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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15.

la part maudite


 
 
 
 
 
 






 
 
 
 
 
* 「소모의 개념」(1933) - 『저주의 몫』
 
 
“인간의 행위가 생산(production)과 보존(consommation)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 첫째, 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 둘째, 또 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 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dépense)라고 부르겠다.”(32)
 
 
“고전경제학에서는 원시적 교환이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고전경제학에서는 교환과 같은 획득의 수단이 획득의 욕구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되는 파괴와 파멸의 욕구를 그 근원에 가지고 있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고대의 교환 형태는 물물 교환의 인위적 관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형태는 모스에 의해 미국 북서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를 통해 확인되었다.”(36)
 
 
*** 『저주의 몫』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오늘 출판하게 된) 책에서는 정치 경제적 사실들을 기존의 전문적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고찰하였고, 나의 관점은 곡물의 판매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 인간의 희생, 교회의 건축, 보석의 선물 등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갖는다. [...] 요컨대 나는 부의 ‘소모’(소비)를 생산과 관련해서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일반경제’(économie générale)의 원칙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 이 최초의 에세이는 개별적인 원리들을 벗어나서 지상의 에너지와 충동을 고찰하는 각각의 원리 - 지구과학에서 출발해서 사회학, 역사학, 생물학을 거쳐 정치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의 원리 - 가 제기하는 문제들의 열쇠가 되는 문제, 여태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초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리학,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조차도 경제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예술, 문학,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연구하는 운동과 관련이 있다. 다름아닌 과잉 에너지의 운동, 삶의 비등(沸騰, effervescence)이 그것이다. [...] 내가 고찰하는 비등, 지구를 부추기는 비등은 또한 나의 비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연구 대상은 연구 주체와, 더 정확히 말해서 ‘비등점의 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51-53)
 
 
“생물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그에 반하는, ‘사치’이다.”(54)
 
 
“총체적으로 산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사회 갈등과 세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총체적으로 발전하는 산업 경제의 일반적 전제를 연구할 때만, 한마디로 인간의 총체적 업적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만 파악이 가능하다.”(60)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한 산업의 성장을 합리적으로 방출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든지, 에너지의 축적이 결코 불가능한 비생산적 또는 낭비의 방법을 통해서든지 생산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가 지체 없이 밝히고 싶은 것은, 성장의 발산이 경제 원칙들의 전복-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모럴의 전복-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 사상과 모럴의 전복은 제한된 경제 관점들로부터 일반적 경제의 관점들로 넘어갈 때만이 가능하다.”(66)
 
 
“원칙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는 자신의 삶을 유지해주는 활동(기능적인 활동, 동물에게 필요불가결한 근육활동, 먹이찾기 등)에 필요한 양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며 그 초과 에너지 덕분에 성장이나 번식도 가능하다. 식물이란 동물에게 초과분이 없었다면 성장도 번식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하는 생체화학작용은 과잉의 수익자이자 창조자인데, 이는 생명체의 대원칙이다.”(67)
 
 
2. 성장의 한계. 우선 삶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한 가지는 ‘태양 에너지는 풍요와 발전의 원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없이 에너지-부-를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이 없이 준다. 천체물리학이 태양의 사치를 측정해내기 전부터 인간들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곡물이 익는 것도 태양 덕분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은 받지 않고 주는 사람을 태양의 광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지점에서 도덕적 판단의 두 가지 근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옛날에는 가치를 영예로운 비생산에서 찾았던 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가치를 생산에 결부한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은 에너지의 소모보다는 획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날의 명예란 유용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결과에 의해 정당화될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감정이 현실적 판단에 의해 -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의해 - 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고대의 감정은 특히 부르주아 세계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의 반발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힘을 잃는 것은 오직 고전적인 경제 개념 속에서이다. / 태양 광선은 지표면에 에너지의 과잉을 초래해한다. 그러나 일단 생물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여서 그 에너지를 할 수 있는 한 남은 공간에 축적한다. 그런 다음 생물체는 그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낭비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발산에 앞서 생물체는 성장을 위해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한다. 성장을 지속할 수 없을 때만 낭비에 자리를 내준다. 진정한 잉여는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이 일단 제한을 받을 때 시작된다. / 개인이나 집단은 일차적으로 다른 개인 또는 집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유일한 한계는 다름아닌 지구(정확히 말해서 생물체의 접근이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생물권)이다. 개인이나 집단은 다른 개인이나 그룹에 의해 제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살아있는 자연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총체적 성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지구라는 방대한 공간이다.”(69-70)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순간 행위의 유용성utilité을 고찰해야 한다. 유용성은 유지, 성장 또는 이익을 내포한다. 물론 성장에 과잉을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제기된 문제는 그 점을 배제한다. 가능한 성장이 멈췄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死血)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 에너지는 파멸될 수박에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불유쾌한 파멸보다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71)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성장은 없고 단지 모든 형태의 에너지의 사치스러운 낭비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사실 주로 광적 분출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사건은 사치의 발전이고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생명 형태들의 생산이다.”(74)
 
 
“성(sexualité)은 애초부터 욕심 사나운 자기만의 성장과는 다르다. 성행위는 종의 차원에서 보면 성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체의 차원에서 보면 사치이다. [...] 동물에게 생식행위는 어느 순간 가능성의 극단에 이른 에너지의 원천을 갑작스럽게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기회가 된다. 그 낭비는 종의 성장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며 순간적으로 보면 개인의 실행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경우 그 소비는 파괴의 모든 가능한 형태들을 수반하며 재산의 탕진 - 육체의 탕진 - 을 부르고 최종적으로 죽음이라는 비합리적 사치 또는 과잉과 결합한다.”(76)
 
 
* 스페인 작가였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Bernardino de Sahagún, 1500-1590)에게 어떤 늙은 아즈텍인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87).
 
 
“내밀한 세계는 마치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명철한 의식과 도취의 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와 대립한다. 정상은 대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성은 대상의 확인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고, 명철성은 대상들에 대한 뚜렷한 인식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반면 주체의 세계는 어둠이다. 한 없이 의심스럽고 유동적인 이 어둠은 이성이 잠드는 사이를 기다려 괴물들을 잉태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이렇게 가정한다. 즉 광기가 아니면 현실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는, 오직 현재에만 열중하는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고. 주체는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떠나 현실적 질서의 사물들에 종속된다. 주체는 노동에 구속되는 순간 소진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의 어떤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만을 걱정한다면 무슨 이유로 비축에 힘쓰겠는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일순간에 무질서하게 탕진할 수 있다. 내일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무익한 소모는 나를 즐겁게 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물이 내밀한 질서로 회귀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소모이다. 소모의 세계라고 폭력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제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희생제의에서 문제는, 여전히 파괴를 끌어들이되 제물 이외의 나머지를 치명적인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희생 제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위험에 빠져있다. 그러나 일정한 제의의 형태는 통상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 희생 제의는 공동의 작업 체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밀성을 되찾게 해주는 광적 행위이다. 폭력은 희생 제의의 원칙이다. 그러나 작업은 폭력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희생 제의의 폭력은 여전히 공공의 사물들을 보존하거나 통합하려는 우려에 대해 종속적이다. 개인들은 광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지 못하게 하는 그 광란은 그들을 다시 속세적 시간의 작업으로 안내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그것은 부의 무한한 발전을 목적으로 한 행위라거나 과잉의 힘을 흡수하는 이익 추구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업은 유지만을 염두에 둔다. 작업은 축제(풍성한 작업은 축제를 부르며 축제는 다시 풍성한 작업의 기원이 된다)의 한계를 사전에 결정짓는다. 그러나 파멸을 모면하는 것은 공동체일 뿐이다. 제물은 여전히 폭력에 내맡겨진다.”(100-101)
 
 
“8. 저주받은 그리고 신성한 제물. 제물은 부의 일부로서 잉여의 부분이다. 그리고 제물은 아무런 이익 없이 소모되기 위하여, 즉 영원히 파괴되기 위하여 유용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제물로 뽑힌 순간 제물은 폭력적인 소모에 약속된 저주의 몫이다. 그러나 저주는 제물을 사물의 질서에서 끌어내 그 빛이 살아있는 존재들의 내밀성, 고뇌, 심연을 비추게 한다. / 제물을 둘러싸고 우려가 확산되는데, 그 우려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사물이기 때문에 제물을 사물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면 파괴를 통해 제물의 유용성, 사물성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제물이 바쳐지는 순간 봉헌과 죽음은 분리되며, 제물은 제의 집행자의 소모적 제의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 현실적 [사물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제물뿐이다. 제물만이 축제의 극단적 충동에 온통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제의 집행자는 신적 특성을 띠더라도 주저하면서 그럴 뿐이다. 그의 내부에 무겁게 남은 미래가 그를 짓누르는 것이다. [...] 제의에서는 고뇌와 광란이 뒤섞인다. 광란이 고뇌보다 더 강한데, 조건이 있다. 제의의 결과가 바깥의 죄에, 즉 밖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제의 집행자는 자신의 재산이 될 수도 있었을 제물을 거부해야 한다. / 그러나 엄격하지 않다고 해서 의식의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 경계를 넘어서는 과잉, 소모이며 그것만이 신에 합당한 대접을 받았다. 인간은 이러한 소모를 대가로 타락에서 벗어났고, 또한 현실적 질서의 냉혹한 타산과 인색함이 인간 내부에 끌어들인 사물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다.”(101-103)


이슬람 사회, 티벳 사회.
 
 
“경제의 일반법칙. 한 사회는 총체적으로 보면 항상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생산하므로, 사회는 잉여를 갖고 있다. 어떤 사회가 잉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태가 결정된다. 잉여는 사회적 동요의 원인이고, 구조의 변화, 모든 역사적 변화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잉여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것은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어떤 성장이든지 일정한 성장 뒤에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사실이다.”(149)
 
 
산업사회. 부르주아의 세계. 소련의 산업화. 마셜 플랜.
 
 
10. 부의 궁극적 사용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 [...] 자아의식은 본질적으로 충실한 내밀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확보는 속임수이다. 의생제의는 신성한 물건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물건은 내밀성을 외재화한다. 말하자면 신성한 물건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과잉 성장에 맡겨져 있다. 대개 인간들은 생존의 목적이나 존재 이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장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에 매몰된 나머지 존재는 때로 자율성을 잃고 만다. 존재는 이따금 자원의 증가 때문에 미래에 있을 어떤 것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실 성장은 자원이 소비되는 순간과 관련시켜볼 때만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확인하기 어렵다. 의식은 그런 순간과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의식은 순전한 소비와는 달리 무가 아닌 어떤 것,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순간과 대립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식이란 성장(어떤 것의 획득)이 소비로 끝나는 순간의 결정적인 의미에 대한 의식이며, 다른 아무것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의식이다. / 명철성이 우위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완성되면 사회적 실존이 제자리를 찾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제자리를 찾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란 어떤 의미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으로의 변화와 비교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일은 최종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가 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트루먼이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은밀하고도 궁극적인 최종 목적에 맞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분명 허망한 것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정신은 낡은 목적론 대신 침묵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232-234)
 
 
 

2012. 9. 30.

부채인간 - 옮긴이 서문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12



알라딘:
로쟈 서평, 주간경향
 
 
 
 
 
 
 
 

한국어판 서문
해제
옮긴이 서문


머리말

I. 부채를 사회의 기반으로 파악하다

왜 금융 경제가 아닌 부채 경제에 대해 말하는가
부채의 생산
특수 권력관계로서의 부채

II. 부채와 채무자의 계보학

1. 부채와 주체성 : 니체의 공헌
1)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서 채권자-채무자 관계
2) 가능성ㆍ선택ㆍ결정으로서의 부채 시간
3)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경제

2. 두 명의 마르크스
1) 매우 니체적인 마르크스
2) 《자본》에 등장하는 객관적 부채

3. 부채 논리에 있어서의 행동 및 신용

4. 들뢰즈와 가타리: 부채의 짧은 역사
1) 무한 부채
2) 야만적 흐름
3) 자본주의적 흐름

III. 신자유주의에서 부채의 영향력

1. 푸코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2. 부채에 의한 주권ㆍ규율ㆍ생명관리 권력의 재배치
1) 주권권력
2) 규율권력
3) 생명관리권력

3. 부채의 시험에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헤게모니인가, 통치성인가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 서브프라임 위기
3) 국가 부채의 위기

4. 부채와 사회적 세계
1) 세 가지 부채: 사적 부채, 국가 부채, 사회 부채
2) 부채 주체성의 테크닉 안에 존재하는 위선, 냉소주의 및 불신
3) 가치평가와 부채
4) 사회적 예속화 및 기계적 노예화로서의 부채
5. 반생산과 반민주주의

결론

주석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2838.html



경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12019305&code=900308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851



시사IN - [특집/'부채 인간'의 탄생] 악마의 속삭임 '부자 되세요'

빚이 삶의 중심이 된 우리는 '부채 인간' 이다.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금융기관들은 미친 듯이 서민에게 대출을 해주며 부동산·주식 열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빚 때문에 힘들지만 빚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다.

'금융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철학자 라차라토 인터뷰

http://www.sisainlive.com/cover2/viewContent.php?idxno=255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22018001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30679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801032530159002






* 옮긴이 서문 [원본]




옮긴이 서문

부채인간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통제하는가?

1. 부채인간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당신과 우리의 오늘에 대한 책이다. 라짜라또는 청년 마르크스의 신용과 통화에 관한 소논문 「대출과 은행」 및 완숙기의 『자본』, 니체의 『도덕의 계보』, 그리고 이에 영향 받은 들뢰즈ㆍ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원용하여 현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지, 그리고 신용과 부채의 문제가 어떻게 ‘당신이 열심히 일을 할수록, 더 많은 빚은 지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라짜라또가 핵심으로 삼는 개념은 물론 특히 니체적 의미로 해석된 부채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상기 사상가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친 독자적인 저술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공정한 평가라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메커니즘을 드러내주는 키워드이다. 왜 기존 경제학의 개념이 아닌, 부채인간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분석에 요청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저자 인터뷰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 즉 사실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통화를 중립적인 것,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간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통화 경제이고, 신용 통화란 경제적 순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통화의 창조는 부채를 통해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신용/부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시장 경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금융화(그리고 오늘날 지상권을 갖고 있는 부채)는 사회적 생산성 및 부의 포획(capture)을 위해 작동하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오늘날 부채 상환은 이윤을 대체해 버렸는데, 이는 기업의 이윤조차도 필연적으로 금융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채와 신용은 경제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의 진실입니다. 통화/부채의 발행을 통제한다는 것은 경제 금융을 통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발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채 인간은 부채 경제의 주체적 형상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니체의 입장을 재구성하려 했는데, 그 주장의 기원은 오늘날에서야 겨우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 관계는 경제적인 동시에 주체적인 것입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이다.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더 이상 경제적 혹은 상징적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짜라또는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부채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자신의 주요 저작, 특히 『도덕의 계보』(1887)를 통하여 근대 영혼 및 신체의 통제 메커니즘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논의의 핵심은 죄책감, 혹은 부채의 관념이 근대 사회의 인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아래에서는 라짜라토의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죄책감 혹은 부채에 관한 니체의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니체의 죄책감, 빚

니체는 우선 죄책감, 곧 양심의 가책 기원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제안한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인(Schuld)는 , 곧 부채(Schulden)라는 매우 물질적인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두 독일어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갖는 용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손해와 고통 사이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근본적으로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적 관계, 사법적 개인의 존재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며 그 자신 교통ㆍ교환, 가치의 구입이라는 근본적 형식에로 또 다시 돌아가는 하나의 관계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이러한 관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고대인의 일반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 따라서, 정의 자체가 - 그 기원에 있어 - 주어진 어떤 순간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보아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죄’, ‘양심’,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바로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이로부터 형을 치르는 것에 대한 하나의 은유, “빚을 갚는다.”라는 일상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내적ㆍ외적 처벌의 기초로서의 양심의 가책은 하나의 ‘질병’이다.

한편, 어떤 범죄자가 스스로를 사회의 ‘적’ 혹은 ‘비행인’(?)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의 내면화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회에 의해 정복 혹은 ‘포괄ㆍ이해’(conquis et "compris")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및 도덕의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사회는 자신의 보존ㆍ보호ㆍ번영이라는 자신의 명확한 이해(利害) 기준에 따라 가치들 및 도덕들을 판단한다. 달리 말해, 모든 가치와 도덕은 오직 주어진 사회 내에서만 타당하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관심은, 결코 자신의 ‘참다운 진보’가 아닌, 오직 자신의 단순한 보존, 현상 유지(statu quo)에 있다. 사회적 가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이기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기능에 관련된 효용성에 준하여 판단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회의 이익을 위한 덕들은 그 기원이 망각됨으로써 오늘날 이익이 아닌 어떤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행해지고 있다.
“근본 동기, 즉 유용성이라는 동기가 망각된 그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행위라고 불린다. [...]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의 근원인 사회는 분명 이익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가 도덕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되도록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격렬하게 개인의 사리사욕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마치 이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근원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며, 모든 개인적인 이익에 맞서 자신을 관철시켜나가고 더 높은 품위를 얻기 위해 애써왔다.”
하나의 사회는 자신에게 ‘부적합한’ 모든 것들을 억압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예외들’을 자신에 대한 위험 요소로서 배제한다. “예외자를 범죄자로 다루고 억압하기 위한 심문, 불신, 관대하지 않음의 정도-자신들의 예외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병들 정도로 그들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갖게 하기 위해서.”따라서, 한편으로는 “살해하고, 고문하고, 자유아 재산을 빼앗”으며, “교육을 제한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로서)” “속이고, 기만하고 쫓아” 다니는 사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최면에 걸리고”, “뭉그러진”, “실패한”, “길들여진” 범죄자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과 신체에 있어 ‘근대인’으로 ‘형성’되고 ‘개선’되었으며 ‘변형’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의무와 마찬가지로 죄,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 역시 이제는 그 기원이 잊혀진 과정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결코 양심의 가책의 존재 이유,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 내력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도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 발명된 것이며, 그 자신이 구성된 계기들, 곧 역사를 갖는다.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을 수행해야 한다.

3. 부채의 인간학 - 경제 인간, 부채 인간

결국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이 전통적인 기존 경제학적 관념만으로는 분석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도덕적인 것, 한 마디로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가치’를 경제적 효용가치로 환원한다. 오늘날의 이른바 ‘스펙’이란 용어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권력 효과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신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좋은 영어 성적을 받지 못하며, 좋은 직장을 가지 못했고,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개인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품행을 통제하는 도덕적 가치를 구성한다.
“현실을 봐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래? 네가 지금 그럴 때니?”
그리고 이는 바로 니체의 단언처럼 스스로에 대하여 내면화 된다.
“아, 난 왜 이러지?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난 왜 이렇게 끈기가 없지, 그래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야.”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구조적 문제이다. 현대 세계를 살면서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도덕주의적 담론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경제학적 분석은 부채인간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 새롭게 포괄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경제적 인간의 생산과 실존적 인간의 생산은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가 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달리 말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위해 고안된 비판적 인간학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 연금 신청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복지 기관의 ‘상담’을 받고 나온 신청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내게 주요 관심사나 일생에 하고 싶은 일 혹은 예전에 하던 일을 왜 선택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질문으로 답했죠. “그럼, 당신은 왜 이 복지 기관에서 일을 하기로 선택했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이 너무 지나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야만 할 의무는 전혀 없는 거죠. […] 그녀가 계속 그런 질문을 고집하는 건, 나에 대해 그녀가 갖는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그녀가 나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보기에 나는 아직 나의 직업, 내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고, 그저 내가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겁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나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나를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능력 평가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더하여, 내밀함에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나는 심도 있는 능력 평가를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는 고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관습대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역겨운 용어들을 쏟아 내면서 당신에게 당신의 삶에 대한 심사숙고를 강요한다.”

“수당 수령자는 ‘개별 조사’에서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혹은 지어내고), 그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수당 수령자가 사생활 침해와 개인과 주체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려고 해도, 기관이 강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에 의해 그는 이 폭력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생각과 삶을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 도덕화하고, 당신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복지기관과 국가는 당신의 공적 생활은 물론 사생활을 통제하며, 이러한 통제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곳, 곧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이른다.

“더 나아가, ‘신청자의 사생활 염탐’은 복지 기관의 종사자들에 의해 점점 더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내심으로는 가난한 자, 실업자, 임시직 종사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을 ‘사기꾼’ 혹은 ‘모리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 기관은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당 수령자들의 품행을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개인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복지 기관은 수령자의 집에 들어가 생활 방식을 조사하고 질문할 권리를 갖는다. 수당 수령자의 방을 살펴보고 화장실을 들여다보며 칫솔이 몇 개나 있는지 확인한다. 또 전기세와 전화세, 집세 영수증을 요구하고,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특히 그가 혼자 살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그가 어떤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이 배우자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하는 존재로 가정되기 때문에, 복지 수당은 중단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학습의 과정을 거쳐, 당신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는’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당신의 마음, 품행, 일상을 통제한다.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사생활, 취미, 습관, 생각, 품행, 태도, 자세, 가치관, 세계관을 새롭게 빚어낸다. 당신은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일은 당신은 그러한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진짜 자기’인 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주체로서 조립ㆍ제조ㆍ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잃고 그저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의해 조건화 된 채로 느끼고 생각하는 자동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라짜라또는 이렇게 말한다.

“부채의 활동 범위는 단순히 금융과 화폐 정책을 세심히 조작하고 막대한 양의 돈을 굴리는 일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용자의 실존을 생산ㆍ통제하는 기술을 형성ㆍ배치하는 것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경제는 결코 주체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가 당신 앞에 제시하는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게임, 다른 삶을 살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라짜라또에 의하면 계급투쟁이다. 더하여, 이는 또한 당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위한 투쟁이다.

가장 효과적인 지점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려면 부채에 대한 이 죄책감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 죄책감은 신에 대한 부채가 아닌, 지상의 부채, 우리의 지갑을 짓누르고, 우리의 주체성을 조정하며 포맷하는 부채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하거나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이런 일들이 매우 유용할 때조차도 - 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다. 우리는 부채에 대해 우리를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우리를 잃었다. 모든 정당화는 이미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 2차적 순수를 정복하고, 모든 죄책감과 의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혜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투쟁의 문제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타리의 말을 인용하여, 당신이고 나인, 그리하여 우리 모두인, 대한민국의 모든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 곧 그들의 단어로는 ‘열등생들’에게 건네는 이런 한 마디 말을 상상해본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같은 열등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강요되는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당신이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

2012년 9월 13일,

옮긴이들을 대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