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6.

l'impossible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성귀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4.
- 제2부. 디아누스(몬시뇰 알파의 비망록에서 발췌한 메모들) 중 「에필로그」
 
 
잠의 늪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무신경하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그걸 우리는 잊고 있으며, 그런 무사태평함이 우리의 ‘명징한’ 태도에 거짓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당장, 최근 꿈에서 체험한 도살장의 야수성(내 주위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국 진정되었다)이 나로 하여금 죽음이 유발하는 ‘위반’의 감정에 눈뜨게 한다. 내 눈에는 금속의 무진장한 부식상태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지면의 곰팡이를 가까스로 모면하는 양지바른 곳의 확신 또한 마찬가지다. 삶의 진실은 그 상극과 유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죽음의 냄새로부터 도망치면, ‘감각의 일탈’이 그 냄새와 연결된 행복감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 중요한 건, 죽음과 그로 인한 삶의 무한한 재생을 우리는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숨겨진 뿌리의 그물망을 통해 대지를 그러쥐듯, 우리 역시 죽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정신적인’ 나무일 뿐 - 그래서 툭하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일 테다.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비밀을 안겨주는 고통의 샘에서 정직하게 물을 긷지 못한다면, 결코 웃음이 열광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계산으로 얼룩진 탁한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음란 자체는 고통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으나, 그 분출에 워낙 ‘경쾌하게’ 연결되다 보니, 온갖 고통 중에서 가장 풍요롭고, 가장 광적이면서, 가장 탐낼 만한 유형이 된 것이다.
 
 
때로는 구름까지 치솟게 해주고, 때로는 모래 위에 죽어 나자빠지게 방치하는 이 욕동(欲動)의 전모를 놓고 볼 때, 그 이중적 행태가 큰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의 실패로부터 영원한 쾌락이 탄생한다는 상상은, 녹아웃 상태에서는 구차한 위안일 것이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쾌락의 파랑(波浪)이란 단 하나의 조건 즉, 고통의 역류 현상 또한 그에 못지않게 끔찍하다는 전제하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 커다란 불행이 낳은 의혹은 오히려 쾌락을 만끽하는 이들, 행복이란 것을 불행의 어두운 후광 속에서만, 오직 변모된 상태로 감지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은 양면성을 해결할 수가 없는 거다. 궁극의 행복은 그 지속을 내가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확신을 갖는 순간부터, 궁극의 행복은 무언가 거북한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오로지 양면적인 상태 속에서만 정신 차려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불행과 쾌락 사이에 극명한 차이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의 의식은 공포 속에서조차 완전히 압살당하지 않는다. 고통을 현기증 나도록 증식시키는 것이 바로 쾌락의 의식이지만, 반대급부로 고문을 견뎌주게 해주는 것 역시 그 쾌락의 의식이다. 사물의 양면성에 그런 경쾌한 작동 원리가 워낙 현저히 구현되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무겁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근심 가득한 사람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교회의 진정한 오류는 윤리와 도그마에 있다기보다, 일종의 놀이인 비극적인 것과 노동의 징표인 심각한 것을 혼동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14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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