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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6.

‘세월호’의 정치철학적 인식론 [최종고]



 
2014년 4월 16일에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사건 혹은 일련의 사태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 문제에 대한 이른바 ‘본질적’ 인식에 입각한 ‘올바른’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 중 어떤 것은 타당하고 어떤 것은 그를 것이며, 어떤 것은 적절하고 어떤 것은 부적절한 것이리라. 그런데, 누가 그것을 판단해줄 수 있으랴? 이 모든 불확실성을 넘어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줄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갖춘 어떤 지고의 존재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모든 것은 달라지리라. 그러나 그러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해도 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러한 존재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인지 또는 여러 명인지에 따라, 그들 중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나아가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그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지가 다시금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비단 각자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불태우고 죽였던 유럽의 중세만이 아니라, 비록 더 이상 종교적인 외피는 쓰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 여기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오늘 여기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진단과 해석이 옳으며,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진단과 해석은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 또는 ‘일면 타당하나 결국 부분적인 인식’이며, ‘올바르고도 온전한 인식’은 다름 아닌 나의 인식, 우리의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은 때로 자신의 인식이 유일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도 없이 ‘공정하게’ 사태를 바라보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본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이해나 편견과도 무관하게 이 사태를 오직 있는 그대로 보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이익이나 편견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본 사람들이 내놓는 인식이 ‘이상하게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이해관계나 편견을 걷어내고 바라보았다면,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보았다면, 각자의 인식은 서로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이 너무 강한 의미를 갖는다면, 적어도 서로 상당히 비슷하거나 닮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이러한 가장 기초적인 사실 위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왜 있는 그대로 사태를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태를 서로 ‘다르게’, 아니, 때로는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철학적 논제들을 차례로 검토해보자.
 
 
1. 사실들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나열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하여 공식적으로는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가던 청해진 해운 소속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침몰 직전 구조된 174명을 제외한 300명 이상의 인원이 사망한다. 정부는 부실 대처의 책임을 물어 해경의 해체를 결정하고, 각종 비리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이른바 ‘해피아’의 척결을 선포한다. 박근혜 정부가 주무부처인 해경, 해양수산부를 비롯한 관료, 관련 집단의 비리 및 그 척결을 추진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가히 ‘전 국민적인’ 슬픔과 분노가 언론과 온라인은 물론,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휩쓴다. 청검찰과 경찰은 해진 해운의 실소유주로 지목되던 유병언 일가, 이른바 ‘구원파’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이들을 소환하나 유병언을 포함한 핵심 인물들은 검경의 예상과 달리 출두가 아닌 도피를 결정한다. 이후 경찰은 7월22일 DNA검사 등을 통해 유병언의 은신처로부터 불과 몇 킬로 떨어진 전남 순천 서면 매실밭에서 지난 6월 12일 발견되었던 변사체가 유병언 본인인 것으로 최종 발표된다.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식 언론매체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 세월호에 관련된 애도와 슬픔, 분노의 글이 넘쳐나지만, 일부 관료와 언론인, 정치인 등이 행한 ‘세월호 유족 폄하’ 및 ‘불순세력 개입설’ 등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킨다. 더하여 일부이지만, 심지어 세월호 유족들을 ‘유족충’으로 부르고, ‘유족된 것이 벼슬이냐’는 식의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이 유족들에게 행해져 ‘국민적 공분’을 산다. 우연히도 세월호 침몰 100일을 며칠 앞둔 7월 30일 전국적으로 치러진 재보선 선거 결과 여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국민’은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에 손을 들어준다. 8월 14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후 미사에 세월호 추모 배지를 달고 나와 유가족들을 애도한다. 이미 100일이 훨씬 지난 오늘 8월 16일 현재 여야는 이른바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법치주의적 형평성, 자력구제 금지원칙 등의 이유를 들어 유가족과 야당의 요구처럼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유가족들은 이를 요구하며 8월 16일 현재 국회와 광화문 광장에서 30일째 단식농성 중이다.
 
 
2. 선택된 사실들
 
 
당신은 방금 내가 적어놓은 ‘사실들’을 읽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사실들의 나열’에 동의하는가? 우선, 위에 내가 적어놓은 것들은 모두 글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인가? 이미 일정한 ‘해석’이 들어간 것이 있지 않은가? 당신이 생각하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사실들 중 빠진 것은 없는가?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간 것은 없는가? 이러한 지적이 옳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사실들만을 적어야 한다. ‘순수한’ 사실이 아닌 특정한 ‘해석’이 가미된 내용이 들어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관련 사실들 전체를 적어야 한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경우, 사실들 전체가 아닌 특정 사실, 또는 사실의 특정 부분만을 적어놓고 그것이 사실들의 전체인 양 칭하는 것은 ‘오류’이며, 무엇보다도 사실을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그런데, 2014년 4월 16일에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이 사건 혹은 일련의 사태들에 관련된 ‘사실들’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는 생각보다 무척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우리의 두 번째 요구, 곧 사실들 전체를 적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자연적인 범위에서 바다의 일기와 기상, 파고와 수심 등은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으므로 주어진 기초적 여건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말하는 ‘인재’(人災)의 범위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로 논쟁의 대상이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의 부도덕성이 근본원인인가, 청해진 해운의 비리가 문제인가, 그것을 용납한 해피아가 문제의 근원인가, 이제까지 쌓인 우리 사회의 적폐가 문제인가, 관료주의의 적폐가 문제인가, 특히 해수부와 해경이 문제인가, 낡은 배를 톤수를 늘려 사용할 수 있게 법을 고쳤던 이전 이명박 정권의 책임인가, 근본적으로 박근혜 정권의 안이한 대응이 문제인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에 해당되는 범위를 정하는 일 자체가 이미 사실의 범위를 넘어선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정하는 일 자체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에 대한 나열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련의 판단들이며, 모든 판단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는 가치 기준의 존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마도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 전체를 적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실들 전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적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이 이미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되는 용어의 정의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서로서로 연결된 세계라는 전체에서 어디까지가 세월호와 연관된 사실들이며, 어디서부터가 연관되지 않은 사실들인가? 그러나 방금 보았듯이,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 전체의 범위를 정하는 일 자체가 -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 하나의 판단 행위이며, 판단이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이다. 사실들 전체를 적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시도를 한다고 할 때, 그러한 시도가 실제로 사실들 전체를 적었는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 또는 적어도 당신이 믿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그러한 판단에 늘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대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판단은 없다고. 맞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으로 결국 받아들여야만 하는 판단이 나의 판단이 아니라, 당신의 판단이어야 하는가? 왜 당신의 결단은 옳고, 나의 결단은 그렇지 않은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나만이 예외가 된다.’고 주장하려는 사람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합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좋다. 관련된 모든 사실의 범위를 정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이런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적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실들 전체가 아니다. 우리가 적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들 전체’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들이란 결국 당신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실들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누가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진실이? 역사가? 그러나, 진실과 역사는 아쉽게도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진실임을 밝힐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사랑하는 이들의 믿음과도 같다.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는 판단은 운명 스스로가 내린 것인가? 그렇게 믿은, 믿기로 결정한 내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닌가? 결국, ‘사실들 전체’에서 ‘중요한 사실들 전체’로 범위를 좁힌다 해도,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판가름해 줄 기준, 곧 가치의 제시가 선행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말들은 모두 무의미한 말들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들이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들이란 오직 선택된 사실들일 따름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의 기준이다. 선택의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초연한 사실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당신과 나의 가치 판단에서 나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선택된 사실들이며, 그 자체가 객관적 세계의 거울 같이 투명한 중립적인 반영이 아닌, 우리 가치관과 관심의 반영이다.
 
 
 
일례로, ‘전원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를 내보냈던 언론을 생각해보자. 오늘 청해진 해운에서 구원파로 이어지며 유병언 추적, 사망 보도에 이어, 장남 유대균과 같이 도피생활을 했던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저 ‘선정적’ 언론은 공정ㆍ중립ㆍ객관 보도를 하고 있는가? 이 사건 이후 언론에 대해 생겨난 ‘기레기’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에 맞게 사태를 알아서 사태를 ‘왜곡’하고 ‘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공정ㆍ중립ㆍ객관 보도라는 이념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파기된 19세기적 과학관의 소산이다.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 이래, 쿤과 푸코 이래, 오늘날 아직도 과학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과학자가 있는가? 이른바 ‘객관적’ 사실 보도란 오직 주어진 관심, 곧 선택된 특정 관점 내에서의 ‘객관적’ 사실 보도일 따름이다. 뉴스의 전체 방송 시간이 정해져 있을 때, 보다 중요한 내용은 결국 우선순위로 선택되어 보도되고, 덜 중요한 내용은 뒤로 밀리거나 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윗선 또는 청와대의 눈치를 보든 개인적인 판단이든, 어떤 것을 보도하고 어떤 것을 보도하지 않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 이 경우에는 가히 정치적 - 선택행위이다. 만약 객관 진실 중립 보도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방송, 신문, 뉴스는 보도될 사건의 선택은 물론, 보도 내용에서도 토씨 하나까지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점과 뉘앙스에 따라 보는 이에게 모두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사람들일 경우에나 가능한 말일 텐데, 모든 면에서 생각과 의견이 똑 같은 두 사람이란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언론인도 언론을 듣고 보는 사람들도 모두 인간이므로, 언론에 관계된 어느 누구도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론에 보도되어 당신과 내가 읽고 들은 모든 ‘사실들’은 이미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관심에 입각하여 선택된 사실들, 곧 해석된 사실들이다. 아래에서는 작은 예를 통해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에 관련된 몇 가지 기초적 사실들을 검토해보자.
 
 
3. “당신은 스스로는 몰랐지만 정직하지 않았다.”
 
 
우선 합리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각자가 ‘같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인식을 얻었다면, 그 이유는 다음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첫째, 비록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경우가 존재한다. 이는 당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수한 개인적 사회적 또는 여타의 편견과 이익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따라서 스스로는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보았다고 진심으로 정직하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 ‘당신’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경우 자신이, 어떤 이익 또는 편견과도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곧 당신은 사실 당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정직하고,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 ‘당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이렇게 묻는 우리 자신도 똑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어(우리도 지금 우리는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왜 그러한 질문이 나와 우리가 아닌, 당신에게만, 곧 타인들에게로만 향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사실상 단순히 처음부터 그저 ‘나는 틀릴 수 없고, 당신은 그럴 수 있다’라는 식으로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몰랐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주장은 당신과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에게도 똑 같이 제기되고 대답되어져야 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나와 우리가 아닌, 당신과 그들에게만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 이렇게 ‘당신의 정직성’만을 문제 삼는 나의 동기 자체가 이미 나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함을, 또는 가장 좋은 경우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정리해보자.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첫 번째 경우는, 당신과 나를 막론하고,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경우이다. 이러한 가정은 그 대전제로서 우리가 알면서, 곧 의도적으로 나와 남을 속이고 있는 경우를 처음부터 제거한 연후에 성립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고 또 이를 스스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경우,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 심지어 자신과 남을 속이고 있는 당사자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가의 여부와도 무관하게 - 하나의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이 경우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우선 당사자가 스스로 반성하고 이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된다. 다음으로, 당사자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객관적 증거를 찾아내고 이로써 해당 당사자가 스스로와 남들 모두를 속이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당사자가 이를 인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 경우, 실제로 그런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가, 그것이 실제로 객관적인 증거인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실제로 자신을 속이는 경우만을 가정했으므로, 이러한 자기기만을 당사자가 실제로 인정하는가의 여부는 지금 다룰 필요가 없다.
 
 
 
이제, 당신과 내가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경우, 달리말해, 우리가 모두 정직하게 스스로의 주장을 진심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경우, 사태는 논리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우선, 당사자의 정직성과 믿음 여부와 무관하게 그 사람의 인식이 잘못된 경우가 존재한다. 당사자가 정직하게 진심으로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가 그것을 진심으로 정직하게, 더 나아가 강렬하게 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늘 옳은 것인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진심으로 정직하게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이 갖는 정직성, 절대성만을 보장해줄 뿐,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의 내용적 옳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개연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도 사실은 그를 수 있고,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믿어도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믿고 그것이 실제로 옳은 것일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그른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 그른 것일 수도 있다. 믿음과 사실은 서로 어떤 절대적 논리적 필연성도 갖지 않는 두 가지 다른 성질의 사태들이다.
 
 
4. 완벽한 정직성?
 
 
물론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전혀 기만하지 않는 ‘완벽한’ 정직성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과 전혀 무관한 완벽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이해관계나 편견이 완벽히 제거된 전적으로 중립적인 시선이 인간에게 가능할까? 이상의 질문들은 ‘어떤 경우에 그러한’(some)이라는 특칭명제가 아니라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그러한’(all) 전칭명제로서 제기된 것들이다. 이 경우,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오늘 ‘나는 개인적 시대적 계급적 편견이 전혀 없는 완벽히 객관적이고 공정한 중립적 인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역시 예외가 전혀 없는 논리적 전칭명제의 형식으로 제기된 질문이므로, 이에 대해 ‘나는 그런 절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내 인식은 절대적이므로 틀릴 수 없고, 절대적 인식은 하나이므로, 나와 다른 인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틀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서양에서 말하는 ‘하느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럽 중세도 조선도 아닌 이 시대에,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이런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절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령 누가 그런 주장을 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아무런 이견 제시 없이 그대로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하는가? 니체가 이미 19세기에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것은 신이 어디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을 벗어난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는(또는 설령 존재한다 해도 각자의 해석만이 존재할 뿐, 누구의 해석이 실제로 그 존재의 뜻인지를 결정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완벽한 정직성, 완벽한 객관성, 완벽한 중립성이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이러한 ‘완벽한 인식’을 이상으로 삼아 이를 추구해 나아갈 뿐, 결코 그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인간이 이러한 인식에 도달했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서양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일 수밖에 없다. 완벽한 인식을 가진 그에게는 오류란 것이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가능했다면, 모든 종교와 학문의 역사 역시 이미 끝났을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밝혀진 완벽한 진리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 어떤 개혁, 발전, 진보도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정직성, 완벽한 객관성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면, 인간에게 가능한 현실적 대안은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정직성 및 그에 입각한 ‘적절한’ 판단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다시 어디서부터가 ‘충분한’ 정직성인지, 어느 정도가 ‘적절한’ 판단인가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이는 다시 누가, 어떤 근거로, 어떻게 이러한 ‘충분함’과 ‘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끌려 간다.
 
 
 
5. “당신은 정직하지만 당신의 무지로 인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제, 다음으로 우리가 검토해보아야 할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의 정직성이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의 진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정직성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의 진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는 정직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공리이다. 나는 당신의 정직성을 의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인식이 옳은 것이 아님을, 나의 인식이 옳은 것임’을 확신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옳고 당신이 그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에 대하여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수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정직성에도 불구하고, 무지로 인한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논리는 다른 말로 이렇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정직성과 진지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신의 인식은 틀렸다. 그 이유는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곧 당신의 무지로 인하여 당신은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신의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당신의 무지 때문이다. 당신의 그릇된 인식은 당신의 도덕적 부족함이나 어떤 악의(惡意)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이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신은 내가 아는 어떤 기초적인 사실이나 논리, 또는 전체적인 정황,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당신은 당신의 순수한 진심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오류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나는 당신의 진심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인식은 당신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위 첫 번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경우 역시 이 논증은 당신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인식은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충분한 지식과 논리에 입각한 참된 것으로, 당신의 인식은 무지에서 기인한 오류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어떤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내가 정직하지 못하여 당신을 속이려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우리는 첫 번째 경우 이래로 이러한 부정적 자기기만의 경우를 이미 양자 모두에게서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당신이 무지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가능하다. 이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런데 실제로 당신이 그런 줄은 사실상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주장하는 경우,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당신의 주장이 당신의 무지로 인한 오류로 내게 보이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미 가정된 것이지만, 이러한 나의 느낌 또는 인식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나는 내 인식의 옳음과 당신 인식의 그름을 어떻게 아는가? 내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만하지 않았다. 결국 이 논리는 이렇다. “나는 나와 당신의 정직성을 믿는다. 그런데 내게는 당신의 논리가 오류로 보인다.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정직하므로 당신이 자기기만을 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의 오류는, 어떤 도덕적 문제가 아닌, 당신의 인식론적 문제, 곧 무지오류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신이 정직하다고 해서, 당신의 인식이 늘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증은 앞의 경우와 똑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논리가 왜 당신이 지적하는 ‘나’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는 아니고, 내가 지적하는 ‘당신’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논증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정직에 관련된 논증과 똑 같은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나의 주장은, 처음부터 그리고 어떤 근거의 제시도 없이, 당신의 주장에 대해 옳은 것, 우월한 것으로 가정되어 있다.
 
 
6. 진리, 재현의 논리
 
 
 
이제 이 ‘옳은 것’을 진리(眞理)라고 불러보자. 우리가 앞서 살펴본 이 모든 논증들의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나의 정직성은 진리를 보장하는 반면, 당신의 정직성은 - 그것이 나의 진리와 다른 것인 이상 -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러한 인식을 갖는데 있어 아무런 인위적 조작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내가 본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참다운 인식, 곧 진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인 자신에 대해서는 적용되는 이 인식이 나와 꼭 같은 다른 인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정직성은 진리를 보장하며, 너의 정직성은, 이상하게도 또는 안타깝게도, 다만 오류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자기중심적’ 논증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진리의 인식론적 비밀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정직하고 사심 없이 세계를 대하여 얻은 인식과 당신의 인식이 같으면, 당신의 인식도 진리이지만, 그렇지 않고 당신의 인식이 나의 인식과 다를 경우, 당신의 인식이 어떤 태도와 방법을 통해 얻어졌는가와 무관하게, 당신의 인식은 오류이다. 이 모든 논의의 대전제는 하나이다. 나의 인식과 다르다면, 당신의 인식은 오류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와 다른, 그리고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의 부정과 살해로 이어진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나’의 진리를 보장해주는 최우선적 요소가 나의 진심과 정직성이라는 사실이다(나의 악의와 권력의지도 물론 존재하지만, 전자는 도덕성의 문제로, 후자는 힘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가므로, 이 단계에서는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내가 진심으로 정직하게 어떤 조작도 없이 세계를 보았을 때 내게 비추어지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자체이다. 나의 인식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 곧 세계의 재현(再現, représentation)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계는 하나이고, 이 같은 하나의 세계를 우리가 바라보았을 때, 내가 사심이 없고 정직하다면, 내게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올바른 반영(反影, refléxion)이 아니겠는가? 세계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역시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사심 없이 정직하게 세계를 바라본 나의 이 인식이 아니겠는가? 재현의 논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의 인식론적 자기중심주의이다. 세계에 대한 올바른 재현인 진리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인식과 다른 인식은 단순히 나와 다른 것을 넘어 세계에 대한 틀린 인식일 수밖에 없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나의 인식과 다른 너의 인식은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너는 오류를 갖게 된다. 이처럼 세계의 재현에 입각한 진리의 이론은 살인의 이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진리에 입각한 우리의 세계 이해를 ‘이치에 맞다’, 곧 합리적(合理的, rational)이라고 부른다. 이제 당신과 내가 각자 자신의 진리와 합리성을 갖고, 사심 없이 정직하게 얻은 자신의 진리를 의심치 않으며, 각자의 진리, 각자의 합리성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가히 진리의 전쟁, 합리성의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진리들의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차라리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스스로 정직하게 얻은 진리를 의심 없이 믿으며, 자신의 본의와도 무관하게, 진리들의 전쟁을 펼친다. 서로 자신의 배타적 옳음만을 주장하는 이 다수의 진리들 중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일까? 누가, 어떤 근거로 그것을 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혹시 진리 자체가 아닐까? 보다 정확히 말해, 문제는 이른바 유일성, 객관성, 절대성을 가정하는 기존의 진리 개념 자체가 아닐까?
 
 
7. 진리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개의 진리들, 합리성들을 인정해도 되는 것일까? 진리란, 합리성이란 그 자체로 이미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무엇,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엇이라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여러 개의 진리들, 합리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유일무이한 절대적 진리를 믿는 절대주의자인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진리관(觀)밖에 없는 것일까? 또, 완전한 상대주의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 내에서의 일정한 진리-규칙을 갖는 상대주의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런 진리들이 사실은 주어진 영역 내에서만 유의미한 그런 진리들, 곧 진리놀이들이라면? 그리고 이 진리들 모두를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진리, 또는 메타-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각자는, 스스로 그것을 인식했든 아니든, 자신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택된 사실들만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각자의 주장에 합치하는 사실만을 보게 될 뿐이라면? 이제, 당신은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으나, 나의 지식이 그렇게 모여 구성된 지식임을 믿기는 정말 어렵다고. 나는 어떤 인위적 조작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모았을 뿐이며, 이렇게 모여진 나의 지식이 지식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진리임을 의심하기 어렵다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관심에서 다른 사실들을 모아 다른 진리를 구성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나와 모든 당신들의 이 모든 진리들을 모아놓은 절대적 진리의 집적체, 곧 진리 자체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고. 나의 것과 다른 진리, 나의 것과 다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그렇다. 세월호 사태를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길고도 먼 길을 돌아온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의 합리성과 다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할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 대답들은 긍정과 부정 그리고 양자 사이에 놓인 무수한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들의 숫자는 몇 개나 될까? 성실, 정직, 효도, 신의, 사랑 등등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 전체의 개수란 ‘가치’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근본적으로 그 개수는 유한한 것일 수 없고, 따라서 각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하여 당신과 나를 포함한 각자는 이렇게 무한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현실적 상황에서 이 가치들 사이의 경중을 가리게 된다. 나는 가령 정직, 성실, 효도 ... 이런 순으로 가치의 위계질서를 규정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당신은 사랑, 신의, 성실 ... 이런 순서로 위계질서를 규정한다고 해보자. 내가 정직을 최우선 순위의 가치로 규정한다는 말은 내가 성실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내가 성실이 아닌 정직을 선택하리라는 의미이다. 당신 역시 당신의 가치 기준에 맞추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가령 당신과 내가 각자 10개의 가치들을 나열하고 그 위계순서를 정했을 때, 당신과 내가 선택한 가치들이 동일하고, 더구나 그 경중의 위계질서까지도 동일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현실적으로는 물론 무수한 수의 가치들이 있기 때문에, 가령 10개의 동일한 가치를 고를 확률조차도 대단히 낮다. 더구나 그 순서마저도 일치할 확률은 거의 없다. 하물며 100개의 동일한 가치들을 고르고, 그 가치들 사이의 위계질서마저 같을 확률은 현실적으로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문장들에서 가치들을 사실들로 바꾸어본다면, 당신은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은, 당신과 나는 다르다’고 말할 때,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한 가지의 사실들이 있으며, 우리는 다만 우리의 관심과 관점에 입각해서 이들 중 단지 유한 개수의 사실들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모은 ‘우리의 사실들’에 입각해, 다시금 우리의 관심과 관점 아래 그 사실들을 해석한다. 선택된, 곧 해석된 사실들을 다시금 해석한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들’이다. 내가 믿는 합리성은 무한히 가능한 합리성의 형식들 중 단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더구나, 평생을 언론과 대중의 선택에 극도로 비판적인 관점을 취해오지 않은 한, 아마도 내가 믿는 합리성은 우리시대의 지배적 관점이기 십상일 것이다. 내가 믿는 합리성은 합리성 자체가 아님은 물론, 아마도 이 시대의 지배적 합리성이 내면화된 것이리라. 나의 합리성과 다른 합리성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8. 합리성들의 전쟁
 
 
 
나는 곤혹스럽다. 나는 이제까지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는 ‘저들’의 말이 그저 비합리적인 말, 부도덕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당신이 이제까지 정치에 무관심했든, 새누리당을 지지했든, 새정치연합을 지지했든, 노동당, 통합진보당, 심지어 북한 정권을 지지해왔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정당을 찍는 저 사람이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합리성 자체가 아니라 나름의 합리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나는 묻는다. 도대체 합리성,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렇게 합리성과 진리를 마음대로 새로 규정해도 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말장난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당신이 믿는 이 진리관을 발명한 자, 곧 진리를 ‘영원불변하는 절대 진리’로 규정한 플라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진리관이 승리를 거두고 이제까지 서구와 세계를 지배해왔다고 해서, 그리스인도 아닌 21세기 오늘의 우리가 그러한 진리관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무조건 지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노자와 공자와 부처, 원효와 퇴계와 다산은 이러한 진리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하나의 합리성을 부정한다는 말이 필연적으로 무조건적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동안 무엇을 믿고 있었던 간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저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것처럼, 부도덕한 동기를 가진 비합리적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나름 그래왔던 것처럼. ‘나름’이란 말이 걸리는가? 나의 합리적 선택이 ‘나름의’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도 역시 ‘나름의’ 합리성이 아닌 합리성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보면, 내가 ‘그들’이다. 그들이 나이고, 내가 그들이다. 이제까지 내기 전개한 합리성과 진리에 관한 이 모든 번쇄한 논의가 아마도 당신에게 복잡하고 이상한 것으로 보였다면, 그 이유는 나의 논의가 합리성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따라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괴해야 할 것은 진리와 합리성에 대한 이런 기존 관념이다. 진리와 합리성은 복수(複數)이다. 우리가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하나의 동일한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진리도 합리성도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하나의 동일한 사태도 하나의 동일한 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관점이 유일한 객관적 사태 파악이며, 따라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나의 해결책이라는 주장만이 있었을 뿐이다. 당신과 나는 동일하지 않은 사태에 대하여 각자 다른 관심과 관점에서 사태에 대한 다른 진단과 다른 해결책만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도 당신도 비합리적이지 않다(물론 우리가 같은 합리성 놀이를 수행하고 있을 경우에는 정답이 존재한다. 이 자리의 논의는 각기 다른 합리성 놀이들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입장 차이를 조정해줄 정답, 곧 메타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관련된다). 나는 당신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나와 다른 합리성의 형식을 가진 사람임을, 당신이 합리적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9. 세월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제, 합리성들을 가로지르는 절대적인 메타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남은 것은 합리성들의 전쟁뿐이다. 사태의 분명한 책임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두의 책임,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월호의 선원, 선주, 청해진해운에 대한 처벌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근본적으로 선원과 선주의 개인적 부도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단순히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경과 ‘해피아’ 및 관료사회 일반에 대한 비판과 처벌 역시 분명히 수행되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관점은 선원과 선주, 해경과 ‘해피아’ 등의 개인적 처벌에 만족함으로써, 그러한 사태를 가능케 했던 근원적인 원인, 곧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척결은 어떤 일개 공무원, 행정가가 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척결, 이른바 ‘적폐’ 타파의 실제적 결행 여부는 정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헌법에 의해 이러한 일을 수행해야 할 의무와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존재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일인밖에 없다. 따라서 세월호에 관련된 문제는 단순한 행정적 처리가 아닌 정치적 결단의 문제, 통치 행위의 문제이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대통령의 개입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대통령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택이며, 분명한 정치적 개입의 또 다른 형식이다. 나는 선원들과 선주가, 청해진 해운이 학생들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 그리고 관료와 언론이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처음부터 괴롭히고 죽이려고 아무런 개입도 대책도 내놓지 않으며 나아가 망언을 일삼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해 모든 것을 제쳐놓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아무런 절실한 이유가 없으며, 설령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는 단순한 사실의 지적일 뿐, 냉소의 힐난의 언사가 아니다.
 
 
 
좋다. 세월호와 관련된 이른바 ‘적폐’를 정말 그 근원에서부터 발본색원하여 척결한다고 하자. 적폐의 원인과 근원, 그 뿌리와 가지는 어디까지일까? 정권과 여당, 관료집단은 물론 언론에서 학계,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기득권자들, 이 적폐들은 스스로 조용히 물러날까? 아니, 자신이 적폐라는 것을 인정할까? 아마도 대한민국 기득권 집단 전체일 이 ‘적폐’는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예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 적이 없다. 어떤 일개인이 양심과 도덕적 반성에 의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혁한 경우는,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몇 십만에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기득권 집단이 모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도덕적으로 반성하여 알아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자는 여전히 ‘순진한 자’란 말을 듣지 않기 어려울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언제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는가? 내놓지 않으면 죽게 될 때이다! 아니, 역사는 심지어 죽게 되는 경우에도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떤 정부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드는 개혁을 알아서 먼저 하지는 않는다. 개혁하지 않고 관례와 관행에 따라 행동하면, 내가 구속된다는 것을, 우리 회사가 망한다는 것을, 나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시켜줄 때,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이 안 해도 되는 개혁을, 더구나 그러한 개혁이 자신의 권력 지지 기반 자체를 흔들 때, 권력자가 먼저 알아서 개혁에 나서기란 만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이 오늘 해야 할 일은 관료가, 기업이, 정부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압박하는 일이다. 이러한 압박을 현실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헌법상 대통령 일인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은 대통령이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철저히 압박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왕조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존재 이유와 주권은 국민인 나와 당신에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의 보호와 앙양이 민주공화국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가, 정권이, 이를 착각할 때, 이를 최우선적 가치로 간주하지 않을 때, 국민은 국가와 정권에게 이를 각성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고, 그러한 국가에서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놀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수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합리성의 궁극적 근거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오늘 이 땅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주의 참칭 세력이 일부 정치 영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좌파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우파를 우리의 정치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직자와 정치인은 자신이 일제시대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쿠데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는, 공화국의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도 안 된다.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이 자유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곧 당신에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국가와 정부의 공식의견과 다르게, 때로는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할 자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을 때, 그 국가에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선구, 로크의 말대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어떤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면, 이는 처음부터 계약 위반이라 볼 수밖에 없다. 상호 간의 계약을 이미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경우, 나머지 한쪽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계약을 파기한 자에게 계약의 준수를 강요하고, 불가피할 경우, 그러한 세력의 타도에 나서는 일이다. 이것은 서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정당화한 로크의 논의이다.
 
 
10. 국가와 정치의 존재이유
 
 
오늘 광화문에서 단식 논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라. 피해자들이 안 괜찮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는데,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닌 관료와 정치인들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반박은 물론 옳은 것이며, 합리적인 지적이다. 그러나 이를 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시도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의 처리는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이미 원칙적으로 끝난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법적인 어떤 책임도 없다는 일본정부의 논리와 동일한 것이다. 물론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양측 모두 법치와 행정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현 정부와 일본 정부의 논리는 분명히 옳은 것이며 근거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미 제정된 법, 이미 합의된 국제협정을 사후적으로 발생한 사태를 처리하기 위하여 다시 개정하거나 예외를 둔다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법치와 행정을 넘어서는 정치와 통치의 논리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행정과 법치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해석관점의 문제, 곧 정치와 통치의 문제이다. 이는 국가의 존재이유 및 정당성의 근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해석과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일본정부가 법치와 행정만을 내세우는 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기는 요원한 일이다. 현정부가 법치와 행정만을 내세우는 한,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는 요원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는 달리, 7.30 재보궐 선거에서 세월호 사태가 100여 일에 가깝게 이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아닌 여당이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개혁 피로감’과도 같은 ‘도덕성 피로감’의 결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국민이 정부 여당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기만당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공천 파동을 비롯한 지리멸렬한 야당의 문제였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경상도 천만 인구의 힘이라는 말을 한다. 아마도 모두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월호 사건이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 하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이보다 더 나은 구조(救助) 성과가 있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다만 가령 ‘특별법’의 제정을 비롯한 정부의 사후 대처라는 측면에서는 상당 부분 다를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과거부터 켜켜이 쌓인 ‘적폐’의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현 정권의 지지자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단순한 정치 공세로 치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민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국민이 새누리당’이라는 말을 지지한다. 새누리당이 총칼로 직접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닌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문제가 될 것도 없으며, 나는 이를 폄하의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국민들의 정서와 도덕감정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집단, 아니 파악하고 있는 수준을 넘어 국민의 정서 및 도덕감정과 ‘일체가 되어’ 국민을 ‘리드’하고 있는 집단은 - 가령 야당과 <한겨레신문>, 또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치>가 아니라 - 새누리당과 <조선일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이 80년대식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념론/유물론’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민 대다수의 정서를 이해하지도 리드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패배하기도 어려운’ 객관적 정세 속에서도 선거를 포함한 매번의 싸움에서 ‘판판이 패배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방금 ‘국민 대다수’의 정서라고 말했다. 정치는, 선거는 숫자 싸움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펼쳐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표를 받지 못하면 현실 정치에서는 질 수밖에 없다(이는 근본적으로 ‘혁명’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맹자의 말대로, 왕과 신하가 잘못되었으면 그들을 죽이고 바꾸면 되지만, 국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국민을 죽이고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인식과 행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규정하는 조건을 바꾸려 노력할지언정, 국민 자체를 죽이고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폴 포트나 스탈린, 마오, 김일성이 했던 일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국민을 알고 이해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국민을 알고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는 이제껏 국민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인식의 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준엄한 자각이다. 국가와 정치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말을 듣는 것,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국가와 정치는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세월호 사태와 관련하여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4년 6월호에 <‘해석권력’의 주체는 국민이어야>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그 자매편이라 할 수 있으며, 두 글의 논의 내용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2014. 5. 22.

'해석권력'의 주체는 국민이어야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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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 누구의 어떤 개혁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올해 6월이면 정확히 사망 30주년을 맞는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984년 5월 발간된 칸트의 계몽에 관한 한 기고문에서 칸트 철학의 새로운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로 정식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서, 현재의 문제, 동시대성의 문제에 관련된 것들이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로서 구성된 이 ‘지금’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의 앞바다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476명의 인원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한 달 이상이 지난 5월 30일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구조시스템은 침몰 전에 구출되었던 174명을 제외하고 배에 남아있던 300여명이 넘는 승객들 중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였다. 이는 침몰과 구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선원들과 청해진해운은 물론, 구조회사,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를 포함한 관료, 정치시스템 전체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단적으로, 이는 천재가 아닌 인재이며,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승선인 전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제 다시 물어보자.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의 오늘, 여기 지금,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지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도덕주의적’ 답변의 문제점 -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결여
 
 
 
이 질문의 중요성은 우리가 오늘 이 질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리라는 명백한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가령, 이는 매우 비극적인 참사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사건에 대한 도덕적 답변을 제출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대응은 - 아마도 이를 수행하는 당사자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 이러한 불행한 사태의 반복만을 낳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부터,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 참사를 거쳐, 바로 얼마 전 2월의 대학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가건물 붕괴 참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전 국민적 차원의 도덕적 반성이 수없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바로 오늘 세월호 침몰 사건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무책임한 선원과 비도덕적 탈법을 일삼은 청해진해운, 이를 비호하고 편의를 보아준 ‘공범적 공생관계’의 공무원, 관료집단 등 명백한 책임주체가 있는데도 ‘우리 모두의 책임’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 설령 그것이 순수한 자기 성찰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 현실적 문제점의 인식 자체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도덕적 반성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거나, 비도덕적 개인 혹은 집단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비도덕적 개인과 집단은 늘 존재하며, 개인의 부도덕함은 비난받아야 하고, 집단의 비도덕적 음모는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 혹은 집단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은 정작 문제의 핵심이라 할 보다 큰 사회적 차원의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
 
 
 
 
나는 승객들의 탈출과 자신들의 탈출이 양자택일적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자신들만 탈출한 선원들에 대하여 분노를 금치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정당한 분노를 인정하지만, 세월호의 선원들만이 유난히 부도덕한 인물들로 우연히 구성되어 있었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없다. 세월호의 선원들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평균적인 대한민국의 선한 직장인들이었으며, 아마도 대한민국의 다른 모든 여객선의 선원들과 현격히 구별될 만한 질적인 도덕적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세월호의 선원들이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마도 대한민국 선원들의 ‘평균적인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진 세월호의 선원들, 청해진 해운은 오늘 이 시각에도 자신들의 과오와 범죄 행위보다는 ‘하필 자기 회사의 배가 침몰한’ 불운을 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비극적 해체의 운명을 맞이한 해경과 해수부 관료 마피아, 넓게는 대한민국의 관료집단 전체가 갖고 있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재수가 없어서 하필 우리 영역에서, 우리 관할에서, 우리 회사에서, 우리 배가’ 침몰했으며,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면책을 도모하며, 이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국민들이 세월호를 잊을 때까지 납작 엎드려 지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을 내버려두고 가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 안전하게 탈출하는 이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단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해도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이렇게 해왔어도 직장에서 자리를 잃지 않으며, 다른 선원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다른 회사도 모두 다 이러하며, 이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공무원, 관료 집단 전체도 다 그러하며, 대한민국의 다른 영역들도 세월호 같은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나라는 개인과 우리 회사와 내가 만나는 관료 집단,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 전체가 하나로서 그러한 ‘공생적 악순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을 경우에만 유지 가능한 것이다. 물론 부도덕한 개인은 비난받아야 하고, 부패와 법범 행위는 엄단되어야 하며, 음모는 밝혀져야 하고,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인적 도덕적 반성의 촉구와 그에 이어지는 해당 기업 및 관료의 사법적 처벌에 만족하고 만다면, 이러한 불행한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덕적 단죄와 사법적 처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세월호’를 막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서는가?
 
 
 
따라서, 어떤 특정 개인, 회사 혹은 집단에 대한 도덕적 비난 혹은 사법적 처리라는 기반 위에,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평균적 도덕성’을 가능케 했던 제반 조건 자체의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한 국가의 평균적 도덕성 혹은 직업윤리, 관료윤리는 물론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의 개혁을 포기하거나 방기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선원들은, 기업인들은, 관료들은 언제 이러한 ‘관행’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의 집단은 언제 자신들의 부당한 ‘기득권’을 타파하고 올바른 길로 나설 것인가? 이에 대한 역사의 답변은 간명하다. 하나의 집단은 그들이 ‘바꾸지 않고서는 안 될 때, 바꾸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관행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탁월한 개인의 도덕적 회심은 개별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수만에서 수십만, 수백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평생 익혀왔던 요령과 관행, 곧 기득권을 버린 경우란 역사에 전무하다. 그들이 그것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버릴 ‘의지’가 없기 때문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시스템의 일부이며, 자기 정체성의 원천이 바로 그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설령 스스로를 혁파하고자 해도 그러한 일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의 결여’인 동시에 ‘능력의 결여’이다. 기업이든 관료이든, 한 집단의 개혁은 자율적 부분과 타율적 부분이 결합될 때 성공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기업과 관료의 자율적 반성이라는 기초 위에 제도적 곧 타율적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존재는 바로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에 세월호 사태에 대한 도덕적, 사법적, 행정적, 관료적 처리 이상의 정치적 결단의 차원, 곧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의 논리가 놓여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라는 정치적 행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이에 대한 확고한 개혁의지, 대통령 자신의 표현을 따른다면, ‘국가개조’,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모두 좋은 말이다. 나는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 의도에 대해 그 순수성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으며, 차라리 그러한 언명의 순수성을 믿는 편이다. 그러나, 하나의 기준을 놓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다. ‘정치 집단인 전교조를 순수한 교육현장에서 몰아내자’는 주장 이상의 정치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을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존재하는가? 주어진 시스템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그와 달리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사유가 있는가? 나와 같이 생각하면 순수하고 정상이며, 나와 달리 생각하면 불순하고 비정상이라는 논리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있을까? 국민은 정부와 달리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달리 생각하는 순간, 불순한 비정상이 되어 엄단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일까? 만약 세월호 사건이 일부의 주장처럼 ‘순수한’ 사고였고, 따라서 대통령은 ‘순수한’ 유족만을 만날 것이며,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세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이자 정치인인 박근혜 대통령은 왜 ‘순수한’ 사고인 세월호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했는가? 이는 21세기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인 나는 정부와 달리 생각할 ‘자유’가 없으며, 사실상 오늘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말일까? 정부에서는 참으로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문제가 있고 불순하며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는 - 서구 중세의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無誤說)을 패러디하여 - ‘정부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정부무오설이라도 주장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는 ‘자유롭지도 민주주의이지도 않은’ 정부를 여하튼 신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을 ‘해석권력’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이른바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때, 자신의 해석을 ‘현실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 간주하고 이를 강요하는 힘이 해석권력이다. 그리고 그 해석권력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있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대한민국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석권력이 과연 국민에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해석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직 국민 스스로가 할 수 있을 뿐이다.
 
 
 
 
국민이 ‘해석권력’의 주체임을 보여주어야
 
 
 
다시 한 번 문제는 의지의 문제인 동시에 능력의 문제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순수한 의도에 입각한 것이라 해도 그 실천, 실현 능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현재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은 언제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수많은 저항과 난관이 예상되며,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안위조차 위태로운 개혁에 나서지 않아도 정권이 유지된다고 믿을 때, 과연 한 나라의 정부는 개혁에 나선 경우가 존재하는가? 불편하고 무섭지 않은 복종하는 말 잘 듣는 국민,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는 착한 국민을 위해 정부가 알아서 자신의 존립 기반 자체를 흔드는 개혁에 나설 것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김용옥의 지적대로, 국민적 합의 없이 특정 정치인 개인의 의지대로 해석된 ‘정상화, 국가개조’는 문제의 책임자가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황망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자각이다. 박근혜 정부는 ‘안 해도 되는 개혁’을 시도할 리도, 시도할 수도 없다. 성공 여부와도 무관하게, 오직 국민들이 ‘정부가 진정한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스스로의 힘을 보여줄 때에만’ 박근혜 정부는 참다운 개혁에 나서고자 할 것이다. 논점은 언제 박근혜 정부가 언제 개혁에 나서는가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나름의 개혁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참다운 문제는 ‘누가 주체가 되는 어떤 개혁인가’의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개혁은 실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버린 전도된 상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푸코는 서두에서 언급한 오늘, 현재의 문제와 관련된 한 강의에서 정치 혹은 통치성과 관련하여 현재의 문제를 이렇게 정의했다. “어떻게 특정인, 특정집단에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의 위대성은 정치철학의 근본적 주체를 통치자로부터 피통치자에게로 영원히 바꾸어놓았다는 점이다. 푸코는 정치와 통치성의 문제를 피통치자의 관점과 관심에서 다시금 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바로 이러한 혹은 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푸코가 ‘주체와 권력’이라는 말년의 논문에서 대답하고자 노력했던 바이다. 푸코의 대답은 이러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더 이상 이전처럼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렇다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타율적으로 규정된 우리의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권력의 문제는 가장 철학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영원한 ‘오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14.5.27.



 
 
 
 

기자가 싫은 4가지 이유



멱살 잡힌 채 쫓겨나고 막말 듣는 기자들…
자성의 목소리 높지만 전에 없는 냉소만 가득
 

    지난 5월15일 경기도 안산 세월호 사고 정부합동분향소. ‘스승의 날’을 맞아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생존한 학생의 부모들이 선생님 영전 앞에 빨간 카네이션 바구니를 놓았다. “우리 애가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학생 유가족과 선생님 유가족이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해졌다. 취재수첩을 든 기자들도 대화를 들으려고 한 발짝 다가갔다. “기자들 물러나주세요.” 유가족이 말했다. 조금 뒤로 물러나는 듯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기자들은 다시 유가족에게 모여들었다. “기자들 물러나주세요” “기자들 물러나주세요”∼ 메아리가 퍼져나갔다.
 
 

기념행사가 끝난 뒤 유가족 대기실 천막 앞에 서서 기다렸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대책위의 협조를 받아 몇몇 유가족을 인터뷰할 참이었다. 주변에 벤치도 있었지만 왠지 앉아서 기다리기가 죄스러웠다. “여기 서 있으면 안 됩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대기실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리지 않습니까.” 그의 시선은 내 취재수첩을 향해 있었다. 몰래 취재하는 중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나는 유가족이 싫어하는 기자가 어쨌든 맞으니까.
 
 
 
한국 언론이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고들 한다. 멱살이 잡힌 채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고 카메라가 내동댕이쳐진다. “개새끼야, 그게 기사야”라는 욕설도,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어쩌다가 언론이, 우리가 이 지경이 됐을까. <한겨레21>은 세월호 피해 가족과 자원봉사자, 언론학자, 시민활동가 등에게 ‘우리가 기자를 싫어하는 이유’를 두루 물었다.

 
 
 
1. 빠른 뉴스, 막말 뉴스

 
 
 
4월16일 사고 당일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최악의 오보가 나왔다. 특히 MBC 기자들은 “최악의 오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혔지만 MBC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목포MBC 기자들은 사고 당일 오전 11시쯤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해경 경비정과 헬기, 어선들은 잠긴 선체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할 뿐 전혀 손쓰지 못했고 잠수요원도 볼 수 없었다. 현장 기자는 목포해양경찰서장에게 “구조자가 160여 명”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울MBC 전국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MBC는 다른 언론사와 마찬가지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학생 전원 구조”라고 보도했다. 전국MBC기자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낸 ‘미필적 고의에 의한 명백한 오보’”라고 고백했다.

 
 
언론의 오보로 유가족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고 방심한 정부는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단원고 학부모들은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아들·딸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은 선체가 전복될 때까지 경찰 간부후보생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다. 그가 진도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고 발생 4시간이 지난 오후 1시10분쯤이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세월호 사건처럼 오보가 많았던 참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재난 보도는 정확성이 생명이라 언론에 대한 신뢰가 그냥 무너졌다. 처음 한 번은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더라도 오보가 되면 그다음부터는 반성하고 더 신중하게 보도해야 했다. 하지만 속보 경쟁에 매달려 계속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난 7년간 정부의 언론 장악 기도가 지속됐다. 그사이에 기자들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취재하는 분위기가 사라졌다고 본다. 비판적으로 보지 않으면 문제를 볼 수 없는데 기자들이 그렇게 돼버렸다. ‘부정적으로 보도하면 문제가 된다’라는 기득권자의 관점이 언론사 내부까지 뿌리내린 것”이라고 진단했다.

 
 
 
2. 윗물이 썩었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교통사고 사망자 비유(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전언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나 박상후 MBC 전국부장의 발언(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성명서 “그런 ×들 (조문)해줄 필요 없어”)은 사회적 비난을 불렀다.



 
재난방송을 이끌어야 할 공영방송은 오히려 믿음을 주지 못했다. 지난 5월7일 방송된 MBC 박상후 전국부장의 리포트는 구조에 참여한 민간 잠수부의 죽음을 실종자 가족들의 조급증 탓으로 돌려 시청자의 원성을 샀다. MBC 뉴스 화면 갈무리
 
 
유가족들은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5월8일 임창건 보도본부장과 이준안 취재주간 등 KBS 임직원이 합동분향소를 찾아왔지만 김시곤 국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유가족의 말이다. “오후 5시쯤 김시곤 국장이 사과하러 온다고 해서 기다렸다. 7시가 넘었는데도 오지 않더라. 우리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8시30분까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찾아가겠다고 했다. 결국 아빠들이 아이들 영정을 눈물로 떼어내 서울행 버스를 탔다. KBS 앞에 갔는데도 보도국장은 나타나지 않고 (길환영) 사장은 면담을 거부하더라. 사과를 더는 구걸하기 싫어서 청와대로 향했다.”

 
 
김시곤 국장은 이튿날 보도국장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발언에 대한 반성이나, 유가족에 대한 사과의 뜻이 아니었다.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혼심의 힘을 기울였으나 보도의 독립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진”다고 했다.

 
 
박상후 MBC 부장도 막말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MBC의 세월호 보도를 총괄한 그는 민간 잠수부의 사망 원인을 실종자 가족들의 ‘조급증’ 탓으로 돌린 ‘데스크리포트-분노와 슬픔을 넘어서’(5월7일)를 보도해 MBC 내·외부에서 비판을 받았다.

 
 
2012년 MBC 노조 파업 때 홍보국장을 한 이용마 MBC 해직기자는 “이 사람들(김시곤·박상후)은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곤 국장이 물러나면서 길환영 사장보고 나가라고 했는데 ‘너나 나나 똑같은데 내가 왜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는 생각에서 비롯된 거다. 반성하기보다는 재수가 없었다고 인식한다. 유가족을 비난하는 뉴스를 내보내는 것도 일반인과 완전히 동떨어진 수준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청와대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이 정권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관점에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본다.”(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에서)


 
 
3. 권력 눈치를 본다
 
 
 

“사고 당일에 아빠 10명이 6만원씩을 걷어 낚싯배를 빌려 나갔다. 해경은 부직포만 깔고 있더라, 기름이 유출될까봐서. 세월호 50m 앞까지 가는데 제재도 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왜 아이들을 구하지 않고 기름만 걷고 있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나는 권한이 없다’고 정부 상황실 관계자가 말했다. 정부가 구조해주지 않아 이튿날 비가 오는데 엄마들이 팽목항에서 무릎 꿇고 1시간 동안 빌었다. ‘제발 아이들 좀 살려달라’고. 그 모습을 수십 개의 카메라가 다 찍어놓고는 방송에 내보내지 않았다. 방송했으면 아이들을 구해내라고 국민이 같이 나서줬을 텐데…. 언론은 ‘정부가 구조에 최선을 다한다’고 써댔다.”(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엄마)

 
 
황필규 변호사는 당시 진도의 구조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진도 팽목항. 이미 사고 후 사흘하고도 몇 시간 지난 시간, ‘UDT 요원 ○○명, 조명탄 ○○발…. 숫자들만 나열된 보도자료를 배포한 해경 국장을 피해자 가족들이 정부상황실에서 끌고 나옵니다.

 
 
가족들: 가라앉은 배가 옆으로 기울었다는 사실 알고 계시죠? 왜 이 중요한 사실이 보도자료에 없나요? 언제 보고받았나요?

 
 
해경 국장: 네, 알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보고받은 적은 없습니다….

 
 
가족들: 첫날부터 바지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왜 이제야 바지선 투입을 결정했나요?

 
 
해경 국장: 처음에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어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 왜 이렇게 인력을 적게 투입하나요?
 
 
 
해경 국장: 오늘부터는 날씨와 무관하게 전원 투입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수십 개의 언론사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 장면을 찍었고, 한두 언론은 생방송을 한다고 소리쳤지만, 이 장면이 제대로 보도된 언론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블로그에서)
 
 
 
 
언론은 초기에 정부의 엉터리 구조 작업을 비판하지 않았다. 선장과 승무원의 태도, 청해진해운 등 사고 원인과 책임자 처벌로 순식간에 취재 초점을 넘겼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청와대와 정부를 감싸기 위해서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진단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방송사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뉴스를 정권에 헌정하려는 태도를 가졌다고 보인다.”(김언경 사무처장) 정연우 세명대 교수(언론학)는 “명절 때 고속도로 상황을 중계한다고 헬기를 띄우는 언론이 세월호 사건 때 헬기도 안 띄웠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의 진도 사고 현장 방문 보도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불안과 분노로 격앙돼 거친 항의와 불만의 목소리를 냈지만 KBS와 MBC는 이러한 분위기를 지워버렸다. KBS 기자는 이를 ‘날조’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의 발언 뒤 박수갈채는 연단 위 대통령과 땅바닥의 실종자 가족들을 벽처럼 갈라놓은 공무원과 경호원의 것이었다. 기묘한 편집술 덕에 공무원의 반응이 마치 가족의 반응인 것처럼 둔갑했다.”

 
 
 
4. 뻔뻔하다
 
 
 
 

언론을 향해 표출하는 분노와 불신은 달라진 언론 환경과도 닿아 있다. ‘정보에 접근하고 정보를 기록하며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서 기자가 독점적으로 누려온 지위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까닭이다. 현장을 전하는 신속성과 생생함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이미 기존 언론을 무릎 꿇렸다. ‘현장의 목격자 모두가 기자’인 시대에 기자가 전하는 정보 자체보다 기자가 정보를 전하는 태도가 중요한 덕목이 됐다. 그래서 취재 업무만을 앞세우는 기자들의 모습이 더욱 도드라진다.

 
 
“사고 당일 구조자가 나오는데 기자들이 몰려가 질문을 쏟아냈다. 서둘러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들인데 기자한테는 그냥 취재 대상일 뿐이었다. 천불이 나서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또 누군가 필요할 때는 들어주지 않다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물불 안 가리고 덤빈다. 아주 질렸다.”(자원봉사자 이석준·24·가명)

 
 
“5월8일께 진도체육관에서 피해 가족들이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언론사가 카메라로 그 모습을 몰래 찍다가 걸렸다. 가족들이 화내고 자원봉사자들이 말리고 경찰이 오고…. 최소한의 배려도 없다. 게다가 취재 과열이나 경쟁으로 언론사가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도는 나가지 않는다. 제 살 깎아먹기이지만 보도하지 않으면 자정 기능을 상실하지 않나.”(자원봉사자 박수동·27)

 
 
 
4월24일 사고 9일 만에 등교를 재개한 안산 단원고 3학년 한 여학생이 언론인의 꿈을 포기하며 쓴 글(‘대한민국의 직업병에 걸린 기자분들께’)엔 무례한 기자들을 향한 실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저의 꿈이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신념을 뒤로한 채, 가만히 있어도 죽을 만큼 힘든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는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업적을 쌓아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앞뒤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에 반발하며 청소년들에게 침묵행진을 제안하는 글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렸던 고등학생 양지혜양도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무조건 마이크를 갖다대고 있는 기자들과 그 상황을 강제하는 취재 시스템에 화가 났다. 장래에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기자들을 보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무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됐다.”

 
 
 
죽음의 공포에 내던져진 가족들과 만나는 기자들은 인간적으로도 미성숙했다. 자원봉사자 박수동씨의 경험담이다. “진도체육관 2층에서 한 남자 기자가 게임을 하고 있더라. 게임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했는지 눈치를 계속 보면서 말이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걸 보며 ‘저 사람들은 그냥 최소한의 공감도 안 되나보다’ 생각했다. 기자들은 가족에게 주는 고급 도시락이나 햄버거, 이런 것도 아주 잘 챙겨 먹더라. 어떤 자원봉사자는 기자들이 많은 모텔에 묵었는데 방 앞에 술병, 치킨 상자 같은 게 쌓여 있어서 황당했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비극의 현장’인데 그들에겐 ‘일터’구나 싶었다.”
 
 
 
 
 
욕먹는 동안 주목받은 언론인

 
 
 
피해 가족들의 편에서 눈물 흘리는 언론인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의자에 앉아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손석희 JTBC 사장은 진도 팽목항에서 비를 맞으며 보도했다. 대부분의 언론인들이 ‘기레기’라고 욕먹는 동안 일부 언론인들은 오히려 주목받았다. 기자가 무조건 싫다기보다 그만큼 진짜 기자를 절실히 원한다는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한 대학원생의 말이다.
 
 
 
세월호 보도에서 JTBC가 처음부터 피해 가족과 시청자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언론사와 마찬가지로 세월호 탑승자와 구조자의 집계 오류를 받아썼고, 사고 첫날 <뉴스특보>에선 앵커가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의 사망 소식을 아는지 물었다. 여론은 싸늘했다. 하지만 그날 손석희 앵커는 깊은 반성을 담은 사과를 거듭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행했다. 앵커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묻자 전문가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답했다. 이때 손석희 앵커는 10초간 침묵하며 비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다른 언론사가 희생자 가족의 오열이나 안타까운 사연에 매달릴 때도 JTBC는 부진한 구조 작업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실종자 가족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4월25일부터 5일간 같은 옷을 입고 진도 팽목항에서 생중계한 뒤 손석희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분들이 아직 많이 계셔서 발길이 떨어질 것 같지 않다. 현장 진행은 마무리하지만 이곳을 향한 시선을 멈추거나 돌리지 않겠다. 약속한다.” JTBC는 5월16일까지 31일째 세월호 사건을 톱뉴스로 다루고 있다.

 
 
최근에는 KBS와 MBC 기자들의 자기반성도 잇따라 나왔다. 특히 KBS는 5월15일 세월호 사건 한 달 특집 방송으로 진행된 <뉴스9>에서 사과 방송을 내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 구조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나 유가족들의 항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점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보도했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유가족 기자회견은 보도하지 않은 점 △사고 당일 정부가 발표한 투입 구조 인력을 받아쓴 점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길환영 사장의 ‘보도 개입’을 폭로한 것을 다루지 않은 점 등이다. 다음날인 5월16일에는 KBS 보도본부의 보직 부장 18명 전원이 보직을 사퇴하고 “길환영 사장 사퇴”를 요구했다.


 
 
어차피 기대할 것 없는 ‘기자 사회’


 
 
같은 날 <중앙일보>는 ‘세월호 부정확한 보도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2면 전면에 싣었다. △탑승·실종자 수를 정확히 보도하지 못한 점 △초기 구조 현황에 대한 정부 발표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점 △가족들에게 상처 준 보험금 보도 △구조된 아이 얼굴을 그대로 내보낸 점을 반성했다. <중앙일보>는 세월호 참사 1년 뒤인 2015년 4월16일 달라진 재난 안전 체계를 치밀하게 검증하고 고발하는 ‘국가 개조 프로젝트 검증보고서’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기레기’라는 전 사회적 비난 앞에서야 들리기 시작한 언론인들의 자성 목소리도 전에 없는 냉소 앞에 직면해 있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국민의 눈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집단으로서 ‘기자 사회’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아예 없다. 어차피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는데 기자들이 스스로 성찰한다고 하는 모습이 피해 가족과 국민의 마음엔 다가오지 않는다”고 했다.


 
 
안산=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 
 
 
 
 
 



2014. 5. 5.

김용옥 - “국민들이여, 거리로 뛰쳐나와라!”

 


[세월호 참사 특별 기고/동영상]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 - 더이상 애도만 하지 말라!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
 
 

2014. 4. 29.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 - 박성미





 
 
 
[펌 -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소통광장 자유게시판]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

박성미 조회수 102610 공감수 11356




원 글쓴이입니다. 페친 중 어느 분이 답답한 마음에 대통령 보라고 이 글을 청와대 게시판으로 가져오신 듯 싶습니다. 덕분에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글은 제가 썼으나 용기는 그분이 내어주신 셈입니다. 부담스러우셨는지 그분이 자진 삭제를 하셨고 청와대에서 글이 삭제된 데 대해 다른 의도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글을 다시 올립니다. 달아주신 답글들 중 주옥같은 글들이 많아 함께 올립니다. - 박성미





 * 원문



숱한 사회 운동을 지지했으나 솔직히, 대통령을 비판해본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번만큼은 분명히 그 잘못을 요목 조목 따져 묻겠다.
지금 대통령이 더 이상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를.

대통령이란 직책, 어려운 거 안다. 아무나 대통령 하라 그러면 쉽게 못 한다. 그래서 대통령을 쉬이 비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 물러나라 라는 구호는 너무 쉽고, 공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아무리 무능해도 시민들이 정신만 차리면 그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임무를 수행 해야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놓쳤다.

첫째, 대통령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몰랐다.

대통령이 구조방법 고민 할 필요 없다.
리더의 역할은 적절한 곳에 책임을 분배하고, 밑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고, 밑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아래 사람들끼리 서로 조율이 안 되고 우왕좌왕한다면 무엇보다 무슨 수를 쓰든 이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안행부 책임 하에서 잘못을 했다면 안행부가 책임지면 된다. 해수부가 잘못했으면 해수부가 책임지면 된다. 그런데 각 행정부처, 군, 경이 모여있는 상황에서 가 책임소관을 따지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면, 그건 리더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거다. 나는 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모든 행정부를 통솔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딱 한 명 밖에 모른다.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했어야 할 일은 현장에 달려가 상처 받은 생존자를 위로한답시고 만나고 그런 일이 아니다. 그런 건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구조 왜 못하냐, 최선을 다해 구조해라’ 그런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잘 못하면 책임자 엄벌에 처한다’ 그런 호통은 누구나 칠 수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은 그게 아니다.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왜 쇼핑을 못 한답니까?’ 그런 말 하라고 있는 자리 아니다.
공인인증서 폐기하라고, 현장에 씨씨티비 설치하라고, 그러라고 있는 자리 아니다.
일반인들이 하지 못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에 책임이 있는 거다. 대통령? 세세한 거 할 필요 없다. 대통령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일이 안 되는 핵심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점을 찾는 일, 뭐가 필요하냐 묻는 일. 그냥 해도 될 일과 최선을 다할 일을 구분하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포기할 일과 안 돼도 되게 해야 할 일을 구분해주고, 최우선 의제를 설정하고 밑의 사람들이 다른 데 에너지를 쏟지 않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는 일, 비용 걱정 하지 않도록 제반 책임을 맡아 주는 일
영화 현장의 스탭들은 감독이나 피디의 분명한 요청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안 돼는 일도 되게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어려운 일을 되게 하려면 당연히 비용이 오버 된다. 이 오버된 제반 비용에 대한 책임. 그것만 누군가 책임을 져 주면, 스탭들은, 한다.

리더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안 돼도 되게 하려면’
밑의 사람들이 비용 때문에 망설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것이 구조 작업이던 뭐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면 무조건 돈이 든다. 엄청난 돈이.
만약 사람들이 비용 때문에 망설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그건 대통령이 정말로 누군가의 말단 직원인 적도 없었고 비용 때문에 고민해 본 적도 없다는 얘기다.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도 다 아는 사실이다.
만약 리더가 너 이거 죽을 각오로 해라. 해내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협박만 하고 비용도 책임져주지도 않고, 안 될 경우 자신은 책임을 피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구하는데 돈이 문제냐 하지만, 실제 그 행동자가 되면 달라진다. 유속의 흐름을 늦추게 유조선을 데려온다? 하고 싶어도 일개 관리자가 그 비용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러나 누군가 그런 문제들을 책임져주면 달라진다
“비용 문제는 추후에 생각한다. 만약 정 비용이 많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진다.”
그건 어떤 민간인도 관리자도 국무총리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힘 없는 시민들조차 죄책감을 느꼈다. 할 수 있었으나 하지 못한 일, 그리고 전혀 남 일인 것 같은 사람들조차 작게나마 뭘 할 수 있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이끌 수 있었던, 문제점을 파악하고 직접 시정할 수 있었던, 해외 원조 요청을 하건 인력을 모으건 해양관련 재벌 회장들에게 뭐든 요청하건,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그 많은 걸 할 수 있었던 대통령은 구조를 위해 무슨 일을 고민했는가?

둘째, 사람을 살리는 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정부는 필요 없다

대통령은 분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왜 지휘자들은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안았을까?
그것이 한 두 번의 명령으로 될까?

날씨 좋던 첫째날 가이드라인 세 개밖에 설치를 못했다면, 이러면 애들 다 죽는다. 절대 못 구한다 판단하고 밤새 과감히 방법을 바꾸는 걸 고민하는 사람이 이 리더 밑에는 왜 한 사람도 없었는가? 목숨걸고 물 속에서 작업했던 잠수사들, 직접 뛰어든 말단 해경들 외에, 이 지휘부에는 왜 구조에 그토록 적극적인 사람이 없었는가?

밑의 사람들은 평소에 리더가 가진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급한 상황에서는 평소에 리더가 원하던 성향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평소 리더가 어떨 때 칭찬했고 어떨 때 호통쳤으며, 어떨 때 심기가 불편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리더가 평소에 사람과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사람이라면
밑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던 말 하지 않아도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한다.

쌍용차 사태의 희생자들이 분향소를 차렸을 때
박근혜에게 충성하겠다 한 중구청장은 그들을 싹 쫓아냈고
대학생들이 등록금 때문에 죽어가도 아무도 그걸, 긴급하게 여긴 적이 없고
모두 살기보다 일부만 사는 게 효율에서 좋고.
자살자가 늘어나도 복지는 포퓰리즘일 뿐이고.
세 모녀의 죽음을 부른 제도를 폐지하는 데에 아직도 대통령이 이끄는 당은 그토록 망설인다.
죽음을 겪은 사람들을 ‘징징대는’ 정도로 취급하고
죽겠다 함께 살자는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뿌렸다.
이곳에선 한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직도 이들에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고, 대의가 더 많다.
‘사람은 함부로 해도 된다’ 는 이 시스템의 암묵적 의제였다.

평소의 시스템의 방향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던 상황에서
이럴 때 대통령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라고 지시를 하면,
밑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진심으로 아이들의 생명이 걱정되어서 그런 지시를 내린 건지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보여줘라 라는 뜻인지,
정부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를 하라는 건지,
여론이 나빠지지 않게 잘 구조를 하라는 얘긴지,
헷갈리게 된다.
대책본부실에서 누가 장관에게 전했다.
“대통령께서 심히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말이 ‘아이들의 안위와 유가족들의 아픔을 염려하고 있다는’ 건지
‘민심이 많이 나빠지고 있어 자리가 위태로워질 걸 염려한다는’ 건지
밑의 사람들은 헷갈린다.

대신 지시가 없어도 척척 움직인 건
구조 활동을 멈추고 의전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
재빨리 대통령이 아이를 위로하는 장면을 세팅한 사람들
대통령은 잘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다 라고 사설을 쓸 줄 알았던 사람들.
재빨리 불리한 소식들을 유언비어라 통제할 줄 알았던 사람들.
구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애를 쓴 사람들.
선장과 기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방향으로 여론몰이를 한 사람들과
순식간에 부르자마자 행진을 가로막고 쫙 깔린 진압 경찰들이다.

이것은 이들의 평소 매뉴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소 리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

내가 선거 때 박근혜를 뽑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가 친일파라서도 보수당이어서도 독재자의 딸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남일당 사태 때 보여준 반응, 자신의 부친 때문에 8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거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안타까움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 대해 그토록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으로 뽑아선 안 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리더의 잘못을 여기에 있다.
밑의 사람들에게
평소 사람의 생명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잘못된 의제를 설정한 책임.

셋째,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막대한 권한과 비싼 월급, 고급 식사와 자가 비행기와 경호원과 그 모든 대우는 그것이 [책임에 대한 대가] 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조직에선 어떤 일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리더가 책임지지 않는 곳에서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 법을 알겠는가?

자신이 해야할 일을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사람을 살리는 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결정적으로,
책임을 질 줄 모르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덧붙임.
세월호 선장들과 선원들이 갖고 있다던 종교의 특징은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못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이라 한다.
이거,
굉장히 위험한 거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는 대통령,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사람에 대해 아파할 줄도 모르는 대통령은 더더욱 필요 없다.

진심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원한다.


* 댓글은 아래의 청와대 홈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http://www1.president.go.kr/community/sympathy/free_board.php?srh%5Bsearch_key%5D=memb_nm&srh%5Bsearch_value%5D=%B9%DA%BC%BA%B9%CC&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577537&srh%5Bdetail_no%5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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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떠난 후 조화는 합동분향소 밖으로 내보내 졌다. (사진=노컷TV 민구홍PD)

http://www.nocutnews.co.kr/news/4015852








2013. 12. 29.

영화 <변호인>과 부림사건의 모든 것

 
 
 
 
나도 그랬고 늘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한 시대의 새로운 세대는 그 이전의 시대를 알 수가 없다.
 
역사란 찾아서 공부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사이트는 참으로 유용한 우리 시대의
교육적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