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Marguerite Yourcenar, 1903–1987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누구나 각각 자기 자신의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법이다."(2권, 79)
 
 
 
 
 
나는 쉴 새 없이 책을 읽는다. 아니,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것은, 책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책을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물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며, 결국 읽는 동안의 살아있다는 유쾌한 체험을, 읽은 후의 즐거운 피로를 낳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독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들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저자는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역시 매우 드물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도 평생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저자,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저자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쉽지 않은 행운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저자들 중의 한 사람, 아마도 나의 기질 중 하나에 꼭 들어맞는 작가를 발견했다.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책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가히 우주에 대한 유쾌한 명상을, 삶에 대한 사려로 가득 찬 천착을, 나 자신과 대면하는 나만의 시간을 내게 돌려준다.


 

화자는 2세기 로마의 14대 황제이자 오현제 중 세번째로 일컬어지는 하드리아누스이다. 책의 모든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나로서는 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긴다. 가령, 아래에 내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옮겨 적어놓은 문장은 나의 어린 시절 이래 내가 언제나 억눌러 왔던 나 자신의 한 부분을 상기(想起)시킨다. 삶에 대한, 관념의 진지한 정적(靜寂)주의(quietism).
 
 
 
 
그렇다.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라는 플로베르의 한 문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은 신 없이 사는 나의 감성에 더 없이 꼭 맞는다. 결국, 신 없이 산다는 것 역시 신 안에서 사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 자신의 신 앞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다.
 
 
 
더하여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최상급이다. 공들인, 제대로 된, 원저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탁월한 번역이다. 그리고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의 1951년 이 저작은 단순히 걸작이다. 더하여, 사실 이 책은 모든 이들이 리더가 되고 자기 자신의 통치자가 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 이 시대에 두루 읽혀 마땅한 책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이 책이 정신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점만은 미리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게 유르스나르의 글을 통해 울려퍼지는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바로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의고주의, 격식과 형식을 차리는 언어에의 조탁. 병도 삶의 일부이며, 더욱이 죽음이야말로 삶의 일부이다. '조숙한 애어른'이라는 규정은 타자적이다. 나의 나의 고통을 다스려줄 문학적 기교들, 기법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내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한 스타일로서 추구할 권리를, 아니 의무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수사학 없이 말할 수는 없다. 말하고 글쓰는 일 자체가 초보적인 것일 망정 하나의 수사학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사학 없이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학과 철학에 막 입문한 이들 거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이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도 수사학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선택지를 보여준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의 수사학, 삶의 비참과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수사학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낀지 삼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



 
"이 이야기는 단 한 사람-그는 나 자신인데-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나를 어떤 결론으로 이끌고 갈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규명하고 또 아마도 판단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이 사실 검증에 기대를 걸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인간의 생존을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세 가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자신에 대한 연구 : 이것은 방법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풍요로운 것이고 하다. 둘째, 사람들에 대한 관찰 :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조처한다. 셋째, 독서 : 책들은 글의 행간에서 태어나는 관점상의 특수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역사가들, 시인들, 심지어 이야기 작가들-이 후자들의 경박하다고 평판이 나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쓴 것들을 나는 거의 모두 읽었고, 아마도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삶의 무척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얻었을 것이다. 서한문은 나에게 인간의 말소리를 듣기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은 조상(彫像)들의 움직임 없는 자태가 몸짓들을 분별하기를 가르쳐 준 것과 똑 같다. 반면, 삶은 그 후에 나에게 책들의 내용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책들은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가장 진지한 책들까지도. 가장 능숙하지 못한 책들은, 삶을 함축할 수 있을 단어들, 문장들을 저자가 구사하지 못해, 삶에 대해 평범하고 빈약한 이미지밖에 남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 루카누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중함으로써 무겁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반대로 다른 작가들, 페트로니우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가볍게 하다 못해 속이 텅 빈 튀는 공으로 만들어, 그것을 무게 없는 세계 속에서 쉽사리 던지고 받는다. 시인들을 우리들을,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 세계보다 더 광활하거나 더 아름답고 더 열렬하거나 더 감미로운 세계로 옮겨 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런 만큼 다른,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살 수 없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은 현실은 순수한 상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불이나 절굿공이가 물체에 과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변화를 현실에 과한다. 그러나 그런 연후에,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바의 한 존재나 한 사상(事象)에서 아무 것도, 그 재나 그 결정체 가운데 존속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에 대해 우리들에게 너무나 완전한 체계,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 체계와 인과관계가 결코 전적으로 진리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 다루기 쉬운 죽은 재료들을 재조정하는 것이며, 나는,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언제나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 작가들이나 밀레토스 풍의 우화 작가들은 푸주한들처럼, 파리들이나 좋아해 덤벼들 조그만 고기 조작들을 진열대에 걸어 놓는 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책 없는 세상에 아주 못 만족할 터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책 속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책 속에 전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더더욱 불완전한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악의가 만족을 얻는 아주 저열한 검증만으로 끝난다. 신분, 입장,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우연적인 상황들이 인간 감정가의 시야를 제한한다. 나의 노예는 나를 관찰함에 있어서, 내가 그 자신을 관찰함에 가지고 있는 용이함과는 전적으로 다른 용이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용이함이나 나의 용이함은 똑같이 제한적인 것이다. 나의 늙은 노예 에우포리온은 20년 전 이래 나에게 기름병과 수건을 가지고 와 시중을 들지만, 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시중으로 끝나고, 그가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목욕으로 끝나며, 그 이상 알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황제에게나 노예에게나 곧 무례함의 인상을 준다. 우리들이 타인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혹시 누가 고백을 하는 경우, 그는 자기 입장을 변호할 따름이고, 그의 변호는 완전히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를 관찰하는 경우에도, 그는 혼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로마 치안 당국의 보고서들을 읽기 좋아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나는 그 보고서들에서 언제나 놀라운 화젯거리들을 발견한다. 내 편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잘 아는 사람이든, 거기에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의 미친 짓들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들에 대한 변명이 된다. 나는 옷을 입은 인간을 벌거벗은 인간과 비교하기에 지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너무나 충실하게 상세한 보고서들은 최종 판결을 내리는 데에 나를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채로 나의 서류 더미에 쌓아 올려질 따름이다. 엄격한 외양을 가진, 문제되고 있는 그 행정관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결코 그를 더 잘 알게 하지는 못한다. 이제부터 나는 한 현상이 아니라 두 현상-그 행정관의 외양과 그의 범죄-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에 관한 관찰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의무로 여기는데, 내가 끝까지 그 옆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이 개체와 타협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60여년 간의 친밀성은 이 경우 역시 오류의 가능성을 크게 함축하고 있다. 가장 깊은 내면적 차원에 있어서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은 애매하고, 내심적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이고, 공모처럼 은밀한 것이다. 가장 비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그것은 내가 수(數)에 관해 세울 수 있는 이론들만큼 냉엄한 것이기도 하다 : 이 경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능을, 나의 삶을 멀리서 또 더 높은 데서 바라보는 데에서 사용하며, 이렇게 하여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의 앎은 어렵고, 전자는 자신 내부로의 침잠을, 후자는 자신 외부로의 탈출을 요구한다. 나는 타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 두 방식에 순수히 관례적인 방식들을, -즉 대중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변형된 나의 삶에 대한 생각, 서툰 재단사가 우리 소유의 천을 힘들여 거기에 맞추어 자르는 완전히 준비된 본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 달리 말해 잘못 이루어진 판단을,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모든 방식들은 한결같지 않은 가치를 가진 장비들이요, 다소간 무디어진 도구들이지만, 그러나 다른 것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도구와 장비들을 가지고 그럭저럭,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관찰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무정형하다고 생각됨에 놀란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들려주는 영웅들의 생존은 단순하다. [...] 나는, 위인들이란 바로 그들의 극단적 위치로써 특징지어지며, 그 극단적인 위치를 평생 견지하는 데에 그들의 영웅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극지이거나 대척지인 것이다. 나는 모든 극단적인 위치들을 번갈아 가며 점했으나, 그것들을 견자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그 위치들에서 미끄러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덕 있는, 농부나 짐꾼처럼 중심에 위치한 생존을 자랑할 수도 없다.



나의 나날들을 이루는 풍경은 마치 산악 지대처럼, 마구 뒤섞여 쌓여 있는 갖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서 이미 혼성적인, 균등한 비중의 본능과 교양으로 형성되어 잇는 나의 본성을 만난다. 여기저기 필연의 화강암들이 지표 위로 노출되고, 우연의 낙반은 사방에서 일어난다. 나는 나의 사람을 다시 훑어보고 거기에서 하나의 지도를 발견하여고, 거기에서 납이나 금의 광맥을, 혹은 지하수의 흐름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 전혀 인위적인 지도란 기억의 눈속임일 뿐이다. 때때로 어떤 조우, 어떤 전조, 어떤 확정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서 나는 하나의 숙명을 인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무 많은 수 많은 길들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너무 수많은 금액들은 합산되지 못한다. 그 다양성 속에서, 그 무질서 속에서 나는 정녕 한 인격의 존재를 지각하지만, 그 형태는 거의 언제나 상황의 압력이 그려 놓은 것인 듯하다. 그 용모는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처럼 흐릿하다. 나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을 닮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아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그 행위들 사이에는 규정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증거는, 그 행위들을 평가하고 설명하여 나 자신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내가 끊임없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오래 계속되지 않는 어떤 일들은 물론 무시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전 생애에 걸쳐 있는 활동들 역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가 황제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는 거의 여겨지지 않는다.



[...]




나에게 나의 삶이 너무도 범속하여 기록으로 남겨질 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소라도 오랫동안 관조될 만한 가치조차 없고, 심지어 나 자신의 눈에도 어느 누구의 삶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고, 바로 그 사실로써, 대다수 인간들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기에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아무것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의 미덕들과 악덕들이 그러기에는 충분치 않다. 나의 행복이 나의 삶을 더 잘 설명하지만, 그러나 지속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그럴 뿐이며, 특히 수락할 만한 이유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우연의 손에 받아들여짐을,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신도 주재하지 않는 운의 덧없는 산물에 자나지 않음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삶의 일부분은, 심지어 그 삶이 주목할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출발점을, 근원을 찾는데 흘려보낸다."(1권, 41-49)


댓글 1개:

  1. 선생님 개인적인 생각을 써주셔서 더 반가운 글이네요. 빨리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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