된 고뇌, 고뇌의 초월이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과잉이며 낭비이다. 삶은 모든 힘과 자원을 무제한으로 낭비한다. 사람은 그것이 창조한 삶 자체를 파멸시킨다.”(97)
 
8장 종교적 제사에서 에로티즘으로, 9장 성적 팽창과 죽음
“미세 생물체도 복합 동물처럼 내적 체험은 있다. 즉자적(卽自的) 실존에서 대자적(對自的) 실존으로의 추세는 복잡한 동물이나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세 생물보다 더 작은 불활성 미립자의 대자적 실존조차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대자적을, 이 용어들도 결코 만족한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우선 내부 체험 또는 내적 체험이라고 부르겠다. [...] 우리는 그것이 내포하는 자아에 대한 느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자아에 대한 느낌은 얼마나 견고하고 안정적인가의 문제로서 고립감의 정도에 비례한다. 성행위의 순간은 고립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다. 성행위는 외적으로 감지되는 행위인데도 자아에 대한 느낌을 잃게 하며 자아를 위기에 빠뜨린다. 우리는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위기는 객관적 사건이 내부에 일으키는 위기이다. 그리고 그 위기는 객관적으로 인지되는 위기이지만 내부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는 위기이다.”(113-114)
 
“인간 세계에서 성행위는 동물의 성행위와 구분된다. 인간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위반이다. 그러나 금기 위반이 동물적 자유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 행위와 마찬가지로 위반도 인간만의 것이다. 노동 행위가 조직적이듯이 위반 행위도 조직적이다. 에로티즘은 넓게 보면 조직된 행위이며, 조직적 행위인 한,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나는 에로티즘을 그 다양성과 변화 가운데서 고찰해서 도표로 제시해 보이겠다. 에로티즘은 특히 결혼이라는 위반을 통해 그 의미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결혼은 아주 복잡한 위반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위반으로서의 성격이 더 복잡다단하게 드러나는 형태이다. / 위반으로서의 특성, 죄과로서의 특성.”(123)
 
10장 결혼과 향연의 위반, 11장 그리스도교
 
“개별적 존재의 불안한 불연속성 앞에서 인간의 정신은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하나는 우리가 존재의 본질이라고 믿는 어떤 꺾이지 않는 느낌, 잃어버린 연속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고, 다른 하나는 제2의 충동으로서 인간이 죽음이라는 개체의 불연속성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인데, 말하자면 인간은 죽음도 침해하지 못하는 불연속성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인류는 불연속적 존재들의 불멸을 상상한다. [...] 그리스도교는 신성, 신적인 것을 창조신이라는 하나의 불연속적 인격체로 변형시켰다. [...] 종교가 아직 우상 숭배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는 위반 자체가 신성이었다, 그때에는 불결한 쪽도 순결한 쪽 못지않게 신성했다. 불결과 순결이 동시에 전체 신성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불결을 배척했다. 금기의 위반이 없이는 신성에 이를 수 없는데도, 죄를 전제하지 않고는 신성을 생각할 수 없는데도, 그리스도교는 죄를 배척한 것이다. [...]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끝까지 불결한 것과 불순한 것을 배척 또는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나름대로 신성의 범주를 정했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정의에 의해 불결, 불순, 조 등은 신성의 세계 밖으로 밀려 났다. 그렇게 밀려난 불순한 시성은 불경(不敬)의 세계가 되었다. [...] 그렇게, 불경은 한쪽은 신성이 순수한 쪽과 나머지 반쪽은 신성의 불결한 쪽과 결합하였다. 불경 세계의 악은 신성(神性)의 악마적 부분과, 선은 신성의 신성(神聖)한 부분과 결합하게 되었다. 실생활에서의 의미가 어떠하든 간에 선은 신성(神聖)의 빛을 받았다. 신성(神聖)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신성(神性)을 의미했다. 그러나 신성은 이내 선(善)에 바쳐진 삶, 즉 선과 동시에 신에게 바쳐진 삶과 연결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위반의 깊은 곳에서의 유사성은 여전히 뚜렷하다. 신자들이 보기에도, 무기력한 사람보다는 방탕아가 오히려 성인에 가까이 갈 수 있다.].”(136-139)
 
“보들레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요 적절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곧 최고의 관능, 그리고 유일한 관능은 확실하게 을 자행하는 데 있다고. 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관능은 남자든 여자든 생득적인 것이다.’ 나는 서두에서 쾌락은 위반과 관계가 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죄악은 위반이 아니다. 죄악은 유죄를 선고받은 위반이다. 죄악은 보들레르가 말하는 과실이다. [...] 사드는 악도 과실도 부인했다.”(145)
 
12장 욕망의 대상, 매음
 
“여자는 매혹적인데 그치지 않고 유혹적이다. / 여자는 남자의 공격적 욕망의 대상을 자처한다. / 모든 여자에게 매음이 소질이 잠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음은 여자의 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여자의 성향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조가 마음에 걸려 전적으로 피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값에 그리고 어떤 조건에 자신을 내줄 것인가의 문제만 남는다. 조건만 충족되면 여자는 언제나 자신을 물건처럼 제공한다. 매음은 문자 그대로 매매행위를 끌어들인다.”(149)
 
“보편적으로 볼 때 남자는 자신이 저지르는 규칙의 위반에 대한 감각이 없는 편이다. 규칙 위반이 있을 때 그가 여자의 당황한 태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자의 그런 태도가 없으면 남자는 위반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짐짓 꾸민 것이든 아니든, 여자는 수줍어하면서 여자의 인간성을 확립시켜주는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금기를 무시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러면 그때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잊지 않은 채,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금기를 어겼음을 수줍음으로 나타내는 일이 중요하다. 수줍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오직 천박한 매음에서인 것이다.”(153-)
 
13장 아름다움
 
“우리가 유혹을 느낀다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것은 우리의 내부에 이미 새겨진 경계 초월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선을 뛰어넘고 싶다. 그때 느껴지는 공포는 우리가 이르게 될 극단을 의미하며, 그런 앞선 공포가 없이는 우리는 극단에 이를 수도 없을 것이다. / 만약 어떤 남자가 얼마나 완벽하게 아름다운지 동물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여자를 더 탐낸다면, 그것은 그 여자를 소유할 때 동물저인 더러움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더럽혀지기 위해 욕구되는 법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구는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더럽힌 후에 오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 중요한 것은 그 얼굴, 곧 아름다움을 모독하는 일이다. 여자의 숨겨진 부분을 드러내, 거기에 음경을 삽입시키는 것이다. 아무도 성행위의 추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이 제사에서 이루어지듯 짝짓기의 추함은 고뇌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고뇌가 크면 클수록(상대의 힘에 비례하지만) 경계 초월의 느낌은 그만큼 커지며, 격정의 환희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취향과 시대적 관습에 따라 상황은 변할 수 있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인간성)은 성행위의 동물성을 더 드러내는(충격적이게 하는) 쪽으로 진행할 뿐이다. 사실 추한 성기나 성행위에 의한 대비 효과에 의해서조차도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만큼 남자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에로티즘의 본질은 더럽히기에 있고, 추함은 더럽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금기의 의미와 다름 아닌 인간성은 에로티즘에서 위반된다. 인간성은 위반되고 모독되고 더럽혀진다. 아름다움이 크면 클수록 더럽힘의 의미는 그만큼 커진다.”(166-167)
 
 
 
2부 에로티즘에 관한 몇 가지 연구 사례
 
 
연구 1 킨제이, 패거리 그리고 노동
 
연구 2 사드의 절대인간
 
연구 3 사드와 정상적인 인간
 
연구 4 근친상간의 수수께끼
 
연구 5 신비와 관능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 죽음처럼 우리 안에 있는 또는 없는, 그리고 오직 죽음에 의해서밖에 멈추지 않는 소비의 충동이다. 우리를 도취케 하는 ‘작은 죽음’ 또는 전복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사실 미미하다. / 모든 인간의 내부를 파고드는 전복에의 욕망은 그것의 모호성 때문에 죽음에 대한 욕망과는 다르다. 그것도 죽음에의 욕망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죽음에의 욕망인 동시에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양극단을 한꺼번에 거머쥐려는 훨씬 더 강한 삶에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기를 멈춘 채 살기를 원하는, 또는 사람을 멈추지 않은 채 죽기를 원하는 것으로서 테레사 수녀(Teresa of Ávila, 1515-1582)가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는다.’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한 극단적 갈망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죽지 않기 위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삶의 한 상태이다.”(280)
 
“마리 보나파르트는 테레사 수녀의 한 문단을 인용한다.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기다란 금창을 보았다. 창끝에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여러 차례 내 가슴을 찌르다가 창자까지 관통하는 듯했다. 그가 창을 빼내자 나는 마치 창자마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느꼈고, 이어 나는 신의 커다란 은총의 불에 휩싸임을 느꼈다. 고통이 너무 커서 나는 신음을 했다. 그러나 그 극단적인 고통의 달콤함이 얼마나 크던지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 육체가 고통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고통은 육체의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의 것이었다. 나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신의 애무가 얼마나 부드럽던지 나는 나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시라고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262-263)
 
연구 6 신성, 에로티즘, 고독 - 1955년 봄 철학학교에서의 강연
 
“나는 에로티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고 싶다. /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행위는 금기에 의해 금지를 당하며, 에로티즘의 영역은 그러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물들의 성행위와는 다르다. 에로티즘의 욕망은 금기를 눌러 이기는 욕망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과 자신의 대립을 전제한다. 인간의 성행위를 반대하는 금기들은 원칙적으로 어떤 특수한 형태를 갖는다.”(299)
 
“내 생각에는 우선 금기와 위반의 이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마르셀 모스의 구두 강의에서 비롯되었다. [...] 나는 개인적으로 그[모스]의 구두 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위반에 관한 마르셀 모스의 이론은 제자인 로제 카유와의 작은 책자 『인간과 신성』에 잘 드러나 있다. [...] 나는 여기에 카유와의 진술 도식을 빌려오고 싶은데,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인종학이 다루는 미개인들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었다. 에로티즘의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성적 방종의 시간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제물 헌납의 시간, 즉 살해의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 나는 원시 인간의 라스코 동굴 벽화, 말하자면 진정으로 동물성에서 인간으로 건너가던 원시 시대 인간, 즉 예술을 탄생시킨 초기 인간의 그림들에 바친 나의 한 저서[「라스코 또는 예술의 탄생」,『미술의 위대한 세기들』(제네바, 스키라사, 1955)]에서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는 위와 같은 논지를 전개시킨 바 있다. 나로서는 금기와 노동을 연결시키는 일이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노동은 예술이 발생하기 훨씬 존재해 왔다. 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흙 속에 묻힌 석기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동은 우리로 하여금 성생활, 살해, 죽음을 배제한 노동 세계가 처음부터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편의 성생활, 다른 한편의 전쟁, 살해, 죽음은 노동의 세계와 관련시켜 볼 때, 심각한 혼란이며, 더 나아가 전복이다. 그러한 시간들은 집단성을 획득하는 노동의 세계로부터 근본적으로 배척당했을 것이다. 노동 시간과의 관계에서 볼 때, 생명 창조와 소멸의 시간들은 밖으로 밀려났을 텐데, 노동의 시간이 중립적 시간이자 일종의 무색의 시간인데 반해, 생명 창조의 시간과 소멸의 시간들은 강렬한 감동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300-301)
 
연구 7 『에두아르다 부인』에 붙이는 서문
 
“신도, 말하자면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창녀이다.”(314)
 
결론
 
“철학은 결코 그것 자체로만 성립할 수 없는 학문이다.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는 이따금 사유의 총체, 우리를 세상에 존재케 하는 총체적 여건을 다룰 필요가 있다. [...] 철학이 문제 삼지 않는 의문은 의미가 없다. 그중에도 절대의 의문은 에로티즘의 절대의 순간(에로티즘의 침묵)이 대답으로 주어지는 의문이다. / 철학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 금기 시간의 연장이다. [...] 철학이 노동과 금기(노동과 금기는 상호 보완적 일치 관계에 있다)에서 위반으로 넘어가면, 철학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 노동과 비교해 볼 때, 위반은 놀이가 된다. / 놀이의 세계에서는 철학이 붕괴된다. / 위반을 철학의 근본으로 삼는(그것은 나의 사고방식인데) 행위는 언어를 침묵으로 대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정상에서 존재를 관조하는 태도이다. [...]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절대의 순산에 대한 알기 쉬운 접근을 시도(언어의 차원에서)했으며 그렇게 그 절대의 순간을 존재의 연속감과 결부시키고 싶었다. [...] 언어의 놀이도 금기와 위반의 놀이와 같은 놀이를 한다. 말을 마치자면, 총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은, 가능하면, 금기와 위반의 역사적 분석에서 새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거기에 반박하면서, 다시 말해 철학을 위반하면서, 존재의 정점(頂點)을 건드려야 할 것이다. 존재의 정점은 오직 위반의 충동(의식의 전개에 근거한 사고가 노동에 힘입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노동에 종속될 수 없음을 알기에 마침내 노동을 초월하려는 위반의 충동) 안에서만 그 온 모습을 드러낸다.”(319-322)
 
 
 

2014. 5. 15.

la part maudite


 
 
 
 
 
 






 
 
 
 
 
* 「소모의 개념」(1933) - 『저주의 몫』
 
 
“인간의 행위가 생산(production)과 보존(consommation)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 첫째, 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 둘째, 또 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 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dépense)라고 부르겠다.”(32)
 
 
“고전경제학에서는 원시적 교환이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고전경제학에서는 교환과 같은 획득의 수단이 획득의 욕구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파괴와 파멸의 욕구를 그 근원에 가지고 있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고대의 교환 형태는 물물 교환의 인위적 관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형태는 모스에 의해 미국 북서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를 통해 확인되었다.”(36)
 
 
*** 『저주의 몫』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오늘 출판하게 된) 책에서는 정치 경제적 사실들을 기존의 전문적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고찰하였고, 나의 관점은 곡물의 판매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 인간의 희생, 교회의 건축, 보석의 선물 등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갖는다. [...] 요컨대 나는 부의 ‘소모’(소비)를 생산과 관련해서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일반경제’(économie générale)의 원칙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 이 최초의 에세이는 개별적인 원리들을 벗어나서 지상의 에너지와 충동을 고찰하는 각각의 원리 - 지구과학에서 출발해서 사회학, 역사학, 생물학을 거쳐 정치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의 원리 - 가 제기하는 문제들의 열쇠가 되는 문제, 여태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초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리학,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조차도 경제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예술, 문학,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연구하는 운동과 관련이 있다. 다름아닌 과잉 에너지의 운동, 삶의 비등(沸騰, effervescence)이 그것이다. [...] 내가 고찰하는 비등, 지구를 부추기는 비등은 또한 나의 비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연구 대상은 연구 주체와, 더 정확히 말해서 ‘비등점의 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51-53)
 
 
“생물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그에 반하는, ‘사치’이다.”(54)
 
 
“총체적으로 산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사회 갈등과 세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총체적으로 발전하는 산업 경제의 일반적 전제를 연구할 때만, 한마디로 인간의 총체적 업적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만 파악이 가능하다.”(60)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한 산업의 성장을 합리적으로 방출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든지, 에너지의 축적이 결코 불가능한 비생산적 또는 낭비의 방법을 통해서든지 생산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가 지체 없이 밝히고 싶은 것은, 성장의 발산이 경제 원칙들의 전복-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럴의 전복-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 사상과 모럴의 전복은 제한된 경제 관점들로부터 일반적 경제의 관점들로 넘어갈 때만이 가능하다.”(66)
 
 
“원칙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삶을 유지해주는 활동(기능적인 활동, 동물에게 필요불가결한 근육활동, 먹이찾기 등)에 필요한 양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며 그 초과 에너지 덕분에 성장이나 번식도 가능하다. 식물이란 동물에게 초과분이 없었다면 성장도 번식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하는 생체화학작용은 과잉의 수익자이자 창조자인데, 이는 생명체의 대원칙이다.”(67)
 
 
2. 성장의 한계. 우선 삶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한 가지는 ‘태양 에너지는 풍요와 발전의 원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이 없이 준다. 천체물리학이 태양의 사치를 측정해내기 전부터 인간들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곡물이 익는 것도 태양 덕분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받지 않고 주는 사람을 태양의 광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지점에서 도덕적 판단의 두 가지 근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옛날에는 가치를 영예로운 비생산에서 찾았던 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가치를 생산에 결부한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은 에너지의 소모보다는 획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날의 명예란 유용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결과에 의해 정당화될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감정이 현실적 판단에 의해 -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해 - 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고대의 감정은 특히 부르주아 세계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의 반발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힘을 잃는 것은 오직 고전적인 경제 개념 속에서이다. / 태양 광선은 지표면에 에너지의 과잉을 초래해한다. 그러나 일단 생물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여서 그 에너지를 할 수 있는 한 남은 공간에 축적한다. 그런 다음 생물체는 그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낭비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발산에 앞서 생물체는 성장을 위해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한다.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때만 낭비에 자리를 내준다. 진정한 잉여는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이 일단 제한을 받을 때 시작된다. / 개인이나 집단은 일차적으로 다른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유일한 한계는 다름아닌 지구(정확히 말해서 생물체의 접근이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생물권)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다른 개인이나 그룹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살아있는 자연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총체적 성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지구라는 방대한 공간이다.”(69-70)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순간 행위의 유용성utilité을 고찰해야 한다. 유용성은 유지, 성장 또는 이익을 내포한다. 물론 성장에 과잉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는 그 점을 배제한다. 가능한 성장이 멈췄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死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박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불유쾌한 파멸보다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71)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성장은 없고 단지 모든 형태의 에너지의 사치스러운 낭비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사실 주로 광적 분출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사건은 사치의 발전이고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생명 형태들의 생산이다.”(74)
 
 
“성(sexualité)은 애초부터 욕심 사나운 자기만의 성장과는 다르다. 성행위는 종의 차원에서 보면 성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사치이다. [...] 동물에게 생식행위는 어느 순간 가능성의 극단에 이른 에너지의 원천을 갑작스럽게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기회가 된다. 그 낭비는 종의 성장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며 순간적으로 보면 개인의 실행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경우 그 소비는 파괴의 모든 가능한 형태들을 수반하며 재산의 탕진 - 육체의 탕진 - 을 부르고 최종적으로 죽음이라는 비합리적 사치 또는 과잉과 결합한다.”(76)
 
 
* 스페인 작가였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Bernardino de Sahagún, 1500-1590)에게 어떤 늙은 아즈텍인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87).
 
 
“내밀한 세계는 마치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명철한 의식과 도취의 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와 대립한다. 정상은 대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성은 대상의 확인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고, 명철성은 대상들에 대한 뚜렷한 인식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반면 주체의 세계는 어둠이다. 한 없이 의심스럽고 유동적인 이 어둠은 이성이 잠드는 사이를 기다려 괴물들을 잉태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가정한다. 즉 광기가 아니면 현실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 오직 현재에만 열중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고. 주체는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떠나 현실적 질서의 사물들에 종속된다. 주체는 노동에 구속되는 순간 소진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의 어떤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만을 걱정한다면 무슨 이유로 비축에 힘쓰겠는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일순간에 무질서하게 탕진할 수 있다. 내일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무익한 소모는 나를 즐겁게 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물이 내밀한 질서로 회귀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소모이다. 소모의 세계라고 폭력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제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희생제의에서 문제는, 여전히 파괴를 끌어들이되 제물 이외의 나머지를 치명적인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희생 제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위험에 빠져있다. 그러나 일정한 제의의 형태는 통상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 희생 제의는 공동의 작업 체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밀성을 되찾게 해주는 광적 행위이다. 폭력은 희생 제의의 원칙이다. 그러나 작업은 폭력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희생 제의의 폭력은 여전히 공공의 사물들을 보존하거나 통합하려는 우려에 대해 종속적이다. 개인들은 광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지 못하게 하는 그 광란은 그들을 다시 속세적 시간의 작업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그것은 부의 무한한 발전을 목적으로 한 행위라거나 과잉의 힘을 흡수하는 이익 추구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업은 유지만을 염두에 둔다. 작업은 축제(풍성한 작업은 축제를 부르며 축제는 다시 풍성한 작업의 기원이 된다)의 한계를 사전에 결정짓는다. 그러나 파멸을 모면하는 것은 공동체일 뿐이다. 제물은 여전히 폭력에 내맡겨진다.”(100-101)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제물은 부의 일부로서 잉여의 부분이다. 그리고 제물은 아무런 이익 없이 소모되기 위하여, 즉 영원히 파괴되기 위하여 유용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제물로 뽑힌 순간 제물은 폭력적인 소모에 약속된 저주의 몫이다. 그러나 저주는 제물을 사물의 질서에서 끌어내 그 빛이 살아있는 존재들의 내밀성, 고뇌, 심연을 비추게 한다. / 제물을 둘러싸고 우려가 확산되는데, 그 우려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사물이기 때문에 제물을 사물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면 파괴를 통해 제물의 유용성, 사물성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제물이 바쳐지는 순간 봉헌과 죽음은 분리되며, 제물은 제의 집행자의 소모적 제의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 현실적 [사물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제물뿐이다. 제물만이 축제의 극단적 충동에 온통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제의 집행자는 신적 특성을 띠더라도 주저하면서 그럴 뿐이다. 그의 내부에 무겁게 남은 미래가 그를 짓누르는 것이다. [...] 제의에서는 고뇌와 광란이 뒤섞인다. 광란이 고뇌보다 더 강한데, 조건이 있다. 제의의 결과가 바깥의 죄에, 즉 밖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제의 집행자는 자신의 재산이 될 수도 있었을 제물을 거부해야 한다. / 그러나 엄격하지 않다고 해서 의식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 경계를 넘어서는 과잉, 소모이며 그것만이 신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은 이러한 소모를 대가로 타락에서 벗어났고, 또한 현실적 질서의 냉혹한 타산과 인색함이 인간 내부에 끌어들인 사물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다.”(101-103)


이슬람 사회, 티벳 사회.
 
 
“경제의 일반법칙. 한 사회는 총체적으로 보면 항상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생산하므로, 사회는 잉여를 갖고 있다. 어떤 사회가 잉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태가 결정된다. 잉여는 사회적 동요의 원인이고, 구조의 변화, 모든 역사적 변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잉여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은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어떤 성장이든지 일정한 성장 뒤에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149)
 
 
산업사회. 부르주아의 세계. 소련의 산업화. 마셜 플랜.
 
 
10. 부의 궁극적 사용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 [...] 자아의식은 본질적으로 충실한 내밀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확보는 속임수이다. 의생제의는 신성한 물건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물건은 내밀성을 외재화한다. 말하자면 신성한 물건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과잉 성장에 맡겨져 있다. 대개 인간들은 생존의 목적이나 존재 이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장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에 매몰된 나머지 존재는 때로 자율성을 잃고 만다. 존재는 이따금 자원의 증가 때문에 미래에 있을 어떤 것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실 성장은 자원이 소비되는 순간과 관련시켜볼 때만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확인하기 어렵다. 의식은 그런 순간과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의식은 순전한 소비와는 달리 무가 아닌 어떤 것,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순간과 대립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식이란 성장(어떤 것의 획득)이 소비로 끝나는 순간의 결정적인 의미에 대한 의식이며, 다른 아무것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의식이다. / 명철성이 우위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완성되면 사회적 실존이 제자리를 찾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제자리를 찾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란 어떤 의미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변화와 비교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일은 최종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가 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트루먼이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은밀하고도 궁극적인 최종 목적에 맞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분명 허망한 것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정신은 낡은 목적론 대신 침묵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232-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