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8.

kuroshio sea

 
 
 
 
 
 
 
kuroshio sea - 2nd largest aquarium in the world 
please don't go by barcelona
 
 
 
 
 
 

모비 딕,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herman melville(1819-1891)
 




 
 
 
 




제23장.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몇 장 앞에서 벌킹턴이라는 선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뉴버드퍼드의 여인숙에서 우연히 만난, 바다에서 갓 상륙한 키다리 선원 말이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운 그 겨울 밤, '피쿼드' 호가 차갑고 심술궂은 파도 속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뱃머리를 찔러 넣었을 때, '피커드' 호의 타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벌킹턴이었다. 나는 경외감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겨울에 4년 동안의 위험한 항해에서 갓 돌아온 사람이 쉬지도 않고 사나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또다시 나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육지에 있으면 발이 타는 모양이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고, 깊은 추억은 묘비명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이 짧막한 장(章)은 벌킹턴의 묘석 없는 무덤이다. 벌킹턴은 폭푸에 시달리며 바람이 불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해변을 따라 떠밀려 가는 배와도 같다는 말만 해두겠다. 항구는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다.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와 저녁식사, 따뜻한 담요, 침구들, 우리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 강풍 속에서 항구나 육지는 그 배에 가장 절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한다. 배가 육지에 닿으면, 용골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 전체가 몸서릴 칠 것이다. 배는 돛을 모두 펴고 전력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를 고행으로 데려가려는 바로 그 바람과 맞서 싸우고, 또다시 거친 파도가 배를 때리는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애쓴다. 피난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벌킹턴이야, 이제 알겠는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진실을 그대는 어렴풋이나마 보는 것 같다. 무릇 깊고 진지한 생각은 망망한 바다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영혼의 대담한 노력일 뿐이며, 또한 하늘과 땅에서 가장 사나운 바람은 서로 공모하여 인간의 영혼을 배반과 굴종의 해안으로 내던지려 한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하지만 가장 숭고한 진리, 신처럼 가없고 무한한 진리는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할지라도, 수치스럽게 그쪽으로 내던져지기보다는 사남게 으르렁대는 그 무한한 바다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벌레처럼 육지를 향해 기어가고 싶어 하겠는가! 무시무시한 것의 공포! 이 모든 고통이 그렇게 헛된 것인가?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 벌킹턴이여! 완강하게 버텨라, 반신반인의 영웅이여! 그대가 죽어갈 바다의 물보라, 그곳에서 그대는 신이 되어 솟아오르리라!


- 151-152쪽.







2012. 12. 18.

도올 김용옥, "혁세격문(革世檄文)"


 
 
* 혁세격문 도올 목소리로 들으며 읽기
 
 
 

 
 
 
 


* 혁세격문(革世檄文) - "유권자의 90%가 투표하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늘 흘러간다!"




지금 조선의 들판이 혁명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조선의 먼동은 "다시 개벽"의 눈부신 햇살을 발하고 있다. 자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깨어나라! 새 시대, 새 정치의 함성이 그대를 부른다. 깨어난 4천만의 유권자들이여,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투표장으로 가라!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백두대간의 대혈인 국립공원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케이블카의 설치를 획책하고,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민이 교사(巧邪)와 허언(虛言)의 달인(達人)을 지도자로 떠받들 수 있는가? 민주라는 허명에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메이저 언론의 정보조작과 선거를 둘러싼 가치의 혼란이 민중의 너무도 정당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민주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호도하는 온갖 정교한 부정이 민주주의라는 타자(他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여! 또 당할 셈인가? 현 정권의 죄악을 반성 없이 반복할 셈인가? 이제 또 안보의 위협에 대책 없이 속을 셈인가? 마지막 순간을 앞둔 깜짝쇼에 대의(大義)의 정조(情調)를 굴복시킬 셈인가? 민생의 감언에 또다시 도덕을 망각할 셈인가?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 거저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오늘과 같은 악랄한 대기업의 횡포는 정부와 공권력의 비호가 없다면 당장 민중의 힘으로 타도될 것이다. 기업과 정부권력의 유착, 자본의 끝없는 폭리확대와 공무행정의 부패의 연환(連環)은 대중민생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이 희생에는 이제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자산가, 임금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대중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위장된 웃음의 눈꼬리를 가장하며, 정의와 도덕을 외면하고 반성과 실천을 거부하는 위선의 심장에 이제 종지부를 찍자! 더 이상 속지 말자!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나와 같이 수십만 권의 장서를 수십 년에 걸쳐 뇌리에 입력한 자나, 만 20세의 청순한 홍안의 유권자나, 동일한 한 표의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혁명은 어렵지 않다.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혁명은 어렵지 않다. 유권자의 90%만 매번 투표에 참여한다면 역사는 항상 선을 지향하며 뒤바뀌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권자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과연 수권(受權)의 자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국가기관이나 공영언론조차도 투표를 독려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직무유기를 일삼는 것이다. 국민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실상을 직시하라!
 


과거에는 최고의 권좌, 그 천명(天命)을 바꾸는 혁신(革新)의 대업에는 수없는 인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라! 동학의 우금치전투를 상기하라! 정주에서 폭파된 홍경래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처절한 고립무원의 항쟁이었던가? 그대들이 손에 쥐고 있는 투표용지는 이들 선열(先烈)의 잘린 모가지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민주의 나무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랐다. 대한민국처럼 비서구권에서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고 직접선거의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이룩한 선례를 축적하여온 나라도 별로 없다. 이것은 오직 선현(先賢)들의 피흘림의 투쟁으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체제 밖에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체제 안에서 한 치를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제 안에서 천 리를 갈 수가 있다. 우리 민중 모두가 19일 투표함으로 가기만 한다면 혁명은 이루어진다.


 
혁명은 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가?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의 혁명은 바스티유감옥의 철창을 터뜨린 불란서인들의 인권선언보다, 차르왕정을 무너뜨린 러시아혁명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침탈을 종식시킨 마오쩌뚱의 공산혁명보다도 더 막중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다. 우리의 혁명은 열강의 모든 근대적 노략질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결과물인 세계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출발이다.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득세, 선조의 파렴치한 임란책임회피, 그 뒤로 이어지는 노론의 장악, 세도정치,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와 친일파의 발호, 이승만의 권력찬탈과 무능한 6·25전쟁대처, 일제 만군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폭정, 이 모든 흐름이 "불의라도 박박 우겨대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통렬한 국민적 반성의 기회를 박탈해왔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올해가 임진왜란 일곱 환갑! 그 부끄러운 통치자들의 행위가 빚어낸 참혹한 민중의 삶을 일순간이라도 연상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좌표는 명료해진다. 그대들은 아는가? 가도입명(假道入明)의 명분으로 이 땅을 짓밟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침략군의 저주보다, 이 나라를 구해주겠다고 원정 온 명군(明軍)의 작태가 민중의 삶에 끼친 폐해가 구체적으로 더 심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는 정말 아는가? 임란 극복의 원동력은 이순신의 서남해상권 제패와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분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한 최후의 진로를 선택해야만 했고, 의병장 김덕령은 모진 고문 속에 죽어야만 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신선을 가장하고 소리 없이 스러져야만 했다. 선조는 이들 구국의 지도자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명군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찬양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여송의 사당을 만들었고 명군을 위하여 동대문 밖에 관묘를 지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었다는 은혜, 즉 재조지은의 찬양은 결국 불과 30년만에 정묘·병자의 양 호란(胡亂)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다시 불러왔다. 이러한 민중의 비운의 역사의 배면에는 6·25전쟁 등 현대사의 명암이 겹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미는 미국과의 정당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도주의적 친미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우리는 남·북한의 화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21세기 인류 최대의 염원을 달성케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생(民生)이라기보다는 민본(民本)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결의 주체성을 갖는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손에 쥔 투표용지 하나로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기나긴 좌절과 절망을 승리와 희망으로 회향시킬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30만 우국지사들의 원혼을 기억하라! 좌절된 반민특위의 역사를 반성하라! 이제야말로 우리는 투표용지 하나로 반민족행위자들의 작태를 일소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에 국민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모든 반민족행위자들의 생애에 종막을 드리워라!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 땅의 깨인 자들이여! 모두 남김없이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들의 투표가 이 민족 모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리라. 주변의 모든 동포를 설득하여 투표장으로 가라! 이 민족의 기나긴 불의와 독선과 배타와 불인(不認)의 역사를 끝장내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반동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분쇄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으로 가라!


 
 
 
 

2012. 12. 14.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 <정신현상학1>(1807),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IV. 자기 확신의 진리
 
 
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중화한 의식이 통일된다는, 자기의식 속에 실현되어 있는 무한성의 개념은 다면적이고 다의적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를 정확하게 식별하여 구별된 가운데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것, 또는 구별된 것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잡아내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구별된 것이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기의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 자기의식이란 스스로 무한한 운동을 펴나가는 가운데 일단 정립되고 난 성질과 정반대의 것으로 즉각 전화(轉化)한다. 이렇듯 이중화한 자기의식의 정신적 통일이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 ‘인정’의 운동이다.
  
자기의식에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대치될 때 자기의식은 자기의 밖에 벗어나 있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를 상실하여 타자를 두고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참다운 자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식으로 타자를 지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자기의식은 자기를 타자로 보는 그런 일은 지양해야만 한다. 이는 지금 얘기된 이중의 의미를 지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서 여기에는 또 다른 이중의 의미가 발생한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 이외의 다른 자립적 존재를 지양하고 이로써 자기야말로 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이 타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중의 의미를 지닌 타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지양은 동시에 이중의 의미에서 자체 내로의 복귀(eine doppelsinnige Rückkehr in sich)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기가 타자라고 하는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일체화된 자기의식은 자기를 되돌려왔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기의식은 타자 속에 있던 자기의 존재를 지양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완전히 방임함으로써 여기에 다시금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이쪽 편에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식과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운동이 여기서는 한쪽 편의 행위로만 표상되어 있지만, 한쪽의 행위라는 것은 이미 한쪽 당사자의 행위인 동시에 또 다른 쪽에서의 행위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인 완연한 존재이므로,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모두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자기의식도 단지 욕망(Begierde)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생명체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자존하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려 하건 간에 상대 쪽에서도 자기가 그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운동은 어김없이 두 개의 자기의식이 행하는 이중의 운동으로서, 양쪽 모두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양쪽 모두가 자기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고 상대방이 그와 동일한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자기도 또한 동일한 것을 해하게 되므로 한쪽에서만의 행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정말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쌍방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행위는 일차적으로 자기에 대한 행위인 것 못지않게 타자에 대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서로가 불가분 한쪽의 행위인 것 못지않게 또한 다른 쪽의 행위라는 점에서도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힘의 유희로 표현되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의식 내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힘의 유희에서는 방관자인 우리에게만 보여졌던 것을 여기서는 양극에 위치한 두 개의 자기의식이 바라보고 있다. 이 양쪽 중심에 있는 것도 자기의식으로서, 이것이 양극으로 분열되면서 두 개의 극이 서로의 역할을 교환해가며 저마다 반대의 역할로 무한히 이행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의 운동인 이상 자기의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자기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동시에 자체로 되돌아와 자기를 고수하는 것이어서 결국 자기가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명확히 의식되어 있다. 자기가 직접 타자의 의식이면서 또한 타자의 의식은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타자가 독자적 존재가 되는 데서도 스스로 독자적 존재임을 포기하여 타자의 독자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마다가 상대방에 대하여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이렇듯 중간항을 이루는 상호적인 타자를 매개로 하여 각기 저마다가 자기와의 매개 아래 자기와 합일된다. 결국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이중화한 자기의식이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인정의 순수한 개념으로서, 이제 이 인정의 과정이 자기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고찰해야만 하겠다. 우선 처음에 타나나는 것은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부등한 위치에 있는 경우인데, 여기서는 매개체로서의 중간항이 양극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한쪽은 인정될 뿐이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기만 하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의식은 우선 단일한 독자존재로서,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다. 이때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자아’로서, 자기의식은 직접 이 ‘자아’와 어우러진 가운데 ‘자아’라는 독자적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는 타자와 맞서 있는데, 이때 타자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성격지어진 비본질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타자 역시 자기의식인 까닭에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형성된다.
 
 
그러나 갓 출현했을 때의 이들 개인은 서로가 마주치는 대상일 뿐이어서, 비록 독립된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식은 생명(Leben)이라는 존재-여기서는 생명과 대상이 같은 존재이다-속에 매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의식은 서로가 직접적인 자기존재를 송두리째 말소해 자기동일적 의식을 지닌 순수한 부정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절대적인 추상화운동을 행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서로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자기의식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 자기존재를 확신하고는 있으면서도 타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진리가 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독자존재가 자신에게 자립적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서 순수한 자기확신으로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인정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타자에 대해서 있고, 또 각기 서로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행위를 통해서도 저마다 독자존재일 수 있는 순수 추상화운동(diese reine Abstraktion des Fürsichseins)을 펼쳐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순수한 추상운동으로서 상호간의 행위가 나타날 때, 이들은 각기 자기의 대상적인 양식을 순수하게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반적인 개별 사안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이중의 행위로서, 즉 타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은 각자가 서로 타자의 죽음을 겨냥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째로 또한 자기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reine Fürsichseins)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타인은 추호도 자기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지 않고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 밖으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는 다양한 일상사에 매여 있는 그런 의식이지만,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타자로서 맞서려고 하는 것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절대적 부정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한 이러한 확증을 필경 이로부터 발현되어야 할 진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확신마저도 전적으로 무산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의식을 떠받쳐주는 자연적인 기점(基點)이며 절대적 부정성까지는 갖추지 않은 자립적인 힘으로서, 그의 자연적인 부정 상태로서의 죽음은 아무런 자립성도 없는 부정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은 인정의 의의를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을 통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것은 확증되지만, 이러한 확증은 싸움을 견뎌낸 당사자에게 안겨지지는 않는다. 죽음을 걸고 맞서 있는 두 당사자는 자연적 존재라는 생소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파기하고 자립성을 고수하려는 양극에 자리한 자기의식으로서 서로가 맞서는 경우라고는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관계 속에 양극으로 대립해 있다는 본질적인 게기는 상실한 채 다만 죽은 통일체라고나 할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니, 이렇게 죽음의 궁지로 내몰린 상태에서는 이 중간 지점도 역시 대립 없는 양극에 묻혀버리게 된다. 양극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체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은 채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생사를 건 투쟁은 무의미한 부정으로서, 이는 상대를 타파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 파국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의식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험의 와중에서 생명이 순수한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본질적이라는 것이 자기의식에게 깨우쳐진다. 간신히 자기를 의식하기에 이른 의식에게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매개를 거쳐 나타난 것으로서, 자립적 생명을 본질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자아’라는 단순한 통일체는 최초의 경험의 결과로서 와해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그러나 일단 이 양자는 서로 부등한 상태에서 대립해 있는 가운데 서로가 통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잡이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형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
 
 
주인은 자주ㆍ자립적인 의식으로서, 단지 개념상으로만 그런 존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를 띤 자립적인 존재와 함께 묶여 있는 타자의 의식과 매개된 가운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다. 주인은 욕망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물성을 본질적으로 여기는 의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와 관계한다. 이때 주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은 ① 독자적으로 직접 상대방과 관계하는 측면과 ② 타자를 통하여 비로소 자립적일 수 있는 매개의 측면을 지니는 것과 함께, ① 위의 두 측면과 직접 관계하는 경우와 ② 어느 한쪽을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주인은 사물이라는 자립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여 노예와 관계한다. 노예는 바로 사물에 속박되어 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物性)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관계한다. 노예로서도 자기의식은 갖고 있으므로 사물에 부정적인 힘을 가하여 사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은 노예에 대하여 자립적인 존재이므로 노예는 부정의 힘을 가한다 해도 사물을 아예 폐기해버릴 수는 없고 사물을 가공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하여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은 마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물의 자립성으로 인하여 욕망의 의식에게 그러한 결과가 성취되지 못하던 참에 주인은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개재시킴으로써 사물의 자립성을 미끼로 하여 사물을 고스란히 향유한다. 이때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은 노예에게 위임되고 노예는 이를 가공하는 것이다.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노예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물을 지배하고 사물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는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행위자이다. 그러나 노예에 의한 주인의 인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인이 상대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주인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하고, 또 노예가 그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역시 그의 상대인 주인에 대해서도 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조성되어 있는 상태는 일방적인, 부등한 인정의 관계이다.
 
 
이렇게 해서 비본질적 의식이야말로 주인에게 있어서의 대상이며 또한 주인의 자기확신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진리라고 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대상은 본질적인 의미의 자기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주인의 자기실현으로 여겨지는 이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은 자립적인 의식과는 전혀 별개의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주인은 의식의 독립성을 객관적 진리로서 확신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 객관적 진리로서 있는 것은 비본질적 의식과 이 의식에 의한 비본질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되면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에 있는 것이 된다. 물론 노예의 의식은 일단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진리를 체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의 과정에서 바로 이 지배의 본질이 스스로를 지향했던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전도되었듯이 예속의 본질도 역시 그것이 관계가 실현되는 가운데 직접 드러나 보이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된다. 노예의 의식은 자체 내로 떠밀려 들어가서 자기복귀할 때 참다운 자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지배와의 관계 속에서 예속은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속되는 것도 자기의식이므로 이런 점에서 예속이 의미하는 그의 전체적인 실상이 고찰되어야만 하겠다. 우선 예속된 의식에서는 주인이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주인 쪽의 자립 자존하는 의식이 예속된 의식에서 객관적 진리를 이루지만 아직도 이 진리는 예속된 의식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은 예속된 의식이야말로 스스로가 부정성을 지닌 독자존재라는 진리를 사무치게 깨우친다고 하겠으니,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고나한 불안도 그리고 특정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도처에 생겨나는 이 순수한 운동, 즉 존립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유동화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인 절대적 부정성의 발로로서, 자기의식의 순수한 자립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노예의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순수한 독자적 요소도 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노예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자립성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식에 단지 막연한 심정상(心情上)의 자괴감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노예노동 속에서 현실적인 붕괴에 직면하게 한다. 이렇듯 노동을 수행하는 매순간마다 노예는 자기에게 가해진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뜻에서 사물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서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 비록 주인에 대한 공포가 지혜의 실마리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 채 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Durch die Arbeit kommt es aber zu sich sewlbst).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되는 셈인데, 어쨌든 노동에서 사물의 자립성이 유지되는 이상 노예는 사물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란 대상의 형식을 다듬어가며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노예에게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립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場)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die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물의 형성은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이 존재하는 모습을 띤다는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공포라고 하는 첫째가는 요소를 불식시키는 부정적인 작용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맞서 있다. 말하자면 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조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도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사물의 형식은 외면에 자리 잡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의식과 별개의 것은 아니며, 오직 형식만이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을 갖춘 진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eigner Sin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봉사하는 의식이 이렇듯 반성적인 자기복귀를 이루는 데에는 공포와 봉사라는 두 요소와 함께 사물의 형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하며 더욱이 이들 요소가 노예생활 전반을 뒤덮고 있어야만 한다. 봉사와 복종의 기강이 잡히지 않고서는 공포는 형식적인 데 그칠 뿐, 현실생활에 의식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는다. 또한 사물의 형성이 없이는 공포는 내면에 잠겨있을 뿐이어서 의식이 이를 명확하게 의식할 리가 없다. 더욱이 최초의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게 된다면 의식은 다만 자기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에 나타난 의식의 부정성이 역시 자기마저도 부정하난 힘이었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이 본질적인 자기실현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절대적인 공포를 실감하지 않은 채 다만 어쩌다 불안감에 젖어들 뿐이라면 자기를 부정하는 힘은 자기 밖을 맴도는 데 그치며, 자기의 심혼마저도 뒤흔들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적인 의식이 안주해 있던 스스로의 지반이 여지없이 동요하는 데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딘가에 기댈 만한 언덕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존립을 지탱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는 것은 속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라는 것도 예속된 상태의 자유에 그칠 뿐이다. 사물의 순수한 형태가 그대로 자기의 본질로 화하지 않는 한, 개개의 사물에 각인된 모습이 의식 전체를 감싸 안는 절대적 개념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물을 잔재주를 통하여 가공하는 손놀림에 그칠 뿐, 보편적인 자연력이나 대상 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220~234쪽
 


 

2012. 12. 9.

einstürzende neubauten

 
 
 
Einstürzende Neubauten
 
 
 
 
 
 
 
 
 
sabrina from "Silence is Sexy" (2000)
 
 
 
 
 
Stella Maris
 
 
 
 
Die Sonne
 
 
 
 
Nagorny Karabach  from "Alles Wieder Offen" [2007]
 
 
 
 
Einstürzende Neubauten - from the film "1/2 Mensch"
 
 
 
BERLIN LIVE 2011 - Einstürzende Neubauten, Caspar Brötzmann Massaker, Wire [ZDFKultur]
 
 
 
 
 
* The Garden from "Ende Neu" [1996]
 

독재자의 딸

 
 
 
 
 
 
 
 
 
 
 
 
 
 
 
 

2012. 12. 8.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해설



위키피디아 국악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C%95%85



문묘제례악 - 황종궁









종묘제례악 - 전폐희문





종묘제례악 보태평 - 희문, 기명, 귀인





종묘제례악 정대업 - 소무,독경,영관




종묘제례악 - 경회루 연향- 무무(武舞)




수제천





여민락



치화평




현악영산회상(하현도드리,타령)

 

2012. 12. 6.

필경사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 월스트리트 이야기
(bartleby, the scrivener, 1853/1856)
 
 
 
 
 
 
"하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2012. 12. 2.

인문학 공동체 - 인터뷰



- 우선, 인문학 공동체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가치
 
인문학공동체의 인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라틴어 studia humanitas에 대한 일본어 번역이다. 인문학이란 오직 인간에 대한 연구, 인간학일 뿐이다. 인간학 공동체에 대한 가치와 지속 가능성이란 이러한 인식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인간 곧 나와 우리에 관한 연구 안 해도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도 없고 따라서 고민도 공부도 없는 이와 그러한 인식 아래 배우고 고민하는 이의 평생은 어떤 의미로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정말 무엇이 실용적인가를 생각해보라. 인문학이야말로 실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공동체에 대한 독자들의 진지한 관심을 촉구한다.
 
지속가능성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부재로 인해 현실적으로 인문학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이는 물론 주체인 공동체 운영진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가령 우리나라에서 오직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인문학 공동체를 운영하는 바보는 없다. 실제로 여러 인문학 커미니티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모두 일정한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박봉 혹은 무급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모습을 본다.
 
문제는 인간학 혹은 인문학에 대한 우리나라의 가히 무지와 편견, 천박함이 어우러진 일반 대중의 인식이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인간학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티비와 주변에서 주워들은 인문학에 대한 황당무계한 소문(가령, 철학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혹은 반대로 인문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환상만을 품은 채 인문학을 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둘이다.
 
하나. 우선 당신이 인문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고자 굳이 찾아다니며 배워야 한다. 안 알아보고 안 배워도 좋다. 다 당신 인생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관심할 권리와 자신을 파괴할 권리 모두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먹고 살기도 힘든 당신에게 인간학만이 유일한 실용적인 길이라 주장하는 멍청한 주장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인문학이 도대체 무엇이며, 뭘 하는 학문인지 당신이 굳이 시간들여 배우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지금 인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평생 가지고 살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둘. 인문학 공동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 중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돕는 커리큘럼을 개발해야 한다(인문학에 대한 인식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주자!). 가령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대한 강의가 있다고 하자. 보통 음 심오한 니체의 철학이니 어렵겟구나, 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 책이 기존 도덕이란 것 자체가 나약한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이른바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이란 하나의 그냥 질병 혹은 그 증상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책임을 안다면 이 강의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가령 니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건 무슨 말인가? 잘못하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말라는 말인가? 죄책감이 잘못된 행동의 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 음, 씨바 쫄지마 ... 보다 이건 한 수 더 나간 것 같다 ... 그렇다면 ... 나꼼수가 니체적이었단 말인가?

- 다음으로는, 제도권 교육과 대안 공간에서의 교육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경험을 살려주실 수 있는, 구체적인 예시가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차이점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그러나 설문이 대학교육의 문제점보다는 오히려 대안교육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달라는 것으로 생각되니 일단 이렇게 적어보자.
 
첫째. 자신들이 굳이 강의를 알아보아, 굳이 돈 내고, 굳이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 특히 강일 당일날 다른 곳에 갈 수도 있는데 굳이 그 모든 현실적 압박과 유혹을 이기고 참여한 사람들이라 강의 분위기나 태도부터가 질적으로 다르다. 대학 강의처럼 학점을 위해 그냥 앉아 자기 인생을 허비하는 한심한 작태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둘째. 대학과 달리 선생님과 수강생, 호은 수강생들 사이에 지나친 위계질서가 없으니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편안한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한 마디로 교수와 학생이 아니니, 내가 쫄 이유도 없고, 미래의 어떤 혜택 혹은 자리 등과 같이 뭘 상대에게 바라거나 하지 않으니 자유롭다. 물론 이런 말이 합리적 권위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내가 핵물리학을 배우고 싶으면 오늘부터 조용히 적어도 15년 정도는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말없이 기존 시스템을 습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습득과는 달리, 인문학의 장점(?)은 이런 학습의 과정에서조차 질문하고 토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내 대학 수업에서 나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이 인문학 연구 공동체에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다. 그때 나는 대학에서는 제도적 제한, 가령 숫자의 제한으로 알 수 없었던 그 학생의 삶에 대해 듣고 말하고 서로 더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와 앎 그리고 배움을 통해 나와 학생의 사이는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앎이자 배움, 스투디아 후마니타스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인문학 공부의 약점은 없는가? 없다. 물론 스스로 알아보아, 스스로 돈 내고,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일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그것이 인간이 하는 일인만큼 왜 문제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 문제의 크기는 내가 아는 어떤 다른 공동체보다도 작다. 나는 오늘도 인문학을 배우러 버스를 타고 공동체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먼훗날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2. 11. 29.

seikilos


b.c. 200 - epitaph of seikilos
 
This song is one of the earliest examples yet found of a complete musical composition from the ancient world. Although other songs have been found that pre-date 'The Song of Seikilos' by many centuries, they only survive in fragments.

Seikilos carved the song on a grave pillar in dedication to his wife.
The Grave was discovered in 1883, near Aydin in Turkey. Archaeologists believe it dates between 200 BC and AD 100.

Seikilos also inscribed a poem on the gravestone, it reads:

"Hoson zēs, phainou
Mēden holōs sy lypou;
Pros oligon esti to zēn
To telos ho chronos apaitei."

In English:

"As long as you live, shine,
Let nothing grieve you beyond measure.
For your life is short,
and time will claim its toll."

From the Atrium Musicae de Madrid directed by Gregorio Paniagua, recorded in 1979.
 
 
 
 
 
 
 
 
 
 
 
 
Anakrousis. Orestes stasimo - Euripides
Atrium musicae de Madrid, 1979
 
 
 
 
First Chorus, Orestes Tragedy of Eurypides
Christodoulos Halaris
 
 
 
 
 
b.c. 138-128 -  two delphic hymns to apollo
 
First Delphic Hymn - Christodoulos Halaris
 
 
 
 
 
Hymn to the Muse
Mesomenedes of Crete.
a.d. 200

Part 1

"Sing for me, dear Muse,
begin my tuneful strain;
a breeze blow from your groves
to stir my listless brain."

Part 2

"Skilful Calliope,
leader of the delightful Muses,
and you, skilful priest of our rites,
son of Leto, Healer-god (paean) of Delos,
be propitious and stand by me."
 
 

 




 
 
 
 

 

alva noto + opiate + blixa bargeld [einstürzende neubauten]


Alva Noto & Opiate - Opto File 1 - 2001

 
 
 
 
Alva Noto + Opiate - Opto File 2 - 2001
 
 
 
 
 
Opto File 3
 
 
 
 
 
Alva Noto and Blixa Bargeld [Einstürzende Neubauten] - Electricity is Fiction
 
 
 
 
ANBB (Alva Noto & Blixa Bargeld) - Electricity Is Fiction live (Moscow Milk 2012)
 
 
 DANCITY FESTIVAL 2009 BLIXA BARGELD + ALVA NOTO AUDITORIUM FOLIGNO
 
 
 
 
 
Blixa Bargeld+Alva Noto. I wish I was 
 
 
 
 
Blixa Bargeld+Alva Noto. Widerstehen
 
 
 
Blixa Bargeld + Alva Noto, penultimo brano (Ravenna, 3 Luglio 2011)
 
 
Blixa Bargeld + Alva Noto, penultimo brano (Ravenna, 3 Luglio 2011)
 
 
 
 
 
* Einstürzende Neubauten - Stella Maris
 
 


강의 2012.10. - 2012.12. [종료]

 








* 철학입문 - 하이데거의 <철학 - 그것은 무엇인가?> 강독(진행중)

(하이데거, <<동일자와 차이>>(민음사) 73-101쪽에 수록)


홍대역 인근 대안연구공동체
2012년 11월 28일 개강. 5주.
매주 수요일 7시 반-9시 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05365

* '프랑스철학으로 읽는 고전 1 -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 강독/강의(진행중)


홍대역 인근 대안연구공동체
11월 20일 개강. 5주.
매주 화요일 7시 반-9시 반.

http://cafe.naver.com/paideia21/1832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32486&start=slayer

* 미셸 푸코의 삶과 책들 - 입문


3호선 경복궁 역 사직공원 앞 푸른역사아카데미.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반-9시반.
11월 8일 개강. 4주.
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67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16131

* 우리시대의 사상가들 - 질 들뢰즈:입문: 삶과 책들

신촌 서강대 앞 한겨레문화센터
11월 3일 개강.
매주 토요일 오후 1-3시.
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0002&searchword=&subj=F91266&gryear=2012&subjseq=0001





* 3호선 경복궁역 철학아카데미

































http://dvd.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17499246

10월 8일 개강.
매주 월요일 2시.
뮤직비디오로 보는 현대미술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041935

매주 월요일 4시.
프랑수아 줄리앙의 <현자는 고정관념이 없다>(한울) 강의.
http://www.acaphilo.or.kr/xe/lecture_2_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