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9.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 - 박성미





 
 
 
[펌 -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소통광장 자유게시판]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

박성미 조회수 102610 공감수 11356




원 글쓴이입니다. 페친 중 어느 분이 답답한 마음에 대통령 보라고 이 글을 청와대 게시판으로 가져오신 듯 싶습니다. 덕분에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글은 제가 썼으나 용기는 그분이 내어주신 셈입니다. 부담스러우셨는지 그분이 자진 삭제를 하셨고 청와대에서 글이 삭제된 데 대해 다른 의도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글을 다시 올립니다. 달아주신 답글들 중 주옥같은 글들이 많아 함께 올립니다. - 박성미





 * 원문



숱한 사회 운동을 지지했으나 솔직히, 대통령을 비판해본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번만큼은 분명히 그 잘못을 요목 조목 따져 묻겠다.
지금 대통령이 더 이상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를.

대통령이란 직책, 어려운 거 안다. 아무나 대통령 하라 그러면 쉽게 못 한다. 그래서 대통령을 쉬이 비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 물러나라 라는 구호는 너무 쉽고, 공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아무리 무능해도 시민들이 정신만 차리면 그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임무를 수행 해야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놓쳤다.

첫째, 대통령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몰랐다.

대통령이 구조방법 고민 할 필요 없다.
리더의 역할은 적절한 곳에 책임을 분배하고, 밑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고, 밑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아래 사람들끼리 서로 조율이 안 되고 우왕좌왕한다면 무엇보다 무슨 수를 쓰든 이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안행부 책임 하에서 잘못을 했다면 안행부가 책임지면 된다. 해수부가 잘못했으면 해수부가 책임지면 된다. 그런데 각 행정부처, 군, 경이 모여있는 상황에서 가 책임소관을 따지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면, 그건 리더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거다. 나는 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모든 행정부를 통솔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딱 한 명 밖에 모른다.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했어야 할 일은 현장에 달려가 상처 받은 생존자를 위로한답시고 만나고 그런 일이 아니다. 그런 건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구조 왜 못하냐, 최선을 다해 구조해라’ 그런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잘 못하면 책임자 엄벌에 처한다’ 그런 호통은 누구나 칠 수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은 그게 아니다.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왜 쇼핑을 못 한답니까?’ 그런 말 하라고 있는 자리 아니다.
공인인증서 폐기하라고, 현장에 씨씨티비 설치하라고, 그러라고 있는 자리 아니다.
일반인들이 하지 못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에 책임이 있는 거다. 대통령? 세세한 거 할 필요 없다. 대통령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일이 안 되는 핵심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점을 찾는 일, 뭐가 필요하냐 묻는 일. 그냥 해도 될 일과 최선을 다할 일을 구분하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포기할 일과 안 돼도 되게 해야 할 일을 구분해주고, 최우선 의제를 설정하고 밑의 사람들이 다른 데 에너지를 쏟지 않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는 일, 비용 걱정 하지 않도록 제반 책임을 맡아 주는 일
영화 현장의 스탭들은 감독이나 피디의 분명한 요청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안 돼는 일도 되게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어려운 일을 되게 하려면 당연히 비용이 오버 된다. 이 오버된 제반 비용에 대한 책임. 그것만 누군가 책임을 져 주면, 스탭들은, 한다.

리더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안 돼도 되게 하려면’
밑의 사람들이 비용 때문에 망설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것이 구조 작업이던 뭐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면 무조건 돈이 든다. 엄청난 돈이.
만약 사람들이 비용 때문에 망설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그건 대통령이 정말로 누군가의 말단 직원인 적도 없었고 비용 때문에 고민해 본 적도 없다는 얘기다.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도 다 아는 사실이다.
만약 리더가 너 이거 죽을 각오로 해라. 해내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협박만 하고 비용도 책임져주지도 않고, 안 될 경우 자신은 책임을 피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구하는데 돈이 문제냐 하지만, 실제 그 행동자가 되면 달라진다. 유속의 흐름을 늦추게 유조선을 데려온다? 하고 싶어도 일개 관리자가 그 비용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러나 누군가 그런 문제들을 책임져주면 달라진다
“비용 문제는 추후에 생각한다. 만약 정 비용이 많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진다.”
그건 어떤 민간인도 관리자도 국무총리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힘 없는 시민들조차 죄책감을 느꼈다. 할 수 있었으나 하지 못한 일, 그리고 전혀 남 일인 것 같은 사람들조차 작게나마 뭘 할 수 있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이끌 수 있었던, 문제점을 파악하고 직접 시정할 수 있었던, 해외 원조 요청을 하건 인력을 모으건 해양관련 재벌 회장들에게 뭐든 요청하건,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그 많은 걸 할 수 있었던 대통령은 구조를 위해 무슨 일을 고민했는가?

둘째, 사람을 살리는 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정부는 필요 없다

대통령은 분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왜 지휘자들은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안았을까?
그것이 한 두 번의 명령으로 될까?

날씨 좋던 첫째날 가이드라인 세 개밖에 설치를 못했다면, 이러면 애들 다 죽는다. 절대 못 구한다 판단하고 밤새 과감히 방법을 바꾸는 걸 고민하는 사람이 이 리더 밑에는 왜 한 사람도 없었는가? 목숨걸고 물 속에서 작업했던 잠수사들, 직접 뛰어든 말단 해경들 외에, 이 지휘부에는 왜 구조에 그토록 적극적인 사람이 없었는가?

밑의 사람들은 평소에 리더가 가진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급한 상황에서는 평소에 리더가 원하던 성향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평소 리더가 어떨 때 칭찬했고 어떨 때 호통쳤으며, 어떨 때 심기가 불편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리더가 평소에 사람과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사람이라면
밑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던 말 하지 않아도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한다.

쌍용차 사태의 희생자들이 분향소를 차렸을 때
박근혜에게 충성하겠다 한 중구청장은 그들을 싹 쫓아냈고
대학생들이 등록금 때문에 죽어가도 아무도 그걸, 긴급하게 여긴 적이 없고
모두 살기보다 일부만 사는 게 효율에서 좋고.
자살자가 늘어나도 복지는 포퓰리즘일 뿐이고.
세 모녀의 죽음을 부른 제도를 폐지하는 데에 아직도 대통령이 이끄는 당은 그토록 망설인다.
죽음을 겪은 사람들을 ‘징징대는’ 정도로 취급하고
죽겠다 함께 살자는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뿌렸다.
이곳에선 한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직도 이들에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고, 대의가 더 많다.
‘사람은 함부로 해도 된다’ 는 이 시스템의 암묵적 의제였다.

평소의 시스템의 방향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던 상황에서
이럴 때 대통령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라고 지시를 하면,
밑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진심으로 아이들의 생명이 걱정되어서 그런 지시를 내린 건지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보여줘라 라는 뜻인지,
정부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를 하라는 건지,
여론이 나빠지지 않게 잘 구조를 하라는 얘긴지,
헷갈리게 된다.
대책본부실에서 누가 장관에게 전했다.
“대통령께서 심히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말이 ‘아이들의 안위와 유가족들의 아픔을 염려하고 있다는’ 건지
‘민심이 많이 나빠지고 있어 자리가 위태로워질 걸 염려한다는’ 건지
밑의 사람들은 헷갈린다.

대신 지시가 없어도 척척 움직인 건
구조 활동을 멈추고 의전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
재빨리 대통령이 아이를 위로하는 장면을 세팅한 사람들
대통령은 잘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다 라고 사설을 쓸 줄 알았던 사람들.
재빨리 불리한 소식들을 유언비어라 통제할 줄 알았던 사람들.
구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애를 쓴 사람들.
선장과 기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방향으로 여론몰이를 한 사람들과
순식간에 부르자마자 행진을 가로막고 쫙 깔린 진압 경찰들이다.

이것은 이들의 평소 매뉴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소 리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

내가 선거 때 박근혜를 뽑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가 친일파라서도 보수당이어서도 독재자의 딸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남일당 사태 때 보여준 반응, 자신의 부친 때문에 8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거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안타까움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 대해 그토록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으로 뽑아선 안 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리더의 잘못을 여기에 있다.
밑의 사람들에게
평소 사람의 생명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잘못된 의제를 설정한 책임.

셋째,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막대한 권한과 비싼 월급, 고급 식사와 자가 비행기와 경호원과 그 모든 대우는 그것이 [책임에 대한 대가] 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조직에선 어떤 일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리더가 책임지지 않는 곳에서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 법을 알겠는가?

자신이 해야할 일을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사람을 살리는 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결정적으로,
책임을 질 줄 모르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덧붙임.
세월호 선장들과 선원들이 갖고 있다던 종교의 특징은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못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이라 한다.
이거,
굉장히 위험한 거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는 대통령,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사람에 대해 아파할 줄도 모르는 대통령은 더더욱 필요 없다.

진심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원한다.


* 댓글은 아래의 청와대 홈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http://www1.president.go.kr/community/sympathy/free_board.php?srh%5Bsearch_key%5D=memb_nm&srh%5Bsearch_value%5D=%B9%DA%BC%BA%B9%CC&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577537&srh%5Bdetail_no%5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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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떠난 후 조화는 합동분향소 밖으로 내보내 졌다. (사진=노컷TV 민구홍PD)

http://www.nocutnews.co.kr/news/4015852








2014. 4. 17.

소립자

 
 
 





"돌이켜 보면, 소년 브뤼노의 마음속에는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59쪽)
 

2014. 4. 15.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

 
 
 
 
 
 
 
 
"브론스키는 그녀[안나 카레니나]에게 있어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이교도의 신, 열정과 사랑의 신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신의 영원한 비호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안나는 신을 버린 스스로를 심판하고 신의 모습을 가장한(아니 그녀가 신의 형상을 입힌) 브론스키를 심판하려 한다. 브론스키가 영원히 안나 자신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녀가 브로스키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 연진희, <작품해설>, <<안나 카레니나 3>>(민음사, 582쪽)
 
 





 




2014. 4. 13.

camera lucida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385846





풍크툼(punctum) - "내가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실제로 나를 찌르 수는 없다. 이름붙일 수 없음은 혼란스러움의 확실한 징후이다."(60)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가 자신의 할머니가 죽었을 때 말한 것처럼 나도 "나는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내 괴로움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85)



2014. 4. 1.

pierre bourdieu



*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1965
Un Art moyen. Essais sur les usages sociaux de la photographie
『중간 예술. 사진의 사회적 사용들에 대한 에세이』,
주형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4.
1970
(with Jean-Claude Passeron) La reproduction : Éléments d’une théorie du système d’enseignement
피에르 부르디외ㆍ장 클로드 파세롱,
『재생산 - 교육체계 이론을 위한 요소들』, 이상호 옮김, 동문선, 2000.
1977
Algérie 60: Structures économiques et structures temporelles
『자본주의의 아비투스』
최종철 옮김, 동문선, 1995.
1979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上ㆍ下)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5.
1980
Questions de sociologie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옮김, 솔, 1994 [부분번역]. /
『사회학의 문제들』
신미경 옮김, 동문선, 2005.
1982
Ce que parler veut dire : l'économie des échanges linguistiques,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옮김, 새물결, 1995.
1984
Homo academicus
『호모 아카데미쿠스』
김정곤 옮김, 동문선, 2005.
1988
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r
『나는 철학자다.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김문수 옮김, 이매진, 2005.
1992
Les règles de l'art : genèse et structure du champ littéraire
『예술의 규칙. 문학 장의 기원과 구조』
하태환 옮김, 동문선, 1999.
1993
Leçon sur la leçon
『강의에 대한 강의』
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9.
1994
Raisons pratiques.
Sur la théorie de l'action
『실천이성. 행동의 이론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5.
1996
Sur la télévision suivi de L'emprise du journalisme
『텔레비전에 대하여』
현택수 옮김, 동문선, 1998.
1997
Méditations pascaliennes
『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1997
La misère du monde
『세계의 비참』(1ㆍ2ㆍ3)
김주경 옮김, 동문선, 2003.
1997
Les usages sociaux de la science. Pour une sociologie clinique du champ scientifique
『과학의 사회적 사용』
조홍식 옮김, 창비, 2002.
1998
La domination masculine
『남성지배』
김용숙 옮김, 동문선, 2003.
1998
Contre-feux
『맞불』
현택수 옮김, 동문선, 2004.
2001
Contre-feux 2
『맞불 2』
김교신 옮김, 동문선, 2003.
2004
Esquisse pour une auto-analyse
『자기분석에 대한 초고』
유민희 옮김, 동문선, 2008.
 
 
-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백의, 2001) 중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기」
- 『경계를 넘어 글쓰기. 다문화세계 속에서의 문학』(민음사, 2003) 중 「위기 속의 문화」
-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 2005) 중 「대담: 권터그라스, 피에르 부르디외 - 자본주의를 길들이자!」
 
* 부르디외 관련


- 현택수, 『문화와 권력 - 부르디외 사회학의 이해』, 나남, 1998.
- 랠프 페브르ㆍ앵거스 밴크로프트, 『스무살의 사회학. 콩트에서 푸코까지, 정말 알고 싶은 사회학 이야기』, 민음사, 2013.
- 하상복, 『부르디외 & 기든스. 세계화의 두 얼굴』, 김영사, 2006.
- 스테판 올브리지,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 이상길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 루이 핀토,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 김용숙 옮김, 동문선, 2003.
- 김동일,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 갈무리, 2010.
- 조광익, 『현대관광과 문화이론 - 푸코의 권력이론과 부르디외의 문화적 갈등이론』, 일신사, 2006.
- 『인문예술잡지 F 5호. 동시대성과 예술/부르디외를 읽자』, 문지문화원사이, 2012.
- 양은경, 『문화와 계급 -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동문선, 2002.
- 홍성민, 『문화와 아비투스 - 부르디외와 유럽정치사상』, 나남, 2000.
-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 200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94630&cid=472&categoryId=114
-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 피에르 부르디외의 읽기와 쓰기』, 현암사, 2012.
 
 

 


https://www.blogger.com/blogger.g?blogID=69287885569930377#editor/target=post;postID=6561376027158364938




http://www.amazon.fr/Premi%C3%A8res-le%C3%A7ons-sociologie-Pierre-Bourdieu/dp/2130529089/ref=sr_1_1?ie=UTF8&qid=1396324337&sr=8-1&keywords=premiere+lecon+sur+la+sociologie+de+p.+bourdieu

 
 
 
 
* 파트리스 보네위츠,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1997)』, 문경자 옮김, 동문선, 2000.


 
1. 어떻게 ‘위대한 사회학자’가 될 수 있는가? - 과거를 수용하면서


 
I. 전기적 요소들. 개인적 여정과 사회적 배경


 
1. 부르디외의 지적 여정은 철학에서 사회학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부르디외 사회학은 개인과 집단의 역사 속에서 구축되는 아비투스(habitus)에 근거하여 개인적ㆍ집단적 실천을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과학의 인식론이 대상화하는 주체의 대상화를 함축하는 만큼, 다시 말해 어떤 다른 연구대상과도 마찬가지로 사회학자에게도 동일한 과학적 원칙을 적용시킨다는 사실을 함축한다(13). - 전기적 요소들은 저자의 몇 가지 객관적 특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 하나의 이론은 결코 사회적 진공상태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의식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문맥 속에 위치한다. - 부르디외의 첫 연구들은 인류학에 속하기는 하지만 고전적인 구조주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 부르디외의 접근법은 하나의 ‘사회학적 경향’을 낳았다. 사회학은 하나의 통합된 학문분과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오늘날 경합을 벌이는 주된 사회학 이론은 다음의 4가지이다. 1) 레이몽 부동의 방법론적 개체주의. 하나의 사회현상을 개인행위들의 집합의 산물로 이해한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견해와 유사한 관점에서 행위의 논리는 행동 주체들의 합리성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2) 미셸 크로지에의 전략적 접근법. 기업 및 관공서와 같은 조직체계 내의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을 주된 목표로 삼는다. 합리적이지만 한계를 갖는 행동 주체들은 자기 권력의 토대가 되는 자유재량의 여지를 마음껏 사용한다. 3) 알렝 투렌의 행동사회학 혹은 행동주의. 사회행동의 분석 및 사회변화에 있어서의 행동의 중요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4) 피에르 부르디외의 발생적 구조주의 혹은 비판적 구조주의(구성적 구조주의, 구조주의적 구조주의).
 
 
 
“‘구조주의’ 혹은 ‘구조주의적’이라는 용어로서 나는 단지 신화와 언어 등과 같은 상징체계만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 행위자들의 의식과 의지에 종속되지 않고 그들의 실천 혹은 그들의 표상을 방향짓거나 구속할 수 있는 객관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또한 구성주의(constructionisme)라는 용어를 통해 나는 한편으로 지각, 사유, 행동 구조 [...] 및 사회구조들 자체는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적 기원을 갖는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19-21). 부르디외의 저작은 늘 의문에 대해 열려있지만, 늘 참다운 인류학을 확립시키려는 의지에 근거해 있다.
 
 
II. 이론적 계보
 
 
1.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에게서 차용해온 것은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해 재정의의 대상이 된다. - 마르크스의 사회학은 몇 가지 주요 개념들에 근거해 있다. 사회계급에 대한 부르디외의 접근은 [‘명목론적’(名目論的, nominalist) 접근과는 대조적인] ‘현실주의적’ 접근으로 정의될 수 있다. 부르디외의 접근법은 사용된 범주들이 실제 현실의 재생산이 아니라 관찰자의 우연한 창작이라는 명목론적 견해에 대립된다. -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개선한다. 부르디외 사회학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강력한 친화력이 있다. 양자는 모두 지배의 패러다임을 통해 사회질서를 사유한다. 계급대립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회적 공간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적 현실은 역사적으로 서로 투쟁해온 계급들이 맺은 역학관계의 총체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비판의 임무를 띠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용도를 갖는다. 문화 비판, 학교 비판, 더욱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와 그 신화 비판이 그러하다(25). 그러나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주의와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부르디외는 객관적 계급과 호명된(呼名, appelation) 계급을 구분하여 명목론/현실주의의 딜레마를 벗어나고자 한다. ‘거리에 실제로 존재하는’ 호명된 계급으로의 이행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암시하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을 존재케 하는 호명 작업이 이에 선행한다. 다음으로 부르디외가 의미관계 및 상징 재화, 상징 지배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있다. 계급투쟁은 계급화 투쟁의 형식을 띠는 상징투쟁으로 확장된다.



2. 피에르 부르디외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로부터 특히 사회학적 분석에 있어서 표상의 역할 및 정당성(legitimacy)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 베버의 사회학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인식은 개인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를 거친다고 가정함으로써 기존의 순수하게 자연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인 설명방식에 대립된다. 인간의 행위는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해석에 의해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그것의 전개 과정 및 결과를 인과관계에 따라 설명하려는 학문을 ‘사회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또한 ‘행동’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행위자 혹은 행위자들이 행위에 어떤 주관적 의미를 전달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행위로 이해한다. ‘사회적’ 행동은 행위자 혹은 행위자들이 의도한 의미에 따라 타인의 행위-타인의 행위와 관련하여 그의 행동 전개 방향이 정해진다-와 관계되는 행동으로 이해한다.”(28-29) - 베버의 문제의식에서 정당성 개념은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의 정치권력이 어떻게 반드시 강제에 의하지 않고도 지속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정당성은 일반적으로 한 사회 구성원들의 대다수에 의해 (정당한 것이라고 혹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는 무엇이다. 전통적 정당성, 카리스마적 정당성, 법적-합리적 합리성. 부르디외는 하나의 메커니즘에서 왜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지배에 동의하고 수락하는지, 더 나아가 왜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명시적ㆍ암묵적) 합의적 속에서 자신의 지배자들과 연대감을 느끼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베버의 이론적 업적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의 정당성보다는) 하나의 행동, 의미, 의견, 실천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메커니즘,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정당화(legitimation) 개념이다. 하나의 권력은 어떻게 자신의 정당성을 창출하는가?(29)



3. 에밀 뒤르켐(Emil Durkheim, 1858-1917)의 기여는 훨씬 더 비중이 크다. 1895년 뒤르켐이 출간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 담긴 두 주요 방법론적 규칙들. 1) 사회적 사실들(faits sociaux, social facts)을 현실상황으로 간주해야 한다. 물리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자처럼 거리를 두고 외부의 관찰자처럼 사회적 사실들을 연구해야 한다. 실증주의(實證主義, positivisme). 실증주의는 외부로부터의 관찰에 의해 포착되는 사실들만을 분석한다. 실증주의는 객관적 세계(사실들의 영역)와 주관적 세계(의식, 가치판단, 직관의 영역) 사이의 단절을 가정한다(30-31). 2) 사회적 사실들은 사회적 사실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사회적 사실을 결정짓는 원인은 개인의 의식상태가 아니라 이전에 발생한 사회적 사실들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에게 가해지는 (유전ㆍ본능 등의) 생물학적 요인, (콤플렉스ㆍ욕구불만 등의) 심리적 요인 등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원칙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변수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관계를 연구, 관찰된 현상들 사이의 예측을 가능케 하는 비교방법을 제안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 방법론은 사회현실을 지배하는, 곧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표면상의 사회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질서를 드러내줄 객관적 법칙들의 탐구를 목표로 하는 객관주의(objectivisme)적 연구방법론이다. 그러나 강한 의미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일정한 ‘규칙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르디외는 동시에 기존 뒤르켐 이론의 문제점이었던 절대적 실증주의와 초월적 보편주의의 함정을 피하고자한다.


2. 어떻게 여전히 사회학자로 남을 수 있는가? - 비판적 방식을 채택하면서



I. 사회학의 방식
 
 
1. 상식과 단절해야 할 필요성은 상식이 감추고 있는 위험에 의해 설명된다. - ‘상식’은 기존 사회나 특정 사회집단들이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고 모든 합리적 정신에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여론 혹은 신념 들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다. - 상식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상투어들,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관념들은 과학적 인식에 장애가 된다. 이미 예전에 뒤르켐이 사회현실에 대한 거짓된 명제들에 관하여 우리에게 경계심을 품으라고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살은 무엇보다 심리적인 문제, 개인의 자살적 성향에 의해 설명된다고 믿는다. 또한 배우자의 선택은 사랑의 문제이며, 범죄는 특수한 성격을 타고난 개인의 문제라고, 때로는 심지어 자신의 행위가 유전적 요소들에 의해 설명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사회학자는 개인들이 지각하지 못하는 여러 변수들에 근거해 설명을 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학자의 첫 번째 의무는 선입견을 멀리하는 일이다. / 상식과의 단절은 이중의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한편으로 상식은 사회현상들에 대해 과학적이지 못한 서명을 제공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상식’의 지각의 범주들이 구성되는 방식 때문에 그러하다(36). 일상적 담론에 내포된 선취 관념들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은 따라서 자신의 실천에 대해 설명하는 개인이 자신의 담론을 만들어낸 조건 전체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 된다. 이것은 무의식의 원칙이다(37).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투명한’ 행위의 의미는 그것을 행하는 주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의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완벽한 관계 체계에 속해 있다. 행동은 이 체계 속에서 이 체계에 의해 수행된다.”(37-38)
 
 
- 사회학자는 상식과 단절하기 위해 또 하나 추가되는 난관에 직면한다. 그것은 사회학자 자신이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는 자신을 규정짓는 모든 구속과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한 극도의 의식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조심성만이 ‘자기 계급 중심주의,’ 다시 말해 모든 개인 혹은 집단을 자신이 속한 집단 혹은 사회 계급의 가치ㆍ규칙ㆍ행동에 따라 판단하는 무의식적 경향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사회학자는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어떤 것이 중요하거나 가벼운 것으로 보인다는 것, 혹은 심지어 특별히 부각되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전혀 관찰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39). 인식론적 성찰은 사회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부르디외는 사회학의 사회학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투쟁한다.



2. 사회학적 접근은 사회적 사실이 구성됨을 전제로 한다. - 전통적 접근방식과 단절하는 과학만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뒤르켐, “사회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에 의해 설명된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 특히 사회철학은 스스로를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역사적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심리학은 정신 구조들이 이미 통합된 사회적 구조들임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국가를 개인들의 행동을 무제한 구속할 수 있는 최고의 조정기관으로 간주하는 법학과 정치학, 심층적 사회기능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는 경제학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사회학은 사회학의 과학성을 주장한다(41-42). - 사회학적 사실의 구성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다. 사회적 사실은 쟁취되고 구성되며 확인되는 것이다.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한한 것으로 가정된) ‘현실 전체’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문적 대상들은 애당초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심에 상응하여 선택된다. 자기 자신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하는 것은 사회학자의 임무이다. 사회학자는 가설과 개념을 세운다. 부르디외는 ‘모든 취향이 자연 안에 잇다’고 주장하는 상식에 반대하여, 모든 취향은 그 자체로 사회적 구성물이며, 따라서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 언어와 단절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 “언어의 규칙성을 깨뜨린다는 것은 - 문외한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두드러진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 자연 발생적 담론 속에 각인되어 잇는 사회철학과 단절하는 것이다.”(43-45)



관계사회학. 사회적 대상은 일군의 내적 관계들, 일종의 관계체계를 감추고 있으며, 이에 대한 분석은 그 대상의 기능을 설명해줄 것이다. ☞ 사회적 장(場, champ, field)의 개념. ‘장’은 “위치들(혹은 지위들)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이 공간의 특성은 공간 내에서 각기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의해 달라지며,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행위자들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분석 가능하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의 공간으로 정의된다(47). 사회학자는 무비판적인 상식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주체와 그들의 말에 의해 사회적 사실이 결정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II. 참여사회학
 
 
1.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많은 비판을 개진시킨다. - 부르디외 사회학은 인식론적ㆍ방법론적 비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자신을 사회학 내의 다양한 전통들을 넘어서고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인식한다. 이른바 객관주의는 ‘사실은 스스로 드러내게 마련’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경험주의로 귀결되기 쉽다. 따라서 사회학자는 수동적으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유일한 임무로 삼는다. 사회학에서 이 같은 방식은 주체와 그가 갖는 표상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에 대한 탐구로 귀결되며, 이는 외부로부터 주체를 억압하는 결정론으로 이끌려간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의 분석에서처럼 개인은 구조의 노리개가 된다. 반대로 주관주의는 개인적인 것에 특권을 주고, 주체, 특히 개인의 타고난 재능, 사함과과 덕스러움, 장점과 결점 등과 같은 것으로 규정되는 인격(인성)의 분석에 집중한다. 주관주의는 주체의 선택과 자유를 강조하며, 주체가 모든 결정론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하는 개인주의로 귀결된다(48-49).


한편 현장 조사 상황은 조사자와 피조사자 사이의 관계에 근거해 있다. 그런데 이들이 말을 주고받는 이러한 상황은 물론 일상적 토론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는 두 개인을 접촉시키는 일이며, 따라서 사회구조의 구속 아래 행해지는 일종의 상호작용이다. 이러한 측면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두 대화자, 즉 과학적 작업에 결부된 정당성을 갖춘 사람과 관찰되고 질문을 당하는 사람 사이에 행사될 수도 있는 상징 폭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 구조는 응답자의 대답 자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다분히 존재한다(50). 사회학이라는 장은 그 자체로 다른 모든 장들과 마찬가지로 투쟁의 대상이며, 그 투쟁의 목표는 지배적인 과학적 위치를 획득하고 사회학적 실천에 대한 (자신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정의를 부과하는 것이다(51).
 
 
- 부르디외는 또한 사회학의 정도를 벗어난 관행들을 비판한다. 사회학은 사회질서의 유지와 보증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보수 사회학과 ‘해방적’이라 지칭되는 사회학으로 대별된다. “스스로를 사회학자 혹은 경제학자라 지칭하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개인 기업 및 행정부의 지도자들에게 [기업 경영 및 통치의] 수단을 제공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는 사회적 기술자들이다. 그들은 지계 계급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실천적 인식”, 혹은 반(反)학술적 인식을 정당화시켜준다. 통치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수단을 갖는다. 경제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술자들에게도 역시 사회학은 결코 근본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51-52) - 사회학자는 예언주의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모든 사회학자는 대중이 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예언자에 맞서 자기 안에서 투쟁해야 한다.”(53)
 
 
2. 부르디외는 ‘해방적’ 사회학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한다. - 규범적이지 않은 학문으로서 사회학은 지배의 전략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적인 것의 기능논리를 규정하려는 경향이 갖는 정치학이나 철학과 달리 그것을 묘사하려 한다. 설령 사회학이 실천이 아니라 인식을 제1의 목적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사회학은 사회적 행위자들로 하여금 모든 지배 형태에 대한 대항 투쟁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이해의 수단을 제공한다. 사회학은 이른바 ‘생물학적 우월성’에 근거한 남성지배나, 연령에 근거한 장자(長子) 지배와 같은 사회구성 체계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자연화[당연화] 과정(processus de naturalisation)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만든다. 개별적 이익을 보편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탈역사화(déshistorisation)ㆍ보편화(universalisation) 메커니즘은 이른바 ‘자연화된 사회적 구성물’(construction sociale naturalisée)을 낳는다(55). 이처럼 부르디외 사회학은 한 사회에 있어서의 지배의 원천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피지배자들에게도 정치적으로 동원 가능한 논의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사회관계에 대한 기술ㆍ묘사는 단순한 중립적인 과학적 보고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해방의 수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학자가 정치가나 투사를 대신할 필요는 없다. 사회학의 정치적 소명은 그것의 내용 자체로부터 태어난다. 과학적 방식의 기준들을 준수하면서도 사회학은 불평등을 고발할 수 있도록 그것을 대상화시켜주는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다(55). - 사회학은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견제세력이 될 수 있다(56). - 가족에 대한 연구는 가족이 일반의 상식과 달리 가족이 ‘자연적’이지 않은 정치적 범주임을 증명해준다(57). 가족은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 가족과 국가의 상호적 형성(58).



3. 사회에 대한 공간적 통찰 - 공간과 장들
 
 
I. 투쟁적인 사회적 공간
 
 
1. 사회 공간은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에 의해 계급화된다. 사회적 사실은 구성된 것이라는 방법론적 원칙에 따라 사회학자는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분류의 기준들을 사용한다. ‘사회공간’이란 표현은 사회에 대한 피라미드식 관점에 근거한 사회계급의 전통적 표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회에 대한 피라미드식 관점이란 사회 내의 각 계급에게 그들의 물질적 존재조건에 따라 사회계층 내에서의 일정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63).
 
 
- 여러 형태의 자본들이 사회공간을 구조화한다. 네 가지 유형의 자본
 
1) 경제 자본. 토지ㆍ공장ㆍ노동과 같은 여러 생산 요소들 및 수입ㆍ유산ㆍ물질적 재화와 같은 경제적 재화의 총체. 2) 문화 자본. 학교제도를 통해 받은 것 혹은 가족에게 물려받은 것을 막론하고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적 자격의 총체.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① 가령 공개석상에서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지속적 능력의 경우와 같은 동화 상태 ② 그림이나 서적의 소유와 같은 문화적 재산 ③ 학위와 같이 사회적 제도가 승인한 상태. 3) 사회 자본. 기본적으로 개인 혹은 집단이 가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 사회적 자본을 갖는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작업, 곧 초대, 공동 여가생활 등의 사교활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상징 자본. 이는 예의범절이나 의례처럼 명예와 인정에 관련된 의식들 전체에 상응한다. 상징 자본은 결국 다른 세 형태의 자본 소유 및 그에 대한 승인이 행위자에게 부여하는 신용과 권위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명예의 규범 및 방정한 품행 규칙의 다양한 표현들이 단지 사회적 통제의 요구가 아니며 실제로 주요한 사회적 특권을 구성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64-65).



- 사회 계급 안에서 행위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가 소지한 자본의 양과 구조에 종속된다. 선진사회의 경우, 차등화의 양대 기준은 경제 자본 및 문화 자본이다(65).
 
 
2. 『구별짓기』(1979)에서 부르디외는 여러 사회계급들의 특수성에 대해 설명한다.



1) 지배계급 혹은 상류계급은 그 구성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의 비중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지배계급은 많은 자본을 할당받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 구성원들은 때때로 여러 다른 유형의 자본을 겸비하기도 한다. 2) 프티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적 상승의지 속에서 통일성을 찾을 수 있지만 여러 형태의 분열을 겪고 있다. 3) 민중계급은 소유권의 상실로서 특징지어진다. 그들은 어떤 자본도 소유하지 못한다.



II. 부르디외는 사회에 대한 이러한 총괄적인 견해에 사회적 장이라는 용어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겹쳐 놓는다.



1. 사회는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장들의 집합이다. 사회는 점진적 차등화가 이루어지는 장소. 장은 일종의 시장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행위자들은 게임을 하는 자들처럼 행동한다(71-73). 장들은 엄격한 경계를 가진 공간이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장들은 그들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장 안에서 사회적 행위자의 위치는 그가 그 사회공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종속된다(72-73).



2. 이러한 접근법의 발견적 가치는 경제적 장의 연구에 의해 증명 가능하다. 전통 사회에서 생산과 교환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활동이다. 경제적 장은 점진적으로 자율화되어 왔다. 이 자율화를 사회ㆍ역사적 시각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74-75).
 
 
III. 사회의 재생산과 사회의 변화
 
 
1.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질서의 보존 메커니즘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범주들 혹은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인들의 이동을 의미하는 ‘사회 유동성’에 관한 연구는 강력하게 사회 재생산의 경향을 드러낸다. 이 연구는 일정한 시기에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그의 아버지의 사회적 위치와 교차시켜 만든 상관 통계표인 유동인구 통계표에 근거를 둔다. 사회질서의 재생산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여러 종류의 자본을 소유하거나 보존하는 전략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 다음처럼 이러한 전략들의 유형학을 구성해볼 수 있다. 1) 생물학적 투자의 전략. 다산성과 건강유지의 전략. 2) 상속의 전략. 3) 교육의 전략. 4) 경제적 투자 전략. 5) 상징 투자 전략(77-81).



2. 재생산 전략의 다양성이 사회구조가 전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생산 전략의 효력은 행위자들에게 일임된 재생산 수단에 달려 있으며, 이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변한다. 여러 사회계급이 사회적 공간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 역시 사회구조의 변동에 의해 변화한다(81-83)
 
 
4. 부르디외의 호모 소키올로기쿠스 - 사회적 행위자
 
 
I. 사회화된 존재: 아비투스의 형성
 
 
1. 아비투스(habitus) 개념은 어떻게 해서 한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에서의 삶은 개인의 사회화를 전제로 한다. 사회화는 아비투스의 형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특정 계급이 자신들의 생존환경을 조절함으로써 영구적이면서도 변동 가능한 성향체계인 아비투스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또한 구조를 결정하는 구조들, 즉 의식적인 목표의 겨냥 혹은 명시적 통제에 의하지 않고서도 객관적으로 목표에 맞추어질 수 있는 실천과 표상을 조직하고 발생시키는 원칙으로서 기능하도록 구조화된 구조들이다.” 이러한 정의는 아비투스가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개인이 획득하는 하나의 성향체계임을 강조한다. 성향은 가가자의 객관적인 생존조건에 의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태도, 지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사고하는 경향으로서 행동, 지각, 사고의 무의식적 원칙으로서 기능한다. 이 내면화는 습득된 행동과 가치들이 자명한 것,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 거의 본능적인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사회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내면화는 행동을 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분명히 기억해내야 하는 의무 없이도 행동을 가능케 해준다(89-90).
 
 
아비투스는 ① 실천적 상황에서의 원칙 혹은 가치를 의미하면서, 일상적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무의식적이며 내면화된 형식,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구도인 에토스(êthos)[따라서 에토스는 논증을 통해 명료화되고 규범적인 이론적 형식으로서의 윤리(éthique)에 대립된다], ② 육체와의 관계, 곧 개인의 역사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개인에게 내면화된태도를 의미하는 육체적 헥시스(hexis)라는 두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결국 아비투스는 우리가 현실을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인 동시에 우리의 실천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것이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성격을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는 이런저런 유형의 감수성과 행동 및 반응의 방식, 스타일을 타고났다고 느끼게 되지만, 실상 우리가 포도주보다 맥주를, 정치영화보다 로맨스영화를, 좌익보다 우익에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은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상반신을 곧게 혹은 구부정하게 걷는 것, 대인관계에서 서툴게 혹은 편안하게 처신하는 것은 육체적 엑시스의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을 작고 잘 것 없다고 느끼거나 반대로 자비롭고 탁월하다고 여기는 것은 정신적 에토스에 속한다(90-91).
 
 
2. 아비투스는 개인이 걸어온 사회적 여정의 결과로 생겨난다. 사회적 소속이 습득을 구조화하고 계급 아비투스를 만들어낸다. 아비투스는 인식과 평가의 구조이다. 우리가 받는 모든 교육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게 일차적 아비투스를 주입시킨 어린 시절의 최초의 교육이다. 가족 집단이 바로 이러한 기능을 맡고 있다. 인간은 중립적인 ‘인간의 도리’ 자체를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합당한 교육’을 받을 뿐이다. 개인은 이러한 교육적 습득 과정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를 자신의 말과 행동 속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재생산될 특수한 성향들을 주입받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사회의 외적 관계 곧 외재성을 개인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적 공간 안에서 우리의 부모가 차지하는 위치에 합당한 속성들을 내재화한다. 일차적인 가족 아비투스를 대체하는 이차적 학교 아비투스는 이를 체계적으로 공고화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한다. 각 개인의 성격이란 계급 아비투스(의 장)가 낳는 다양한 변이형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91-93).



3. 사회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전통적인 해석과의 단절을 가능케 한다. 사회화와 관련하여 대립되는 두 가지 방법론적 관점이 존재한다. 1) 방법론적 전체주의(methodological holism). 개인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규범 및 가치들의 집합소에 불과하다. ‘사회’는 수동적인 개인들을 구속한다. 개인의 행동은 자신을 넘어서는 문화와 사회의 논리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2) 방법론적 개체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 규범과 가치는 개인에게 주어진 가능성에 불과하며, 개인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 여지를 갖는 존재로 간주된다. 따라서 개인의 행위 역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적 전략으로 이해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구조와 행위자 논쟁(the structure and agnecy debate). 부르디외는 이러한 대립 자체를 인위적인 것으로 본다. 아비투스는 객관적 관계와 개인적 행위를 매개해주는 개념이다. 개인은 경제적 행위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행위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실천의 진정한 ‘경제’(經濟, 經世濟民, économie, oeconomia)를 파악해야 한다. 이때의 ‘경제’는 넓은 의미로 ‘질서’, ‘논리 구조’, 곧 - 명백한 계산이나 외부로부터의 결정이 아닌 - 각자의 아비투스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서의 실천에 내재한 합리성이다(94-95).



II. 아비투스의 구조적 효과
 
 
1. 아비투스는 사회의 기능논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동일집단 내 아비투스의 동일성이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상의 차이의 토대를 이룬다. ‘삶의 방식’이란 취향, 신념이고, 한 계급 혹은 그 계급의 부분적 특징을 이루는 체계적 실천의 총체이다. 아비투스는 정치적 견해, 철학적 신념, 도덕적 확신, 미적 선호에서 성, 음식, 의복, 문화 등에 이르는 실천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현대프랑스는 지배계급, 프티부르주아계급, 민중계급이라는 세 개의 주요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비투스가 자신을 탄생시킨 어떤 사회적 영역과 관계 맺을 때, 아비투스는 마치 물속의 물고기처럼 행위의 관찰자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영역이 한 관찰자에게 그토록 당연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관찰자를 만들어낸 것이 다름 아닌 그 영역이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그 영역이 관찰자가 그 영역의 관찰에 적용시킨 범주들마저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97-99)



2. 아비투스는 사회 조정을 보장한다. 동일한 아비투스를 소유하고 있는 행위자들은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직업을 선택할 때 혹은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위해 서로 협의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따르고 또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각자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자신과 같이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일치하게 된다. 이로 인해 관찰자는 모든 사회의 작동이 이미 (최소한 상대적으로는) ‘조화롭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더욱이 아비투스는 객관적 계기와 주관적 동기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아비투스는 개인들에게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 개인들은 자신을 형성시킨 아비투스를 실행시킬 뿐이다. “이는 다름 바로 개인들이 복잡하고도 오랜 조정 과정 동안 자신들에게 제공된 객관적 기회를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미래를 읽어낼 줄 알기 때문’이다. 주관적 희망과 객관적 기회 사이의 변증법은 사회적 영역 내의 도처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 변증법은 대개 후자에 맞추어 전자를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객관적인 기회의 내면화는 학교, 노동시장, 결혼 시장, 혹은 학문이나 정치에서 이용되는 사회적 전략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한다. 아비투스는 따라서 세뇌에 적합한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렇게 하여 객관적 규칙성에 부합하게 되는 일련의 행동과 태도를 가능케 한다. 아비투스는 내면화의 외재화를 창출한다(100-102).



한편, 아비투스는 사회변화에 민감하다. 개인의 아비투스는 자신을 구성했으며 스스로 지금도 실행하고 있는 아비투스의 객관적 조건이 변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즉시 변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처럼, 원인이 작용을 멈춘 후에도 여전히 존속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러한 이력(履歷) 현상은 오래 지속된 아비투스와 새로운 환경처럼 두 가지가 어긋날 때 잘 드러난다. 개인은 새로운 상황 속에서도 종종 이전에 자신이 속했던 아비투스의 행위들을 ‘어울리지 않게’ 반복한다(103). 급상승한 혹은 급하락한 중간계층을 생각해보자. 세대 간의 대립, 인종들 사이의 대립도 이러한 논리로 설명가능하다. 한편, 아비투스는 행위자가 밟는 사회적 여정에 따라, 사회적 상승, 정체, 퇴조를 따라 내재된 체험에 의해 재구조화된다. 따라서 사회학적 연구는 단순히 현재 개인이 어느 사회적 위치에 속하는가와 더불어, 개인이 걸어온 길, 더하여 개인이 걷고자 하는 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비투스는 운명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과 이 새로운 경험에 영향을 받는 열린 성향체계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에게 마치 생래적인 것처럼 가장해온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위들이란 사실은 사회적 경험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의 성격은 하나의 사회계급 속에서, 그리고 그 계급에 속했다는 사실에 의해 구축되는 사회적 성격의 한 변이형(a variation)에 불과하다(105-106).



- 사회적 재생산의 메커니즘. ‘외재성의 내면화/내재성의 외면화’의 이중적 과정(106).
 
 
5. 차이를 개발하자 - 구별의 논리
 
 
문화사회학. 지배자들은 바로 문화에 의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문화는 위계화된 의미들의 차이다. 문화는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변별적 격차를 유지하는 것을 궁극목적으로 삼는 집단들 간의 하나의 투쟁목표가 된다(108).



I. 문화: 하나의 투쟁 목표
 
 
1. 부르디외는 특히 문화가 하나의 장에서 생산되는 자본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문화는 자연에 대립되는 인간 자체의 보편적인 ‘인위적’ 행위를 지칭하는 인류학적 의미, 사실상 ‘지적 엘리트’의 문화와 동일시되는 ‘교양’이라는 일상적 의미, 다수에 의해 획득ㆍ공유되는 규범 및 실천의 총체라는 사회학적 의미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108-109). 그 외에도 전체사회 내에 존재하는 한 집단 특유의 행동양식 및 가치를 지칭하는 하위문화(sub-culture), 지배문화에 저항하며 새로운 문화규범의 창출을 추구하는 반(反)-문화(counter-culture)가 있다(109-110).
 
 
- 문화적인 것의 생산논리는 문화적 장의 자율화(문화 생산자들의 전문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 모든 다른 장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장도 공급자와 수요자가 있는 하나의 시장으로 기능한다. 생산자들은 차등화된 문화체계들로 조직된 ‘상징코드’의 생산을 임무로 여긴다. 문화 생산의 장은 문화가 단지 작품들의 총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의 형성이고 세계를 묘사하고 이해하는 특별한 하나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문화는 지각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장치들이다. 이 장치들은 고급한 문화 자본의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정당한 권위를 갖는 개인들, 가령 명망 있는 지식인, 언론인, 노동조합 혹은 압력단체의 지도자 등에 의해 생산되고 공식화된다(111-112).
 
 
2. 지배적 문화는 상징 갈등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정당화(légitimation) 작업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보장해주는 사회에 대한 정당한 규정을 부과하는 것이다. 사회학의 문제는 한 계급의 전횡이 어떻게 해서 사회 일반의 ‘정당한’ 문화로 변형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테제는 지배문화가 지배계급의 문화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오랜 시간에 걸친 정당화 과정을 통해 그것이 역사적ㆍ정치적으로 구성된 정당성임을 망각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상징 투쟁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구별짓기 혹은 분류의 행위를 부르디외는 분류투쟁(lutte de classement)이라 부른다. 상징투쟁은 사회에 대한 지각의 범주들을 부과하는 것에 근거한다. “상징폭력이란 사회적 행위자의 암묵적 동조 하에 자신에게 행사되는 폭력의 형식이다. 나는 하나의 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못함에 따라, 바로 그 때문에 행사되는 폭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무지’라고 부른다. 사회적 행위자들이 - 그들이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구조로부터 파생된 인식 구조를 다시 바로 그렇게 이해된 세계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 세계를 자명(自明, self-evident)한 것으로, 다시 말해 원래 있는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실제로 개인들은 이러한 기본 전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는 일정 수의 명제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를 위한 별도의 의식적인 세뇌는 사실상 불필요하다. 이 때문에 객관적 구조와 개인의 주관적 인식구조가 즉각적으로 일치하게 됨에 따라 한 개인이 세계를 정통적으로 수락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분석은 지배와 정치에 관한 진정한 현실주의 이론의 진정한 토대가 된다.”(112-115)



이러한 지배적 표상들 혹은 상식, 독사(doxa)들은 일정한 세뇌의 과정을 거쳐 사회집단 일반에 부과되는데, 이 때 그 효력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1)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로 이루어지는 개별적 요구들의 합리화가 있다. 지식인에게 자유란 생각하고 말할 자유이나, 사장에게 자유란 고용과 해고의 자유이다. 따라서 언어의 근본적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해석권력]. 이른바 ‘정당한 것’에 대한 정의는 ‘용어논쟁’을 거칠 수밖에 없다[정의(定義, definition)투쟁]. 하나의 사물 혹은 사람은 - 그냥 절대적으로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 특정 가치, 입장과 분리 불가능한 ‘보는 자’의 관심, 관점에 의해 관찰될 수 있을 뿐이다(관점은 관찰, 인식의 가능조건이다). ‘불량청소년’, ‘미혼모’, ‘이혼녀’, ‘~녀’, 낙인(찍기) 효과(labelling effect). 2) 신념의 확산은 또한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의 제도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대립되는 신념에 대한 가치폄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명명하는 힘(命名力)은 하나의 사물, 사람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능력이다(117).



II. 사회적 소속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구별의 논리에 근거하는 문화적 실천
 
 
1. 정당화된 문화의 존재가 실천을 구조화한다. 사회적 공간은 상징 자본의 축적에 토대를 둔 투쟁들로 점철된다. 차이는 실로 상징 자본에서 생겨난다. 사실 사회적으로 말하여,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부터 그것은 존재하며, 반대로 그것의 실체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징자본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졌다고 믿는 순간 작동하는 자본이다(신용, 신뢰). 사회적 공간은 개인 및 집단의 구별의지,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사회적 정체성을 소유하려는 의지에 기반을 둔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사회적 정체성 투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위신을 얻고 눈에 띄어 최종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관건이다 ... 이러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은 성(姓), 출신가문, 국적, 직업, 종교, 사회계급 등 개인에게 라벨과 명찰을 제공하는 소속들에 근거한다(-120). 마찬가지로, 문화적 재화의 소비는 사회적 구별의지 속에 포함된다. 모든 경험적 연구는 지배 계급이 박물관, 미술관, 오페라 하우스, 도서관을 더 자주 들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적 재화에 대한 접근 자체가 매우 불평등하게 이루어지며, 이러한 불평등은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구별 전략들, 곧 문화영역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반영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계급투쟁은 대개 다양한 실천들의 정당화된 위계화를 위한 투쟁의 완화된 양상이다. 이러한 구별짓기가 수행되는 장에는 옷, 실내장식, 자동차, 여행, 레저, 스토츠, 음식, 취미, 영화, 음악, 강의수강 등 한계가 없다. 한 사람의 취향, 선호는 자신의 취향이 스스로를 성립시키기 위해 배제했던 취향에 대한 반감이다. 취향은 개인이 어떤 특정계급에 속해 있음을 자신과 타인에게 증명하는 통합 요소인 동시에 축출 기능을 수행한다(-121).
 
 
2. 사회적 차등화는 실천의 성격에서만큼 형식에서도 존재한다. 영화 혹은 사진과 같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 영역도 계급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거나 수용ㆍ거부된다. 1) 지배계급은 구별짓기 전략에 따라 나머지 사회계급에게 ‘훌륭한 취향, 좋은 취향’을 규정ㆍ부과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고 한다. 2) 프티부르주아 계급은 그가 가진 ‘문화적 열정’, 지배계급의 고급문화에 대한 동화에의 요구로서 특징지어진다. 이들에게는 ‘충분하지 못할까봐 과잉으로 하게 되는’ 과잉 교정의 경향이 포착된다. 3) 민중계급은 고급한 것, 고상한 것에 대한 박탈로서 특징지어지면서, 생필품의 선택과 남성다움에 가치를 부여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교양 있는 것’은 ‘참으로 남성다운 것’에 대한 거부로 인식되곤 한다. 요약하면, 결국 문화사회학은 문화적 지배이론에 근거해 있다. 의미의 계급적 특성 혹은 자의성을 망각하게 만들면서 특정 계급의 의미를 ‘의미 있는 것 자체’로서 강요하는 것이 상징 폭력의 논리, 메커니즘이다. 이 모든 메커니즘을 결정적으로 수행하는 제도가 학교이다(-127).
 
 
6. 사회적 재생산 - 학교의 역할
 
 
* 대학의 문제 - 『상속자들』(1964), 학교체제의 기능에 관한 일반론 -『재생산』(1970)
 
 
I. 학교: 감추어진 지배의 도구



1. 학교문화는 지배계급의 문화이다. 학교문화는 중립적이지 않다. 학교문화는 특수한 문화, 곧 객관화 가능하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문화로 변형된 지배계급의 문화이다. 학교문화는 가치 있는 것, 고상한 것에 대립되는 저속한 것, 평범한 것의 규정에 따른 선택의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고, 자의적이고 사회적, 정치적인 구성물이다. 교사들에 의한 성적 평가의 기준들은 곧 사회적 기준이다. 구두시험은 자세, 억양, 심사위원들이 ‘재기발랄’, 명석함 혹은 ‘훌륭한 취향’이라 부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미묘한 사회적 인정기호들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실질보다 형식을 승인하는 ‘품행시험’으로 간주될 수 있다. 논술과 같은 필기시험도 사용된 ‘문체’를 통해 동일한 성향을 드러낸다. 결국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기준 곧 아비투스의 평가가 공식적인 평가기준들보다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은 학교성적이라기보다 학생의 아비투스와 같은 사회적 성적이다(131-133).



2. 이른바 ‘천부적 재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재생산 기능을 은폐한다. 천부적 재능의 이데올로기는 ‘상식’에 부합한다. 학교가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려면, 다시 말해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려면, 학교가 자신에게 적합한 표상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역할, 곧 하나의 집단 혹은 계급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계급의 실천을 정당화ㆍ합법화시키는 ‘사회관계의 왜곡된 일련의 표상들’(=허위의식)이 갖는 역할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교육체제에서 ‘천부적 재능’의 이데올로기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학교에서 거두는 성공의 불평등이 ‘타고난 것’으로 간주되는 소질의 불평등을 반영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재능, 직책, 취향이 그에게 허락한다면 그가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오를 수 있다고 단언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수반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학교가 모든 개인을 의무와 평등 양 측면에서 평등하게 대우하며 출신성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공정한 중립적 기관임을 전제한다. 이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자율권, 자주권, 잠재적 능력의 개발권을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가치를 사회의 근본가치로 삼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 포괄된다. 학교 교육의 담당자들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집단이다(133-134).
 
 
천부적 재능의 이데올로기가 학교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시킨다. 학교와 교육이 주장하는 ‘중립성’은 실제로 피지배계급을 배척하고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편파성이다. 학교의 서열은 사실상 천부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사회적 서열이다. 천부적 재능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학교는 사회적 불평등을 개인적 자질의 불평등으로 변형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 학교는 사회적 불평등의 합법화 수단이다. 학교는 해방을 추구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그것에 반대하는 교육을 행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유지 장치로서 기능한다(134-135).



3. 민중계급은 상징폭력에 굴복한다. “모든 교육 활동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전제적 권력에 의한 문화적 독재의 강요로서 일종의 상징폭력이다.” 학교는 ‘차이’에 무관심한 척하면서 실상은 ‘교육 부재의 교육’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속자들’만이 접근 가능한 암시된 것, 암묵적인 것을 배양한다. 학교는 음악적, 문학적, 문화적 소양 등 사실은 ‘상속자들’만이 자신의 가족 환경에 의해 접근 가능하고 따라서 습득 가능한 특정 문화를 일반적인 것으로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상속자들의 특수한 계급 문화를 ‘사회가 승인하는 우월한 가치’ 자체로 변형시킨다. 가령 언어사용의 습관이 바로 그러하다. 부르주아 언어는 언어와의 일정한 관계, 곧 추상화, 형식주의, 주지주의 등 ‘우연히도’ 학교가 추구하는 온갖 특징과 일치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민중언어는 반대로 특수한 경우를 과대평가하고, 학교의 요구와는 반대로 구조화된 논증에 무관심한 경향을 드러낸다. 이는 사실상 피지배계급의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하나의 낯선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피지배계급 구성원의 교양문화 곧 지배문화로이 동화과정은 실상 자신의 언어와 취향과 태도, 한 마디로 자기 기존 인생관 전체의 전면적인 부정, 수정, ‘교정’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이런 ‘외국어’의 습득은 제도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피지배계급 출신의 학생들을 학교 제도에서 배제시키는 가장 강력한 체제는 물론 아비투스이다.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의 개인적 내면화로부터 생산되는 아비투스는 빈곤 계층 자녀들의 ‘자동적인’ 도태를 낳고,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의 계급ㆍ계층에 허락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욕망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대다수의 민중계급은 결국 학교교육에 의한 신분상승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며(앞서 말한 자동 도태 메커니즘에 의한 불량청소년화, 품행불량, 성적불량, 자퇴, 퇴학), 학교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계급적 혹은 개인적 게으름으로 규정, 단죄함으로써 이러한 악순환을 증가시킨다(136-139).



II. 교육민주화와 사회적 유동성



1. 실제 사례 연구가 교육과 사회적 유동성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밝혀준다. 국민교육의 강화로 인한 학교 정원의 증대는 학위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이는 민중 계급에게 상당한 실망을 주었으며, 나아가 학위를 소유했다는 사실에서 이전에 기대되던 안정된 직장에 대한 보장이 사실상 사라지게 됨에 따라 학교제도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해주었다(-142).



2. 사회계급은 그들의 전략에 따라 차별화된다. 교육체계의 이용은 불균등하다. 학교에 대한 전략은 재생산 전략 중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며, 다른 전략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교에 대한 투자 전략은 출산전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부르디외는 학교와 학문의 사회학을 통해 학교가 개인의 상승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에 봉사하는 중립적 기구라는 확신을 깨고 학교가 문화적 특권을 재생산하는 장치들 중의 하나임을 입증하고자 한다(-148).



7. 열광과 반박 사이에서 - 영향과 비판
 
 
I. 확고부동한 명성
 
 
1. 부르디외의 접근방식은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사회학의 여러 장들 속에서 부르디외의 영향을 받은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부르디외 자신은 자신을 헌신적인 제자들로 구성된 확고한 학파의 지도적 사상가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부르디외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의 이론은 예술사회학, 사회집단의 사회학, 연령 계층에 대한 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더욱이 부르디외의 영향은 사회학의 틀을 벗어난 다른 인문과학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제적 장의 문제(경제 역시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이다), 사회학과 역사를 접근 시키는 방식(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 역사는 아비투스의 형태로 우리의 육체에 각인된다), 정치학(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비참여 자체가 박탈의 증표이다)의 영역이 바로 그러하다(156).
 
 
2. 부르디외의 저서는 경험적 방법론적 영향을 미쳤다. 교육사회학에 대한 그의 연구들은 교육체계의 기능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부르디외는,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158).
 
 
II. 다양한 비판들
 
 
1. 이제 부르디외가 개진한 사회에 관한 견해는 추월되고 있다. 세 가지 비판. 1) 사회계급이라는 관념은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한 범주들이다. 많은 학자들이 계급을 계층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2) 계급투쟁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죽은 개념이다. 3) 사회 집단들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지배 계급과의 대립관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163).



2. 부르디외 사회학에서는 학교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보여주듯이 사회변화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다. 부르디외의 이론은 너무나 정태적이며 역사를 무시한다. 재생산 이론은 행동 주체들의 능동적 역할을 무시한다. 부르디외 이론은 일종의 결정론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들이 제시되었다. 1) 개인이 행위 능력을 갖춘 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한다. 2) 행동주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 학교가 만드는 ‘블랙박스’를 열어보고자 한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지지하지 않는 여타의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의 비판적 목표를 공유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론과 부르디외 이론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과 분쟁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분쟁이야말로 학문적 진보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 1만 달러 시대 당시 한ㆍ미ㆍ독ㆍ일 비교 “부자한국 국민은 가난” - 한겨레 1996.3.24.



엘지 경제연구원은 94-95년 현재의 한국과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막 돌파할 무렵의 미국ㆍ독일(78년), 일본(84년)의 보건, 의료, 교육, 환경 등 사회관련 지표를 비교한 결과. 한국은 94-95년 경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수준에 이르렀으나,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이들나라와 큰 격차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총생산(GNP) 대비 정부의 사회보장비 수준은 한국(94년)이 1.9%인 반면 당시 미국은 6.1%, 독일은 12.0%, 일본은 9.2%였다. 인구 일인당 공공교육비도 한국(95년)은 332 달러인데 비해 미국은 676 달러, 일본은 557 달러였다. 인구 1천 명당 의사수도 한국(94년) 1.2명으로 미국 1.9명. 독일 2.3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적었다. 이 밖에 주택보급률도 한국(94년)은 84.2%로 88년의 일본(111.1%)보다 못하고 방 하나당 인원수도 1.5명으로 대만(0.9)이나 닭장 같다는 일본(0.7)보다 훨씬 못했다.
 
 
 

프랑스의 복지





* 프랑스의 복지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606&section=sc7


* 2013년 국가별 1인당 GDP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GDP_(nominal)_per_capita


* 1만 달러 당시 국가별 복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32400289109001&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3-24&officeId=00028&pageNo=9&printNo=2513&publishType=0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