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f-litteratur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f-litteratur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5. 6. 2.

michel foucault - l'usage de la parole - 1963/1974



 
 Le discours de la folie 3
- La persécution (1963)  
 
 
 
 
 
Le discours de la folie 4
- Le corps et ses doubles (1963)  
 
 
 
 
 
 
interview 1974
radioscopie
 
 
 

2014. 5. 15.

la part maudite


 
 
 
 
 
 






 
 
 
 
 
* 「소모의 개념」(1933) - 『저주의 몫』
 
 
“인간의 행위가 생산(production)과 보존(consommation)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 첫째, 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 둘째, 또 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 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dépense)라고 부르겠다.”(32)
 
 
“고전경제학에서는 원시적 교환이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고전경제학에서는 교환과 같은 획득의 수단이 획득의 욕구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파괴와 파멸의 욕구를 그 근원에 가지고 있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고대의 교환 형태는 물물 교환의 인위적 관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형태는 모스에 의해 미국 북서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를 통해 확인되었다.”(36)
 
 
*** 『저주의 몫』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오늘 출판하게 된) 책에서는 정치 경제적 사실들을 기존의 전문적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고찰하였고, 나의 관점은 곡물의 판매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 인간의 희생, 교회의 건축, 보석의 선물 등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갖는다. [...] 요컨대 나는 부의 ‘소모’(소비)를 생산과 관련해서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일반경제’(économie générale)의 원칙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 이 최초의 에세이는 개별적인 원리들을 벗어나서 지상의 에너지와 충동을 고찰하는 각각의 원리 - 지구과학에서 출발해서 사회학, 역사학, 생물학을 거쳐 정치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의 원리 - 가 제기하는 문제들의 열쇠가 되는 문제, 여태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초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리학,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조차도 경제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예술, 문학,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연구하는 운동과 관련이 있다. 다름아닌 과잉 에너지의 운동, 삶의 비등(沸騰, effervescence)이 그것이다. [...] 내가 고찰하는 비등, 지구를 부추기는 비등은 또한 나의 비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연구 대상은 연구 주체와, 더 정확히 말해서 ‘비등점의 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51-53)
 
 
“생물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그에 반하는, ‘사치’이다.”(54)
 
 
“총체적으로 산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사회 갈등과 세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총체적으로 발전하는 산업 경제의 일반적 전제를 연구할 때만, 한마디로 인간의 총체적 업적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만 파악이 가능하다.”(60)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한 산업의 성장을 합리적으로 방출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든지, 에너지의 축적이 결코 불가능한 비생산적 또는 낭비의 방법을 통해서든지 생산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가 지체 없이 밝히고 싶은 것은, 성장의 발산이 경제 원칙들의 전복-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럴의 전복-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 사상과 모럴의 전복은 제한된 경제 관점들로부터 일반적 경제의 관점들로 넘어갈 때만이 가능하다.”(66)
 
 
“원칙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삶을 유지해주는 활동(기능적인 활동, 동물에게 필요불가결한 근육활동, 먹이찾기 등)에 필요한 양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며 그 초과 에너지 덕분에 성장이나 번식도 가능하다. 식물이란 동물에게 초과분이 없었다면 성장도 번식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하는 생체화학작용은 과잉의 수익자이자 창조자인데, 이는 생명체의 대원칙이다.”(67)
 
 
2. 성장의 한계. 우선 삶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한 가지는 ‘태양 에너지는 풍요와 발전의 원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이 없이 준다. 천체물리학이 태양의 사치를 측정해내기 전부터 인간들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곡물이 익는 것도 태양 덕분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받지 않고 주는 사람을 태양의 광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지점에서 도덕적 판단의 두 가지 근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옛날에는 가치를 영예로운 비생산에서 찾았던 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가치를 생산에 결부한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은 에너지의 소모보다는 획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날의 명예란 유용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결과에 의해 정당화될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감정이 현실적 판단에 의해 -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해 - 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고대의 감정은 특히 부르주아 세계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의 반발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힘을 잃는 것은 오직 고전적인 경제 개념 속에서이다. / 태양 광선은 지표면에 에너지의 과잉을 초래해한다. 그러나 일단 생물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여서 그 에너지를 할 수 있는 한 남은 공간에 축적한다. 그런 다음 생물체는 그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낭비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발산에 앞서 생물체는 성장을 위해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한다.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때만 낭비에 자리를 내준다. 진정한 잉여는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이 일단 제한을 받을 때 시작된다. / 개인이나 집단은 일차적으로 다른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유일한 한계는 다름아닌 지구(정확히 말해서 생물체의 접근이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생물권)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다른 개인이나 그룹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살아있는 자연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총체적 성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지구라는 방대한 공간이다.”(69-70)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순간 행위의 유용성utilité을 고찰해야 한다. 유용성은 유지, 성장 또는 이익을 내포한다. 물론 성장에 과잉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는 그 점을 배제한다. 가능한 성장이 멈췄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死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박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불유쾌한 파멸보다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71)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성장은 없고 단지 모든 형태의 에너지의 사치스러운 낭비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사실 주로 광적 분출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사건은 사치의 발전이고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생명 형태들의 생산이다.”(74)
 
 
“성(sexualité)은 애초부터 욕심 사나운 자기만의 성장과는 다르다. 성행위는 종의 차원에서 보면 성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사치이다. [...] 동물에게 생식행위는 어느 순간 가능성의 극단에 이른 에너지의 원천을 갑작스럽게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기회가 된다. 그 낭비는 종의 성장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며 순간적으로 보면 개인의 실행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경우 그 소비는 파괴의 모든 가능한 형태들을 수반하며 재산의 탕진 - 육체의 탕진 - 을 부르고 최종적으로 죽음이라는 비합리적 사치 또는 과잉과 결합한다.”(76)
 
 
* 스페인 작가였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Bernardino de Sahagún, 1500-1590)에게 어떤 늙은 아즈텍인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87).
 
 
“내밀한 세계는 마치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명철한 의식과 도취의 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와 대립한다. 정상은 대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성은 대상의 확인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고, 명철성은 대상들에 대한 뚜렷한 인식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반면 주체의 세계는 어둠이다. 한 없이 의심스럽고 유동적인 이 어둠은 이성이 잠드는 사이를 기다려 괴물들을 잉태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가정한다. 즉 광기가 아니면 현실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 오직 현재에만 열중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고. 주체는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떠나 현실적 질서의 사물들에 종속된다. 주체는 노동에 구속되는 순간 소진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의 어떤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만을 걱정한다면 무슨 이유로 비축에 힘쓰겠는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일순간에 무질서하게 탕진할 수 있다. 내일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무익한 소모는 나를 즐겁게 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물이 내밀한 질서로 회귀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소모이다. 소모의 세계라고 폭력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제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희생제의에서 문제는, 여전히 파괴를 끌어들이되 제물 이외의 나머지를 치명적인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희생 제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위험에 빠져있다. 그러나 일정한 제의의 형태는 통상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 희생 제의는 공동의 작업 체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밀성을 되찾게 해주는 광적 행위이다. 폭력은 희생 제의의 원칙이다. 그러나 작업은 폭력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희생 제의의 폭력은 여전히 공공의 사물들을 보존하거나 통합하려는 우려에 대해 종속적이다. 개인들은 광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지 못하게 하는 그 광란은 그들을 다시 속세적 시간의 작업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그것은 부의 무한한 발전을 목적으로 한 행위라거나 과잉의 힘을 흡수하는 이익 추구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업은 유지만을 염두에 둔다. 작업은 축제(풍성한 작업은 축제를 부르며 축제는 다시 풍성한 작업의 기원이 된다)의 한계를 사전에 결정짓는다. 그러나 파멸을 모면하는 것은 공동체일 뿐이다. 제물은 여전히 폭력에 내맡겨진다.”(100-101)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제물은 부의 일부로서 잉여의 부분이다. 그리고 제물은 아무런 이익 없이 소모되기 위하여, 즉 영원히 파괴되기 위하여 유용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제물로 뽑힌 순간 제물은 폭력적인 소모에 약속된 저주의 몫이다. 그러나 저주는 제물을 사물의 질서에서 끌어내 그 빛이 살아있는 존재들의 내밀성, 고뇌, 심연을 비추게 한다. / 제물을 둘러싸고 우려가 확산되는데, 그 우려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사물이기 때문에 제물을 사물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면 파괴를 통해 제물의 유용성, 사물성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제물이 바쳐지는 순간 봉헌과 죽음은 분리되며, 제물은 제의 집행자의 소모적 제의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 현실적 [사물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제물뿐이다. 제물만이 축제의 극단적 충동에 온통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제의 집행자는 신적 특성을 띠더라도 주저하면서 그럴 뿐이다. 그의 내부에 무겁게 남은 미래가 그를 짓누르는 것이다. [...] 제의에서는 고뇌와 광란이 뒤섞인다. 광란이 고뇌보다 더 강한데, 조건이 있다. 제의의 결과가 바깥의 죄에, 즉 밖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제의 집행자는 자신의 재산이 될 수도 있었을 제물을 거부해야 한다. / 그러나 엄격하지 않다고 해서 의식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 경계를 넘어서는 과잉, 소모이며 그것만이 신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은 이러한 소모를 대가로 타락에서 벗어났고, 또한 현실적 질서의 냉혹한 타산과 인색함이 인간 내부에 끌어들인 사물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다.”(101-103)


이슬람 사회, 티벳 사회.
 
 
“경제의 일반법칙. 한 사회는 총체적으로 보면 항상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생산하므로, 사회는 잉여를 갖고 있다. 어떤 사회가 잉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태가 결정된다. 잉여는 사회적 동요의 원인이고, 구조의 변화, 모든 역사적 변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잉여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은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어떤 성장이든지 일정한 성장 뒤에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149)
 
 
산업사회. 부르주아의 세계. 소련의 산업화. 마셜 플랜.
 
 
10. 부의 궁극적 사용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 [...] 자아의식은 본질적으로 충실한 내밀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확보는 속임수이다. 의생제의는 신성한 물건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물건은 내밀성을 외재화한다. 말하자면 신성한 물건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과잉 성장에 맡겨져 있다. 대개 인간들은 생존의 목적이나 존재 이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장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에 매몰된 나머지 존재는 때로 자율성을 잃고 만다. 존재는 이따금 자원의 증가 때문에 미래에 있을 어떤 것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실 성장은 자원이 소비되는 순간과 관련시켜볼 때만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확인하기 어렵다. 의식은 그런 순간과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의식은 순전한 소비와는 달리 무가 아닌 어떤 것,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순간과 대립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식이란 성장(어떤 것의 획득)이 소비로 끝나는 순간의 결정적인 의미에 대한 의식이며, 다른 아무것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의식이다. / 명철성이 우위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완성되면 사회적 실존이 제자리를 찾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제자리를 찾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란 어떤 의미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변화와 비교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일은 최종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가 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트루먼이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은밀하고도 궁극적인 최종 목적에 맞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분명 허망한 것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정신은 낡은 목적론 대신 침묵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232-234)
 
 
 

2014. 4. 17.

소립자

 
 
 





"돌이켜 보면, 소년 브뤼노의 마음속에는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59쪽)
 

2014. 4. 13.

camera lucida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385846





풍크툼(punctum) - "내가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실제로 나를 찌르 수는 없다. 이름붙일 수 없음은 혼란스러움의 확실한 징후이다."(60)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가 자신의 할머니가 죽었을 때 말한 것처럼 나도 "나는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내 괴로움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85)



2014. 3. 4.

roland barthe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 1915-1980)
 
 

 
 
 
 
 
1953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suivi de Nouveaux essais critiques
『글쓰기의 영도』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1957
Mythologies [2007]
『현대의 신화』
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1963
Sur Racine
『라신에 관하여』
남수인 옮김, 동문선, 1998.
1967
Système de la mode
『모드의 체계』
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8.
1970
S/Z essai sur Sarrasine d'Honoré de Balzac
『S/Z』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970
L'Empire des signes
『기호의 제국』
김주환ㆍ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산책자, 2008.
1973
Le Plaisir du texte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1975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동녘, 2013.
1976
Comment vivre ensemble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와 세미나, 1976-77』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1977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
김희영 옮김, 동문선, 2004.
1978
Le Neutre
『중립.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와 세미나, 1978』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1980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ㆍ한정식 옮김, 열화당, 1986/1998.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981
Le Grain de la Voix : Entretiens, 1962-1980
『목소리의 결정』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5.
1987
Incidents
『작은 사건들』
김주경 옮김, 동문선, 2003.
2009
Journal de deuil
『애도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웅진), 2012.


 
* 바르트 관련
 
 
- 그레이엄 앨런,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 송은영 옮김, 앨피, 2006.
- 신항식,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 기호의 윤리에 관하여』, 문경(문학과경계), 2003.
- 벵상 주브, 『롤랑 바르트』,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4.






* 조너선 컬러, 『바르트』,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그[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졌다. 그는 도처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항상 의미를 만들어내며, 이 의미가 그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의미의 가혹한 시련 속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의 접촉은 이렇듯 모두 대답이라는 문제를 야기하며, 이때 대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살갗이다. / (손을 꽉 잡는다는 것 -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 온 -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가만히 있는 무릎,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려진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그 어떤 것).”(『사랑의 단상』)(152-153)



연인은 기호의 천국에 산다. 사랑받는 사람과 관련 없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애인의 행동을 자세하게 분류하고 또 해석하면서 몇 시간을 보낸다. “그 일은 사소한 것이나(그것은 언제나 사소한 것이다) 내 모든 언어를 끌어당긴다.” / 바르트는 연인들의 기호학적 사색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며 설득력도 지니고 있다. 애인은 아주 빈번하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의도적인 몸짓’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 처신에 관한 고뇌는 사소한 것이다. 그것은 점덤 더 사소해져서 끝이 없다. 만약 그 사람이 무심코 이런저런 시간에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내게 주었다면,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전화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그에게 전화할 수 있다고 - 이것이 그 메시지의 올바른 객관적 의미이다 -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바로 이 허락이니까.)” / “[...]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어떤 사실의 부류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하나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이다(그 울림에 의해). 그 사람이 내게 새 전화번호를 주었다면 그건 어떤 기호일까? 시험 삼아 지금 곧 사용해보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필요에 의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라는 것이었을까? 내 응답 또한 그 사림이 필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기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이미지의 소란스러운 교차가 폭발한다. 모든 것은 의미한다라는 명제가 나를 사로잡아, 계산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할 뿐 즐기지도 못하게 만든다.” [...]



이와 같은 소설적 단상들은 연인의 생각이 가지는 구체적인 몸짓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의미작용의 메커니즘과 그 물귀신 같은 공모성(共謀性)을 생생하게 드러내준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연인, 강박증을 보이는 해설가, 곤경을 명쾌하게 분석하는 분석가와 기호학자/신화학자를 구분해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연인의 담론이 갖고 있는 감상성(感傷性)이다. 연인은 평범한 기호를 의미 있는 기호로 착각하고, 그 주위의 사소한 대상에 본원적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153-155).
 
 
* 저자의 죽음(1968년) - “우리는 이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텍스트는 단 하나의 ‘신학적’[=절대적] 의미가 내세우는 단어의 조합(신이나 다름없는 저자의 ‘메시지’)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비(非)독창적 글쓰기가 뒤엉키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이 되어야 마땅하다.”(13-14) 저자가 아니라, 텍스트를 연구해야 한다.



* “엄마, 나 자전거 두 손 놓고도 잘 타요!”, “엄마, 나 개념 없이도 잘 해요!”(20)



* 「비평[비판]이란 무엇인가?」 - “비평가[비판가]의 책무는 작품의 숨겨진 의미-과거의 진실[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é)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해 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의 현상들을 다루는 개념의 틀을 다시 짜는 일이다. / “평생 동안 나를 매혹시켜 온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방식이었다.” / 바르트의 글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또 실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의미들은 실은 문화의 산물이며, 너무 친숙하여 오히려 우리가 간과하고 마는 개념적 틀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 바르트는 기존 견해에 도전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습관적 방식을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한다(21-22).



* “모든 자서전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은 소설이다.”(23)
 
 
*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시인과 산문작가의 구분을 écrivainécrivant 사이의 구분으로 대치한다. écrivain 또는 ‘작가’는 언어의 탐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écrivant은 언어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바르트가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물론 écrivain이다(172).
 
 
* 1954-1956년 동안 바르트는 <레 레트르 누벨>이라는 잡지에 매달 ‘이 달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특별 기사를 썼다. “나는 현대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역사가 혼동되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를 느낀다.” 바르트는 대중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토론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호도된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분석해 나갔다(42).
 
 
* 신화(神話, mythologies). 대부분의 경우 바르트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위장된 이데올로기의 함축을 폭로하면서 ‘신화’를 폭로해야 할 환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급진적 사상은 이런 오래된 관습(시공을 초월한 불변의 공통분모로서의 ‘인간성’ 혹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의 조건을 역전시켜야 하며 늘 자연, 그 ‘법칙’, 그 ‘한계’를 지속적으로 벗겨내어 거기서 역사를 발견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연을 하나의 역사적인 것으로 확립해야 한다.”(42-43) 프랑스인에게 “포도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강요된 집단행동이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사회통합의 의식이다.” 신화적 의미를 생성시키면서 문화는 그 자체의 규범을 이른바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다 ... 부르주아 규범은 이제 자연계의 자명한 법칙으로 경험되고 있다.”(44) 가령 포도주는 2차적(신화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폭로하려 한다. 포도주와 한 장의 사진 같은 아주 실용적인 물건이나 관습도 사회적 용례에 의해 2차적 의미를 획득하여 하나의 신화로 기능하게 된다(43-44). 레슬링과 권투의 차이(47-49).



* 바르트는 나중에 동양의 신화학이라 할 일본 기행문 『기호의 제국』을 펴냈는데, 여기서 그는 일본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여주는 인공성(人工性)을 높이 칭찬하고 있다. 일본의 정교한 예절 체계, 깊이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태도, 서구인의 눈으로 볼 때 사회적 관습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노력 등이 모두 신기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건강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언어의 바탕이 되는 기호의 자의성이다. 신화가 역겨운 것은 가짜 자연에 의존하려는 바로 그 태도 때문이다.”(49)
 
 
* 그는 대중지 <파리 마치>의 표지로 실린 프랑스 군복 차림의 흑인이 프랑스 국기에 거수경례를 하는 사진을 예로 든다. “겉으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이 표지의 의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대충 이렇다.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다. 제국의 아들들은 인종이나 피부색의 구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뭉쳐야 한다. 식민주의가 틀려먹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여, 이 젊은 흑인 병사를 보라. 이 젊은이가 소위 압제자라고 하는 제국에 이토록 충성하고 있는데, 도대체 식민주의가 왜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이 표지의 신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건 단지 흑인 병사의 사진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들이 단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와 같이 얼토당토 않은 알리바이를 자꾸 꾸며내는 것을 바르트는 신화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바라보았다(50-51). “신화를 분석하는 것은 지식인이 정치적 행위를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53) 빵집 점원 여성에게 건네는 한 마디, “오늘 햇빛이 참 좋네요.”(53-54) 아름다움의 인식, 향유는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



* 『비평과 진실[비판과 진리]』(Critique et Vérité). 바르트는 한 국가의 비평은 과거의 대상을 시기별로 채택하여 그것을 새롭게 기술함으로써, 오늘의 시대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문학연구를 작품을 어떤 상황 속에 놓고 그 의미를 캐내는 비평과, 작품을 텅 빈 공간으로 보는 문화과학(혹은 시학)으로 구분했다. 문화과학은 의미가 발생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비평가는 자신의 언어로 작품을 뒤덮으며 작품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어 의미를 발생시키는 작가이다. 반면 시학은 작품을 해석하지 않고 작품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읽기의 구조규약[=코드, code]를 기술하는 것이다. 시학은 다양한 시대의 독자와 다른 성향의 독자에게 다양한 의미를 전달해주는 읽기의 구조와 규약에 집중한다(93-94).
 
 
* 소쉬르의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개념 쌍. 랑그는 사람들이 특정 언어를 배울 때 익히는 언어의 체계[文法]이며, 파롤은 말, 즉 언어로 실제로 말해지거나 쓰인 무한한 발화(發話)들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은 의미작용을 가능케 하는 규칙과 변별의 내재적 체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기호학은 하나의 전제, 곧 인간의 행동이나 인간이 만든 물건에 의미가 있다면 거기에는 그 의미를 생성시키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변별 및 규약의 체계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음식문화[및 ‘식사예절’]를 연구하는 기호학자가 있다고 하자. 이 때 파롤은 식사 행위라는 개별적 구체적 사건이 되고, 랑그는 이런 식사를 지배하는 규칙의 체계가 된다. 가령, 랑그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요리가 어떤 요리와 함께 나와서는 안 되며, 또 몇 가지 코스로 식사를 구성하는가와 같은, 하나의 식사 행위가 문화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주는 규칙[기준]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양식을 수프-전채-주요리-후식-음료의 순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은 랑그이고, 야채수프-아스파라거스-로스트비프-애플파이-커피 등 구체적인 음식을 먹는 것은 파롤이다. 영어의 2형식은 주어, 동사, 보어(S-V-C)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랑그이고, 구체적인 발화들, 곧 I am a boy, You are a girl, He is a pupil 등은 파롤이 된다.]
 
 
레스토랑의 메뉴는 사회의 ‘음식문법’의 가장 좋은 사례이다. 연사적(連辭的, syntagmatique) 위치가 있고(수프, 전채, 주요리, 샐러드, 후식 등), 각 위치를 메워줄 수 있는 서로 대조되는 항목들의 계사적(繫辭的, paradigmatique) 부류(수프는 야채크림수프, 크림수프, 샥스핀 수프 등이 부류가 된다)가 있다. 또 이들 음식을 먹는연사적 순서를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가령 수프, 주요리, 후식은 정통적인 순서이지만, 후식, 주요리, 수프는 비문법적이다). 또 같은 부류 안에서 서로 다른 음식을 고르는 것은 의미를 갖게 된다. 가령 주요리로 햄버거를 먹는 것과 구운 꿩고기를 먹는 것은 서로 변별됨으로써 2차적 의미(이 경우, 빈부의 차이)를 구성하게 된다. [연사적 관계는 “저 사과는 붉다.”라는 말에서 ‘저/사과는/붉다’ 사이의 관계를 말하며, 계사적 관계는 ‘저/이/그’, ‘사과/배/감’, ‘붉다/푸르다/노랗다’ 사이의 관계이다.](97-99)
 
 
* 분절(分節, articulation). 언어의 중요한 특징이다. 가령 “머리가 아프다.”라는 문장은 일정한 음성의 연쇄체에 일정한 의미가 결합한 단위이다. 이 문장은 ‘머리/가/아프다’의 세 단위로 분절되는데, 이를 1차 분절이라 하고, 다시 ‘머리’가 ‘ㅁ/ㅓ/ㄹ/ㅣ’의 네 단음으로 분절되는 것을 2차 분절이라 한다. 인간의 언어가 지닌 이중 분절이라는 것은 겨우 수십 개의 음운이나 일정한 수의 기호소로 무한한 말을 할 수 있는 놀라운 메커니즘이다. 유한수의 단위를 유한수의 연결규칙으로 결합시켜 무한한 수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중 분절이다(99-100).



* 바르트는 패션이나 문학이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기표(signifiant) 우선주의를 지키고자 했다(106). 의미가 있는 곳에 체계가 있다. 바르트 탐구의 주된 관심은 기호와 그것이 발생시키는 의미에 대한 체계적 반성이다(108).
 
 
* 구조주의(structuralisme). 현상을 규칙과 변별의 내재된 체계의 산물로 보는 구조주의는 언어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원칙을 차용해왔다. 1) 의미(sens)를 나타내는 실체는 본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내적ㆍ외적 관계의 그물망에 의해 규정된다. 2) 따라서, 의미작용(signification)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러한 현상을 가능케 한 규범 체계를 서술하는 것이다. 이제 구조주의적 설명은 - 더 이상 역사적 전례나 인과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며 - 다만 특정 대상이나 행동을 그것들이 기능하는 체계 속에 연결시킴으로써, 그 구조와 의미작용만을 파악하고자 한다(110). “반성적이든 시적인 것이든, 모든 구조주의적 행동의 목표는 대상을 ‘재구성하여’ 그것이 기능하는 규칙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은 생각의 방식(혹은 ‘시학’)이다. 따라서 소설시학은 그 대상에게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가 어떤 방식, 어떤 수단으로 생산되는지를 파악하는데 더욱 관심을 갖는다.” 바르트는 문학도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작품의 의미 해독을 도덕적 목표로 삼지 말고, 그 의미가 만들어진 과정의 규칙과 제약을 재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 모름지기 문학비평가라면 작품의 주제를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그 작품의 체계를 더 잘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언어학자가 특정 문장의 의미보다는 그 문장의 의미가 전달되는 형식구조의 확립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도 같다.”
 
 
구조주의 문학연구 방법론의 네 가지 특징
 
 
1) 문학의 언어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문학구조의 변별성을 파악하려 한다. 에밀 벵브니스트(Émile Benveniste [bɛ̃venist], 1902-1976)d의 담론(discours)과 이야기(histoire).
 
 
2) 서사(敍事, narration, narrative)의 구성요소를 밝혀내고 다른 서사 기술에서 그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재배열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서사학’(敍事學, narratologie)의 발달.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 1895-1970), ‘민담(民譚)의 문법’. 민담의 기본 모티브와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배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이에 힘입어 플롯(plot)의 기본 요소는 무엇이고, 어떻게 서로 결합되는지, 플롯의 기본구조는 무엇인지, 어떻게 완성/미완성의 효과가 생산되는지를 연구. “구성 단위들 및 규칙들에 내재된 체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서사를 생산할 수 없다.”
 
 
3) 문학적 의미는 자품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문화 담론에 의해 생산되는 코드에 상당히 의존한다.
 
 
4) 읽기에 있어서의 독자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이때 독자는 - 어떤 사람 혹은 주체로서보다는 - 일정한 기능(機能, fonction[=函數]) 혹은 역할(役割, rôle)로서 이해된다. “텍스트에 접근하는 ‘나’는 그 자체로 이미 다른 텍스트의 집합이며, 무한한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잃어버린(기원이 상실된) 코드들의 집합체이다. [...]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내가 그것 때문에 텍스트를 방해하는 하나의 충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가짜 충만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코드들의 흔적에 불과하다. 결국 나의 주체성은 고정 관념의 총합이 되어 버리고 만다.” / “문학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을 더 이상 텍스트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생산자로 만드는 것이다.” / “독자의 탄생은 곧 저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구조주의 이후, 사람들은 문학을 - 더 이상 의사전달 혹은 재현으로 바라보지 않고 - 문학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몇 가지 형식 혹은 문화의 담론적 코드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구조분석은 작품 속에 숨겨진 비밀스런 의미를 찾지 않는다.
 
 
“작품이란 독사(doxa)다. 작품은 층위(수준, 제도)의 구성물이다. 그 안에는 심장, 핵심, 비밀, 가장 근본적인 원칙 따위는 없다. 단지 무한한 층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층위는 작품의 표면을 통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115)
 
 
“작품의 표면 구조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그 표면을 탐구해야 하며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110-116)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단 하나의 신학적 의미(저자-신의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차원의 공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는 다양한 비(非)독창적인 글쓰기가 혼합되고 충돌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의 중심부에서 가져온 인용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다.”(118)



* 바르트의 독해는 클리언스 브룩스, 크로 랜섬 등과 같은 영미권 신비평가들의 자세히 읽기와 다르다. 이들은 전체적 유기성이 갖는 미학의 파악을 자세히 읽기의 목적으로 삼은데 반해, 작품의 ‘다원적’ 성격의 파악에 관심을 갖는 바르트는 전체적 통일 구조의 추적을 거부하는 대신, 각 부분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 부분에 어떤 코드가 관련되어 있고, 또 그 코드의 기능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120).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입장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른바 ‘해체’(déconstructionisme)와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해체는 한 담론의 배경이 되는 철학적 전제조건을 담론 스스로가 파괴(해야)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구조주의는 물론 의미를 코드와 규약의 생산물로 바라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규약의 파괴에서도 의미가 생산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구조주의의 표어가 포괄적인 과학성의 개념이었다면, ‘해체’를 포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표어는 포괄적인 문제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22-123).



* 진정한 작가에게 글을 쓴다라는 동사는 - 목적어(‘무엇’)를 수반하는 타동사가 아니라 - ‘스스로 쓴다’라는 뜻의 자동사이다. “나는 나 자신의 오래된 단편들을 샅샅이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나 자신을 복구하려(우리가 기념비에 대해 말할 때처럼)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기술하지 않겠다. 아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오히려 텍스트를 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R.B.라고 부르겠다.”(『바르트가 쓴 바르트』)(141).



* 『바르트가 쓴 바르트』 -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쓴 것은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 내가 ‘진지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 자신은 더욱 더 해석의 대상이 된다 ... 나의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느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보다 우세하다고 할 수 없다. 맨 나중의 텍스트는 한층 심화된 텍스트일 뿐, 결코 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텍스트 위에 텍스트가 놓여 있을 뿐, 서로 조응하지 않는다.”(147) “내가 개인적 삶을 드러낼 때 나 자신을 가장 많이 폭로하는 셈이 된다 [...] 개인적인 것은 사소한 것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서, 주체에 의해 고백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흔적일 뿐이다.”(148)



* 주체의 부정 - “나라는 주제는 통합되어 있지 않다.” “주체는 단지 언어의 효과이고 문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일 뿐이다.” “주체의 분야에서는 지시대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않았던가?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이야기일 뿐이다.”(157-158) 바르트 자신이 볼 때나 또 우리들이 볼 때나, 바르트(이 자리에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좋다, 가령 당신)는 글쓰기의 집합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정한 ‘바르트’라고 못 박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대조와 모순의 덩어리인 글쓰기의 집합체, 바르트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바르트’라는 사람 자체가 이들 단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형성된 구조물이기 때문이다(158).



* 위반에 대한 위반 - “반작용형성. 독사(대중적 의견)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런 독사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하나의 역설을 제시한다. 그러면 이 역설이 변질하여 새로운 구체물이 되고, 그렇게 하여 이것 역시 독사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른 새로운 역설을 찾아 떠나야 한다.”(160-161) “나는 나의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Larvatus prodeo.”(161) “분명 그는 의미가 면제된(병역에서 면제되듯이)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꿈은 ‘모든 기호의 부재’를 꿈꾼 『글쓰기의 0도』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꿈과 관련된 천 개의 확인 행위가 발생한 것이다.”(『바르트가 쓴 바르트』)(145)
 
 
“내가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내가 그 어떤 환원적 체계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164)



georges brassens


 
 
* georges brassens, 1921-1981
 

 
 
 
korea fan page -> 가나다
 
 
 
 
 
 
 
 
La mauvaise réputation
나쁜 평판 (1집-01,1952)
 

 
이곳 한적한 마을에서
난 평판이 나쁘지.
설치든, 조용히 있든
난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놈이라지.
근다고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내 꼬마의 길을 따르며 말야.
하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 말야.
아니,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 말야.
모두들 다 날 헐뜯지.
물론 벙어리는 빼고.

7월 14일에
난 포근한 침대에 누워있어.
발맞춰 행진하는 음악은
내가 알 바 아니야.
근다고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울리는 나팔을 안듣지만 말야.
하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딴 길 가는 사람 말야.
아니,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 말이야.
모두 다 내게 손가락질하지.
물론 팔병신은 빼고

농부에게 쫓기는
운 나쁜 좀도둑을 지나칠 때
슬쩍 발을 걸지.
농부는 땅바닥에 넘어져 뭘찾는 꼴이야.
근다고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사과도둑이 도망치게 내버려두며 말야.
하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 말야.
아니, 사람들은 안 좋아하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 말야.
모두 다 내게 발길질하지.
물론 앉은뱅이는 빼고.

내게 뭔일이 닥치게 될지 점치려고
예레미야가 될 필요는 없어.
그들 입맛에 맞는 줄 찾게 되면
내 목에 걸거야.
근다고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로마로 가는 길을 안 따르며 말이야.
하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을 말이야.
아니,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지.
자기들과 다른 길 가는 사람을 말이야.
모두 다 내가 목매이는 걸 볼거야.
물론 장님들은 빼고.

 
 
 
 
 
Le gorille  고릴라 (1-03,1952)
 
 
          


 

  
C'est à travers de larges grilles,
Que les femelles du canton,
Contemplaient un puissant gorille,
Sans souci du qu'en-dira-t-on.
Avec impudeur, ces commères
Lorgnaient même un endroit précis
Que, rigoureusement ma mère
M'a défendu de nommer ici...
Gare au gorille !...


 
수많은 고릴라 가운데서
마을 아줌마들이 별나게 바라보는 놈
,말 안 해도 알만한
우람한 고릴라 한 마리
.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다쟁이들은 바로 '거시길' 정확히 훔쳐보고 있었다네.어머니께서 이런 자리에선 말 못하게 하시는 그것 말야.

고릴라 조심!
Un jour la porte de la prison bien close
Où vivait le bel animal
S'ouvre, on n'sait pourquoi. Je suppose
Qu'on avait du la fermer mal.
Le singe, en sortant de sa cage
Dit "C'est aujourd'hui que j'le perds !"
Il parlait de son pucelage,
Vous aviez deviné, j'espère !
Gare au gorille !..



 
잘 닫혀져 있던 우리가,그 잘생긴 동물이 살고 있던 우리가 갑자기 열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네.
(
누가 지쳐 놓은 모양이야
)

그 고릴라는 뛰어 나오며 말했다네.
"
오늘이 바로 내가 그것을 잃는 날이야
!"

그가 말한 건 당신들도 눈치챘겠지만,그의 총각딱지!

고릴라 조심!
L'patron de la ménagerie
Criait, éperdu : "Nom de nom !
C'est assommant car le gorille
N'a jamais connu de guenon !"
Dès que la féminine engeance
Sut que le singe était puceau,
Au lieu de profiter de la chance,
Elle fit feu des deux fuseaux !
Gare au gorille !...



 
동물원 주인은 제 정신을 잃고 소리를 내질렀다네
 "아이고,큰일났네. 쟤는 아직 암컷을 모르는데."
여인네들은 고릴라가
숫총각이란 걸 알자마자,
그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네.


고릴라 조심!
Celles là même qui, naguère,
Le couvaient d'un œil décidé,
Fuirent, prouvant qu'elles n'avaient guère
De la suite dans les idées ;
D'autant plus vaine était leur crainte,
Que le gorille est un luron
Supérieur à l'homme dans l'étreinte,
Bien des femmes vous le diront !
Gare au gorille !.



 
좀 전에 대담한 눈길로
지긋이 바라보던 바로 그 여자들이 달아났다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말야.
그들의 걱정은 부질 없는 것이었다네:
고릴라는 포옹하는 데선
많은 여자들이 말하듯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놈이기 때문이라네
.


고릴라 조심!
Tout le monde se précipite
Hors d'atteinte du singe en rut,
Sauf une vielle décrépite
Et un jeune juge en bois brut;
Voyant que toutes se dérobent,
Le quadrumane accéléra
Son dandinement vers les robes
De la vieille et du magistrat !
Gare au gorille !...



 
모두들 발정한 고릴라한테
붙잡힐까 도망치고 쭈글쭈글한 백살 먹은 할머니와 신참내기 판사님만 남았다네
.

모두 빠져나간 걸 보고
네 손 달린 놈은 뒤뚱뒤뚱
할머니와 판사님의 옷자락을 향해 곧장 뛰어갔다네
.


고릴라 조심!
"Bah ! soupirait la centenaire,
Qu'on puisse encore me désirer,
Ce serait extraordinaire,
Et, pour tout dire, inespéré !" ;
Le juge pensait, impassible,
"Qu'on me prenne pour une guenon,
C'est complètement impossible..."
La suite lui prouva que non !
Gare au gorille !...



 
할머니는 한숨지으며 말했다네.
"
아이고, 나하고 하고 싶어하는 놈이 있네
! 별일 다 보겠네. 진짜 놀랠 '노'자네!"

판사님은 차분하게 생각했다네.
"
저 털보가 날 암컷으로 볼 리는 없지
..."

이게 아니란 걸 보게 될 거야.

고릴라 조심!
Supposez que l'un de vous puisse être,
Comme le singe, obligé de
Violer un juge ou une ancêtre,
Lequel choisirait-il des deux ?
Qu'une alternative pareille,
Un de ces quatres jours, m'échoie,
C'est, j'en suis convaincu, la vieille
Qui sera l'objet de mon choix !
Gare au gorille !...



 
생각해 보시오. 여러분들이
고릴라처럼 판사님과 할머니 중 하나를 덮친다면
누굴 고르겠소
?

내가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당장에 골라야 한다면 나의 선택대상은
확신컨대 할머니겠소
!


고릴라 조심!
Mais, par malheur, si le gorille
Aux jeux de l'amour vaut son prix,
On sait qu'en revanche il ne brille
Ni par le goût, ni par l'esprit.
Lors, au lieu d'opter pour la vieille,
Comme l'aurait fait n'importe qui,
Il saisit le juge à l'oreille
Et l'entraîna dans un maquis !
Gare au gorille !...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릴라는
사랑의 유희에 할만큼 하는 녀석이지만
,취향이나 생각에선 별볼일 없는 놈이라오. 고릴라가귀를 잡고 숲속으로 끌고 간 거은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의 판사님! 사실은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렇게 하겠지만!


고릴라 조심!
La suite serait délectable,
Malheureusement, je ne peux
Pas la dire, et c'est regrettable,
Ça nous aurait fait rire un peu ;
Car le juge, au moment suprême,
Criait : "Maman !", pleurait beaucoup,
Comme l'homme auquel, le jour même,
Il avait fait trancher le cou.
Gare au gorille !...
그 다음에 즐거운 일이 벌어졌겠지만,불행하게도, 난 말할 수 없네유감천만!
분명 우리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을 거네.
판사님이 절정에 이르러서는
"엄마!" 소리를 지르며 펑펑 울었거든! 바로 그 판사님이
오늘 아침에 교수형에 처한
그 사람처럼
.


고릴라 조심!
 


 
* 프랑스에서는 사형제도가 1981년 가을, 의회의 결정으로 폐지되었다.
 
 
 
 
 
 

 

 

 


옛 시절의 귀부인들을 위한 발라드

 Ballade des dames du temps jadis

1952
 
François Villon
1431-1463
 

      

Dictes moy où, n’en quel pays,Est Flora, la belle Romaine ;
Archipiada, ne Thaïs,
Qui fut sa cousine germaine ;
Echo, parlant quand bruyt on maine
Dessus rivière ou sus estan,
Qui beauté eut trop plus qu’humaine ?
Mais où sont les neiges d’antan !

말해다오, 지금 어디 갔을까?로마의 미녀 플로라,
알키피아데스, 그녀만큼 아름다웠던 타이스,
강물 위나 연못 위로 부를 때마다 언제나 대답하는,
인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에코는?
그런데 지난 해 내린 눈은 어디로 갔을까?



La royne Blanche comme ung lys,
Qui chantoit à voix de sereine ;
Berthe au grand pied, Bietris, Allys ;
Harembourges, qui tint le Mayne,
Et Jehanne, la bonne Lorraine,
Qu’Anglois bruslèrent à Rouen ;
Où sont-ilz, Vierge souveraine ?
Mais où sont les neiges d’antan !

어디 갔을까, 저 슬기롭던 엘로이즈는?
그녀 때문에 피에르 아벨라르는 거세되었고
후에 생 드니의 수도승이 되었네.
이 불행은 사랑 때문이니.
그래, 어디 갔을까?
뷔리당을 자루에 넣어 센 강에 던지도록 했던 그 여왕은?
그런데 지난 해 내린 눈은 어디로 갔을까?

인어의 목소리로 노래하던
백합처럼 희었던 왕후 블랑슈,
발이 큰 베르트 왕비, 베아트리스, 아엘리스,
멘을 다스렸던 에람베,
그리고 영국인이 루앙에서 화형시킨
로렌의 처녀 잔 다르크,
그녀들은 어디 갔을까? 성모 마리아여.
그런데 지난 해 내린 눈은 어디로 갔을까?
 
 
Prince, n’enquerrez de sepmaine
Où elles sont, ne de cest an,
Qu’à ce refrain ne vous remaine :
Mais où sont les neiges d’antan ?
님이여, 이 주에도, 이 해에도,
그녀들이 어디로 갔는지 물으신다면,
이 몸은 이 후렴을 되풀이할 뿐이외다.
그런데 지난 해 내린 눈은 어디로 갔을까?
 




 

 



벤치의 연인들
(2,1953)

Les gens qui voient de travers
Pensent que les bancs verts
Qu'on voit sur les trottoirs
Sont faits pour les impotents ou les ventripotents
Mais c'est une absurdité
Car à la vérité
Ils sont là c'est notoire
Pour accueillir quelque temps les amours débutants


















곁눈으로 흘겨보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길가에 있는
푸른색의 벤치가 불구자나
배뚱뚱이를 위한 거라고 말야
.그건 말도 안돼.사실은, 그건 누구나 다 알다시피,이제 막 연인이 된 이들을 맞기 위한 거야.


 
[Refrain]
Les amoureux qui s'bécott'nt sur les bancs publics
Bancs publics, bancs publics
En s'fouttant pas mal du regard oblique
Des passants honnêtes
Les amoureux qui s'bécott'nt sur les bancs publics
Bancs publics, bancs publics
En s'disant des "Je t'aime" pathétiques
Ont des p'tit's gueul' bien sympatiques
[후렴]
벤치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은
벤치의, 벤치의 연인들은
존경하는 통행인들의
곁눈질엔 아랑곳 하지 않는다네
.벤치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은
벤치의, 벤치의 연인들은
정열적으로 "사랑해"를 연발한다네
.정말 호감이 가는 작은 입들을 가지고 있다네!


 
Ils se tiennent par la main
Parlent du lendemain
Du papier bleu d'azur
Que revêtiront les murs de leur chambre à coucher
Ils se voient déjà doucement
Ell' cousant, lui fumant
Dans un bien-être sûr
Et choisissent les prénoms de leur premier bébé
연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장래를 이야기 하지.침실의 벽을 장식할
쪽빛의 벽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벌써부터 느긋하게 그려본다네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바느질하고 담배 피는 모습을 말야
.그리곤 첫 아기의 이름을 지어 본다네...


 
Quand la saint' famill' machin
Croise sur son chemin
Deux de ces malappris
Ell' leur décoche hardiment des propos venimeux
N'empêch' que tout' la famille
Le pèr', la mèr', la fille
Le fils, le Saint Esprit
Voudrait bien de temps en temps pouvoir s'conduir' comme eux
성 가족 거시기는
산책 길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연놈들을 마주쳐 지나가며
,대놓고 신랄한 말투로 쏘아 붙인다네
...그래도 온 가족은
(엄마, 아빠, , 아들, 성령은
...)이따금 이 연인들처럼 한번
해봤으면 하고 바란다네
.



 

Quand les mois auront passé
Quand seront apaisés
Leurs beaux rêves flambants
Quand leur ciel se couvrira de gros nuages lourds
Ils s'apercevront émus
Qu' c'est au hasard des rues
Sur un d'ces fameux bancs
Qu'ils ont vécu le meilleur morceau de leur amour

여러 달이 지나고,이들의 불타는, 아름다운 꿈들이
누그러뜨려질 때면
,하늘에 묵직한 먹구름이 덮힐 때면,이들은 감격하며 깨닫게 될 거네.
오가는 길가의
이 이름난 벤치에서
자신들의 가장 멋진 사랑을 체험했다는 걸 말야
...
 


 



Il n'y a pas d'amour heureux
- Louis Aragon
1953   

행복한 사랑은 없다
- 루이 아라공

 

            
   Rien n'est jamais acquis à l'homme Ni sa force
Ni sa faiblesse ni son coeur Et quand il croit
Ouvrir ses bras son ombre est celle d'une croix
Et quand il croit serrer son bonheur il le broie
Sa vie est un étrange et douloureux divorce
Il n'y a pas d'amour heureux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힘도 그의 허약함도 그의 마음까지도
그는 두 팔을 벌린다고 하는데

그 그림자는 십자가의 모습이다
행복을 꽉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행복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기이하고 고통스런 투쟁이다
행복한 사랑은 없다 

Sa vie Elle ressemble à ces soldats sans armes
Qu'on avait habillés pour un autre destin
A quoi peut leur servir de se lever matin
Eux qu'on retrouve au soir désoeuvrés incertains
Dites ces mots Ma vie Et retenez vos larmes
Il n'y a pas d'amour heureux 
 
인간의 삶,

그것은 무장 해제된 병사들과 흡사하다
또 다른 운명을 위해 군복을 입은 병사들
그들이 아침에 일어난들 무슨 소용인가
저녁이면 할 일도 확신도 없는 그 모습

다시 보게 될 것인데
<내 삶이여>,

이렇게 읊조리며 눈물을 삼켜라
행복한 사랑은 없다
 

Mon bel amour mon cher amour ma déchirure
Je te porte dans moi comme un oiseau blessé
Et ceux-là sans savoir nous regardent passer
Répétant après moi les mots que j'ai tressés
Et qui pour tes grands yeux tout aussitôt moururent
Il n'y a pas d'amour heureux


내 아름다운 사랑이여

내 소중한 사랑이여

내 찢어진 상처여
나는 너를 상처 입은 새처럼 보듬어 안는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내가 엮은 말들을 따라한다
너의 그 커다란 두 눈 앞에서는

즉시 무의미하게 되어버릴 그 말들을
행복한 사랑은 없다 
  


Le temps d'apprendre à vivre il est déjà trop tard
Que pleurent dans la nuit nos coeurs à l'unisson
Ce qu'il faut de malheur pour la moindre chanson
Ce qu'il faut de regrets pour payer un frisson
Ce qu'il faut de sanglots pour un air de guitare
Il n'y a pas d'amour heureux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나 된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하는가
가장 작은 노래 하나를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불행이 필요한 것인가
한 순간의 전율을 얻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회한이 필요한 것인가
하나의 기타 선율을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흐느낌이 필요한 것인가
행복한 사랑은 없다

  
Il n'y a pas d'amour qui ne soit à douleur
Il n'y a pas d'amour dont on ne soit meurtri
Il n'y a pas d'amour dont on ne soit flétri
Et pas plus que de toi l'amour de la patrie
Il n'y a pas d'amour qui ne vive de pleurs
Il n'y a pas d'amour heureux
Mais c'est notre amour à tous les deux
     

 

고통스럽지 않은 사랑은 없다
상처받지 않는 사랑은 없다
시들지 않는 사랑은 없다
너에 대한 사랑이든

조국에 대한 사랑이든
눈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랑은 없다
행복한 사랑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둘의 사랑이다 

 
 

 


 

La mauvaise herbe
잡초
1954
    
 Chanson pour l'Auvergnat
오베르뉴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1954
 
 

        
Elle est à toi cette chanson
Toi l'Auvergnat qui sans façon
M'as donné quatre bouts de bois
Quand dans ma vie il faisait froid
Toi qui m'as donné du feu quand
Les croquantes et les croquants
Tous les gens bien intentionnés
M'avaient fermé la porte au nez
Ce n'était rien qu'un feu de bois
Mais il m'avait chauffé le corps
Et dans mon âme il brûle encore
A la manièr' d'un feu de joie.


이 노래는 당신께 바치는 노래입니다
내가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오베르뉴 사람, 당신은 아무런 격식 없이
나에게 장작 몇 개를 주었지요
농부들과 배려심 많다는 모든 사람들이
내 코 앞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당신은 나에게 불을 건네준 것이지요
그것은 단지 작은 장작불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 몸을 덥혀주었죠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는 지금도 그것은
기쁨의 불이 되어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요

  


Toi l'Auvergnat quand tu mourras
Quand le croqu'mort t'emportera
Qu'il te conduise à travers ciel
Au père éternel

 
오베르뉴 사람, 당신, 당신이 죽어
장의사가 당신을 데려갈 때
하늘 저 넘어 영원한 아버지에게
당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Elle est à toi cette chanson
Toi l'hôtesse qui sans façon
M'as donné quatre bouts de pain
Quand dans ma vie il faisait faim
Toi qui m'ouvris ta huche quand
Les croquantes et les croquants
Tous les gens bien intentionnés
S'amusaient à me voir jeûner
Ce n'était rien qu'un peu de pain
Mais il m'avait chauffé le corps
Et dans mon âme il brûle encore
A la manièr' d'un grand festin.

이 노래는 당신께 바치는 노래입니다
내가 굶주림에 허기져 있을 때
주막집 여인 당신은 아무런 격식 없이
나에게 빵 몇 조각을 주었지요
농부들과 배려심 많다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굶어 죽는 것을 보며 즐거워 할 때
나에게 빵 상자를 열어 주었지요
그것은 약간의 빵일 뿐이지만
그것은 내 몸을 덥혀주었죠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는 지금도 그것은
거대한 진수성찬으로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요

  
Toi l'hôtesse quand tu mourras
Quand le croqu'mort t'emportera
Qu'il te conduise à travers ciel
Au père éternel

오베르뉴 사람, 당신, 당신이 죽어
장의사가 당신을 데려갈 때
하늘 저 넘어 영원한 아버지께
당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Elle est à toi cette chanson
Toi l'étranger qui sans façon
D'un air malheureux m'as souri
Lorsque les gendarmes m'ont pris
Toi qui n'as pas applaudi quand
Les croquantes et les croquants
Tous les gens bien intentionnés
Riaient de me voir emmener
Ce n'était rien qu'un peu de miel
Mais il m'avait chauffé le corps
Et dans mon âme il brûle encore
A la manièr' d'un grand soleil
이 노래는 당신께 바치는 노래입니다
경찰들이 나를 체포해 갈 때
농부들과 배려심 많다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잡혀가는 것을 보며 웃고 있는데
이방인인 당신은 아무런 격식 없이
딱하다는 모습으로 나에게 미소를 보내 주었죠
그것은 약간의 꿀처럼 달콤한 것에 불과지만
그것은 내 몸을 덥혀주었죠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는 지금도 그것은
거대한 태양처럼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요  


Toi l'étranger quand tu mourras
Quand le croqu'mort t'emportera
Qu'il te conduise à travers ciel
Au père éternel
 
이방인인 당신, 당신이 죽어
장의사가 당신을 데려갈 때
하늘 저 넘어 영원한 아버지에게
당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빅토르 위고, 수녀의 전설
georges brassens 1956
barbara 1960
https://blog.naver.com/3504kim/220781434553 

poeme 1828
https://fr.wikisource.org/wiki/Odes_et_Ballades/La_L%C3%A9gende_de_la_nonne

 


 
Le Verger du roi Louis
루이왕의 정원
1960




 친구들 먼저
Les Copains d'abord
1964







 Vénus callipyge
엉덩이가 아름다운 비너스 1964
 
 
 
 
 
 
 Supplique pour être enterré à la plage de Sète
 세뜨 해변에 묻어다오
(9-01,1966)
 
 
 


 

 

La Camarde qui ne m'a jamais pardonné,
D'avoir semé des fleurs dans les trous de son nez,
Me poursuit d'un zèle imbécile.
Alors cerné de près par les enterrements,
J'ai cru bon de remettre à jour mon testament,
De me payer un codicille.



Trempe dans l'encre bleue du Golfe du Lion,
Trempe, trempe ta plume, ô mon vieux tabellion,
Et de ta plus belle écriture,
Note ce qu'il faudra qu'il advint de mon corps,
Lorsque mon âme et lui ne seront plus d'accord,
Que sur un seul point : la rupture.





Quand mon âme aura pris son vol à l'horizon,
Vers celle de Gavroche et de Mimi Pinson,
Celles des titis, des grisettes.
Que vers le sol natal mon corps soit ramené,
Dans un sleeping du Paris-Méditerranée,
Terminus en gare de Sète.







Mon caveau de famille, hélas ! n'est pas tout neuf,
Vulgairement parlant, il est plein comme un œuf,
Et d'ici que quelqu'un n'en sorte,
Il risque de se faire tard et je ne peux,
Dire à ces braves gens : poussez-vous donc un peu,
Place aux jeunes en quelque sorte.






Juste au bord de la mer à deux pas des flots bleus,
Creusez si c'est possible un petit trou moelleux,
Une bonne petite niche.
Auprès de mes amis d'enfance, les dauphins,
Le long de cette grève où le sable est si fin,
Sur la plage de la corniche.




C'est une plage où même à ses moments furieux,
Neptune ne se prend jamais trop au sérieux,
Où quand un bateau fait naufrage,
Le capitaine crie : "Je suis le maître à bord !
Sauve qui peut, le vin et le pastis d'abord,
Chacun sa bonbonne et courage".




Et c'est là que jadis à quinze ans révolus,
A l'âge où s'amuser tout seul ne suffit plus,
Je connu la prime amourette.
Auprès d'une sirène, une femme-poisson,
Je reçu de l'amour la première leçon,
Avalai la première arête.




Déférence gardée envers Paul Valéry,
Moi l'humble troubadour sur lui je renchéris,
Le bon maître me le pardonne.
Et qu'au moins si ses vers valent mieux que les miens,
Mon cimetière soit plus marin que le sien,
Et n'en déplaise aux autochtones.




Cette tombe en sandwich entre le ciel et l'eau,
Ne donnera pas une ombre triste au tableau,
Mais un charme indéfinissable.
Les baigneuses s'en serviront de paravent,
Pour changer de tenue et les petits enfants,
Diront : chouette, un château de sable !




Est-ce trop demander :

sur mon petit lopin,
Planter, je vous en prie une espèce de pin,
Pin parasol de préférence.
Qui saura prémunir contre l'insolation,
Les bons amis venus faire sur ma concession,
D'affectueuses révérences.






Tantôt venant d'Espagne et tantôt d'Italie,
Tous chargés de parfums, de musiques jolies,
Le Mistral et la Tramontane,
Sur mon dernier sommeil verseront les échos,
De villanelle, un jour, un jour de fandango,
De tarentelle, de sardane.








Et quand prenant ma butte en guise d'oreiller,
Une ondine viendra gentiment sommeiller,
Avec rien que moins de costume,
J'en demande pardon par avance à Jésus,
Si l'ombre de sa croix s'y couche un peu dessus,
Pour un petit bonheur posthume.






Pauvres rois pharaons, pauvre Napoléon,
Pauvres grands disparus gisant au Panthéon,
Pauvres cendres de conséquence,
Vous envierez un peu l'éternel estivant,
Qui fait du pédalo sur la plage en rêvant,
Qui passe sa mort en vacances.








자신의 콧구멍에 꽃씨 뿌린 날
용서치 않았던 내 친구, 죽음이
나를 어리석은 열성으로 쫓네
.

이제, 무덤으로 완전히
에워 싸였나니,
내 유언장을 빛을 보게 하고
추가로 몇 마디 적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
.








적셔라, 리용 만()의 푸른 잉크에
적셔라, 너의 깃털을, 나의 늙은 공증인이여
.그리고 가장 멋진 필체로,내 혼과 몸이 단 한 가지,

단절이라는 것말고는
더 이상 공통점이 없어질 때,
내 육신이 사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적어 두기를.  







슈와 미미 팡송의 수평선으로
거리 소년과 소녀들의 수평선으로
내 혼이 날아갈 때
자연의 태양을 향해 내 몸이
파리-지중해간 침대차에 실려
종착지 세뜨 역으로

되돌아가게 하라.






내 가족 지하 매장터는
아쉽게도 전혀 새 것이  아니네.
속되게 말해,
그건 콩나물 시루처럼 가득 찼네.
하여 여기서 누구 하나
일어나지 않으면
너무 늦을지도 모르지만
,

이 사람들에게 난
"거기 날 위해 한 자리
만들어주오"
라고 말할 수 없네.






바닷가에 바로,
푸른 파도가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되도록 이면 푹신한 구덩이를
,

아담하고 예쁜 벽감을 파다오.
어린 시절 내 친구였던
돌고래 곁에
고운 모래가 길게 늘어진

펼쳐진 곳에






꼬르니슈의 해변에.
화를 내는 순간에조차
포세이돈이 너무 건방지게 
 굴지 않는 바닷가에,
배가 가라 앉아도 선장이
"선장이다. 자기 목숨 각자 알아서! 포도주와 파스티스를 먼저!
각자 큰 술병 들고 용기를 내!"
라고 외치는 곳에.







옛날 그곳에서 15살 때,
혼자 노는데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한 난 처음으로 첫사랑을 알았지.
바다의 요정, 인어 곁에서
난 연애 수업을 처음 받았고
처음으로 생선가시를 삼켰지
.






폴 발레리에게 경의를,
보잘 것 없는 음유 시인인 내가
한술 더 떠도,
마음 좋은 거장은
날 용서하겠지.
그의 시가 내 것보다
더 나을지라도
내 무덤만은 그의 무덤보다

더 바다에 가까이 있을 거라네.
이곳 토박이들에겐
실례가 되겠지만.




하늘과 물 사이에 낀
이 무덤은
좋은 경치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을 것이네.
말할 수 없는 매력이 될 것이네.
해수욕객들은
병풍 삼아
이곳에서 옷을 갈아 입을 것이고, 아이들은
"여기 봐라! 모래성이다!"

고 외칠 것이네.




과분한 요구는 아니겠지!
내 조그만 봉분 위에,
부탁컨대,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이왕이면 땡볕을 막아주는
소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내 묘를 찾아와
다정히 인사를 건네는
옛 친구들이
그을리지 않게 하게 하라
.





더러는 스페인에서,
더러는 이탈리아에서 불어오는,
향기를, 즐거운 음악을 싣고 오는,뒤바람과 산바람이
내 마지막 단잠에
하루는 목가를,

하루는 판당고를,
하루는 타란텔라를,
하루는 사르단을
울려 쏟아낼 것이네.






그리고 물의 요정이
내 언덕을 베개 삼아
거의 벗다시피 한 채
귀엽게 잠에 들 때
,

내 십자가의 그림자가
잠시 그 위로 누워
죽은 뒤에 조그만 기쁨을 
 누릴지라도
예수가 너그러이

봐주길 바라네.







가련한 파라오 왕들!
가련한 나폴레옹!
판테옹에 매장된 채 사라진 
가련한 위인들!
이름난 인물들의 가련한 유골들!
그대들은
파도에 실려 꿈꾸며
페달로 보트 타는,
죽음을 휴가처럼 보내는,
영원한 피서객을
조금은 부러워 하리라.






 
 
 
 
 
 
 


 Fernande 페르낭드

11집, 1972

 
 
 


나이먹은 소년의 기벽처럼
내게, 나에게 쓸쓸함을 달래는
버릇이 있었지. 이 같은
노래 가락에 맞춰 말야:

* 페르낭드를 생각하면
불끈 서지, 불끈 서지.
펠리시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로 서지.
레오노르를 생각해도,
어쩌나, 또 서지.
하지만 룰루를 생각하면,
그땐 더 이상 서지 않아.
불끈 서지 못하는 걸,
아빠, 어찌 할 수 없어요.


이 가락은 남아를 위한 소악장.
씩씩한 교송성가처럼
꿋꿋한 보초병의 초소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되지:


울적함을 달래려고,
덜 생기 없는 삶을 보려고,
탐조탑위에서 경계를 서며,
등대지기처럼 노래를 부르지:


저녁 기도를 마치고,
어딘가 우울해지면,
신학도처럼 노래 부르지.
무릎 꿇고 간이제단 앞에서 말야:


언젠가, 에뜨왈으로 난
불길을 살리려 간 적이 있지.
눈물이 나도록 감동된 채,
난 낯선 병사의 소를를 들었지:


몸에 좋은 이 노래에
한 마디 덧붙여 마무리 짓자면,
독신자들이여, 이 노래를
애국가로 만들지어다.




Mourir pour des idées
이념을 위해 죽는 것
(11집, 1972)  
 
 
 

 

이념을 위해 죽는 것,
생각은 대단한 거지.
, 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죽음 면했네.
그걸 가졌던 사람들은,
짓누르는 듯한 무리들은
모두 죽음을 울부짖으며

내 위로 쓰러졌네.
그래 그들은 날 설득했고,
내 무례했던 뮤즈는
제 과오를 버리고

그들의 믿음에 가담했네.


그렇지만 조그만 단서를 하나만 달자.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좋아,
하지만 천천히."
머무적거리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또 가는 길에 빈둥거리며, 저 세상으로 가자.
너무 속력을 내다보면,
이튿날엔 안 통하는 이념을 위해
죽게 되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 쓰라린, 가슴 아픈 일이 있다면,
신에게 혼을 되돌려준 뒤라도
길을 잘못 들었다고,
잘못된 이념에 빠졌다고 인정하는 게 좋아.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좋아,
하지만 천천히.
순교를 설파하는,
황금 빛 입*'성스러운 사람들'
더구나 대개는 이곳 낮은 데에서 꾸물거리지
.



이념을 위해 죽는 것
-다시 한번 말해 두는데-
그건 그들 삶의 이유야.
그들은 그걸 포기하지 않지.
그래 거의 모든 종파에서
곧 므두셀라보다
더 오래 살게 될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되지
.

난 그들이 나직이
다음처럼 말해야 한다고 결론짓지:
 

"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 좋아,
하지만 천천히."

유명한 희생을 요구하는 이념을,
온갖 종류의 종파들은 줄줄이 내놓지.


그럼 풋내기 희생자는 묻게 되지:
이념을 위해 죽는 건 정말 좋은 일인데,
어떤 이념?
그리고 모두들 서로 비슷해서,
그들이 큰 깃발을 들고 오는 걸 보면,
분별 있는 사람은 멈칫하며, 무덤을 돌아갈 거야.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
좋아, 하지만 천천히.
황소 백 마리의 산 제물로 몇 번 충분하여,
결국 모든 게 바뀌고, 모든 게 정돈된다면야!


그 많은 <위대한 전야>,
그 많은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면,
우린 벌써 지상 낙원에 살고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황금 시대는 끊임없이 무기한 미뤄지고,
신들은 늘 목 말라 하고, 물릴 줄 모른다네.
그리고 늘 다시 시작하는 건 죽음이야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
좋아, 하지만 천천히.

선동자들이여,
잘난 전도자들이여,그대들 먼저 가오,
우리가 그대들에게 양보하리라.


하지만
 부디 딴 사람들은 살게 내버려 두오!
목숨은 이들이 이 땅에서 가진 하나뿐인 사치라오.
나중에 저승사자가 몸소 알아서 신경 쓸 테니
사람들이 일부러 낫을 쥘 필요 없는 것이오
.

단두대 주변의 죽음의 춤이 더 이상 없길!


이념을 위해 죽자, 좋아,
하지만 천천히, 좋아, 하지만 천천히.
 
 
 
 
 
 

*
황금 빛 입 = 황금 입의 성스러운 쟝 ,

Saint Johnnes Chrysotomos,

그리스 정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334/54-407), 
 설교가 뛰어나 황금 입이란 별명이 붙음.
불관용(처녀성유지, 재혼금지,syneisaktentum의 불인 등)으로 유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