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8.

aletheia - pythagoras, platon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피타고라스 교설의 핵심은 인간 혼의 불멸성과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의 육신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육화(肉化ㆍ化身, incarnation)을 통한 혼의 진행에 관한 믿음이었다. 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동물의 살을 먹는 것에 대한 금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먹는 짐승이나 새 안에 어쩌면 나의 할머니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혼의 윤회가 가능하고 흔히 있는 일이라면, 모든 생물이 동족이며, 이와 같은 자연의 동족관계는 피타고라스학파의 또 하나의 교설을 이룬다. 이 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확대되는데 그 이유는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생물의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로 전체로서의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이오니아학파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도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시메네스에게는 낯선 것, 곧 합리적 근원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신비적인 종교적 근원에서 유래한 함축적 의미를 알았다. 그들은 우주는 무한량의 공기 혹은 숨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것이 전체에 스며들어가 생명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개개의 살아있는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된 이러한 통속적인 믿음의 잔재에서 이제 하나의 종교적 교훈이 이끌어내어진다. 사람의 숨 혹은 생명은 무한하고 신적인 우주의 숨 혹은 생명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우주는 하나이며 신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럿이며 각기 다르고 또 사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 곧 혼은 사멸하지 않는 것이고, 그 불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혼은 신적인 혼이 잘려나가 사멸하는 육신 안에 갇힌 것으로, 신적인 혼의 파편 혹은 불꽃이다.
 
 
사람은 이리하여 하나의 삶의 목표, 곧 육신의 더러움을 털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이 되어 자신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보편적[우주적 universal] 정신과 다시 결합하는 목표를 갖는다. 혼이 스스로를 완전히 정화할 수 있기 전까지는, 혼은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감으로써 계속해서 일련의 윤회를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해진 출생의 순환이 완결되지 않는 한, 개체성이 유지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가 신적인 것과의 재결합[合一]에 의한 자신의 적멸(寂滅)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믿음을 피타고라스학파는 다른 신비주의 종파와 나누어 갖고 있었는데, 특히 신화적인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름으로 가르친 사람들과 그러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은 정화 및 신적인 것과의 결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부분이다. 그때까지 순결은 종교적 의식에 의해 그리고 시체들을 피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금기들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에 의해 추구되어 왔다. 피타고라스 역시 이러한 금기의 많은 부분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만의 방식, 곧 철학자의 방식을 더하였다.
 
 
피타고라스 교설의 첫째 원리라 할 수 있을 자연의 동족관계설은 고대 신앙의 잔재이며, 마법적인 ‘함께 느낌’의 관념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째 원리는 합리적이고 전형적으로 희랍적인 것이다. 연구의 진정한 대상으로서의 형상 혹은 구조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강조,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도 혹은 한정(限度, 限定, peras, limit) 관념의 강조가 그것이다. 만약 희랍인들의 독특한 점이 ‘(환상적이고 모호하며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지적이며 확정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에 대한 그들의 선호라면, 피타고라스야말로 헬라스 정신의 가장 앞 선 주창자였다. 확신에 찬 도덕적 이원론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계열을 제시했다. 좋은 것에는 빛, 단일성, 남성, 한정 혹은 한도가 온다. 나쁜 것에는 어둠, 다수성, 여성, 한정되지 않은 것 혹은 한도지어지지 않은 것(無限定者, to apeiron, the unlimited)이 온다.
 
 
피타고라스의 종교는 일종의 범신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세계는 신과 같으며, 따라서 세계는 선하고, 하나의 단일한 전체이다. 만일 세계가 선하고 살아있고 하나의 전체라면, 이는 세계가 한정되어 있으며(peperasmenon, limited), 자신의 상이한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질서(kosmos, order)가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충만하고 유능한 삶은 조직화(organization) 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를 개개의 생물에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이를 유기체(organism)라 일컫는 것은 그것이 각기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정돈하여 전체를 살려가는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그리스어 organon은 연장, 도구의 뜻이다). 세계가 좋은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물론, 하나의 단일한 전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가 정해진 한계 혹은 한도를 가지며 따라서 그렇게 조직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세계 현상의 규칙성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낮과 밤이 그리고 계절들이 제 때에 맞추어 변함없이 질서 속에서 이어진다. 선회하는 별들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영원하고 완전히 원형인 운동을 보인다. 요컨대, 세계는 하나의 코스모스(kosmos)라 불릴 수 있는 것인데, 이 단어는 질서, 적절함, 아름다움의 관념들이 결합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피타고라스는 세계를 이러한 이름으로 부른 첫 번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천성이 철학자여서 만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와 동족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우주와 동일하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옛날의 종교적 규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주의 방식을 연구하고 우주가 어떤 것이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을 우주가 드러내주는 원리에 한층 더 가깝게 부합시켜 이끌어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물론, 우리를 우주에 한층 더 근접시켜 줄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코스모스 혹은 질서 정연한 전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하나의 작은 코스모스이다. 우리는 대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재현하는 작은 유기체이다. 그리고 이들을 관통하는 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형상과 질료의 요소를 발전시키고 조장한다. 코스모스(kosmos)를 연구하는 학자는 자신의 혼 역시 코스모스적인(kosmios) 것이 된다. [...] 피타고라스 자신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數, numbers)였다(54-58쪽)
 
 
* 비율(比率, proportion).
  
 
 
 
 
 
 
테트락티스(tetraktys)
 
 
 
 
 
 
 
 
 
 
 
 
 
 
 
 
 
* 탈레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3. 헤로도토스(DK14A1)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들이다. 즉 사람의 혼은 불사적이며 몸이 소멸할 때면 그때마다 태어나는 다른 동물 속으로 들어가고, 육지나 바다에서 살거나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거쳐 윤회하고 나면, 태어나는 사람의 몸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혼의 윤회(periēlysis)가 3,000년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한다. 헬라스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앞서서, 어떤 이들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이용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만 기록하지 않는다.(『역사』 II. 123)
 
* 프리맨은 헤로도토스가 혼의 전이설을 이집트인들의 설로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이집트의 종말론에서 이 지상의 삶은 또 다른 세상에서의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위한 짧은 준비 기간이며, 되돌아옴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66, 78쪽). KRS도 혼의 옮겨감(metempsychōsis)이란 것은 이집트의 기록이나 작품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지적한다(KRS 220쪽).
 
 
 
24. 포르퓌리오스(DK14A8a)
 
 
[...] 그[피타고라스]는 말하기를, 우선 혼은 죽지 않는다고, 그 다음으로 혼은 다른 동물들로 옮겨간다고, 게다가 일어났던 일들은 어떤 주기에 따라 언젠가 다시 일어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혼을 지니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동족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실로 피타고라스가 이런 교의(dogma)들을 처음으로 헬라스에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의 생애』 19)
 
 
2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21B7)
 
 
그[크세노파네스]가 그[피타고라스]에 대해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그는, 개가 심하게 맞고 있을 때, 곁을 지나가다가 불쌍히 여겨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멈추어라. 매질하지 마라. [나의] 친구인 사람의 혼이니까.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혼을 알아보았다’라고 말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VIII. 36)
 
 
(176-179쪽)
 
 
 
 
 
***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플라톤
 
 
그래서 완전하고 영구적인 본(本)의 존재가 가정되면 그리고 또 일단 그것이 가정되었으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상들에 우리가 어떤 실재성을 귀속시키든 그 실재성은 초월적인 형상(形相, εἶδος, eidos, form; from εἴδω, eidō, 'I see')들의 실재성에 제한된 정도에 있어서 그것들이 관여하는 덕택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저 영원한 형상들을 알게 되었기에, 이를테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는 생물들이 어떤 형상들에 속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또 어떤 실행된 행위가 좋음(善)이나 아름다움에 관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또 언급할 수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가르침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측면을 발전시키고 확실히 했다. 나는 앞서 확대와 옹호가 필요한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옹호는 ‘자신의 (魂, Ψυχή, psychē, soul or breath of life)을 보살피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플라톤이 땅에 얽매인 인간의 마음과 초월적 이데아들의 세계 사이의 다리를 보게 된 것은 혼의 본성에 관한 종교 개혁가들의 이론에 있어서였다. 보통의 희랍인의 믿음에 있어서는 앞서 내가 말했듯이 육신이 소멸하게 되면 이제 정처가 없어진 단지 망령에 불과한 혼은 - 호메로스가 표현했듯이 ‘연기처럼’ - 슬며시 빠져나와 마음도 힘도 없는 창백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는데, 마음과 힘은 혼이 신체적 기관들에 부여된 결과로서 또 같이 혼에 주어진 것이었다. 강풍이 불 때 죽는 것이 아마도 특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던 날에 장난스럽게 친구들의 그러한 믿음을 나무란 바 있다.) 그들이 그렇게 믿게 된 것은 강풍이 혼을 잡아채서는 이 지상의 사방으로 흐트러뜨리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와 믿음의 상황에 있어서는 이 육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며 육신을 희생하고서라도 보살펴야만 되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단언에 대해 친구들이 이를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스승의 확신을 지지하여, 혼은 본질에 있어서 영원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지 일시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피타고라스 교설의 진리를 재차 확인했다. 혼은 지상에서의 여러 차례에 걸친 삶을 살았고 그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그리고 삶과 삶 사이에 육신을 떠나있는 동안 초월적인 실재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었다. 육체적인 죽음은 혼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삶의 회복이다. 육신은 감옥과 무덤에 비유되고, 혼은 이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친히 지내던 이데아(ἰδέα, idéa, notion or pattern)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이 육체로부터 풀려나오길 원한다. 이데아설은 혼은 불멸성에 대한 믿음 - 또는 적어도 혼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믿음 -과 존립여부를 같이 한다. 이데아설은 배움, 이승에서의 지식획득을 상기(想起, ἀνάμνησις, anamnesis, reminiscence)의 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지각하는 사물들이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보편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처음으로 우리 안에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참된 실재들에 대한 직관을 이미 했기 때문에 이 지상에 있어서의 이들 실재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영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과거에 이미 알았으나 혼이 육신의 물질적인 불순물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해 버렸던 것을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설의 기본적인 가정은 불완전한 것이 제 혼자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것의 인식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물도 둘이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같은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같다’는 말의 참된 의미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의 정신 혹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지팡이나 우리가 긋게 되는 선에 대한 검토 혹은 비교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접근 역시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성(이성, nous)이 한때 가졌었고 따라서 지금은 지성 속에 잠재해 있는 완전한 지식을 되찾는 일에 오직 지성만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의 감각의 역할이다. 그것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은 모든 지식은 사실상 상기의 결과이므로 철학자가 일단 감각적 지각에 의해 출발하게 된다면, 그는 혼을 [플라톤의 경우에는 지성을] 자유롭게 혼으로 하여금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형상들에 대한 앎을 다시 갖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육신은 무시하게 될 것이고 또 육신의 욕망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철학은 ‘죽음 위한 준비’인데, 이는 철학이 하는 일이 혼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치 못하는 구조의 한계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저주로부터 풀려나 이데아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도록 적응시켜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혼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인식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의 궁극적 설명으로서 『파이돈』 전체에 퍼져 있는데, 이 책에서 이러한 견해는 물론 문답 형식으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끝부분에서는 신화라는 상징적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다른 대화편 『메논』에서도 상기설을 논리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경우에 상기설이 내포하고 있는 종교와 철학의 결합은 소크라테스가 이 대화편에서 처음에 철학을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남녀 사제(司祭)들’이 주장하는 교리로서 언급할 때 시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플라톤 철학의 이 측면은 퍽 많은 대화편에 있어서 대미를 장식하곤 하는 일종의 관례적 장치로서의 대신화(大神話)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대의 신화는 『국가ㆍ정체(政體)』 말미의 에르(Er) 신화이다. 이곳에는 혼의 전체 역사, 곧 혼의 육신으로의 연속적 환생이 혼이 지상에서 사는 삶과 삶 사이에 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며 또 혼이 마침내 정화(淨化, κάθαρσις, katharsis, catharsis, purification or cleansing)되었을 때, 어떻게 혼이 윤회(輪廻, reincarnation)에서 벗어나게 되는지가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 본 진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 신화에서 혼이 막 육신으로 재탄생할 즈음에 어쩔 수 없이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의 강물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로 설명되고 있다. 혼은 불볕더위의 물도 없는 들판을 방금 건너야만 했던 터라 물을 마시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 때 혼은 유혹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나타내 보이는 힘에 의해 [이승에 있어서] 자신이 수행한 철학의 정진(精進) 정도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혼이건 - 육신에서 벗어나 진리와의 영원한 교섭 속에 있게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한 - 모두가 적어도 조금씩은 망각의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 망각의 주제는 희랍에 있어서의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즉 신화와 종교 의식에 있어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플라톤이 전설의 자료를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아마도 육신이라는 장애물에 의한 오염의 실제적 영향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었을 것이다(126-130쪽).
 
 
 

2014. 2. 27.

부르디외, 구별짓기 distinction - chansons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592043





Pierre Bourdieu, 1930 –2002
 
la sociologie est un sport de combat, 2002
 


 

* 계급 및 사회 직업 범주
계급
계급 분파들
사회-직업 범주들
상층계급
또는
지배계급
지배분파
1. 구 부르주아
2. 신흥 부르주아
상공업 경영자, 자유업,
상급관리직(공기업, 관청 관리직, 사기업 관리직)
피지배 분파
교수(고등교육), 교사(중등교육), 상급 기술직,
예술 제작자
중간계급
신흥 프티 부르주아
공예 장인,
의료보건 서비스직 종사자, 문화서비스업, 비서
상승 프티 부르주아
일반 관리직(판매, 사무)
사무 노동자(사무원, 상점원)
일반 기술직
초등학교 교사
구 프티 부르주아
장인, 소상인, 중소기업 경영자
민중계급
생산 노동자
소 농업경영자
숙련공, 단순기능공, 단순노무자, 직공장, 자영농
소 봉급생활자
파출부, 농업노동자
*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상)>(새물결), 15쪽.

조르주
게타리
페튤라
클라크
조르주
브라상스
레오
페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칼의
피아노 평균율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민중
계급
33.0
31.0
38.0
20.0
65.0
28.0
1.0
0
중간
계급
23.0
29.0
41.0
21.0
64.0
26.0
1.5
1.5
프티 부르주아
12.0
21.0
46.5
39.0
31.0
17.5
5.0
4.0
상류
계급
0
3.0
90.0
49.5
11.5
3.0
29.5
12.0
*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상)>(새물결), 43쪽.


 
*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상)>(새물결), 44쪽.
 

    
 

 
 

 
 




* Georges Guétary, 1915-1997



Les enfants du Pirée  
 
 
La valse des regrets, 1936


 
s' wonderful (with gene kelly) - an american in paris, 1951
 
 
 
 
* petula clark, 1932-
 
 
downtown, 1964
 
 
 
 i know a place, 1965
 
 
 
 
 
this is my song (charlie chaplin, la comtesse de hong kong, 1967)
 
 
 
 
 
 
 * leo ferre 
 
 
 
* georges brassens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칼의 춤 sabre dance 1942
 
 
* rhapsody in blue 1924
george gershwin - richard bernstein
 
 
* j.s. bach - well tempered clavier
glenn gould
 
 
* maurice ravel
piano concerto pour la main gauche
 


2014. 2. 21.

maurice blanchot

 
 
File:MauriceBlanchot.jpg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2003

 


 

 

* 그린비 모리스 블랑쇼 선집, 1-11

1.『죽음의 선고』 2.『문학의 공간』 3.『도래할 책』 4.『기다림 망각』 5.『무한한 대화』 6.『우정』 7.『저 너머로의 발걸음』 8.『카오스의 글쓰기』 9.『정치평론 1953-1993』 10. 『하느님』 11.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 모리스 블랑쇼, 「목가」, 민희식 옮김, 『문학사상』, 1980년 5월호.

* 모리스 블랑쇼, 「자라나는 죽음」, 민희식 옮김, 『한국문학』, 1980년 11월호.

* 바타유ㆍ블랑쇼ㆍ베케트, 『C. 신부/죽음의 선고/말론은 죽다』, 안태용 옮김, 금성출판사, 1983

* 모리스 블랑쇼, 『아미나다브』, 하동훈 옮김, 범한 출판사, 1984.

* 모리스 블랑쇼, 「내가 상상한 미셸 푸코」, 김현 옮김, 󰡔외국문학󰡕, 제25호, 열음사, 1990년 겨울호.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 모리스 블랑쇼,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최윤정 옮김, 『작가세계』, 1990년 가을호.

*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3.

* 모리스 블랑쇼, 「내 죽음의 순간」, 우종녀 옮김, 『현대비평과 이론』 14호, 1997년 가을/겨울호.

* 모리스 블랑쇼ㆍ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 미셸 푸코, 심재상 옮김, 「바깥의 사유」, 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文學과知性社, 1989.

* 에마누엘 레비나스,『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박규현 옮김, 동문선, 2003.

* 박준상, 「블랑쇼의 문학론」,『프랑스철학과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2008.

* 울리히 하세ㆍ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최영석 옮김, 앨피, 2008.

* 김성하,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처음 읽는 프랑스현대철학』, 동녘, 2013.

 

 

‘언어와 존재의 일치’ -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주부/술부 - 주어/술어 - 주체/속성 - 명사/동사ㆍ형용사

 

 

현전(現前, présence)/재현ㆍ표상(再現ㆍ表象, représentation, 언어ㆍ기호의 정보전달 기능)

 



1) 헤겔 - 언어와 존재의 일치. ‘언어만이 존재를 결정할 수 있다.’
2) 블랑쇼 - 언어와 존재의 불일치. ‘바깥은 언어의 한계이다.’(218-219)


 


밤, 또 다른 밤(l'autre nuit): 헤겔적인 밤, 곧 낮(le jour)의 결여 혹은 낮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적 단계로서의 밤이 아니다. 망각, 단절, 중성, 의식을 가진 자로 정의되는 ‘나’의 포기, 역동적인 중성의 무(無, le rien)는 무아(無我, le moi sans moi). 탈주체화, 타자화. 죽음의 사건.

 

 

비개인 - 비인칭(l'impersonnel) - 익명성(l'anonymat/anonymité)

 

 

중성적인 것(le neutre) - 중성화/무력화(la neutralisation): 역동적 중성 운동

 

 

실존(實存, existence, 어느 누구도 아닌 여기-지금의 ‘나’, 現存在, Dasein) - 탈존(脫存, ex-sistence, ‘나’ 바깥과 관계맺음의 사건) - 외존(外存, ex-position, 자신 바깥ㆍ외부에서 존재함, 즉 하나의 탈존 형태, 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

 

 

* 박준상,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인간사랑, 2006.

 

 

- “독서는 알지 못한다. [...] 독서는 받아들이며 듣는 것이지, 판독하고 분석하는 힘이 아니며, 발전하여 나아가거나 폭로하여 되돌아가는 힘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서는 이해가 아니다. 그저 따라간다. 이 놀라운 무지(無知).”(『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52; IC, 320)

 

 

- 페르디낭 드 소쉬르, “그 자체에 놓여 있는 사유란 아무 것도 필연적으로 규정된 것이 없는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미리 정해진 관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어의 출현 이전에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다.”(137)

 

 

- 프리드리히 니체, “이제 우리는 사물들 안에서 부조화와 문젯거리를 읽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 형식 내에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 그에 따라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주어ㆍ술어 등). 만일 우리가 언어의 구속(sprachlichen Zwange) 내에서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러한 한계를 한계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에 정확히 도달하였다.”(137-138)

 

 

- 모리스 메를로-퐁티, “단어는 대상들과 의미들을 나타내는 단순한 기호이기는커녕 사물들에 거주하고 의미들을 운반한다. 따라서 말하는 자에게 말은 이미 형성된 사유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138)

 

 

- 스테판 말라르메, “사물을 그리지 말고 사물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그릴 것. / 거기서 시는 단어들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지향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말들은 감각(sensation) 앞에서 지워져야만 하네.”(169)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겔, “언어는 매순간 죽음을 가져온다. 이러한 생각은 [...] 단어(개념)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 이루어지는 - 이해라는 것이 하나의 살해와 같다는 헤겔의 생각에 연결된다. [...] 여기서 살해는 우리가 단어, 언어를 사용해 한 존재자existant를 규정(재현, 표상)하면서 그 생생한 살아 있는 현전(現前)을 파괴하는 행위, [...] - 그 존재자를 일반적 표상으로 전환시켜 직접적ㆍ일회적으로 주어졌던 그 현전을 부재로 돌리는 - 행위이다. 언어를 바탕으로 주어졌던 현전을 부재로 돌리는 것은, 즉 언어를 통해 한 존재자를 규정(동일화)해서 파악한다는 것은 그 존재자에게서 그것이 생생하게 주어졌던 시간과 공간을 탈취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해는 살해이다.”(206-207)

 

 

- 알렉상드르 코제브, “‘이 개’(le chien)라는 단어는 발설되자마자 그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바로 이 개(눈 앞에서 짖고 있는 이 하연 개 또는 검은 개)를 그 존재의 지주인 여기 지금으로부터 떼어놓고 즉시 ‘하나의 어떤 개’, ‘일반적인 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동일화ㆍ일반화시킨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다.”(207)

 

 

* 지워지는 글쓰기, 침묵의 글쓰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아가 ‘우리’ 자신인 사건(‘내’가 공간으로 열리는 탈존, 그리고 타인으로 열리는 외존) 자체가 침묵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지 않은가?”(14)

 

 

외존, “이 말은 자신 바깥에 놓임, 자신 바깥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 즉 탈존의 한 양태를 표현한다. 즉 이 말은 탈존과 동근원적이며, 둘 모두는 어원상 인간존재의 근본 조건인 ‘나’ 바깥ex에 놓임sistere을, 즉 나 바깥과의 관계 하에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탈존이라는 의미에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타인이라는 바깥과의 관계에서의 인간 존재 양태를 가리킨다. 즉 외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 바깥으로 나감, 타인을 위해 자신을 드러냄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15)

 

 

“그[블랑쇼]가 말하는 휴머니즘은 자기결정력, 즉 자아ㆍ주체 바깥의 인간의 영역을 가리키는 단수성(單數性, singularité)에 대한 탐색이다. 여기서 단수성은 어떤 인간의 본질을 가정하지 않는 탈존(실존), 즉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형태로 현전하는, 따라서 즉각 사라지는 부재”로 돌아가고 있기에 시간적(순간적) 현재에 기입된 탈존의 양태이다. [...] 그 현전은 동일화하는 의식에 떠오르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며, ‘나’와 타자의 만남의 기표signifiant로써 관계(사이 관계, 관계 사이)를 알리는 표시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써, 함께 있음être-avec의 기표로서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념의 바깥에서(따라서 그것은 본질이 배제된 현전이다), 함께 있음의 장소로서, ‘나’와 타자가 서로 접근하는 장소로서 현시(現示, présentation)된다(表象représentation과는 다른 현시). 그 현전은 인간의 이념을 전해주고 의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되찾을 수 있는 표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 너머 또는 의식 이하에서 직접 주어진 감각적 현시로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의 열림을 알려주며 타인과의 관계와 함께-있음이 ‘나’의 실존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기표이다. / 그 현전, 본질 없는 현전, 인간의 현전(또는 타자의 현전)을 블랑쇼는 ‘그 le Il’ 또는 ‘그 누구 le On’라고 부른다(‘그’와 ‘그 누구’는 블랑쇼에게서 동의어이다. “이 누군가는 형성 없는 그, 우리가 일부분을 이루어 소속되어 있는 그 누구이다. 그러나 누가 그 누구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가?”) ‘그’ 또는 ‘그 누구’는 함께-있음과 소통의 장소를, ‘나’와 타자가 관계 가운데 놓이지만 양자 중 하나에 귀속되지 않는 ‘우리’의 장소를 만든다.”(27-28)

 

 

“그에게서 ‘작품’ 자체, 언어 자체, 또는 ‘글쓰기’는 어떤 움직임, [...]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은 문자로 씌어진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을 넘어서 ‘책 바깥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co-constitution de l'œuvre을 통해 전개된다.”(29)

 

 

“왜 바깥(le dehors)에서 문학이 유래하며 문학은 궁극적으로 바깥을 향해 나아가는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바깥은 글 읽는 자와 글 쓰는 자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인가, 왜 바깥으로 향해 있는 작품은 바깥을 위해 결국 사라져 가는가? [...] 그러한 물음들이 주어질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바깥이 문학 이전 그리고 문학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문학 이전에, 문학 바깥에서, 문학 너머에서 문제가 된다. “문학을 문학 자체 내에서 긍정하고자 하는 사람 자는 아무 것도 긍정하지 못하게 된다. 문학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사람은 문학을 벗어나 있는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가를 찾은 사람은 문학 이하의 것만을, 또는 더 나쁘게 문학 그 너머의 것만을 찾은 것이다.”(33-34)

 

 

“바깥은 문학의 모든 언어와 문학 작품 이전에 군림하는 완전한 바깥(pur Dehors)이다. 완전한 바깥은 이 현실의 세계로, 그리고 보다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또 다른 세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추방당해 있는 공간이다. 바깥의 경험은 “삶으로부터 추방되어, 경계선 바깥으로 내몰려, 추방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 채” 존재하는 경험이다. 블랑쇼에게 바깥의 체험을 겪는 자의 대표적인 예는 카프카이며, 카프카에게 “예술은 다만 이전의 치명적인 숙명에 대한 해석ㆍ왜곡ㆍ심화에 지나지 않는다.”(34)

 

 

“바깥의 경험은 불행의 경험, 어떤 불행이(그것이 육체적이든 사회적이든) 현상의 수준에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다시 번역되는 데에서 오는 경험이다. 즉 그것은 어떤 육체적ㆍ사회적 고통(블랑쇼의 소설화된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가령 ‘나’의 죽음으로의 접근ㆍ타인의 죽음의 체험ㆍ병의 체험ㆍ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추방이 가져오는 고통)이 존재(세계에서 존재함)의 불가능성의 자각에 따르는 고통으로 덧나는 체험이다. 그것은 세계와의 관계, 즉 유의미성에 의해, 의미의 친숙함에 의해 보장되는 관계의 결렬을 가져온다. 그 결렬은 어떤 고통과 함께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결렬은 또 다른 결렬, 자아와 자신 사이의 결렬, 즉 자아(le moi)의 파기를 야기한다.”(35-36)

 

 

“세계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의 동근원성(同根源性), 그것을 블랑쇼는 다시 카프카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이 일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데, 적어도 카프카에게서만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술이 카프카가 그러한 것처럼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예술은 내밀성도 없고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 이 바깥의 깊이를, 우리가 신과조차, 우리의 죽음과조차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의 관계도 맺지 못할 대, 솟아나는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러한 불행’에 대한 의식이다. 예술은 스스로를 상실한 자, ‘나’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자, 같은 움직임에 의해 진리를 상실한 자, 추방에 처해진 자[...]의 상황을 묘사한다.” 바깥의 경험은 이해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현상, 존재에 이르지 못하며 단순한 비존재-완전한 무(無)-도 아닌 현상과 관계한다.”(36-37)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le Neutre)에 대한 경험이다. 중성적인 것은 [...] 나타난 대로의 현상과 거기서 도려내어 얻을 수 있는 인식 사이의 공백(차이, 하지만 무해한 차이가 아니라 언제나 고통을, 추방의 고통을 수반하는 차이)에 기입된다. 중성적인 것은 인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동일자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인식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중성적인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그것이] 항상 미결정적인 것(l'indéterminé)이라는 의미에서이다. [...] 바깥의 경험은 어떤 진정한 실존의 발견하기 위해 거쳐 가야만 하는 어떤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우리가 의지로 도달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바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나아가 우리가 거기에 함몰되는 것이다. 바깥의 경험은 말하자면 수동성의 경험이다. [...] 그[블랑쇼]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깥이 항상 의지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깥이 중성적인 것으로 부과된다는 것, 그것은 현상의 주어짐의 근원적 무차별성을, 현상은 원칙적으로 현상에 대한 동일화(현상을 동일자로 환원시킴, 간단히 말해 존재에 대한 결정)를 초과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깥은 존재에 대한 결정에 앞선다. 따라서 세계가 오직 존재에 대한 - 현실적(도구적) 수준에서 또는 이상적(정신적) 수준에서의 - 결정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다면, 바깥은 세계의 ‘근원’이다.”(37-38)

 

 

“바깥의 경험에서 어떤 인간 공동의 영역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존적 조건으로의 함께-있음이 발견된다. [...] 바깥의 경험 내에서의 함께-있음, 그것을 소통의 어떤 급진적 양태와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성찰은 부각시키고 있다. 그 성찰은 바깥이 인간들 사이의 한께-있음이 이루어지는 소통이 장소라는 것을 말한다.”(39)

 

 

밤, 또 다른 밤의 경험. “또 다른 밤의 경험에서, 즉 바깥의 경험에서 [...] 비롯되는 나의 부재는 자아가 완전히 영사막으로 변형되는(devenir-écran absolu du moi ) 데에, 다시 말해 자아가 그 자신과 연결되는 능동적 의식이 차단되는 데에, 절대적 수동성 내에 침몰당하는 데에 있다. 자아가 완전히 영사막으로 변형됨, 그것은 세계가 의미가 부재하는 모상ㆍ빈 껍데기ㆍ시뮬라크르로 변형되는 사건에 따라 나오는 경험이다. 세계가 시뮬라크르로 변환되는 사건, 즉 세계가 완전히 어둠으로 묻히는 사건,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이 바로 바깥의 경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의 경험, 의미가 부재하는 이미지의 경험, 의미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세계 내의 사물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열린다는 - 탈존한다는 -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54-55)

 

 

“내가 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억압당하는 [...] 불행한 관계에서 나는 그에게 변증법적이자 비변증법적인 항의contestation로 단호히 저항해야만 한다. 블랑쇼는 다시 이렇게 쓴다. “그에 따라서 당연히 타인의 살기 돋친 의지가 나를 그의 게임에로 이끌며 나를 그의 공모자로 만드는데, 바로 이 때문에 항상 두 종류의 언어가, 두 종류의 요구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는 변증법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변증법적이다. 하나, 거기서는 부정성(la négativité)이 과제가 되며, 또 다른 하나, 거기서는 중성적인 것(le neutre)이 존재와 비존재 위로 솟아오른다.””(109)

 

 

“변증법적-비변증법적 항의를 블랑쇼는 ‘거부refus’라는 말로 대신한다. 변증법적-비변증법적 항의 또는 거부는 어떤 평등과 소통의 요구를 표현한 말이 된다. 힘 있는 말인 동시에 무력한 말. [...] 그 말은 자아의 말인 동시에 또한 세계를 상실한, 자아를 박탈당한 자의 말, 다만 중얼거리기만(murmurer) 하는 어느 누군가(quelqu'un)의 말이다. 거부는 따라서 어떤 법의 비호 아래 아직 모일 수 없는 자들의 말,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공통의 독트린ㆍ조직ㆍ기관을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 아직 말하지 못하는,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113)

 

 

“블랑쇼가 말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공동체는 어떤 가시적 공동체, 어떤 조직과 기관에 기초한 뭐라고 명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없는 공동체(communauté sans communauté), 이름 없는 공동체 또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communauté inavouable)이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자들은 나와 어떤 이념, 어떤 기준, 어떤 목표를 공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 공동체는 어떤 전체성 하에 나의 복수형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어떤 사회적ㆍ국가적ㆍ정치적ㆍ이념적 집합체-그것이 제도에 따라 정착된 것이든 아니든-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모든 정치적 이념과 모든 현실적인 정치적 계기들(모든 정체(政體)의 구성과 그 당위성, 정치권력의 구성과 해체, 정치적 저항세력의 조직과 그 당[위]성)에 대해 전-근원적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현실) 정치와 결부된 의식 수준에서의 문제들(이념ㆍ법ㆍ도덕)에 대해 중성적이며(즉 그것은 이러한 이념ㆍ법ㆍ도덕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정치 너머의, 그 이하의 인간들 사이의 급진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의 현전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15-116)

 

 

“이중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고독’과 관계없지 않은 그 분리로부터, 나와 타인이 서로를 부르고, ‘우리’라는 함께-있음의 양태에 기입되면서 양자는 자아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함께-있음 가운데, 나와 타인은 제3의 인물troisième personne이라는 공동의 지위에 속한다. 그 공동의 지위를 지정하는, 타자의 현전과 마주하는 비인칭적ㆍ익명적 탈존을 블랑쇼는 ‘그le Il’(또는 ‘그 누구le On’)라고 부른다. ‘그’는 나도, 타인도, 제3자도 아니며, 그 모두의 타자, 그 모두에게 제3의 인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Autre를 제시한다. “타자Autre, 즉 그le Il, 그러나 제3의 인물이 어떤 [구체적인] 제3의 인물이 아니고 중성적인 것을 발효시키고 있는 한에서.” ‘그’는 탈존의 공유가 이루어지는 관계 내에서의 사건을, ‘우리’ 또는 ‘공동-내의-존재’로 열리는 사건을 의미한다.”(119)

 

 

“바깥의 경험은 결국 자아 바깥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예를 들어 병ㆍ고독의 경험, 사회로부터의 추방의 경험)]에 대한 공유의 경험이다. [...] 자신의 존재를 의식으로, 사유로, 언어로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는가? 상징체계로서의 언어를 바탕으로 의식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가 문화[文化, 社會, 人爲?]의 세계라면, 바깥은 또한 문화의 세계 바깥이며 바깥의 경험은 문화 바깥의 경험이다. 그렇다고 바깥의 경험은 있을 수 없는 순백의 자연(그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고 그곳으로의 회귀를 꿈꿀 수도 없다)에 대한 경험이 아니며, 문화(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사이의 균열ㆍ틈ㆍ단절에 들어가는,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128-129)

 

 

“제3의 인물, 즉 나와 타인 모두에게 공동의 타자는 우리가 본 대로 ‘그’(또는 ‘그 누구’)이다. [...] ‘그’는 특정 인물과 일치될 수 없지만 어느 누구라도-아무나-기입될 수 있는 비인칭적 탈존, 동사적 탈존 또는 탈존의 비인칭성, 탈존의 동사성을 가리킨다. 작품이 씌어지고 읽히고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는 데에 따라 글쓰는 자의 모든 서술 행위가 하나의 궁극적 관점에서 조망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글쓰기 가운데, 즉 비인칭적 언어의 움직임 가운데 놓여 있다. [...] 여기서 글쓰기는 작품을 향해 나아가며, 작품은 의미를 거쳐, 그리고 의미를 넘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이에서 말함’(entre-dire)의 형태를 갖는다.”(135-136)

 

 

“하나의 단어는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말하거나 쓸 때마다 죽음을 가져온다 - 즉 그것이 가리키는 존재자의 사라짐을 알리고 확인한다. [...] 인간은 단어들의 도움으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존재자들을 살해해 의식의 고정된 의미들로 바꾸고, 그에 따라 의식에 기반한 존재, 자유롭지만 고독한 의식적 존재가 된다. [...] 존재자들을 살해한, 존재자들에 죽음을 부과한 인간에게 이제 그 죽음을 견지하고 지탱하는 것, 즉 비현실성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언어는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 온다.” [...] 그 과정은 여기 지금 주어졌던 생생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의식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죽은 껍데기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언어로 인해 인간이 비현실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은, 언어가 단순히 허위 또는 거짓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구체적ㆍ개별적 존재자가 주어지는 시간과 추상적ㆍ일반적 사물(언어가 구성하는 사물)이 주어지는 시간 사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즉 시간의 시간성을 전개시키고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언어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시간의 지나감을 통고한다, 언어는 지나간 시간, 사라진 시간을 기억으로, 죽은 껍데기로 보조하는 무덤이다. 또한 언어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그 자신의 최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이다. 언어가 없엇다면 우리에게는 기억이 없었을 것이고 시간의 시간성(시간의 지나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끝, 우리의 최후의 죽음(종말)을 에상할 수 없었으리라. 간단히 말해 죽음을 몰랐으리라.”(207-211)

 

 

“인간은 언어의 도움으로만 존재에, 의식의 일반적 존재에 접근할 수 있다. [...]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이르게 된 존재는 또한 존재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안에 비현실성을 담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 존재는 언어로 포착되는 한 유한성 내에서만 구성되며 언제나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을 언어에 매어 있는 존재로 보았을 때, 존재의 유한성은 인간의 유한성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 의미의 세계는 한계지워진 존재 위에, 즉 존재자들에 대한 살해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존재에 대한 결정(한정)에 따라 형성된다. 의미의 세계는, 인간이 부정의 능력을 가진 자이자 창조자라는 정체성 아래 오성을 부여받은 자로서 고유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부정하는 자이자 창조하는 자라는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견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세계를 주정하고 의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먼저 무 가운데, 언어가 만들어낸 ‘비현실성’ 가운데로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말하면서, 언어에 붙들리게 되면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의 한계를, 부정하는 자이자 창조하는 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떠받치고 잇는 공허를, 즉 자신 내부의 틈ㆍ분열을, 결국 자신의 결정적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내가 지적한 것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말한 자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212-214)

 

 

“문학은, 정확히 말해, 문학 또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문학은 의미의 세계에, 자연의 세계와 구별되는 인간적 현실에, 인간이 담론을 통해 구축한 현실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 현실, 의미의 세계로서의 현실은 또한 비현실로서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 갖는 객관성(문화의 세계에서의 객관성, 퓌시스physis의 객관성이 아닌 노모스nomos의 객관성, 즉 담론이 구축한 의미들ㆍ사상思想들의 객관타당성)은, 헤겔이 정확히 본 것처럼, 영원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역사의 지평에서 주어진다. [...] (존재는 언제나 유한성 위에 놓여 있다). 존재(헤겔에서의 존재, 즉 존재의 의미로서의 존재, 간단히 의미ㆍ개념으로서의 존재)가 시간의 어떤 [유한한] 시점에서 결정된다면, 언제나 그 결정은 시간에 따라, 역사에 따라 수정될 수 있고, 나아가 취소될 수도 있다.”(214-215)

 

  

 

“작가와 독자의 소통과 동시에 생성하는 작품은 책 바깥에서 퍼지는 단어들의 부재의 순간적(시간적) 울림을 자신에게 고유한 공간, 즉 ‘문학의 공간espace littéraire’으로 만든다(단어들이 음악이 됨,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공간화). 그 공간, 즉 책의 바깥은 중성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어들이 사물들을 동일화(재현)하는 구성적 기능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중성적인 것은 ‘이것’ 또는 ‘저것’으로, ‘이것이 아님’ 또는 ‘저것이 아님’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 따라서 비존재로서의 존재이다). 중성적인 말(바깥의 말)은 사물의 부재를 포착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중성적인 말은 연장되어 있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시간으로서 사물의 부재의 현전(작품에서 사물들이 단어의 부재에 부응하면서 부재로 돌아가는 순간에 나타나는 현전)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 사물의 부재 가운데 작품에서 ‘그’(‘그 누구’)가 현시된다. 사물의 부재는, 즉 작품에서 단어의 부재는 단순한 무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현시하며,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작품에서 ‘그’는 언어의 바깥에, 언어에 매개되지 않은 어떤 신비로운 현전이 아니라, 언어적 형태를 통해, 즉 목소리(시선-언어)를 통해 나타난다. [...] 하나의 문학에 대한 긍정(작품에 대한 긍정)은 또 다른 하나의 문학에 대한 궁극적 부정(책에 대한 부정)으로 귀착된다. 문학은 문학 자체를 향해, 즉 사라짐을 향해 가고 있다(“문학은 문학 자체를 향해, 즉 사라짐이라는 문학의 본질을 향해 가고 있다.”)”(282-284)

 

 

“언어가 더 이상 사물들과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의 한계만을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시간과 장소에서조차 또 다른 언어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다. 그 또 다른 언어, 즉 타인과 관계를 여는 언어, 사물들과 세계를 관리ㆍ통제하는 능동적 언어에 앞서는 언어, 능동적 언어의 한계에서조차 타인을 향해 있는 언어가 시(詩)이며,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모든 언어의 밑바닥을 이루는 언어, 모든 언어의 구원으로서의 언어이다. 그 또 다른 언어는 목소리 또는 절규이다. 문학은 그 언어를 현시하고,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침묵의 절규가 들리게 한다. 거기에 모든 종류의 휴머니즘이, 즉 타자와의 소통에 대한 최후의 긍정이 있다. ‘우리’는, ‘그’ 또는 ‘그 누구’는 삶과 죽음의 접경에서, 그러나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죽음의 편에서가 아니라 삶의 편에서 절규한다.”(296)

 

 

* 박준상, 「옮긴이 해설」, 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블랑쇼의 사유는 20세기에 그 극점에 다다랐던 서양의 모든 잠재력과 근대성의 모든 힘이 쇠진되어 가는 장소에서 전개된다. [...] 블랑쇼에게서 [...] 근대성을 뒷받침했던 이념적 지주들(예를 들어, 인간의 주체성, 신, 예술의 자율성과 절대성, 예술가의 천재ㆍ내면성, 공동체의 이념)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 블랑쇼는 근대성의 환상, 한마디로 말해 인간의 힘ㆍ능력의 확신에 대한 환상이 깨져나가는 장소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건조하고 냉정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어떻게 주체의 최고 주권(이성의 사유능력의 최고주권)이 주체의 사라짐으로,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개념적 절대 존재가 존재의 바깥으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한 예술가의 고유성ㆍ절대성이 예술가의 주변성(예술가의 세계로부터의, 또한 작품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어떻게 세계 변혁의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타자의 발견으로 귀결되는가를 말한다.”(92-95)

 

 

“블랑쇼가 강조하는 것은 ‘관계’이지 관계의 한 항인 ‘타자’가 아니다. 즉 그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일방적 비대칭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97)




 

2014. 2. 18.

distinction - classiques


 
 

 
 
*  Johann Strauss II, 1825–1899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Op. 314 [1866]
New Year's Concert 2002, seiji ozaw.
 
 
 
 

 
 
* Aram  Khachaturian, 1903–1978
     Sabre Dance [Gayane, 1942]
 
 
 
 
 

 
*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Das Wohltemperierte Klavier [The Well-Tempered Clavier]
BWV 850, 1722-1742
Davitt Moroney
  



 
+
 

 
* Joseph-Maurice Ravel, 1875–1937
Concerto pour la main gauche, 1929-1931 
pierre boulez + pierre-lauren aimard








슈트라우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하차투리안
칼의 춤
바흐
피아노평균율
라벨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민중계급
65.0
28.0
1.0
0
중간계급
31.0
17.5
5.0
4.0
상류계급
11.5
3.0
29.5
12.0

*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상), 43쪽




 

2014. 2. 14.

lavinia meijer

 
 
 
 
 
"glassworks: opening piece"
philip glass
2012
 
 
 
 
 
 
metamorphosis
philip glass
 
 
 
 
 
 
 
 
 
 
the hours
philip glass
 
 
 
 
 
 
 
 
 
 
the hours
philip glass
o.s.t.
 
 
 
 
 
 
 
 
carlos salzedo
 
selections from variations
on a theme in ancient style
 
 
 
 
 

clara jumi kang

 
 
 
 
 
 
 
 
 
 
the 5th seoul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violin final round
 
april 26, 2009. seoul arts center, korea

clara jumi kang - 1st prize, germany/korea

conductor: eunseong park
orchestra: korean symphony orchestra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ii. larghetto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myung-whun chung, conductor
clara jumi kang, violin

may 24, 2013
seoul arts center
 
 
 
*
 
 
 
 
 
jacques offenbach
les larmes du jacqueline
- mischa maisky
 
 
 
 
 
 
 
jacques offenbach
les larmes du jacqueline
- han na chang 
 
 
 
 
 

2014. 2. 11.

david hume



 
File:David Hume 1754.jpeg

david hume, 1711-1776
http://en.wikipedia.org/wiki/David_Hume

"나의 면학적 기질, 진지함 및 근면함으로 인해 내 가족은 법률가가 내게 적합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철학 및 일반 학문의 탐구말고는 모든 것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되었고, 그들이 내가 보에티우스와 비니우스를 파고 있다고 착각하는 동안 나는 비밀리에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에 탐닉했다."(david hume, the life of david hume. esquire written by himself, 1777; 재인용, <<서양근대철학>>, 창비, 258)





 

2014. 2. 10.

잠언 06

 
 
 
 
 
 
 
 
 
 
0.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 백지 상태의 누군가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라기보다는 - 그녀가 철학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황당한'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가깝다. 모든 '가르치는 사람'은 이 점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1. 사르트르가 1945년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한 말은옳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완벽히 면제받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위대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그는 원래 악인이고 나는 원래 용기가 없고, 하는 식으로. 운명이란 당신의 '알리바이'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제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당신인가? 우리들의 사랑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운명인가, 당신들인가? 한 노래 가사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니체의 말대로, 나의 소망이 나의 인식이 된다.


2. 때로는 어떤 것이 내게 정말 옳은것으로, 가히 '운명'처럼 정말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은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이는 다만 당신이 사회문화적으로 그렇게 느끼도록 조건화된 경우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 감히 그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믿기 어렵고 - 다만 내가 그렇게 진실로 '느낀다'고 믿도록 조건화된 경우.


더하여,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옳다는 혹은 당연하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도저히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의심할 수 없는 경우마저 존재한다(물론 자기 기만이나 합리화의 경우는 제외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것이 옳다는 혹은 그것이 운명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나 스스로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게 이토록 '옳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생각, 이 느낌은 옳은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것이 옳다는 나의 강력한 감정은 그것이 실제로 옳은가와는 전혀 무관하며,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옳다고 강력히 믿고 있는가만을 알려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그것이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 혹은 그렇게 생각에 대한 믿음의 강렬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결국 문제는  '운명'의 정의(definition)이다. 사람들이 보통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각처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실상은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운명의 정의에 따라서는, 때로 정말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든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계가 조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3. 푸코에 따르면, 합리성(rationality)은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특정 문제상황을 해결하려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의 결과로서 얻어진 생산물(product)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합리화의 결과이다. 이것이 니체의, 사실은, 베버의 중요성이다.


4. 어떤 문제가 존재할 때, 유용한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와 세계를 냉정하게('냉혹하게'가 아니다), 곧 '정확하게' 본다. 인간은 자기 기만을 행하는 존재이니, 무엇보다 먼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의 자동적 '자기 기만 메커니즘'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여기서 누군가가 '인식만 하면 뭐해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그녀가 한 번도 냉정한 자기 인식을 스스로 수행해본 적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은 '계몽'이 덜 된 존재들이다(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담론은 자신들만의 초엘리트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산, 유통, 폐기된다. 그들은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학문과 일상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관습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들에게는 계몽이, 성찰적 반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6. 악의(惡意)가 없는 자란 죽은 사람이며, 자신의 악의를 모르고 있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7. 사람들은 보통 내가 그녀에게 이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녀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도 인생의 불필요한 많은 분쟁을 피할 수 있다.


8. "철학은 전도를 하지 않는다" - 이는 설령 내 말이 옳다 해도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당신이 내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혹은 듣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여하튼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당신이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원래 없다. 더하여, 내 말이 '옳다'는 말은 보통 내가 설정한 전제의 한도 내에서 '옳은'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옳다'(진리)는 말의 의미는 천차만별, 무한대로 확장 가능하다. 옳다, 그르다는 '관점'의 문제일 수가 있다. 더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전혀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의 말이 옳은 경우라 할지라도,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고통을 겪게 될 사람은 당신이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당신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도 융도 늘 같은 말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알아서 하세요!"


9. 아이러니 - 인간은 자신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부분, 곧 그녀가 스스로 의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거의 행하지 않는다. 그녀의 의식이 글자 그대로 깨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는 부분은 그녀가 전혀 생각짇 못하는 부분, - 곧 의식적으로 늘 자기를 감시하고 처벌하느라 너무도 지친 나머지 -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이 곳은 - 그녀의 의식적 고려와 검토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 무성의와 무신경,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어 있는 영역이다.


10. 대한민국의 학생들, 아니 모든 배우는 이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예의바르고 너무 얌전하며 너무 순하고 너무 (수동적으로만) 길이 잘 들어 있다. 이는 물론 구조적 문제인데, 궁극적으로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에 더하여, 근래에 수입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감시와 처벌 메커니즘의 거의 완벽한 내면화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 마디로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의 눈치보기, 분위기 파악, (자기) 기만, 비겁, 자기 처벌의 메커니즘이 완벽한 자동화의 수준으로까지 내재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케이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품행담론은 아직 '자기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11. 대한민국 대학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는 태도는 거의 대부분 (일제 시대 이래 더욱 강화된) 한(韓)민족의 자기 비하, 자기 멸시의 일종, 곧 사회적 버전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우리나라 대학을 비판하면 이를 듣는 사람(물론 한국인)은 즐거운 웃음, 냉소를 터뜨린다.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현상.


12. 보편성 관념의 부재 - 오늘날 보편성은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우선, 여러 사람이 있는데 자신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과만 (즐거운) 대화를 지속하는 경우. 이는 때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상은 이러한 행위가 - 본의건 아니건 - 그 이외의 주변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위가 된다(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당사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아예 의식을 못하건 모르는 경우는 보편성의 '전적인' 부재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공적인 자리나 상항에서도 자신과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이야기)을 하는 경우. 실제로 주의 깊게 이런 경우를 심사숙고해 보면, 이를 정작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성의 개념이 필요한 시간!


13. 자기 비하, 자기 경멸은 또 다른 자기중심주의이다.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늘 '자기'이다.


14.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자가 된다.


15. 철학이란 방법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나 바람, 당위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주의적 함정에 빠진다.


도덕주의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현실적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타인혐오, 자기혐오, 인간혐오에 빠진다. 어리석은 선택.


잘 되어야 한다고?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해야만 한다고? 안 돼서 못하는데, 노력하라고?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자신감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미한 말, 더 나아가 해로운 말이다(물론 때로는 이런 말이 좋은 효과를 낳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가져라'라는 말은 잘못된 대전제, 곧 그저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라는 무식한 대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이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합리적인 존재이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감을 가질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아 실제로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합리적이 존재이며 자신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강함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16. '좋은' 방법론을 고르는 여러 기준들 중 하나는 그런 말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곧 그런 담론이 어떤 인간을 낳는가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가령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혹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 살고 있나라는 담론은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어떤 인간을 결과적으로 탄생시키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은 성실한 인간을 낳는가? 효도해야지라는 담론은 효도하는 인간을 낳는가?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담론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드는가?


17.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잡는다" - 가령 어머니에게 고통받은 인간(어머니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의 문제는 이 경우 중요하지 않다)은 때로 상당한 세월이 흘러 현실의 어머니가 이러저런 이유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그녀는 가령 어머니가 죽어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을 것이다. 이 경우 어머니는 머릿속 외부의 현실저 존재가 아니라, 머릿속의 현실적인 존재, 오늘 그녀의 정신적 구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그렇게 구조화, 조건화되어 있다.


관건은 이러한 지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어떻게'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다.


18. 모든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 적당한 불편함, 적당한 두려움이 존재해야 썩지 않는다, 오래 간다.


19. "일은 일" - 함께 일을 할 때, '상대가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은 일이므로, 담백하고 간명하게 예의를 갖추어 본심을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


20.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사정이 있다. 따라서 자기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 사정만을 특별히 양해해 달라고 말하는 자는 사회에서 아웃된다. 그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이다


21. 냉정한 인식과 냉혹한 인간성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22. "너도 물론 위에서 시켜서 한 거라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 월터 미티


23. 한 분야(보통은 자기 분야)에서의 무능력을 그 인간 자체에 대한 경멸의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24.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그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달리,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경우 그렇지 않았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효과가 발생되는 하나의 유용한 조작 개념(operational notion)이다.


25. "신이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측정하는 개념이다." - 존 레논, <신>(god)


26. 해석권력(power on interpretation) - 실상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해석이 사실 혹은 현실 자체라고 말하고 그것을 관철, 강요하는 능력.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현상에 대한 해석 권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경우와 모르고 있는 경우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와는 궁극적으로 대화와 투쟁이, 후자와는 교육과 설명이 가능할 따름이다.


27. "언어가 살해한다." - 헤겔


28.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이 실상은 정말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존재하는 바깥'이라는 점, 그리하여 이른바 '바깥'이 실상은 안쪽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임을 깨달은 푸코는 구조주의적 중립성의 개념 전체를 포기하고 니체주의적 힘 관계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권력에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


29. 블랑쇼의 '익명의 그녀'(une anonyme)가 바타유의 '공공의 여성' 곧 '창녀'(la femme publique)이다.


30. '저주의 몫'(la part mudite) - 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그중에서도 자기 삶, 생존 자체의 정당성을 빼앗긴 자들, 박탈당한 자들, '파렴치한 자들'(les infameux)이, 그들에 대해,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문학'이다(푸코의 문학관).


31. 논증의 '필연성' - 모든 '고전적'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갖는 '필연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령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아니라 아리우스파가 승리했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정되고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부정되었다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리스도교 <성경>의 정경과 외경이 지금과 달라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 '필연성'을 논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도 - 바로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겐 반증불가능한 맹목적 믿음으로 보이는 영역이다. 그들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연적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32.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말은 사람을 죽여놓고서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은 없고 어차피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살인자의 말을 편들어주지 않는다.


니체의 사실이 없다는 말은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이 무수히 선택 가능한 사실들 중에 관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보는 자의 관심에 의해 조명된 사실, 또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다.


정말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관심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드러난다면, 세상에 신문은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혹은 모든 신문이 다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앉아 있는 방 혹은 버스의 크기나 평수, 당신의 나이는 다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한 '중립적 사실보도'를 해야 할  언론은 내일 아침 신문에 그러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이란 특정한 관심에 따라 선택된 사실이며, 이는 사실상 무한 개수의 사실에서 유한한 개수의 사실을, 그것도 지극히 협소한 유한 개수의 사실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란 늘 선택된 사실이며, 인간은 이러한 선택의 기준 곧 '관심'(interest) 혹은 '관점'(perspective) 없이 사실을 볼 능력이 없다. 바로 이런 면에서 관심과 관점이란 한계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조건'(condition)이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실이 없다라는 말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사실이란 없으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사실들 중에 당신이 왜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이 사실을 인식했고 또 말하는가에 관련된 언명이다. 한 마디로, 사실과 관점의 문제는 주어진 관점 내에서의 사실 여부보다는, 무수한 사실들 중 이런 혹은 저런 사실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선택과 관점의 층위에 속하는 말이다.


33.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토머스 홉스, <시민론>(1642년, '디본셔 백작에게 드리는 헌사')


34. 자신의 몸이 싫어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좋아하려고 하는 사람들, 더하여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35. 강박관념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논리적인 관념의 질서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 면에서, 강박관념의 해결은 비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어렵고, 오히려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논리를 밀고 나아가 그 논리의 '부분적' 특성, 비현실성, 비논리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강박증환자의 논리와 '우리'의 논리가 같은 합리성일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의세 가지 사항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합리성에 대한 나의 정의와 타인(이 경우 위의 정의)의 정의가 다를 때, 누구의 정의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 강박증 환자와 나는 다만 정도의 차이에서만 다른 두 사람인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사람인가? 셋째, 합리성의 정의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36. 모든 인간은 자기 기만을 한다. 자기 기만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다만 자신의 자기 기만을 명확히 인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있을 뿐이다. 전자는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후자는, 그가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당연히,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37. 성격이 나쁜 인간이란 - 원래 그녀가 선천적으로 악(惡)해서라기보다는 -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성격의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격 안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같이 지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38. 도덕과 무관한 이유로도, 그리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이유로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 보다 정확히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 혹은 때로는 '도덕적 결과를 낳는' 행동을 할 수 있다.


39. 논리적 오류 - 보통 우리는 '모든 인간은 외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인간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로부터 치유되고 싶어하고 따라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40. 오르한 파묵은 좋은 소설가이다. 그러나 파묵의 가장 큰 장점은 소설가로서의 그가 가진 재능, 곧 '놀라운 입담'이 아니라, 그가 '오늘을 사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 곧 '서양과 비서양의 대면'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 안에 놓여 있다.


41. 당신이 사랑하는 죽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42. "존 레논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중 하나이다" - 다니엘 클로드


43. 리트머스 시험지 - "이 세상의 모든 사상가, 소설가, 시인들은 자신들의 책이 아니라면 정신병자들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안심'을 주었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44. 데카르트와 니체 - 이른바 한 사회의 '상식'이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관습의 집합이다. 참으로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데카르트를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재검토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검토한 것은 인식의 측면만이었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관습적 삶의 도덕적 기초를 인정하고, 또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시작된다. 이러한 관습적 도덕 자체에 대한 재검토는 니체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45. 법과 주먹, 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 "사회는 멀고, 가정은 가깝다."


46.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자연'과 '당연'의 문제, 곧 기준의 문제이다.


47. 인정 투쟁은 '정의(defintion) 투쟁'이다. 기존의 '진리'와 '정의'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다. 다시금 세워져야 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의 새로운 정의에 다름 아니다.


48. "요컨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자연법 그 자체는 어떤 힘에 대한 공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227쪽)


49. 11세기 안셀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을 밀고 나가면, 17세기의 이신론자들(deists), 그리고 이후의 과학자들(scientists), 그리하여 무신론자들(atheists)이 나온다. 이는 정의상 '신앙의 내부에만 설정된 이성'으로부터 '신앙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이성과 자연, 신과 인간의 정의가 모두 바뀐다.


50. 이른바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유신론자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이들이 여전히 또 다른, 뒤집힌, 그리스도교도들인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한다.




 




1984.12.-2014.02.