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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2.

spain + portugal - history










































 
 
 
*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역사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Hispania)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선사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리아족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두 번째로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말라가, 알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키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 서고트족과 수에비족, 반달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이슬람 시대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포르투갈, 스페인)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 시대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베르베르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들은 북부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Parias)라고 불리는 보호비 명분의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1492년 최종적으로 후퇴하였다.
무슬림 통치의 종말과 스페인의 통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콘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한편 8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추방하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스페인의 전성기
 
네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5년)으로 여러 고비를 겪었다.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반란을 일으켜 1648년 독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하게 된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스페인 제국의 변천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지나치게 강요하였으며 더구나 무적함대가 1580년대 말 영국에 패배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적이 남발하면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생겨났고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두 나라의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를 후일을 우려해 계승권을 포기했다. 스페인의 완전한 자주 독립은 펠리페 5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역을 완전히 합병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서 성취됐으며, 그는 바로 귀족들의 터무니없는 특권을 폐지하였다. 통일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 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 강 서부에 있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쇠퇴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왕은 권력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이양하는 한편 조제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한다. 원래 스페인의 왕은 나폴레옹의 맹장(猛將)인 조아생 뮈라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아생 뮈라에 대한 스페인 군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관계로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하고 원래 나폴리의 왕이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왕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 역시 뮈라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군중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으므로, 1808년 5월 2일 민족주의자 군중은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일종의 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이러한 움직임은 반도 전쟁으로 촉발됐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낸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겹치면서 프랑스 세력은 1814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에 따라 나폴리의 왕으로 지내던 찰스 3세(나폴리의 페르디난드 7세)가 복권한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스페인-미국 전쟁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과 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혼란한 20세기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공화국(Rep. of Rif)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전선/우파연합과 제휴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국민전선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3년 뒤 스페인 내전의 시민 세력이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주도로 승리를 얻게 된다. 상당 부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게 됐다.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만 30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최초 시작이자 유럽의 시민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주축국에 협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행적이 국제 사회로의 진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반대를 부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순을 보일만큼 부가 지주계층, 군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편중돼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창궐하였다. 인민전선에서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 등 심각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국민운동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1세와 입헌군주제
 
1975년 유럽의 마지막 군사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은 왕정복고가 있었고,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용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1979년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으로 보통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스페인사》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에서 길게 줄을 설 만큼 보통선거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때 수감됐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부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이나 스페인의 정권을 독점하던 좌파계열의 사회노동당은 개혁을 요구받으며 결국 1996년 우파에 참패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Euskadi Ta Askatasuna”)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주장은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라는 것이다.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가 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ETA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004년 3월 13일 토요일 정오, 중도 우파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의 대변인이었던 Eduardo Zaplana는 검찰 수사가 ETA에 집중되어 있다고 발표한다. 이는 스페인 총선거 하루 전날 일이었다. PRISA 그룹에 속한 la SER 에선 정부 대변인 발언을 부인하며 검찰 당국이 이슬람 세력을 수사 중이라고 발언, 총선거 하루 전날 시민들은 SMS와 전화 등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당 본부 앞에 모여 "사실을 원한다.", "거짓말쟁이들", "선거 전에 우린 사실을 알고 싶다.", "Aznar(당시 국민당의 스페인 총리) 너는 알고 있다!" 등의 슬로건을 내달고 시위가 이루어진다. 결국 다음 날 총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 총선거에 2,5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국민당과 사회노동당, 두 정당에 표가 가장 많이 집중된 선거(82%)로 기록되었다. 2009년 11월 부로 스페인 정부는 양성 평등 비율이 거의 평균으로 동등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공표했다. 18명의 정부 각료 중 9명은 여성이며 현재 호세 로드리게스 총리 하의 내각에서 스페인은 양성 평등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히 안정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는 성평등 문제를 의식적으로 정부 내 문제로 각인하고 있는 정부가 스페인 이외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 입법 절차를 거쳐 성별에 관련한 정치, 경제에 대한 평등 문제를 용인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Gender Equality Act). 현재 입법부에서 350명 의석 중 128명은 여성으로 36.3%이다. 현재 하원의 경우 여성 의원이 더 많은 13번째 국가가 됐으며 상원의 경우에는 263석 중 79명이 여성으로 30%에 머물고 있다.
* 포르투갈의 역사
초기 이주민족들
 
포르투갈의 선사시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와 함께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흔적은 약 2만 4,5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자취"가 공존하는 크로마뇽인으로, 이는 두 종 사이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또한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이 드러나는 가장 최근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해당 종의 마지막 개체일 것으로 추정된다. 약 서기 5500년 전에는 중석기 문화가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에는 갈라이키족, 루시타니족, 코니족과 같은 부족들의 기원인 선켈트족과 켈트족이 점령하였고,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체류하였다. 로마인들기원전 45년 이후 처음 이 지역을 루시타니아로써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고, 비리아투를 우두머리로 한 저항을 진압한 뒤, 도루 강 북쪽의 갈라이키아(Gallaecia)를 세웠다. 로마는 포르투갈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라틴어는 포르투갈어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서기 406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로 반달족, 부리족과 같은 게르만족이 침공하였다. 이 중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은 이 지역에 첫 기독교 왕국을 세운다. 711년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알 안달루스를 세웠다. 기독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으로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운다. 레콩키스타 중인 868년 포르투칼렌스 백작령이 성립된다.
왕국의 성립 및 공고화
 
포르투갈 독립 훨씬 이전부터, 갈리시아 왕국과 포르투칼레를 통치하던 귀족들에 의해,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 확대를 꾀한 시도들이 여러 번 있어왔다. 레온 왕국의 지배에 대한 지방 귀족들의 독립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당시 "포르투칼레 땅"을 포함하고 있던 갈리시아 백작령의 통치권을 부르고뉴의 하이문두(Raimundo de Borgonha) 백작에게 양도하였다. 무어인에 대한 하이문두의 여러 차례의 군사적 실패 이후, 1096년 알폰소 6세는 하이문두의 사촌 동 엔히크 백작에게 갈리시아 백작령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하며, 포르투칼레 백작령이 세워졌다. 동 엔히크 백작의 통치 아래, 포르투칼레 백작령은 무어인들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군사 정책은 물론, 가장 활발한 독립정책을 펼쳤다. 동 엔히크 백작이 죽은 뒤, 아들 동 아폰수 엔히크스가 권좌에 올랐고, 포르투갈은 산타렝, 리스본, 팔멜라, 에보라 등 주요 거점을 무어인들로부터 정복하는 한편, 1143년 사모라 조약을 통해 독립에 서명하였다. 1249년 포르투갈의 헤콩키스타가 끝났지만, 신생 왕국의 독립은 이웃 카스티야로부터 여러 차례 위협받았다. 첫 위기는 페르난두 1세의 왕위계승 문제로, 당시엔 알주바호타 전투의 승리로 위기를 넘기며 아비스 왕가가 성립되었다.
지리적 발견과 필리피나 왕가
 
15세기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로 알려진 해외 원정 및 확장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항해왕자' 엔히크와 동 주앙 2세가 지도자로써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포르투갈은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였고,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바다의 끝으로 여겨지던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였고,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을 지나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였다. 뒤이어 '행운왕' 마누엘 1세 통치기간에는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동양으로의 항로와 육지 등 대다수를 발견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정복 덕분에 16세기 전반에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확장하는 데 전력을 쏟는 한편, 1530년 동 주앙 3세가 브라질의 식민화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1480년대부터 거의 100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578년 모로코 정벌에 나선 젊은 왕 동 세바스티앙과 상당수 포르투갈 귀족이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대패해 사망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뒤를 이어 즉위한 추기경왕 엔히크도 2년 뒤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고, 1580년 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 동군 연합(同君聯合)이 형성돼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필리피나 왕가"의 첫 왕인 "필리프 1세"로 즉위하였다. 독립된 외교권을 상실하고 스페인과 묶인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인도양 독점무역이 깨지며 큰 퇴보를 겪게 된다. 이러한 스페인의 지배는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종식시켰고, 동 주앙 4세가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정복고와 절대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독립운동 쿠데타 이후, 곧 스페인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쟁은 1668년까지 가서야 리스본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며 끝나게 된다.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브라질에서 금과 귀금속 등 광물이 발견되며 광산개발은 호황을 맞이했고, 이를 통해 동 주앙 5세 시기 포르투갈의 궁정은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궁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는 주로 수입품을 지불하는데 사용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왕국 내에 직물 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직물을 잉글랜드로부터 수입을 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이 잉글랜드로 빠져나가게 된다. 포르투갈의 대외 무역은 와인 산업에 기반하였고, 동 주제 통치기인 1750년에서 1777년 사이 재상을 지낸 폼발 후작은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중상주의적 개혁 등의 노력을 통해 왕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리스본과 알가르브를 폐허로 만든 1755년 11월 1일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유지하고 대륙봉쇄령에 참여하길 거절한 이유로 인해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는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해 리우데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긴다. 이러한 상황은 1816년부터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왕이 된 동 주앙 6세가 1821년 첫 헌법을 공포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돌아갈 때 까지 지속되었다. 이듬해, 그의 아들인 동 페드루 4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한다.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9월 혁명, 마리아다폰트 혁명, 파툴레이아 전쟁 등 반복되는 반란과 무력 봉기와 같은 거대한 사회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으며, 1852년 헌장에 추가 법령이 더해지면서 겨우 정치적 안정과 재생 기간 중 주를 이룬 폰트스 페레이라 드 멜루를 앞세운 진흥 정책의 시작이 가능해졌다. 19세기 말엽,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욕은 영국과 충돌했고, 이는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요구에 대한 굴복과 점점 더 흔해져가는 경제 문제와 논란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된다. 동 마누엘 2세가 이끈 왕실은 2년을 더 유지하지만,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계기로 공화국이 수립되며 폐지된다.
공화국, 이스타두 노부와 민주주의
 
1910년 10월 5일 공화국이 수립된 지 머지않아, 젊은 왕 동 마누엘 2세는 잉글랜드로 떠나게 된다. 이 후 수년간 노동자 투쟁, 소요사태 ,봉기, 정치인 암살, 재정위기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면서 더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군대가 권력을 쥐게 된다. 군사 정권은 1928년 재무부 장관으로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임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라자르는 1932년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된다. 살라자르는 재정을 회복하는 동시에,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 이스타두 노부(신국가체제 1932~1968 )를 수립하였고, 최소 1945년까지 파시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후 1968년 병으로 인해 권력에서 멀어지며,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살라자르의 뒤를 이었다. 살라자르 정권의 해외 주 탈식민지화에 대한 거부는 식민지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고, 1961년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시작으로 1963년 기니비사우, 1964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 등 몇몇 육군 원로 장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정책을 유지하는데 확고한 듯하였다. 해외 전쟁에서 군사적 해결책이 유지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자신의 책 "포르투갈과 미래"(Portugal e o Futuro)로 인해 스피놀라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는 육군 내 청년 장교들의 늘어나던 불만을 가중시켰고, 이들은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어 혁명 진행 과정(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 불리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 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공산주의 방향의 새로운 독재기로 빠져들려 했던, 뜨거운 여름(Verão Quente)이라 불린 1975년 여름에 극에 달했다. 이 기간 포르투갈은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한다. 1975년 11월 25일 주로 리스본 군사지역 내 낙하산부대원과 헌병이 주축이 된 여러 급진 좌파 군부세력은 쿠데타 시도를 하지만, 이들은 뚜렷한 지도부를 갖지 못했다. 9인방 (Grupo dos Nove)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가 지휘하는 군사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응했다. 이들이 승리하면서 다음 해 민주주의가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하말류 이아느스 본인은 다음 해 보통 선거로 뽑힌 첫 포르투갈 대통령이 된다. 또한 민주주의 헌법을 승인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아소르스, 마데이라 지방자치정부를 수립한다. 1940년대와 60년대 사이 포르투갈은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1960년 유럽자유무역연합 (EFTA), 196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공동 창립회원국이었으며, 이 중 EFTA는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위해 1986년 탈퇴한다. 1999년 포르투갈은 유로존에 가입하며, 같은 해 마카우의 주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한다. 유럽 연합 가입 이후, 포르투갈은 총 3번의 유럽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가장 최근인 2007년 이사회에서는 리스본 조약 서명식을 거행하였다.


2014. 6. 4.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 1853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853610, 금요일, 런던
 
 
판에 박힌 형태의 이 자그마한 [인도의 촌락이라는] 사회 유기체는 영국의 징세관과 영국의 병사가 자행한 야수적 간섭에 의해서라기보다 영국의 증기력과 영국 자유무역의 작용에 의해 대부분 해체되고 소멸되었다. 이러한 가족 공동체들은 가내 공업, 즉 손()노동에 의한 방적, 손노동에 의한 경작의 독특한 결합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결합이 이 공동체들에 자급자족의 힘을 가져다주었다. 영국의 간섭은 방적공을 랭카셔에, 직조공을 벵골에 가져다 놓으면서 혹은 인도인 방적공과 인도인 직조공을 일소하면서, 반은 야만적이고 반은 문명적인 이 자그마한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를 폭파시켜 버렸고 그리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의 간섭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 실은 아시아 유일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이 수많은 근면하고 가부장제적이며 무해한 사회 조직이 해체되고 각 구성단위로 분해되어 고통의 바다에 던져지는 과정, 그리고 그 개개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고대문명 형태와 자신들의 전래의 생활 수단을 동시에 상실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아무리 애절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목가적 촌락 공동체가 언제나 동양 전제 정치의 견고한 기초를 이루어왔다는 것, 이 촌락 공동체가 인간 정신을 있을 수 있는 가장 좁은 틀에 제한하였고 또한 인간 정신을 미신의 온순한 도구로, 전통적 관습의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 웅대함과 역사적 정력을 앗아 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야만의 이기주의 때문에 촌락 공동체 주민들은 땅 조각에만 신경을 쓸 뿐이지 제국들의 멸망이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잔학 행위들 또는 대도시 주민들의 학살 따위는 강 건너 불 바라보듯이 방관하게 되어, 결국 그들 자신은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정복자들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적 존엄을 모르고 정체해 있으며 식물과 다름없는 이 생활, 이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 다른 한편으로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맹목적이며 멈출 줄 모르는 파괴력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인을 힌두스탄의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자그마한 공동체가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과 노예제라는 오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인간을 환경의 지배자로 올려 세우는 대신에 외적 환경에 예속시켰다는 것, 자기 발전하는 사회 상태를 결코 변하지 않으며 자연에 의해 부여되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리하여 자연의 지배자인 인간이 원숭이 하누만과 소 삽발라를 숭배하여 그 앞에 무릎을 조아리는 사실에서 인간을 어마나 값어치 없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는 자연 숭배를 낳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세계의 붕괴 광경이 우리의 개인적 감정에 아무리 애통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괴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칠 권리가 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쾌락을 늘리거늘 /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번민할 까닭이 있는가. / 티무르의 지배도 / 무수한 생명을 유린하지 않았던가?”
 
 
Sollte diese Qual uns quälen / Da sie unser Lust vermehrt; / Hat nicht Myriaden Seelen / Timurs Herrschaft aufgezehrt?(416~418)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줄레이카에게>(An Suleika)[티무르 시편(Timur Nameh: Buch des Timur) ], 西東詩集(West-östlicher Divan, 1819/1827), 418.
    
 
- 뉴욕 데일리 트리뷴3804, 1853625일자. 맑스엥게스 저작집, 9, 127-133. 영어 원문으로부터 김태호 번역.
 
 
 
 
 
줄라이카에게
 
 
아름다운 향내로 그대를 애무해서
그대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미꽃 봉오리들이
먼저 불길에 스러져야 한다.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조그만 병 하나, 그대 손가락 끝만큼이나 날씬한
병 하나를 얻는 데에도
하나의 세계가 희생되어야 한다
 
 
솟구치는 그리움 속에서
이미 꾀꼬리의 사랑을,
그 황홀한 사랑의 지저귐을 예감하며
힘차게 움터 나오는 생명의 세계 하나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이 꽃봉오리들의 수난을 우리가 괴로워해야 할까?
티무르의 지배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가야 하지 않았던가?
 
 
Sollte jene Qual uns quälen,
Da sie unsre Lust vermehrt?
Hat nicht Myriaden Seelen
Timurs Herrschaft aufgezehrt?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동시집, 안문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6.
 
 
 

2013. 12. 24.

ignorance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84102



"1950년대, 1960년대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망명객들은 프랑스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 당시 프랑스인들은 파시즘을 단 하나의 진정한 악으로 간주했다.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의 스페인,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그들은 점차적으로, 즉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가 되어서야 공산주의를 한 단계 밑의 악, 제2의 악으로나마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레나와 그의 남편이 프랑스로 망명한 것은 바로 이 시기, 즉 1969년이었다. 제1의 악과 비교해 볼 때 자신들의 나라에 닥친 불행은 그들의 친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줄 만큼 처참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재빨리 알아차렸다."(16)


프랑스에 가서 살아보면 이 프랑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끔찍한 과거를 가졌는가, 그리고 그것을 의식으로는 비판한다 하면서도 얼마나 그에 대한 끔찍할 만큼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절감을 하게 된다. 내가 유학하던 21세기 초반이나, 오늘이나,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한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어이 없는 '표상의 정치학'에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책없고 무지막지한 프랑스인들의 '무지'(ignorance)는 도대체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이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프랑스인들의 무지, 제국주의적으로 재구성된 한국에 대한 그들의 지식 혹은 무지는 아예 무지한 이른바 '민중' 계급보다, 이른바 <르 몽드>나 좀 보는 인텔리겐차 계급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이 읽는 정보가 처음부터 차별적 편견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무장한 특파원과 데스크의 관점에 의해 선택되고 구성된 것임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이 무지임에 대한, 아니 오히려 무지보다 못한 최악의 지식임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이다. 자기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다. 스스로의 무지를 모르는 무지만큼 끔찍한 것도 드물다. 그런 면에서, 그 자신도 오로지 서구중심주의자라는 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지만, 프랑스의 제국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쿤데라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프랑스인들이 지금도 종종 되뇌는 '프랑스적 예외'(exception francaise)라는 황당한 자기중심적 언사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프랑스는 유럽의 일본이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가해자에 더 가까우나, 스스로를 오로지 희생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본의 원자탄이 프랑스의 히틀러인 것이다. 프랑스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른바 좌파적 환상은 어이 없는 것이다.

2013. 4. 2.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Marguerite Yourcenar, 1903–1987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누구나 각각 자기 자신의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법이다."(2권, 79)
 
 
 
 
 
나는 쉴 새 없이 책을 읽는다. 아니,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것은, 책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책을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물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며, 결국 읽는 동안의 살아있다는 유쾌한 체험을, 읽은 후의 즐거운 피로를 낳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독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들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저자는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역시 매우 드물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도 평생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저자,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저자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쉽지 않은 행운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저자들 중의 한 사람, 아마도 나의 기질 중 하나에 꼭 들어맞는 작가를 발견했다.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책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가히 우주에 대한 유쾌한 명상을, 삶에 대한 사려로 가득 찬 천착을, 나 자신과 대면하는 나만의 시간을 내게 돌려준다.


 

화자는 2세기 로마의 14대 황제이자 오현제 중 세번째로 일컬어지는 하드리아누스이다. 책의 모든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나로서는 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긴다. 가령, 아래에 내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옮겨 적어놓은 문장은 나의 어린 시절 이래 내가 언제나 억눌러 왔던 나 자신의 한 부분을 상기(想起)시킨다. 삶에 대한, 관념의 진지한 정적(靜寂)주의(quietism).
 
 
 
 
그렇다.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라는 플로베르의 한 문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은 신 없이 사는 나의 감성에 더 없이 꼭 맞는다. 결국, 신 없이 산다는 것 역시 신 안에서 사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 자신의 신 앞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다.
 
 
 
더하여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최상급이다. 공들인, 제대로 된, 원저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탁월한 번역이다. 그리고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의 1951년 이 저작은 단순히 걸작이다. 더하여, 사실 이 책은 모든 이들이 리더가 되고 자기 자신의 통치자가 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 이 시대에 두루 읽혀 마땅한 책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이 책이 정신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점만은 미리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게 유르스나르의 글을 통해 울려퍼지는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바로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의고주의, 격식과 형식을 차리는 언어에의 조탁. 병도 삶의 일부이며, 더욱이 죽음이야말로 삶의 일부이다. '조숙한 애어른'이라는 규정은 타자적이다. 나의 나의 고통을 다스려줄 문학적 기교들, 기법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내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한 스타일로서 추구할 권리를, 아니 의무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수사학 없이 말할 수는 없다. 말하고 글쓰는 일 자체가 초보적인 것일 망정 하나의 수사학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사학 없이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학과 철학에 막 입문한 이들 거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이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도 수사학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선택지를 보여준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의 수사학, 삶의 비참과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수사학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낀지 삼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



 
"이 이야기는 단 한 사람-그는 나 자신인데-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나를 어떤 결론으로 이끌고 갈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규명하고 또 아마도 판단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이 사실 검증에 기대를 걸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인간의 생존을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세 가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자신에 대한 연구 : 이것은 방법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풍요로운 것이고 하다. 둘째, 사람들에 대한 관찰 :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조처한다. 셋째, 독서 : 책들은 글의 행간에서 태어나는 관점상의 특수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역사가들, 시인들, 심지어 이야기 작가들-이 후자들의 경박하다고 평판이 나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쓴 것들을 나는 거의 모두 읽었고, 아마도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삶의 무척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얻었을 것이다. 서한문은 나에게 인간의 말소리를 듣기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은 조상(彫像)들의 움직임 없는 자태가 몸짓들을 분별하기를 가르쳐 준 것과 똑 같다. 반면, 삶은 그 후에 나에게 책들의 내용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책들은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가장 진지한 책들까지도. 가장 능숙하지 못한 책들은, 삶을 함축할 수 있을 단어들, 문장들을 저자가 구사하지 못해, 삶에 대해 평범하고 빈약한 이미지밖에 남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 루카누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중함으로써 무겁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반대로 다른 작가들, 페트로니우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가볍게 하다 못해 속이 텅 빈 튀는 공으로 만들어, 그것을 무게 없는 세계 속에서 쉽사리 던지고 받는다. 시인들을 우리들을,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 세계보다 더 광활하거나 더 아름답고 더 열렬하거나 더 감미로운 세계로 옮겨 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런 만큼 다른,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살 수 없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은 현실은 순수한 상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불이나 절굿공이가 물체에 과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변화를 현실에 과한다. 그러나 그런 연후에,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바의 한 존재나 한 사상(事象)에서 아무 것도, 그 재나 그 결정체 가운데 존속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에 대해 우리들에게 너무나 완전한 체계,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 체계와 인과관계가 결코 전적으로 진리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 다루기 쉬운 죽은 재료들을 재조정하는 것이며, 나는,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언제나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 작가들이나 밀레토스 풍의 우화 작가들은 푸주한들처럼, 파리들이나 좋아해 덤벼들 조그만 고기 조작들을 진열대에 걸어 놓는 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책 없는 세상에 아주 못 만족할 터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책 속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책 속에 전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더더욱 불완전한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악의가 만족을 얻는 아주 저열한 검증만으로 끝난다. 신분, 입장,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우연적인 상황들이 인간 감정가의 시야를 제한한다. 나의 노예는 나를 관찰함에 있어서, 내가 그 자신을 관찰함에 가지고 있는 용이함과는 전적으로 다른 용이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용이함이나 나의 용이함은 똑같이 제한적인 것이다. 나의 늙은 노예 에우포리온은 20년 전 이래 나에게 기름병과 수건을 가지고 와 시중을 들지만, 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시중으로 끝나고, 그가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목욕으로 끝나며, 그 이상 알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황제에게나 노예에게나 곧 무례함의 인상을 준다. 우리들이 타인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혹시 누가 고백을 하는 경우, 그는 자기 입장을 변호할 따름이고, 그의 변호는 완전히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를 관찰하는 경우에도, 그는 혼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로마 치안 당국의 보고서들을 읽기 좋아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나는 그 보고서들에서 언제나 놀라운 화젯거리들을 발견한다. 내 편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잘 아는 사람이든, 거기에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의 미친 짓들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들에 대한 변명이 된다. 나는 옷을 입은 인간을 벌거벗은 인간과 비교하기에 지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너무나 충실하게 상세한 보고서들은 최종 판결을 내리는 데에 나를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채로 나의 서류 더미에 쌓아 올려질 따름이다. 엄격한 외양을 가진, 문제되고 있는 그 행정관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결코 그를 더 잘 알게 하지는 못한다. 이제부터 나는 한 현상이 아니라 두 현상-그 행정관의 외양과 그의 범죄-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에 관한 관찰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의무로 여기는데, 내가 끝까지 그 옆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이 개체와 타협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60여년 간의 친밀성은 이 경우 역시 오류의 가능성을 크게 함축하고 있다. 가장 깊은 내면적 차원에 있어서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은 애매하고, 내심적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이고, 공모처럼 은밀한 것이다. 가장 비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그것은 내가 수(數)에 관해 세울 수 있는 이론들만큼 냉엄한 것이기도 하다 : 이 경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능을, 나의 삶을 멀리서 또 더 높은 데서 바라보는 데에서 사용하며, 이렇게 하여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의 앎은 어렵고, 전자는 자신 내부로의 침잠을, 후자는 자신 외부로의 탈출을 요구한다. 나는 타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 두 방식에 순수히 관례적인 방식들을, -즉 대중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변형된 나의 삶에 대한 생각, 서툰 재단사가 우리 소유의 천을 힘들여 거기에 맞추어 자르는 완전히 준비된 본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 달리 말해 잘못 이루어진 판단을,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모든 방식들은 한결같지 않은 가치를 가진 장비들이요, 다소간 무디어진 도구들이지만, 그러나 다른 것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도구와 장비들을 가지고 그럭저럭,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관찰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무정형하다고 생각됨에 놀란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들려주는 영웅들의 생존은 단순하다. [...] 나는, 위인들이란 바로 그들의 극단적 위치로써 특징지어지며, 그 극단적인 위치를 평생 견지하는 데에 그들의 영웅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극지이거나 대척지인 것이다. 나는 모든 극단적인 위치들을 번갈아 가며 점했으나, 그것들을 견자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그 위치들에서 미끄러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덕 있는, 농부나 짐꾼처럼 중심에 위치한 생존을 자랑할 수도 없다.



나의 나날들을 이루는 풍경은 마치 산악 지대처럼, 마구 뒤섞여 쌓여 있는 갖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서 이미 혼성적인, 균등한 비중의 본능과 교양으로 형성되어 잇는 나의 본성을 만난다. 여기저기 필연의 화강암들이 지표 위로 노출되고, 우연의 낙반은 사방에서 일어난다. 나는 나의 사람을 다시 훑어보고 거기에서 하나의 지도를 발견하여고, 거기에서 납이나 금의 광맥을, 혹은 지하수의 흐름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 전혀 인위적인 지도란 기억의 눈속임일 뿐이다. 때때로 어떤 조우, 어떤 전조, 어떤 확정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서 나는 하나의 숙명을 인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무 많은 수 많은 길들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너무 수많은 금액들은 합산되지 못한다. 그 다양성 속에서, 그 무질서 속에서 나는 정녕 한 인격의 존재를 지각하지만, 그 형태는 거의 언제나 상황의 압력이 그려 놓은 것인 듯하다. 그 용모는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처럼 흐릿하다. 나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을 닮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아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그 행위들 사이에는 규정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증거는, 그 행위들을 평가하고 설명하여 나 자신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내가 끊임없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오래 계속되지 않는 어떤 일들은 물론 무시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전 생애에 걸쳐 있는 활동들 역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가 황제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는 거의 여겨지지 않는다.



[...]




나에게 나의 삶이 너무도 범속하여 기록으로 남겨질 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소라도 오랫동안 관조될 만한 가치조차 없고, 심지어 나 자신의 눈에도 어느 누구의 삶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고, 바로 그 사실로써, 대다수 인간들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기에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아무것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의 미덕들과 악덕들이 그러기에는 충분치 않다. 나의 행복이 나의 삶을 더 잘 설명하지만, 그러나 지속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그럴 뿐이며, 특히 수락할 만한 이유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우연의 손에 받아들여짐을,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신도 주재하지 않는 운의 덧없는 산물에 자나지 않음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삶의 일부분은, 심지어 그 삶이 주목할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출발점을, 근원을 찾는데 흘려보낸다."(1권, 4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